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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군역사서에서 극찬한 이순신

한부울 2009. 1. 27. 17:19
 

미 군역사서에서 극찬한 이순신



Korea’s Legendary Admiral

Barry Strauss

(from MHQ: The Quarterly Journal of Military History Summer 2005 (Volume 17,

Number 4: 52-61).)


One man had already carved his place in history. The other was an obscure naval officer. one man held the proud title of Regent of Japan, earned by conquering that entire island nation, which he unified after a long period of feudal wars. The other had limped through a troubled career to the mere admiralship of one part of the coast of a single province of Korea. one man entertained the Emperor of Japan in his palatial house called the Mansion of Pleasure; the other fine-tuned the details of cooking rice for the troops. one man la-unched a huge land-sea invasion force. The other had just 24 warships at his disposal when the conflict began. one man plotted strategy from the rear, in godlike detachment, while the other shared enough of his men’s risks to take an enemy bullet in his shoulder. And yet the humble commander outfought and outfoxed the Regent and, in the end, the path of empire changed course.


한사람은 역사에 이미 자기 자리를 새겨놓았다. 다른 한사람은 잘 알려지지 않은 수군 장수이다. 한사람은 오랜 세월의 봉토 전쟁후 통일시킨, 전 섬나라를 정복해서 얻은 일본의 섭정이라는 자랑스러운 직위를 가졌다. 다른 한사람은 시련많은 경력을 느리게 통과해서, 한국의 한 지방의 해안지역 한부분의 단순한 제독직에 이르었다. 한사람은 오락관저라고 불리는 자신의 호화로운 주거지에서 일본의 황제를 접대했다; 다른 한사람은 군대를 위한 밥을 짓는 세부 기술을 손보았다. 한사람은 거대한 육-해 침략군을 시작했다. 다른 한사람은 전쟁이 시작되었을때 수하에 단 24척의 전선이 있었다. 한사람은 신같은 초연함으로 뒤에서 전략을 계획했고, 다른 한사람은 그의 어깨에 적의 총알을 맞을만큼 부하들의 위험을 충분히 같이 나누었다. 하지만 그래도 겸양한 지휘관은 섭정을 이겼고, 쉽게 따돌렸으며, 종국에는 왕국의 진로가 방향을 바꾸었다.


The Korean admiral’s name was Yi Sun-Shin (1545-1598). He rode to glory when the Japanese la-unched a full-scale invasion of Korea in 1592, the brainchild of the Regent, Toyotomi Hideyoshi (1536-1598). There followed over six years of war up and down the Korean peninsula. In the West the war is known, if it is known as all, as the Hideyoshi Invasions or the Imjin War, but the latter is a pale translation of the Korean name: “the Japanese-started Invasion of the Year of the Dragon.” The Japanese call it the “Choson Campaign”--as Korea was then called. The Chinese have a name for it too— “the Eastern Pacification”--and not merely because they were keen observers. As in the Korean War of 1950-1953, so in the 1590s, war in Korea led to Chinese intervention and on a massive scale. To Koreans, the Hideyoshi Invasions — as we may as well call the war – is one of the major events of their history. They see it as a devastating, humiliating, but heroic struggle that drove out the invader, saved the nation, and gave rise to one of the country’s heroes: Admiral Yi Sun-Shin.


한국 제독의 이름은 이순신 (1545-1598) 이었다. 그는 일본인들이 1592년 섭정 토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 의 독창적인 계획인 한국에 대한 전면적 침략을 일으켰을때 영광을 얻게 되었다. 한국 반도의 위로 아래로 6년 이상의 전쟁이 뒤따랐다. 서양에서는 전쟁은, 알려졌다면, 히데요시의 침략, 또는 임진란으로 알려졌다, 후자는 한국인 이름의 엷은 번역이다: ‘일본이 시작한 용의 해의 침략’. 일본인은 이것을 ‘조선 전투’라고 부른다 –조선- 그당시 한국은 그렇게 불리었다. 중국인도 그것에 붙인 이름이 있다 – ‘동양 평정’ – 그들이 단순히 예리한 관찰자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1950년에서 53년의 한국전처럼, 1590년에 한국의 전쟁은 거대한 규묘의 중국인의 개입으로 이어졌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히데요시 침략은 – 우리는 전쟁이라고 할수도 있는- 그들의 역사의 주요사건의 하나이다. 그들은 그것을 충격적이고, 굴욕적으로 보지만, 침략자를 몰아낸 영웅적 분투는 나라를 구하고, 국가의 영웅중의 한사람을 낳았다 – 이순신 제독.


Admiral Yi is remembered today in South Korea as a mythic figure like George Washington. A man whose statue stands in nearly every city and town in the land is likely to be the subject of tall tales. Yet there is no need to exaggerate Admiral Yi’s achievements. Few commanders in history, whether on land or at sea, have ever accomplished as much. A list of his qualities reads like a roster of the complete general:

he was patriotic, self-sacrificing, a shrewd strategist, a tactician who smoothly mixed courage and caution, a technological innovator, a superb quartermaster, a fine administrator, a natural leader of men. Trained in land warfare, he was flexible enough not merely to adapt to the sea but to master it. He knew how ships worked and made them work better; he kept his eyes on the complicated tides and currents off Korea’s coast and used them to his advantage against Japan.


이제독은 오늘날 남한에서 조오지 워싱톤처럼 신화적 인물로 기억된다. 동상이 본토의 거의 모든 도시와 동네에 서있는 그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의 주제가 되기 쉬울것이다. 그렇지만, 이제독의 업적을 과장할 필요는 없다. 역사에 있어, 육지에서건 바다에서건, 그렇게 많이 이룬 지휘관은 거의 없다. 그의 특성의 목록은 완벽한 장군의 명부같이 읽어진다. 그는 애국적이고, 희생적이고, 교묘한 병법가이고, 용기와 경계를 매끄럽게 조화시킨 책략가이고, 기술적 개혁가이고, 특출난 보급장교이고, 훌륭한 행정가이고, 부하들의 타고난 지도자였다. 그는 육전에서 훈련받았지만, 바다에 적응했을뿐 아니라 그것에 정통할 정도로 융통성이 있었다. 그는 선박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았고, 그것들이 더 잘 작동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한국 해안의 복잡한 조수와 해류에 유의해서, 그것을 일본에 대항해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했다.

 

His story begins in February 1591, when Yi Sun-Shin, then 45 years old, was appointed Fleet Admiral of the eastern coast of Cholla Province in southwestern Korea. A month before, across what Koreans call the East Sea and Japanese call the Sea of Japan, a remarkable event took place. The warlord Hideyoshi became master of all Japan, after having obtained the surrender of his last enemy’s fortress, which he had besieged. By force of arms, in years of fighting, he had unified the islands.

Less than a year later, in autumn 1591, Hideyoshi gave the order for a new military undertaking, a huge xpedition abroad. Some evidence suggests that he had been planning this campaign already for many years. With more than 500,000 now- unemployed soldiers, it was perhaps inevitable that Hideyoshi would divert military energies outward rather than risk the outbreak of civil war at home. Perhaps it merely reflected his huge ambition.


그의 이야기는 45세된 이순신이 한국 남서쪽 전라도의 동쪽 해안의 함대 제독으로 임명되었던 1591년 2월에 시작한다. 그 한달전 한국인이 동해라 부르고, 일본인이 일본해라 부르는 곳 너머에서 놀라운 사건이 터졌다. 군벌 히데요시는 그가 포위한 마지막 적의 요새의 항복을 얻어낸후, 전 일본의 대장이 되었다. 몇년간의 전투를, 군력으로 그는 섬들을 통일했다.


일년도 못되서 1591년 가을, 히데요시는 새로운 군대의 시도, 거대한 외국 원정의 명을 내렸다. 어떤 증거는 그가 이전투를 이미 수년간 계획해왔다고 암시한다. 이제 50만명이상의 직장을 잃은 군인들로, 히데요시가 안에서 내전 발발의 위험을 감수하기 보다는 군의 에너지를 밖으로 돌리려고 한것은 아마도 불가피했을 것이다. 아마 그것은 단순히 그의 거대한 야심을 반영했을 것이다.


Hideyoshi appears to have believed in his own invincibility. He had risen from obscurity, from the lowly status of a peasant. Canny and brilliant, Hideyoshi had a lean and hungry look out of Shakespeare. He was short and thin and his sunken face earned him the unflattering nicknames of “monkey” and “bald rat.”

A huge force was gathered for Hideyoshi’s expedition. A base was constructed in the southern port city of Nagoya. Special gold and silver coins were issued. Orders were given for soldiers and sailors, ships and weapons, cargoes and commanders. Hideyoshi himself did not take part in the invasion but his generals included the leading daimyo, that is, feudal lords, of western Japan. Chief among them were Kato Kiyomasa (1562-1611) and Konishi Yukinaga (ca.1558-1600). They were personal rivals who could hardly have been more different, since Kato was a Buddhist of the traditional samurai or warrior class while Konishi was a Catholic and son of a wealthy merchant. Christians were heavily represented in the invasion army, since many of the daimyo of western Japan had converted.


