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변절

반드시 되 갚아야 할 해원[解寃]-을미사변 The Eulmi Incident

한부울 2009. 2. 10. 20:14

명성황후의 본 모습은? http://blog.daum.net/han0114/17050043

日외교관이 증언하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http://blog.daum.net/han0114/17050099 

명성황후 살해범 중 조선인 우범선(禹範善) http://blog.daum.net/han0114/17049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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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가 얼마나 큰 대륙조선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에 일본이 제거해야 할 장벽같이 여겨 정책적으로 합세 암살을 도모하였으며 끝내 무사깡패 하수인들을 시켜 살육하도록 지시하였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청말 서태후를 끼워넣기 할 수 있는 기회로 삼는 거대한 역사음모의 시작이라고 할 만큼 충격적인 것이라고 판단되며 대륙조선을 무너뜨릴려고 하는 당시 예수회 주도 국제 정치적인 상황도 한 몫했을 것이란 판단을 할 수 있다.

서태후가 명성황후로 둔갑 할 수 있는 시대적인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서태후를 능가하는 조대비(趙大妃, 대한제국 황후, 추존왕 익종(翼宗)의 정비(正妃)이며 헌종(憲宗)의 어머니 신정왕후(神貞王后, 1808~1890.음력4.17)란 여제(女帝)가 있어 연상되지만 어쨌던 조선말 철종 죽음으로 고종으로 교체되는 시기와 분리되어야 하는 대한제국의 고종의 등장문제가 청나라 함풍제 이후에 벌어지는 형국과 비슷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청나라 역시 함풍(咸豊1850~1861)의 갑자스런 죽음으로 서태후가 등장하면서

동치(同治1861~1875)가 등극하고 이어 광서(光緖1875~1908)까지의 시기가 조선말기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이럴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조선과 청이 교체되는 시기라고 보는 것이다.

하여튼 서태후의 등장은 수수께끼같은 사실이라고 하고 있다.

서태후는 만들어진 여걸이라고도 한다.

조선과 청이 교체되는 모든 상황은 일제와 서세가 합세하고 명성황후를 대신 할 수 있는 서태후를 만든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해당한 시기가 다르고 태어난 연대가 달라 의심 할 수 없다고는 하지만 지금까지 나타나는 모든 정황에서 보면 분명 대륙조선과 청의 교체에 따른 의도된 사건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 함풍제와 철종은 여러모로 같다.

그렇다면 분명 대륙조선은 청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철종죽음 이후에 고종이 등장하는 것은 신종황후가 있어 많은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다.

고종과 흡사한 동치 또한 서태후가 있어 혼란스럽다.

동치가 광서로 넘어가는 시기가 대륙조선이 완전히 붕괴되는 싯점과 맛물리고 있다.

대략 1875부터 1881년까지이다.

우리 역사기록에서는 대한제국 성립일자가 1897년 10월부터 1910년 8월 22일 까지라고 하여 명성황후시해(1895)와 청일전쟁(1894~1895) 이후라고 못을 박고 있지만 기실 1881년 10월이라고 보이고 1882년은 임오군란이 벌어진다.

바로 대륙조선과 청이란 상징성이 뒤바뀌는 시기인 것이다.

어쩌면 중앙아시아를 포괄하던 대륙조선이 철종과 일족이 몰살함으로서 야기된 국내혼란은 서세의 압력과 맞물려 결국 1881년에 망하자 대륙(동국)만을 영역으로 하던 대한제국에서 청군벌과의 권력다툼이 있었다고 보이는데 그것이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갈등으로 나타난 것이고 명성황후가 대륙조선을 밀고 있던 러시아와 태생적인 관계가 있었다면 몽골계 청 황제를 내세우려는 서세와 일제가 있어 충돌로 이어지고 결국 명성황후를 제거하려고 하였던 것이라고 풀이 할 수 있다. 

그때까지 대륙조선의 대외적인 명칭과 중앙정부로서 만다린 명칭이 청이었다면 대한제국으로 바뀌면서 청군벌이 그자리를 차지하였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대륙조선과 청이 역사적으로 자연스럽게 교체하게 하는 사건이고 방해가 될 수 밖에 없는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통탄할 이야기다.

우리의 역사는 분명 난도질 당하고 끝내 망하고 말았다.

그들의 잔혹함과 잔인성에 의하여 흔적조차 없이 깡그리 망했다.

그들이 누구인가?

근본이 기생충 같은 종족이다.

아열대 연안을 무리지어 누비며 도적질과 살인을 일삼던 왜구이고 해구이며 짐승들이다.

우리 선대가 그들을 인간취급도 하지 않았던 미개한 종족들에게 이처럼 한없이 짓 밟히고 더렵혀져 역사는 끝내 시궁창이되고 말았다.

옛 삼한과 고려와 조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망한 것인가?

나라만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어짐의 역사가 그들에 의하여 완벽하게 단절되었고 그야말로 초토화 되어 흩어져 버린 먼지가 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우리 역사의 참모습이고 참담한 실체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겨진 역사는 무엇인가?

그들이 다 부수고 초토화시킨 후 그들 입맛에 맞게 만들어진 가공의 역사 일뿐이다.

그야말로 고통이고 아픔이며 전 민족이 다 같이 같은 날 미련없이 옥쇄 한다 하여도 모자랄 굴욕이고 참담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엄청난 짓을 이웃으로 여태껏 꾸짖어도 보고 달래도 보았지만 그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과거 잘못된 역사에 대한 반성을 진심에서 하는 지금의 독일과도 다른 비인간적인 종족이라는 사실도 우리는 알 수 있다.

100년이 넘도록 끊이지 않는 분노와 민족의 아픔이 뒤 범벅이 되어 이제 우리 민족 가슴엔 하나같이 멍이되고 문신이 되어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가 되고 말았다.

이것이 잘못된 역사라면 당장 끝을 맺을 수 있어야 한다.

절대 이 상태가 지속되는 것을 방치 할 수 없다.

이러한 역사 현실이 천리(天理)를 거스린 것이라면 반드시 되돌려 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시시때때로 과거사가 무슨 훈장이라도 된 것처럼 은근히 내세우며 상채기를 건들이며 헤집어 놓고 있다.

그래서 선조가 남겨 둔 진실의 사서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 선조들께서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던 것이아.

