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신라의 선도산은 신라땅 절강성에 있었다.

한부울 2009. 4. 3. 01:48
 

신라의 선도산은 신라땅 절강성에 있었다. 

[지구조선사연구회]09.04.02 19:35

 

http://www.breaknews.com/new/sub_read.html?uid=72736§ion=section1

[잃어버린 국사] 선도산 성모는 혁거세와 고주몽을 낳았다. 박병역 칼럼니스트  

 

                                      ▲가짜 경주 타워  © 박병역 칼럼니스트 


경주세계문화엑스포2007의 쇼를 즉각 중단하라


지금 천년고도 경주에는 경주세계문화엑스포2007은 '천년의 빛, 천년의 창' 이라는 주제의  얼빠진 작태의 굿판이 한창이다. 즉 신라 삼보(三寶) 중 하나인 황룡사 9층 목탑을 모티브로 만들었다는 82m높이의 경주타워는 최첨단 멀티미디어의 불빛 쑈를 펼치고 있다. "천년의 불빛"이 아니고 2천년의 불빛은 그야말로 얼빠진 7천만 국민을 희롱하는 광란의 불빛이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2007은 문헌상 “2천년의 빛” 이라 해야 합당한 것을 '천년의 빛, 이라 하니 어찌 7천만 국민을 기만하는 진짜 광란의 쑈가 아니고 무엇인가? 즉 경주는  신라시대(기원전 57~935년)의 천년 왕도이다,  고려시대(918~1392)는 동경(東京)이며,  조선시대(1392~1896년)는 병마절도사를 두었던 2천년의 지방 행정 중심도시 이었다.


그런데 한일문화유적답사연구소의 故박정호 선생이 소장한 신라의 고도 경주고적안내(新羅の古都 慶州古蹟案內)에 의하면 일제식민지 때의 1936년 당시 경주읍의 총 인구는 19,748명 이었다면 지금의 경주는 일제에 의해 신라 천년의 왕도로 급조한 실증적 증서이며 살아있는 명확한 입증이다. 정녕 7천만 한국인은 두 번도 생각하지 못하는 단세포적 민족인가?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7천만 한국인은 정녕 얼빠진 민족인가?


경주는 문헌상 무려 2천년의 행정 도시 인구가 1936년에 19,748명이라면 개가 멍멍 짖고 소가  비웃을 일이 아니겠는가? 정녕 경주시민은 단세포적 인간이 아니고 사람이라면 [2007경주세계문화엑스포]의 광란의 굿판을 즉각 중단하고, 진실로 각성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잃은 순국선열에게 진심으로 참회하는 조곡(弔哭)의 천고(天鼓)를 울려야 마땅할 것이다.


7천만 大韓國人아...! 진실로 각성하고 깨어나라!


신라 천년의 왕도 경주는 일제식민지시대의 [1895년 전국 지방관제 개편]에 의해 비로소 한반도 속에 신라 천년의 왕도로 급조한 확실한 실증(입증)이 곧 1936년 일제가 발행한 신라의 고도 경주고적안내(新羅の古都 慶州古蹟案內)가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제는 1910년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하고, 중국 대륙에서 건국되었던 신라를 한반도 속으로 축소하고, 거짓 가짜로  편찬된 조선사(현행 국사)와 얽어 맞추기 위해 [1895년 전국 지방관제 개편]을 단행 했던 것이다. 넋을 잃은 7천만 대한국인은 아래의 [특보 제2편]의 본문을 읽고 진실로 각성하여 깨어나라.


[특보 제2편]신라의 선도산은 중국 절강성에 있었다


[1] 신라왕은 오직 하느님을 숭배했다


[부도지] 고조선 삼한이 멸망에 이르자 유랑하던 고조선 삼한의 백성들은 마침내 삼신(하느님)에게 제사를 올리는 천부도(天符都)의 명지단(明地壇:제천단)을 봉해버리고, 동쪽 海濱(해빈)으로 피하여 빈 공지 땅의 사례벌(斯禮筏)에 이르렀다. 사례벌 광야(曠野)에는 긴 깃대를 걸어 놓고 유배된 사람이, 아침에 내걸고, 저녁에 거둬들여서, 지키는 사람으로 하여금, 먼 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도망가지 않았음을 알리게 하는 깃 빨이었다.


