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무와 조선시대 춤
[오마이뉴스] 2009/02/23 16:56 이충렬
어제 평양성 그림을 보면서 고구려의 옛모습을 조금 엿볼 수 있었다. 이번에는 또 다른 평양성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처용무를 통해 신라의 흔적을 소개한다.
[클릭원본]
전(傳) 김홍도(1745 ~ 1806 이후) <부벽루 연회도> 종이에 채색 71.2 x 196.6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 그림은 얼마 전에 포스트했던 '평양감사 할 만했네'에서 소개했던 <평양감사 향연도> 3점 중의 한 점인 <부벽루 연회도>이다. 부벽루를 어제 소개한 <퍙양도>에서 찾으면, 9폭에 있다.
<평양성> 9폭 부분도. 오른쪽 위의 탑 앞이 부벽루이다.
일제강점기 시대의 엽서에서 보이는 부벽루와 영명사.
일제강점기 때의 부벽루
부벽루 연회 부분. 처용무를 추고있다. 오른쪽이 영명사이다.
구경꾼이 꽤 많다. 아래 확대이미지에서 자세한 표정들을 볼 수 있다.
연회 세부도
맨 앞이 무고(舞鼓)춤, 가운데에 검무, 처용무, '평양 감사' 바로 앞이 헌선도, 모두 4가지 춤이 담겨있는데, 실제 행사에서는 따로따로 춤을 췄지만, 한꺼번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먼저 헌선도 부분을 소개한다.
'헌선도' 춤. 고려때부터 내려오는 궁중무용으로,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한다.
<원행을묘정리 의궤첩> 중 제 3면 <헌선도> 판본채색 24.6 x 16.7cm (개인소장)
정조의 을묘년(1795년. 정조 19년) 화성행차를 기록한 의궤의 제 3면에 소개된 작품으로, 혜경궁 (홍씨) 회갑잔치의 한 장면이다. 가운데 의자에 혜경궁이 앉아 있었지만, 임금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모습을 그리지 않은 것이다.
의궤의 기록에 의하면, 앞에서 노래한 두명은 경기도 기생 덕애(47세) 와 화성기생 계섬(60세)이다. 그외에 한양의 침선노비 채단(40세), 화성의 모애(35세), 한양기생 덕애(47세), 한양 침선노비 창성(28세), 화성의 복취(21세), 한양 의녀 상애(18세), 한양 의녀 철옥(25세), 화성의 윤애(27세), 한양 의녀 철옥(25세)이라고 자세하게 밝히면서, 그들의 의상에 대해서도 매우 상세하게 기록했다.
도판 : <정리의궤> 출처 : 한영우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효형출판)
의궤는 의식과 궤범의 줄인 말이다. 왕실에서 중요한 의식이 거행되면 그에 대한 기록을 그림과 글로 남겨 다음 행사 때 참고하게 했고, 이 기록과 그림이 담긴 책을 의궤라고 했다. 그래서 의궤에는 조선왕조 600여년에 걸친 왕실의 주요 행사 즉, 왕과 왕비의 책봉, 왕실의 혼인과 장례, 왕과 세자의 책봉, 궁중 잔치, 궁궐 건축 등 다양한 국가 행사가 그림과 함께 담겨있다.
이런 의궤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어, 유네스코에서는 2007년 조선왕조 의궤를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병인양요 때 강화도 사고에서 약탈해 간 의궤 중 이미 반환한 1권을 제외한 296권을 아직 반환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프랑스에서 갖고 있는 나머지 의궤 296책도 국내로 환수될 기회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1993년 프랑스의 미테랑 당시 대통령은 독일 일본과 치열한 경합하던 경부 고속철도 차량사업을 프랑스의 테제베(TGV)가 따내도록 도우려는 의도에서 297권의 의궤 중 한 책인 <휘경원원소도감의궤>를 반환하면서 나머지 296책의 의궤도 반환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이때 '칼자루'를 쥐고 있던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의궤를 모두 반환해야 도장을 찍겠다고 했으면, 나머지 296권도 반환했을 가능성이 많다. 당시 프랑스에서 의궤반환을 반대한 사람은 프랑스 국립박물관 직원 정도였고, 프랑스는 자국의 TGV 계약에 몹시 조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휘경원원서도감의궤> 한 권만 받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 후 프랑스는 아직까지 296권을 반환하지 않고 있다.
나는,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의궤의 역사적 중요성과 가치를 몰랐기 때문에 '천금의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하면서, 역사와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역사의 죄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울 시장 당시 숭례문 개방을 지시한 지금 대통령도, 숭례문 방화에 대한 역사적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평가를 받을 날이 틀림없이 온다고 생각한다.
처용무와 검무, 무고(舞鼓) 부분도.
도판 <정리의궤> '무고' 춤 부분. 출처 :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무고는 고려때 춤으로, 화려함이 춤의 자랑이다.
도판 <정리의궤> '검부' 부분. 출처 :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처용무는 신라시대 때부터 시작된 춤으로, '나쁜 귀신을 쫓아내고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춤'으로, 처용의 가면을 쓴 다섯명이 중심이 된다.
<원행을묘정리 의궤> 중 제 14면 <처용무> 판본채색 24.6 x 16.7cm (개인소장)
도판 ; <정리의궤> '처용무' 부분. 출처 : <정조의 화성행차 그 8일>
정조의 을묘년(1795년. 정조 19년) 화성행차를 기록한 의궤의 제 14면에 소개된 작품으로, 혜경궁 (홍씨) 회갑잔치의 한 장면이다.
장득만(1684 - 1764) 정홍래(1720 - 1791이후) 외 2명의 화원 <기사경회첩> 중 처용무 1744 -1745년 사이에 제작 견본채색 43.5 x 67.8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영조 20년인 1744년, 신사철 외 5명의 신하가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여 4명의 화원이 어명을 받아 행사의 진행을 그린 화첩 중, 처용무를 추면서 연로한 대신들을 위로하는 장면이다.
기로소는 조선시대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기구로, 문과 출신의 정2품 이상 전직·현직 문관으로 나이 70세 이상인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으며, 이들을 기로소당상이라 하였고 인원 제한은 없었다. 청사는 서울 중부 징청방(澄淸坊)에 있었다.
태조 3년(1393년)에 시작된 기로연 행사는 임금이 환갑이 되어야 열렸기 때문에, 조선시대 통털어 태조, 숙종, 영조 때만 열렸다.
기로연 화첩은 여런 첩 제작되어 한 첩은 기로소에 보관하였고, 기로소에 들어가는 대신들에게도 나눠줘서 가보로 전수되었기 때문에, 같은 기로연 화첩은 여러 점이다.
부분 확대
김진녀, 장태흥, 박동진, 장득만 등 합작 <기로사첩> '경현당연회'
숙종 45년인 1719년의 4월 17,18일 이틀에 걸쳐 진행된 기로연 행사를 그린 화첩 중 처용무가 나오는 면이다. 이 행사때 기로소에 들어간 대신들은 모두 11명이었고 그래서 모두 12첩의 화첩이 그려졌고, 현재 4첩이 전해진다.
처용의 가면은 조선 초 <악학궤범>에도 그려져 있다. 처용무는 중요무형문화재 39호이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라 헌강왕 때 처용이 부른 8구체 향가는 아래와 같다.
서울 밝은 달밤에 밤 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것인데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래 내 것이지만 빼앗걌으니 어찌하리.
[오마이뉴스] 이충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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