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변절

3.1 독립정신은 분열과 반목의 통탄이다-박재목 칼럼

한부울 2009. 3. 1. 20:13
  

이상목 靑비서관 친일파 불가피한 부분 있었다 논란

 http://blog.daum.net/han0114/17046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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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독립정신은 분열과 반목의 통탄이다

[데일리안] 2009년 03월 01일(일) 오전 09:57

 

◇ 28일 오후 서울 탑골공원에서 열린 3.1 독립운동 희생선열 추념식에서 참석자들이 헌화.분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레닌이 주도한 제3차 인터내셔널 코민테른은 1국 1당주의 원칙을 고수하면서 국제주의 원칙을 엄격하게 강화했다. 이미 이보다 앞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조국 = 민족’의 개념은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베트남 독립건국의 아버지 호치민은 1952년 스탈린과의 정상회담에서 민족의 독립과 영광이 공산주의 이념보다 더 우선한다는 자신의 원칙을 끝까지 고수했다. 스탈린은 두 의자를 가리키며 “호치민 동지! 여기 두 의자가 있는데, 하나는 민족주의자 의자요, 또 하나는 국제주의자 의자인데 어디에 앉고 싶소?”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호치민은 당시 살벌했던 상황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둘 다 앉고 싶다”라고 잘라 대답했다. 베트남 민족의 독립과 자결을 모든 이념적·수단적 가치보다 우선적으로 천명했던 것이다.


3.1 독립투쟁의 오늘날 정신…“자기희생적 가치통합”


이처럼 통한(痛恨)은 이념과 사상을 초월한다. 지금까지 역사적 가치에서 이념은 언제나 지고하고 담대한 가치의 종속변수에 불과했다. 그래서 인간은 올곧은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이념과 사상의 잣대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선열들이 피로써 항거한 기미년 3.1 독립투쟁의 21세기적 염원인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 글로벌 경제난국에 허덕이는 대한민국과 지구촌의 인간적 가치를 세습독재와 그 아류들의 착취를 호도하기 위해 핵 놀음과 미사일 불장난을 떠벌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두 정권적 집단은 민족적 정통성, 선악, 이념적 호불호를 막론하고 동학혁명부터 처연하게 죽어간 수백만 독립투사들의 영령 앞에 숨을 멈추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그동안 이렇게 살았다. 일제의 강탈 앞에 맨몸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역사의 발전과 민족의 자유와 독립은 언제나 역사를 자각하는 민중의 피를 먹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독립투쟁 선열들은 이 땅과 우리 후손들의 역사발전과 미래번영을 지키기 위해 전 세계 어수룩한 뒷골목에서 기아와 공포, 질병과 배신의 시간과 싸워야 했다. 그들 중 대부분은 광복의 기쁨도 보지 못한 채, 전사하고, 옥사하고, 병사하고, 맞아 죽고,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으로 신음하다가 비참하고 외롭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우리는 이 점을 항시 잊어서는 절대 안 된다.


이념은 지고하고 담대한 역사적 가치의 종속변수에 불과


우리는 그동안 이렇게 살았다. 일제 강탈의 항일 전선을 조직하면서 독립투쟁을 전개할 때는 언제나 이념이나 노선, 신분의 귀천이나 지역차별 등을 따지지 않았다.


오직 이 땅과 이 민족을 강탈한 일제의 강도짓과 무차별 살인 만행을 응징하기 위해, 허기(虛飢)와 동상(凍傷)으로 몸이 문드러져도 끝까지 단 한 명의 왜놈을 처단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피를 쏟았다.


이것이 오늘에 일깨워 보는 제90돌 3.1 독립투쟁 정신이 아닐까. 광복 전까지 우리에게는 민족의 독립과 조국 건설이 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절실했다. 그래서 민족과 독립에 해로운 모든 탐욕과 분열, 반복과 질시는 일제의 강탈과 똑 같이 간주되었다. 모든 이념과 개인적 가치는 민족의 생존과 독립에 종속시켰고, 종속되어야만 했다.


그러면서 매 순간 우리가 민족독립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대한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자체적으로 요구하지 않는다면, 한민족 모두는 계속하여 개와 돼지와 같은 굴종의 삶을 살아야 할 뿐임을 스스로 자각해 나갔다.


