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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코 다 가마 (Vasco da Gama, 1460-1524)

한부울 2009. 6. 23. 00:34

 

바스코 다 가마 (Vasco da Gama, 1460-1524)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 ['vaʃku dɐ 'gɐmɐ], 1460년 또는 1469년~1524년 12월 24일)는 포르투갈의 항해자이며 탐험가다. 1497년~99년, 1502년~03년, 1524년 3차례에 걸쳐 인도로 항해했다. 유럽에서 아프리카 남해안을 거쳐 인도까지 항해한 최초의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때때로 인도까지의 항로를 최초로 발견한 유럽인으로도 불리고 있다. 이 인도 항로의 개척으로 인해 포르투갈 해상 제국의 기초가 다져졌다.


초기생애

 

                        Statue of Vasco da Gama at his birthplace, Sines, Portugal


바스쿠 다 가마는 1460년이나 1469년 포루투갈의 남서부 알렌테호 주 해안에 위치한 시네스(Sines)에서 지역 사령관이었던 에스테반 다 가마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바스쿠 다 가마의 아버지는 1460년 비제우 돔 페르난도공 가문의 기사였으며, 시네스의 시민 통치자(Alcaide-Mór)로 지역의 비누 생산에 대한 징수권을 가지고 있었다. 바스쿠 다 가마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으며, 에보라라는 내륙 도시에서 수학과 항해술을 배웠으며 천문학을 잘 이해했고 저명한 천문학자인 아브라함 자쿠투(Abraham Zacuto)에게 수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492년 포르투갈의 주앙 2세는 평화시 포르투갈 선박에 대한 약탈 행위에 대한 보복으로 다 가마를 세타불 항구, 리스본 남부, 포르투갈의 최남단 알그라브주로 보내어 프랑스 배들을 나포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다 가마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The route followed in Vasco da Gama's first voyage (1497–1499)

                                          바스쿠 다 가마의 첫 번째 항해

 

제1차 항해


1497년 7월 4척의 선대(船隊)를 인솔하고 리스본을 출범하였다. 도중까지 동행한 디아스의 조언대로, 시에라레온 앞바다에서 대서양을 서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혁명적 항법(航法)을 써서(약 6,400 km), 11월 희망봉을 돌아 대륙 동해안을 북상(北上)하여 모잠비크 ·몸바사를 통과, 1498년 4월 마린디에 도착하였다.

 

제2차 항해

1502년 2월 12일


제3차 항해

1524년

       Monument to the Cross of Vasco da Gama at the Cape of Good Hope, South Africa

 

비판


바스쿠 다 가마가 캘리컷 토후와 전투를 일으킨 것은 탐험 지역 원주민들의 문화를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므로, 이런 점을 비판하는 의견들이 존재한다.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해 500주년 행사를 인도 정부와 포르투갈 정부가 추진하였으나, 인도 국민들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극우에서부터 극좌에 이르기까지 바스쿠 다 가마는 식민 지배를 가져온 장본인이라고 한 목소리를 내었다

 

                                           Pillar of Vasco da Gama in Malindi,

 

                             Vasco da Gama lands at Calicut, May 20, 1498.

 

                Map of the Portuguese Empire during the reign of John III (1502–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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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대륙 서부를 남하하여 동방과 교역을 하고자 하는 ‘엔리케 항해 왕’의 꿈을 40년만에야 마침내 실현시킨 것은 가마( Gama, Vasco da : 1469-1524년)이다. 1497년 7월 8일에 4척의 선대(船隊)와 170명의 선원을 인솔하고 리스본을 출항하였다. 배의 선대는 기함 산 가브리엘 호(200톤), 산 라파엘 호(200톤), 팔리오 호(100톤)와 식량 운반선(400톤)등 모두 4척이었다.