곧 육촌(六村) 가까이 살고 있던 여러 부족이 분담하며 함께 보위(保衛)하였다. [고조선 3한]의 각 부족을 한(韓)민족이라 하였는데 韓(한)나라는 천부도를 보위 한다는 뜻이다. 북쪽에 마한이 있고, 남쪽의 변한, 동쪽의 진한은 각각 자치를 행하였다. 삼한(三韓)을 통칭하여 한국(韓國)이라 칭했는데 선세(先世) 고조선의 천부도를 굳게 지키었다.


신라는 삼신(三神:여호와 하느님)을 숭배하고, 제사를 주제(主祭)하는 제사장의 나라로서 천부도(天符道)를 지키며 나라를 보위하는 일에 전념하여, 국력은 방비할 여력이 거의 없었다. 이 때 서방 하토(夏土)는 서로 땅을 빼앗는 쟁탈의 바람이 점차 격심하여, 삼한에 까지 동요와 혼란이 파급되므로, 육촌의 사람들이 서로 모의하였다. 서쪽의 화가 점차 우리나라에 임박하여, 보수(保守)하기가 장차 위태로워 어쩔 수 없이 통합 방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국경의 경계를 설정하고, 혁거세를 추대하여, 통어(統御)하는 일을 위임하고 모든 부족 역시 수령을 두어 방비하게 하였다.


먼저 육부(六部)의 촌장(村長)들이 약(藥)을 캐는 날에 모여서 회의를 하였는데 선도산 단묘(仙桃山壇廟)의 성모(聖母)가 알을 낳았다는 말을 듣고, 여러 사람이 가서 보았다. 동쪽의 우물을 보로 덮어 가리고, 껍질을 벗겨서, 남아를 얻었다. 몸에서 빛이 나고, 귀가 부채만큼 컸다. 곧 박(朴)으로 성을 삼고,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하였다. 명지단(明地壇)의 어음이 지상을 밝게 한다. 는 뜻이기 때문에 밝다에서 박을 취하여 성씨로 삼고 몸에서 빛이 났기 때문에, 빛날 혁(赫)자로 이름 하였다. 즉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천리(天理:근본 이치, 자연의 법칙) 깨우치게 하여 중생을 구원한다는 뜻이다.


육촌의 사람들이 함께 양육하니, 점차 자라면서, 신기(神氣)가 수명(秀明)하고, 도리(道理)를 깨우쳐 덕성을 겸한 대인(大人)이었다. 13세에 이르자 여러 사람이 추거(推擧)하여, 거서간(居西干)이 되었다. 거(居)는 거(据)요, 간(干)은 방(防)이요, 장(長)은 곧 투쟁을 일삼는 서방에 의거하여, 경계하는 방어장(防禦長)의 뜻이다. 즉 서방의 하(夏)나라는 남의 나라를 침략을 일삼고 사도(詐道)를 행하는 자들이다.


혁거세씨는 천성(天性)이 어질고 지혜와 덕성을 겸한 神聖(신성)이시다. 또한 현비(賢妃) 알영(閼英)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 때 사람들은 두 사람을 가리켜 이성(二聖)이라 하였다. 여러 부족을 능숙히 통솔하며, 선세(先世)의 천부도를 행하며, 제시(祭市)를 설치하여 나라가 부흥하였다. 남쪽 태백산(太白山:산동성 태산)에 천부소도(天符蘇塗)를 건설하였다.


중대(中臺)에 천부단을 설치하고, 보단(堡壇) 동서남북에 4臺(대)를 설치하여, 계불의식(禊祓儀式)을 행하였다. 혁거세 대인(大人)으로 하여금, 금척(金尺)의 이치에 준거하여 천지시원의 근본을 증리(證理)하고, 옥관(玉管)의 음을 조절하여 율여화생법(律呂化生法)을 수증(修證)하였다. 혁거세왕은 해마다 10월 (3일)은 제천단에서 흰옷을 입고 백의제(白衣祭)를 행하였다. 이는 처음 황궁씨의 속신백모지의(束身白茅之義)를 따르는 제례의식이었다.


