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변절

고종황제가 사용한 국새 발굴

한부울 2009. 3. 18. 13:38
 

대한제국의 역사는 일제가 윤린한 역사이다.

국새의 역할이란 것은 지극히 사적일 수밖에 없고 국새가 있었다면 일제가 손에 쥐고 좌지우지 하였을 것이라고 본다.

때문에 국새라고 하는 진정한 의미가 사라지고 만 것이다.

***************************************************

고종황제가 사용한 국새 발굴

[연합뉴스] 2009년 03월 17일(화) 오후 04:09

 

 

고궁박물관 "외국 친서에 사용"


지금까지 단 한 점도 실물이 남아있지 않다고 보고된 조선왕조 임금의 친서(親書)에 사용한 실무용 국새(國璽)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국립고궁박물관(관장 정종수)은 17일 오전 이건무 문화재청장이 참석한 가운데 박물관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해 12월 고종황제가 친서에 사용한 현존하는 유일한 대한제국시대 국새를 재미교포로부터 구입했다고 발표했다.


박물관은 이 국새를 구입한 직후 지금까지 약 3개월에 걸쳐 관련 기록을 검토하고 분석한 결과, 이 유물이 바로 식민지시대 유리원판 사진으로만 전해지던 사라진 고종황제의 국새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국새는 외함은 분실되고 보통(寶筒)이라 일컫는 내함과 함께 입수됐다. 국새는 전체 높이 4.8cm에 무게는 794g이었다. 손잡이는 거북 모양이며 비단실로 짠 끈이 달렸다. 정사각형 인장면(도장을 찍는 면)에는 '황제어새'(皇帝御璽)라는 글자를 양각(陽刻.돋을새김)했다.


이들 글자 중 '皇'자는 '白'에 해당하는 부분을 '自'로 썼으며, 이는 "대한제국기 고종시대에 사용된 다른 국새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된다"고 박물관 측은 덧붙였다.

내함은 황동(黃銅)으로 3단으로 만들어 하단에는 인주(印朱)를 넣을 수 있게 했으며, 그 윗단에 국새를 넣었다. 나아가 뚜껑은 네 면을 경사지게 꺾어 마무리했다.


하단과 뚜껑 내부는 붉은 비단을 직접 접착해 마무리했으나 국새가 들어가는 상단은 두께 0.5cm의 소나무로 내곽을 만든 뒤 붉은 천을 붙여 마감했다.


고궁박물관이 국새 성분을 비파괴 분석한 결과 은(銀)과 금(金) 비율이 거북형 손잡이는 81:18인 반면, 몸체는 57:41로 나타나 손잡이와 몸체를 따로 제작해 붙인 것으로 밝혀졌다.


박물관 측은 "고종이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황제에게 보낸 10여 통의 편지에서 사용한 황제어새로는 두 종류가 확인됐지만 이에 사용한 도장 실물은 사라진 것으로 간주됐으며, 그 중 1점이 유리원판 사진으로만 남아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었다"면서 "이 국새가 바로 유리원판 사진으로 남은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확인한 국새는 "그 제작기록이 보이진 않지만 '문화각(文華閣)의 옥새와 책문(冊文) 등을 보수하도록 하다'라는 고종실록(광무 5년 11월 16일)의 기록 등으로 미뤄 1901-1903년 무렵에 제작됐으며, 1903년 이탈리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 등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박물관 측은 설명했다.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이 국새가 가짜일 가능성에 대해 "다각도로 검토한 결과 도저히 그럴 가능성은 없다는 확신에 도달했다"고 말했으며, 정종수 고궁박물관장 또한 "이것이 가짜라면 이를 만든 사람은 인간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는 말로 자신감을 표출했다.


500년간 지속된 조선왕조에는 모두 27명에 이르는 임금이 있었으며 이들 임금은 이번 고종황제의 국새처럼 실무용 도장을 무수히 제작해 친서 등에 사용했을 테지만 그런 실물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일제 강점 직후 조선총독부가 압수한 고종황제의 국새류 중 제고지보(制誥之寶)와 대원수보(大元帥寶), 그리고 칙명지보(勅命之寶) 등 3점이 일본으로 유출됐다가 해방 이후에 반환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을 뿐이다.


이들 국새류는 명칭으로 보아 황제가 국내의 신민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군대를 통수할 때 사용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것을 실제 사용한 사례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고궁박물관을 비롯한 국내외 일부 기관 등이 소장한 '임금 도장'은 대부분 어보(御寶)라 해서, 그 임금이 죽은 뒤에 종묘에 안치하기 위해 제작한 '의례용'일 뿐이며, 왕이 생전에 실제로 사용한 국새는 아니다.


이런 중요성을 고려해 고궁박물관은 이 국새에 대한 국보 지정절차를 밟기로 했으며, 그와 동시에 일반공개도 하겠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은밀히 새긴 ‘황제어새’ 고종황제의 혼 오롯이

[서울신문] 2009년 03월 18일(수) 오전 04:16

 

 

되찾은 ‘대한제국 국새’ 의미


1897년 10월12일 조선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올랐다. 하지만 황제국에 걸맞은 지위와 화려함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2년 전 황비(명성황후)가 시해되는 비극을 겪었음에도 고종은 여전히 러시아와 일본, 중국 등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경국(傾國)의 위기를 헤쳐 나가야 하는 운명이었다.


