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문체반정에 대한 학계의 두 평가
[한겨레]2008-02-14 오후 02:33:35
정조
“책과 사상을 탄압” “노론 견제 노림수”
문체 오염 내세워 중국서적 수입 금지
성리학에 어긋나는 이단적 사유 색출
조선 22대 왕인 정조(1752~1800)에게는 ‘개혁군주’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규장각을 설치해 문예부흥을 이끌고 서얼을 등용해 신분 차별의 완고한 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또 시전 상인의 독점적 상업특권인 금난전권을 철폐하는 등 민생 안정을 위해 기득권 세력과의 전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행적 모두가 ‘개혁’에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문체반정’이다. 정조는 당시 유행하던 소설체 문장을 잡문체라고 규정하고 전통적인 고문을 문장의 모범으로 삼도록 했다. 문체 오염을 이유로 중국으로부터 고증학과 패관소설 등 명말청초의 문집을 포함해 모든 서적의 수입을 금했다. 주자학적 세계관을 뛰어넘는 새로운 사유와 지식을 담은 명말청초 서적들이 금서로 묶여 버린 것이다. 이를 두고 연구자들은 대체로 비판적인 견해를 보였다.
강명관 부산대 교수는 지난해 펴낸 책 〈안쪽과 바깥쪽〉(소명출판) 등에서 “정조는 책과 사상의 탄압자”로 기억될 뿐이라고 했다. 그는 문체반정의 본질을 “성리학에 어긋나는 이단적 사유를 색출한다는 것”이라며 정조는 그가 다스리는 세상이 가장 보수적인 정통주자학에 의해 완벽하게 작동하기를 원했던 사람이라고 단언했다.
김태희 다산연구소 기획실장도 연구소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통해 문체반정은 문예부흥 정책의 내용과 성과를 부정하는 정조의 자기모순이요 자기부정이라고 규정했다. 정조 사후 정순왕후는 ‘사학(邪學) 종식’이라는 정조의 명분을 앞세워 실학자 등 개혁 세력 탄압에 나선다. 때문에 정조 사후 전개된 “세도정치와 피의 민란”에 정조의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 힘들다는 게 김 실장의 견해다.
이에 대해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최근 펴낸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1~2〉(고즈윈, 각권 1만2800원)에서 다른 견해를 폈다. 그에 따르면 문체반정은 천주교에 대한 국가 차원의 전면 탄압을 막고 당시 지배층인 노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정조의 깊은 노림수가 담긴 방책이다. 당시 천주교도들은 노론과 대립하고 있던 남인이 다수를 차지했다. 이 소장은 문체반정의 시발이 된 시점이 양반 출신의 두 천주교도가 부모의 신주를 불태웠다는 소문이 도는 ‘진산 사건’ 때와 같은 점에 주목했다. 천주교 금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질 것을 우려한 정조가 대신 패관소품과 명말청초 문집을 비판하면서 정국의 물줄기를 돌렸다는 것이다. 천주교를 뜻하는 서양학을 금지하려면 먼저 명말청초 문집부터 금지해야 한다는 논리로 천주교에 대한 전면 탄압을 피해 갔다는 것이다.
노론 잡문 적발로 천주교 탄압 막아
중국 학문 기대는 조선 사대부 비판
이 소장은 문체반정으로 반성문을 썼던 관련자들이 모두 노론 가문 출신이었음을 강조했다. 자파 가문 출신이 문체반정의 대상으로 계속 적발되는 상황에서 노론이 더 이상 천주교 공격에 나서기 어렵게 되었다는 게 이 소장의 해석이다.
그는 또 문체반정을 ‘성리학적 세계관의 확고한 성채 쌓기’라는 해석에도 이견을 보였다. 중국 서적 수입 금지는 중국 학문에 기대는 조선 사대부들의 태도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태어났으면 또한 우리나라의 책을 읽는 것이 마땅하다”(정조, 〈일득록〉 5)는 것이다. 특히 정조의 고증학 비판은 그 이단적 사유에 주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만주족이 장악한 청나라 지식인들이 현실을 비판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현실과 무관한 고증학에 몰두하고 있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이 소장은 지적했다. “성리학자를 자처하는 조선의 사대부가 어찌 북벌에 뜻을 두지 않고 청나라의 고증학에 경도되느냐”는 비판이라는 것이다.
이 소장은 정조가 박지원의 문체를 문제 삼은 대목에 대해서도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정조의 내심은 박지원을 크게 등용하는 데 있었다는 것이다. 정조는 박지원에게 순수하고 바른 글을 한 편 지어 〈열하일기〉의 죗값을 치르라고 요구한 뒤 “(그렇게 한다면) 문임(文任)이라도 주기를 어찌 아까워하겠는가?”라고 했다. 문임은 홍문관·예문관의 제학을 뜻하는 요직이다. 박지원과 같이 과거를 거치지 않은 음관이 이 직위를 맡은 적이 거의 없으니 대담한 회유책인 셈이다. 이 소장은 또 박지원이 노론 가문 출신이 아니었다면 아예 문체반정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정조의 죽음과 동시에 조선은 미래에서 과거로, 개방에서 폐쇄로, 소통에서 단절로, 사랑에서 증오로 돌아섰다면서 그가 5년만 더 살았다면 조선의 운명은 바뀔 수 있었다고 마무리했다.
[한겨레]강성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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