혁거세왕은 [선동성]의 달구(達丘:청구)에 조시(朝市)를 설치하고, 산서성의 율포(栗浦)에 해시(海市)를 열어, 육해 교역의 제도를 수립하였다. 항상 나라를 순행(巡行)하시며, 뽕나무를 많이 심어 농상(農桑)을 권장하시어 각 가정마다 베를 짜고 백성들은 비단 옷을 입었다. 인자하신 혁거세 대인(大人)은 항상 백성들에게 도리(道理)를 가르쳐 선행(善行)을 권장하여 백성들 또한 어질고 순박하여 농작물을 들에 쌓아 두어도 도적이 없었다. 이와같이 나라를 부흥시키고 여러 사람들과 고락(苦樂)을 함께 하였다. 비록 나라는 부강했으나 외국에는 방패와 창을 쓰지 않고, 이웃 나라와 더불어 평화를 보존하여 군자(君子) 국이라 칭하였다.


백성들은 한 마음 한뜻으로 옛 풍속을 지키는 일에 전념하시니, 신라 국경 내에 도리가 있어, 옛날 고조선과 흡사 하였다. 이 때에 弁韓(변한)과 진한(辰韓)의 제족이 합동하여 협력하니, 비록 경계를 두고 방비는 하였으나, 國(국:나라) 라고 칭하지 아니하고, 또한 왕이라고 칭하지도 아니하였다. 국경 내를 다스리는 정치제도는 선세(先世)의 법을 준수하여, 제회(祭會)에서 의결되지 아니하면, 일찍이 한가지의 일도 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수계위법(領首繼位法) 역시 씨족 혈통 계열에 한정할 필요가 없었으며, 비록 평민이나 제후국 사람이라도 현명한 사람을 선택하여 영수로 삼았다.


[신라는] 제 1세 혁거세왕이 서례벌(西禮筏)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창업한 후로 제 2세 남해왕 제 3세 유리왕에 이어 삼세(三世)를 지나니, 어느덧 백여 년이 되었다. 세상의 풍조가 크게 변하여 보수파들의 입지가 어려워졌다. 이에 국왕을 세워, 대권을 행사하자는 여론이 대두하여, 그 반대자들이 이러쿵저러쿵 나라가 시끄러웠다. 선세부터 지켜온 유법의 천부(天符:河圖)의 원리는 온 세상을 밝게 비추는 진도(眞道)이다.


지금의 시대는 비록 어렵더라도 나라를 튼튼히 방비하며 보수하고 그 때를 기다리는 것이 옳지 어찌 사단(詐端)에게 굴종하며 스스로 소자(小子)가 되어, 부모국도 모르는 패리(悖理)의 중국에게 모독을 당하는 것을 참을 수가 있겠는가? 차라리 이와 같이 된다면, 의롭게 목숨을 바쳐, 진도(眞道)를 뚜렷하게 나타내어,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것만 못 할 것이다.


왕을 세워 대권을 행사하자고 주장하는 진보파에게 찬성하는 사람들은, 외세가 긴박하여 파동이 격심하니, 어떻게 나라를 방비하겠는가?. 담장 안에서도 이반하여 시끄러움이 그치지 아니하는데, 어찌 천부도를 지키며 보수한단 말인가? 사태가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같이 경쟁해야지 나라가 부강하게 된 후에, 유업을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지금 사해 제족이 사도(邪道)에 미쳐 날뛰어, 눈 멀은 봉사가 된 지 이미 오래 되었다. 우리나라가 지금 자멸하면 누가 眞道(진도)를 현창하며, 후세에 누가 알아 볼 수 있겠는가? 만약 능히 방비하여, 보수한다 하더라도 세월이 오래되면 새 천 마리 중에 백로 한 마리와 같이 고립되어, 오히려 세상에서 존립할 수도 없는 다른 道(도:종교)가 될 것이니 장차 또 그를 어찌한단 말인가?. 이 같은 것은 다 옳지 못하며, 오직 선택은 왕이 대권(大權)을 집행하며, 군마를 호령하여, 파죽지세로 전진하고 부도 전역을 회복하는 것뿐이다.


부도를 다시 세워, [잃어버린 자신의 본성] 근본을 명확히 밝혀지면, 여러 부족들이 비록 완강하더라도, 반드시 각성하여, 근본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마침내 중론(衆論)이 德望(덕망)이 있는 사람으로 결정되어 왕국 수립을 주장하던 석(昔)씨에로 돌아 왔다.


