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해적의 전성기(The Golden Age of Piracy)

한부울 2009. 6. 24. 00:20
 

해적의 전성기(The Golden Age of Piracy)

 

Spanish Main


Christopher Columbus에 의하여 1492년에 발견된 신세계 아메리카는 에스파니아의 식민지가 되었다. 초창기에는 본국에서 지원을 해왔지만 얼마 되지 않아 서인도제도를 포함한 카리브해는 에스파니아 보물선단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새로 발견된 이들의 부와 땅은 에스파니아에 대한 경쟁과 시기가 되었다. 식민지에서 처음으로 함대가 공격 받고, 에스파니아의 권력에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도전하게 된다. 프랑스와 잉들랜드의 정부에서는 해적행위에 대한 승인을 내려보내 샤락함대 조직을 합법화 하게된다. 이 Buccaneer는 결국 해적이 되었다. 결국 에스파니아에게 해적은 엄청난 부담을 안겨주게 된다.


Buccaneer : 17세기 후반 미국연안의 에스파니아 식민지를 약탈했던 해적들.


Port Royal(자메이카의 항구도시, 해적의 천국 참조.)


지금은 고기잡이 배들에게만 분주한 마을이지만 1672 - 1692년 사이 20년 동안에는 6,500명의 이주민들과 함께 번성했던 항구였다. 4명의 금세공인, 125명의 상인, 44명의 선술집 바텐더, 매춘부들, 샤락함대제독들 그리고 해적들. 1680 - 1830년 사이에는 가장 많은 해적들이 교수형 된 곳이기도 했었다. 1720년 Calico Jack Rackham과 같은 해적.


Port Royal은 에스파니아가 섬을 되찾으려는 시도를 포기하게 하기 위하여 Jamaica의 통치자로 인해 역시 해적행위가 인정된 중심지 이기도 했다. Buccaneers에게는 에스파니아 함대를 공격해도 되는 Letters of marque(나포 면허장)를 주었다. 가장 성공적이었던 Buccaneer, Henry Morgan.


1692년 6월 7일 아침, 12분에서 20분동안의 대규모 지진이 마을을 덮친다. 2천명의 사람들이 지진으로 사망하고 이후에도 2천명은 각종 질병이나 열병으로 죽어갔다. 지진으로 인해 섬의 2/3가 바다 속으로 가라 앉아 버리고 사람들은 죄와 사악함으로 가득찬 Port Royal이 신에게 벌을 받은것으로 생각했다.


Barbary Coast


유럽 십자군(Crusader)들은 지중해 남부를 이어가는 아프리카의 해안과 회교도(Muslim)들을 바바리라 불렀고 바바리 해안과 바바리 해적(Corsair)들로 들끓는 이슬람해는 잘 알려져 있었다.


Corsair : 북아프리카 해안을 유랑하는 이슬람 해적.

 

 

16세기 말, 기독교국과 회교도사이의 세기전쟁이 끝난후 지중해의 남쪽은 무슬림이, 지중해 북쪽은 그리스도교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것은 평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Barbary는 독립과 그들의 경제적 부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스도교국 배들을 공격하게 된다. 이에 그리스도교국은 보복을 하게 되고 양측모두 해적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샤략함대를 조직한다.


Indian Ocean


17세기말 에스파니아의 추락과는 반대로 성장하는 동방무역으로 인해 많은 반갑지 못했던 많은 해적들이 동쪽 Madagascar로 이동하게 된다. 수많은 동인도 회사의 상선과 무갈제국의 보물선이 그들의 약탈 대상이 었다. 하지만 결국 대부분의 해적들이 동아프리카 해안 마다가스카르(Island of Madagascar)섬을 떠나게 된다. 이는 인도에서 바라보는 유럽과 교역의 손실로 인해 정부나 상인 조직에서 해적을 소탕하기 위해 많은 샤락함대를 구성했기 때문이다.


Madagascar

 

 

1690 - 1720년의 30년 동안 마다가스카르는 인도무역을 가로채는 해적들의 본거지였고 미개척지였다. 마다가스카르는 카리브해에서 넘어온 해적들에게는 이상적인 곳이었고, 17세기 후반에는 17척의 해적선과 1,500명의 해적들이 머물렀다고 알려진다. 긴 시간동안 가장 악명 높았던 해적 Captain Kidd를 포함한 Thomas White 그리고  Thomas Tew의 무대였었다.

 


지중해는 8세기 이후 이슬람교도의 지배에 들어가 유럽인은 이 해역으로부터 완전히 거세되었으나, 십자군을 계기로 하여 이탈리아 도시에 의한 동방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무역의 독점을 둘러싼 도시국가 간에, 또는 이슬람 상인과의 사이에 해상 폭력이 전개되었다. 도시국가들은 후세의 사략(私掠:私拿捕) 특허장(적국 선박의 나포를 私船에 허가한 정부 발행의 면허장)을 발행하였으나, 정식의 선전포고가 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던 당시로서는 해적과 사략의 구분이 어려워, '전쟁, 무역, 해적은 삼위일체로, 분리하기 어려운' 상태가 계속되었다.


