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인도네시아(Indonesia)

한부울 2009. 6. 30. 00:11

Javanese 과 Japanese 는 같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8696

자바섬(JAVA) http://blog.daum.net/han0114/17048814

향신료(spice:香辛料)와 향료무역 http://blog.daum.net/han0114/17048815

 

인도네시아(Indonesia)

 

 

 

 

수도

자카르타
6°8′S, 106°45′E

공용어

인도네시아어

정부 형태

대통령

대통령제 공화정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독립
 • 독립

네덜란드로부터 독립
1949년 12월 27일

면적
 • 전체
 • 내수면 비율

 
1,904,569km² (16위)
4.85%

인구
 • 2005년 어림
 • 2000년 조사
 • 인구 밀도

 
222,781,000명 (4위)
206,264,595명
117명/km² (84위)

GDP (PPP)
 • 전체
 • 일인당

2005년 어림값
$9774억 (15위)
$4,458 (110위)

HDI
 • 2006년 조사


0.726 (109위)

 

 

지형


인도네시아는 서쪽 끝의 수마트라섬·자바섬에서 북동쪽의 할마헤라섬까지 약 5,100km에 걸치는 호상(弧狀)의 순다열도와 그 내부에 위치한 보르네오섬(칼리만탄), 셀레베스섬(술라웨시) 등의 큰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해역은 테티스해(海) 구조대와 환태평양 구조대가 이어지는 곳으로 지반의 변동이 격심했던 지역이다. 현재 이들 제도(諸島)에 의해 둘러싸인 바다는 수심 50m 이하의 얕은 바다로, 이른바 순다 해붕(海棚)을 형성하고 있다. 이 해붕과 오스트레일리아 북서부의 사풀 해붕은 마카사르·롬보크 양 해협을 연결하는 월리스선(線)으로 명확하게 구분된다. 순다열도 및 몰루카제도에는 현재 화산활동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화산의 수가 전국을 통틀어 400개에 달하며, 이 중 활동 중인 화산은 78개이다. 화산은 특히 수마트라섬과 자바섬에 집중되어 있으며 보르네오섬과 셀레베스섬에는 극히 적다. 이 화산들은 자주 발생하는 폭발과 지진으로 인간생활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준다.


인도네시아는 비가 많은 지대이므로 토양은 라테라이트 토양이나, 산지에서 범람한 물질이 토양을 비옥하게 만든다. 이 경우 화산암질토양은 수성암(水成岩)토양에 비하여 비옥도가 높아 농사에 유리하다. 화산암을 거의 포함하지 않는 보르네오섬 대부분과 셀레베스섬 중부에 인구가 희박한 것으로 미루어볼 때, 화산암질 토양의 분포는 자바섬과 수마트라섬에 인구가 밀집하는 현상의 자연적 원인이 된다. 인도네시아의 농업이 거름을 거의 주지 않고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화산은 3,000m를 넘는 것이 대부분이며, 자바섬 최고의 세메루산(3,676m)을 비롯하여 롬보크섬의 린자니산(3,726m) 등이 대표적이다. 높은 산들 사이에는 많은 고원 및 분지(盆地)가 이어지며 수마트라섬 서안의 파단 고원, 자바섬의 반둥, 말랑 고원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고원에서는 기온이 체감률에 따라 낮아지므로 거주에 유리하다. 수마트라와 보르네오 지역의 산지와 해안부근에 있는 정글에는 넓은 저습지대(低濕地帶)가 분포하며 그 중간을 많은 하천이 곡류한다. 수마트라섬의 무시강(江)·잠비강, 보르네오섬의 카푸아스강·바리토강 등은 길이에서 인도네시아의 유수한 하천에 해당한다.

 

Mount Semeru and Mount Bromo in East Java. Indonesia's seismic and volcanic activity is among the world's highest.

 

                                 Major volcanoes in Indonesia


기후


인도네시아의 섬들이 적도를 중심으로 북위 5°에서 남위 10° 사이에 위치하므로 완전한 열대성 기후를 나타내며 동남아시아 계절풍대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인다. 일반적으로 연중 높은 기온을 나타내 거의 전지역이 평균기온 25∼27℃를 기록하며 적도변의 중앙지대에서는 월별 변화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강수량은 몬순의 영향을 크게 받아 중심부에 해당되는 적도 부근의 연중 강우지역을 제외하면 대체로 건기(乾期)와 우기(雨期)의 구별이 뚜렷하다. 주요지역의 연평균강수량은 폰티아나크(보르네오섬) 3,175mm, 파당(수마트라섬) 4,172mm, 자카르타(자바섬) 1,755mm이며, 소순다열도의 동쪽은 훨씬 더 건조하다.


정치


인도네시아의 국체(國體)는 공화국, 정체(政體)는 대통령 중심제이다. 1945년 8월 17일 공화국 독립을 선포한 이후, 2001년 7월 23일 와히드(Abdurrahman Wahid)가 무능력과 부패 의혹 등으로 인해 집권한 지 21개월 만에 대통령직에서 쫓겨나고,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Megawati Sukarnoputri)가 신임 대통령으로 정권을 잡기까지 대통령 중심제를 고수하고 있다.