히데요시는 자신의 불패를 믿었던것 같다. 그는 무명의 농부의 천한 신분에서 출세했다. 영리하고 명석한 히데요시는 여위고 허기진 세익스피어의 경계심을 가졌다. 그는 키가 작고 말랐으며, 그의 들어간 얼굴은 그에게 ‘원숭이’ 와 ‘대마리 쥐’ 하는 노골적인 별명을 얻게했다. 거대한 군대가 히데요시의 원정을 위해 집결되었다. 진영은 나고야 남쪽 항구도시에 건설되었다. 특별한 금과 은 동전들이 제조되었다. 병사들과 수병들, 배와 무기들, 짐과 지휘관들을 위한 명이 주어졌다. 히데요시 자신은 침략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의 장수들은 중견 다이묘 – 일본 서쪽의 영주들 -를 포함했다. 그들중 우두머리는 가토 기요사마(1562-1611) 와 고니시 유키나와 (ca.1558-1600) 였다. 그들은, 가토는 전통적인 사무라이나 무사 계급의 불교신자였고, 고니시는 카톨릭 신자이고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으므로 더이상 다를수 없는 개인적 라이벌이었다. 서일본의 많은 다이묘들이 개종했기 떄문에 기독교인들은 침략군에 비중있게 참여했다.


On May 23, 1592, the vanguard of the Japanese army, 150,000 men strong in all, began landing in southern Korea near Pusan. They had just crossed the Tsushima Straits, a treacherous waterway, 180-miles wide, that separates Korea and Japan. It was the beginning of a vast undertaking: ambitious, unabashedly aggressive, and stunning in its vanity and ignorance.

Toyotomi Hideyoshi aimed at nothing less than the conquest of all China, then ruled by the Ming Dynasty (1368-1644). He sometimes spoke of capturing India too. He is supposed to have said of invading China that, “To take by force this virgin of a country, Ming, will be [as easy] as for a mountain to crush an egg.”

Korea was all but an afterthought in Hideyoshi’s plans. Of relatively little value to him in and of itself, Korea served a strategic purpose as a land bridge between Japan and China. Korea was, as a later Chinese ruler would say, “the jaws of the dragon’s mouth.” A modern Japanese analyst turned the matter around by describing Korea as “a dagger pointed at Japan’s heart.”


1592년 5월23일, 강한 15만명의 일본군의 선봉은 부산가까이 한국 남쪽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방금 한국과 일본의 가르는 180마일 넓이의 신뢰할 수 없는 수로, 대마도 해협을 건너왔다. 그것이 거대한 시도의 시작이었다; 야심적이고, 염치없이 저돌적이고 그 헛됨과 무지에 있어 놀라운 시도.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적어도 그때 명왕조(1368-1644) 에 의해 통치되는 전 중국의 정복을 목적으로 했다. 그는 가끔 인도 점령에 대한 것도 얘기했다. 그는 중국을 침략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것으로 생각된다, ‘이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나라 명을 무력으로 진압하는것은 산으로 달걀을 깨는것처럼 쉬울것이다’.

 

한국은 히데요시의 계획에는 뒷 궁리밖에 아니었다. 그에게 비교적 적은 가치로, 한국은 일본과 중국간의 육교로의 책략적 목적의 역활을 했다. 한국은, 나중에 중국 통치자가 말하듯, ‘용의 입의 턱(좁은입구)’ 이었다. 근대 일본 분석가들은 한국을 ‘일본의 가슴을 겨냥한 단도’라고 묘사함으로서 사건을 변절시켰다.


To invade China in 1592, the Japanese would have to march north up the Korean Peninsula, but they did not expect any difficulties along the way. For all practical purposes, Korea was disarmed. The Korean state or Choson, as it was then called, was an agrarian and bureaucratic monarchy, ruled from the capital city, Seoul, by King Sonjo (r. 1567-1608).


The Korean elite prized learning and courtliness; they looked down on military virtues. As a result, Korea had virtually no full-scale field army. An enormously powerful class of landowning nobles ruled the provinces and kept the power of the central government limited. Korea was not, however, without defenses. A combination of geography, culture, technology, and diplomacy made Korea potentially a formidable enemy, even without an

army.


1592년에 중국을 침략하기위해, 일본은 한반도의 북쪽으로 전진해야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는데 어려움을 예상하지 않았다. 실제로는 한국은 비무장이었다.

 

한국, 또는 그때 한국이 불린 조선은, 수도인 서울에서 선조왕 (r. 1567-1608)에 의해 통치되는 농업의 관료적인 군주국가였다. 한국 지식인들은 배움과 예의바름을 존중했다; 그들은 군인의 덕을 경멸했다. 그 결과로 한국은 사실상 전면적 규묘의 야전군이 없었다. 굉장히 힘있는, 땅을 소유한 귀족계급들이 지방을 통치했고, 중앙의 정부의 힘을 제한했다. 하지만 한국은 방어가 없는것은 아니었다. 지리, 문화, 기술, 그리고 외교는 어쩌면 한국을 군대가 없이도 만만치 않은 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The land itself was Korea’s first defense. The Korean peninsula’s roughly 85,000 square miles (about the size of the states of New York and Pennsylvania combined) are almost entirely mountainous and in 1592 Korea lacked good roads. An invading army, if forced to bring its supplies overland to China, would find the going slow and frustrating. To make matters worse, the Korean people were tough and deeply patriotic. Effective leadership could organize them into guerrilla soldiers, who could attack Japanese supply dumps, raid Japanese columns on the road, and deny the Japanese access to the countryside and its food.

The obvious alternative for Japan was to move as much manpower and supplies by sea as possible. That, in turn, required merchant ships and a navy to protect them but Japan was not a naval power. Paradoxically, although Japan was a chain of islands, it was land power and not sea power that the Japanese had built up. Few of the ships in Hideyoshi’s armada were fast or maneuverable. In fact, most were little more than transport vessels. At sea, Japan was vulnerable.


땅 자체가 한국의 첫 번째 방어였다. 한반도의 대강 8만5천 평방마일 (뉴욕주와 펜슬베니아주를 합친 크기) 은 거의 전부가 산지였고, 1592년 한국은 좋은 도로가 부족했다. 침략군은 보급품을 중국으로 육지를 통해 공급해야 한다면, 느리고 좌절적이라는 것을 발견할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한국인들은 거칠고 깊이 애국적이었다. 효과적인 지도력은 사람들을 유격대원들로 조직해서, 일본의 보급짐을 공격하고, 길에서 일본종열을 기습하고, 시골과 식량에 일본인들이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수가 있었다.

 

일본에게 명확한 대안은 가능한한 많은 인력과 공급품을 바다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상선과 그들을 보호할 수군이 필요했다, 하지만 일본은 수군력이 강하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일본은 섬의 연속이었지만, 일본이 쌓은것은 육지 힘이었지, 바다 힘이 아니었다. 히데요시의 무적함대에 빠르고 조종하기가 쉬운 배는 거의 없었다. 사실상, 대부분은 운송선박과 거의 마찬가지였다. 바다에서 일본은 취약했다.


Korea, by contrast, had a strong naval tradition and genuine warships. True, the Korean navy in 1592 was relatively small and inexperienced, but sound tactics and inspiring leadership could give Korea the edge. The defenders could snap the invaders’ naval lifeline. By doing so, they would close off Japan’s main avenue of advance and resupply.

Japanese strategy would face a crisis.

Diplomacy could turn that crisis into a disaster. For centuries, Korea had enjoyed close relations with China. In western terms, we might say that China was the suzerain and Korea was its vassal. But the reality was both tighter and looser. In terms of theory,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countries was based on a family model. The Koreans spoke of their relationship to China as sadae, that is, “serving the superior,” as a younger male might serve an older male in a traditional family.


한국은 그 반대로, 강한 수군 전통과 진정한 전선들이 있었다. 물론, 1592년의 한국 수군은 비교적 작고 경험이 안 되어 있었지만, 온전한 전법과 분발케하는 지도력이 한국에게 우위를 줄 수 있었다. 방어자는 침략자들의 수군생명선을 물어뜯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은 일본의 진전과 재공급의 주요통로를 차단할 것이었다. 일본 전략은 위기를 직면할 것이었다.

 

외교는 일본의 그 위기를 재난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몇 세기를, 한국은 중국과 가까운 관계를 누렸다. 서구 의미로 우리는 중국은 영주이고 한국은 그 가신이었다고 할 수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더 엄격하고 동시에 더 느슨했다. 이론적으로, 두 나라의 관계는 가족모델에 기인했다. 한국 사람들은 중국에 대한 그들의 관계를, 전통적인 가족에서 젊은 남자가 나이든 남자를 섬기듯, 사대, 그 뜻은 ‘위의 사람을 섬긴다’라고 말했다.


