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인물

정조를 위한 변명

한부울 2009. 4. 7. 14:32
 

정조를 위한 변명 - 1

옛 그림 이야기 2009/02/10 09:35 이충렬


어제(2월 9일), 정조의 비밀 편지 299통이 공개되었다. 1796년 8월20일부터 1800년 6월15일까지, 예조판서와 우의정 등을 역임한 노론 벽파(僻派)의 거두 심환지(沈煥之.1730-1802)에게 보낸 비밀 편지다.


이 편지들 중에는, 정조가 심환지에게 자신의 건강에 심대한 이상이 있음을 여러 차례 알렸다는 내용이 있어, '심환지의 정조 독살 의혹'은 종지부를 찍어야 할 형편이 되었다. 추측과 심증에 의한 역사해석이 얼마나 위험한지가 증명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여러 언론에서는...


편지 내용 중, 최측근인 노론계 서영보(1757~1824)를 “호로자식(胡種子)”, 촉망받던 젊은 학자 김매순은 “젖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 학문적 정적을 비방하는 일부 유생들을 겨냥해 “오장에 숨이 반도 차지 않았고” “도처에 동전 구린내를 풍겨 사람들이 모두 코를 막는다”는 등의 비속적 표현을 썼으니...


정조는, ‘학자 군주’라기보다 능수능란 ‘고단수 정객’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어느 일간지 기자는 "200여 년 전에 부친 왕의 편지. 이를 통해 우리가 익히 알던 18세기 ‘성인 군주’를 잃어야 할지는 모르지만" 이라고 썼다.

 

[그림전부 원본클릭]

 

                      왼쪽에서 다섯 번 째 줄 아래에 '뒤죽박죽'이라는 한글이 보인다.


어제 언론의 평가에 따르면, 정조는 '욕쟁이 정치꾼'이라는 소린데 그건 아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 최초로 전해진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를 소개하면서 숙종과 그 시대는 다시 평가되어야 한다고 했듯이, 조선시대의 왕들은 하나의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동시대에 세상에 존재하던 왕들 중에서 공부를 가장 많이 한 '학자'들이었고, 어려서부터 '제왕학'을 공부한 '전문 정치인'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학자와 정치인의 두 가지 모습이 있다. 


따라서 성리학이라는 학문에 기반을 두었던 조선시대의 왕과 그들의 통치형태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학자와 전문 정치인 양면을 보고 평가해야지, 어느 한쪽만 보면 정당한 평가를 할 수 없다.  정조도 마찬가지다.

 

                                            영조의 <연강시> (간송미술관 소장)

 

                                                 간송미술관 최완수 연구실장 번역


위의 자료에서 볼 수 있듯이 정조는 설날에도 83세의 할아버지 영조 아래서 공부를 했다. 영조는 세손 정조에게 그렇게 '제왕의 길'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런 '제왕 훈련'은 어렸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상풍에 긔후 평안하오신 문안 아옵고져 바라오며 뵈완디 오래오니 섭~ 그립사와 하옵다니 어제 봉셔 보압고 든~ 반갑사와 하오며 한아바님 겨오셔도 평안하오시다 하온니 깃브와 하압나이다. 元孫"

(가을바람에 기후 평안하신지 문안을 알기를 바라오며 뵌 지 오래되어 섭섭하고도 그리워하였사온데 어제 봉한 편지를 보고 든든하고 반가워하였사오며 할아버님께서도 평안하시다 하시오니 기쁘옵나이다. 원손)


이 한글 편지는, 정조가 8살 원손 시절 외숙모에게 보낸 문안편지이다. 어려서 부터 한문뿐 아니라 한글 공부도 했고, 친인척에 대한 예의범절을 배웠다. 학문과 제왕학 뿐 아니라 인성교육도 함께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심성은 훗날 왕이 되어서도 이어진다.

 

                                 정조 어찰(왕의 편지)  출처 : <묵적> (명문당 발행)

 


이 편지는 위의 한글 문안 편지를 쓴 종이처럼 꽃 무늬가 찍힌 시전지에 쓴 걸로 봐서, 신하가 아니라 왕실 친인척 누군가에게 보낸 새해 선물 편지로 보인다. 정조는 신하에게 편지를 보낼 때는 도장을 찍었기 때문에 친인척에게 보낸 편지라고 추정할 수 있다.

 

                                  정조 <김참판에게 보내는 선물 편지> 출처 : <묵적>

 

                                   큰 곶감이 아니라 곶감이라는 부분이 눈에 띈다.