미개한 왜구무사종족들이 우리의 찬란하고 웅장한 역사를 갈취하는 것도 모잘라 살육의 피를 마시며 살인귀가 되어 아직까지 남아 세계경제대국으로 군림하고 있지만 뿌리까지 속일 수 없다 할 것이다.

항시 그들 뒤춤엔 우리가 알 수 없는 무엇인가 숨기고 음모를 꾸미며 침탈의 기회만을 엿보는 간교한 족속들임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그들의 실체이고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들이다.

근대사를 보면 우리의 역사는 이제 풍지박산이 났지만 그들 왜구 왕조는 상처하나 없이 건재하다.

우상같이 섬기던 초강대국인 서양제국 그것도 미국에게 덤벼들다가 실컷 두들겨 맞고 그들 땅 나카사키, 히로시마에 핵폭탄까지 맞았지만 거짓말처럼 건재하다.

이것이 어찌 온당한 천리라 하겠는가?

아직 천리는 올바르게 시행 되지도 않았고 시작하지도 않았다.

근세기 역사는 힘있는 자들만의 향연이었고 그들이 그들의 입맛에 맞추어 차려놓은 잔치상이었으며 그야말로 수수께끼같은 더럽고 추잡한 음모가 난무한 쓰레기 같은 유물의 역사이다.

우리는 더 이상 쓰레기 같은 유물들을 끌어안고 하루라도 더 살수가 없다.

또한 미개하고 더러운 왜구종족에게 받은 치욕의 역사가 더 이상 무거운 멍에로 남아 지속되어 자손들에게 깊은 상처를 물려줄 순 없다.

바로 명쾌함과 확실함이 담보된 해원으로 씻어내고 도려내어야 할 실천의 역사만 남았을 뿐이다.

이러한 한을 해결하지 않고서야 어찌 미래의 찬란한 역사를 기대 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풀어야 하고 되갚아야 할 사무친 원한이 틀림이 없다.

해원을 푸는 일은 현대에 살고 있는 바로 우리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신성한 성업으로서 개개인의 몫이기도 하다.

억울하게 비명횡사 하신 선조님들의 한이기도 하다.

또한 천지신명의 맡겨진 소명이기도 한 것이다.

그 해원의 시기는 언제쯤인가?

그 때가 이 몸이 죽고 난 후가 되어서야 어찌 제대로라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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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되 갚아야 할  해원[解寃]-을미사변 The Eulmi Incident

 

이 사진은 명성황후가 아닐 가능성이 100%

일본 놈들 기록에 이 사진이 의도적으로 여기저기 나타나는데 이것 역시 조작일 가능성이 높다.

명성황후의 본 모습은 우리 몽골계가 아닐 수도 있다.

 

                이것은 일제가 의도적으로 흘린 사진일 가능성이 높다. Empress Myeong Seong

 

                                            명성황후 대한문 앞 국장의례식(1897)


을미사변(乙未事變)은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일본 제국이 조선을 침략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인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지휘하는 일본 낭인 등에게 시해된 사건이다. 명성황후 시해참변 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민비학살사건이라고도 부르며, 당시에는 을미년의 변(乙未之變) 또는 을미년 팔월의 변(乙未八月之變)이라고 불렀다.


배경


고종과 명성황후는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고 문호를 개방한 그때에는 일본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1884년 친일 급진개화당이 쿠데타(→갑신정변)를 일으키자 일본과 협력하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친일노선에서 거일(拒日) 노선으로 선회한다. 그러자 일본은 고종과 명성황후, 특히 명성황후에게 반감을 갖게 된다.


갑신정변이 을미사변의 간접적인 원인이라면 직접적인 원인은 청일전쟁 이후의 국제 정세와 조선 정부의 행보 및 그것을 만회하려는 야욕을 일본의 야욕이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를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 양국 군대가 조선에 입국하여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1895년 청나라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명성황후는 일본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계책 마련에 고심한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직후 서양 삼국, 곧 러시아·독일·프랑스가 일본에 간섭하여 일본이 얻은 이권을 내놓게 하였는데, 이것이 삼국간섭이며, 그에 따라 일본은 조선에서의 지위도 흔들리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주시하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친서방 정책을 강화했다. 특히 일본보다 훨씬 강하게 여겨지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도록 했다.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로서,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 또는 수원책(綏遠策)으로 불렸다.


당시 일본은 세 개의 칼을 가지고 대외정책에 임했는데, 러시아 황태자, 청나라 전권대신, 그리고 한국의 국모를 죽이는 것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한편 일본의 위축은 갑오경장에 불만을 품은 근왕 세력과 동도서기파에게는 자주독립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겨졌으며, 일본이 궁궐을 무력으로 장악한 가운데 추진한 갑오경장은 고종과 명성황후뿐만 아니라 국민 정서에도 크게 위배되었다. 국가 주권을 지키려면 강력한 지도력을 지녀야 하며 또한 왕실의 위상이 높아져야 했다. 그러나 당시의 갑오경장을 추진한 세력은 일본의 침략을 수월하게 하는 데 지나지 않았으므로 고종과 명성황후는 당연히 갑오경장에 반대하였고, 국민의 정서도 마찬가지였다.


명성황후는 안으로는 삼국간섭 직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유배당한 민씨 척족을 다시 결집시켜 친위 세력을 형성코자 했으며, 밖으로는 수원책으로 서양 세력, 특히 러시아와 우호를 증진시키려 했다. 이를 바탕으로 러시아·미국에 호감을 가진 정치 집단인 정동파(貞洞派)가 탄생한다.


민씨 세력이 친서방 정책을 펴자 일본은 조선 내 친일 세력을 사주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그러나 사건이 미리 발각되자 그 주동자인 박영효가 1895년 윤5월 일본으로 망명한다. 드디어 일본은 황후를 직접 시해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었든데, 국내외 여론을 호도하기 위해 황후와 갈등 관계에 있는 반대 세력인 흥선대원군과 훈련대 군인들을 음모에 이용한다.