고종은 나라를 사실상 빼앗긴 1905년 을사조약을 전후해 열강의 황제·군주에게 적지않은 친서를 보냈는데 대부분 품에 지니고 있던 ‘황제어새(皇帝御璽)’를 찍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17일 공개한 국새가 바로 이 ‘황제어새’다. 따라서 고궁박물관이 이 국새를 되찾은 것은 단순히 조선시대 국새를 하나 더 갖게 된 것을 넘어서는 의미를 갖는다.


●즉위 후 만든 13개에 포함 안돼


고종 13년(1876년) 11월4일 경복궁 교태전이 화재로 소실되면서 이곳에 보관하던 국새도 대부분 녹아버리거나 손상됐다. 이에 따라 고종은 소실된 옥새와 인장을 새로 만들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때의 상세한 제작 과정은 장서각이 소장한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에 보인다. 시명지보(施命之寶)를 비롯한 새로운 보인은 그해 12월27일까지 모두 11과(科·개)가 제작됐다.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뒤에는 각종 도장 또한 황제의 위상에 걸맞게 새로 만들어야 했다. 대한제국의 선포과정을 기록한 ‘대례의궤(大禮儀軌)’에는 이때 대한국새(大韓國璽), 황제지새(皇帝之璽), 황제지보(皇帝之寶), 칙명지보(勅命之寶), 제고지보(制誥之寶), 시명지보(施明之寶), 대원수보(大元帥寶), 원수지보(元帥之寶) 등 13과를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외교문서에 쓴 비밀국새는 2개?


하지만 황제어새는 이 기록에 들어 있지 않다. 국새의 제작과 관련된 기록조차 남기지 않은 채 은밀히 추진해야 했던 고종의 위기의식과 절박함을 황제어새는 보여주고 있다. 비밀로 남았던 황제어새는 이처럼 제작 관련 기록이 없는 것은 물론 누가, 언제, 어떻게 해외로 반출했는지조차 전혀 파악이 되지 않았다.


고궁박물관이 고종의 친서에 사용한 국새를 판별한 결과 두 종류가 사용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것을 박물관은 ‘제1유형 국새’(1903~1906년 사용)와 ‘제2유형 국새’(1905~1906년 사용)로 구별했다. 활자체의 미세한 차이가 있을 뿐 두 국새에는 모두 ‘황제어새’라는 문구를 새겼다. 이번에 발견된 국새는 ‘제1유형 국새’로 확인됐다. 두 과의 비밀 어새가 존재했던 셈이다.


고궁박물관은 이번에 공개한 비밀 국새가 만들어진 시기와 관련해서는 ‘문화각(文華閣)의 옥새와 책문(冊文) 등을 보수하도록 하다.’라는 고종실록의 기록(광무 5년 11월16일)으로 미루어 1901~1903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진위감정 절차와 환수의 의미


문화재청은 이번에 전각, 금속공예, 서체, 매듭 등 각 분야별로 10명에 이르는 평가위원을 따로따로 불러서 국새의 진위를 감정했다. 일반적으로 중요문화재라 하더라도 3명 정도의 평가위원회를 구성하는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이를 통해 국새의 재질 분석, 활자 비교, 국사편찬위의 유리원판 사진 비교 등의 과정을 거쳤다. 국새의 제작 관련 문헌이 없는 상황인 만큼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국새 구입의 실무를 추진한 정계옥 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장은 “10명의 위원 중 매듭을 감정한 분만 상중하에서 ‘하’ 판정을 내렸을 뿐 나머지 위원은 모두 틀림없는 진품으로 감정했다.”고 말했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대원수보(국방 관련용 국새), 제고지보(고급 관리 인사 때 쓰는 국새), 칙명지보(칙령을 내릴 때 쓰는 국새) 등 3과의 국새는 관련 제작 문헌(대례의궤)이 존재하지만 사용된 문서가 없는 데 반해 고종의 비밀 국새는 제작 관련 문헌은 없지만 사용된 문서가 존재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이 국새는 앞으로 국보 지정 절차를 밟은 뒤 덕수궁 석조전이 복원되면 고종 관련 전시에 활용할 계획”이라면서 “환수된 국새는 대한제국기의 정치, 사회, 왕실상 등 학술적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박록삼 강병철기자 서울신문사

********************************************

비운의 고종은 국새도 비밀리에 사용했다

[한국경제신문] 2009년 03월 17일(화) 오후 06:12


●문화재청 '황제어새' 공개 의미


고궁박물관, 美 교포로부터 구입…1901~1903년 제작 추정

국새와 사용된 문서 함께 발견된 것은 처음…국보급가치


"짐은 대덕국의 호의와 지원을 항상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짐에게 파국이 닥쳐왔습니다. 이웃 강대국(일본)의 공격과 강압성이 날로 심해져 마침내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독립을 위협받고 있습니다. 짐은 폐하에게 이런 고통을 호소하고 다른 강대국들과 함께 약자의 보호자로서 본국의 독립을 보장해 줄 수 있는 폐하의 우의를 기대합니다. "


