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羌戎(강융)과 조선(朝鮮)의 철령(鐵嶺)땅이 접(接)하였다?

한부울 2009. 4. 7. 16:39
 

羌戎(강융)과 조선(朝鮮)의 철령(鐵嶺)땅이 접(接)하였다?

[우리역사의비밀 : 문상욱 ]2009-04-05 23:03:23 

  

전회(前回)에 설명한 내용의 연장선에서 이해(理解)를 돕고자 몇 가지 사안을 설명코자 합니다. 당시(唐詩)와 조선(朝鮮)유학자들의 문집 속에 기록된 몇 내용을 여러분과 조선(朝鮮) 영토에 관해 논해 보고자 합니다. 본인(本人)이 영토(領土)에 관해 주안점을 두는 것은 <인간(人間)은 땅이 없이는 살 수 없으며, 그 땅위에 두 발을 굳게 디디고 서 있을 때 그는 인간(人間) 일 수 있으며, 역사(歷史)를 말할 때 땅이 없는 역사(歷史)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조선(朝鮮)의 역사를 말하면서 조선(朝鮮)의 땅이 어디인지를 모르고 어떻게 역사(歷史)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본인이 여러 회에 걸쳐 강조하고, 주장하는 내용은 과연 조선(朝鮮 : 총칭)의 서(西)쪽 영역의 한계(限界)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하는 점입니다. 물론 그 동(東)쪽 지방은 조선(朝鮮)의 땅입니다. 그 조선(朝鮮)속에는 “옛 조선으로부터 삼한(三韓). 삼국(三國: 高句驪. 百濟. 新羅). 발해(渤海). 고려(高麗). 조선(朝鮮)”이 모두 포함되는 것입니다.


반도사관과 식민사관에서 말하는 “서토(西土)”가 “하북성이나 산서성의 땅일 수 없다”는 것이며, 이 《서토(西土)란 서역(西域)의 땅을 말하는 것이며, 그 서역(西域)이란 현 신강성을 일부 포함한 그 서쪽 땅을 말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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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唐詩(당시) 중에서 ; <高 適> 燕 歌 行 並 序 / 開元二十六年客有從御史大夫張公出塞而還者,作燕歌行以示適,感征戍之事,因而和焉。


【漢 家 煙 塵 在 東 北 / 漢 將 辭 家 破 殘 賊 / 男 兒 本 自 重 橫 行 / 天 子 非 常 賜 顏 色 / 摐 金 伐 鼓 下 榆 關 / 旌 旆 逶 迤 碣 石 間 / 校 尉 羽 書 飛 瀚 海 / 單 于 獵 火 照 狼 山 / 山 川 蕭 條 極 邊 土 / 胡 騎 憑 陵 雜 風 雨 / 戰 士 軍 前 半 死 生 / 美 人 帳 下 猶 歌 舞 / 大 漠 窮 秋 塞 草 衰 / 孤 城 落 日 鬥 兵 稀 / 身 當 恩 遇 常 輕 敵 / 力 盡 關 山 未 解 圍 / 鐵 衣 遠 戍 辛 勤 久 / 玉 筋 應 啼 別 離 後 / 少 婦 城 南 欲 斷 腸 / 征 人 薊 北 空 回 首 / 邊 庭 飄 颻 那 可 度 / 絕 域 蒼 茫 更 何 有 / 殺 氣 三 時 作 陣 雲 / 寒 聲 一 夜 傳 刁 斗 / 相 看 白 刃 血 紛(紛) / 死 節 從 來 豈 顧 勳 / 君 不 見 沙 場 征 戰 苦 / 至 今 猶 憶 李 將 軍.】


(1) <漢家煙塵在東北> : 한(漢)나라에서 병마(兵馬)의 발굽에서 일어나는 먼지는 동북(東北)에 있다. <한(漢)나라 전란의 어지러움은 동북지방에 있다>라는 뜻이다).