This relationship brought practical benefits to both parties. China gave Korea autonomy in its own affairs in return for loyalty in foreign relations. Korea got the benefit of a powerful Chinese army to defend it without the political and financial burden of a big Korean defense establishment. For its part, China was guaranteed a friendly and subservient state to its south. Ever since the establishment of the first Chinese empire in 221 B.C., China has considered it essential to control or neutralize Korea to protect its flank against northern “barbarians.” These included not just the Japanese but also such continental peoples as the Huns, the Mongols, and the Manchus. For China, a friendly Korea was a buffer, a hostile Korea was a danger.

Yet each side suffered from a matching drawback: inflexibility. China and Korea were committed to each other. Neither power would find it easy to engage in that betrayal which, throughout history, has been the price for survival that many states have eagerly paid.


이관계는 양편에 실제적인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중국은 국제 관계에 충성을 주는 댓가로, 한국에게 국사에 있어 자주성을 주었다. 한국은 강한 중국군이, 큰 방어군 수립의 정치적, 재정적 부담없이 한국을 방어하게하는 이득을 가졌다. 그역활로, 중국은 그의 남쪽에 우호적이고 복종하는 나라를 보장받았다. 단기221년 첫 중국 제국의 설립이후, 중국은 한국이 중국 북쪽 ‘원시인’들에게서 측면을 보호하기위해, 한국을 통치하거나 중립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다. 이것은 일본인들만이 아니라, 헌, 몽고인과 만주인들 같은 대륙인들도 포함했다. 중국으로서는 우호적인 한국은 완충장치였고, 적대적인 한국은 위험이었다.

 

그래도, 각측은 똑같은 약점으로 고통을 겪었다; 비융통성. 중국과 한국은 서로에게 철저했다. 어느쪽도 그배반에 연류되는 것을 쉽게 생각하지 않을것이었다. 그것은 역사를 통해, 많은 나라들이 열렬히 지불한 생존을 위한 댓가였다.


If the Koreans thought that they had family relations with China, they considered their ties with Japan to be merely contractual and hence revocable. Add to this Korea’s boundless respect for Chinese culture and its traditional contempt for Japan. Koreans considered China to be the fountainhead of civilization while the Japanese were thought of as pirates and barbarians. It was all but inconceivable for Korea to betray China by allowing Japanese armies to march up the peninsula and attack Korea’s suzerain.

When Japan threatened invasion, therefore, and demanded Korean submission, the oreans refused. In fact, most of the courtiers would not even take the threat seriously. They neglected to put the country on a defensive footing, which all but guaranteed that the Japanese would win pile up victories at first. It also left the Korean people vulnerable to the mercy of the invaders, and in an era not known for soldierly respect for civilians.


만약 한국인들이 그들이 중국과 가족관계를 가졌다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일본과의 연관을 단순히 계약적이고 취소할수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한것은, 한국의 중국문화에 대한 끝없는 존경과 일본에 대한 전통적 경멸이었다. 한국인들은 일본이 해적이고 야만인이라고 생각하는 반면에, 중국이 문명의 원천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으로서는 일본군이 반도를 행군해서 한국의 군주를 공격하는것을 허가함으로서 중국을 배반하는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래서 일본이 침략을 위협하고, 한국의 복종을 요구했을때 한국인들은 거부했다. 사실상, 대부분의 조신들은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들은 나라를 방어적인 확고한 위치에 올려놓기를 무시했고, 그것은 일본인들이 처음에 승리를 쌓아올리는 것을 보장했을 뿐이다. 그것은 또한 한국인들을 침략자들의 처분에 내맡겨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평민에 대한 군인의 존경심이 없는 시대였다.


Yet even had Korea been mobilized, it would have had a tough time against Japan’s advantages in land-fighting. Japanese soldiers had been steeled in the long wars for unification. The Korean soldier’s main weapons were the bow and arrow and the spear. The Japanese had muskets. They had borrowed musket technology from the Portuguese and by the 1590s, the Japanese manufactured their own guns.

So in spite of its well-walled cities and fortresses, Korea fell rapidly to the invader. Korean soldiers put up little resistance; some blundered; others panicked. Although the Japanese began the invasion with a huge mistake, the Koreans took no advantage of it. The Japanese invasion force had been divided into three groups, and their arrival was supposed to have been coordinated. But most of the fleet arrived several days late, after the vanguard had already landed at Pusan. Had the Koreans been organized, they could have crushed the divided Japanese navy. But the Korean government refused until the end to believe that the Japanese would carry through their threat of invasion.


하지만 한국이 전시 체제로 들어갔다 할지라도, 육전에 있어서의 일본의 유리함에 대항하는데는 힘든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일본 병사들은 통일을 위한 오랜 전쟁에서 굳어졌다. 한국병사의 주무기는 활과 화살과 창이었다. 일본인들은 조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포르투갈인으로 부터 조총 기술을 빌려왔고, 1590년대 경에는 일본인들은 자기네 총을 생산했다.

 

그러므로 잘 벽으로 싸인 도시와 요새들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급속히 침략자에게 떨어졌다. 한국 군인들은 거의 저항을 하지 않았다; 약간은 실책을 했고, 다른 사람들은 겁에 질렸다. 일본인들이 침략을 거대한 실수로 시작했지만, 한국인들은 그것을 유리하게 이용하지 않았다. 일본 침략군은 세구룹으로 나뉘었고, 그들의 도착은 서로 잘 짜여지게 되어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함대는 선봉대가 이미 부산에 도착한 후, 사나흘 늦게 도착했다. 한국인들이 조직이 든든히 잘되어 있었더라면, 그들은 분열된 일본 수군을 쇄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조정은 끝까지 일본이 그들의 침략위협을 실제로 감행하리라는 것을 믿기를 거부했다.


After landing in May, the Japanese headed northward in a two-pronged attack, with Kato and Konishi each commanding an arm. It took less than a month to march from Pusan to Seoul, which Konishi’s men captured on June 12. on July 22, they took Pyongyang. Kato and his troops marched northeastward, where they not only reached the Tumen River, Korea’s border with Manchuria, but even crossed it.

Yet little of Korea’s rugged and largely roadless territory was actually in the invader’s hands. The northernmost part of the country, to which the king and his court had fled, were still free. So was the southwestern province of Cholla. Protected by a fortified pass, Cholla was economically vital as the nation’s breadbasket, and strategically vital because of its harbors. In one of them sat the naval commander of the eastern coast of Cholla, a little known leader who was poised to display genius. He was Yi Sun-Shin.


5월 상륙 후, 일본은 카토와 고니시가 각각 군을 지휘하고, 두 갈래 공격을 하면서 북쪽으로 향했다. 부산에서 고니시의 부하들이 6월12일에 점령한 서울까지 행군하는데 한달도 걸리지 않았다. 6월22일, 그들은 평양을 점령했다. 카토와 그의 군대는 북동쪽으로 진군했고, 거기서 그들은 한국과 만주의 경계선인 두만강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건너기까지 했다.

 

그래도, 한국의 울퉁불퉁하고, 대부분 길이 없는 영토는 실제로 침략군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다. 왕과 그의 조정이 도망간 나라의 가장 북쪽은 아직 자유로왔다. 남서쪽 전라도도 그랬다. 요새화된 길로 보호되어, 전라는 나라의 곡창지대로 경제적으로 핵심이었고, 항구로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했다. 전라 동쪽 해안지방의 수군사령관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중의 하나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조만간 천재성을 드러낼 지도자였다. 그는 이순신이었다.


Admiral Yi’s career up to then had displayed mixed results. He was born into a family of poor scholars. As a youth, he drove his father to distraction by choosing a soldier’s rather than a scholar’s career. But Yi Sun-Shin failed at first to be admitted to the army when he broke his leg during the horsemanship exam. He was thirty-two before entering the military. Between 1577 and 1591 he served in a variety of posts on the northern border, in Seoul, and in a naval garrison in Cholla. These various assignments showed him to be outstandingly brave, efficient, disciplined, cunning, and a good administrator. But they also demonstrated a near total lack of ability to navigate the treacherous political waters of Korea’s highly factionalized government. Despite winning a big victory over the tribesmen who crossed into northern Korea on raids, Yi Sun-Shin was practically forced out of the military by jealous political enemies. He only survived thanks to the influence of a boyhood friend, Yu Song-Nyong, who became prime minister. It was he who had Yi Sun-Shin appointed fleet admiral of eastern Cholla in 1591, on the eve of the Hideyoshi Invasion.


