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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와국(瓜蛙國)과 일본

한부울 2009. 9. 7. 18:01

Javanese 과 Japanese 는 같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8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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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보신전쟁)이전까지 일본은 어디에 있었는가?

  

조와국(瓜蛙國)과 일본

 

이상하게도 실록에 조와국(瓜蛙國)이 조선 초 태종(1400∼1418)朝에 잠시 보이고 그 이후 그 나라 기록은 전혀 보이질 않는다. 이것은 조와국(瓜蛙國)이 망했거나 어디에 합체 되어 국가명이 유명무실해졌다는 반증이다.

실록 설명에 조와국은 인도네시아 자바(Java)라고 하였다.

조선은 조와국이 정기적으로 방문할 수 있는 거리에 존재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일본과 왜구 역시 그 범주 내에 존재 한 나라고 종족이라고 해야 한다.

일본은 1872년 이후 만들어진 나라이름이다.

이렇다면 동남아 해안 등지에서 활동하는 무사정치집단이라고 해야 한다.

왜구는 그 집단에 소속된 졸개들이고 해적이라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조와국과 일본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설정된다.

결론적으로 일본이라 칭하는 왜구무사집단 세력에 의하여 조선과 조와국 사이에 개입하여 조와국을 침범하였거나 없애버렸다고 볼 수 있다.

아래 실록의 마지막기록에서 조와국이 조선에게 간절하게 청을 하는 것인데 기사 내용을 보면 그러한 상황을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는 기록이다.

“일본 나라 사람들의 성품이 본래 탐하고 사나워서 진언상(瓜蛙國 使臣: 자바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한문으로 풀어 사용했다)의 재물을 많이 도적질하였는데, 중로에서 우리를 죽여서 그 형적을 없앨까 두려우니 원컨대 국가(조선이라 하지 않고 국가라 한 것은 인도네시아 자바 조와국이 조선의 租貢國이라는 말이다.)에서 호송하여 주소서”

이후 조와국(瓜蛙國)에 대한 실록기록은 보이질 않는다.

그것으로 왜구 해적들의 밥이 되고 만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대륙사적인 확증을 발견한다.

분명 조와국은 인도네시아 자바라고 하였다.

그런데 인도네시아 자바에 있었던 조와국에서 무엇 때문에 직선거리 5,000㎞(12,500里)나 되는 머나먼 해상 길을 왜구 행패가 빈번하였다는 상황에서 마다하지 않고 한반도까지 힘들게 공물을 헌납 할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실록은 그들의 안타까운 요청도 거부하는 한반도 조선에 그렇게 억지로 애를 써 토산물을 바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보는데 분명 기록에는 1406~1412까지 그렇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떻게 된 것인가?

이것은 두 가지를 확실하게 뒷받침해주는 기록이다.

하나는 조선이 인도네시아 해협에 어떤 식으로든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일본과 왜구 그리고 자와국이 같은 자바 근역에 있었다고 하는 점이다.

실록에서 왜구라 하는 것은 조선 남해 해안에 빈번하게 출몰하는 해적과 도적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도네시아 해협을 무대로 날 뛰는 해적을 말한 것이다.

그곳은 조선의 남해이고 바로 아열대 지역인 南 인도네시아 근해이다.

다급한 조와국은 분명 일본이나 왜구의 위협으로부터 조선에게 간절하게 보호요청을 한 것이다.

일본(Japan)은 자바(java)란 사실이 더 확실해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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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와국(爪哇國) : 자바(Ja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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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12권, 6년(1406 병술 / 명 영락(永樂) 4년) 8월 11일(정유)

남번의 조와국 사신 진언상이 군산 근처의 섬에서 왜구에게 약탈당하다

○南蕃(瓜蛙國)〔爪蛙國〕使陳彦祥, 至全羅道群山島, 爲倭所掠, 船中所載火雞、孔雀、鸚鵡、鸚哥、沈香、龍腦、胡椒、蘇木、(香)〔木香〕等諸般藥材、蕃布, 盡被刦奪。 被虜者六十人、戰死者二十一人, 唯男婦共四十人脫死上岸。 彦祥, 嘗於甲戌年, 奉使來聘國朝, 拜朝奉大夫書雲副正者也。


