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요강까지 건졌다..땅에서 캐낸 서울 100년

한부울 2009. 6. 20. 14:43
 

일본은 역사조작국 그러나 자랑스러워하라, 조작해서라도!

http://blog.daum.net/han0114/17046171


실증사학이란 허구


일제가 만든 반도역사는 역사라고 할 수 없다.

역사허구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전이되어 우리 머릿속 깊숙하게 내재되거나 사실진의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그것을 진실처럼 여기며 받들고 있는가에 대한 어리석음을 또 다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한시바삐 이러한 분명치 않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2000년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일본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가 일본 미야기 현의 유적 발굴 현장에서 가짜석기를 파묻는 장면을 찍은 사진을 보도했다. 이 사건은 그 당시 희대 역사조작 사기사건으로 일본 내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사학계에 주는 충격 또한 대단하였다.

이런 것을 단순히 일본고대사 최고(最古) 石器기록을 좀 앞당기려는 행동이었다고 의미를 축소하고 볼 것이 아니라 일본 역사가들이 가지고 있는 관행, 보편적 관습이라는 점에서 우리 반도역사를 되 짚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식민 강압통치시대 때 반도사관을 만들었던 일제사학가들에게 이러한 관행과 관습이 보편화 된 것이었고 과거 반도역사 또한 그러한 조작사기에 노출이 되어 빈번하게 이용되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재론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절대 그렇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조작사기가 관행이고 관습적이었다면 그러한 행위가 전혀 없었다고 장담 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들은 그러한 행위가 범죄라고 여기지 않았고 그들 입장에서 오히려 애국하는 것이라고 보았다면 역사조작사기가 당연시 되었을 것이란 생각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또한 역사는 조작하는 것이고 언제든지 또 다른 목적에 의하여 수정 될 수 있는 것이며 시류나 시대에 의하여 마구 훼손 왜곡되어야 할 대상이 곧 역사라고 보았다는 사실은 도저히 정상적으로 상황판단을 할 수 없게 하는 것들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반도역사가 생성되었고 그 반도역사가 생성되기 전 역사는 그들의 무도한 관행과 관습에 의하여 철저하게 농단되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이 있음에도 반도역사만큼은 온전하고 진실이라고 감히 주장 할 수 있는 것인지 우리 사학계 인사들의 무사 안일주의 정신자세를 다시 한 번 성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그냥 묵인하고 덮어둘 수 없는 엉터리 같은 역사가 있고 그것을 추종하는 세력이 우리역사내부에 산재하고 있음에도 사회적으로도 아무런 제재(制裁)가 없다는 것은 통분할 일이고 안타까움이 아닐 수 없다.

100년 전 일제가 강압적으로 우리나라주권과 역사를 강탈하면서 영토를 차지하는 것도 부족하여 거대한 동이조선의 역사전체를 축소하면서 반도역사로 왜소하게 만들어놓았으며 실증사학으로 철저하게 마무리조작까지 하고 말았다.

일제가 잠재된 문화역사적 열등의식에 의하여 이러한 엄청난 짓을 벌렸고 그래서 보잘 것 없는 그들의 초라한 역사를 위하여 어쩔 수 없이 한 짓이라고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거대한 동이조선역사한쪽 귀퉁이에 끼어 넣으려는 수작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있을 수 없는 도적질이고 백주의 노략질이며 하늘의 뜻을 배역한 도저히 용서 할 수 없는 파렴치한 짓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다.

일제는 이러한 부정한 짓조차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수많은 우리의 귀중한 사서와 유물을 소각하거나 파괴하였으며 또는 탈취하거나 도적질하여 그들이 감추어두고 마치 그들의 보물인냥 열도지하에 깊숙하게 소장하고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선왕조실록을 언제 우리가 환수하였는가?

그것을 받아 쥔 우리는 우리 것임에도 불구하고 감지덕지 하였다.

어디 조선왕조실록뿐인가?

우리가 모르는 무수히 많은 귀중한 유물 유적들이 그들 감아쥐고 놓지 않고 있으며 우리가 특별한 수단을 찾지 않는 한 언제까지라도 그 부정하고 더러운 도독놈 손아귀에 있어야 하다는 사실을 우린 부정할 수가 없다.

또한 그러한 짓에 끝이지 않고 그들이 만든 반도역사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면서 사실화하기 위하여 실증사학의 모순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였고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우리민족 후손, 후대에서까지도 완벽하게 속이면서 부정할 수 없도록 거짓유적, 유물을 만들어 곳곳에 심어두고 묻어두었다.

