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倭寇) - 일본인해적
왜구(倭寇)란, 고려와 원나라의 연합군이 일본 열도 원정에 실패한 이후인 13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한반도와 중국 대륙의 연안부나 일부 내륙 및 동아시아 지역을 침략하고 약탈하고 사람들을 납치하며 밀무역을 행하던 일본인 해적들을 가리킨다.
14세기에서 16세기의 일본은 센고쿠 시대로 천황은 막부에 실권을 잃고 각 지방으로 분열된 혼란한 시기였다. 일본 연안 일대의 생활이 궁핍한 중소 무사나 농민 및 어민 가운데 해적이 되는 자들이 생겨났다. 그들의 근거지는 막부의 통제력이 가장 약하고 한반도와 가까운 키타큐슈 연안 지역으로, 특히 대마도, 이키, 마쓰우라 등지가 주된 거점지였다.
한국에서의 이들의 활동 시기는 고려 말기에서 조선 전기에 이르는 사이에 가장 심하였고, 고려 멸망의 한 요인이 되었다. 삼국 시대에도 왜구의 침입이 있었으나, 그때만 해도 그 수와 피해 횟수는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고려 중기에 와서 갑자기 들끓기 시작하여, 고려·원 연합군의 일본정벌이 실패한 후로 그들의 노략질은 더욱 심해지고, 특히 고려 말기와 조선 시대 내내 한반도의 남부 연안 지방을 조직적으로 자주 침략하여 노략질을 일삼았다. 주된 약탈물은 식량이였으며 지방에서 조세를 거두어 서울로 올라가는 공선 등이 피해를 가장 많이 입었다. 그 규모는 100척에서 500척까지 이르는 선단을 이루어 연안 마을을 습격하는 형태였으니 때로는 내륙 깊숙이 들어오기도 하였다.
왜구들의 약탈 (14세기 회화)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기록에 나타나는 왜구의 침입은 고종 10년 5월에 왜구가 김해 지방에 침입하였다는 것이 처음이다. 이후 100여 년 동안 기록에 나타나는 왜구의 침입은 10여 차례 정도에 불과하였다. 그러다가 충정왕 2년(1350년)부터 왜구의 침입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우왕 때에 절정에 달하였는데, 우왕의 재위 14년간 왜구의 침략 횟수는 무려 378회나 되었다. 우왕 말기부터 점차 수그러들기 시작하였으나 고려 왕조가 멸망하기까지 40여 년간 극심한 왜구의 침략으로 인해 고려는 커다란 시련을 겪었다.
조선1419년(세종 1년)에는 대마도를 정벌하고 3포를 폐쇄하는 등의 강력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지만, 이후에는 부산포, 웅천, 염호 등 삼포를 개항하여 사절(使節)과 상왜(商倭)를 왜구와 구별하여 일본인들과의 정식적인 무역을 유도하는 유화책을 쓰기도 하였다. 이러한 강력한 조치와 유화책에 따른 교린 관계 정책을 펼쳤지만 삼포왜란(1510년), 사량진왜변(1544년), 을묘왜변(1555년) 등 계속적으로 크고 작은 왜변을 일으켰다.
영향 : 연해지역은 주민의 피난과 유이로 텅텅 비게 되었고 농토도 황폐화 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운로도 막혀 군수와 녹봉 등 국가 재정의 어려움을 심화시켰다. 따라서 한반도에서는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에 외교 사절을 보내어 왜구들에 대해 단속할 것을 수차례 요청하였으나 성과는 거의 없었다. 고려 말기에는 화약 무기 연구소인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화약 및 화포 등의 개발로 왜구를 격퇴하는 데 효과를 보았는데 우왕 6년(1380년)에 충남 진포를 침입한 왜구의 배 500척을 불태워 격퇴한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또한 이성계는 이때 왜구를 격퇴하는 전공을 올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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