남번(南蕃)의 조와국(爪哇國)745) 사신 진언상(陳彦祥)이 전라도(全羅道) 군산도(群山島)에 이르러 왜구(倭寇)에게 약탈을 당했다. 배 속에 실었던 화계(火雞)746) ·공작(孔雀)·앵무(鸚鵡)·앵가(鸚哥)747) ·침향(沈香)·용뇌(龍腦)·호초(胡椒)·소목(蘇木)·향(香) 등 여러 가지 약재와 번포(蕃布)를 모두 겁탈당하고, 피로(被虜)된 자가 60인, 전사자(戰死者)가 21인이었으며, 오직 남부(男婦)748) 를 합해 40인만이 죽음을 면하여 해안으로 올라 왔다. 진언상은 일찍이 갑술년에 봉사(奉使)로 내빙(來聘)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 조봉 대부(朝奉大夫) 서운 부정(書雲副正)을 제수하였던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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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12권, 6년(1406 병술 / 명 영락(永樂) 4년) 9월 1일(정사)

조와국의 사신 진언상 등에게 물품을 하사하다

○(瓜哇國)〔爪哇國〕使陳彦祥至自全羅道, 從者十七人。 命中官饋于西廊, 各賜襦衣一襲及笠靴, 其留船者, 亦令監司給衣服。


조와국(爪哇國)의 사신 진언상(陳彦祥)이 전라도(全羅道)에서 이르렀는데, 종자(從者)가 17명이었다.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서랑(西廊)에서 먹이게 하고, 각각 유의(襦衣) 한 벌과 갓[笠]·신[靴]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배에 머물러 있는 자에게도 감사(監司)를 시켜 의복(衣服)을 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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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12권, 6년(1406 병술 / 명 영락(永樂) 4년) 9월 16일(임신)

조와국의 진언상 등이 돌아가니 물품을 후하게 하사하다

爪哇國陳彦祥等還, 上厚賜以遣之。 彦祥呈議政府曰:

永樂四年五月十八日, 蒙國王差遣, 齎擎方物, 特爲朝鮮國進賀事, 於當年五月二十二日起程, 駕坐海船一隻, 至閏七月初一日未時, 到朝鮮全羅道鎭浦外群山島外, 忽逢倭船一十五隻。 當日兩相交戰, 至初三日午時, (寡不迭衆)〔寡不敵衆〕, 力不能加, 被刦掠一空, 殺死蕃人二十一名, 捉去蕃人男婦幷六十名, 現存性命上岸者, 幷彦祥男婦幷四十名。 進賀方物幷自己進獻、衆人滿船物貨, 盡行被掠。 今蒙給賜衣糧, 回還本國, 誠恐我國未信遇賊事意, 口說無憑, 乞賜回文爲照。又呈曰:

永樂四年五月十八日, 蒙國王敬差, 特爲齎擎方物進賀事, 於當年五月二十二日起程, 駕坐新造二千二百料海船一隻, 至閏七月初一日, 到朝鮮全羅道鎭浦外群山島外, 不期遭遇倭賊, 刦掠一空, 只留本船。 今蒙使令回還乃可, 駕船水手人等被倭殺害太半, 餘者捉去。 駕船人少, 本船重大, 難以乘駕, 惟恐洋海儻有疏失, 性命爲重。 今情愿將來大船納獻, 回換四十料輕快小船一隻, 明年再來。上命許之。


조와국(爪哇國)의 진언상(陳彦祥) 등이 돌아가니, 임금이 후(厚)하게 하사(下賜)하여 보냈다. 진언상이 의정부에 글을 올려 말하였다.