(2) <天子非常賜顏色> : 천자(한나라 황제)가 비상한 표정(안색)으로 내린 것은

(3) <摐金伐鼓下榆關> : 천천히 걸으며 북을 두드리며 유관아래에  <傱: 종종 걸음 칠 종. 鼓 : 북 고. 북을 두드리다>

(4) <旌旆逶迤碣石間> : 천자가 하사한 기(旌)가 꾸불꾸불 비스듬하게 갈 석 사이로 펄럭이고 <旌 : 기 정. 천자가 군대의 사기를 고부시킬 때 사용하는 기. 旆 : 기 패, 펄럭이다. 逶 : 꾸불꾸불 갈 위. 迤 : 비스듬할 이>

(5) <校尉羽書飛瀚海> : 교위의 우서는 한해(瀚 海)를 날고 <羽書 : 급한 소식(消息)을 전(傳)하는 때에 깃털을 꽂아서 보냈던 편지. 군사용 시급한 戰書>

(6) <單于獵火照狼山> : 선우(흉노 왕)는 랑산(狼 山)에 불 밝혀놓고 사냥을 한다. <獵 : 사냥 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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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시 내용은 대륙의 당시(唐詩)속에 포함된 것을 소개한 것이다.l 여기서 우리는 당시 한(漢)나라가 어디에 있었으며, 한해(瀚海)랑산(狼山)의 본래 위치를 찾아보려 함이다.


(번역문이 매끄럽지 못한 점 양해 바랍니다. 의미 전달이나 주된 내용에는 크게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위 글에서 중요한 것은 이때 한(漢)나라에 전란이 생기게 된 곳은 한해(瀚海) 즉 북해(北海)지방이었다. 이는 위 글에서 교위가 보낸 우서(羽書) 즉 긴박한 소식을 전하는 전령(傳令)이 “한해(瀚海)를 난다(飛)”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여기서 한 천자가 보낸 군대의 사기를 복 돋우기 위해 보낸 천자의 기(旌)가 갈석(碣石)의 유관(楡關=渝關=臨閭關=山海關)으로 이어져 펄럭인다는 것에서 <갈석과 유관> 역시 현재의 하북성과는 전혀 관계없는 한해(瀚海)의 남쪽지방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한나라 변경을 침략해 난리를 친 선우(單于) 즉 흉노왕은 태연하게 불 밝혀놓고 랑산(狼山)에서 사냥을 했다는 것을 보면 “랑산” 역시 한해(瀚海)부근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여기서 한나라 변경 전란의 시점은 동북(東北)지방이라 했다. 결국 한해(瀚海)의 서남쪽지방에 한(漢)나라가 위치하고 있었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사견이나 옛 한(前漢=西漢. 後漢=東漢)이란 나라는 마한(馬韓)이며, 마한(馬韓)은 구려(句麗)로, 고려(高驪)로, 高句驪=高句麗로 변천되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으나 이는 근거나 고증이 아직 부족하므로 시간을 갖고 추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1) 한해(瀚 海)를 고비사막의 북쪽지방으로 비정해보면 ; 한(漢)나라는 그 서남쪽 청해 일부와 티베트 일부와 신강성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지대가 된다.

 

[클릭원본]

                                     본 카페의 지도 방에 있는 고지도(지형도) 참조


2) 한해(瀚海)를 천산산맥 북쪽으로 비정하면 ; 한(漢)나라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서남지방에 위치해 있어야 하고,--------▶대륙사의 기록과 근대조선 관리들의 기록(대륙의 25사와 산 해 경. 자치통감. 통전. 조선 유학자들의 문집 등에서 말하는 것으로 가장 보편타당하다.) 문화적으로 눈부시게 발전하여 개원의 치를 열었다는 당나라 현종시절의 대부분 시 구절에는 이곳 지방 즉 옥문관의 북방 천산산맥의 북쪽지방을 한해(瀚海)라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당나라 시절의 기록이 생생하게 살아 있음에도 <한해나 북해>를 <바이칼 호수>지역쯤으로 추정하여 해설하는 어리석은 우를 범하고 있는 분들은 각성해야 할 것이다. 만약 북해나 한해를 기록에도 존재하지 않는 바이칼 호수쯤으로 비정하면 이것은 식민사관과 반도사관의 연장일 뿐이다. 왜 이런 짓을 해야 할까. 생생한 기록이 살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3) 한해를 하 북 성이나 흑룡 강성 북방으로 비정할 경우 ; 한(漢)나라는 장안과 낙양지방에 위치하게 된다.--------반도사관과 식민사관의 논리이다.