신앙의 존엄성, 인간의 존엄성, 통일 인도네시아, 대의정치, 사회정의 구현 등 1945년 제정된 헌법에 따라 '판차실러(Pancasilla)', 즉 '건국 5원칙'을 국가 이념으로 삼고 있으며, 헌법을 개정해 강력한 대통령의 권한이 축소되고, 국민 대표기관인 국민협의회(MRP)와 국회(DPR)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정치 성향은, 대내적으로는 군도(群島) 국가로서 지역간 불균형, 심각한 빈부격차, 전통과 근대의 혼재, 다종족 등으로 인한 통치상의 난점뿐 아니라, 부정부패·정경유착 등 정치권의 부정부패도 심각하다. 대외적으로는 비동맹 중립노선을 추구하면서 친서방 외교정책을 통한 실리외교에 중점을 두고 있다.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이자 국가 원수로서, 임기는 5년이며, 국민협의회에서 선출되고, 국회에 대해 책임을 진다. 1968년 6월 경제안정과 경제개발계획 추진을 목적으로 제1차 개발 내각이 발족한 이후 수하르토(Suharto) 정권 하에서 7차에 걸쳐 개발내각이 구성되었고, 1998년 5월 하비비가 새 과도정부를 구성한 뒤, 1999년 10월 국민협의회 대통령 선거에서 와히드가 당선되었다. 당선 이후 와히드는 국가통합 유지와 경제위기 극복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모든 정파를 포함하는 국민연합 내각을 발족, 취임 직후에는 비교적 정세가 안정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부 지방의 분리주의 요구와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처리 문제 지연, 정파간 갈등의 표면화 등으로 인해 갈수록 정국이 혼미해지고, 2001년에 들어서면서는 와히드 자신이 조달청 자금 횡령 및 브루나이 국왕의 기부금 유용 혐의 등을 받으면서 국내 정세는 급격히 불안해졌다.


그러다 2001년 7월 23일, 국민협의회의 탄핵에 의해 임기를 절반도 채우지 못한 채 대통령직에서 쫓겨나고, 메가와티가 새로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지만, 일선 군부대 지휘관들인 영관급 장교 중에는 아직도 와히드의 지지세력이 적지 않고, 인도네시아 최대 이슬람 단체인 나둘라툴울라마(NU) 회원들이 자살특공대를 결성해 와히드를 사수하겠다고 선언하는 등 당분간은 불안한 정국이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또 몇 년째 계속되는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국제통화기금)이 2000년 12월, 개혁이행 실패를 문제 삼아 구제금융 집행을 중단하는 등 국내 정세의 불안 외에 경제난까지 겹침으로써 이것이 앞으로 메가와티 정부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지적되고 있다. 대통령 메가와티는 영토 보존, 인권존중 및 개혁·민주화 추진, 경제개발 및 국민경제 기반강화, 법 집행 강화 및 부정부패척결, 능동적 외교수행 및 국가 신뢰도 회복, 2004년 총선 준비 등을 국정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위해 협동내각을 구성하였다.


975년 인도네시아에 병합된 동티모르는 구스마오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줄기차게 펼친 결과, 1999년 8월 UN(United Nations:국제연합) 감시 아래 치러진 동티모르의 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에서 독립이 결정되었다.


국민대표기관은 국민협의회와 국회의 2원적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민협의회는 헌법제정, 주요 국가정책 방향 결정, 대통령·부통령 선출 및 해임 등과 관련된 일을 하며, 임기는 5년이다. 국회의원 500명, 지역대표 130명, 직능대표 65명 등 총 695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회는 입법권, 예산 결정 및 집행·감독, 행정부 견제 기능을 하며, 임기는 5년으로, 총 50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정당에는 메가와티 현 대통령이 소속된 민주투쟁당(PDIP), 와히드 전 대통령이 소속된 국민계몽당(PKP)를 비롯해 골카르당(GOLKAR), 통일개발당(PPP), 국민수권당(PAN) 등이 있다. 사법제도는 3심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법원은 대법원·고등법원(26개)과 지방법원 및 분원(287개)으로 구성되며, 그밖에 국방부가 관할하는 군사재판소, 종교부가 관할하는 종교재판소가 있다.


국방은 국방부(Department of Defense) 관할하의 육군·해군·공군으로 구성되며, 기존의 경찰군은 2000년 7월부터 대통령 직할군으로 편성되었다. 국토방위와 치안유지의 의무가 있으며, 헌법상 정치참여의 권리가 인정된다. 총 병력은 48만 2000명으로, 육군이 23만 5000명, 해군이 4만 3000명, 공군이 2만 1000명, 경찰군이 18만 3000명이다. 전차 330대, 장갑차 500대, 화포 450문, 잠수함 2척, 구축함을 포함한 함정 100여 척, F-16 10대를 포함한 전투기 및 수송기 358대를 보유하고 있다. 2002년 국방비는 8억 3000만 달러이다. 병역제도는 지원제이다.


경제


인도네시아는 19세기 이래 네덜란드에 의해 풍부한 열대자원을 바탕으로 한 농업개발이 중점적으로 이루어져 어떤 의미에서는 ‘열대의 보고(寶庫)’로서의 가치를 가장 강하게 나타내고 있는 나라이다. 농업은 이른바 에스테이트에 의해서 수출을 위한 것과 원주민의 식량자급을 위한 것의 2가지 종류로 나누어진다. 에스테이트 농업은 예전에는 자바섬과 수마트라섬을 중심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과 잇달은 독립전쟁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전전의 248만ha 중 오늘날 경작되고 있는 면적은 170만ha에 지나지 않는다. 주요 농산물은 쌀·옥수수·카사바·고무 등 식량작물 외에 고무·커피·잎담배·야자유 등이다.