이 제독의 경력은 그때까지는 엇갈린 실적을 보였다. 그는 가난한 학자의 가정에 태어났다. 젊었을때 그는 문인의 직보다는 무인을 택함으로서 아버지를 마음을 어수선하게 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처음에는 승마시험 중 다리를 부러트려 군에 들어가는데 실패했다. 그가 군에 들어갔을 때는 32살이었다. 1577년과 1591년 사이, 그는 북쪽 국경, 서울, 전라수군 수비대에서 여러가지 직에 종사했다. 이 여러가지 임무는 그가 드러나게 용감하고, 효율적이고, 단련되고, 교묘하고, 훌륭한 행정가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한국의 심하게 파당화 된 조정의 신뢰할 수 없는 정치적 바다를 항해하는 능력이 거의 전무함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한국 북부에 쳐들어온 부족민에게 급습으로 큰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질투하는 정치적 적들에 의해 군에서 사실상 밀려났다. 그는 영의정이 된 어린시절 친구인 유성룡의 영향 덕으로 겨우 살아남았다. 이순신을 히데요시의 침략직전 1591년 동부 전라의 함대 제독으로 임명되게 한 것도 바로 그였다.


The crisis brought out the best in Admiral Yi. “His face,” said Yu Song-Nyong, “is full of grace like that of an elegant scholar, sober and reflective.” Traditional Korean portraits depict Admiral Yi with a beard and moustache and a serious demeanor. A student of the Chinese military thinker Sun Tzu, Admiral Yi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cunning and discipline in war. The imperturbable admiral displayed a combination of intelligence, courage, and patriotism that allowed him to leverage maximum force at minimum effort. It was a stunning demonstration of tactical genius. And much of it can be traced in the war diary and memos to court which the literate admiral penned and which were preserved for posterity.

The Korean navy began the war with several advantages over its Japanese opponents. The Koreans knew the peninsula’s treacherous coastal waters intimately, and they could count on logistical and intelligence help from the local population. Korean warships were heavier than their Japanese counterparts, which allowed the Koreans to deploy more and bigger cannons on board. The result was considerable superiority in firepower. This more than compensated for Japan’s huge numerical advantage in its number of ships.


위기는 이 제독에서 그의 최고를 끌어냈다. ‘그의 얼굴은’ 유성룡은 말했다, ‘기품있는 학자같이 단아함으로 가득차고 진지하고 사색적이었다.’ 전통적 한국인 초상화는 이제독을 수염과 콧수염과 근엄한 태도를 가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중국 군 사상가 손자의 연구가로서, 이제독은 전쟁에서 교묘함과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침착한 이제독은 그를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든 지능, 용기와 애국심의 조합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전술의 천재성의 놀라운 시연이었다. 그리고 많은 것이 학식높은 제독이 쓰고 후대를 위해 보존된 전쟁일기와 조정에의 장궤에서 찾아질 수 있다.

 

한국수군은 일본인 상대에 대해 서너가지 유리점을 가지고 전쟁을 시작했다. 한국인들은 반도의 예상할 수없는 해안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지역주민들에게 병참상과 정보의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한국전선들은 일본 것보다 무거웠고, 그것은 한국인들이 더 많고 큰 포를 선상에 배치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결과는 화력에 있어 상당한 우위였다. 이것은 일본의 선박수에 있어 거대한 숫적 유리함을 보상하고도 남았다.


But Korea suffered the major disadvantages at sea of a factionalized and out-oftouch government and of a disunited command structure. Enter Admiral Yi. He received an urgent request for help from Admiral Won Kyun of the neighboring Kyongsang Province (which includes the city of Pusan). Admiral Yi was reluctant to respond. He had not received permission from Seoul, he commanded only 24 warships, and he had not completed import!!!ant preparations. Even so, he organized a conference of port garrison commanders and local magistrates. Their unanimous advice was for him to help Admiral Won. Admiral Yi agreed. He drafted a report for Seoul and stiffened his men’s morale by having a Korean deserter beheaded and his head hoisted on a tall pole as a warning. He then prepared to sail for Kyongsang the next day at the first cock-crow. By now, he commanded 91 ships, but they included fishing vessels.


하지만 한국은 파벌로 나누어지고 협조가 안 되는 조정과 분열된 지휘체제 때문에 바다에서 심각한 불리함을 겪었다. 이제독이 여기 등장한다. 그는 이웃의 경상도 (부산시를 포함하는) 의 원균제독으로부터 도와달라는 급박한 요청을 받았다. 이제독은 응답하는데 주저했다. 그는 서울로부터 허가를 받지 않았고, 24척의 전함뿐이 없었으며, 주요준비를 끝내지 못했다. 그래도, 그는 항구 수비대의 지휘관들과 고을현감들의 회합을 모집했다. 그들의 만장일치의 충고는 그가 원제독을 돕는 것이었다. 이제독은 동의했다. 그는 서울에 보고서를 작성하고, 탈영병의 머리를 베어 경고로 머리를 높은 장대에 올림으로서 부하들의 사기를 굳혔다. 그리고 그는 다음날 첫 새벽닭이 울 때 경상도로 항해할 준비를 했다. 그때 그는 91척을 지휘했으나, 그것은 고기잡이배들을 포함했다.


Chief among Admiral Yi’s preparations for war was the building of a small number of turtle boats. This ship is remembered as his signature weapon. The turtle boat indeed struck great blows for Korea’s cause, but it has given rise to many misconceptions. It is sometimes mistakenly called an ironclad, but the turtle boat was in fact a fully enclosed wooden galley whose roof was covered with iron spikes. (Ordinary Korean warships were larger and heavier than the turtle boat and had open decks.) Impenetrable by enemy guns and protected from boarding tactics, the Turtle Boat spearheaded Korean attacks, more than once succeeding in killing the Japanese commander on his flagship. Admiral Yi never had many turtle boats – probably never more than six – and he won some battles without them. Still the ship represented a remarkable weapon.


이제독의 전쟁에 대한 준비 중의 주된 것은 적은수의 거북배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배는 그의 주제 무기로 기억되고 있다. 거북배는 진실로 한국 명분을 위해 큰 타격을 미쳤지만,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가끔 철갑선으로 잘못 불렸지만, 거북배는 사실상 철못으로 지붕이 덮힌, 완전히 동봉된 나무 갤리선 (노로 젓는배) 이었다. (일반적인 한국전함은 거북배보다 더 크고 무겁고 트인 갑판이 있었다). 적의 총탄에 의해 꿰 뚫어질수 없고, 선상 전략으로부터 보호되어, 거북배는 한국인의 공격에 있어 선두에 서서, 기함에 있는 일본 사령관을 죽이는데 여러번 성공했다. 이제독은 많은 거북배를 가진적이 없었다 – 아마 절대 6척이상은 아니었을 – 그리고 그는 어떤 전투들은 거북배 없이 이겼다. 그래도 배는 놀라운 무기임을 보여주었다.


The turtle boat was based on a traditional Korean design. Like a turtle, whose shape it resembled, the boat had a protective shell. No data on its size survive, but based on a later version, we might estimate that Admiral Yi’s turtle boat was about 65 feet long, about 14 ½ feet wide amidships, and about 20 ½ feet high. It was built of thick and solid wood but it was faster than any other contemporary ships, thanks to its 16 oars and 80 oarsmen, taking turns in teams, to power them. It was circled by 36 gun ports. Cannon and fire arrows were the ship’s weapons, and they could be fired from all sides of the vessel. Meanwhile, sulfur gunsmoke poured out of the mouth of a large wooden turtle’s head in the bow, to blind and frighten the enemy. The turtle boat made an excellent assault weapon, perfect for targeting the enemy chain of command. The Japanese called it a “blind ship” because it fought as fearlessly as a blind warrior. But it was not ready when Admiral Won called for help, so Admiral Yi would have to go into his first battle without turtle boats.


거북배는 전통적인 한국인의 설계에 의거했다. 모양이 비슷한 거북처럼, 배는 보호하는 껍질이 있었다. 현존하는 그 크기에 대한 자료는 없지만, 나중판에 의거하면, 우리는 이제독의 거북배가 약 65 피티길이, 선체중앙부가 14.5 피트 넓이, 그리고 약 20.5 피트 높이였음을 예상할 수 있다. 그것은 두껍고 순수하게 나무로 만들어졌으나, 움직이는데 16개의 노와 팀으로 교대하는 80명의 격군으로 그 당시 어느 다른 배보다도 빨랐다. 거북배는 36대의 포문으로 둘러싸였다. 대포와 불화살들은 배의 무기였고 그것들은 선박의 모든면으로부터 발사될수 있었다. 그 반면, 굽혀진 커다란 나무거북의 머리의 입에서 유황색 화포 연기가 적들을 눈멀게하고 두렵게하도록 뿜어져 나왔다. 거북배는 훌륭한 공격무기가 되었고, 적의 지휘체제를 겨냥하는데 완전했다. 일본인들은 그것을 눈먼무사처럼 두려움없이 싸운다해서 ‘장님배’라고 불렀다. 하지만 원제독이 원조를 청했을때 준비가 되지않아, 이제독은 그의 첫전투를 거북배 없이 나가야했다.


What he had instead, in addition to superior firepower and local knowledge, were his skill as a superb tactician and a charismatic leader of men. Admiral Yi always chose his battlegrounds carefully and he exercised discrimination in choosing which enemy detachment to target. He understood well the necessity of keeping his ships well clear of Japanese vessels. Get too close and Japanese soldiers would be able to board Korean

ships and fight, in effect, a land battle at sea. In that case, the Japanese would enjoy their superiority in hand-to-hand conflict – and the Koreans had to avoid that.