갈석(碣石)과 유관(楡關) : 이 역시 오늘날의 <하북성 갈석이나 유관>과는 전혀 관계없다. 위의 시(詩)는 당시(唐詩)에 기록된 내용이다. 따라서 <갈석과 유관>은 한해(瀚海)의 남쪽지방에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이곳은 옥문관 또는 양관 주위가 될 것이다. 옛(古) 옥문관은 현재의 옥문관 서북지방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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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천산의 북쪽지방이 한해(瀚 海)인가에 대한 답을 보자 : 당시(唐詩)에 기록되어 있는 아래 시를 보자 ; <岑 參>  白 雪 歌 送 武 判 官 歸 京


[8월의 오랑캐 하늘 곧 눈이 날린다.<胡 天 八 月 即 飛 雪>. 갑자기 하룻밤 사이에 봄이 오니<忽 如 一 夜 春 風 來>, 천만 나뭇가지들이 꽃을 피우네.<千 樹 萬 樹 梨 花 開>,(중략). 한해에는 백장의 얼음으로 가로막혀 있고<瀚 海 闌 干 百 丈 冰>, (중략), 이때 천산 로에는 눈이 가득 쌓여 있다<去 時 雪 滿 天 山 路>](필요 없는 부분은 잘라냈음)


이 글에서 봐도 천산(天山)주위가 한해(瀚 海)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천산(天山)은 신강 성 북쪽에 있다. 이러한 설명을 봐도 한해(瀚海)니 북해(北海)니 하는 곳은 이곳지방일 수밖에 없으며, 바이칼 호수 주위니 뭐니 하는 해설은 조선의 역사를 왜곡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역사 해설일 뿐이다.


따라서 당시의 한(漢)은 한해(瀚 海)의 서남지방에 있었으며, 고구려(高句麗=高句驪)의 왕도(王都)는 장안 성(長安 城) 즉 평양성(平壤 城)이었다. 대륙은 중원지방의 황도(皇都)는 조선(朝鮮)의 황도며, 이곳을 중심으로 “조선은 화(華)였고, 동서남북의 사이(四夷)를 다스렸다”고 본다. 이는 근대조선(近代朝鮮) 왕조실록(王朝實錄)에도 전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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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근대조선왕조에서 대신(大臣)을 역임한 유학자분들의 기록을 보자.


海峯集 / 送金安邊 ;【又, 鐵嶺橫天限一隅.麗時爲界卽通衢.北連沙塞三千里.南擁函秦百二都.(중략) ; 안변(安邊)으로 가는 “金”을 보내다(전송하다)-----또, 철 령은 좌우 하늘을 경계로 한 모퉁이다. 고려 때의 지경으로 곧 갈림길이다(衢). 북쪽으로 사막변경(요새) 3,000리가 이어져 있다. 남쪽으론 진의 함 관 102개 도회지를 끌어안고 있다.】


위 기록은 여러분들이 주장하는 반도 근대조선 왕조시대의 유학자가 쓴 내용이다. <철령(鐵嶺)은 반도의 북방지역에 있다, 또는 요녕성이나 길림성에 있다>는 것이 반도사관이나 식민사관에서 주장하는 내용이다.


이럴 때 위의 원문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점은 <北 連 沙 塞 三 千 里>라는 문구다. “북쪽으로 연이어져 있는 모래 변방(요새)3천리”즉 <철령의 한곳 갈림길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사막변방(沙塞=성채)이 3천리에 이어져 있다>라는 말이다.


◉ 북쪽으로 사새(沙塞) 3천리가 연(連)이어져 있을 곳은 현재의 시점에서 보더라도 감숙성이나 청해성 지역밖에 없다. 결국 위 <해봉선생>이 쓴 글에서 말하는 곳은 반도나 그 북쪽 3성 지방이 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든 반도에 끼워 넣어 보려 해도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생각해보라. 沙는 모래 사이며, 塞는 변방 새로, 변방이나, 성채 등을 의미한다. 결국 <철령의 갈림길에서 바라보면 3천리에 달하는 사막으로 된 고려(高麗)의 변방지대가 까마득하게 펼쳐져 있다>라는 얘기다. 반도나 현재의 북쪽 세 개의 성(省=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지역에 위에서 말하는 모래사막 3천리에 달하는 곳은 없다. 아니 없는 것이 아니라 존재할 수 없는 지리, 지형적인 조건이다. 어떤 역사서나 지리지 및 이곳 3 성지방의 지형, 지리를 설명한 근세기의 기록 역시 사막(沙漠)은 존재하지 않으며, 더구나 3천리에 달하는 사막(沙漠)지대는 존재할 수 없다


이럼에도 “철령”이 반도나 현 동북삼성지방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가? 철령은 분명히 “麗(高麗:고려)”땅이었으며, 모래사막 3천리에 달하는 변방지대는 고려의 것이었다는 내용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기록이 말해주고 있잖은가. 왜 고려(高麗)나 근대조선(近代朝鮮)이 좁디좁은 반도 땅에 있어야만 되는 것인가. 반도사관이나 식민사관을 주장하는 분들에게 반문하고픈 것이다. 무엇 때문에 조선(朝鮮 : 총칭)이 꼭 반도에 있어야 하는가?