자연조건으로 보아 벼농사는 2년5작(二年五作)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농업기술이 뒤떨어져 국내 수요를 충당하지 못하고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산림자원은 수량이 풍부하여 목재산업이 활발할 뿐 아니라 주요 수출품 중의 하나이다. 재배림의 대부분은 티크나무로 자바섬이 주생산지이며, 동부 몰루카 지방의 특산으로 다마르 수지(樹脂)가 있다. 어업도 활발하나 어획방법이 원시적이고 어로지역도 근해가 중심이다. 제염은 마두라섬에서 활발한데, 자연조건으로 보아 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염업지(鹽業地)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 밖에 동부의 아루제도 부근에서는 진주조개가 잡힌다.


인도네시아는 풍부한 지하자원의 혜택을 입고 있는데, 특히 국내총생산액의 35%를 차지하고 노동력의 16%를 점유하는 공업과 광업은 석유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석유는 민간자본에 의한 석유회사를 통합하여 1968년 설립한 국영석유회사인 플루타미나와 미국을 필두로 하는 외국석유회사에 의해 급속한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주요 유전은 수마트라(메단, 팔렘방)·보르네오(타라칸, 발릭파판)·자바 동부·서이리안 등지이며, 석유자원은 국유화되어 있고 정유는 국영 정유회사인 페르타미나에서 전담하고 있다.


천연가스도 주요 수출품으로 점차 비중이 높아져 생산시설의 확충이 계속되고 있다. 석탄은 수마트라섬 서안 및 팔렘방 부근에서, 금은 수마트라섬과 보르네오섬에서, 철은 보르네오섬 남동부와 셀레베스섬 남서부에서 생산된다. 공업의 발달은 지극히 낙후된 상태로 이제까지는 에스테이트 농업 등과 결합된 소규모에 지나지 않았으나 자원과 노동력이 풍부하여 장래 공업발달의 가능성은 높다.


무역은 1970년대 이후 수출이 계속 늘어 무역흑자폭이 확대되고 있다. 주요 수출품목은 원유·천연가스·섬유·원목(原木)·신발·고무 등이며 주요 수출국은 일본·미국·싱가포르·한국 등이다. 주요 수입품목은 기계류·화학제품·비금속(非金屬)·자동차부품·철강판 등이며 주요 수입국은 일본·미국·싱가포르 등이다. 무역상대국은 수출입 모두 일본이 제1위, 미국이 제2위를 차지하며, 그 밖의 수출에서는 중국·타이완·네덜란드, 수입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독일·한국 순이다. 2000년 수출은 611억 달러, 수입은 336억 달러이다.


역사


솔로강(江) 유역에서 발견된 플라이스토세(世) 말기의 화석인류와 이와 함께 발굴된 유물은 인도네시아에 구석기문화가 발전하였음을 증명한다. 또한 자바섬의 와자크에서도 고기충적층(古期沖積層)의 표면 부근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인종과 비슷한 두개골이 발견되고 있다. 오늘날 각지의 인종들 사이에 남아 있는 멜라네시아·네그리토·베도이데계(系) 인종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 인종도 태고시대에는 이 지역의 주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시대의 유물로는 서쪽 지방에 네모꼴 돌도끼[石斧], 동쪽지방에 원통형 돌도끼가 분포되어 있는데, 전자는 대륙에서 남하해온 인도네시아형(型) 종족이 남긴 것이고 후자는 멜라네시아 지방과의 교류를 증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석기시대의 뒤를 이어 거석유물(巨石遺物)을 수반하는 철기문화가 펼쳐져 돌멘 모양의 분묘, 돌항아리, 돌로 만든 조상의 인물상 등이 남아 있다.

 

As early as the first century CE Indonesian vessels made trade voyages as far as Africa. Picture: a ship carved on Borobudur, circa 800 CE.

 

The nutmeg plant is native to Indonesia's Banda Islands. once one of the world's most valuable commodities, it drew the first European colonial powers to Indonesia. (육두구 식물(nutmeg/mace)은 인도네시아의 Banda 제도 원산이다.  세계 최고의 가치 있는 상품으로 부각되면서 유럽 식민지의 세력을 인도네시아 쪽으로 끌어당기고 축진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인도네시아계 인종이 이와 같은 발전을 이룩하는 동안 서쪽에서는 인도인 이주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수마트라섬 동부와 자바섬 서부지방을 개척한 데 이어 보르네오섬과 셀레베스섬까지 진출하였다. 수마트라섬의 팔렘방을 중심으로 번영을 누렸던 인도계 문화국가 스리비자야(중국의 문헌에는 室利佛逝, 나중에는 三佛齊라고 하였다)는 특히 강대한 해상세력을 형성하여 수마트라섬과 자바섬 서부, 말레이반도의 대부분을 수중에 넣었으며 남중국해 무역의 중심지로서 막강한 부(富)를 자랑하는 국가로 발전하였다.


8세기에는 자바섬의 중앙에 샤일렌다르라고 불렸던 왕조가 일어나 보로부두르와 같은 불교유적을 남겨놓았다. 이 왕조는 수마트라섬의 스리비자야 왕조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9세기 중엽에 이 두 왕통(王統)이 합병됨으로써 한때 남중국해의 강대한 해상제국이 성립되었다. 11세기 초 스리비자야는 인도의 코로만델 해안을 지배하였던 주련국(注輦國:Colas)과 싸움을 벌였으나 크게 패하였다.