당시 흥선대원군은 반역 사건에 연루되어 공덕리 별장(아소정)에 유폐되어 있었는데, 좋지 않은 소문이 돌아서 공덕리는 매우 위험한 곳으로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도 대원군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고종 및 황후와의 불편한 관계를 이용하고자 했을 따름이다. 결국 사건 당일 대원군을 궁궐에 들여보내 그가 황후 시해를 주도한 듯이 보이도록 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를 죽이려 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훈련대는 갑오경장이 진행되던 1895년 음력 5월 궁궐 수비를 위해 설치된 군대인데, 교관이 일본인으로 실제로는 일본 공사관의 지휘를 받는 군대였다. 제1대와 제2대로 나뉘었는데, 대장은 각각 이두황과 우범선이었다. 고종과 황후는 훈련대를 의심하여 연대장으로 홍계훈을 임명했다. 또한 훈련대를 견제하기 위해 같은 해 윤5월 미국인 다이(Dye)에게 시위대를 창설하여 훈련을 시켜 장차 훈련대를 대체하려고 했다. 그러나 일본의 견제를 받아 규모나 무기 면에서 훈련대보다 열등하였고, 이는 을미사변 때 시위대가 궁궐 수비에 실패한 원인이 된다.


준비 과정


을미사변은 미우라 일당이 저질렀지만, 그동안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진정한 주동자는 미우라에 앞서 공사를 지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비롯한 일본 정치의 최고 원로(元老 : 겐로) 및 이토 히로부미 총리를 비롯한 각료였다. 당시 을미사변 실행자들이 일본 정부의 실권자인 원로들에게 보호 받았는지는 그들의 사후 출세 가도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심비어 미우라는 재판을 받고 석방되자 일본 메이지 천황이 직접 시종을 보내 치하하기까지 했다.


한편 사건의 실행자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은 당시의 목격자인 궁녀, 환관, 태자 이척 등이 증언한다. 또한 러시아인 건축기사 세레딘사바틴(Середин-Cабатин, 士巴津, Sabatin, 흔히 사바틴)과 시위대 교관인 미국인 다이(W. M. Dye)가 현장을 목격하여 범인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서양 각국에도 알려졌다. 일본은 기록을 조작하여 황후 살해 책임을 흥선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에게 돌리려 했다.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한 준비


을미사변은 매우 치밀하게 준비되었는데, 기본적으로 당근과 채찍을 준비하였다. 당근으로는 왕실을 회유 혹은 매수하여 반일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경계심을 풀게 하려 했으며, 채찍은 바로 황후 시해였다.


《한국통사》 등에 따르면, 주한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 부부는 사건이 있기 한 달 전 일본을 다녀온 뒤 왕궁을 방문하여 조선 왕실의 안전을 확보한다고 약속하면서 9천 원에 상당하는 선물을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바쳤다고 한다. 당시 내각에서 논의하고 있던 조선 정부에 대한 차관을 지급하기로 이미 결정했다고 거짓말까지 한다. 고종은 이노우에가 너무 진지하여 예방을 소홀히 했다고 한다. 이때의 이노우에의 행동은 일본에 대한 고종과 황후의 경계심을 풀게 하려는 계산된 연극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매천야록》과 《대한계년사》에 따르면, 일본은 고무라(小村室)의 딸을 명성황후의 양녀로 삼게 하였는데, 뒤에 그녀는 명성황후의 신원을 확인하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또한 고무라의 딸과 명성황후가 궁중 연희(演戱)를 보고 있을 때 배우 가운데 종왜(從倭, 일본을 따르는 사람)로 하여금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고 한다.


육군 중장 출신 미우라 고로가 1895년 9월 1일(음력 7월 15일) 공사로 부임한다. 전문 외교관이 아닌 군인 출신을 공사로 보냈다는 사실 자체가 특수 임무를 띠고 있었음을 암시한다는 주장이 있다. 우익군인 세력의 거두였던 미우라는 조선에 온 뒤 두문불출하고 불경을 외우면서 지냈는데,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염불 공사’였고, ‘수도승 같다’라는 평을 들었는데, 이는 경계심을 풀기 위한 위장술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시해 계획과 준비

 

            Japanese illustration of King Gojong and Queen Min receiving Inoue Kaoru.


황후시해 계획을 세운 이노우에가 일본으로 돌아간 때는 사건 20일 전이었다. 《대한계년사》에 따르면, 세부 계획이 세워진 때는 10월 3일(음력 8월 15일)이었고, 장소는 일본 공사관 지하 밀실이었다. 그때 미우라의 참모는 시바 시로(柴四郎)였는데, 하버드 대학과 펜실바니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고급 지식인이었다. 그는 조선에 나와 있는 일본의 극우 낭인 단체인 천우협(天佑俠)현양사(玄洋社) 소속과 긴밀하게 협의하면서 미우라를 보좌하였다. 일본의 낭인들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특이하게도 고급 지식인 출신이 많았고, 심지어 동경제국대학 출신도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직업적 정치깡패가 아니라 고도로 의식화된 지식인 테러리스트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날 모의에 참여한 사람은 일등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杉村 濬)와 궁내부 및 군부 고문관으로서 평소 흥선대원군과 친분이 두터운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 柳之助) 대위, 영사관보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 九萬一), 그리고 공사관 무관이자 포병 중좌인 구스노세 유키히코(楠瀨 幸彦)였다. 그밖에 직원에게는 비밀 유지를 위해 일체 알리지 않았다. 우치다 사다쓰치(内田 定侈搥) 일등영사도 이 모의에서 빠졌다.


당시 논의한 내용은, 첫째 시해의 주역은 일본 낭인이 맡고, 외관상으로는 흥선대원군과 조선인 훈련대의 반란으로 꾸민다. 이 일은 청일전쟁 직후 갑오경장 때 일본 군인의 궁궐 점령을 지휘한 오카모토에게 맡겨졌다. 둘째 일본인 가담자는 낭인 자객, 일본 수비대 군인, 일본 공사관 순사로 구성한다. 이때 낭인 자객은 한양에서 발행하는 일본인 신문인(新聞人), 한성신보 사장 아다치 겐조가 맡았다. 규슈와 구마모토 현 출신 낭인 30여 명과 한성신보 주필 구니토모 시게아키, 편집장 고바야가와 히데오, 기자 히라야마 이와히코, 사사키 마사유키, 기쿠치 겐조 등의 민간인이 참여하였다. 이러한 민간인의 참여는 일이 세상에 알려지더라도 공사관이나 일본 정부의 입장을 유리하게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비중이 컸다. 셋째 일본 수비대와 순사, 조선인 훈련대를 움직이는 일은 일본 공사관 소관이다. 그래서 황후 시해에 구스노세 유키히코 등이 참여한다. 넷째 거사일은 10월 10일 새벽으로 한다.

