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부

1989년 톈안먼 사건-Tiananmen Square protests of 1989

한부울 2009. 6. 3. 19:31
中 텐안먼 사태 20주년http://blog.daum.net/han0114/17048261

 

1989년 톈안먼 사건-Tiananmen Square protests of 1989

 

 

                                         A BBC report from June 4, 1989:

BLOOD IS on THE SQUARE” (words and music by Philip Morgan)

 

A song was heard in China

in the city of Beijing.

In the spring of 1989

you could hear the people sing.

And it was the song of freedom

that was ringing in the square,

the world could feel the passion of

the people gathered there.

Oh children, blood is on the square.

 

톈안먼 광장 전경톈안먼 사건(천안문사건, 天安門事件)은 1989년 6월 4일, 후야오방의 사망을 계기로 톈안먼 광장에서 발생한 학생과 시민의 민주화 시위를 중국 정부가 무력 진압한 사건이다.


6·4 톈안먼 사건, 6·4 사건, 천안문 사태, 북경 대학살 사건 등으로도 불린다. 애초 공식 발표로는 민간인 사망자 300여 명, 부상자 7천여 명이 발생한 사건이다. 비공식 집계로는 5천여 명 사망, 3만여 명 부상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 후 중국 공안부가 1990년 7월 10일 제5차 국무원 보고에서 정식 발표한 것을 따르면, 민간인 사망자는 875명, 민간인 부상자는 약 14,550명이었으며, 군인은 56명이 사망, 7,525명이 부상당했다.

 

 

배경


덩샤오핑(鄧小平)은 중국 공산당 내 개혁파들인 후야오방(胡耀邦)과 자오쯔양을 자신의 후계자로 정하고 그들을 정치적으로 후원하였다. 그런데 1982년 공산당 총서기에 취임한 후야오방(胡耀邦)은 덩샤오핑(鄧小平)의 기대와는 달리 사상해방, 언론자유, 개인자유의 신장, 법치주의, 당내 민주화 등 과감한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정치 개혁은 당내 보수파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후야오방(胡耀邦)은 공산당 총서기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1989년 4월 15일, 후야오방은 오랜 침묵 끝에 사망했다.


중국의 시위사태가 후야오방(胡耀邦)의 사망을 계기로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덩샤오핑(鄧小平)을 중심으로 한 실용파가 집권하면서 추진해 온 개혁·개방 정책이 중국인의 생활수준 향상도 가져왔지만 여러 정치·경제적 부작용도 양산함에 따라, 정부에 대한불만도 심해졌기 때문이다. 그 불만은 중국공산당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고, 후야오방(胡耀邦)의 정치 개혁 노선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 덩샤오핑(鄧小平)은 경제개혁을 통해 중국의 근대화와 강대국 도약을 추진하였지만 정치개혁을 할 의사는 그다지 없었던 것이다.

 

국제정세와 독일통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된 냉전구도에 지각변동을 가져오는 계기는 바로 1985년 시작된 소련의 당서기장 M.고르바초프의 개방·개혁정책이었다. 이는 사회주의 동맹국가의 운명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많은 동구국가는 소련의 개방·개혁정책을 수용하였으며 그 여파는 동독에까지 미쳤다. 동독의 정치지도부가 개방을 거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동독주민의 저항운동은 점차 거세졌다. 1988년 교회에 의한 평화운동이 억압당하는 등 동독의 정치현실에 실망한 동독주민들은 1989년 동베를린에 있는 서독 상주대표부에 대거 몰려들어 출국신청을 하였다.


동년 9월 서독정부는 동·서독 간 직접충돌을 막기 위해 헝가리와 정치적 협상을 벌여 동독인이 헝가리를 경유 서독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을 개방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와 더불어 1989년 10월 동독의 건국 40주년 기념일에 대규모의 시위가 드레스덴에서 발생하였고 이러한 저항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당서기장 E.호네커는 사임을 할 수밖에 없었고 후계자인 E.크렌츠는 무혈혁명을 시도하여 기존의 사회주의 체제에 입각한 당과 국가기관은 마비사태에 이르렀다.


1989년 11월 9일 동베를린 주민의 대규모 국경탈출을 동독정부는 아무런 통제도 하지 않았고 급기야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1989년 12월 동독정부는 베를린 장벽을 공식적으로 개방함과 동시에 특별전당대회를 열어 당서기장제 폐지, 당명 개정의 신강령을 채택하고 동독의회의 헌법상 권력독점조항을 폐지하는 등 정치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동독의 몰락과정은 동독주민이나 서독정부에 통일의 호기로 여겨졌다. 동독의 신정부 총리 모드로프는 조속한 개혁을 전제로 하여 동독의 국가유지를 희망한 반면, 서독정부는 연방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10개항 프로그램을 제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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胡耀邦 (Hu Yaobang)

  

 

후야오방(호요방, 중국어: 胡耀邦, 병음: Hú Yàobāng, 1915년 11월 20일 ~ 1989년 4월 15일)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가이다.