이 당시 동부 자바에 에를랑가라는 왕이 출현하여 이 지방을 통일하였으나 그가 죽은 뒤 장갈라와 카디리의 2왕조로 분할되었으며 12세기에는 카디리의 세력이 커지면서 동부 인도네시아의 여러 섬들을 정복하였다. 그때부터 1세기 반 뒤 카디리 왕조가 멸망하자 싱가사리 왕조가 새로 일어났으며 이 왕조 최후의 왕인 쿠리타나가라 시대에는 수마트라를 비롯하여 발리·순다·마두라섬을 정복하였다. 그가 죽고난 뒤 몽골군이 침입해왔으나 쿠리타나가라 왕의 사위 라덴비자야가 교묘한 술책으로 몽골군의 세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적(政敵)을 제거하는 한편, 몽골군의 허점을 엿보고 있다가 기습하여 큰 손해를 입힘으로써 민족독립을 되찾고 마자파히트 왕조를 창시하였다. 이 왕조는 나중에 포르투갈 영토가 된 동인도의 대부분을 지배하여 인도계 국가로서는 최후의 번영을 누렸다. 한편 아랍인들이 남중국해로 진출해온 것은 꽤 오래된 일로 추정되는데, 10∼11세기 무렵 베트남의 참파 근방으로 유입해온 이슬람교는 13세기에 수마트라섬 북부의 사무두라와 페들라크에 이슬람 왕국을 성립시켰다.


14세기에는 말레이반도에 교두보를 확보하였으며 말라카가 그 중심지 구실을 하였다. 15세기에 자바로 진출한 이슬람 세력은 특히 중부지방에서 기반을 굳혔으며, 마자파히트 왕조는 북부해안 부근의 테마크를 지배하였던 이슬람교 군주에게 멸망하였다. 그 뒤 이슬람교는 서부 자바를 비롯하여 보르네오섬·셀레베스섬 등 여러 섬으로 전파되어 발리섬을 제외한 동인도제도를 휩쓸었다. 근세에 와서는 이슬람교도의 해상세력을 격파한 서유럽인들이 진출해왔다.


포르투갈은 암본을 차지하고 몰루카제도의 향료 무역권을 독점하였으며, 에스파냐인들은 필리핀을 세력권으로 하여 몰루카제도의 향료무역에도 손을 대었다. 그러나 이 두 나라는 식민지정책에 서툴렀기 때문에 네덜란드가 이들에게서 동인도의 해상권(海上權)을 빼앗았으며, 이때를 전후하여 이 곳으로 진출해온 영국인과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17세기 초 네덜란드의 쿤은 자카르타에서 영국세력을 몰아내고 바타비아를 건설하여 자바섬에 네덜란드 세력을 심었다. 따라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마자파하트 왕조의 뒤를 이은 마타람왕국을 잠식해 들어갔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한때 영국군에게 점령되기도 하였으나 1814년과 1824년에 체결된 런던조약에 따라 네덜란드는 아시아 대륙의 옛 영토를 포기하는 대신 영국으로부터 인도네시아 지배권을 승인받게 되었다. 이로써 자바섬의 토착 왕국은 점차 네덜란드의 무력에 굴복하게 되었고, 마침내 티모르(포르루갈령), 보르네오섬의 일부(영국령), 필리핀(에스파냐령, 나중에는 미국령)을 제외한 인도네시아의 대부분이 잇달아 네덜란드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350년이 넘는 네덜란드의 지배는 인도네시아 민족해방을 지도할 만한 민족자본가의 성장가능성을 배제해 버렸다.


그러나 19세기 후반경부터 미약하나마 문화적 활동을 지향하면서도 종족적 색채가 강한 여러 가지 운동이 일어났다. 1908년 와히딘 수디로후소도가 주도한 부디우토모당(黨)이 대표적이다. 그 후 이슬람교도들을 중심으로 한 사리카트이슬람(이슬람연합) 운동이 인도네시아 전역에 걸쳐 일어나 종교를 통하여 종족의 벽을 뛰어넘음으로써 대규모의 통일된 힘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사리카트이슬람은 마침내 급진적인 정치색을 띠기 시작하여 1920년에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탄생시켰다. 공산당은 1926년 노동조합의 통일전선(統一戰線)으로 동인도 노동조합협의회를 결성한 데 이어 공산당을 비롯한 12개 정당과 노동조합을 결속하여 반제국주의 통일전선(反帝國主義統一戰線)을 결성하였으나 1926∼1927년 전국에 걸친 무장폭동 이후 비합법화되었다. 그 대신 1927년에는 인도네시아 국민당이 결성되어 지도권을 장악하고 민족주의적 비협조를 제창함으로써 세력이 크게 확산되었다.