The naval war that began in spring 1592 unfolded over the next six years on Korea’s south coast. This is a dramatic region of mountains and deep-water harbors, of coastline indented by bays lined by sand beaches, and of sparkling turquoise water dotted with pine-covered islands. And the romantic scenery was now to be broken by gunfire and stained by blood.


그 대신 그가 가진 것은, 우월한 화력과 지역에 대한 지식외에, 뛰어난 전술가와 카리스마적 부하들의 지도자로서의 그의 능력이었다. 이제독은 항상 그의 전장을 조심스럽게 골랐고, 어떤 적의 고립을 겨냥할 것인지 선택하는데 있어 차별화했다. 그는 배가 일본선박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할 필요성을 잘알았다. 너무 가까이 가면, 일본병사들은 한국배에 선상하여, 사실상 바다에서 육전을 싸울수 있을 것이었다. 그 경우에, 일본인은 접전에서의 우위를 즐길 것이었고, 한국인들은 그것을 피해야했다.

 

1592년 봄에 시작한 수전은 다음 6년간을 한국 남해안에서 전개되었다. 이것은 산과 수심이 깊은 항구와, 모래사장들로 그어진 만으로 들쭉날쭉한 해안선과, 소나무가 덮힌 섬이 군데군데있는 반짝이는 청록색의 바다로 된 극적인 지역이었다. 그리고 이 낭만적인 경치는 이제 포격으로 깨졌고, 피로 얼룩졌다.


Admiral Yi’s first victory over the Japanese came in June at the port city of Okpo, on the northeast coast of Kojedo Island, off the central part of Korea’s southern coast. Here Korea’s 91 ships surprised a Japanese fleet of 50 ships docked at the wharf while its men were looting the city. The Koreans surrounded the enemy and attacked with guns and arrows. By sunset, 26 Japanese ships had been destroyed and burned, with no Korean

losses. That evening, after retreating to the open sea, the Koreans chased and destroyed five Japanese ships. The next day they headed toward the coast and destroyed 13 more Japanese ships. Admiral Yi returned to his base at the city of Yosu and rested his crews. He had not lost a single ship.


이제독의 일본에 대한 첫 승리는 6월 한국 남해안의 중앙부분에서 떨어진 거제도의 북동쪽에 있는 옥포 항구도시에서 왔다. 여기 한국의 91척은, 도시를 약탈하고 있는 동안 부두에 정박하고 있던 50척의 일본함대를 놀라게했다. 한국인들은 적을 둘러싸고, 포와 화살로 공격했다. 석양때까지, 일본 26척이 파괴되고 태워졌으며, 한국인의 손실은 없었다. 그날 저녁, 트인바다로 도망간 이후, 한국군들은 쫓아가서 5척의 일본선박을 파괴했다. 다음날, 그들은 해변으로 향했고, 일본선박 13척을 더 파괴했다. 이제독은 여수시 진영으로 돌아왔고, 선원들을 쉬게했다. 그는 단 한척도 잃지 않았다.


About three weeks later, Admiral Yi went back to sea, this time to attack a Japanese force in the Bay of Sachon. Although he had only 23 warships, he discarded the fishing vessels in favor of the turtle ship, which was now ready. on July 8, when they reached Sachon an ebbing tide prevented the Koreans from entering the harbor, so they began to lure the Japanese out to sea after pretending to retreat. Then the tide turned and the Koreans entered the harbor. There followed a furious battle, with the turtle boat in the van. Admiral Yi described the battle thus:

I ordered my oarsmen to row my Flag-Ship at top speed, and dashed to the foremost front, hammering the enemy vessels; then my officers’ and ships’ captains rallied around me and hurled cannon balls, long arrows, winged arrows, fire arrows, and other death-dealing missiles from big guns “heaven” and “Earth,” while our battle-cries shook land and sea. Finally shrieks and death agonies were heard from the enemy vessels as their warriors fell dead or ran away with the wounded on their shoulders in countless numbers. The survivors pulled back further up the hill and dared not come forward to fight. (Ha Tae-hung, trans. Imjin Changch’o. Admiral Yi Sun-Sin’s Memorials to Court. Ed. By Lee Chong-young. Seoul: Yonsei University Press, 1981, 41)


The Koreans had destroyed all 12 Japanese ships. Admiral Yi was struck in his left shoulder by the bullet of a Japanese arquebus. The wound was several inches deep. So as not to upset his men, he kept the fact a secret until the battle was over, when he calmly removed the bullet with his own sword.


약 3주후, 이제독은 바다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사천만에서 일본군을 공격하기위해서 였다. 단 23척의 전선밖에 없었지만, 그는 이제 준비가 된 거북선을 택하고, 고깃배들을 포기했다. 7월8일, 그들이 사천에 도착했을 때, 썰물은 한국군이 항구에 들어서는 것을 막았고, 그래서 그들은 후퇴하는 것처럼 가장해서 일본군을 바다로 유인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류는 바뀌었고, 한국군은 항구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거북배를 선두로 격렬한 전투가 따랐다. 이제독은 전투를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격군들에게 내 장군선을 최고의 속력을 내도록 노를 저으라고 명을 내렸읍니다, 그리고 적의 배에 부딪히면서 맨먼저 정면으로 돌진했읍니다; 그리고 부하들과 배의 선장들은 내주위에 모여서, 함성으로 땅과 바다를 뒤흔들면서, 포탄과 긴 화살과 날개달린 화살과 불화살과 ‘하늘’과 ‘땅’ 대포로부터 다른 치명적인 유도탄을 퍼부었읍니다. 드디어 수도없이 많은 그들의 무사들이 쓰러져 죽고, 어깨에 부상한채로 도망칠 때에 비명소리와 죽음의 고통소리가 적의 선박으로 부터 들려왔읍니다. (하태형 번역, 임진장초, 이순신제독의 장궤. 이창영 편집. 연세대 출판 1981)

 

한국군들은 일본군 12척 모두를 파괴했다. 이제독은 왼쪽 어깨에 일본 화승총에 의한 총알에 맞았다. 상처는 서너인치 깊이였다. 부하들을 동요하지 않으려고, 그는 전투가 끝날때까지 그사실을 비밀로 했다. 그리고는 전투후 침착하게 자신의 칼로 총알을 제거했다.


This success was a taste of things to come. During the summer and fall of 1592, Admiral Yi won ten victories over the Japanese fleet. At one of them, in July at Tangpo Harbor, the Koreans caught 21 Japanese ships, including the flagship of a Japanese admiral, Kamei Korenori. on deck stood a tall, painted pavilion surrounded by a red

brocade curtain. Inside sat the commander. A turtle boat attacked the ship and killed Korenori with an arrow to the chest, after which he was beheaded. After the battle, the Koreans found a gold fan inscribed with the name of Hideyoshi. And they liberated a Korean woman who had been enslaved and made the commander’s mistress. She described Korenori as “a tall strong man, aged about thirty” and claimed that he “wore a yellow brocade robe and gold crown and sat upon his dais in the pavilion of his boat.” (Ha, trans. Imjin Changch’o, 44.)


이 성공은 닥아올 일들의 시식이었다. 1592년 여름과 가을동안 이제독은 일본함대에 대해 10번의 승리을 거두었다. 그중의 하나는 7월 당포항구에서 한국군이 일본제독 가메이 고레노리의 장군선을 포함한 21척의 일본선박을 포획한 것이었다. 갑판에 빨간 능라커튼으로 둘러싸인 높고 색칠한 누각이 있었다. 안에는 지휘관이 앉아있었다. 거북배는 배를 공격했고, 고레노리를 가슴에 활로 쏘아 죽였다, 그후 그는 목이 잘렸다. 전투후, 한국군은 히데요시의 이름이 새겨진 금부채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들은 잡혀서 지휘관의 첩으로 강요된 한국여인을 자유롭게 했다. 그녀는 고레노리를 ‘키가 크고 강하고, 약 30세된 남자’라고 묘사했고, 그가 ‘노란 능라 겉옷을 입고, 관을 쓰고, 그의 배의 누각의 연단에 앉아 있었다’라고 주장했다 (하, 번역, 임진장초, 44)


The greatest of Admiral Yi’s victories came at the battle of Hansan Island, south of the modern city of Chungmu, on August 14 against a Japanese fleet led by Wakisaka Yasuharu. on that day, 70 Korean ships sent out a small decoy force to lure the Japanese fleet of 63 ships out of a narrow strait to fight in the open water. There the Koreans attacked the Japanese by arranging the Korean ships in a semi-circular formation known as “the crane wing.” This allowed the Koreans to concentrate their firepower, with the turtle boats in the lead. In a memo to court, Admiral Yi describes what happened next:

Our ships dashed forward with the roar of cannons “Earth,” “Black,” and “Victory,” breaking two or three of the enemy vessels into pieces. The other enemy vessels, stricken with terror, scattered and fled in all directions in great confusion. Our officers and men and local officials on board shouted “Victory!” and darted at flying speed, vying with one another, as they hailed down arrows and bullets like a thunder storm, burning the enemy vessels and slaughtering his warriors completely. (Ha, trans. Imjin Changch’o, 58.)

