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례(回禮)가 무엇인가?
조선왕조실록에 일본회례사(日本回禮使)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지금까지 우리가 해석한 것을 보면 일본에 답례로 파견된 사신이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에는 문제가 많다고 보인다.
왜 회례(回禮)라고 하였을까?
회(回)가 무엇인가?
단어 뜻은 돌아간다는 뜻과 되돌려질 등으로 쓰인다.
그러나 그러한 뜻을 가진 단어를 정례화 하는 곳에 쓰기에는 마땅치 않다.
쉽게 답례(答禮)라고 하면 될 것이다.
그래서 일본답례사라고 하면 듣기에도 쉽고 이해하기도 어렵지 않다.
그러나 구지 왜 回禮라고 했을까?
그것은 일본이란 주체가 위치하는 지역을 나타낼 수 있는 단어이기도하다.
대륙조선 즉 인디즈(indies) 남쪽에 위치한 일본을 찾아야 한다.
지금의 열도에 있는 일본은 1872년 이후 이동한 왜구무사정치집단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일본은 이슬람권의 나라임에 틀림이 없다.
회(回)는 전통적으로 아랍을 말하는 것이고 이슬람이다.
회례란 바로 이슬람율법에 따른 모든 예의를 말하는 것일게다.
다시 주지하는 사실이지만 조선은 아시아전역을 통치하던 거대한 나라이다.
그러한 조선에는 색목인들이 자연스럽게 공존하여 정계까지 진출하였고 정치적으로도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고 나온다.
때문에 조선사회에는 여러 방변에서 색목인 즉 서양인, 서역 이슬람교도들이 존재하였다고 해야 한다.
조선을 의지하고 있던 일본도 이슬람교도들이 주체가 된 정치세력이 아닌가 여겨진다.
지금의 열도 일본은 여러가지 종교가 혼합된 형태에 있다.
그러나 그 당시 일본은 이슬람교도들이 많았다고 해야 한다.
항해시대에 접어들면서 포르투칼인과 스페인, 네델란드인들에 의하여 예수회가 전파되었지만 그 전엔 이슬람교도들이 주도가 되었을 것이라고 판단이 된다.
14세기 초 인도북부지역을 델리 술탄국이 16세기까지 지배하게 되었고 무굴제국이 들어서면서 그 여파로 인도 동쪽으로 이슬람문명이 퍼져나가 서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말레이반도,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이슬람교가 번성하게 되었다.
그 당시 일본은 인도북부 동쪽지역 지금의 버어마, 말레이반도, 자바 등지를 거점으로 하는 나라였다고 보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때문에 그 당시 일본은 이슬람국일 가능성이 높다.
대륙조선은 일본회례(回禮)의식에 조선대왕들이 특별하게 신경을 썼던 것이라고 보여 진다.
다시 말해 회례(回禮)는 회교율식이다.
특히 조선에서 일본에 가는 회례사는 아랍계 색목인이었을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는
회례(回禮)가 어느 본에는 ‘別禮’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원예단(元禮單)의 회례(回禮)는 인삼 1백 근과 초피(貂皮) 20령(令)이고 별예단(別禮單)의 회례는 인삼 1백 근과 초피 40령이니, 도합 인삼 2백 근이라고 했다.
이것은 분명 회례에 올리는 례단(禮單)이다.
회청(回廳) 또한 회교 사원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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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례[回禮] <명사>
① 사례의 뜻으로 하는 예.
② 차례로 인사하며 도는 일. 회례-하다
회례와 일본 그리고 대마주 또한 유구국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러나 일본이나 대마주 유구가 조선에 와서는 꼭 회례하고 하여 조선도 그 회례를 배려하는 듯한 문구가 많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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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회례(回禮)검색
태종 15권, 8년(1408 무자 / 명 영락(永樂) 6년) 5월 22일(경오) 3번째기사
회례관 최재전이 일본 대내전의 사인과 포로들을 데리고 울산포에 이르러 상언하다
○日本回禮官崔在田還。 在田以大內殿使人及推刷本國被擄人四十四名, 至蔚山浦, 先遣人上言曰:
臣至日本, 觀其形勢, 大內殿當一面巨鎭, 土富兵彊, 諸酋長皆畏服。 今向本國忠誠至切, 待臣如見大賓, 燕食之設, 糧餉之贈, 皆致其厚, 及至辭別, 言辭款曲。 今來使臣, 不可以他例支待, 其所求《大藏經》, 伏望酌量行下。 臣之還也, 有倭仇羅穩五名, 隨船出來。 其仇羅穩, 壯勇無敵, 且善磨劍, 自言: “朝鮮境內可居, 則還率妻子而來。” 伏望賞給赴京。
命議政府曰: “仇羅穩, 可令與在田一時赴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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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日本) 회례관(回禮官) 최재전(崔在田)이 돌아왔다. 재전(在田)이 대내전(大內殿) 사인(使人)과 추쇄(推刷)한 본국(本國) 피로인(被擄人) 44명을 데리고 울산포(蔚山浦)에 이르러 먼저 사람을 보내 상언(上言)하기를,
“신(臣)이 일본(日本)에 이르러 그 형세(形勢)를 보니, 대내전(大內殿)이 한 방면의 거진(巨鎭)을 담당하여 땅이 풍부하고 군사가 강하여 여러 추장(酋長)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복종합니다. 지금 본국(本國)에 대해 충성(忠誠)이 지극히 간절하고, 신(臣)을 대접하기를 대빈(大賓)을 본 것 같이 하여 연식(燕食)의 설비와 양향(糧餉)을 주는 것이 모두 지극히 후하였으며, 작별할 때에 이르러 언사(言辭)가 관곡(款曲)하였습니다. 지금 온 사신(使臣)은 타례(他例)로 대접할 수 없습니다. 청구한 《대장경(大藏經)》을 작량(酌量)하여 하사(下賜)하소서. 신이 돌아올 때에 왜인 구라온(仇羅穩) 등 5명이 배를 따라 왔사온데, 구라온은 씩씩하고 용맹하여 대적(對敵)할 자가 없고, 또 칼을 잘 갑니다. 스스로 말하기를, ‘조선(朝鮮) 경내(境內)가 살 만하면 돌아가서 처자(妻子)를 데리고 오겠다.’고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상(賞)을 주어 서울에 올라오게 하소서.”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 명하였다.
“구라온은 재전(在田)과 함께 일시(一時)에 서울로 오게 하라.”
타례(他例)는 회례(回禮)이외 禮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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