후난 성 창사 출신으로 일찍이 1928년 공산청년단에 가입했고, 뒤이어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후에 마오쩌둥과 주더가 이끄는 홍군에 가담하여 초급장교로 복무하였다. 1931년부터 1935년까지 마오와 주더를 대신하여 당권을 장악한 친소련성향의 지도부("28인의 볼셰비키")는 마오에 충성하던 그의 성향을 불신하여 체포하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그를 아끼던 다른 지도자의 도움으로 석방되었고, 그후에도 성향을 의심당해 대장정에도 처음에 참가를 거부당했으나, 작전중 부상당해 친구의 도움으로 부상자로서 후송되게 되었다.


이후 장궈타오의 부대의 일원으로서 대장정에 참가하였지만, 그의 부대가 국민당에 충성하는 회족 마부팡 군벌군에게 패해 포로가 되었다. 이후 마부팡의 영지에서 강제노역을 하다, 다른 포로와 함께 탈주해서 공산당 지도부가 있던 옌안으로 복귀하였다.


이후에도 계속 당에 연결된 정치장교로 홍군에서 복무하였고,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도 지방의 당과 행정기관을 오가며 일하다 1975년 중국과학원 부원장을 맡으며 중앙에 진출하였다. 1977년에는 중국공산당 조직부장의 요직을 맡으며 마오쩌둥 사후, 덩샤오핑의 지원를 받아 중국 최고지도부의 한사람으로 떠올랐고, 1981년에는 중국공산당 주석을 맡았다. 이후 주석직이 폐지되고 총서기제가 도입되어 그는 계속 총서기를 맡았다. 그는 급진개혁파로서 자유화를 시도하였으나, 보수적인 원로그룹의 역공을 받아 1987년 사임을 강요당해 자리에서 물러나고 후임 총서기는 자오쯔양이 맡았다.


1989년에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고, 그를 추모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이 5.4운동 70주년을 맞아 베이징에서 집회를 열어 전면적인 자유화를 요구하였으나, 원로그룹의 결단으로 무자비하게 진압되었고 (텐안먼사태 참조), 집회를 방문하여 이들에게 동정적 발언을 한 자오쯔양도 실각하였다.[위키백과]

 

                                                              鄧小平(左)

 

                                                       中南海의 新華門

 

                                         빌·클린턴( 오른쪽)과 악수하는 강택민

 

                                                           趙紫陽(左)

 

                               미하일·고르바초프(왼쪽)와 에리히·호네카 (Erich Honecker)

 

                                                                李鵬(右)

 

An anonymous drawing posted in a pedestrian walkway underneath Chang'an Avenue caricatures Deng Xiaoping (simplified Chinese: 邓小平; traditional Chinese: 鄧小平) (seated behind the lectern) as an old Chinese emper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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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과

 


4월 15일 - 후야오방(胡耀邦) 사망과 함께 베이징 시를 중심으로 학생, 시민 시위 시작. 이들은 후야오방(胡耀邦)의 당 총서기직 해임 이유를 밝힐 것과 그의 명예 회복을 요구.

4월 21일 - 경찰과 충돌이 빚어지면서 시위 참여 대학이 10여 개로 늘어났고 베이다오(北道)를 주축으로 한 47명의 저명한 학자들이 학생운동 지지 성명 발표.

4월 22일 - 후야오방(胡耀邦) 장례식. 시안(西安)에서 군중이 10여 대의 차량에 불을 지르고 성(省) 정부를 습격하며 공산당 타도 외침.

4월 26일 - 최고 실권자 덩샤오핑(鄧小平), 리펑(李鵬) 총리에게 시위 강경 진압 지시. 인민일보는 이 날짜 사설을 통해 학생 시위를 ‘반혁명 폭동’으로 규정.

5월 13일 - 학생 수천 명 천안문 광장서 무기한 단식농성 시작. 시위 인원 며칠 새 200만 명으로 급증.

5월 19일 - 자오쯔양, 단식 농성장 방문해 학생들에게 자신이 너무 늦게 온 것에 대해 사과.

5월 20일 - 베이징 일부 지역에 계엄령 선포.

6월 4일 - 0시 57분. 계엄군 본격적인 진압작전 개시. 중국 정부, 진압과정에서 민간인 300여 명이 사망하고 7천여 명이 부상했다고 발표. 비공식 집계로는 5천여 명 사망, 3만여 명 부상이라는 주장도 있음.


무력진압


1989년 6월 4일 오전 1시 40분, 약 10만에 가까운 인민해방군은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위대들이 밤을 세우고 있는 천안문 광장을 습격했다. 인민의 군대인 인민해방군은 시위대를 향해 총을 바로 겨누고 사격했으며 광장은 순식간에 피바다를 이루었다. 이로써 약 50여 일간에 걸친 중국인민들의 요구는 막을 내렸다.