“영락(永樂) 4년 5월 18일에 국왕이 〈저희들을〉 파견하여 ‘토산물(土産物)을 가지고 특별히 조선국에 가서 진하(進賀)하라.’하기에, 그해 5월 22일에 길을 떠나 해선(海船) 한 척을 타고 윤7월 초1일 미시(未時)에 조선국 전라도 진포(鎭浦) 바깥 군산도(群山島) 밖에 닿았을 때, 갑자기 왜선(倭船) 15척을 만나 당일(當日)에 둘이 서로 교전(交戰)하였는데, 초3일 오시(午時)에 이르러 적은 숫자로 많은 적을 대적하지 못하고, 어찌 할 수 없이 전부 겁탈을 당하여, 번인(蕃人) 21명이 죽음을 당하고, 번인(蕃人)으로 남녀(男女) 아울러 60명이 잡혀 가고, 현재 살아남아 생명을 보전하여 해안에 상륙한 자는 언상(彦祥)과 남녀(男女) 합하여 40명입니다. 진하(進賀) 하려던 토산물과 제가 진헌(進獻)하려던 물건과, 그리고, 여러 사람이 배에 가득 실었던 물건들을 모두 약탈을 당하였는데, 지금 옷과 양식을 하사(下賜)해 주셔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나, 저희나라에도 도적을 만난 일을 믿지 않을까 저으기 걱정입니다. 생각하건대, 입으로 말해도 증거가 없으니, 원컨대, 회문(回文)을 내려 주시어 증빙(證憑)을 삼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 글을 올려 말하기를,

“영락 4년 5월 18일에 국왕이 〈저희들을〉 파견하며 ‘특별히 토산물을 가지고 가서 진하(進賀)하라.’하기에, 그해 5월 22일에 길을 떠나 새로 만든 2천 2백료(二千二百料)의 해선(海船) 한 척을 탔는데, 윤7월 초1일에 조선국 전라도 진포(鎭浦)바깥 군산도(郡山島) 밖에 닿았을 때, 뜻하지 않게도 왜적(倭賊)을 만나 겁탈을 당해 전부 없어지고, 본선(本船)만 남았을 뿐입니다. 지금 돌아가도 좋다는 사령(使令)을 받았으나, 배를 타는 수수인(水手人)들이 왜적 때문에 태반이 살해되고, 남은 사람은 잡혀 가서, 배를 탈 사람이 적습니다. 본선(本船)은 무겁고 커서 타기가 어려우니, 양양(洋洋)한 바다에서 소실(疏失)되지나 않을까 염려되옵니다. 생명(生命)이 중하니, 이제 가지고 온 큰 배를 헌납(獻納)할 터인즉, 40료(四十料)쯤 되는 경쾌(輕快)한 소선(小船) 한 척과 바꾸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명년에 다시 오겠습니다.”하니, 임금이 명하여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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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12권, 6년(1406 병술 / 명 영락(永樂) 4년) 9월 26일(임오)

대마도 수호 종정무가 조와국 사신에게 약탈했던 공작 등의 물품을 바치다

 

○對馬島守護宗貞茂, 遣使獻土物蘇木胡椒及孔雀。 使者自言掠南蕃船所得, 司諫院上言: “珍禽奇獸, 不畜於國, 古之訓也。 況此剽刦之物乎? 宜却而勿受。” 上重絶遠人, 命畜孔雀於上林園。


대마도 수호(對馬島守護) 종정무(宗貞茂)가 사신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쳤으니, 소목(蘇木)·호초(胡椒)와 공작(孔雀)이었다. 사자가 스스로 말하기를,

“남번(南蕃)의 배를 노략하여 얻은 것입니다.”하였다. 사간원에서 상언(上言)하기를,

“진기(珍奇)한 새와 짐승은 나라에서 기르지 아니하는 것이 옛 교훈입니다. 하물며, 겁탈해 빼앗은 물건이야 말할 게 있겠습니까? 물리쳐 받지 않으심이 옳겠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먼데 사람과의 관계를 중하게 여기시어, 공작을 상림원(上林園)에서 기르라고 명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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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23권, 12년(1412 임진 / 명 영락(永樂) 10년) 4월 21일(을해)

조와국 아열 진언상이 사람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다

 

○(瓜蛙國)〔爪蛙國〕亞列陳彦祥, 遣使獻土物, 琉球別種也。 其書曰:

彦祥稽首頓首百拜, 申議政府大人閣下。 僕於前年, 被倭賊刦害, 感得皇恩, 賜僕衣衫日食, 又賜軍船, 不勝犬馬之情。 來至日本國洋內, 船隻漏水, 被風漂流, 失害槓(椇)〔桿〕, 流至岸邊, 卽時船沈, 留得性命。 又被倭賊刦盡衣衫, 十分寒凍, 無耐之何, 感得日本國王就時差使, 坐駕軍船一隻, 拜禮物, 送至本國。 國王就差僕送日本使臣回禮船隻, 因風失害槓(椇)〔桿〕, 又回本國, 至今年七月內, 至日本博多地面, 官府留遲, 未及上京, 至明年正二月, 只得上京。 僕想感得前年貴國厚恩, 意欲親身前來, 叩頭謝恩, 干係國家未辦, 僕不及前來, 親謝皇恩, 特差孫男實崇, 齎持方物前來代拜, 感謝聖恩。 蒙大人奏下情, 無任叩頭叩頭。 伏乞電覽。