 

 


Miura, Goro (1847 - 1926)

 

                                              Oyama, Iwao (1842 - 1916)

 

                                 Inoue Kaoru (井上 馨, Inoue Kaoru) (1836 –1915)

Kunitomo Shigeaki (國友 重章)

Ieiri Kakitsu (家入 嘉吉)

Kikuchi Kenjō (菊池 謙讓)

 

을미사변을 일으킨 강도 살인범들(한성신보 사옥 앞에서) - 여기사진에 있는 자들뿐만 아니라 직간접적으로 개입되었다고 판명되는 자들 색출 解寃차원 剖棺斬屍 3번 반복 할 것. 물론 왜노왕실 당시 일제 권력을 가진 자들 또한 같고 자손까지 이와 같다


미우라는 황후 시해를 위한 음모를 “여우사냥”이라고 불렀으며, 예상보다 일찍 훈련대가 해산되자 거사 일시를 10월 8일 새벽 4시로 앞당기게 된다. 그러나 바뀐 계획도 차질이 생긴다. 새벽 4시에 작전을 끝내려면 늦어도 새벽 3시까지는 흥선대원군과 흉도들이 경복궁에 진입해야 한다. 그러나 대원군이 공덕리 별장을 떠난 때는 새벽 3시였고, 경복궁에 도착한 때는 새벽 5시가 넘어서였으며, 명성황후가 시해된 때는 6시경이었다. 그래서 많은 목격자가 나타나게 된다.


1894년 4월 15일 고등재판소 판사 권재현이 법부에 제출한 〈권재형 보고서〉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은 입궐하던 날 간사한 무리를 몰아낸다는 요지의 유시를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매천야록》에서는 이 유시가 김홍집 등이 대원군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한국통사》에서는 대원군이 입궐하는 일본인들에게 “오늘의 일은 단지 왕실을 호위하는 것뿐이다. 궁중에서 폭거를 행하지 말라.”라고 했다고 한다. 이를 종합하면, 흥선대원군이 황후 시해에 동의했는지 매우 의문이다.


한편 일본으로서도 흥선대원군의 정치 참여는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서기관 스기무라가 4개조 약조문을 초안하고, 10월 6일(음력 8월 18일) 오카모토가 이를 가지고 공덕리에 가서 대원군의 서약을 받았다. 주된 내용은 대원군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진행 과정

 

사전 모임

조선 정부가 훈련대의 해산을 명령한 때는 10월 7일 새벽 2시였다. 이에 군부대신 안경수가 9시경 급히 이 사실을 미우라에게 통보하고, 뒤이어 우범선도 달려와 미우라에게 보고했다. 이에 미우라는 거사 날짜를 그날 밤으로 바꾸고 스기무라와 의논한 뒤 오카모토를 불러들인다. 오카모토는 10월 6일 대원군을 만난 뒤 일본으로 가는 척하다가 급히 서울로 돌아왔다.


미우라는 거사 계획서인 〈입궐방략서〉(入闕方略書)를 영사관보인 호리쿠치 구마이치에게 주고, 용산으로 가서 거사 준비를 지시한다. 이에 한성신보 직원들과 낭인들은 칼 또는 총을 들고 용산으로 모였다. 또 미우라는 오기하라 히데지로(荻原 秀次郎)에게 영사관 순사들을 인솔하여 사복에 칼을 차고 용산으로 가도록 지시한다. 아사야마로 하여금 군부 협판 이주회에게 사실을 알리도록 하였고, 이주회가 조선인 몇 명을 규합하여 공덕리로 가도록 했다. 그렇게 그날 밤에 공덕리 대원군 별장에 모인 사람은 공사관 직원, 고문관, 순사, 기자 등 약 60여 명에 달했으며, 이들은 술에 취한 상태였고 복장도 제멋대로였다.


일본인들이 공덕리에 도착한 때는 자정쯤이었으나, 흥선대원군이 교여를 타고 떠난 때는 새벽 3시경이었다. 대원군은 그들이 온다는 사실을 모르고 잠을 자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담을 넘어 가서 별장 경리(警吏)를 모두 포박하여 가두고 옷을 빼앗아 일본인 순사들이 입었는데, 조선인으로 위장하려 함이었다. 오랜 실랑이 끝에 대원군이 집을 나섰는데, 아마도 일본인들이 대원군을 반강제로 끌어냈으리라 여겨지며, 76세 노령의 대원군이 이 쿠데타에 가담했다고 믿기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다.


일행이 서대문께에 이르렀을 때 우범선이 이끄는 훈련대 제2대대와 합류했다. 그들은 그때까지는 황후를 시해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잠시 뒤에 장소를 잘못 알아 엉뚱한 곳으로 갔던 140여 명의 일본 수비대 제1중대가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또 시간이 지체되었다. 이때 경복궁에서는 일본 수비대 제3중대가 광화문 부근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수비대 제2중대장은 훈련대 제2대대를 인솔하고 춘생문(경복궁 동북문) 부근에 집결하였다. 그들은 새벽 2시경부터 미리 와서 경복궁을 포위하고 있다가 광화문 쪽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사방에서 궁궐 담을 넘어 명성황후가 거처하는 건청궁(乾淸宮) 쪽으로 돌진했다.


새벽 2시경에 별군관에게 고종의 호위경관 2명이 달려와 삼군부(광화문 앞 경비실)에 일본군과 조선군 훈련대가 운집해 있다고 보고하자, 현흥택 정령은 즉시 궁궐 경비병 여럿을 광화문으로 급히 보내 상황을 확인했다. 시간이 지나 새벽 4시 무렵에 조선군 훈련대 대대가 춘생문(春生門, 경복궁 동북문)과 추성문(秋成門, 경복궁 서북문)을 포위하였다고 현흥택 정령은 증언했다.


다이 장군과 사바틴은 이학균 부령으로부터 보고받자마자 일어나 별군관실로 갔으나 2명의 부령과 최소한 6~7명의 당직 장교가 야근하고 있어야 함에도 그곳에는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고 사바틴은 증언했다. 또한 고종은 이미 새벽 4시 반 전후로 궁궐이 소란함을 알고 있었으며, 명성황후는 위험한 침전인 옥호루(玉壺樓)를 떠나 은신하였으리라 여겨지나[17] 궁궐을 벗어나지는 못했으리라 본다.