그 해답은 단 하나일 뿐이다. 즉 옛 왜(倭)의 본거지를 현 열도(列島)로 못 박기 위한 들러리에 불과할 뿐이며, 이를 이용한 조선(朝鮮 : 총칭)의 옛 강역을 없애고, 반도로 몰아넣기 위한 목표일뿐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다. 이러한 속임수를 눈치 채지 못하는 반도의 지식인들은 오늘도 열심히, 쇠 빠지게 반도 조선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선배들이 미련 없이 버린 그  조선사를 후배님들은 또 다시 미련 없이 버리려 하는 것이다. 역사기록이란 후대(後代) 승자(勝者)의 기록이라는 점을 항상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 반도사관이나 식민사관은 바로 이 승자(일시적 한 때의 승자일 뿐이나)의 기록이다. 식민통치를 받는 다는 것, 무력으로 빼앗은 점령지를 통치하려 했을 때 그 수단과 방법은 무엇이겠는가를 생각하면 될 일이다. 현세의 여러분은 현세를 기준으로 옛 일을 판단하려 하고 있다. 2,000 년 전의 사건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면 2,000 년 전의 생활방식이나 당시 인간들의 사고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조선의 역사는 잃어버린 역사가 아니다. 버린 역사일 뿐. 그 버린 역사를 후배님들은 또 버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朝鮮)! 우리들의 선대 조상님들이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기에 그들 조상님들의 발자취를 버리려하는 것인가. 그것은 조상과 선조에 대한 죄악일 뿐이다. 아래의 구절을 보면서 조선(朝鮮)의 강역으로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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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峯集>을 보면 “安 邊 駕 鶴 樓 韻(안변가학루운)”이라는 제목의 시(詩 )가 있다.

   

[鶴城形勝畫樓中.六月登臨暑氣空.欹枕任他西下日.披襟嬴得北來風.沙川截野水聲小.➡鐵嶺界天山勢雄.回首秦京自此近.莫言疆土接羌戎]위 글 중에서

《➡鐵嶺界天山勢雄.回首秦京自此近.莫言疆土接羌戎」구절을 보자》


1) 鐵 嶺 界 天 山 勢 雄 : 철 령과 이웃한(界)【또는 지경의】천산의 기세는 뛰어났다.

2) 回 首 秦 京 自 此 近 : 머리를 돌려(바라)보니 진(秦)나라 왕도(서울)가 가깝다.

3) 莫 言 疆 土 接 羌 戎 : 말없는(조용한, 고요한) 강토(강역)는 강융(羌戎)과 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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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철령(鐵嶺)”에 대한 설명을 보면 ; 반도나 동북삼성지방에 있다고 하는 철령(鐵嶺)의 절경이 아무리 뛰어나고, 산세가 뛰어났다고 해도 일만(一萬)리쯤 떨어져 있는 신강성에 있는 “천산(天山)”과 경계를 하고 있다거나, 지경(之 境)이라든가, 이웃한다거나 하는 글귀로 설명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이 글을 지은 분은 여러분들이 말하는 반도 조선인이기 때문에 “천산(天山)”에 대한 지식이 있을 수 없으며,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어 그 산세의 근원(根源)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철령(鐵嶺)에서 옛 진(秦)의 왕도(王都)가 가깝다는 말은 그 철령(鐵嶺)이 반도나 동북삼성지방에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고증하고 있다.


또 중요한 것은 이러한 “철령(鐵嶺)”이 반도나 동북삼성지방에 없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하고, 고증하는 말은 바로 <그 땅이 강융(羌戎)>과 접(接)하고 있다>는 기록이다. 즉 강융(羌戎)은 중원(中原)의 서쪽지방의 종족이며, 1세기로부터 7세기에 이르기까지의 강융(羌戎)들의 주요 거점지를 이곳 “카페의 지도 방”에서 찾아보면 <감숙성 장액. 주천. 돈황. 옥문관 남쪽지방>에 그려져 있다.


이러한 강융(羌戎)의 땅과 반도나 동북삼성에 있다고 하는 철령(鐵嶺)과 접(接)하고 있다는 말은 <지구의 인류가 대부분 멸망하고 지구에 혼돈의 세계가 다시 찾아와도 불가능한 지형, 지리다.> 이러한 불가능한 지리, 지형적인 조건을 반도 인들은 가능하게 만들려 하고 있으니 반도 인들은 신(神)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일까? 참으로 답답한 이야기다.