그러나 1931년에는 이것 역시 해산명령을 받게 되어 민족해방운동은 점차 후퇴하였으며, 단지 자치를 요구하는 선에 머물렀던 대(大)인도네시아당이 그 뒤를 이었다. 1936년에는 각종 정당 및 노동단체를 통합한 인도네시아 인민회의가 탄생하여 보통선거에 의한 완전한 의회의 획득이라는 슬로건을 정면으로 내세웠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에 바타비아를 점령한 일본군이 동인도 전역에 군정(軍政)을 실시하였기 때문에 민족운동은 지하로 숨어들었다. 일본의 항복 직후인 1945년 8월 17일 민족운동 지도자 수카르노와 하타를 중심으로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독립이 선언되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식민지회복을 노렸던 네덜란드는 1947년 경찰행동(警察行動)이라는 명목으로 인도네시아에 대한 전면공격을 가해왔다. 이 사건은 국제연합(UN)의 조정에 따라 1948년 1월 15일 렌빌협정에 의해 수습되었으나 이 협정은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들의 불만을 샀으며 급진세력이 공산당을 중심으로 결속하여 인민민주당을 조직하였다. 공화국 정부는 마디운사건을 계기로 이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그러나 1948년 12월 네덜란드가 제2차 경찰행동을 일으켜 공화국을 위협하자 다시 반(反)네덜란드 감정이 높아졌고 식민지 재편성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미국이 네덜란드에 압력을 가하기도 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1949년 12월 27일 헤이그 원탁회의 결과 인도네시아 연방공화국이 탄생하였고 네덜란드와의 사이에는 네덜란드·인도네시아 연합이 성립되었다. 그 뒤 공화국 정부는 단일국가 수립에 노력하였으며 연방내 친(親)네덜란드파(派)의 반란을 비롯한 여러 가지 장애를 배제한 뒤 1950년 8월에는 1949년의 연방헌법을 폐지하고 연방을 해체하였다.


그 결과 서유럽형 의회제도를 골자로 하는 1950년 헌법에 의하여 단일독립국가로 통일되었고, 이어서 1956년 2월 네덜란드·인도네시아 연합을 폐기함으로써 완전한 독립국이 되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경제적 권익은 그대로 남아 커다란 제약요인이 되었다. 국제적으로는 이른바 콜롬보 그룹에 속하여 SEATO(Southeast Asia Treaty Organization:동남아시아 조약기구)에 반대하며 국제적 긴장완화를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1963년에는 수카르노가 군부의 지지하에 종신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독재체제를 수립하였으며, 대외적으로 UN을 탈퇴하고 소련과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였으며 대내적으로 용공노선을 지지함으로써 군부와 공산당이 대립, 경제난과 정치적 혼란을 초래하였다. 이에 1965년 반공적인 군부세력의 쿠데타가 발발하였으며, 1968년 수하르토 정부가 출범하였다. 수하르토 정부는 1969년 이리안바라트를, 1975년 동티모르를 합병하였으며 1992년 총선에서 집권당이 승리함으로써 연속집권의 기반을 다졌다. 1999년 8월에 UN 감시 아래 치러진 주민투표에서 동티모르의 독립이 결정되었다.


사회


인도네시아의 신화·옛이야기·전설·신앙에서는 폴리네시아·미크로네시아·멜라네시아의 여러 지역과 공통되는 면이 발견된다. 신화에는 아시아와 유럽에서 들어온 요소가 많으며, 기원이 원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지방적 신앙에도 고대 인도의 서사시 <마하바라타> <라마야나> 등의 사상이 나타난다.


문화


인도네시아의 미술은 인도미술의 한 갈래가 발전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동남아시아 제국의 경우와 동일하며 역사시대 초기부터 오랫동안 인도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과 관련된다.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유품은 수마트라섬·자바섬 동부·보르네오섬·셀레베스섬에서 각각 하나씩 발견된 불상(수마트라섬의 것은 석불이고, 그 밖의 것은 모두 청동불상)이다. 모두 4∼5세기 남인도 양식의 작품으로 수마트라섬의 불상을 제외하면 인도에서 건너온 사람이 가져온 것과 동일한 것이다. 4∼5세기 전후에 인도계 미술은 이들 섬들에 뿌리내리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인도네시아 민족 자신의 미술활동에 대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7∼8세기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내구재료인 돌을 이용하는 건축 및 조각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많은 유물을 남겼다. 이것은 자바섬·수마트라섬에 관한 것으로(특히 자바가 중요하다) 다른 섬들에는 이와 같은 유품이 없다. 이 밖에 인도네시아계 미술이 행하여졌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자바섬은 인도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는 동남아시아 제국 중 가장 우수한 종교예술을 전개시킨 지역으로, 인도의 불교 및 힌두교 미술의 수용을 필두로 8∼9세기에는 중부 자바에서 가장 먼저 전성기가 출현하였다.


인도 굽타계의 전아(典雅)하고 가지런한 양식을 기조로 하여 보로부두르(불교) 및 칸디 롤로전그란(힌두교)과 같은 동양미술사상의 우수한 걸작을 창조하였다. 그 후 정치의 중심이 동부 자바로 이동한 후부터는 인도와의 교섭이 줄어듦에 따라 미술도 점차로 쇠퇴하고 대신 자바의 민족적 요소가 짙어지기 시작하였다. 즉 자바의 미술사(美術史)는 전형적인 쇠퇴의 과정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오랜 유품으로는 팔렘방 부근에서 출토된 가장 오래된 석불 외에 스리비자야 초기에 속하는 돌 및 청동의 불교존상(佛敎尊像)이 여러 개 있는데, 중부 자바의 미술과 양식(樣式)상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주목된다. 동부 자바에서 발견된 찬디 유적, 힌두교 및 불교의 존상 및 숭배물 등이 있으며 그 중에서도 1286년의 연기(年紀)인 불공견색관음(不空a 索觀音), 14세기경의 거대한 바이라바(Bhairava)의 입상(立像) 등이 대표적인 것으로 인도계의 표현이지만 수법은 현저하게 인도네시아화하고 있다.[엠파스사전]

 

언어


공용어는 인도네시아어로 인도네시아의 국어이다. 회화체 언어로는 어휘, 문법 규칙 등이 서로 다른 583개 이상의 방언이 인도네시아어와 함께 병존하며 각 지역의 일상 생활에 사용되고 있다. 인도네시아어가 국어이기는 하나 일상에서 사용하는 사람은 약 3,000만 명 정도로 전국의 인구에 비해 의외로 적지만, 제2언어로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꽤 많다.