고종은 일본군이 궁궐을 포위했다는 급보를 받고 이범진에게 시간을 다투어 미국 공사관과 러시아 공사관에 뛰어가 도움을 요청하라고 명령했다. 이범진은 일본인 순찰을 피해 높이가 4~5미터인 담에서 뛰어내려 궁궐을 탈출하였다. 미국 공사관에 도착했을 때 대궐 쪽에서 첫 총성이 들려왔다고 이범진은 증언했다. 이범진은 미국공사관을 거쳐서 러시아공사관을 찾아가 궁궐이 일본군에 포위되었음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했다.


한편 고종이 미국 공사관과 러시아 공사관에 연락하라고 한 까닭은 미국인과 러시아인이 궁궐 내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례로 시위대 지휘관은 퇴역 미군 대령 출신의 다이(W.M. Dye)였고, 미국 공사관에서 의료 선교사로 활동하던 앨런은 최초의 외국인 어의였다. 또한 미국과 러시아 외교관이 일본은 유럽을 두려워한다고 건의하자 채용한 유럽인 경비원 가운데 건축기사 사바틴이 있었다.


사바틴의 증언을 보면 사건 전날(10월 6일) 밤에 조선군 훈련대와 일본군이 대궐 앞에 모여 소란을 피웠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그는 당일 밤에는 음모가 있으리라는 정보도 중국인으로부터 사전에 입수했다. 그런데도 안이하게 생각하고 대책을 세우지 않다가 결국 대궐이 포위되는 지경에 이른다.


경복궁 진입

새벽 4시 30분경 일본인 교관에게 훈련받은 조선군 약 250~300명이 일본인 교관 4~5명의 인솔을 받으며 뭔가 상의하였다. 그 뒤 한 조선인이 큰소리로 대문을 열어 달라고 몇 번 외쳤다. 새벽 5시 무렵 흥선대원군 일행이 광화문 앞에 이르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일본 수비대 제3중대가 미리 준비한 긴 사다리를 건네고, 일본 순사들이 담을 넘어 빗장을 풀었다. 광화문을 지키던 경비병과 순검들이 저항하여 총격전이 벌어졌다. 일본인들을 막으려고 나왔던 홍계훈은, 일본인에게 호통을 치다가 일본 수비대가 쏜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또한 담을 넘은 일본인 폭도들이 궁궐 경비병에게 발포하자, 경비병은 무기와 군복상의를 벗어던져 버리고 초소를 떠나 어디론가 달아나기도 했다. 한편 폭도들은 남쪽의 광화문, 동북쪽의 춘생문, 서북쪽의 추성문 등 3개의 문으로 침입하였다.


광화문이 열리자 일본군이 소리를 지르며 북쪽의 건청궁을 향해 돌진했다. 3백~4백여 시위대가 연대장 현흥택(玄興澤)과 교관 다이 장군의 지휘를 받으며 총격전을 벌였으나, 갑오경장 때 우수한 무기를 빼앗겨 일본군을 당할 수가 없었다.


명성황후가 기거하던 건청궁까지 다가온 흉도들은 대오를 맞구어 합문(閤門)을 포위하고 파수를 보았다. 자객들은 전당으로 들어가 밀실을 수색하기 시작했고, 흥선대원군은 근정전 뒤 강녕전(康寧殿) 옆에서 기다렸다. 훈련대 군인들은 건청군 앞마당에서 쉬며 황후 시해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또한 사바틴은 궁궐 안에서 수비하던 도중 폭도와 환관(宦官), 벼슬아치, 궁노(宮奴) 등에게 떠밀렸다가 일본인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 자신의 원래 직업인 건축가임을 밝히고 호위를 요청했다고 한다. 그 뒤 그곳에서 서서 사건을 목격하다가 명성황후 시해에 앞서 두들겨 맞고 현장에서 쫓겨난다.


명성황후 시해

궁 안의 상황과 흉도들의 궁 안에서의 행동은 자료와 증언마다 차이가 있다. 러시아인 건축기사 사바틴이 고종을 호위하고 있었는데, 궁전 뜰에서 일본인의 행패를 목격했다. 시위대 교관이던 미국인 다이(Dye)도 시위대를 지휘하면서 궁 안에서 이 참상을 목격했다. 사바틴과 다이는 둘 다 일본 군인들에게 폭행을 당했는데, 뒷날 일본인들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하는 증언을 하였다.


흉도들은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명성황후의 처소를 대라고 윽박지르는 등 난폭하게 행동했다. 그러나 궁녀들은 두들겨 맞고 내던져짐에도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건청궁 동쪽 곤녕합에서 황후를 찾아냈는데,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두 팔을 벌려 황후 앞(또는 황후가 있는 방문 앞)을 가로막고 나서다가 권총을 맞고 쓰러졌으며, 이어 신문기자 히라야마 이와히코(平山岩彦)가 다시 칼로 두 팔을 베었다.


흉도들은 궁녀들 사이에 숨었다가 도망치는 명성황후를 쫓아가 그녀를 마룻바닥에 넘어뜨려[16] 내동댕이친 뒤 구둣발로 짓밟고 여러 명이 칼로 찔렀다.[11][19] 〈에조 보고서〉를 근거로, 일본 군인들은 황후를 죽이기에 앞서 능욕했다는 주장이 있다.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局部檢査)(웃을(笑) 일이다. 또한 노할(怒) 일이다)를 하였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油)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筆)로 옮기기조차 어렵도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을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殺害)했다.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 〈에조 보고서〉


명성황후가 절명한 시각은 사바틴이 현장을 떠난 지 20~30분 뒤인 새벽 5시50분 이후인 10월 8일 아침 6시 직전이나 직후로 여겨지나,[20] 절명한 곳이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여간 방 안에서 황후의 시신을 보았다는 증언은 많다. 또한 흉도들은 황후를 죽인 뒤에도 그들이 죽인 사람이 황후임을 알지 못하여 용모가 비슷한 궁녀를 세 명 살해하였다. 흉도 가운데 황후를 죽인 사람으로 자주 지목되는 사람은 데라자키 다이키치(寺崎泰吉)이다. 그밖에도 나카무라 다테오(中村楯雄), 후지카스, 구니토모 시게아키(國友重章) 등의 낭인과 미야모토 소위, 마키 등의 일본 군인들이 황후의 침실에 난입하여 칼을 휘둘렀기 때문에 누가 범인인지 지목하기 힘들다는 지적도 있다.