석씨는 동보(東堡:인도) 유배인의 후예로, 옛날부터, 해빈(海濱)에서 살아오던 사람이었다. 체격이 장대하고 지략이 뛰어나 남해씨(南海氏)가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 이에 이르러, 대중의 여망에 따라, 탈해(脫解)가 왕위를 계승하고 비로소 왕이라 칭하게 되었다. 즉 보수(保守)의 질고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또한 서라국(徐羅國)이라 칭하고, 비로소 방패와 창을 사용하여 옛 삼한 국경 내를 모두 다 평정하였다.


[탈해]는 用兵術(용병술)을 과도하게 행사하여, 필경은 배척당하였다. 중론이 다시 박씨의 보수계로 돌아오니, 이에 박씨가 다시 계승하고, 왕국의 칭호를 폐지하였다. 4세를 지나, 중론이 또 석씨에게로 돌아갔으나, 단 정벌하는 일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벌휴씨(伐休氏)뿐이었다. 석씨 4세 사이에 정벌을 다시 시작하니, 중론이 중화(中和)를 주장하는 김씨에게 돌아갔다. 김씨는 원래 부도에서 동쪽으로 옮겨와 진한에서 살던 사람으로, 온양덕후(溫讓德厚)한 지마씨(祗摩氏)가 손녀를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


이에 이르러 미추씨(味雛氏)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미추 이사금(味鄒尼師今)은 [미추(味鄒)를] 또는 미조(味照)라고도 하였다. 성은 김씨이다. 어머니는 박씨로 갈문왕 이칠(伊柒)의 딸이고, 왕비는 석씨 광명부인(光明夫人)으로 조분왕의 딸이다. 그의 선조 알지(閼智)는 계림에서 났는데 탈해왕이 데려다가 궁중에서 키워 후에 대보(大輔)로 삼았다. 알지는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은 아도(阿道)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보(郁甫)를 낳았다. 욱보는 구도(仇道)를 낳았는데 구도는 곧 미추왕의 아버지이다. 첨해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미추를 왕으로 세웠다.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갖게 된 시초이다.


이 때 서북쪽은 계속 전쟁을 일으켜 환란을 당하여도 하나도 조치된 바가 없으므로, 중론이 다시 석씨에게로 복귀하였다. 이에 석씨가 다시 자리를 이어, 3세 사이에 征服(정복)하는 일이 허다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탕진하는 왕은 배척을 받는 시대이었다. 중론이 다시 김씨에게로 돌아가니, 이에 김씨가 다시 이어 오늘에 이르렀다.


오직 근본을 지키는 우리민족이 침략자를 피하여 동해에 살면서, 방비하고, 보수한 지 삼백여년 사이에, 중론의 번복이 이와 같았으니, 역외(域外)의 풍운이 어떠함을 가이 짐작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또 천부의 진리가 사단의 세상에서도 의연히 전해온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세 중론이 반드시 이 도는 무너지지 않는 것에 근거하였던 것이다.


신라의 역대 영수들이 오히려 중론의 소재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과격하지도 않고 느슨하지도 않게 능히 조절하여, 보수파들이 대도를 전하여 마침내 오늘날의 사람들로 하여금 천부의 실재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장차 후세의 사람들로 하여금 그 때 행한 天符(천부)를 습득하여 천부도를 다시 건설하고, 4해를 하나로 통합하여 평화시대로 이룩해야 될 것이다. 근본을 다시 찾는 眞理(진리)를 명증(明證)하자고 주장하던 당시 석씨 이론의 결과를 성취한 [사람이 현세에 출현한다면] 불행 중 다행이 될 것이다. 본문 끝.


[2] 선도산 성모는 혁거세와 고주몽을 낳았다.


[삼국유사] 임자년(BC 69) 3월 초 하루 날 6부의 각 촌장은 子弟(자제)를 거느리고 그들의 아버지 俱禮馬(구례마)를 모시고 閼川(알천) 언덕에 모여서 회의를 하였다. 아버지 구례마 의장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아직 임금이 없으니 난세를 맞아 백성들을 다스리기 어렵다. 德(덕)있는 君主(군주)를 옹립하고 나라를 세워 도읍을 설치하도록 하자.