The Japanese lost 59 ships – almost their entire fleet. The Koreans destroyed 47 Japanese ships outright and captured 12. Thanks to the speed of his flagship, Admiral Wakisaka escaped.


이제독의 가장 위대한 승리는 8월14일 와키사카 야수하루가 이끄는 일본함대에 대한, 현대도시 충무의 남쪽 한산도 전투에서 였다. 그날, 70척의 한국군 선박이 63척의 일본함대를 좁은 해협에서 나와 트인 바다에서 싸우도록 유인하는 미끼군으로 보내졌다. 거기서 한국군은 한국선박들을 ‘학의 날개’ 라는 반원형 진으로 배열하고 일본군을 공격했다. 이것은 한국군이 거북배들을 선두로, 그들의 화력을 집결시킬 수 있게했다. 장궤에서 이제독은 다음에 일어난것을 묘사한다:

‘우리배들은 두세척 적의 선박을 조각내면서, ‘땅’, ‘어두움’, ‘승리’ 포의 굉음과 함께 앞으로 돌진했읍니다. 다른 적의 선박들은 공포에 질려, 커다란 혼란 속에 모든 방향으로 흩어지고 도망쳤읍니다. 배에 있던 우리 장수들과 부하들과 고을 관료들은 ‘승리!’를 외쳤고 서로 경쟁하면서, 빠르게 나는 속도로 진입했읍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폭풍처럼 화살과 총탄을 퍼부었고, 적의 배들을 불태우고 배의 무사들을 완전히 무찔렀읍니다 (임진장초, 58).

 

일본은 59척- 거의 전 함대- 을 잃었다. 한국군은 일본의 47척을 완전히 파괴하고 12척을 포획했다. 장군선의 속도 덕분에 와키자카제독은 도망쳤다.


“So ended, we may well believe, one of the great naval battles of the world. It may truly be called the Salamis of Korea.” This was the judgment of Homer Bezaleel Hulbert in 1905 in his History of Korea, today still the most detailed (though not the most up-to-date) book on that subject available in English. He compared Hansan Island to the epochal battle of 480 B.C. in which the Greeks defeated the Persian fleet and saved Greek civilization.

After Hansan Island, Hideyoshi ordered the Japanese to avoid sea battles entirely. In effect, Admiral Yi had driven the enemy from the water. The Japanese fleet was kept out of the Yellow Sea and thereby it could neither supply nor even communicate with its forces in Pyongyang. The Japanese had to carry all supplies by men or horses on Korea’s insecure roads, which severely taxed their organizational ability and manpower.


‘그렇게, 우리가 믿는 것이 당연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수전의 하나가 끝났읍니다. 그것은 진실로 한국의 살라미스라고 불릴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 그 주제에 대해 가장 자세한 (가장 근래는 아니지만) 영어로 된 책, 1905년Homer Bezaleel Hulbert 가 그의 한국의 역사에서 내린 판단이었다. 그는 한산도를 단기 480년 그리스가 페르시안 함대를 물리치고 그리스 문명을 구한 신시대적인 전투에 비교했다.

 

한산도이후, 히데요시는 일본군에게 수전을 완전히 피하라고 명을 내렸다. 사실상, 이제독은 적을 바다에서 몰아낸 것이었다. 일본함대는 서해에서 물러나있었고, 그래서 평양에 있는 자기네 군대에 공급하거나, 소통할 수도 없었다. 일본은 모든 공급품을 한국의 위험한 길로 사람과 말로 운반해야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의 조직력과 인력에 심하게 짐을 지웠다.


참조: 헐버트 (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 Yahoo 


미국 선교사•언어학자•사학자. 버몬트주 뉴헤이븐 출생. 한국이름은 할보(轄甫). 1884년 다트머스대학을 졸업한 뒤 유니온신학교에 들어갔다가, 1886년(고종 23) D.A. 벙커 등과 함께 한국에 와서 육영공원의 외국어 교사로 1891년까지 재직하였다. 그 뒤 삼문출판사의 2대 사장, 황성기독교청년회 초대회장을 지냈다. 반일입장을 취해 을사늑약 후 한국의 자주독립을 주장하였고,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으로 돌아가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만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6년 《한국평론》을 통하여 일본의 야심과 야만행위를 폭로하였다. 1907년 고종에게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파견을 건의하였고, 한국 대표단보다 먼저 헤이그에 도착하여 《회의시보》에 대표단의 호소문을 싣게 하는 등 한국의 국권회복운동에 적극 협력하였다. 1919년 3•1운동을 지지하는 글을 서재필이 주관하는 잡지에 발표하였다. 대한민국 수립 후 1949년 국빈으로 초대되어 방한중 병으로 죽었다. 저서로 《한국사(2권)》 《대동기년( 5권)》 《한국견문기》 등이 있다. 1950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태극장이 추서되었다


This was a revolution in strategic terms. Unless they commanded the sea, the Japanese could not advance into China. As Admiral Yi’s patron, Yu Song Nyong put it, the Korean naval victory at Hansan Island “cut off one of the arms” with which Japan had tried to envelop Korea, isolating the Japanese army at Pyongyang and securing Chinese waters, so that “the Celestial Army [that is, the Chinese] could come by land to the assistance” of Korea.

Admiral Yi now transferred his headquarters to Hansan Island, which he turned into Korea’s main naval base. It was here that he wrote poetry in the classic manner of a Confucian gentleman. His most famous poem is the “Hansan Island Song”:

By moonlight I sit all alone

in my tower on Hansan Island;

I stroke the long sword at my side,

nnd breathe a deep sigh toward the tide.

Hark! Whence shrills this tuneful flute

So sharp to pierce my heart? (Ha, trans. Imjin Changch’o, 197.)


이것은 전략상 면에서 혁명이었다. 바다에서 통솔하지 않는 이상, 일본은 중국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제독의 후원자, 유성룡이 표현하듯, 한국수군의 한산도에서의 승리는 한국을 측면 공격하려한 일본의 ‘한 팔을 자른’ 것이었다. 그것은 평양의 일본군을 고립시키고, 중국 해안을 안전하게 했으며, 그래서 ‘ 신성한 육군 (중국) 이 한국을 도우러 육로로 올수 있었다’.

 

이제독은 이제 한산도로 본부를 옮기고 그곳을 한국의 주요 수군기지로 바꾸었다. 그가 유교의 양반처럼 전형적인 방식으로 시를 쓴 것도 여기였다. 그의 가장 유명한 시는 ‘한산도가’ 이다: (해석 생략)


From his Hansan Island base, Admiral Yi devoted himself to mopping-up operations, patrols, and preparations for future battles. Among other things, he trained and hardened his men, drafted new sailors, administered examinations to enroll new officers, arranged for food supplies, and set up a gun foundry to compete with Japanese muskets. In a biography of his famous uncle written by Admiral Yi’s nephew, Yi Pun, the admiral’s rigorous self-discipline is recorded:

During his camp life … [he] never suffered any woman to come to him, and when going to bed he never loosened his belt. He always got up early in the morning and called in his staff officers to talk over military affairs until daybreak. He took only two meals a day, averaging five or six bowls, but he was full of energy in handling his business. His mental energy was twice as great as that of an average person so even after drinking wine with some guests until midnight he would seat himself erect, with a candle burning, to read or write or discuss naval tactics. (Ha, trans. Imjin Changch’o, 218.)


그의 한산도 진영에서, 이제독은 소탕 작전, 순찰, 그리고 미래전투 준비에 자신을 전념했다. 다른 것들 중, 그는 부하들을 훈련시키고 단련시켰으며, 새수병들을 뽑고, 새장수들을 뽑기위한 시험을 시행했고, 식량공급을 조성했고, 일본 조총과 경쟁하기위해 총 주조장을 세웠다. 이제독의 조카, 이분에 의해 쓰인 그의 유명한 삼촌에 대한 전기에, 제독의 엄격한 자기훈련이 기록되어 있다.