흉도들은 그들이 살해한 네 여인 가운데 누가 황후인지를 확인하는 방법으로는, 궁녀와 태자를 불러와서 확인했다는 설, 황후 얼굴을 잘 아는 고무라의 딸을 불러와서 확인했다는 설(《매천야록》), 황후의 얼굴에 있는 마마 자국을 확인했다는 설, 처음부터 초상화를 들고 들어왔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으며, 이러한 여러 방법을 섞어서 썼으리라는 주장도 있다.


미우라 공사는 새벽에 고종을 면담하기 위해 궁에 들어간 뒤 황후의 시체를 직접 확인하고 나서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오기하라에게 급히 화장하라고 지시했다. 흉도들은 시신을 문짝 위에 얹어 이불을 덮고 건청궁 동쪽 녹원(鹿園) 순속으로 가져간 다음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석유를 뿌려 태웠다. 날이 밝은 뒤 타다 남은 유골을 궁궐을 순시하던 우범선이 우연히 발견하여 연못 향원정에 넣으려고 했으나, 훈련대 참위 윤석우(尹錫禹)가 혹시 황후의 시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이를 수습하여 멀리 떨어진 오운각 서봉(西峰) 밑에 매장했다. 뒷날 친일 내각은 윤석우를 비롯한 법부협판 이주회, 일본어 통역관 박선(朴銑) 등을 무고하게 반역죄 또는 불경죄로 사형에 처했다.


나중에 명성황후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유해를 수습할 때 뼈에 재와 모래가 뒤섞여 신체 부위가 판명되지 않아 고양군에 사는 환관을 불러 그의 말을 들으면서 석회를 바르고 비단옷을 수십 벌 입혀 구부리고 포개고 묶어서 관에 넣었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궁내관 정만조가 이 광경을 목격했다고 한다.


법부협판 권재형의 보고서(흔히 〈권재형 보고서〉)에 따르면, 고종은 흉도들의 주의를 따돌려 명성황후의 피신을 돕기 위해 밀실의 뒷문을 모두 열고 흉도들이 잘 보이는 방 문 앞에 나와 서 있었는데, 흉도들은 칼날을 휘두르며 그 방에 들어가 고종의 어깨와 팔을 끌고 다니기도 하고, 고종 옆에서 권총을 쏘고 궁녀들을 난타하며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또한 무단 침입을 꾸짖는 고종의 어깨에 무례하게 손을 얹어 주저앉혔으며, 태자도 다른 방에서 붙잡혀 머리채를 휘둘리고 관이 벗겨지고 칼등으로 목 줄기를 얻어맞는 수모를 당했다.


당시 흉도들은 남의 나라 국모를 무참하게 죽이는 일에 가담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은커녕 일본 국가를 위해 충서하는 자부심에 가득 차 있었다.


그날 오전 9시 20분, 주한 일본 공사관 수비대 소속 니이로(新納) 해군 소좌는 본국(일본제국) 대본영 육군참모부에 전문(電文) 한 장을 보냈다. ‘극비’(極秘)라는 붉은 낙인이 찍힌 이 전문에는 ‘국왕무사 왕비살해’(國王無事 王妃殺害)라는 문구가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그것은 일본 정부의 공식 라인을 통해 “여우사냥”의 성공을 알린 보고서였다.


사후처리


여론 호도 작업

을미사변이 일어난 10월 8일 아침에 고종이 미우라 공사에게 사자를 급히 보내 어젯밤 일의 내막을 묻자 미우라는 서기관 스기무라와 통역관을 데리고 궁으로 들어왔다. 고종은 아침 8시경 장안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미우라와 스기무라, 그리고 자객의 우두머리가 옆에 섰으며, 흥선대원군도 들어와 고종 옆에 앉았다. 미국과 러시아의 공사도 소식을 듣고 궁으로 왔다. 미우라는 고종을 협박하여 김홍집 내각을 성립시켰다. 김홍집 등이 연락을 받고 궁으로 들어올 때 미우라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황후의 시신을 직접 확인하고 화장을 명한다. 다만 《한국통사》에 따르면, 미우라가 고종을 알현한 곳은 장안당이 아니라 건청궁이다.


김홍집 내각은 세 가지 조칙을 기초하여 고종에게 서압(서명)하라고 요청했다. 고종이 거부하자 그들은 서로 서압하고 물러났으며, 일본 군인들도 궁궐에서 철수하였다. 이날 군부대신은 안경수에서 일본의 사주를 받은 조희연으로 바뀌었고, 권형진이 치안을 담당하는 경무사, 유길준이 서리내무 대신, 어윤중이 탁지부 대신, 장박(張博)이 법부대신, 서광범이 학부대신, 정병하가 농상공부 대신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황후 시해를 방조 또는 묵인한 이들이다.


사건 직후 미우라는 황후 시해 사건을 조선인의 반란으로 호도하는 공작을 폈다. 미우라는 이튿날인 10월 9일과 그 다음날인 10월 10일 외부에 공문을 보내었다. 그 와중에 군부대신 조희연이 일본을 위해 거짓말을 하고, 미우라는 조선 외부(外部)와 군부(軍部)의 입을 통해 일본이 관여하지 않았다는 거짓 증명을 받아냈다. 사건 발생 다음날인 10월 9일에는 사바틴의 입을 막기 위해 친일 내각이 그에게 내무부 고문직을 제의했으나, 사바틴은 거절했다.