콜럼버스는 1492년부터 1502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대서양 탐험을 감행하였다. 그는 이 과정에서 쿠바, 푸에르토리코, 자메이카, 에스파뇰라 등을 탐사하고 식민시를 건설하였으며, 남미대륙의 일부를 탐사하였다. 그는 자신이 도착한 곳이 인디즈(Indies)의 일부라고 착각했기 때문에 원주민들을 인디언이라고 불렀다. 15세기에는 인디즈가 인도만을 의미했던 것이 아니라 ‘갠지즈강 너머의 아시아의 모든 땅’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의 탐험에 뒤이어 바스코 다 가마가 진짜 인도에 도착하고(1498), 베스푸치 등의 탐험가들이 남미 대륙을 탐험하여 이곳이 아시아대륙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냄에 따라 카리브해 지역은 서인도로 불려지게 되었지만, 그곳의 원주민들은 아직도 인디언으로 불리고 있다.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횡단하여 인디즈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었던 것은 당시의 그릇된 지리관 때문이었다. 콜럼버스는 기원전 2세기의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의 학설을 받아들여 지구둘레를 1만 8천마일(실제는 2만 4,902마일)로 추산했고, 다이이(d'Ailly) 추기경의 『세계의 상』(Imago Mundi)과 성경의 에즈드라스(Esdras)서의 구절을 받아들여 바다는 지구표면의 7분의 1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였다. 그 결과 유럽에서 아시아로 가기 위해서는 아프리카를 돌아가는 것 보다는 대서양을 횡단하는 것이 훨씬 빠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콜럼버스는 먼저 인디즈 본토인 카타이에 도착하고 난 뒤, 시팡고로 가려고 했다.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아시아로 가고자 했던 이유는 카타이와 시팡고에 가면 막대한 부와 명예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당대의 저명한 지리학자인 토스카넬리(1397-1482)가 쓴 편지에는 카타이와 시팡고의 ‘궁전과 사원이 금과 귀금속으로 뒤덮여 있는 황금향’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15세기 말에 사용된 인디즈(Indies)란 말은 갠지즈강 너머의 인도, 카타이, 씨팡고 등 아시아 전체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당대의 저명한 지리학자인 토스카넬리(1397-1482)가 쓴 편지에는 카타이와 시팡고의 ‘궁전과 사원이 금과 귀금속으로 뒤덮여 있는 황금향’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16세기의 사건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강하고 담대한” 경쟁적인 투쟁이라고 할 수도 있고 이베리아 반도의 하모니 (harmonía= 조화)를 이룬 대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끄리스토포로의 아메리카 발견은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 중에 하나”가 될 수는 있어도 엄연히 따져서 그는 실패하였다. 성공적으로 “인도로 가는 길”을 개척한 사람은 “바스꼬 다 가마”라는 포르투갈의 인도양 해군제독이다.


바스꼬 다 가마 해국제독은 공상소설과 같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기록된 인도(Catay), 켈리쿳(Calicut)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해양 실크로드”의 세계화 시대를 열은 장본인이 되었다.


수단으로 가는 길


15 세기 하반기에 아프리카 서해안 정탐을 시도하여 포르투갈은 대서양 상의 카나리아, 아소레스, 마데이라 제도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과거에는 노예제도를 도입하여 사탕수수 생산 식민지로서 본국에 이익을 주었는데 현재는 일반적인 식민지와는 달리 두 섬 (아소레스/마데이라 제도)에서 원주민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고, 주민들의 거의 전부가 포르투갈 본토인들이다. 파라다이스와 같은 아름다운 섬은 온 유럽인들의 휴양지로 변했다.


15세기 말에는 바돌로메 디아스 (Bartolomé Días)가 아프리카의 최남단 희망봉 (Cabo de Nueva esperanza, 1488)을 돌아서 아프리카 동쪽해변을 항해하였다. 그러므로 아프리카의 수단공화국과 직접 통상의 길을 열게 되었다. 이 사건은 터키오스만 제국이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에 쌓은 냉전시대의 만리장성을 돌아 해양으로 세계화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된 것이다.