 

그의 진영 생활동안.. 그는 어느 여자도 그에게 오라 괴롭히지 않았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때도 결코 허리띠를 풀지 않았다. 그는 항상 아침 일찍 일어나 날이 밝을때까지 그의 참모장수들을 불러 군무를 의논했다. 그는 평균 5이나 6공기되는, 하루에 두끼만 먹었으나, 일을 주관할때 활력이 넘쳤다. 그의 정신적 에너지는 보통 사람의 두  배로, 자정까지 손님들과 술을 마신후에도, 똑바로 앉아 촛불을 밝히고, 읽거나 쓰거나 수략을 의논하였다. (임진장초, 218)


It would be hard to overrate Admiral Yi’s achievement as a commander. A brilliant tactician, he was a superb leader of men, incorruptible, courageous, and endowed with clear strategic vision. And yet, Admiral Yi’s spectacular victories at sea were not enough to win the war for Korea. Korean seapower could frustrate Hideyoshi’s ambition to conquer China but it could not drive his armies off the Korean peninsula. only Ming’s armies, supported by Korean guerrilla harassment in Japan’s rear, could do that – or rather, could come close to doing that. Because the truth is, in purely military terms, Japan was able to withstand the blow. The combination of Ming regulars and Korean guerrillas forced the Japanese military to withdraw southward but not to leave the Korean peninsula altogether. Conditions in Korea were terrible for Japan’s soldiers. About a third of the invasion force died, most through exhaustion, hunger, cold, disease. Nevertheless, the rest hung on.


이제독의 지휘관으로서의 업적을 과대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출난 전술가로서 그는 뛰어난 지도자였고, 청렴결백하고, 용기있고, 뚜렷한 전략적 시각을 타고났다. 그러면서도, 이제독의 바다에서의 놀라운 승리는 한국의 전쟁을 이기기에 충분하지가 않았다. 한국의 바다에서의 힘은 히데요시의 중국을 점령하려는 야심을 좌절시킬 수는 있었지만, 그의 군대를 한반도에서 몰아낼 수는 없었다. 명군만이, 일본 후측에서 괴롭히는 한국 게릴라병의 지원과 함께, 그것을 할 수있었다 – 아니, 그것을 목전에 둘 수있었다. 왜냐하면, 진실은, 순수하게 군대면으로, 일본은 타격을 버티어 낼 수있었다. 명정규군과 한국 게릴라군들의 연합은 일본군을 남쪽으로 후퇴하게 만들었지만, 한반도를 완전히 떠나게 할 수는 없었다. 한국의 상황은 일본 병사들에게는 혹독했다. 침략군의 약 3분의 일이 대부분 피로, 배고픔, 추위, 병으로 죽었다. 그래도 나머지는 버티었다.

 

Ming’s army crossed the Yalu River into Korea in late January 1593. on February 10 they defeated the Japanese at Pyongyang and drove them southward. But a few weeks later on February 25 it was the Japanese turn to defeat the Chinese a few miles north of Seoul. Then, a Korean force in a castle north of Seoul pushed back a Japanese attempt to head back north. The Japanese held Seoul but it proved a bitter prize.

Known as Righteous Army the guerrilla ranks united nobles, peasants, and slaves. Most guerrilla groups were headed by local notables, but some were led by Buddhist monks.

The guerrilla’s domination of the countryside was so complete that the Japanese could barely forage for food. The garrison in Seoul was hard pressed and miserable.


명군은 1593년 1월말 압록강을 건너 한국으로 들어왔다. 2월10일 그들은 평양에서 일본군을 물리치고 남쪽으로 몰아냈다. 하지만 몇주 후 2월25일, 이번에는 일본이 서울 몇마일 북쪽에서 중국군을 이겼다. 그리고, 서울의 북쪽 성에서 한국군은 북쪽을 다시 향하려는 일본군의 시도를 늦추었다. 일본군은 서울을 점령했으나 그것은 쓰라린 상인 것으로 드러났다.

 

수백의 한국 게릴라군들이 나라 전역에서 솟아났다. ‘의병’이라고 알려진 게릴라 지위는 귀족, 농부들, 노예들을 연합시켰다. 대부분의 게릴라군은 지방귀족이 이끌었으나, 얼마는 불교 승려들에 의해 이끌어졌다. 게릴라의 지방에서의 우세는 완전해서, 일분군은 거의 식량수집을 할 수가 없었다. 서울의 주둔군은 쪼들리고 비참했다.


By spring, the Japanese were ready to accept the Korean and Chinese offer of an armistice. In April, the Japanese withdrew in relative security to the southeast corner of the peninsula. Peace talks between Ming and Japan now ensued – with poor Korea on the sidelines. The talks dragged on for years without success because the two sides were still far apart. Ming wanted to enroll Japan as a vassal state, while Hideyoshi wanted to keep southern Korea, hold a Korean prince as hostage, and arrange a marriage between the Japanese emperor and a daughter of the Chinese emperor. In 1597, furious at Chinese stonewalling, Hideyoshi la-unched a second invasion of Korea. This time, he had an army of about 140,000 men. Konishi led his forces back to Korea.

The Koreans and Chinese were better prepared for the second invasion than for the first. Together, they held the Japanese army to the southeastern corner of the peninsula. Meanwhile, Japan did much better at sea. Admiral Yi could not stop them, because he was himself a prisoner in jail, victim of factional infighting in court. Amazingly, the Koreans had sacked their best leader.


봄이 되자, 일본은 한국과 중국의 휴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4월, 일본군은 비교적 안전한 반도의 남동쪽 구석으로 철수했다. 이제 명과 일본사이의 평화회담이 일어났다 – 불쌍한 한국은 방관자였다. 회담은 두 편이 아주 달라서 성공하지 못하고 몇 년을 끌었다. 명은 일본을 가신국으로 가입하기를 원했고, 히데요시는 한국 남쪽을 차지하고, 한국 왕자를 인질로 잡고, 일본 황제와 중국 황제 딸의 혼인을 중개하기를 원했다. 1597년, 중국의 비협조에 분개해서 히데요시는 한국에 대한 두번째 침략을 일으켰다. 이번에 그는 약 14만명의 군대가 있었다. 고니시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그의 군대를 이끌었다.

 

한국군과 중국군은 첫 번보다 두번째 침략에 더 잘 대비가 되어있었다. 그들은 같이 일본군을 반도의 남동쪽 구석에 잡아놓았다. 그러는 반면, 일본은 바다에서 훨씬 더 잘했다. 이제독은 그자신이, 조정의 당파싸움의 희생으로 감옥에 죄수로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막지 못했다. 놀랍게도,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최고의 지도자를 해고시켰다.


His rival Won Kyun had obtained command of the Korean fleet, which he then proceeded to wreck. Won Kyun replaced Admiral Yi’s skilled officers and neglected his men. He took unnecessary risks in battle and on July 15, 1597, he paid for them with total defeat. The Japanese carried out a successful surprise attack on the Korean navy at Chilchonryang, a narrow strait facing Kojedo Island. The Japanese struck at night. The incautious Admiral Won allowed his ships to close which the enemy, which permitted the Japanese to overwhelm the Koreans with boarding tactics. The Koreans lost over 160 ships and, in short order, their naval base at Hansan Island as well, which fell into Japanese hands. Won Kyun was among the dead. A week later, the King reappointed Admiral Yi to his command.


그의 라이벌 원균은 한국함대의 지휘권을 얻었다. 그리고는 그는 함대를 파멸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원균은 이제독의 숙련된 장수들을 대체하고, 부하들을 경시했다. 그는 전투에서 불필요한 위험을 택했고, 1597년 7월 15일 전투에서 완전 패배로 그 댓가를 지불했다. 일본군은 한국 수군에게 거제도를 향해있는 좁은 해협인 칠천량에서 성공적인 기습을 감행했다. 일본군은 밤에 반격을 가했다. 경솔한 원제독은 배들이 적에게 가까이 가는 것을 허락했고, 그것은 일본군에 의해 한국인들을 선상전략으로 압도당하게 만들었다. 한국군은 160척이상을 잃었고, 즉시, 한산도 그들의 수군진지도 일본군의 손에 떨어졌다. 원균도 사망자의 한사람이었다. 일주 후, 왕은 이제독을 지휘하도록 재임명했다.


He had a fleet of only 12 ships, all that was left to Korea. Although the court ordered him to disband the navy, the admiral had other plans. In spite of a seemingly hopeless situation, he was optimistic. The Japanese planned now finally to use their navy to sail northward towards China, as they had originally hoped to do in 1592. Admiral Yi aimed to stop them again. After winning several skirmishes with Japanese squadrons, he prepared for his most remarkable victory at sea. It was October 26, 1597.


그에게는 한국에 남은 전부, 12척의 함대밖에 없었다. 조정이 그에게 수군을 해제하라 명했지만, 제독은 다른 계획이 있었다. 겉보기에는 희망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낙관적이었다. 일본군은 그들이 1592년 원래 그렇게 하려고 했던 것처럼, 이제 드디어 수군을 중국을 향해 북쪽으로 항해하는데 이용하려고 계획했다. 이제독은 그들을 다시금 멈추도록 겨냥했다. 일본 중대와 서너번 소접전을 이긴 후, 그는 바다에서 그의 가장 놀라운 승리를 준비했다. 그것은 1597년 10월 26일이었다.


