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대륙평양성의 옛모습이 아닌가?

한부울 2009. 4. 1. 16:38

대륙 서안(長安) 호경(鎬京) 평양성을 보는 듯 하다.

규모면으로 보았을 때 한반도 평양이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게 하는 그림이다.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은 초기에는 왕검조선의 평양(平壤) 기성(箕城), 낙랑(樂郞)으로 불리웠고 또한 호경(鎬京) ,유경(柳京), 서도(西都)로 불리웠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평안도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호경은 어디일까?

호경은 바로 주무왕의 周왕조를 건국하고 세운 황도이다. 즉 중원중의 중원으로 천자가 거하던 곳이다. 이곳이 내내 같은 지역으로 주대에는 유경, 서도, 한대이후에는 장안으로, 그리고 고려, 조선대에서는 서경으로도 불렀다. 
조선의 역사에서 보면, 이지역은 기성, 낙랑, 평양, 서경으로 단군이 처음으로 도읍을 정한 평양, 아사달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당서에서도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을 장안이라고도 한다’ 라고 직접 언급하고 있다.

이 그림을 보고 KBS 역사스페셜팀은 한반도 지금의 평양에 맞추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엄청나게 넓은 평야, 그 곳에 가옥이 듬성듬성 있고 넓은 평야 끝에 이어진 산세 모양하며, 그리고 대동강이라고 보이는 강세 모양 등을 보면 도저히 한반도 평양과 비견 할 수 없는 그림이다.

1866년(고종3년) 미국함선 제너널셔먼호가 대동강으로 올라와 마침내 양각도 모래톱에 걸려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전소당한 곳이 과연 한반도 대동강이겠는가 아니면 대륙 대동강이겠는가?

다시 한번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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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의 옛모습

[오마이뉴스]2009/02/21 15:52 이충렬


며칠 전 '추사의 실수'를 이야기하면서 평양성과 성벽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런데, 평양은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어떻게 생긴 성인지, 아직도 성벽이 남아있는지 등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물론 지난 10년 동안에는 남북관계가 좋아 다녀온 사람도 있지만, 갔었다한들 지금의 모습을 살펴보느라 유적지는 볼 시간도 여유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은 귀에만 익숙할 뿐 머릿속에서는 상상이 잘 되지 않는 그런 곳이다.


그런데 다행히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조선시대 때까지 남아있던 고구려의 성벽 일부가 그려져 있는 그림 한 점이 소장되어있어, 조선시대의 모습뿐 아니라 1500년 전 고구려 시대의 모습도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작가 미상, <평양도>, 10폭병풍, 종이에 채색, 각폭 131 x 39cm, 전체 크기 131 X 390 cm, 조선후기 추정


이 그림은 새로 부임하는 듯보이는 '평양감사'(정식명칭은 평안도 감찰사, 평안감사)가 가마를 타고 대동강 건너편에 도착해서 강을 건널 준비를 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평양성 안과 부근의 산까지 그리느라, 부임장면은 그림 아래부분을 조금 차지할 뿐이고, 오히여 평양성과 성안의 구조를 자세하게 보여준다.

 

 

 

                                     10폭 병풍 속에 있는 재미있는 장면 부분도

 


이 그림은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의 <북한문화재 특별전>에 출품되었던 평양 조선역사박물관 소장 <평양도>와 거의 비슷한 구도이다. 얼마 전 이 블로그에서 소개한 정조의 능행도의 경우에도 거의 비슷한 구도의 작품이 여러 점이니, 정조 혹은 그 보다 조금 후의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병풍의 2번째 폭에 대동강의 조그만 섬에서 판소리를 하는 명창의 이름이 모은갑(牟恩甲)이라고 밝혔으니, 만약 모은갑 명창의 활동연대가 나오는 자료가 발견된다면 이 작품의 제작시기는 명확해질 수 있다.


이 그림은 가로가 거의 4미터의 대작이다. 그래서 어느 부분이 고구려성벽인지를 살피려면, 세부도와 함께 고구려 성벽지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고구려 시대에 제작한 지도는 지금 남아있지 않고,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성의 존재가 보인다.

 

                      평양(平壤) 맨왼쪽부터 외성, 중성, 대동문, 북성의 표기가 보인다.


오래 전 KBS 역사스페셜 팀에서 여러 자료를 참조해서 만든 평양성 자료에도 같은 위치에 성의 표시가 있다.

      

 

평양성의 큰 둘레는 약 16㎞, 내부의 성벽까지 합하면 23km이다. 성 방어력 강화와 신분 구분을 위하여 내성(內城)·중성(中城)·외성(外城)·북성(北城) 등 4개 성으로 나누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왼쪽의 분홍색 부분이 현재 평양의 중심지이니, 옛 평양성과 거의 같은 위치이다.