또 수도 자카르타에 돈벌이하러 나오는 사람도 꽤 많기 때문에 지방 사람이라도 인도네시아어는 필수이며, 사용할 수 없으면 돈벌이에도 영향이 미친다. 그 외에도 자바어, 마두라어, 발리어, 중국어, 네덜란드어, 영어, 말레이어 등도 사용된다. 문맹퇴치율:88.5%(2003년)


인도네시아어는 말레이어의 한 변종어로서 1928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며, 청년단체가 말레이어를 약간 개정하여 인도네시아어로 재정한 것이다. 말레이반도에서 사용되는 말레이어와는 거의 흡사하나 발음, 철자, 단어의 의미, 문법 규칙 등이 약간씩 다르다. 어족으로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중 서부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말레이어파에 속하며, 유형학적으로는 교착어(어근에 접사가 붙어 다양한 품사로 파생되는 언어)에 속한다.


인도네시아어외에 인도네시아의 각 지역에서 사용되는 지방어는 현재 742개(2005년 SIL 조사)로 추산된다. 이들에는 자와어, 순다어, 마두라어, 발리어, 람풍어, 바탁어, 아체어, 이반어, 다약어, 마카사르어, 부기스어 그리고 머나도어 등이 있다.


종교


인도네시아는 헌법 29조에서 5개종교(개신교, 로마 가톨릭, 불교, 힌두교, 이슬람)의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며, 종교가 없는 사람은 공산주의자로 간주[1]되기 때문에 신분증에 반드시 종교가 명시되어 있어야 한다.대부분의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이슬람교를 믿지만 발리 섬에서는 힌두교가, 술라웨시 섬 북부에서는 로마 가톨릭이 우위이다. 인도네시아 기독교는 1960년대 크게 성장하는데, 그 이유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당원들을 교우로 받아들여서 정부와 극우파들의 박해와 학살로부터 보호했기 때문이다.


2000년 인도네시아 정부의 통계에 의하면,이슬람교 80%, 개신교 5.9%, 가톨릭교 3.1%, 힌두교 1.8%, 불교 0.8%, 기타 0.2%이다. 이슬람교도의 인구는 1억 7000만 명 이상으로 세계 최대의 이슬람교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사실 인도네시아는 이슬람교가 다수일 뿐 세속 국가이며 전형적인 이슬람 국가는 아니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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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역사

 

Early kingdoms

Tarumanagara (358-723)

Srivijaya (7th to 13th centuries)

Sailendra (8th to 9th centuries)

Kingdom of Sunda (669-1579)

Kingdom of Mataram (752–1045)

Kediri (1045–1221)

Singhasari (1222–1292)

Majapahit (1293–1500)

The rise of Muslim states

The spread of Islam (1200–1600)

Malacca Sultanate (1400–1511)

Sultanate of Demak (1475–1518)

Aceh Sultanate (1496–1903)

Sultanate of Banten (1526–1813)

Mataram Sultanate (1500s to 1700s)

European colonialism

The Portuguese (1512–1850)

Dutch East India Co. (1602–1800)

Dutch East Indies (1800–1942)

 

Early kingdoms

 

Tarumanagara (358-723)

 

1600-year-old stone inscription from the era of Purnawarman, king of Tarumanagara, founded in Tugu sub-district of Jakarta.


스리비자야 Srivijaya (7th to 13th centuries)

 

                                               12~13세기경 스리비자야의 판도


인도네시아에는 일찍부터 인도의 힌두교가 침투하여 그 영향을 받은 몇 개의 작은 나라가 2세기경부터 점점 성장해갔다. 7세기가 끝난 무렵에는 그들이 연합하여 스리비자야라는 커다란 국가로 통일되어 수마트라 섬의 현재의 팔렘방을 수도로 했다. 이곳의 비문이나 중국인 의정(義淨)의 여행기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典)』으로도 이 나라가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각국, 그리고 인도와 활발한 교역활동으로 경제적으로 번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항로의 중간에 위치하여, 믈라카 해협과 순다 해협의 중앙에 위치하는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8세기에 들어서자 해상무역 국가로 급속히 발전했다. 때마침 서방의 사라센 제국으로부터 상선(商船)이 자주 동쪽으로 나온 시기이며, 당대(唐代)의 중국은 풍부한 시장임과 동시에 중국인도 해외로 진출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스리비자야는 중계무역지 역할을 하였다.


7세기 후반 인도에 유학했던 당나라 중 의정(義淨)이 도중에 스리비자야에 들러서 산스크리트어 연구와 불전의 번역 등에 종사했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이 나라 불교의 번영을 알 수 있다. 8세기 중엽에는 말레이 반도의 일부도 지배했던 것 같고 영토도 확대되어 동남아시아에서 거의 유일한 대국이 되었다. 10세기를 최성기로 하여 14세기에 몰락했다.

 

Candi Gumpung, a Buddhist temple at Muaro Jambi of Malayu Kingdom, later integrated as one of Srivijaya's important urban center.

 

                        Ruins of the Wat Kaew in Chaiya, dating from Srivijayan times

 

                                Pagoda in Srivijaya style in Chaiya, Thailand

 

The graceful golden statue of Avalokiteçvara in Malayu-Srivijayan style, discovered at Rataukapastuo, Muarabulian, Jambi, Indonesia

 

                                     Srivijaya's Empire and its neighbors in 900 AD.