역사나누기, 자르기, 끼워넣기, 지우기, 고치기, 금그으기, 덮씌우기, 때어붙이기...등 

반도 온 천지를 그들이 마음대로 파헤치거나 헤집어 그들의 거짓역사 틀에 맞게끔 교묘하게 꾸미고 감쪽같이 만들어 파묻어 놓고 처음부터 그것을 사실화하려 수작을 부렸다고 생각해보라.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있는 역사유적, 유물 중 이러한 의도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감히 부정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일제가 마치 사실이고 진리인 것처럼 가르친 반도고고학 실증사학이 주는 허구가 바로 이런 것임을 그래서 그러한 허구가 하나하나 들어나고 있음을 절대로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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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강까지 건졌다..땅에서 캐낸 서울 100년

[연합뉴스] 2009년 06월 19일(금) 오후 03:57


서울 행당구역 도시개발사업부지 발굴


1965년 김원룡 교수가 이끄는 서울대 고고인류학과팀이 부천 소사동 신앙촌의 현대 쓰레기장을 발굴했다. 적어도 발굴성과에 의하는 한, 당시 한국인은 주식이 쌀이나 보리가 아니라 라면으로 드러났다.


이는 고고학 발굴을 통해 드러난 현상만을 토대로 하는 역사의 구축이 얼마나 사실(史實)과는 동떨어진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여실히 증명한 사건이었다. 이는 나아가 세계 고고학계에 '쓰레기 고고학'이란 분야가 탄생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 신앙촌 발굴과 비슷한 맥락에서 지난 100년간 근ㆍ현대 한국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엿보기 위한 인류학적 관점을 가미한 대규모 고고학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조사대상 지역은 한국토지공사가 도새개발사업을 추진하는 서울 성동구 행당동 90-1번지 일원. 이곳은 중랑천이 한강으로 유입되는 지점으로 지금은 편평한 대지를 이루고 있지만, 100년전만 거슬러 올라가도 이곳은 인구 밀도가 대단히 희박한 농촌이었고, 서울시민에게 미나리 대부분을 공급하는 미나리꽝이 있던 지역으로 유명했다.


나아가 식민지시대에는 다수 일본인의 이주정착이 이뤄진 곳이기도 하면서, 이번 재개발을 위한 철거 이전까지 이곳에는 각종 공장건물이 무질서하게 들어찼던 곳이기도 했다. 한양대 문화재연구소가 한국토지공사 의뢰로 공사를 앞두고 간단한 시굴조사를 토대로 재개발 전체 예정지 7만4천800㎡(약 2만3천평) 중 1만4천㎡를 발굴조사했다.


그 결과 지난 100년간 이 지역의 생활 변화상이 무수한 유적과 유물을 통해 드러났다. 근ㆍ현대의 유적이 분포하는 가장 밑바닥에서는 벽체까지 비교적 온전하게 남은 식민지시대 일본인들이 세운 건축물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공중에서 내려다 보았을 때는 흡사 사과상자를 연상케 하는 구조다.


특이한 점은 흙벽돌, 혹은 철근콘크리트 벽체 군데군데 통풍을 위한 기능으로 생각되는 구멍을 뚫어놓았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이번 발굴에서 건진 유물은 수량이 막대하다. 조선후기 때 각종 생활자기를 필두로 '게타'라고 일컫는 일본식 나막신과 정종병, 약병, 요강, 안경, 체온계, 잉크병과 물감통, 매니큐어나 포마드병, 호미 등의 각종 철제 농기류 등을 골고루 수습한 것이다.


이로 인해 조사단 현장 사무실은 금세 만물상이나 고물상처럼 변했다.


특히 근대기 유물 중에는 일본 식민통치의 직접 영향을 증언하는 유물이 대거 수습됐다. 일장기와 일본군의 모습을 도안으로 넣은 도자기가 있는가 하면, 1904년 창립 이후 현재도 영업 중인 일본 도기회사 '노리타케'라는 문구를 찍은 도자기도 발견됐고, 바닥과 옆면에 '경성부' 어디라는 주소와 '본2국'으로 시작하는 전화번호를 넣은 도자기도 찾아냈다. 또 다른 유물인 '광화문 경찰교습소'라는 한자 안내판을 묵글씨로 적은 근대 목간(木簡)은 요즘 한국고대사학계에서 구세주로 등장하는 목간이 고대의 전유물만이 아님을 보여준다.


한양대 배기동 박물관장은 "이번 조사는 고고학적 방법 외에도 민속지 조사를 병행해 현지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터뷰 조사도 함께 실시했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발굴한 유물 목록을 보면 아마도 국립민속박물관은 득달같이 현장으로 달려올 만한 것들이다. 실제 18일 현장설명회에는 신광섭 민속박물관장이 다녀갔다.


신 관장은 "이번 행당지구 발굴성과는 그동안 사진자료에만 치중하던 한국 근현대 100년의 생활사를 고고학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했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