망국의 원인은 우리 민족의 마음이 죽은 탓


“우리의 마음은 대한의 혼이다. 망국의 원인은 이 마음이 죽은 탓이다. 그래서 마음이 죽어버린 것 보다 더 큰 슬픔은 없다.” 3.1 독립투쟁과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초를 민족적·국제적으로 통합한 예관 신규식 선생이 그의 저서 《한국혼》에 남긴 처연한 외침이다.


그는 을사늑약을 보고 순국도 적극적 투쟁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바로 독약을 마셨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한 쪽 눈만 멀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스스로 한 눈으로 일제를 흘겨본다는 뜻의 ‘예관(睨觀)’을 그의 호(號)로 삼았다.


그는 사상과 이념, 신분과 빈부, 남녀와 민족을 초탈하여 다양한 독립투쟁 방안을 전개한 열린 가슴의 민족주의자이자 국제주의자였다. 그래서 “3.1 독립투쟁은 예관에 의해 점화되었다.”고 위창(葦滄) 오세창과 도올 김용옥은 단언했던 것이다. 물론 당시 일제의 정보분석도 이와 같았다.


신규식은 민족의 장래를 근심하다가 경술국치 이후 중국으로 망명, 쑨원(孫文)의 신해혁명(辛亥革命)에 가담하면서 중국 요인들과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결성하고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을 조직, 김구, 홍범도, 조소앙 등 당시의 우국열사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21년 광둥(廣東) 중화민국 정부로부터 유일하게 상해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아냈다. 하지만 1922년 임시정부 안에 내분이 생기자 참담한 조국의 장래를 근심한 나머지 25일간 단식으로 처연하게 목숨을 끊고 말았다.


1921년 4월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탐욕, 파벌, 신분, 지방, 노선, 금전 문제 등으로 도둑소굴같이 지리멸렬되고 말았다. 단재 등 많은 뜻있는 투사와 지사들이 떠났다. 그러자 신규식은 ‘불식(不食)-불언(不言)-불약(不藥)’으로 임시정부의 단합을 외치며 이승을 하직했던 것이다.


일제의 만행과 더불어 ‘역사의 적’은 항상 내부에 도사리고


동학혁명 진압(1894년), 명성황후 시해(1895), 을사늑약(1905), 경술국치(1910) 등 대한국(1897~1910) 시대를 전후하여 많은 이씨 왕족과 당시 권력적 위정자들은 일제에 아부하고 친일로 변절하여 엄청난 부귀영화를 자손만대로 누렸다.


그러나 한편으로 많은 지식인과 이름 없는 촌부들은 신규식 선생과 같은 의리와 충절로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자신의 목숨과 재산, 가족의 안위와 가문의 명예까지도 기꺼이 던졌다.


여기서 3.1 독립투쟁 90돌을 맞아 지금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본질이 나온다. 아직까지 이 민족적 거사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민족대표 33인이 고종의 국장일을 기화로 태화관 음식점 방안에서 독립선언서를 읽고 거리로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스스로 체포되었다는 고답적인 역사관에 짓눌러 있으면 곤란하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에 놀란 일제가 무단정치를 문화정치로 바꾸고, 조선과 동아 등 우리 민족의 자주언론을 허용했다는 어처구니없는 망발에 중독되고 현혹되어 있으면 안타깝다.


당시에 이미 대한의 민족독립 정신은 한반도를 벗어나 중국 대륙, 연해주, 북간도, 서간도, 시베리아, 미주, 일본 등지에서 활발히 싹이 트고, 투쟁의 국제적 연계를 도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항상 내부에서 굼틀거리는 탐욕과 반목, 아집과 갈등이었다. 일제는 이를 교묘히 악용했다. 불신과 배신의 공포가 독립투쟁 전선의 전반에 팽배하여 연합적 역량 발휘를 치명적으로 방해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잠깐 스치는 미풍이었고, 그 이전에 3.1 정신은 이미 우리의 얼과 혼에 체화된 자존과 자결, 그리고 자주의 원칙에 입각한 반만년 한민족 민중의 뜨거운 독립과 투쟁정신의 발로였다.