다음날 중국정부는 이 사건에 대한 중국 내 언론의 보도를 통제하면서 (6월4일 천안문 광장에서는 한사람의 사망자도 없었다. 학생들은 해산했고 총에 맞거나 전차에 치인 학생은 없다. 폭도들이 소란을 피운 곳은 다른 곳이다. 폭도들은 군으로부터 총을 탈취하여 국가를 전복시키려 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사망자는 300여명이다. 희생자의 절반은 군인이며 절반은 폭도 및 질 나쁜 구경꾼들이다)라고 발표했다.


4일 한밤중의 대살육전이 끝나고 날이 밝아지자 4일 오전 계엄부대 사령부는 (수도에서 어제 저녁중대한 반혁명 동란이 발생했다. 폭도들은 광기의 상태로 해방군 장병들을 습격하여 무기를 빼앗고 군용차를 불 질러 바리케이트를 쳤으며 해방군 장정을 연행하는 등 중화인민공화국을 전복하고 사회주의 체제를 뒤엎으려고 획책했다)라고 하면서 천안문의 학살을 정당화했고, 천안문 시위대들을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폭도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천안문 광장에서 죽음을 간신히 피한 한 학생은 홍콩으로 탈출하여 기자들에게 그 날 밤의 상황을 생생히 증언했다.(많은 동료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전차에 깔려 갈기갈기 찢겨졌다. 군대는 짖겨진 시체를 삽으로 모아 포대기에 넣어 불태웠다)


이날 사건의 희생자는 중국당국의 발표, 대만 그리고 외국언론에 따라 각각다르다. 정확한 보도로 정평이 있는 영국 BBC 방송이 6월 7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사망자만 7천여명 (그중 군인이 1천여명)에 이르렀다. 당연히 부상자는 수만 명에 이르렀을 것이다. 천안문 광장에서 몸을 피한 시위대 지도부들 특히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대표들에 수배령이 내려졌으며 잡히면 총살당했다. 이것이 89년 봄 중국에서 전개되었던 민주화 운동의 비극적인 최후를 장식하는 천안문 사건이다. 이 사건은 어떤 면에서 10여년전인 1976년 주은래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위집회와 비슷했다. 두 사건 모두에 관련된 사람은 등소평이다. 1976년에는 시위대를 배후 조정한 혐의로 실각했지만, 1989년 사건 때 그는 중국 최고지도자로서 시위대를 무력 진압하는 위치였다.


학생들은 천안문 광장에 모여 무엇을 요구했는가? 북경대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시작되었고 많은 시민들이 합세하여 어떤 때는 1백만 명이 넘는 군중들이 천안문 광장에 모였던 천안문 시위의 직접적인 계기는 중국공산당 총서기를 지냈던 호요방(胡耀邦)의 죽음이었다. 그는 4월 15일에 죽었는데, 그때부터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것이 천안문 광장의 약 50여일 일간에 걸친 긴 시위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호요방(胡耀邦)의 죽음은 하나의 죽음은 하나의 계기였을 뿐,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주의 중국의 체제에서 비롯된다. 중국은 모택동이 죽고 등소평이 실권을 장악한 이후 10여년간 개혁과 개방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러한 개혁 및 개방정책은 완고한 사회주의 체제에 묶여있던 중국을 커다란 혼란 속에 빠뜨렸다. 1980년대 중반에 인민공사가 해체되면서 개인 농, 즉 사유제하의 농민이 생겨났으며 생산량도 향상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농산물의 생산량이 무한히 증가할 수는 없었다. 중국정부는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농산물 수매가격을 약 30% 가량 전체적으로 인상했고 이로 인해 중국정부의 재정상태가 악화되었다.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화폐를 발행하게 되고 그것은 바로 물가상승, 즉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했으나 이 돈은 일부기업과 당 간부수중에서 놀아 나게 되어 경제에 큰 보탬이 되지 못했다.


어떻든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중국경제는 상품시장 및 시장경제가 발달했다. 당연히 배금주의적인 풍토가 만연하게 되었으며, 이런 변화에서 당 간부들이나 몇몇 사람들은 엄청난 재산을 모으게 되어 심각한 소득 불평등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1988년 중국공산당 13기 삼중전회에서는 긴축경제정책이 채택되었다. 개혁과 개방은 중국경제를 더욱 혼란에 빠뜨렸고 이제다시 긴축경제정책을 펴게 되자 미래에 대한 전망이 아주 불투명하게 된 것이다. 거기에 당 간부들은 특권신분층으로 지위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개방정책에 의해 새로 세워지는 회사들은 당 간부와 결탁할 수밖에 없고, 당 간부들은 권력뿐 아니라 개인의 부도 증대시켰다. 고위 당 간부들의 자식들은 그 부모를 이어 요직을 차지했다.