오늘에도 계속되는 해양 실크로드의 덕을 보며 싱가포르는 경제대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동서양의 해운업체들은 이곳에 기점을 두던가 경유하여 무역을 해야 한다. 싱가포르는 고도로 발달된 시장기반 경제와 역사적으로 수출입 무역에 의존하여 발달하였다. 해양 실크로드의 분기점으로 유리한 위치에 놓여있어서 엄청난 이익을 보는 셈이다. “관광산업으로도 유명한데, 2006년에는 9천7백만 명의 관광객이 싱가포르를 방문했다”고 한다. 가히 가공할 만한 세계적인 관광국이다!


싱가포르는 16세기에 포르투갈 정책에 의하여 부두도시로 발전함과 동시에 지배를 받았고, 17세기에는 덴마크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19 세기초 전 유럽 대륙이 나폴레옹에게 굴복당 할 때에 영국은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덴마크 등의 식민지 대량을 강탈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싱가포르도 예외가 아니다. 포르투갈과 덴마크가 실크로드의 주권을 상실할 때에 (1819년) 영국 동인도회사의 토머스 스탬피드 레플스경이 이 지역에 상륙하여 조호르의 술탄과 계약을 맺고, 싱가포르를 국제무역항으로 발전시켰다. 1858년부터는 영국 식민지의 인도 정부가 이 지역을 관할하였으며 1867년부터는 정식으로 대영제국의 식민지로 편입되었다. 평화로운 조약으로 시작한 것을 먹어 치운 영국을 아직도 신사 나라라고 할 것인가?


까따이(인도)와 시암바(중국)로 가는 길.


바스꼬 다 가마는 바돌로메 디아스의 루트를 확장하여 처음 해상의 길로 유럽과 인도를 연결하였다. 5세기 말에 호도껍질 같은 까라벨라 (Carabela, 세개의 돛대를 달은 가벼운 범선)에 몸을 싣고 이러한 대양을 항해 한다는 것은 과장 없는 “엄청난 모험!”이었다.


가마 선장은 1497 년 중반에 현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 (Lisbõa)를 떠나 거의 일 년만(1498년 5월)에 인도에 도착하였다. 이로서 가마는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꿈꾸던 소원을 성취하여 부귀영화를 받게 되었다. 포르투갈의 마누엘 왕은 그의 모든 가족에게 귀족 신분과, 연 봉30 만 헤아이스 (Reales, 화폐단위)와 인도양 해군제독이란 명예를 하사했다. 그를 이은 포르투갈 탐험대는 일본까지 가는 해양항로에 있는 모든 항구도시를 식민지 정책 중심으로 운영하여 해운사업을 확장하였다. 아프리카, 남부 아라비아, 인도차이나, 일본과 연결되는 모든 섬에까지 정책적으로 포르투갈은 전무후무한 해상왕국을 건립해 나아갔다.


15세기 당대에는 지구의 크기에 대해 두 가지 설을 활용할 수 있었다. 고대에 에라토스테네스가 지구의 둘레를 25만 stades(현재 기준으로 약 4만 km)로 추산한 바 있었고,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보다 훨씬 작은 18만 stades로 추정하였다. 콜럼버스는 먼저 프톨레마이오스의 학설을 받아들임으로써 지구의 크기를 실제 지구둘레 4만 km(약 2만 4860마일)보다 약 30% 정도 작게 계산하게 되었다. 그런데 프톨레마이오스는 사람이 거주하는 거대한 땅 덩어리인 ‘오이쿠메네’(oikoumene)는 동에서 서까지 180도를 차지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고, 그 나머지 180도는 사람이 거주할 수 없는 바다라고 보았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육지와 바다의 구성 비율에 대해서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설을 따르지 않고, 다이이(d’Ailly)의 세계의상(Imago Mundi)과 성서의 외경 「에즈드라스(Esdras)서」의 문구를 받아들였다. 다이이는『세계의 상』에서 육지가 225도, 바다가 135도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았고, 에즈드라스서 2권 6장 42절에 “셋째 날에 물에 명하여 지구의 일곱째 부분에 한 데 모여 있도록 명하였고, 여섯째 부분에는 씨앗을 뿌리고, 농사를 짓고, 당신에게 봉헌할 수 있도록 마른 땅으로 있게 하라고 명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 두 설을 종합하면 지구의 7분의 6이 육지로 되어 있고 그 나머지인 7분의 1만이 바다가 된다.