여기서 <강융(羌戎)과 접(接)할 수 있는 령(嶺)은 기련 산맥(祁連山脈)이며, 강융(羌戎)들을 월씨(月氏)와 함께 보면, 신강 성 동북(東北)방에서 동남(東南)방향으로 뻗어 내린 “아 이태(알타이)산맥”이 된다!


또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곳에서 머리를 돌려 바라보면 “진(秦)의 왕도(王都)가 가깝다”는 말이다. 즉 <기련산맥이나 알타이산맥>을 철령(鐵嶺)으로 보면, 그곳에서 머리를 돌려 바라보면 진(秦)의 서울이 가깝다 했으니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상식의 진왕도(秦王都)였다는 함양(咸陽)이 아니었다는 것과 같다. 이러한 사실은 현재 서안(옛 장안)주위의 려산(麗山)에서 발견되어 발굴된 진시황 병마용(兵馬 俑)갱[도용의 크기는 1.75~1.86m, 도마용은 높이 1.5m, 길이 2m의 실물과 거의 같다]을 보면 대륙의 학자들은  아직까지도 누가, 누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인가에 대한 정확한 고증이나 근거를 찾지 못하고 있다. 학자들 간에 여러 이견이 많다는 것은 그 병마용 갱이 진시황제의 것인지 확실한 근거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있다. 혹자는 조(趙) 태후(太后)를 위한 것이라는 등 아직까지 정립되지 않은 상태다. 이들 도용들의 모습을 보면 대부분 상투를 틀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병마용 갱에 대해 설명한 <진시황 릉>의 저자 말에 따르면 아직까지도 많은 이설(異說)이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진(秦)나라의 서울이 꼭 현재의 섬서성 함양(咸陽)이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있으며, 이는 고려(高句麗=高句驪=高驪)의 호경(鎬京)과 같은 지역에 있으므로 해서 더더욱 의심을 받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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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내용이다. <안변(安邊)도호부>에 대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


(1) 오압산(烏鴨山) 일명 황룡산(黃龍山)이라고도 하며 본부 동쪽 60 리에 있는데, 극히 높고 남쪽으로 ❶ 철령(鐵嶺)과 연해 있다. (중략). 철령(鐵嶺) 본부 남쪽 83 리에 있다. 고려 때에 관문(關門)을 설치하고 ➋ 철관(鐵關)이라 불렀다.

혹 서양인들이 보았다고 하는 (corea gate)가 여기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2) 정도전(鄭道傳)의 시에, “➌ 철령(鐵嶺)의 산은 높아 칼날과도 같은데, 동쪽으로 바다 하늘을 바라보니 아득하기만 하다. 가을바람은 유난스럽게 양쪽 귀밑을 불어 스치는데, 말을 몰아 오늘 아침에 북녘 변방에 왔노라.” 하였다.


(3) 변중량(卞仲良)의 시에, “➍ 철관성(鐵關城) 아랫길은 멀리도 뻗었는데, 안계(眼界)에 가득히 들어오는 노을과 물결엔 해도 기울었구나. 남으로 가고 북으로 오는 사이에 봄은 저물려 하는데, 가는 곳마다 말머리에 해당화(海棠花)가 피었네.” 하였다.


