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항로개척

한부울 2009. 6. 23. 01:24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항로개척

 


1415년 포르투갈의 왕자 엔리케가 중심이 되어 서아프리카 연안의 탐험을 위한 항해가 시작되었다. 그의 항해 동기는 서아프리카의 모로코 상인이 행한 소금, 황금, 상아(象牙), 노예 등의 무역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동시에 아프리카 대륙 내지는 아시아의 어디엔가 있다고 믿은 전설적인 그리스도교왕 프레스터 존의 나라를 발견하여 그들과 동맹을 맺어 이슬람교도의 우세를 꺾으려 한 정치, 종교적인 의도도 강하게 작용하였다.


엔리케가 파견한 최초의 탐험선은 15년 카나리아 제도(諸島)에까지 항해하여, 이후 10여 년 간은 마데이라, 포르토산토, 아조레스 등 대서양 제도 및 그 근해의 답사가 진행되었지만, 1434년에 비로소 서아프리카의 보자도르곶(串)을 회항(回航)하였고, 그 이후 세네갈강, 제바강까지 남하하였다. 엔리케 왕자가 죽기까지는(1460) 코나크리 부근까지의 아프리카 서해안이 밝혀졌다.


1469년 포르투갈인의 항해가 다시 시작되어 상아해안 ·황금해안 등에 탐험선이 진출하였다. 1482년에 장래 노예무역의 중심지가 된 에루미나에 성채(城砦)가 구축되고, 같은 해 콩고 ·앙골라 지방에 발견기념비가 세워졌다. 이어 1487년 말부터 다음해 초까지 B.디아스가 아프리카 대륙 남단의 희망봉(希望峰)을 넘어 그레이트피시강까지 동진하여 인도양에 이르는 항로를 열었다.


바르톨로뮤 디아스의 희망봉 발견

 

포르투갈 군대가 바하도르 곶을 지난 시기를 전후로 엔리케는 교황 마르티누스 5세(재위1417-1431년)에게 청하여 ‘앞으로 인도까지의 구간과 인도에서 발견된 모든 토지를 포르투갈령으로 한다’는 내락을 받았다. 1493년에는 교황 알렉산드르 6세(재위 1492-1503년)가 아조레스 제도의 서쪽(서경 약 30°)을 경계선으로 그것보다 동쪽의 반구(동경약 150°까지)를 포르투갈, 서쪽의 반구를 에스파냐의 세력 범위로 하는 교황 경계선을 제안하였다. 다음 해 1494년의 ‘토르데시야스 조약’에서는 교황 경계선을 약 1600km 서쪽으로 움직인 것으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양국이 합의하였다.


포르투갈 인들은 1471년 적도를 넘어 현재의 가나 즉 황금 해안을 황금 거래와 탐험의 기지로 삼았다. 이후 서해안을 남하하여 1484년에는 자이르(콩고) 하구를 발견하여 상륙하였다. 1487년에 3개의 석주를 배에 싣고 포르투갈을 출발한 디아스(Bartholomeu Diaz : 1450-1500년)는 나미브 사막 남단에 있는 오렌지 강 하구에 도달하여 그 곳에 최초의 석주를 세웠다. 그 후 남하한 곳에서 격렬한 폭풍우에 휘말려 약 2주일 동안 육지를 볼 수 없었다. 폭풍우가 가라앉았을 무렵에 이제까지의 포르투갈 배의 상식에 따라 동진하였지만 육지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과감히 북진을 감행했을 때 마침내 육지를 발견하였다.


이렇게 해서 아프리카 대륙 남단에 도착한 것 같음을 알게 된 그들은 해안선을 따라 동진하여, 마침내 해안선이 북쪽을 향해 구부러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디아스는 아프리카의 동쪽 해안을 따라 그대로 북상하자고 제안하였지만 겁이 난 선원들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거기에 제2의 석주를 세우고 되돌아가기로 하였다. 도중에 큰 곶을 만났는데, 폭풍 때문에 가는 길에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는 데서 연유하여 ‘폭풍의 곶’이라 이름붙이고 그 곳에 제3의 석주를 세웠다. 1488년의 일이다. 귀환한 그들로부터 사정을 전해들은 포르투갈 왕 주앙 2세는 그 후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이 곶을 통과하여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한데 연유하여, ‘폭풍의 곶’이라는 이름이 부적합하다고 여기고는 Cabo da Boa Esperana(희망의 곶)라고 개칭, 그것을 ‘희망봉’이라고 이름지었다. 인도 항로를 찾는 희망을 북돋운 곶이었기 때문이다.