특히 그리스도교는 이교도 이슬람에 대한 약탈을 정당화하고, 이슬람측도 이에 응수함으로써 지중해의 해상질서는 문란하였다. 특히 14-15세기, 이베리아반도의 그리스도교 제국(諸國)에 의한 국토회복운동(레콩키스타)으로 오랫동안 반도를 점거하고 있던 이슬람계 무어인(人)이 북(北)아프리카로 쫓겨나면서, 그들은 바르바리 해안에서 그리스도교국의 선박을 보복적으로 나포, 약탈하고, 승무원을 사로잡아 몸값을 요구했으며,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이들을 노예시장에 팔아 갤리선(船)의 사공으로 혹사시켰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제국들은 연합하여 자주 이들의 기지(基地)를 공격하였으나 그 세력은 여전하였다.


한편, 13-14세기 이후 발트해(海), 북해, 영국해협 방면에서도 독일의 한자 제도시(諸都市) 및 이탈리아 제도시의 상인을 중심으로 한 해상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연안 제국(諸國)의 해적이 출몰하였으며, 그 중에는 부(富)를 갈망하는 국왕이나 제후(諸侯), 기사(騎士)들의 후원을 받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한자 상인은 자기방위를 위해 선대(船隊)를 조직하여 무장하거나 호위함대를 거느렸는데, 상선의 무장화는 무력행사를 용이하게 하고 상업의 독점을 둘러싼 제국과 제도시 간의 분쟁을 야기시켜 이 해역의 전쟁상태는 끊일 날이 없었다.

 

 

상비군이 없는 제국은 해군력 보강을 위해 민간선에 사나포(私拿捕)를 인정하는 허가장을 부여하고, 또한 외국인으로부터 약탈이나 몰수의 손해를 입은 자에게는 정부가 보복장을 수여하여 자력으로 상대국의 선박을 나포하여 손해를 보상케 하는 보복행위가 널리 행해졌다. 그래서 이 합법, 반합법(半合法)의 약탈은 해적행위를 더욱 조장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 치하의 영국은 당시 신세계를 지배하고, 제3국의 진출을 무력으로 배제하고 있던 에스파냐의 독점무역을 타파하기 위해 미국의 식민지 도시를 약탈하고 보물선을 나포, 약탈하였으며, 에스파냐 측도 이에 응수함으로써 양국은 준(準)전쟁상태에 있었다. 노예상인 호킨스나 사나포 선장 드레이크 등은 에스파냐 국왕의 재보(財寶)를 훔쳐 해적으로서 증오의 대상이 되었으나, 영국인은 이들을 영웅으로 찬양하였다. 이를 모방하여 사나포 원정을 시도하는 자가 속출, 1588년 마침내 무적함대의 내습이라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당시 가톨릭국인 에스파냐로부터의 독립혁명을 추진하고 있던 네덜란드에는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신교도 외에 제국의 해적들이 모여들어 바다 거지(제 고이센)를 조직하고 에스파냐의 선박을 공공연히 나포하고 약탈하였다. 17세기 초에 평화가 회복되고 유럽 해역의 평화가 확립되자 실업군인(失業軍人), 선원, 해적 등은 카리브 해역에 대거 이동하여서 인도의 작은 도서들을 점거하고 에스파냐의 무역선이나 도시를 습격하였다. 에스파냐 측은 이를 버커니어(buccaneer)라고 하여 증오했으나, 그들은 마침내 '해안의 형제'라고 하는 반(反)에스파냐 공동전선을 형성하여 강력해졌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본국 정부는 그들에게 사나포 특허장을 주는 등 음양으로 그들을 도와 식민지 획득에 이용하였으나, 이에 성공하자 더욱 광포해진 버커니어를 진압하기 위해 군함을 파견하는 등의 조처를 취했다. 또한, 17세기 후반 영국 정부는 버커니어의 수령 헨리 모건을 자메이카 부총독에 임명하여, 해적진압을 담당케 하였다. 이와 같이 일시적으로 국가권력의 지지를 받았던 버커니어는 서인도 해역에서 추방되어 북아메리카 해역, 마다가스카르섬 주변, 인도양, 홍해(紅海) 방면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인류의 공적'으로서 제국(諸國) 정부의 추궁을 받게 되었다.


17세기 말 말레이시아, 보르네오, 남중국해, 페르시아 해안 등에 겨우 잔당이 여명(餘命)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19세기 말에 이르러 해적은 완전히 쇠망하였다.[해양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