(4) 남곤(南袞)이 절도사(節度使) 이장곤(李長坤)을 보내는 부(賦)에, “등주(登州) 남쪽과 연성(連城) 북녘에 ➎ 큰 산들이 깎아지른 듯 하늘로 치솟으니, 그 산세가 국토를 가로질렀다. 장백산(長白山)에 뿌리를 박고 뻗어나가 남으로 수천 里를 달려와서 넓게 모였다. 그 길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을 당시에는 다만 만 길이나 되는 푸른 절벽이 보일 뿐이라, (중략). ➏ 고려(高麗) 때엔 이곳에 관문을 설치하고 철관(鐵關)이라 불렀다네. ➐ 아, 슬프다, 백이(百二) 험한 요새지에서 몇 왕대(王代)의 분쟁을 겪었던고, (중략). 게다가 내안(乃顔)의 잔당이 흉악하게 침입하여 개원령(開元嶺)을 넘어 화주(和州)ㆍ등주(登州)를 노략하여 사람을 죽여 양식을 삼으니 어린아이들이 남지 않았다. (중략). ➑ 성인이 풍패(豐沛)에서 일어나시니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케 하는 큰 뜻을 두시었네. ➒ 철관(鐵關) 서쪽에 살기(殺氣)가 가득한지라 잔악한 무리들을 제거하여 ➓ 동한(東韓)의 안녕을 되찾았으며, 땅의 경계를 정하고 산하를 다 차지하였으니, 옛날의 외적들 있던 곳이 이제는 지경 안에 있게 되었다. (중략). 긴 칼 빼어들고 휘파람 불어 이별에 어지러운 이 마음을 끊었노라. 어찌하면 그대와 더불어 꽁무니를 수레로 삼아 ⓫ 신마(神馬)를 몰아서 큰 사막을 넘고, 푸른 연하(煙霞)를 헤치며 백두산(白頭山)의 정상에 올라 윤관(尹瓘)의 공적비(功績碑)를 어루만지고, 바다에 임하여 푸른 물결을 잔질하여 가슴 가운데에 불평을 씻고 군신(君臣)이 같이 즐기는 징초(徵招)의 악장(樂章)을 연주하며 돌아와 호월일가(胡越一家)의 가사(歌詞)를 임에게 바쳐볼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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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➒ 철관(鐵關) 서쪽에 살기(殺氣)가 가득한지라 잔악한 무리들을 제거하여 ➓ 동한(東韓)의 안녕을 되찾았으며, 땅의 경계를 정하고 산하를 다 차지하였으니, 옛날의 외적들 있던 곳이 이제는 지경 안에 있게 되었다.>


※ 이게 참으로 웃기는 이야기다. 반도 땅의 철관(鐵關) 서쪽이라면 평안도지방이며, 평양이 있는 곳이며, 그 서쪽은 바다(海)? 이다. 이럼에도 철관(鐵關)의 서쪽지방에서 살기가 가득하다니 서해바다속의 용궁(龍宮)의 특수부대(特殊部隊)와 상류전대(上陸戰隊)가 상륙작전(上陸作戰)을 감행했다는 말인가? 상륙작전을 전개한 용궁의 특수부대들을 모두 퇴치시켰으니 반도 땅에 있던 “동한(東韓)”을 지켜냈다? 맹랑한 역사 해설이다.


동한(東韓)이 있었다면 “서한(西韓)”은 서해바다 속에 있었다는 말인가? 참으로 별난 역사 해설이다. <韓한>이란 나라가 여러 개 있었다면 몰라도 “동한”은 무엇인가? <韓>이란 한 개의 국가가 존재했다면 “동東”이란 말은 필요 없는 존재다. 그냥 “한(韓)”이면 되는 일이다. 굳이 “동한(東韓)”이라 했을 땐 분명 대칭되는 서쪽의 한(韓)나라 즉 “서한(西韓)”이 있었다는 얘기다. “대한민국”이면 됐지 “동 대한민국”이라 할 이유가 없는 일이다. 이러한 일은 “동파키스탄과 서파키스탄”이 있었던 일을 기억하면 될 일이다.


철관 서쪽의 무뢰한 외적(外賊)들을 모두 평정하고, 땅의 경계를 정하고 산하(山河)를 다 차지했으니 전(前)에 오랑캐들이 있었던 그 땅을 모두 “동한(東韓)”의 영토로 편입시켜 이제는 모두 동한(東韓)의 영토 속에 포함되어 천자(天子 또는 皇帝)의 교화를 입었다는 뜻이다. 평안도 서(西)쪽 땅이라면 평양과 그 북쪽의 의주(義州)까지다. 어느 곳의 서쪽 땅을 평정해 “조선”의 산하(山河)로 만들어 군현(郡縣)을 설치했다는 말인가? 자신들의 땅에 자신들의 백성들을 토벌해 또 다시 자신들의 군현으로 삼았다는 말인가? 웃기는 역시 이야기다. 이런 희극도 역사라고 배우고 있다니 참으로 불쌍타!


<신마(神馬)를 몰아서 큰 사막을 넘고, 푸른 연하(煙霞)를 헤치며 백두산(白頭山)의 정상에 올라 윤관(尹瓘)의 공적비(功績碑)를 어루만지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회에 자세하게 설명하였으니 오늘은 생략키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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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주(李冑)의 시에, “⓬ 철령(鐵嶺)의 천연 요새(要塞) 진중(秦中)과도 같은데, 옛 변성에서 부는 슬픈 피리소리가 먼 공중에 퍼지네, 찬비는 무수한 산봉우리 눈[雪]에 연했고, 굶주린 갈 까마귀 숲을 흔드는 바람소리에 놀라 부르짖는다. 인생 백년 가고 머무르는 가운데 몸이 먼저 늙었고, 반평생의 슬픈일 기쁨 속에 당당했던 호기(豪氣) 꺾이었다. 만리타향의 나그네 시름으로 말이 없는데, 관하(關河)는 멀고멀어 오랑캐의 땅과 가깝다네.” 하였다.