조선 시대의 왕들은 시서화에 능했다. 시는 공부를 했으니 당연히 잘 짓고, 글씨 역시 연습을 많이 했으니 명필이 많다. 그림은 글씨를 쓰면서 붓과 먹에 익숙해있고 세자시절 그림의 기본을 배워 웬만한 문인화가 못지않은 솜씨를 가진 임금이 많다. 예를 들어 영조는 세자 시절 겸재 정선에게 그림을 배웠다.

 

                                    정조 <정혜공 연시 잔치의 시> (간송미술관 소장)

 

                                           간송미술관 최완수 연구실장 번역

 

          정조 <임지로 떠나는 철옹부사에게> 201.8 x 73.3cm 1799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미술사학자 고 오주석 선생의 글에 의하면, "정조는 글씨 쓰기를 좋아하여 두 살 때 글자 모양을 만들었고, 서너 살 때는 필획을 이루어 날마다 그것으로 장남을 삼았다고 한다. 심지어 여섯 살 때 쓴 글씨로 병풍을 만들었다 전하는 사람도 있다."라면서 정조의 글씨는 바르고 단정하다고 평가했다.


시(詩)와 서(書)를 봤으니 이제 화(畵), 그림을 볼 차례다.

 

           정조 <들국화> 종이에 수묵 84.6 x 51.5cm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보물 제743호


이 작품은 고 혜곡 최순우 선생을 비롯해 많은 미술사학자들이 매우 잘 그렸다고 평가한 작품이다. 일본에 살던 왕손의 소장품이었는데, 어느 재일동포가 구입해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해 고국에 돌아오게 되었다.


정조의 내면적 모습이 느껴지는 듯 한 작품이다. 왕 혹은 왕세손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쓸쓸함을 그림 속에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국화꽃 위에 메뚜기 한마리를 그려 넣었는지도....

 

             정조 <파초> 종이에 수묵 84.6 x 51.5cm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보물 제743호


왕은 외롭고 고독하지만, 꿋꿋함과 고고함을 잃으면 안된다. 정조는 그렇게 외로운 삶을 살았고, 자신의 능력을 믿었기에, 편지에다 자신의 속마음을 나타냈고 마음에 차지 않는 신하들을 우습게 알면서 욕을 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번에 발굴된 편지들은, 왕이기에 갖고 있는 내면의 한 모습일 뿐, 정조의 전체를 평가하는 잣대로 삼을 수는 없다.

 

               정조 <묵매도> 종이에 수묵 123.5 x 62.5cm 1777년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이 작품은 정조가 28세 께, 작은 외숙에게 그려준 작품이다. 직업 화가의 그림이 아닌 문인화로서 이정도면 상당한 수준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 정조는 이렇게 시서화에 능하고 공부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백성들을 생각하는 정치를 하려고 한 성군이었다.


따라서 이번에 발굴된 편지들은,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왕이, 자신들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신하들에 대한 불신과 경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편지들 속에서 비속어가 보이고, 정치술이 보인다고 하여  정조가 성군이 아니었다고 단정하려는 듯한 기사는 매우 위험하다. 그 편지들은 정조의 통치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백성들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아니, 그는 백성들을 어떻게 생각하며 나라를 다스린 임금이었을까?  정말로 성군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줬을까? 그 답 또한 몇 점의 그림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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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를 위한 변명 - 2

[오마이뉴스]2009-02-11 17:33:58


정조는 백성들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아니, 그는 백성들을 어떻게 생각하며 나라를 다스린 임금이었을까?  정말로 성군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줬을까? 그 답 또한 몇 점의 그림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어제 글의 마지막 부분이다... 그렇다면, 어떤 그림에서 임금과 백성의 관계가 설명될 수 있을까?  아니, 그런 그림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사실, 다른 임금들에게는 그런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그림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조에게는 있다. 그것도 아주 자세히 알 수 있는 여러 점의 그림이 남아있다.


(그림 설명 중 일부는 이전 연구 자료들에서 부분적으로 발췌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화성능행도 8폭 병풍> 작가미상 비단에 채색 각 폭 크기 142 x 62cm (전체 크기 142 x 496cm)  1795 ~ 1796년 경 추정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정조와 백성들의 관계는, 이미 잘 알려진 이 병풍 그림 속에 있다....  정조 19년인 1795년 윤 2월 9일부터 8일동안 정조의 행적과 행사의 내용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정조가 백성을 어떻게 생각했고, 백성이 정조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먼저, 구체적 일정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윤2월 9일 창덕궁 출발, 시흥행궁 유숙, 10일 화성행궁 도착ㆍ유숙,11일 화성 성묘 배알, 낙남헌 과거시행, 12일 현륭원 전배, 서장대 성조 및 야조, 13일 봉모당 회갑연 거행, 14일 낙남헌 양노연 거행, 득중정 어사, 15일 화성행궁 출발, 시흥행궁 유숙, 16일 시흥행궁 출발, 창덕궁 환궁.