이에 높은 남산을 바라보니 楊山(양산:강소성) 밑의 蘿井(나정) 우물곁에 이상한 빛이 땅에 드리워져 있고 白馬(백마) 한 마리가 꿇어 앉아 절하는 현상을 하고 있기에 그 곳에 찾아가 살펴보았더니 백마는 사람을 보고는 길게 울음소리를 내며 하늘로 올라가고 그 곳에 자주 빛(혹은 청색)의 알이 하나 있었다. 그 알을 깨고서 사내아이를 얻으니 모습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더욱 놀라운 것은 東泉寺(동천사: 詞腦野(사뇌야) 북쪽)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몸에서 상서스러운 광채가 났으며 온갖 새와 짐승들이 무리지어 춤을 추고 천지가 진동치고 해와 달도 淸明(청명)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름을 혁거세라 하였다. 혹 혁거세를 弗矩內王(불구내왕)이라고 하였다. 광명은 암흑세상의 중생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西述聖母(서술성모)가 혁거세왕을 낳았기 때문에 中華人(중화인)들이 선도산성모를 찬양했다. 는 말이 있고 성모(聖母)가 동국의 선도산으로 가서 신라의 시조 혁거세 성인(聖人)을 낳았기 때문에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를 찬양했다. 또한 상서스러운 鷄龍(계룡)이 나타나서 閼英(알영)을 낳은 것도 西述聖母(서술성모)님이 아니겠는가?


혁거세가 왕위에 즉위 하시고 호를 居瑟邯(거슬감 혹 居西干:거서간)이라 하였다. 처음 입을 열 때에 자칭 말하기를 한번에 일어나 閼智居西干(알지거서간)이라 하셨다. 이 같이 칭한 말씀으로 인하여 이 뒤부터 왕을 거서간이라 칭했던 것이다.) 이 시대의 세상 사람들은 다투어 賀禮(하례)하였다. 지금 天子(천자)가 이미 내려 오셨으니 마땅히 德(덕) 있는 왕후를 찾아서 聖君(성군)의 배필로 맞이해야 옳지 않겠는가?


이날에 沙梁里(사량리)의 閼英井(알영정 혹 娥利英井:아리영정)우물가에 鷄龍(계룡)이 나타나서 왼쪽 갈빗대에서 어린 여자 아이를 낳았는데 얼굴 모습이 뛰어 나게 아름다웠다.(일설에는 龍(용)이 나타나 죽었는데 그 배를 가르고 계집애를 얻었다고 했다. 얼굴 모습이 빼어나게 아름다웠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와 흡사하여 月城(월성)의 북쪽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차차 그 부리가 떨어 졌다. 그로 인하여 그 하천 이름을 撥川(발천)이라 하였다.


남산 서쪽 기슭(지금의 昌林寺(창림사)에 궁실을 세우고 두 성스러운 아이를 양육하였다. 남자 아이는 알에서 출생하여 그 알이 匏(박)과 같다 하여 鄕里(향리)의 사람들은 박을 朴(박)이라 하는 고로 그로 인하여 성을 朴(박)이라 하고 여자 아이는 우물에서 출생하였으므로 우물의 이름으로 이름을 알영(閼英:아리영(娥利英)이라 하였다.


혁거세 聖人(성인)은 나이 13세 때의 원년 갑자(서기전 57년)에 南韓(남한:진한)의 왕위에 옹립하고 여자 아이는 왕후로 삼았다. 국호를 徐羅伐(서라벌) 또는 徐伐(서벌) 혹은 斯羅(사라) 또는 斯盧(사로)라 하였으나(지금은 세속에 京字(경자)를 서울 京(경)자라고 가르치고 있으나 옛날은 서울을 徐伐(서벌)이라 했기 때문이다.)


처음 왕이 태어난 우물은 鷄井(계정)이기 때문에 혹 나라 이름을 鷄林國(계림국)이라 칭했다. 상서스러운 鷄龍(계룡)이 鷄井(계정)의 우물에서 나타나 閼英(알영)을 낳았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脫解王(탈해왕) 시대에 金閼智(김알지)를 얻었는데 숲 속에서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 하여 국호를 고쳐 鷄林(계림)이라 했다. 후세에 드디어 국호를 新羅(신라)로 정하였다.


혁거세왕이 나라를 다스린지 61년 3월에 왕은 하늘로 올라 가셨는데 7일 후에 遺體(유체)가 땅에 떨어져 흩어졌다. 왕후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떠나시니 나라의 사람들이 합장하려고 하였으나 큰 뱀이 나타나 쫓아다니며 이를 방해하여 五體(5체)를 각각 장례하여 五陵(오능)이 되었다. 역시 능의 이름을 蛇陵(사능)이라 하였다. 曇嚴寺(담엄사)의 북쪽에 이 陵(능)이 있다. 태자 南海(남해)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본문 끝.