Cape Town 근처 해발 256M(840ft),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의 아굴라스곶의 북서쪽 160km 지점. 대서양과 인도양 사이를 항해할 때 기점으로 표시.


말라카 해협 발견 ( Strait of Malacca )

 


동남아시아 말레이반도 남부 서해안과 수마트라섬의 동해안 사이에 있는 해협(海峽). 길이는 약 800km, 너비(북부)는 300km, 평균수심은 50m이다. 동쪽의 남중국해(海)와 서쪽의 안다만해(海)를 연결한다. 연안과 중앙부에 여울이 있어 항행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극동과 유럽을 잇는 중요한 통로에 해당하며, 인도양 및 남중국해의 계절풍을 이용하는 선박의 왕래가 많다. 근세에 수에즈 운하가 개통된 후에는 그 중요성이 더욱 커졌으며, 전략상으로도 큰 비중을 지니게 되었다. 따라서, 연안에는 페낭, 말라카, 싱가포르, 팔렘방 등의 많은 역사적인 항구가 발달하였다.


※ 말라카 해협


말라카해협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사이를 지나는 길이 약 900km, 폭 65∼249km, 평균 수심 25∼27m의  국제 해협으로 매년 5만척 이상의 각종 선박이 통과  유조선 통항량은 수에즈운하의 3배, 파나마운하의 5배에 이르며, 동아시아 지역으로 공급되는 원유·LPG·LNG의 90%가 통과하고 있어 이곳에서 테러가 발생해 수송로가 봉쇄될 경우 아시아 및 세계경제에 엄청난 파급효과 예상

 

 

☞ 테러세력이 폭탄을 장착한 소형보트로 유조선을 폭파할 경우 해양오염으로 선박통행이 전면 마비되는 치명적 타격


예 : 지난 2002년 10월 아덴만 예멘 앞바다에서 폭탄을 장치한 소형보트가 프랑스 선적 유조선 림버그호와 충돌하는 해상테러가 발생,9만 배럴의 원유가 해상에 유출


전문가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의 아체(Aceh)분리 독립운동, 필리핀의 모로(Moro) 이슬람해방전선 등은 테러세력과 연계될 가능성을 지적함

 

말라카 제도(향료 제도)

 

 

동양의 산물 향료. 향료는 육류를 저장하거나 음식물의 맛을 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재료로서 후추, 계피, 육두구, 정향 등을 말하는데, 주로 인도와 실론, 말라카 제도등지에서 산출되었다.


인도항로를 발견한 포르투갈이 1511년 말라카를 공략한 직후 포르투갈 사람 안토니오 데 아부레우의 선대(船隊)가 향료제도로 향하였다. 또 그가 귀착(歸着)한 뒤 1513년에는 중국과 자바에도 선대가 파견되었다. 그의 선대 중에서 프란시스코 세란은 암보이나섬을 거쳐 향료제도 가운데 테르나테섬(Ternate)에 도착하고, 1520년에는 포르투갈군의 성채가 이 섬에 축조되었다.


그러나 1521년에는 마젤란 선대가 향료제도에 내항하고, 1526년에는 에스파냐측도 티도레섬에 요새를 축조하여 에스파냐, 포르투갈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북부에 활화산이 있는 화산섬인 테르나테섬은 유명한 향료 산지이며 몰루카 제도 중에서 최초로 이슬람교를 받아들인(15세기) 섬으로 보인다. 1522년 포르투갈인이, 1605년 네덜란드인이 향료무역을 독점하기 위하여 섬을 점령하고 성을 쌓았다. 1650년과 1679년 원주민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1680년 항복함으로씨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포르투갈인은 1550년대로부터 마카오에 동아시아 무역의 근거지를 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