사일렌드라 Sailendra (8th to 9th centuries)


사일렌드라는 8세기 중엽 중부 자바에서 일어난 왕조로 베트남의 참파와 캄보디아를 공격할 만큼 군사적으로 강했던 듯하나 그 정치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대승불교의 귀의자였던 이 왕가의 사람들은 불교를 소중히 보호하여 장대한 불교 건조물 보로부두르, 찬디 멘두트 등 훌륭한 불교 건축을 남겼다. 그런데 9세기 중엽 자바의 이 왕가는 강력한 해군력을 이용하여 베트남 북부와 캄보디아에 원정을 하고 나아가서는 말레이 반도까지 권력을 떨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스리비자야 왕국이 차지하고 있던 지위도 빼앗고 말았다. 결국 스리비자야 왕국은 사일렌드라 왕조의 지배 밑에서 재흥해 가게 되는 것이다.


한편, 자바의 동부에는 불교계 사일렌드라 왕조에 대항하여 힌두교를 신봉하는 마타람 왕국이 대두하였다. 서로 이웃한 두 나라의 적대 관계는 결국 마타람 왕국의 승리로 끝난다. 그 결과 자바에서 축출된 사일렌드라 왕가는 완전히 수마트라 섬의 재생(再生) 스리비자야 왕조로 합체했다.


Kingdom of Sunda (669-1579)


Tarusbawa (669 – 723 AD)

Sanjaya/Harisdarma/Rakeyan Jamri (723 –732 AD).

Rakeyan Panaraban/Tamperan Barmawijaya (732 – 739 AD).

Rakeyan Banga (739 – 766 AD)

Rakeyan Medang Prabu Hulukujang (766 – 783 AD)

Prabu Gilingwesi (783 – 795 AD)

Pucukbumi Darmeswara (795 – 819 AD)

Prabu Gajah Kulon Rakeyan Wuwus (819 – 891 AD)

Prabu Darmaraksa (891 – 895 AD)

Windusakti Prabu Dewageng (895 – 913 AD)

Rakeyan Kemuning Gading Prabu Pucukwesi (913 – 916 AD)

Rakeyan Jayagiri Prabu Wanayasa (916 – 942 AD)

Prabu Resi Atmayadarma Hariwangsa (942 – 954 AD)

Limbur Kancana (954 – 964 AD)

Prabu Munding Ganawirya (964 – 973 AD)

Prabu Jayagiri Rakeyan Wulung Gadung (973 – 989 AD)

Prabu Brajawisesa (989 – 1012 AD)

Prabu Dewa Sanghyang (1012 – 1019 AD)

Prabu Sanghyang Ageng (1019 – 1030 AD)

Prabu Detya Maharaja Sri Jayabupati (1030 – 1042 AD).

Jayabupati

Raja Sunda XXI

Raja Sunda XXII

Raja Sunda XXIII

Raja Sunda XXIV

Prabu Guru Dharmasiksa

Rakeyan Jayadarma.

Prabu Ragasuci (1297 – 1303)

Prabu Citraganda (1303 – 1311)

Prabu Lingga Dewata (1311 – 1333)

Prabu Ajigunawisesa (1333 – 1340.

Prabu Maharaja Lingga Buana (1340 – 1357)

Mangkubumi Suradipati/Prabu Bunisora (1357 – 1371)

Prabu Raja Wastu/Niskala Wastu Kancana (1371 – 1475)

Prabu Susuk tunggal (1475 – 1482)

Sri Baduga Maharaja


Kingdom of Mataram (752–1045)


Sanjaya (835-838)

Pikatan (838-850)

Kayuwangi (850-898)

Balitung (898-910)

Daksa (910-919)

Tulodong (919-924)

Wawa (924-929)

Mpu Sindok (929-947)

Sri Isyana Tunggawijaya (947-985)

Dharmawangsa (985-1006)


Kediri (1045–1221)


Unknown ruler 1042 - 1104 (the era of twin kingdoms: Janggala and Kediri)

Çri Jayawarşa Digjaya Çāstaprabhu 1104 - 1115

Kameçwara 1115 - 1130

Jayabhaya 1130 - 1160

Sarwweçwara 1160 - 1170

Aryyeçwara 1170 - 1180

Gandra 1180 - 1190

Çrngga 1190 - 1200

Kertajaya 1200 - 1222


Singhasari (1222–1292)


Ken Arok 1222 - 1227

Anusapati 1227 - 1248

Panji Tohjaya 1248

Wisnuwardhana 1248 - 1268

Kertanegara 1268 - 1292


Majapahit (1293–1500)


마자파힛 (Majapahit, 1293년 ~ 1520년) 은 자와 중부에 번영하였던 최후의 인도식 왕조이다. 이 마자파힛 왕국은 자바해 전역을 지배할 정도의 대함대의 위력을 지녀 단시일 동안에 지배권을 주변으로 확대해 갔다.


14세기 후반 제4대 하얌 우룩 왕의 시대에는 현 인도네시아 전역과 말레이 반도의 일부까지 지배하에 두고, 또한 중국이나 인도차이나의 여러 나라와 밀접한 외교 관계를 맺어 최성기를 맞았다. 궁정시인 (宮廷詩人) 프라판차의 서사시〈나가라 케르타가마〉는 그 번영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왕이 죽자 왕조는 몰락의 길로 들어서 마침내 15세기 말에 멸망하였다. 그 배경에는 왕위 계승 분쟁에 따른 국내의 혼란과 속국의 이반 (離反), 재정의 궁핍화 등이 계속되었음을 들 수 있으나, 그 밖에도 중국의 해군력이 증강되어 위협을 받게 되었고, 서방에서 이슬람 세력과 포르투갈 세력의 침투가 시작된 것 등 국제적인 동향도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을 했다.