대한제국 고종 황제는 광무 10년(1906년) 1월 경운궁에서 독일 황제에게 이 같은 내용의 친서를 썼다. 그리고 편지 말미에 황제의 도장인 국새(國璽)를 찍었다. 문화재청이 재미교포 소장가로부터 구입해 17일 공개한 '황제어새( 帝御璽)'는 바로 이 국새다. 이에 따라 현존하는 고종 황제의 국새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칙령지보''대원수보''제고지보' 등 3점과 함께 모두 4점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국새가 사용된 문서와 함께 확인된 것은 이번 '황제어새'가 처음이어서 국보급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새와 어보(御寶)=왕조의 임금이나 황제의 도장은 공문서나 친서 등에 실제로 사용한 국새와 왕실의 영속성을 상징하는 의례용 어보로 나뉜다. 국새는 사무용,어보는 의례용이다. 금과 은의 합금으로 만든 국새는 조각기법이 섬세하고 정교한 반면 구리와 은의 합금으로 만든 어보는 기법이 굵고 덜 정치하며 크기도 어보가 국새보다 4~5배나 된다. 특히 국새는 실무용이기 때문에 궁내부에서 보관하지만 어보는 왕이나 황제가 죽은 뒤 종묘에 의례용으로 안치하기 위해 만들었기 때문에 실제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런 까닭에 현재 어보는 330점가량이 남아 있으나 국새는 조선의 역대 왕들이 많이 만들어 썼음에도 고종 황제가 사용한 4점만 확인된 상태다.


문화재청이 이날 공개한 '황제어새'는 고종 황제가 친서에 사용한 국새의 하나다. 고종 황제는 용도에 따라 칙서용인 '칙령지보',군(軍) 인사용인 '대원수보',공문서용인 '황제지보' 등 여러 종류의 국새를 사용했으며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과정을 기록한 '대례의궤(大禮儀軌)'에는 '대한국새''황제지새' 등 13과의 국새를 만들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번에 공개된 '황제어새'는 친서에 사용된 두 종류의 국새 가운데 하나로 나머지 하나는 아직 존재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다.


◆황제어새는 어떤 국새?= 황제어새는 원래 내함과 외함이 함께 있었으나 외함은 분실된 채 내함만 돌아왔다. 황동으로 만든 내함은 상단에 국새를,하단에 인주를 넣을 수 있도록 2단으로 짜여졌고 국새는 도장 몸체와 거북형 손잡이로 구성돼 있다. 성분 분석 결과 거북형 손잡이는 은과 금의 비율이 81 대 18인데 비해 몸체는 그 비율이 57 대 41로 나타나 손잡이와 몸체를 따로 제작해 붙인 것으로 밝혀졌다.


가로 · 세로 5.3㎝의 정사각형 인장면에는 ' 帝御璽'라는 네 글자가 양각돼 있으며 이 중 황제의 '皇(황)'은 통상 '흰 백(白)' 아래에 '임금 왕(王)'을 두는 것과 달리 '白' 대신 '스스로 자(自)'를 쓴 점이 특징이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공개한 '황제어새'는 '대례의궤' 등에도 제작 기록이 보이지 않지만 '문화각(文華閣)의 옥새와 책문(冊文) 등을 보수하도록 하다'라는 《고종실록》의 기록 등으로 미뤄 1901~1903년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황제어새,어떻게 확인했나= 해외반출 문화재의 국내 환수를 위해 관련 정보를 수집하던 국립고궁박물관은 지난해 미국의 한 재미교포가 국새를 소장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후 고궁박물관과 문화재청은 전각,금속공예,서체,매듭 등 각 분야별로 모두 10여명의 전문가를 동원해 진위 여부를 확인한 다음 '황제어새'를 구입했다.


이들이 '황제어새'를 진품으로 확인한 결정적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국편)가 소장하고 있는 유리원판 사진이다. 고종 황제는 독일 황제에게 보내는 친서를 쓰기 전에 초고본을 써서 이를 일부 손질해 보냈는데 그 초고본을 찍은 유리원판을 국편이 갖고 있었던 것.또 국편은 최근 독일에 있는 이 친서의 원본을 촬영해 왔으며 전문가들이 감정한 결과 초고본과 원본,황제어새가 모두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됐다는 설명이다.


고종 황제의 국새를 찍어 독일 황제를 비롯해 프랑스,이탈리아,러시아 등의 군주에게 보낸 친서는 지금까지 10여 통 발견됐으며 이 중 국새와 그 국새가 사용된 문서가 함께 확인되기는 '황제어새'가 처음이다.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이 국새는 공문서에 주로 사용된 '대한국새''황제지보' 등과 달리 친서에 주로 사용된 점으로 봐서 비밀리에 제작돼 고종 황제가 직접 지니고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원래 국새는 상서원(尙書院)에서 직접 관리하는 것이 상례이나 황제가 직접 이 국새를 소지하고 관리한 점은 당시의 긴박하고 어려웠던 정치적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화동 기자 한국경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