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항로 발견
아프리카 대륙 서부를 남하하여 동방과 교역을 하고자 하는 ‘엔리케 항해 왕’의 꿈을 40년만에야 마침내 실현시킨 것은 가마( Gama, Vasco da : 1469-1524년)이다. 1497년 7월 8일에 4척의 선대(船隊)와 170명의 선원을 인솔하고 리스본을 출항하였다. 배의 선대는 기함 산 가브리엘 호(200톤), 산 라파엘 호(200톤), 팔리오 호(100톤)와 식량 운반선(400톤)등 모두 4척이었다.
약 1주일에 걸쳐 카나리아 제도 부근까지 남하한 곳에서 짙은 안개에 휩싸여 배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약 2주일을 헤맨 다음에 보다 남서쪽의 베르데곶 제도 부근에서 만나, 섬으로 기항하여 식량과 물을 보급 받고 8월 3일 그 섬을 출발하였다. 도중까지 동행한 디아스의 조언대로, 시에라레온 앞바다에서 대서양을 서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혁명적 항법(航法)을 써서(약 6,400 km), 대서양을 우선 남서쪽으로 계속해서 남동쪽으로 나아간 반원형의 항로를 더듬어 브라질에서 약 1000km인 곳까지 갔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포르투갈의 세력권이 된 해역 내에서 새로운 섬을 발견하는 것이 이 항해의 목적이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약 100일에 걸친 항해로 일행은 모두 신선한 과일과 채소 부족에서 일어나는 괴혈병에 시달렸다. 11월 4일에 간신히 세인트헬레나 만에 도착하였다. 희망봉 북쪽 약 50km에 있는 케이프타운 북쪽에 있는 만이다. 배의 동체 부분에 달라붙은 굴 등을 떨어뜨리고, 찢어진 돛을 수리하고, 식량·물·땔감 등을 보급 받아 출발하여 11월 22일에 희망봉을 돌아 대륙 동해안을 북상(北上)하여 더반(남아프리카 공화국)·켈리마네·모잠비크(모잠비크 공화국)ㆍ몸바사로 기항하였다. 모잠비크 부근에서 부터 이슬람교도와의 접촉이 시작되었으나, 가마 일행은 자신들이 크리스트 교도임을 숨기지 않았다. 당연히 이슬람교도는 가마 일행을 경계하였다.
가마 일행은 자신들이 가지고 온 방울ㆍ산호ㆍ모자ㆍ외투 등이 아무래도 빈약하였으나, 어렵사리 인도로 가는 길을 아는 안내인을 고용하여, 그 1주일 후에 아프리카 남해안의 모셀 만에 기항하였다. 여기서 식량선을 버리고 남은 식량을 나누어 1498년 4월에는 말린디(케냐 공화국)에 도착하였다.
도중에도 역시 이슬람교도들의 적대적 방해로 시달림을 받았으나, 우호적인 마린디에서는 이슬람의 수로(水路) 안내인 이븐 마지드의 도움으로 인도양을 횡단하였다. 그의 안내로 가마 일행은 1498년 5월 20일 마침내 인도의 말라바르 해안의 인도 남서 해안의 항구 캘리컷에 도착하였다. 인도항로 발견을 기뻐한 포르투갈은 대규모 선대(船隊)를 파견하여 힘으로 인도양의 이슬람 상인의 세력을 제압하고, 70년에 걸친 인도항로 발견의 대사업을 성취하였다. 1508년 2월 디우 앞바다에서는 이슬람의 연합함대를 격멸하였으며, 2년 후 인도의 고아를 점령하고 나아가서 1511년에는 동남아시아 무역의 요충인 말라카 공략에 성공하였다.
캘리컷 왕이 포르투갈 왕 마누엘 1세(재위 1495~1521년)에게 보내는 ‘우리나라에는 계수나무·정향나무·생강·후추나무가 많다. 당신 나라의 금과 은, 산호와 진홍의 직물이 우리가 원하는 물건이다’라는 의미의 자필 서신을 받은 가마일행은, 1498년 10월 초 인도의 고아에서 아프리카로 향해 서진(西進)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역풍을 만나 고전하여 1499년 1월에 모가디슈(소말리아 민주 공화국)에 도달할 때까지 30명이 괴혈병으로 죽었다. 어쩔 수 없이 몸바사로 기항하였을 때 산 라파엘 호를 버리고, 남은 선원을 모두 산 가브리엘 호와 팔리오 호에 태우고, 희망봉을 돌아 1499년 9월 초에 리스본으로 돌아왔다. 출발해서 약 26개월 후의 일이다.
그로부터 약 6개월 후인 1500년 3월 9일에 카브랄(Pedro, Alvares Cabral : 1467-1520년)은 희망봉의 발견자인 디아스와 함께 가마와 다른 항로를 찾아 인도로의 왕복을 시작하였다. 대서양을 보다 서쪽으로 나아간 그들은 브라질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되돌아온 희망봉 부근에서 심한 폭풍우를 만나 디아스가 세상을 떠났다. 남은 카브랄은 인도로의 왕복을 마치고 1501년 7월 1일경에 리스본으로 돌아왔다. 그의 배에는 다량의 향료ㆍ도자기ㆍ생강ㆍ향목ㆍ진주ㆍ다이아몬드ㆍ루비 등이 실려 있었다. 이렇게 하여 포르투갈의 황금시대가 시작되어 포르투갈 왕 마누엘 1세는 ‘행운 왕’이라 불리게 되었다. 엔리케 항해 왕의 꿈이 멋진 형태로 실현된 것이다.[항해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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