(6) 정도전(鄭道傳)의 시에, “수상(首相)이 ⓭가학루(駕鶴樓)에 올라, 눈앞의 경개를 시구(詩句)에 담아 벽 사이에 머물게 하였구나. 강산은 참으로 아름다워도 나의 고향이 아닌데, 세월은 덧없이 물을 따라 흐른다. 저 멀리 바라보니 별은 북극(北極)에 높았고, 안장에 몸을 붙여 멀리 놀던 지난 가을이 기억된다. 이 한 몸 만리행역(行役) 피곤함 속에서, 난간에 의지하여 잠시의 휴식을 얻었노라.” 하였다.


(7) 박 원형(朴元亨)이 시에, “절부(節符)를 가지고 순행하다가 옛 고을 누대에 올라, 감회로 술 마시며 시 짓고 잠시 머물렀다. 구름은 ⓮ 패택(沛澤 한(漢) 나라 고조(高祖)의 고향. 여기서는 이 태조의 고향 함흥을 말함)으로 뻗친 길 가운데서 일어나고, 강물은 기산(岐山) 골짜기로 흘러 들어가는구나. 요동(遼東)의 학(鶴)이 간 후에도 성곽은 예와 같은데, 순(舜) 임금이 갈던 밭에는 보리가 가을을 이루었네. 이 몸 이미 황하(黃河)를 두고 맹서하는 공신(功臣)되려고 결심했는데, 누가 임천(林泉)으로 물러나는 것을 배울 것이랴.” 하였다. 원수대(元帥臺) 학포현(鶴浦縣)에 있다. (중략).


(8) 안축(安軸)의 시에, “일만겹산이 4면을 둘렀는데, (중략).


(9) 제영 편의 박원형(朴元亨)의 시에, “이 땅은 일찍이 칼과 창을 겪었던 곳, 이제는 만사가 모두 공허로 돌아갔다네. 넓은 바다 물결은 천추(千秋)의 달빛 아래 고요하고, 변방 관문(關門)의 구름도 한 피리 바람과 함께 걷혔구나. 밝은 원님 응당 오늘의 두모(杜母)라 노래할 것이요, 글하는 사람으론 누가 양웅(揚雄 서한(西漢) 사람. 문장으로 이름이 높다)의 뒤를 이으려나. 앉아서 다시 ❈성인(聖人 일본 : 본인 주 : 해설자의 의도된 번역이다. 어떻게 성인이 일본을 말하는 것인지 반도의 역사학계는 참으로 오만방자한 사람들이다. 다음 문장을 보면 ; 성인의 덕화가 점점 동쪽으로 번졌다하는 것은 당시 일본은 반도 서쪽에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알 수 없는 해설이다)의 덕화(德化)가 점점 동녘으로 번져 나온 것을 치하하니, 때로 산 넘고 바다 건너 귀화(歸化)해 오는 야인(野人)을 보겠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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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해설을 읽으려니 참으로 난감하다. 도대체 이러한 역사해설들이 어떻게 21세기에 가능한 것일까? 국가적인사업으로 벌이는 작업도 모두가 "열도“의 ”일본“을 위한 것으로 둔갑해야 되는 건지 묻고 싶다. 반도 인들은 옛 왜(倭)의 후손들인가. 선조인 왜(倭)를 위하는 마음으로 조선(朝鮮)의 역사 기록을 해설하고 있는 것인가.


위 글 중에서[❈성인(聖人 일본 :《본인주》: 해설자(번역자)의 의도된 번역이다. 어떻게 성인이 일본을 말하는 것인지 반도의 역사학계는 참으로 오만방자한 사람들이다. 다음 문장을 보면 성인의 덕화가 점점 동쪽으로 번졌다하는 것은 당시 일본은 반도 서쪽에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알 수 없는 해설이다)의 덕화(德化)가 점점 동녘으로 번져 나온 것을 치하하니, 때로 산 넘고 바다 건너 귀화(歸化)해 오는 야인(野人)을 보겠네.” 하였다.]를 보면 ;