정조는 한양으로 돌아온 후, 행사의 내용을 묘사한 도설(圖說)을 제작하고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의 머리에 첨가하도록 지시하였는데, 이 도설작업은 윤2월 28일 의궤청의 건의로 이해 1월 연풍현감에서 파직된 김홍도가 주관자(主管者;‘專管’者)로 임명되어 그의 지휘 아래 제작되었다. 그래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는 밑그림 비슷한 그림이 많이 담겨있고, 이런 이유때문에 한때 8폭 병풍도 김홍도가 그렸다고 알려졌었다.


그러나 의궤의 기록에 의하면 병품 그림은 김득신, 최득현, 이명규, 장한종, 윤석근, 허식, 이인문 등 실력이 쟁쟁한 화원들이 그렸고, 이 병풍을 헤경궁에게 진상하자 칭찬과 포상을 받았다고 하니...  김홍도는 의궤의 도판 그림 정리 작업을 하느라 병품그림 제작에는 참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전해지는 8폭병풍은 리움 소장품 외에도 국립중앙박물관과 궁중유물전시관(구 창덕궁)에도 거의 같은 병풍이 있으니, 어느 병풍이 진상품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리움의 경우 화가 소개를 '작자미상',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김득신 외'라고 표기한다.

 

# 정조의 경로사상와 구휼의식

 

                      <낙남헌양로연도(洛南軒養老宴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이미지


윤2월 14일 오전, 정조가 낙남헌에서 영의정 홍낙성(洪樂性) 등 능행에 수행한 노대신(老大臣) 15명과 수원부의 노인 총 384명에게 양로연을 베푸는 장면이다. 그러나 기록화에서는 왕의 모습을 그리지 않기 때문에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 잔치에 초대받은 80세 이상의 사서인(士庶人) 노인은 무려 209명이나 되고, 99세 3명, 97세 1명 등 90세 이상 노인만도 17명이나 됐다. 정조는 이날 '경로잔치'뿐 아니라, 화성부에 사는 홀아비와 과부, 고아, 독자 등 539명과 가난한 백성 4천813명에게 쌀과 소금을 나눠 주고, 죽을 쑤어 나눠줬다.


쌀을 나눠 줄 대상자는 미리 선발해 뒀다. 쌀을 나눠 주는 지역을 4곳으로 나눠 성곽 내외의 도시 지역은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에서 왕이 친림한 가운데 진행됐다. 주변 지역은 승자들을 보내 산창(山倉)과 사창(社倉), 해창(海倉)으로 보내 왕을 대신해 나눠 주도록 했다.


화성행궁에서 음식물이 분배되는 동안 정조는 신풍루에 올라가 이를 지켜봤고, 백성에게 주는 죽을 직접 맛보기도 했다. 이 행사를 통해 화성부 인구의 10분의 1 정도가 혜택을 받게 됐다.


쌀과 소금은 4개 지역으로 나눠 배급됐다. 나이와 남녀에 따라 차등을 뒀으며, 이때 나눠 준 쌀이 모두 368석에 달했다.


정조는 당시 '화성 능행' 행사를 위하여 10만 3천여 냥의 재원을 조성하였는데,  그 자금의 일부를 떼어내어 제주도의 진휼곡(賑恤穀)으로 보냈고, 행사 후 남은 자금을 3도(都)와 8도에 분급하여 진휼곡으로 쓰도록 하였다.


이쯤되면 어진 임금이라고 할 수 있다.

 

#군사훈련을 시키면서 백성들이 다치지 않게 주의했다.

 

                                 <서장대성조도(西將臺城操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윤2월 12일 밤, 정조가 화성의 서장대(西將臺)에 갑옷을 입고 행차하여 군사조련을 실시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화면 제일 아래에 위치한 문은 동문인 창룡문(蒼龍門)이고, 중앙 좌우변의 대문은 오른쪽이 북문인 장안문(長安門), 왼쪽이 남문인 팔달문(八達門)이다.


당시 정조는 투구와 갑옷을 입고 직접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西將臺)에 올라가 군사들의 조련을 지휘했다. 무기로는 낭기(浪機)와 조총(鳥銃), 신포(信砲), 삼안총(三眼銃) 등이 동원됐으며, 여기에 참가한 군사는 모두 3천700여 명이었다.