Raden Wijaya, styled Kertarajasa Jayawardhana (1294 - 1309)

Kalagamet, styled Jayanagara (1309 - 1328)

Sri Gitarja, styled Tribhuwana Wijayatunggadewi (1328 - 1350)

Hayam Wuruk, styled Sri Rajasanagara (1350 - 1389)

Wikramawardhana (1389 - 1429)

Suhita (1429 - 1447)

Kertawijaya, styled Brawijaya I (1447 - 1451)

Rajasawardhana, born Bhre Pamotan, styled Brawijaya II (1451 - 1453)

Interregnum (1453-1456)

Bhre Wengker, Purwawisesa or Girishawardhana, styled Brawijaya III (1456 - 1466)

Singhawikramawardhana, Pandanalas, or Suraprabhawa, styled Brawijaya IV (1466 - 1468 or 1478[5])

Kertabumi, styled Brawijaya V (1468 - 1478)

Girindrawardhana, styled Brawijaya VI (1478 - 1498)

 

                    Genealogy of the Majapahit Royal Family. Rulers are highligh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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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ise of Muslim states


The spread of Islam (1200–1600)

Malacca Sultanate (1400–1511)

Sultanate of Demak (1475–1518)

 

Aceh Sultanate (1496–1903)

1496-1528 Ali Mughayat Syah

1528-1537 Salahuddin

1537-1568 Alauddin al Qahhar

1568-1575 Husain Ali Riayat Syah

1575 Muda of Aceh|Muda

1575-1576 Sri Alam

1576-1577 Zainal Abidin of Aceh|Zainal Abidin

1577-1589 Alauddin Mansur Syah

1589-1596 Buyong

1596-1604 Alauddin Riayat Syah Sayyid al-Mukammil

1604-1607 Ali Riayat Syah

1607-1636 Iskandar Muda

1636-1641 Iskandar Thani

1641-1675 Ratu Safiatuddin Tajul Alam

1675-1678 Ratu Naqiatuddin Nurul Alam

1678-1688 Ratu Zaqiatuddin Inayat Syah

1688-1699 [[Ratu Kamalat Syah Zinatuddin

1699-1702 Badrul Alam Syarif Hashim Jamaluddin

1702-1703 Perkasa Alam Syarif Lamtui

1703-1726 Jamal ul Alam Badrul Munir

1726 Jauhar ul Alam Aminuddin

1726-1727 Syamsul Alam

1727-1735 Alauddin Ahmad Syah

1735-1760 Alauddin Johan Syah

1750-1781 Mahmud Syah

1764-1785 Badruddin

1775-1781 Sulaiman Syah

1781-1795 Alauddin Muhammad Daud Syah

1795-1815 Alauddin Jauhar ul Alam

1815-1818 Syarif Saif ul Alam

1818-1824 Alauddin Jauhar ul Alam (second time)

1824-1838 Muhammad Syah

1838-1857 Sulaiman Syah

1857-1870 Mansur Syah

1870-1874 Mahmud Syah

1874-1903 Muhammad Daud Syah


Sultanate of Banten (1526–1813)

Sunan Gunungjati

Hasanudin - Panembahan Surosowan (1552-1570)

Maulana Yusuf - Panembahan Pakalangan Gedé (1570-1580)

Maulana Muhammad - Pangeran Ratu Ing Banten (1580-1596)

Pangeran Ratu - Abdul Kadir Kenari (1596-1651)

Ageng Tirtayasa - Abul Fath Abdul Fattah (1651-1672)

Abu Nasr Abdul Kahhar - Sultan Haji (1672-1687)

Abdul Fadhl (1687-1690)

Abul Mahasin Zainul Abidin (1690-1733)

Muhammad Syifa Zainul Ar (1750-1752)

Muhammad Wasi Zainifin (1733-1750)

Syarifuddin Artu Wakilul Alimin (1752-1753)

Muhammad Arif Zainul Asyikin (1753-1773)

Abul Mafakir Muhammad Aliyuddin (1773-1799)

Muhyiddin Zainush Sholihin (1799-1801)

Muhammad Ishaq Zainul Muttaqin (1801-1802)

Wakil Pangeran Natawijaya (1802-1803)

Aliyuddin II (1803-1808)

Wakil Pangeran Suramanggala (1808-1809)

Muhammad Syafiuddin (1809-1813)

Muhammad Rafiuddin (1813-1820)

 

Mataram Sultanate (1500s to 1700s)

Wars of succession

Court intrigues in 1723-1741

Chinese War 1741-1743


Division of Mataram

 

                                  The divided Mataram in 1830, after the Java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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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ropean colonialism

 

The Portuguese (1512–1850)

The nutmeg plant is native to Indonesia's Banda Islands. once one of the world's most valuable commodities, it drew the first European colonial powers to Indonesia.


Dutch East India Co. (1602–1800)

 

Dutch East Indies (1800–1942)

 


Map of the Dutch East Indies showing its territorial expansion from 1800 to its fullest extent prior to Japanese occupation in 1942.

 

The submission of Prince Diponegoro to General De Kock at the end of the Java War in 1830[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