이와 같은 근거에 따라 콜럼버스는 지구와 바다의 크기를 실제 보다 훨씬 작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콜럼버스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나오는 아시아가 프톨레마이오스나 다이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서쪽으로 향해 있다는 내용을 근거로 하여 육지에 28도를 추가하였다. 이에 따라 지구에서 육지는 253도, 바다는 107도가 되었다. 게다가 마르코 폴로는 씨팡고(Cipango)가 카타이(Cathay)에서 더 동쪽으로 뻗어 있다고 했다. 콜럼버스는 이 주장에 따라 다시 30도를 빼서 바다를 77도가 되게 했다. 그리고 난 뒤 그는 출항지가 스페인이 아니라 카나리아제도에서 출발할 것으로 가정하여 다시 9도를 빼 항해해야 할 바다를 68도가 되게 했다. 콜럼버스는 이것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다이이가 바다의 넓이를 추산할 때 8도를 빼 먹은 것으로 간주하여 결국 바다는 60도가 되었다. 이로써 카나리아 제도에서 황금향인 씨팡고까지의 바다는 길어야 2천6백여 마일을 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콜럼버스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단위를 자의적으로 활용했다. 적도에서 위도 1도는 경도 1도와 같다. 다이이는 9세기 아랍의 천문학자 알프라가노(Alfragano)가 위도 1도를 56 ⅔마일로 정한 것을 받아들였다. 콜럼버스는 알프라가노가 정한 수치에 쓰이는 마일을 해리(海里, nautical mile)보다 더 짧은 고대 로마식 마일이라고 가정했다. 그에 따라 콜럼버스는 적도상 위도 1도의 거리를 45 해리로 정한 뒤, 적도 보다 북쪽으로 항해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1도의 거리를 40 해리로 가정했다.


이러한 생각들은 콜럼버스로 하여금 지구의 둘레를 실제 크기보다 32% 작게 추산케 하였고, 씨팡고까지의 거리를 실제거리인 1만 2천마일보다 4분의 1이나 작게 계산케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지리학적인 세계관에 의하면, 카타이는 오늘날 멕시코서해안에, 씨팡고는 서인도제도상에 위치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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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 이후 카타이는 조선과 무굴제국(명)이다.

이것을 서양인들은 인디즈(indies)라했다.

마르코 폴로가 말한 시판구(Cipango, Zipangu)가 어디일까?

지금의 일본이 맞는가?

아니다.

서세가 일본인들을 선의적으로 그려 모사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

그러한 이유 몇가지를 열거해본다.

서세가 일본인이라고 하는 근원을 엄밀하게 따지면 인도양 말라카해협을 무대로 활동하던 해적정치집단을 총칭하여 부르던 것일게다.

때문에 인도양과 뱅갈을 경유하여 말라카해협에 출몰하는 해적들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과 그 해적집단을 정치세력으로 묶어 규합 포섭하여 대륙동쪽으로 향하는 항로를 안전하게 유지하면서 대륙통로 확보하는데 첨병역할을 할 수 있는 군사적 자원으로서 충분하게 이용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모색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서방전체여론을 일본인(Javanese:자바계)을 선의적으로 그려 미화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한 연장선에서 시판구를 일본으로 본 것이고 지금의 열도을 일본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서세가 주도한 역사재편과정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허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872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지금의 열도엔 일본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