정조는 군사훈련때 사용하는 총포에 백성들이 다치거나 피해를 입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줬다는 기록이 있고, 훈련이 끝난 뒤 수백 명의 장병들에게 궁시(弓矢)와 포목 등을 상으로 하사했다. 따라서 정조는 공권력으로 백성에게 위화감을 조성하는 임금이 아니라, 피해가 가지 않도록 배려하는 임금이었다... 


# 유생들과 함께 공자에게 절했다

 

                                        <알성도(謁聖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윤2월 11일, 정조가 화성에서의 첫 번째 공식행사로 거행했던 성묘(聖廟) 참배 장면이다. 학문을 사랑하는 정조의 유학진흥(儒學振興)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孔子)에서 주희(朱熹)에 이르는 21명의 중국 성현과 설총(薛聰)에서 박세채(朴世采)에 이르는 15명의 우리나라 유학자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가장 뒤쪽의 대성전(大成殿) 위에 큰 차일을 치고 뜰에는 청금복(靑衿服)을 입은 유생(儒生)들이 시좌한 가운데 지금 섬돌 위의 오른쪽에서 정조가 4배를 올리는 장면을 상징적으로 묘사하였다. 대성전의 신문(神門) 앞에는 산선(?扇) 시위(侍衛)들이 서있고, 그 앞에 수행한 문무백관이 동서로 나뉘어 시좌하였다.


이곳에서 참배를 마친 정조는 행궁으로 돌아와 낙남헌(洛南軒)에서 문과와 무과 별시(別試)를 실시했다. 길과 산자락에는 구경나온 백성들이 매우 자유로운 동작으로 묘사되어 있다. 정조는 백성들에게 자유롭게 '임금 구경'을 할 수 있게 한 임금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정조는 그렇게 백성들과 가까이 하려고 노력한 임금이었다.

 

 

군졸들과 일반 백성들이 어울려 앉아 있는 모습에서, 당시의 사회가 편안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임금이 백성을 위하면 그 아래 군졸도 백성에게 함부로 하지 않지만, 만약 임금이 백성을 무시했다면 군졸들도 백성을 무시하고 백성 위에 군림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 백성과 함께 불꽃놀이를 즐겼다

 

                                  <득중정어사도(得中亭御射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윤2월 14일 오후 정조가 화성행궁 안의 득중정(得中亭)에서 신하들과 함께 활쏘기를 한 다음 저녁에 혜경궁을 모시고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장면이다.


계단 앞 어사대(御射臺)에는 지금 혜경궁이 나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잠시 행차하여 가마를 열어 놓은 채 불꽃놀이를 구경하고 있지만, 임금의 어머니도 그리지 않기 때문에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매화포가 폭발하는 광경 가까이 백성들이 있으니, 백성들과 함께 한 불꽃놀이라고 할 수 있다. 정조는 그렇게 백성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려고 했던 임금이었다.

 

 

 

# 정조는 백성의 목소리를 들으려 했고, 백성은 임금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시흥환어행렬도 始興還御行列圖 >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윤2월 15일, 화성행궁을 출발하여 서울로 올라오면서 이제 막 시흥행궁 앞에 다다른 장대한 행렬을 묘사한 작품이다. 처음으로 혜경궁을 모시고 함께 능행하여 무려 6,000여 명의 인원과 1,400여 필의 말이 동원된 가장 성대했던 행렬의 장관을 보여준다...


그림의 내용은 시흥행궁을 멀리 바라보면서 그 남쪽의 안양교(安養橋) 앞길에서 행렬을 잠시 멈춘 다음 정조가 직접 혜경궁에게 미음(米飮)과 다반(茶盤)을 올리릴 때의 광경을 담은 것이다. 산 왼쪽 건물이 정조가 능행을 위해 세운 시흥 행궁이다.  

 

 

화면 중앙에 미음을 들기 위해 푸른 휘장으로 가린 혜경궁의 가마가 보이고, 그 바로 뒤에 산선(?扇)을 받고 있는 정조의 좌마(座馬)가 서 있다. 그리고 그림 아래 길가 빈터에 수라를 실은 수레(水刺架子)와 음식을 준비하는 막차(幕次)가 보인다.