자바국[爪蛙國] 아열(亞列) 진언상(陳彦祥)이 사자를 보내어 토물을 바쳤으니, 유구(琉球)의 별종(別種)이었다. 그 글은 이러하였다.

“진언상은 계수(稽首) 돈수 백배(頓首百拜)하여 의정부 대인(議政府大人) 각하(閣下)께 여쭙니다. 내가 전년에 왜적(倭賊)의 겁해(劫害)를 당하였을 때, 감사하게도 황은(皇恩)을 입어 나에게 의삼(衣衫)과 양식을 주시고, 또 군선(軍船)을 주었으니 견마(犬馬)의 정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와서 일본국(日本國) 바다 안에 이르러 배에 물이 새어 풍랑에 표류되어 공구(槓椇)를 잃어버리고 흘러서 해안가에 이르자, 곧 배는 침몰되고 생명만은 보존하였습니다. 또 왜적에게 의삼(衣衫)을 다 빼앗기고, 십분 춥고 얼어서 견딜 수가 없었는데, 감사하게도 일본국왕(日本國王)이 그 때에 사신을 차임(差任)하여 군선(軍船) 1척에 태워서 예물을 갖추어 본국에 보내 주었습니다. 우리 국왕이 곧 나를 차임(差任)하여 일본 사신으로 보내게 하였는데, 회례(回禮)하는 배가 풍랑으로 인하여 공구를 잃어버리고, 본국으로 돌아왔다가 금년 7월에 이르러서야 일본 박다(博多)지방에 이르러 관부(官府)에서 지체하다가 미처 서울에 들어가지 못하고, 명년 정이월에 이르러 겨우 일본 서울에 들어갑니다. 내가 전년에 귀국의 후한 은혜를 입은 것을 생각하면, 몸소 친히 나아가서 고두(叩頭)하고 사은하고 싶으나, 국가에서 준비하지 아니한 관계로 내가 미처 나아가서 친히 황은을 사례하지 못하고, 특히 손자 실숭(實崇)을 시켜 방물(方物)을 싸 가지고 나아가서 대신 절하고 성은(聖恩)을 감사합니다. 대인(大人)께서 하정(下情)을 아뢰어 주신다면 고두(叩頭) 고두(叩頭)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전람(電覽)하시기를 엎드려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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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23권, 12년(1412 임진 / 명 영락(永樂) 10년) 5월 10일(계사)

조와국 사람이 판매한 비포 10필 사다

○買爪哇國人所賣柲布十匹。


자바국[爪哇國] 사람이 매매하는 필포(柲布) 10필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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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23권, 12년(1412 임진 / 명 영락(永樂) 10년) 5월 25일(무신)

일본국의 우구전 사인과 자바국 진언상의 사인이 돌아간다고 하다

○戊申/日本國宇久殿使人及(爪蛙國)〔爪哇國〕陳彦祥使人等告還。 (爪蛙國)〔爪哇國〕人曰: “日本國人性本貪暴, 多竊彦祥財, 恐中路殺我, 以滅其迹。 願國家護送。” 政府啓曰: “送一兩兵船, 安能禦暴! 又不可多遣。” 遂行。


일본국(日本國) 우구전(宇久殿)의 사인(使人)과 자바국[爪哇國] 진언상(陳彦祥)의 사인(使人) 등이 돌아간다고 하였다. 자바국 사람이 말하기를,

“일본 나라 사람들의 성품이 본래 탐하고 사나워서 진언상의 재물을 많이 도적질하였는데, 중로에서 우리를 죽여서 그 형적을 없앨까 두려우니, 원컨대, 국가에서 호송하여 주소서.”

하니, 정부에서 아뢰기를,


“한두 병선을 보내더라도 어찌 능히 탐포한 것을 막겠으며, 또 많이 보낼 수도 없습니다.”

하니, 드디어 그대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