대학생들은 부패한 당 간부에 의한 국가경영으로 인민들만 고통을 받고 있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천안문 민주화 시위가 있기 전부터 이미 일부 지식인들로부터 공산당의 통치에 대한 비판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과 개선요구는 공산당 중앙정부에 의해 탄압을 받았으며, 그 결말이 천안문의 비극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천안문 민주화 시위의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했던 호요방(胡耀邦)의 죽음은 1989년 4월 15일 이었다. 호요방(胡耀邦)은 당면의 과제를 놓고 당시 중앙당 간부들이었던 조자양, 이붕, 양상곤, 등과 격렬한 토론을 벌리다 졸도하여 그대로 죽고 말았다. 하생들은(죽어야 할 사람은 죽지 않고 죽지 않아야 할 사람이 죽었다)라고 애석해했다. 죽어야 할 사람이라고 지칭한 것은 등소평이다. 그의 장례식을 계기로 북경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중앙당의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가 시작되었다. 이들의 집회 장소는 중국의 상징인 천안문 광장이었다. 그들은 호요방(胡耀邦)의 재평가, 명예회복과 언론보도의 자유, 그리고 제반 민주화 조치를 요구했다.


학생들의 움직임을 보고받은 등소평은(단순한 학생운동이 아니라 동란이다)라고하면서 강력한 진압을 명령하였다. 이를 이어받아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이 학생운동은 비합법 조직의 계획적인 음모에 의한 동란으로 규정하고 강력하게 비판, 학생들을 더욱 자극했다.


시위대는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났다. 중국을 공식방문하고 있던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천안문 광장에 있는 인민영웅기념비에 헌화하기로 예정이 잡혀있던 5월 17일에는 1백만의 인파가 모여들었다. 결국 고르바초프는 이 헌화계획을 취소하게 된다. 시위대의 행위에 동정적이었던 총서기 조자양은 천안문 광장의 시위대를 방문하여 눈물을 글썽이며 학생들의 시위가 정당하다고 위로했다. 그는 실권자인 등소평에 대항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 중앙에 의해 조자양은 연금 상태에 들어가 실각되고 이붕 수상은 시위대에 대한 강경진압을 명령했다. 5월 20일 북경의 중요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군대는 시위대를 포위했고 포위된 상태에서도 북경 중앙미술학생들은 민주의 여신상을 만들어 천안문 광장에 세웠다. 그러나 민주의 여신상은 군인들에 의해 넘어뜨려졌으며 수많은 학생들이 희생되고, 민주를 부르짖던 시위운동은 엄청난 희생자를 낸 채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되었다.

 

 

 

Zhao Ziyang speaks on 19 May 1989. Behind him, the State Council Premier, Wen Jiabao, is present (2nd from right in black). This was Zhao's last public appearance before he was placed under house-arrest, where he remained until his death

 

[趙紫陽]1987년부터 1989년까지 중국공산당 총서기를 맡았고, 1989년 톈안먼 사태 때 무력진압에 반대하다가 실각했다. 1989년 5월 19일 이후 계엄령 선포에 반대했던 자오쯔양(趙紫陽)은 당 지도부 내에서 고립되었다. 계엄령 선포저지에 실패했던 5월19일 새벽 4:45, 그는 천안문 광장으로 나와 학생들에게 눈물로 호소하였다.

 

“ 죄송합니다. 여러분, 제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 상황이 아주 안 좋습니다. 제발 광장을 떠나주십쇼! ”

 

이후 그는 당 중앙위 총서기 직에서 물러나길 바랐으나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덩샤오핑과 보수파 지도부는 그를 체포하였고, 2005년 1월 17일, 그가 숨을 거둘 때까지 가택연금의 상태에 있었다. 심지어 그의 죽음 뒤에도 그는 복권되지 못하여 그의 장례식은 후진타오 정부의 철저한 감시 속에 가족끼리 조용히 치러 졌다.

 

영향


현재


2005년 11월 18일 ‘후야오방 기념대회’를 시점으로, 후진타오 중국 주석이 후야오방 전 총서기의 복권을 조심스레 추진하고 있으나, 여전히 중국에서 천안문 사태를 언급하는 것은 위험한 일로 되어 있다. 후야오방에 대한 재평가는 곧 천안문 사태의 재평가로 이어지기 때문에 쉽게 손을 댈 수 없는 뜨거운 감자이다. 지금도 매년 6월 4일을 전후하여 천안문 광장에는 중국 공안이 대규모로 배치되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 검색엔진 구글에서도 중국정부의 요청으로 중국어 구글에서는 천안문사태에 대해 정보검색을 하지 못하게 한 것으로 알려졌다.[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