폐서인 조칙

한편 을미사변 직후 고종은 허수아비처럼 되었다. ‘대군주폐하’라는 존칭을 받고, 황제가 쓸 수 있는 ‘조칙’을 내리고 있지만, 자신의 의지로 내린 조칙이 없었다. 10월 10일(음력 8월 22일) 김홍집 내각은 ‘왕후’를 서인(庶人)으로 폐위하는 조서(詔書)를 김홍집 내각이 스스로 서압하여 고종의 명의로 발표했다. 그 가짜 조서에서 “옛날 임오 때와 마찬가지로 짐을 떠나 피난했다.”라는 거짓말을 하였다. 이때 서명한 이는 김홍집을 비롯하여 김윤식, 조희연, 서광범, 정병하 등이며, 탁지부 대신 심상훈(沈相薰)만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때 “나라의 원수를 갚지 않으면 벼슬하지 않겠다.”라고 말했으며, 그런 까닭에 고종으로부터 신임을 얻었다.[23]


왕태자가 가장 먼저 명성황후의 폐위에 반발하면서 태자위를 양위(讓位)하겠다며 저항하자 다음날인 10월 11일(음력 8월 23일) ‘왕후’를 ‘서인’에서 후궁에 해당하는 ‘빈’(嬪)으로 승격시켰다. 10월 14일(음력 8월 26일)에는 황후를 새로 간택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으나, 고종의 의사와는 관계가 없었고, 고종은 그 뒤로 1919년 죽을 때까지 황후를 새로 맞이하지 않았다. 명성황후 시해와 폐위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민심은 극도로 나빠졌으며, 재야에서는 황후의 복위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고, 복수를 외치는 의병운동(을미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폐위 소식을 들은 외국 공사들은 고종이 직접 도장을 찍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준을 거부하니, 일본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같은 반응을 보였다. 특히 서울 주재 러시아 대리공사 베베르(Вебер К И )는 을미사변 사건 직후 서울 주재 외교 대표단의 회합을 주선하고,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에게 항의하고 일본 공사가 조선의 국모(國母) 시해사건의 주모자였음을 밝혀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을미사변을 조선인의 소행으로 돌리려던 미우라의 흉계가 실패로 끝나자, 일본은 미우라 공사를 비롯한 관련자 47명을 소환하여 히로시마 재판소에 회부했다. 그러나 예심 판사 요시오카(吉岡美秀)는 증거가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다음해(1896년) 1월 20일 이들을 모두 석방한다.


일본과 김홍집 내각은 악화된 국내외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11월 26일(음력 10월 10일) 폐후 조칙을 취소하였다.


장례

폐후 조칙이 취소된 뒤 김홍집 내각을 타도하고 경복궁에 유폐되다시피 한 고종을 구출하여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던 춘생문 사건이 발생하자 김홍집 내각은 명성황후가 살해된 지 55일 만인 12월 1일(음력 10월 15일)에 그 사망을 공식 발표하고 국상을 치르려 했다. 이는 고종의 친위 쿠데타 세력인 정동파가 몰락한 분위기를 이용하여 국상을 치르려 함이었다.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이 일어났으며, 그날 고종은 조칙을 내려 김홍집 일파, 곧 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을 을미사적(乙未四賊)이라고 밝히어 역도로 규정하고, 그들이 진행시키던 국모 재간택과 이미 내린 폐비에 관한 조칙을 무효로 돌렸다. 1896년 3월 10일 김홍집 내각이 진행하던 국상 절차를 중단시키고, 무기한 연기하였다. 그 뒤 국상 일정을 몇 차례 더 연기하였다.


1897년 10월 12일(음력 9월 17일) 고종이 새벽 4시에서 6시 사이에 환구단에 나아가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고, 낮 12시에 왕후를 “명성황후”로 책봉·추존하였다. 이튿날인 10월 13일 아침 황제는 황후의 빈전에 제사를 드리고, 오전 8시에 태극전에 나아가 “대한(大韓)”이라는 국호를 반포하였다.


1897년 11월 22일 명성황후는 청량리 홍릉에 안장되었다.


평가

고종은 사건 이전에 명성황후의 신변을 염려하여 여러 조치를 취한다. 시위대를 만들었으며, 그것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아 서양인 궁궐 경비원을 고용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인 경비원 세레딘사바틴은 폭동이 있으리라는 정보를 중국인으로부터 받고도 방어 대책을 건의하거나 세우지 않아 고종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또한 시위대와 궁궐 경비원들은 사건 당일에도 새벽 2시에 이미 일본군의 수상한 동태를 파악했으나 안이하게 경비하다가 4시 30분경에야 고종에게 급보를 전했다. 고종은 왕후가 안전한 곳에 피신했다고 답변했으나 당시의 급박한 정황으로 보아 마땅한 피신처를 찾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으리라 여겨진다.


당시 고종은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왕의 침전만은 감히 침범하지 못하리라는 예상하고 왕후를 침전인 옥호루에서 고종의 침전인 곤령합으로 부르고,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왕후를 일반 궁녀와 같은 복장으로 궁녀들과 함께 앉혀 폭도들의 눈을 피하려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일본인 폭도들은 곤령합마저 서슴없이 유린하였다.


한편 봉건 군주 국가에서 마땅히 조선의 군대는 왕실 수호와 국토방위에 헌신해야 함에도 조선 군대인 훈련대 일부는 일본 폭도들의 역모에 가담해 그들의 졸개로 궁궐 침입에 가세했다. 한편 연약한 조선 궁녀들은 일본 폭도들의 폭력과 협박 앞에 굴복하지 않았으나 1500명의 궁궐 경비병은 겁을 먹고 무기와 군복 상의를 벗어던지고 도주해 버렸다.


역사적 평가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이 사건을 고종이 아관파천을 결정하게 된 주요 원인으로 보며, 또한 의병 봉기의 계기가 되었다고 여긴다. 또한 대한제국 성립의 한 원인으로 평가한다.