가까이로만 봐도 3.1 정신의 연원(淵源)은 위로는 영·정조와 당시 위정자자들이 그 본질적 가치를 깨닫지 못했던 실학의 창안과 연계되었고, 아래로는 이 땅 민초들이 스스로 가치를 개창한 동학의 숭고한 인내천 사상에 그 염원의 뿌리를 박고 있었다.


1919년 상황은 모든 것이 우리에게 불리


1919년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난 뒤 미국 대통령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지만, 대한국 시대 이전부터 미-일의 밀약관계 때문에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우리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또한 1919년 베르사유 강화회의에 우리의 독립 선각자들은 많은 기대를 걸었으나, 각국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비밀조약, 제국주의 체제의 재확장, 일제의 협박과 미국의 일방적 동조, 중국의 조인 거부 등으로 강화회의 자체가 이미 풍비박산이 난 상태였다.


그래서 당연히 우리는 지대한 관심은 가졌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가 출석하여 정치범 석방, 집회·결사의 자유 등 대한 인민의 자결과 독립을 전파하고 요구할 상황이 아니었다.


한편, 1919년은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이 창설되어 개별 국가에는 1국 1당의 원칙에 따라 우리 민족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투사 중 많은 인사들이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계급투쟁에서 반제국주의 투쟁으로 노선을 바꾸어 사회주의 성격의 독립 유격투쟁의 이념적 근거를 마련해 나갔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3.1 독립투쟁은 인도 간디의 샤타그라하(眞理把持)와 중국의 5.4운동의 시원을 기록해 국제적 자각을 촉구시켰다. 특히 중국 인민들은 조선의 비극적 운명이 바로 자신들의 운명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간디, 네루, 진독수, 모택동 등이 고무된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3.1 정신의 연원…실학의 창안과 동학의 인간정신


조선 중기 이후의 실학적 탐구정신은 무한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실용의 빛을 보지 못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가치주의와 과학주의를 지향한 실학의 인간정신과 더불어 삼한 일대에 30만 민초의 피를 쏟은 동학혁명의 의지는 대한국(1897~1910) 시기 전국적으로 궐기한 의병투쟁을 거쳐 연해주와 간도의 대일 무력독립 투쟁으로 활발히 거듭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비폭력, 산발 시위로 참가자 200만 명 이상의 거족적 투쟁임에도 불구하고, 외형적 성과에 비해 우리 민족은 많은 피해를 초래했다. 하지만 3.1 독립투쟁 정신은 곧바로 대표적인 서간도 신흥강습소의 강인한 민족독립 정신과 무력투쟁 의지 등과 결부되었다.


그러자 간도와 연해주의 홍범도 김좌진 등의 봉오동전투, 청산리 전투의 전과로 피어났고, 그 후 수많은 항일무장투쟁의 정신적 지주로 재창조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애국애족 의거는 1932년 매헌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이어져 4억 중국인뿐 아니라 제국주의 전체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런 독립투쟁의 자기희생 정신이 대한민국의 광복과 건국정신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왜 비폭력(非暴力) 원칙을 채택했나?


기미독립선언서 이전에 이미 무오년 대한독립선언서가 있었다. 간도와 연해주 지역 신채호, 조소앙 등 39명의 민족독립 선각자들은 1919년 초(음력으로 1918년 11월) 중국 동북부 길림성에서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맞추어 대한독립을 최초로 선언했다. 한민족 독립의 당위성과 무력투쟁의 대일항전을 최초로 전 세계에 명확히 선포한 것이다.


이처럼 동학혁명과 의병항쟁에 견주어 볼 때, 비폭력과 평화적 시위는 우리 민중들에게는 어설픈 것이었다. 무오년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는 육탄혈전(肉彈血戰)을 명시했고, 동경유학생의 2.8 독립선언서도 ‘혈전(血戰)’을 선언했다.


혁명에는 언제나 비폭력의 민중투쟁 그것만의 성과에는 내재적 한계가 있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에서 한반도 내에서의 무력투쟁의 방도는 너무나 요원할 뿐이었다. 외국의 도움없이 일제의 엄혹한 감시 하에서 무기획득의 방책과 조직 체계의 기회는 없었다.