A Japanese fleet of 133 ships sailed into the Myongyang Strait in the southwestern corner of Korea, between Chindo Island and the mainland. The Japanese were heading northward for Admiral Yi’s base at Byokpajin. But he did not retreat. on the contrary, although utterly outnumbered, the admiral used his knowledge of the narrow strait and its fast and treacherous tides as a force multiplier. He prepared his men for battle with a stirring encouragement: “According to the principles of strategy, ‘He who seeks his death shall live, he who seeks his life shall die.’ Again, the strategy says, “If one defender stands on watch at a strong gateway he may drive terror deep into the heart of the enmy coming by the ten thousand.’ These are golden sayings for us.” (Ha Tae-hung, trans. Najung Ilgi. War Diary of Admiral Yi Sun-Sin. Ed. Sohn Pow-key Seoul: Yonsei University Press, 1977, 311)


133척의 일본 함대가 진도와 본토사이 한국 남서쪽 모퉁이의 명량해협으로 항해해왔다. 일본군은 벽파진에 있는 이제독의 진영으로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후퇴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완전히 압도적으로 수가 적었는데도, 제독은 좁은 해협과 그의 빠르고, 예상할 수없는 조류에 대한 지식을 힘의 증가력으로 이용했다. 그는 전쟁에 나가는 부하들을 감동시키는 격려로 준비시켰다: ‘병법의 원리에 의하면, 죽고자 하는 사람은 살 것이요,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죽을 것이다’. 또한 병법은 말하기를 ‘한사람의 방어자가 강한 통로에 지키고 서있으면, 수천명의 적에게 마음깊이 두려움을 가져다 줄수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금같은 말이다. (하태영번역. 난중일기, 이순신제독의 전쟁일기. 손파기편집; 연세대학 출판, 1977, 311)


The Japanese advanced into the strait in the early morning. The Koreans met them at the midpoint, taking immediate advantage of their superior firepower. Because of the narrowness of the channel, the Japanese could not surround the enemy. The Koreans quickly destroyed several enemy vessels including the commander’s flagship. The Japanese admiral was killed and then his corpse was captured and beheaded: his head was hoisted on top of a mast on Admiral Yi’s flagship. The sight struck terror in the Japanese officers, who immediately turned their ships to flee. By now, however, the tide had turned, which hindered their escape – just as Admiral Yi had planned. on top of that, the Koreans had stretched an iron chain across the southern end of the strait. The order was now given to lift the chain and so stop the Japanese. The Koreans sank more than 30 enemy ships before the battle was done.


일본군은 아침 일찍 해협으로 전진했다. 한국군은 그들의 우월한 화력의 유리점을 즉각적으로 이용하면서 중간점에서 그들을 만났다. 해협의 협소함으로 인해, 일본군은 적을 에워쌀수가 없었다. 한국군은 재빨리 지휘관의 장군선을 포함한 적의 선박 서너척을 파괴했다. 일본 제독은 죽었고, 그의 시체는 포획되어 목이 잘렸다. 그의 머리는 이제독의 장군선의 돛대끝에 매달아졌다. 그광경은 일본장수들에게 공포를 불어넣었고, 그들은 도망가려고 즉시 배를 돌렸다. 하지만 이때는, 조류는 바뀌어, 그들의 도망을 방해했다 – 이제독이 계획한것처럼. 게다가, 한국인들은 해협 남쪽 끝에 철쇄를 가로질러 걸쳐놓았다. 이제 쇠사슬을 올려서 일본군을 멈추라는 명이 떨어졌다. 한국군은 전쟁이 끝나기 전에 30척 이상의 적전선을 침몰시켰다.


The “Miracle at Myongyang,” as it is sometimes called, put the Japanese navy back on the defensive, just as its land army already was. The arrival soon afterwards of a Chinese fleet under Admiral Chen Lin to reinforce the Koreans only added to Japan’s military woes. By April 1598, the Japanese commanders on the peninsula were ready to go home, but Hideyoshi refused. When Japan eventually decided on total withdrawal, it was a political and not a military decision. However incapable of achieving Hideyoshi’s original, grandiose goal, and however weary, Japanese land power was strong enough to hold on in Korea. Hideyoshi knew this, and insisted on holding on to a Japanese colony in southern Korea.

Whether Japan would have been able to maintain such a colony for a long period of time is doubtful, given the political and financial costs. In any case, no sooner had Hideyoshi died than his weary successors decided on a complete Japanese pullback. The warlord died, after an illness of several months, in September 1598; by December, the Japanese army was in the process of withdrawing from Korea. Meanwhile, the Koreans continued to make war on them.


가끔 불리듯, ‘명량의 기적’은, 육군이 이미했던 것처럼 일본수군이 다시금 방어 자세를 취하도록 만들었다. 곧 한국군을 보강하러 진린제독하에 온, 중국함대의 도착은 일본군의 고뇌를 더할 뿐이었다. 1598년 4월에는, 반도에 있는 일본 지휘관들은 집에 갈 준비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거절했다. 결국 일본이 전철수를 결정한 것은 정치적이지, 군사적 이유가 아니었다. 아무리 히데요시의 원래의 웅대한 목표를 얻을 수가 없었다해도, 아무리 지쳤어도, 일본의 육군의 힘은 한국에서 버티기에 충분히 강했다. 히데요시는 이것을 알고 있었고, 한국 남쪽에 일본 식민지를 고수하기를 고집했다.

 

정치적, 재정적 댓가를 볼 때, 일본이 오랫동안 그런 식민지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는 의심스럽다. 어쨌든, 히데요시가 죽기가 무섭게, 그의 지친 계승자들은 일본의 완전한 철수를 결정했다. 군벌은 1598년 7월, 서너달 동안의 병 끝에 죽었다. 12월에는, 일본군은 한국으로 부터의 철수과정에 있었다. 한편 한국인들은 계속해서 그들과 싸웠다.


According to Admiral Yi, the Chinese under Admiral Chen Lin were willing to take Japanese bribes in order to let the enemy leave in peace, but Admiral Yi refused. In any case, after negotiations followed by much maneuvering of ships, the Japanese managed to threaten the Chinese fleet gravely. Admiral Yi hurried to the rescue with his ships. A great battle was fought in the Noryang Strait, between Namhae Island the southern Korean coast. It was December 15, 1598. once again, the Koreans inflicted a devastating defeat on the enemy, this time with the help of their Chinese allies. Some reports speak of the loss of hundreds of Japanese ships. Unfortunately, the price was enormous: a stray bullet killed Admiral Yi as his fleet was pursuing Japanese ships in flight. Concerned to the last about the morale of his men, he insisted on his deathbed that his fate be kept secret until the battle was safely over.


이제독에 의하면, 진린 제독하의 중국인들은 적이 평화롭게 떠날 수 있도록 일본인의 뇌물을 받을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독은 거절했다. 어쨌든, 그렇게 많은 배들의 기동훈련 후 따른 협상들 이후에도 일본은 여전히 중국함대를 심각하게 위협할 수가 있었다. 이제독은 황급히 그의 배를 가지고 구하러갔다. 한국남쪽 해안 남해도 사이의 노량해협에서 거대한 전투가 일어났다. 그것은 1598년 12월 15일 이었다. 또다시 한번, 한국은 이번에는 중국 연합군의 도움과 함께, 적에게 통렬한 패배를 가했다. 어떤 기록은 수백척 일본 선박의 손실을 얘기한다. 불행히도, 댓가는 막대했다; 그의 기함이 도망가는 일본 선박을 쫓고 있을때, 지나가는 총알이 이제독을 죽인 것이었다. 죽을 때까지 부하들의 사기에 대해 염려되어, 제독은 임종시에 전투가 안전하게 끝날 때까지 그의 운명을 비밀에 부치도록 고집했다.


Admiral Yi was 53 years old. His men mourned him, while Admiral Chen Lin supposedly fell three times to the deck in mourning over Admiral Yi’s death. He was eulogized in Korea. The judgment of his old friend, Premier Yu Song Nyong, was typical: “he was capable of withholding the falling sky with a single hand of his.” Within two weeks of his death, Admiral Yi was granted the posthumous title of Third State Counselor. In 1605, he was posthumously given a feudal rank as Great Lord of Tokpung.


Admiral Yi was also lionized in China and eventually even in Japan. It is said, for example, that Japanese Admira


이제독은 53세였다. 그의 부하들은 그를 애도했고, 진린은 이제독의 죽음을 애도하며 갑판에 세번이나 쓰러졌다고 한다. 그는 한국에서 칭송을 받았다. 그의 오랜 친구 영의정 유성룡의 판단은 전형적이다: ‘그는 무너지는 하늘을 한손으로 떠받힐 수 있었다.’ 사망 후 2주안에, 이제독은 좌의정이란 사후직위에 추증되었다. 1605년, 그는 사후에 덕평부원군이라는 봉건제 직위가 주어졌다.

 

이제독은 또한 중국에서 유명해졌고, 결국 일본에서도 유명해졌다. 예를 들면, 1905년 대마도 전투에서 러시아를 이긴 위대한 승자, 일본 제독 타고 헤이하치로는 이제독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군 지휘관이라고 일컫었다고 알려진다. 오늘날, 남한에 이제독의 조상전래의 집은 국가 영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