원래 정조는 전체 그림의 중간 조금 아래에 보이는 용 깃발 앞에서 말을 타고 가야 하지만, 어머니보다 앞서 갈 수 없다는 효심에 헤경궁 뒤에서 따라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래의 세부도를 보면, 당시 백성들은 정조를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니, 봄나들이 하듯 산언덕이나 길 옆 둔덕에 앉아 편안한 자세로 임금과 임금의 어머니의 행차를 구경하러 나온 것이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품 부분도


정조는 모두 15차례의 화성능행 길에 백성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으려고 노력한 임금이었다. 재위 3년째에는, 상언(上言)·격쟁(擊錚 임금 행차길에 꽹과리를 두드리며 억울함을 호소하던 제도)을 할 수 있는 신분적 차별의 단서들을 철폐하여 누구든 억울한 일은 무엇이나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도록 하여 능행(陵行) 중에 그것들을 접수하도록 하였다.


그렇다. 정조는 백성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백성은 정조가 그런 임금인 줄 알기에 편안한 자세로 그의 행차를 구경했을 것이다. 정조와 백성은 이렇게 가까웠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품 부분도


오른쪽 아래가 수라를 실은 수레(水刺架子)와 음식을 준비하는 막차(幕次)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작품 부분도


사방에 백성들이 있지만, 모두들 편안한 자세로 행차를 구경하고 있다.  백성들의 편안한 모습은 강요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임금이 백성을 편하게 했기에 백성도 편하게 임금을 구경하는 것이지, 만약 백성을 무섭게 하는 임금이었다면, 이렇게 편한 자세로 구경하는 일은 꿈도 못 꿨을 것이다.


정조는 이번 비밀편지 발굴에서 보듯이, 신하들에게는 어렵고 무서운 임금이었는지 몰라도, 백성들과는 소통하려고 노력했고, 학문과 문화를 발전시키려고 한 임금이었다. 그래서 정조는 성군이었다.


그런데,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편지 299통에 일부 과격한 언사가 있고 정치술이 보인다고, 그를 폄하하려는 자세를 보이는 것은 온당치 않다.  


이번에 발굴된 편지는 비밀편지인 동시에 정치적 목적을 띄고 있는 편지들이다. 그의 통치방법 중의 하나였을 뿐이고, 결국 그 편지들은 역사 서술을 위한 또 하나의 보조 자료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 비밀편지 발굴 기사는, 아래 소개하는 <경향신문> 김재중 기자의 기사가 정확했고 역사학의 관점에서 온당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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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신하인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편지 299통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학계의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다. 조만간 정조어찰첩이 출간돼 연구자들이 본격 검토에 들어가면 정조의 통치 스타일에서부터 정조의 정치적 위상, 정치 집단간 세력판도 등을 새롭게 조명하는 논쟁이 벌어질 전망이다.


먼저 학자풍의 이상적인 군주로 그려지던 정조의 통치 방식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비밀편지라는 수단을 통해 신하들을 조종하는 등 공식적 통치행위의 이면이 밝혀진 것이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는 “정조뿐 아니라 당대 여러 왕들이 세도정치 하에서 신하들과 깊은 의견조율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보이는 만큼 더 많은 1차 사료가 발굴돼 입체적인 연구가 가능해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정조가 펼친 개혁정치의 주도권이 어디에 있었느냐를 둘러싼 학계의 논쟁구도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정조와 각 당파에 대한 연구자들의 학문적 입장에 차이가 있는데 이번 자료가 새로운 논쟁거리를 제공한 것이다. 어찰첩 연구에 참가한 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남인적 시각, 시파적 시각을 가진 분들이 많고, 벽파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분들은 그리 많지는 않은데 이번 자료로 벽파적 시각을 가진 분들이 힘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박광용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도 “정조시대 연구에 있어 시대정신을 정조가 이끌었다는 입장과 노론계의 주류가 이끌었다는 주장으로 나뉜다”면서 “이번 자료는 정조가 노론 주류를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려고 노력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후자 쪽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조가 펼쳤던 탕평책의 진면모가 드러났다는 해석도 제기됐다. 정치적 반대파로 알려진 심환지와 속 깊은 편지를 나눈 것은 정조의 탕평책이 정치적 수사나 구호가 아니라 실질적인 신념에 근거했다는 것이다. 김성윤 경북대 사학과 교수는 “이번 자료는 정조의 탕평정치가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관되게 정적들도 같이 가면서 새로운 정치문화의 차원으로 이끌어 보려고 노력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말했다.


자료가 공개되자마자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정조 독살설 기각론’은 오히려 초점을 흐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김문식 교수는 “고의학 연구자들이 이번 자료에 나오는 증세와 처방을 보면서 의학적 연구를 할 부분이지 역사학자가 논할 부분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오마이뉴스]김재중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