 

   (원본클릭)

                                                                외성 부분


외성은 고구려 때, 중국 수(隋)나라 도성제도(都城制度)를 참고하여 바둑판 모양으로 시가지를 조성하였으며 일반 백성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그림뿐 아니라 조선시대까지 비슷한 형태를 유지했다는 기록도 있고, 광복 후에도 고구려 시대 때의 유적과 유물들이 많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길은 아직도 고구려 때의 방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10폭 평풍 중 제10폭. 왼쪽강이 보통강이다. 추사는 이 그림 가운데 부분(아래 부분도)에서 성벽 돌을 발견했다.

 

                                    제9폭. 중간의 구부러진 길은 수로(水路)다.


 

                                  제8폭.  가운데 성벽 오른쪽부터 중성이다.


 

                                       중성 부분.  중성은 관아 건물지역이었다.

 

                                                            신당(神堂)

 

                    제7폭. 오른쪽 부분이 중성과 내성의 경계다. 성벽 오른쪽부터 내성이다. 

    

이 폭에서는 2가지가 눈에 띈다. 하나는 민속놀이이고 또 하나는 북한 역사하자들이 '고구려시대 운하'라고 주장하는 수로(水路)이다.                 

 

                                                          수로(水路) 부분


그림 오른쪽 아래 성벽 앞에서 대동강으로 연결되는 수로(水路)를 북한 역사학자들은 고구려시대의 운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남한의 역사학자들도 동의하는지는 확인을 하지 못했다.


북한의 역사학이나 고고학은 체제를 위해 복무하기 때문에, 고구려의 후예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가끔은 객관성이 결여된 결론을 내릴 때가 있다.  

 

                                                           민속놀이 부분.


'평양감사' 부임날은 잔칫날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민속놀이를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무슨 놀이인지가 확실하지 않다.


일부 사람들의 팔동작 모습으로 봐서는 돌싸움 놀이를 그리면서 돌을 생략한 것 같은데, 돌싸움이 아닌 다른 놀이일 가능성도 있으니 좀 더 자료를 찾아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내성 부분.  내성은 궁궐이 있는 궁성(宮城)지역으로, 이 그림에 보이는 건물들은 1624년(인조 2)에 만들어졌다.

 

                                              평양감사'도 보고, 빨래도 하고

 

                                                              제6폭

 

제5폭. 대동문, 보통문이 보이고,  여인들이 빨래하는 모습이 보이는 바위 위의 정자가 연광정이다.


 

                                 제4폭. 가운데 보이는 건축물들이 평양 관아일 것이다.

 

                제3폭. 내성의 끝부분이다. 섬에서 낚시질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재미있다.

 

  북성 부분.  내성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고, 조선 숙종때 증축했다.

 

                                                               제2폭. 


가운데 보이는 사찰이 영명사(永明寺)이고, 위쪽으로 부벽루, 절 왼쪽 위에 을밀대가 보인다. 영명사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지은 아홉 절 중의 하나라고 전해진다.

 

                                                      땔감 나무를 실은 배

 

                                                능라도 판소리 공연 부분도.


실제의 능라도에 비해 작게 그려졌지만, 맨 왼쪽에 한문으로 綾羅島 라고 써서 섬이름을 밝혔다. 그리고 판소리를 하는 사람이 명창 모은갑(牟恩甲)이라고 기록했다.

 


마치 사진을 찍은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했다. 좍펼쳐진 명창의 부채와 북을 잡은 고수의 손동작 그리고 구경꾼의 손사위에서, 판소리 한자락이 들리는 듯하다.


필자가 과문해서인지는 몰라도, 조선시대 그림 중 판소리하는 장면은 이 그림과, 고종 때의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이 남긴 <가객소리 하는 모양>이라는 제목의 조그만 그림에서 볼 수 있을뿐이다. 그러나 기산의 풍속화는 크기도 작고 등장인물이 4명밖에 되지 않을뿐 아니라, 그림의 격이 지금 소개하는 병풍그림에 비해 훨씬 떨어진다. 그래서 이 그림에서의 판소리 장면이 갖고있는 풍속사적 가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제1폭. 북성 바깥부분이다.  절벽 바위 위에 성을 쌓은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북한에 설치되어 있는 국보 1호 표지석. 평양의 한문 표시가 옛 표기와 다르다

 

                                                  1 ~ 5폭까지  (원본클릭)  

 

                                                6 ~ 10폭까지 (원본클릭)


지금도 평양에는 위의 그림 속에 있는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지난 10년 동안 금강산에서 시작해 내금강 그리고 개성의 선죽교, 공민왕릉 등이 개방되어, 마음만 먹으면 여러 유적지를 살필 수 있었다. 그래서 평양 유적지 개방도 그리 멀지 않은 듯 느껴졌다. 그러나 이제는 금강관과 개성 길조차 다시 막혔으니,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그저 안타깝기만 할뿐이다.


뱀의 다리 : 200년 전의 평양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아시고 싶은 분은, 한림대 사학과 오수창 교수님 홈페이지( http://www.hallym.ac.kr/~changa/tour/pytour/pyindx.html )에 실려 있는 <암행어사가 되어 떠나는 200년 전 평안도여행>(역사여행 폴더에 실림)을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매우 재미있습니다.


[오마이뉴스]이충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