위 글에서 성인(聖人)이란 말하는 분은 대륙 왕조의 천자나 황제를 말함이고, 그 덕화가 동(東)쪽으로 뻗친다는 말이다. ➡《이럼에도 “성인(聖人)”을 “일본(日本)”으로 지칭하여 해설해 버리면 일본(日本)은 반도의 서(西)쪽에 있었다는 말이 되며, 반도(半島)는 일본왕의 덕화를 입었다는 이야기가 전개된다.》“고전번역원”으로 들어가 다시 확인해보니 틀림없이 “성인(聖人 : 일본)”이라는 글자가 확연하다. 이러한 일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떨리는 가슴을 진정할 수가 없다. 본인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아님 오타일수도 있겠으나 이건 변명조차 될 수 없는 것이 하루 이틀 게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번역이나 해설을 하였으면 많은 이들이 이것을 검증했을 것이다. 따라서 오타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 본인의 이해력이 부족해 잘못 이해하였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바램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가능한 시급히 수정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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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3월 17일 인터넷 판 <연합뉴스>를 보면 <고종 국새 6점 1910년 종적 감춰>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은 글이 실렸었다. <연합뉴스 | 김태식 기자>


[(중략), 고종의 사례에서 보듯이 그 신분이 '조선왕'이건 대한제국 '황제'건 관계없이 조선시대 군주는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많은 국새를 제작해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했다. 조선왕조 500년 기간에 27명의 왕이 사용한 국새는 그 정확한 통계수치는 없지만 엄청나게 많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의아하게도 지금까지 조선시대 국새는 단 1점도 실물이 남아있지 않았다. 이런 의문과 관련해 국립고궁박물관 등이 상설전시품으로 내놓은 '임금님 도장'은 도대체 뭐냐는 의문을 표시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도장들은 '어보'(御寶)라고 해서 종묘의 신실(神室), 즉 각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공간에 안치한 의례용 도장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어보는 실무에는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중략)]


위의 글을 간단히 정리하면 ; 근대조선 500년. 27왕이 사용한 어새(御璽) 즉 옥새(玉璽=국새國璽)는 무수히 많았으나 그 실물 즉 어새(御璽=玉璽=國璽)는 단 한 점도 보관되어 있는 것이 없다(전해오는 것이 없다)는 설명이다.


반도 땅에서 500 년을 이어온 근대조선은 스물일곱명의 황제 또는 왕이 있었으며, 그 왕들이 사용하던 수많던 어새(御璽)들이 단 한개도 전해져 오는 것이 없다는 의미다. 반도의 왕조는 왕조이되 어새(국새=옥쇄)하나 가지고 있지 못한 허수아비 왕조였다는 말인가?


아님 일제 애들이 모두 수거하여 빼앗아 갔다는 변명은 하지말자. 치사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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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와 잡 설>에 보면 ; 목 은(이색(李穡 : 1328~96)이 시중(侍 中) 송 헌(松 軒 : 이성계)에게 부친 시가 있는데 ; 


삼한이 천명 맞아 날이 방금 한창인데 / 三 韓 迓 命 日 方 中

백 번을 꺾여도 사귀는 정 ➡물이 동으로 흐르는 듯 / 百 折 交 情 水 必 東

난리는 저절로 사라지고 화기 동함은 / 乖 亂 自 消 和 氣 動

황각에 맑은 기풍 있어서 이네 / 只 緣 黃 閣 有 淸 風


: 본인은 당시의 정권 실세들의 발자취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당시에 지어 현존하는 내용 속에 있는 지형, 지리와 산천지리에 대해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고려(高麗) 또는 근대조선의 강역을 찾는데 중요한 역할이 될 것이란 생각 때문이다.


: 보자. “百 折 交 情 水 必 東 ; 백 번을 꺾여도 사귀는 정 ➡물이 동으로 흐르는 듯”이라고 한 구절에서 <水 必 東>은 <물은 반드시(틀림없이) 동으로 흐른다.>는 의미다. 이럴 때 반도의 지형, 지세로 보면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몇 개 없고, 그나마 조그마한 도랑 물 정도이며, 대강 즉 큰 하천은 반드시(틀림없이) 서쪽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위의 글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


위 내용이 사실이라면 근대조선의 영토는 하천의 물들이 동(東)쪽으로 흐르고 있는 산천지리(山川地理가)가 있는 곳에 있었어야 정상이다. 또 이해할 수 있다. 반도의 지형, 지리와는 반대의 형상을 띄고 있기 때문에 위에서 말하는 <목은>이나 <송헌>은 반도 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이 반도 인이 아닌 대륙인이라면 고려나 근대조선은 반도에 존재할 수 없다.


2009년 04월 05일

필 명 ; 문무 씀[우리역사의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