[환단고기의 고구려 본기 제6] 사로(斯盧)의 시조 혁거세왕은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의 아들이다. 옛 부여 황제 궁실의 娑蘇(사소)라는 여인이 남편 없이 아이를 잉태 하여 사람들의 의심을 받게 되자 눈수(嫩水:만주 흑룡강성)에서 도망하여 東沃沮(동옥저)에 이르렀다. 또 배를 타고 남행하여 진한의 奈乙村(내을촌)에 당도했을 때 蘇伐都利(소벌도리)가 소문을 듣고 집으로 데리고 와서 길렀는데 나이 13세가 되자 다 숙성하여 聖德(성덕)을 두루 갖추었기에 진한의 6부에서 居世干(거세간:거슬한(居瑟邯)으로 추대하고 국호를 서나벌(徐那伐),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 혹은 사라(斯羅), 사로(斯盧)라 하였다.


신라의 시조 혁거세 성인(聖人)과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 성제(聖帝)를 낳은 선도산(仙桃山) 성모(聖母:하백의 딸 유화, 사소)는 地仙(지선)이 되어 선도산(仙桃山)에 오래 머물러 계시며 신라국을 진호하시어 신라국은 신령스러운 일이 매우 많이 일어났다.


[3] 진짜 선도산은 경주인가? 절강성인가?


[삼국유사 제5권 감통 제 7] 仙桃聖母 隨喜佛事(선도성모 수희불사)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는 佛殿(불전:대웅전)을 새로 수리하는 일을 기뻐하시고 안흥사 주지 지혜에게 도움을 주시었다. 신라의 진평왕조(서기 579-632년) 때 이름이 지혜라는 비구니가 있었는데 행실이 많이 어질었다. 安興寺(안흥사) 住持(주지)로 있으면서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을 새로 수리하고자 하였으나, 자금력이 모자라 미루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밤 꿈에 몸매가 호리호리하고 간드러지게 예쁜 선녀가 쪽빗 머리에 푸른빛의 비취 구슬로 장식하고 내려와서 위로하며 약속하시기를 나는 선도산의 神母(신모=사소, 유화) 이니라,


너희가 대웅전을 수리하기를 소원하니 내가 기뻐서 금 열 근을 시주하여 돕고자 하노라, 내가 앉은 좌대 밑에서 금을 취하여 主尊佛(주존불) 3像(상)을 모시고 점등하고, 53 六類聖衆(육류성중)과 모든 天神(천신)과 五岳(오악)의 神君(신군) 그림을 그려서 벽 위에 붙이고 매년 봄과 가을 두 계절 10일 날은 선남선녀 들을 광장에 모아서 일체의 모든 含靈(함령)들을 위하여 占察法會(점찰법회)를 개최하는 일을 규정으로 삼아 항상 잊지 않도록 하라.


지혜는 놀라운 생각에 승도를 거느리고 선도산 神祠(신사)로 가서 좌대 밑의 굴에서 황금 160량을 얻었다. 지혜는 지극 정성으로 공을 다하여 神母(신모)가 일러주신 말씀에 의거하여 불상을 갖추고 모셨다. 그 事跡(사적)은 아직 남아 있지만 법회의 일은 폐지되었다.(중략) 또 聖母(성모:하백의 딸 사소)는 하늘의 모든 仙女(선여)들에게 비단을 짜서 붉게 염색된 비단 직물을 가지고 와서 조정의 대신들에게 옷을 만들어 주었다. 신라 사람들은 이 신비스러운 일을 경험하고 비로소 神驗(신험)을 알게 되었다.(중략)


신라의 진평왕조(서기 579-632년) 때 하늘나라의 옥황상제(여와=여호와)의 명을 받은 천사가 신라의 진평대왕을 배알하고 옥으로 만든 天賜玉帶(천사옥대)를 주시었다. 천사가 말하기를 이 玉帶(옥대)는 옥황상제(삼신=여호와 하느님)님이 내려 주시는 보물이니 잘 간직하여 대대로 전하도록 하시오, 신라국의 진평왕은 친히 꿇어앉아 길이가 十圍(10위)이고, 62개의 옥으로 새겨서 장식하여 만든 요대(허리띠)를 천사로부터 받았다.(후략)        