그러나 우리 민중은 비로소 3.1 독립투쟁을 통하여 무력투쟁의 절실함을 알게 되었고, 입으로의 애국계몽이니 민족교육의 개조 주장은 헛발질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그 후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난 연해주, 북간도, 서간도, 일본, 미국, 중국과 한반도 전역에서의 무력투쟁과 한민족 원흉의 민족적 처단은 이를 잘 반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결국 무오독립선언과 기미독립선언은 뜻을 달리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되찾으려면 무력을 써야 한다는 것에는 서로 공감했다. 하지만 기미독립선언은 무력투쟁의 판단과 수단은 오직 시간문제라는 것을 전제로 했다. 따라서 3.1 독립투쟁은 저항적 무력투쟁을 잠시 유보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기미독립선언은 무력투쟁의 절심함을 일깨워 준 촉매제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새롭게 가져야 할 창조적 역사의 관점이다. 3.1 독립투쟁으로 우리 민족은 상상을 초월하는 인명과 독립투쟁 역량의 전략적 손실을 입었다. 일제는 한반도를 포함한 모든 독립투쟁 근거지부터, 소위 ‘빗질말살’ 초토화 방안으로 우리 민족독립의 싹을 모두 황폐화시켰다.


독립투쟁의 혁명 기지를 구축하고 있었던 연해주와 간도는 물론, 중국에서 조차도 우리 민중과 독립투사들은 굶어서 죽고, 얼어서 죽고, 맞아서 죽었다. 겉으로 문화정책을 표방한 제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해군대장 출신으로 아예 우리 민족의 씨를 말리려고 작정한 인간 도살자였다.


그는 독립투쟁의 씨가 보이면 여지없이 우리 민족을 개와 돼지처럼 도살하고 파괴했다. 결국 그런 인간 파탄으로 그는 1936. 2. 26일 일제의 급진파들에게 암살되고 말았지만, 이 당시 많은 대한의 인사들이 지레 겁을 먹고 친일로 변절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서도 우리 독립투사들은 풍찬노숙(風餐露宿)을 마다하지 않고 뜨거운 혈기로 독립투쟁의 의지를 북돋웠다. 그들은 어떠한 영예도 공명도 없었다. 더구나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기에 불평불만은 더 더욱 있을 수가 없었다.


기층 민중들도 독립군부대를 도왔다는 의혹만으로 일제의 대대적인 보복 학살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대표적으로 간도의 경신참변 만행이 이를 잘 반증해 주고 있다. 1920년대 간도 지역의 수만의 우리 동포들은 이렇게 무참히 학살되고 추방되었다.


오늘의 위정자들…풍찬노숙의 독립투쟁의 길 되새겨야


우리 조선은 평화로운 자족적 민족국가였다. 우리는 스스로의 역량으로 웅비의 길을 개창할 수 있는 충분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일제는 오도된 자만심으로 우리를 피탈했다.


이런 관점에서 3.1 독립투쟁은 첫째, 전 민족의 일치된 동질성의 정신적 가치를 완성하였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는 신분·지역·빈부·이념·종교·남녀를 초월한 의식혁명이자 사회혁명이었다.


둘째, 지금까지의 지배와 억압, 약탈과 굴종의 부조화를 극복하고 오직 민족적 대동단결을 기치로 삼은 융합적 민중혁명이었다. 창조적 실학정신과 인간적 동학정신을 이와 연계시켰던 것이다.


셋째, ‘우리’ 의식의 완성, 그리고 근대 지향과 민족 보존의 창조적 융합 이외에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대한의 민족주의 원리의 하나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을 통하여 한민족은 자유민주주의적 공화국인 대한민국을 건립할 수 있는 디딤돌을 마련하게 되었다.


넷째, 이때까지 정치적 자유의 획득만을 주목표로 했던 민족주의가 3.1 독립투쟁을 기화로 민족의 경제적 번영 내지 경제적 독립을 또 하나의 목표로 삼아 경제적 민족주의 의식이 민중 속에 침투하고 싹트기 시작했다.


다섯째, 3.1 독립투쟁 정신을 통하여 대한 민족이 스스로의 실력에 의하여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자유와 독립을 죽음으로서 찾을 줄 아는 대한 민족은 고도의 문화민족임을 세계에 알리는 동시에, 잔인무도한 일제의 본색이 진실로 야만이요 또한 인간적인 무능이라는 것을 세계만방에 폭로하였던 것이다.