◆경주의 선도산은 이병도가 지정한 가짜이다

 

 

한반도 속의 가짜 선도산은 높이 380,2m이며 경주의 진산으로 서악(西岳), 서술(西術), 서연산(西鳶山), 서형산(西兄山)이라고 불린다. 산성내의 정상부에 보물 제65호로 지정된 마애석불입상이 남아 있다. 선도산 동면의 남쪽에 태종무열왕릉을 비릇하여 김인문(金仁問)과 김양(金陽)의 무덤이 있고 북쪽 서악서원의 뒤쪽 산허리에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이 있고, 선도산의 서면 애공사지(哀公寺址)의 서쪽에 법흥왕릉이 있다. 라고 돼 있습니다. [국립경주 박물관 참조]

                                         ▲경주 선도산 삼존상(三尊像)  © 박병역  

 

 한반도 속의 가짜 선도산은 높이 380,2m이며 경주의 진산으로 서악(西岳), 서술(西術), 서연산(西鳶山), 서형산(西兄山)이라고 불린다. 산성내의 정상부에 보물 제65호로 지정된 마애석불입상이 남아 있다. 선도산 동면의 남쪽에 태종무열왕릉을 비릇하여 김인문(金仁問)과 김양(金陽)의 무덤이 있고 북쪽 서악서원의 뒤쪽 산허리에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이 있고, 선도산의 서면 애공사지(哀公寺址)의 서쪽에 법흥왕릉이 있다. 라고 돼 있습니다. [국립경주 박물관 참조]


◆선도산의 성모사(聖母祀)는 1963년에 만든 가짜이다

 

 

경주 성모사(聖母祀)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왕을 낳은 성모(聖母)를 기리기 위해  경주 서악(西岳) 선도산(仙桃山)에 세운 사당이다. 1963년 사우(祠宇)를 중건한 것이다.신라 천년의 도시 경주는 궁궐의 유적물은 단 하나도 없고 온통 무덤의 도시입니다.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임의대로 지정한 경주의 각 유적 물에 대하여 1945년 8.15광복 이후 학문적 토론의 비평이나 단 한번의 검증도 없이 경주를 신라 천년의 도시로 믿고 있는 얼빠진 민족입니다. 도대체 대한민국 정부당국자는 언제까지 왜곡된 국사로 국민을 호도하며 기만 할 것인가?

                                            ▲선도산 정상의 가짜 성모사(聖母祀) 

 

 경주 성모사(聖母祀)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왕을 낳은 성모(聖母)를 기리기 위해  경주 서악(西岳) 선도산(仙桃山)에 세운 사당이다. 1963년 사우(祠宇)를 중건한 것이다.신라 천년의 도시 경주는 궁궐의 유적물은 단 하나도 없고 온통 무덤의 도시입니다.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가 임의대로 지정한 경주의 각 유적 물에 대하여 1945년 8.15광복 이후 학문적 토론의 비평이나 단 한번의 검증도 없이 경주를 신라 천년의 도시로 믿고 있는 얼빠진 민족입니다. 도대체 대한민국 정부당국자는 언제까지 왜곡된 국사로 국민을 호도하며 기만 할 것인가?

 

◆신라의 선도산은 중국 절강성에 있다

 

                                   ▲중국 절강성의 선도산  © 박병역 칼럼니스트 


선도산(仙桃山)은 북부여 해모수 천제의 부인이며, 신라의 시조 혁거세 성인(聖人)과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 성제(聖帝)를 낳은 유화(柳花=사소(娑蘇) 성모(聖母)님이 오랜 세월로 머물러 계신 대한민족의 성지(聖地)입니다. 경주시의 충효동 서산의 선도산은 이병도가 조작한 가짜이고, 중국 호북성(안휘성?)의 선도산이 진짜인지 정부당국자는 철저히 검증하라.

 

                             ▲중국 산서성의 신라 蔚州(울주)   © 박병역 칼럼니스트 


신라의 혁거세왕은 [산동성] 달구(達丘:청구)에 조시(朝市)를 설치하고, 산서성(山西省) 율포(栗浦=蔚州(울주)에 해시(海市:해물 시장)를 열어, 육해 교역의 제도를 수립하였다. 蔚州(울주)는 삼한시대의 진한 땅이다.

 

[지구조선사연구회]러브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