3.1 독립투쟁은 한민족의 일치된 동질성의 완성을 의미


비폭력 평화적 시위와 비조직적 감상적 투쟁은 분명 비효율이었다. 하지만 실패라는 표면적 관찰과는 달리 3.1 독립투쟁은 승리를 향한 거보(巨步)였으며, 독립투쟁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 역사의 주체가 바로 우리 민중 자체임을 확인케 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3.1 독립투쟁 이후 열화와 같은 독립투쟁과 무력봉기의 의지는 수많은 제2, 제3의 안중근, 유관순, 윤봉길 등을 탄생시켰고, 의열단과 애국단, 그리고 이를 기저로 봉오동대첩, 청산리대첩, 수많은 항일유격전 승리 등이 역사적 성과로 나타났다.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의거, 신간회 등의 독립단체 조직, 다양한 임시정부와 사회단체 및 정당 등이 대한 민족의 주권회복과 국가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한 것 역시 3.1 독립투쟁이 실패한 것이 아님을 역설해 주는 명백한 증거들이다.


그래서 3.1 독립투쟁 제90돌을 맞아 이러한 민족적 의식개명이 우리 민족사에서 차지하는 의의와 시사점을 21세기 시대정신으로, 그 위치와 가치를 영혼의 외침으로 다시 한 번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회복과 역사창조를 동시에 일궈나가야


우리의 지난 역사는 확실히 불행한 역사였다. 싹을 틔우고 있던 민족의 독자적인 창발적 의지는 제국주의 침탈과 악랄한 일제의 약탈적 만행으로 수없이 좌절했고, 민중은 봉건적 지배 체제와 착취를 당하면서 성장의 길을 유보당한 채, 끊임없는 멸시와 외세와의 투쟁에 모든 생명의 힘을 소진해야 했다.


그래서 불행했던 근대 민족사를 극복하는 전기로서 우리는 바로 3.1 독립투쟁이라는 민족사적 기념을 21세기 역사적 시대정신으로 승화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21세기 대한민국 시대정신은 3.1 독립투쟁에서 지난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는 역사회복의 전기와 앞으로 불행하지 않을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 역사창조의 계기를 동시에 시사(示唆)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3.1 독립투쟁에서 민족 운동으로서의 저항적 측면만을 보아서는 안된다. 진정한 독립과 근대화를 지향한 힘찬 도약이라는 창조적 측면을 함께 도출해 내야 한다.


세계 어느 민족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저항과 창조가 동시에 융합된 독특한 민족운동으로 이해해 나가는 전향적 자세가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역사 외면…인간성의 무지에서 촉발


분명 일제의 야만적 만행과 지금도 자신들의 침탈과 비인간적 행위에 대한 사과와 속죄를 거부하고 있는 일본의 역사의식과 인간정신의 결핍은 지구촌의 보편적 인류가치와는 거리가 멀다. 실로 함께 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하지만 우리는 일본과 함께 살아야 하고, 일제의 철면피 역사의식을 인간적 이성으로 깨닫게 해 주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역사적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독특한 위치적 구조사슬에서 극일(克日)하는 것만이 지난 불행한 역사를 치유하는 길임은 자명하다. 극일(克日)만이 그 시대를 보듬고 통곡했던 수백만의 독립 선열들의 처절했던 피에 대한 보답이다.


그러자면 우리는 먼저 생잔(生殘)해야 한다. 그래서 한·중·일의 독특한 애증과 경쟁의 이중적 구조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면서 3.1 독립투쟁의 역사적 가치를 오늘의 관점으로 다잡아야 한다.


모든 역사적 아픔은 항상 내부에 잠복하고 있다. 따라서 극일(克日)의 정신도 우리 내부를 먼저 추스르지 못하면 요원하다. 대일무역적자 문제가 통상구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술경쟁력과 산업정책의 전략부재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의 역사적 만행에 속수무책인 것도 우리 자신의 역사의식 결핍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 스스로의 탐욕과 오도된 가치와 불신을 먼저 척결해야


그래서 되돌리고 싶지 않지만, 지난 자유시참변, 민생단사건, 남북분단, 6.25남침, 보도연맹사건, 제주의 희생, 광주항쟁 등 수많은 민족 내부의 갈등과 반목, 불만과 처단이 우리 스스로의 탐욕과 오도된 가치와 불신에서 촉발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어쩌면 3.1 독립투쟁의 역사정신은 양식과 씨앗의 차이에서 오는 교훈을 오늘 우리 모두에게 던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막무가내로 찾아 온 글로벌 경제난국에 대한민국은 지금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여전히 정치경제 모든 분야에서 이념과 가치의 혼돈 상태에 빠져 있다.


무작정 공짜의식과 양극화의 분노, 노동의욕 상실과 실업의 공포, 저출산 고령화의 생산적 체질약화는 한민족 전반적인 악성종양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책임을 미루면서 눈앞의 탐욕에만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지난 조선말과 대한국 시대의 혼조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양상이다.


또 하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오직 독재세습 사이비 정권 놀음에 빠져 2500만 우리 동포의 인권을 세계에서 가장 참혹한 지경으로 내몰고 있다. 김정일 정권은 북한 동포의 거의 모든 생존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으며, 기본권의 접촉 기회마저 박탈하고 있다. 북한에서의 사법절차는 실종되었고, 살인, 실종, 신체구금 등과 더불어 그들을 기아선상에 그냥 방치하고 있는 실상이다.


그런데도 세습독재 유지를 위해 핵과 미사일을 가지고 전쟁 장난을 하면서 같은 민족인 대한민국의 위신을 땅에 처박고 있는 망발을 일삼고 있다. 그렇게 공짜로 받아먹었으면서도 부끄럽거나 고마운 줄 모르고, 같은 동포를 금강산에서 총으로 쏴 죽이고도 사과한마디 없는 것이 그들의 철면피적 본질이다. 6.25남침도 마찬가지다.


남과 북, 모두 3.1 정신을 다잡고 통일의 길로 매진하자


그래서 90년 전 3.1 독립투쟁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우리는 아직도 진정한 독립을 이루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참다운 독립이란 우리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탐욕과 갈등, 이념·지역·빈부·지식·종교 등으로 인한 반목과 질시를 제거하고 통합과 의식적 가치융합을 이룰 때 가능해진다.


진정한 독립이란 몽매한 권력세습에 중독되어 2500만 북한동포를 일제의 침탈보다 더하게 생존의 한계선상으로 팽개치는 북한 정권을 개화시켜 자유민주주의적 통일을 이룰 때 가능해진다.


그래서 양식과 씨앗의 교훈은 우리 역사의 길에 있는지도 모른다. 양식은 비축해 두었다가 배가 고프면 먹으면 된다. 하지만 씨앗은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내일의 생존과 후손의 미래를 위해 끝까지 남겨 두어야 한다.


수많은 전쟁과 투쟁의 혼란 속에서 우리는 양식이 떨어져도 당장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씨앗을 먹지 않았다. 죽어가는 자식을 보면서도 종자는 배고픈 누구 하나가 한번 먹고 미래를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역사적으로 실천했다.


3.1 투쟁정신은 불행한 역사의 교훈을 간직한 씨앗


우리는 탐욕과 본능으로 살지 않았다. 씨앗은 앞으로 우리 모두가 씨를 뿌려 그 열매로 우리를 풍요롭게 하고, 자손만대 우리 후손들이 먹어야 하는 변할 수 없는 없는 절대가치임을 우리는 3․1 독립투쟁에서 외쳤다.


이것이 바로 양식과 씨앗을 보는 가치의 차이다. 그래서 이런 창조적 가치 관점에서 역사는 숭고한 3.1 독립투쟁의 정신을 우리 민족에게 영원히 간직할 ´역사의 씨앗´으로 남겨두었는지도 모른다.


지혜로운 농부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종자로 허기를 채우지 않는다. 이런 차원에서 3.1 독립투쟁의 역사적 가치 앞에서 지혜로움이란 지금 남(南)과 북(北) 모두에게 결핍되어 있는 탐욕과 아집, 분단과 반목을 스스로 탈피할 줄 아는 창조적 ‘자기해체’ 작업이 아닐까?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보면, 3.1 독립투쟁의 정신은 지금도 우리의 귓전을 때리는 아둔한 분열과 반목, 내부갈등과 불신에 대한 역사적 통탄(痛嘆)은 아닐까?


[데일리안 박재목 칼럼니스트](주)이비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