한국의 친일파나 일본의 극우 인사들은 한국의 근대화를 방해하는 “민비”를 처단함으로써 한국의 근대화를 촉진하였다고 주장한다. 반면 그와 같은 주장에 대해 서구화만을 근대화로 오해하여 자주적 근대화를 수구·반동으로 여겨서 일으킨 폭거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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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베르의 시해 보고서와 증언서

[신동아]2002 년 01 월 01 일


일본인 폭도가 가슴을 세 번 짓밟고 일본도로 난자했다

러시아 측 자료로 본 명성황후 시해사건


왕후는 갑자기 회랑(궁궐 내의 복도)을 따라 달아났다. 그 뒤를 한 일본인 폭도가 쫓아가 왕후를 마룻바닥에 넘어뜨리고 왕후의 가슴을 세 번 발로 짓밟고, 칼로 찔러 시해했다. 나이 많은 한 상궁이 수건을 꺼내 왕후의 얼굴을 덮어주었다. 일본인 폭도들은 왕후의 시신을 가까운 숲속으로 운구해 갔다.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나서 1세기가 지난 오늘날, 사건의 원인과 결과는 학계의 꾸준한 노력으로 대부분 밝혀졌지만 사건 당일의 자세한 진상은 미궁에 빠진 채 여러 주장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동안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한 연구는 미·소 냉전의 영향으로 인해 러시아측 자료는 도외시된 반면, 국내자료와 영·미 자료 그리고 은폐 조작된 일본 측 자료에 의존해왔다. 최근에는 시간설(屍姦說)과 황후 시신을 일본인이 궁정 밖으로 빼돌렸다는 충격적인 주장도 나오고 있다


과연 지금까지의 여러 주장들이 얼마만큼 진실 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명성황후 시해사건 관련문서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곳으로 알려진 러시아 외무성 제정(帝政)러시아 대외정책문서국 자료와는 다소 차이점이 있는 것 같다.


러시아측이 보관하고 있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문서는 당시 서울주재 러시아 대리공사 베베르(Вебер К И )가 외상 로바노프-로스토브스키(Лобаов-Ростобский А)에게 보낸 보고서 그리고 당시 고종을 위시한 여러 목격자의 증언서 등이다.


서방국가의 자료에서도 베베르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직후 서울주재 외교 대표단의 회합을 주선하고,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에게 항의하여 마침내 일본공사가 조선의 국모(國母) 시해사건의 주모자였음을 밝혀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명성황후 시해에 관련해 러시아 외상에게 보낸 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전 농상공부 대신 이범진(李範晋)이 10월8일 이른 아침에 러시아공사관으로 찾아와 궁궐이 일본군에 포위되어 민왕후(1897년 이전에는 왕후로 호칭)의 생명이 위태롭다고 말했다.


그때 마침 궁궐 현장에서 사건을 목격하고 우리 공사관으로 온 러시아인 건축기사 세레딘-사바틴(Середин-Cабатин)도 일본 폭도들이 왕후를 위해(危害)하려 한다고 증언했다. 나는 조선 국왕의 절박한 구원 요청에 조선과 이해관계가 많은 미국의 앨런(Allen) 공사대리와 동행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즉시 앨런에게 연락, 그와 함께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먼저 일본공사관을 방문했다. 그러나 미우라 공사가 출타중이라는 말을 듣고 바로 궁궐로 가서 고종을 알현했는데 벌써 일본공사 미우라와 대원군(大院君)이 와 있었다.


오후에 일본공사를 만나 일본군이 조선궁궐에 난입한 진상을 듣기로 하였다. 대원군은 그 자리에서 자신이 사건과 무관함을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베베르는 1895년 10월8일 을미사변(乙未事變) 당일 즉시 러시아 외상에게 숫자로 된 난수표 암호전문을 보내고, 다음날 10월9일에는 현장 목격자로부터 증언서를 받아 보고서에 첨부해 함께 외상에게 보냈다. 러시아 외상은 베베르의 보고서를 사건 목격자 증언서와 함께 니콜라이 II세 황제에게 상주(上奏)하였다.


니콜라이 II세(당시 그는 대관식 이전이었으나 황제 직무수행)는 베베르 보고서를 읽고 상단에 친필로 “천인공노할 사건이니 좀더 자세히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급기야 일본의 만행을 경계해 조선과 러시아 사이의 두만강 국경과 인접해 있는 러시아극동아무르 군관구 사령관에게 산하 부대를 비상대기시키라고 명령했다.


베베르의 민첩한 활동


이와 같은 베베르 보고문서와 현장 목격자들의 증언서 등이 현재 러시아 외무성 제정러시아 대외정책 문서국에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그 문서의 종류는 아래와 같다.


▲고종의 증언서(1897년 대한제국선포 이후에 고종은 황제로 호칭. 민왕후도 이후부터 명성황후로 추존)

▲시해 현장에 있던 무명 상궁의 증언서

▲전 농상공부 대신 이범진(李範晋) 증언서

▲조선군 부령(副領, 중령) 이학균(李學均) 증언서

▲조선군 정령(正領, 대령) 현흥택(玄興澤) 증언서

▲러시아인 궁궐 경비원 건축기사 세레딘-사바틴의 증언서

▲가톨릭 서울주교 프랑스인 구스타프 뮤텔(Gustave Mutel)의 증언서

▲10월8일 서울 일본공사관에서 서울주재 서방 외교대표(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가 모여서 미우라 일본공사에게 항의하며 나눈 대담록(영국 총영사가 기록)

▲조선 외부대신(外部大臣) 성명서


▲서울에서 일본인이 발행한 한성신보(漢城新報) 기사

▲일본군 궁궐 침입로 도면(圖面)


그밖에 베베르가 10월 9일 이후에 외상 로바노프-로스토브스키에게 보낸 문서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고종의 서명 없이 일본이 강압적으로 발표한 왕후폐위칙서(王后廢位勅書)

▲대원군의 성명서

▲10월25일자, 11월5일자, 11월13일자 일본공사관에서 서울 외교대표들이 일본공사에게 항의하며 나눈 대담록

▲베베르의 보고서와 전문(電文)

▲동경주재 러시아공사 히트로보의 전문

▲중국에서 보낸 세레딘-사바틴의 2차보고서(사건 당일 밤 궁궐의 서양인 경비원으로 미국인 다이(W.M. Dye)와 함께 있었던 세레딘-사바틴이 서울 공사관에서 다 쓸 수 없었던 내용을 중국지부 러시아영사관에서 러시아 외무성에 2차 보고한 증언서

▲고종에게 보낸 일본천황의 친서 등이다.


우선 위와 같은 증언서를 포함해서 자세한 사건보고서를 러시아 외무성에 제출한 서울주재 러시아 대리공사 베베르는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베베르는 1841년 7월5일 러시아 리바프 지방에서 독일계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루터교 선교사였으며 어머니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그는 1865년에 페테르부르크대학 동양학부를 졸업한 후 러시아 외무성 외교관 시보로 채용되어 베이징(北京)에서 5년간 중국어 공부를 계속했다. 그후 중국 톈진(天津)주재 영사, 일본주재 총영사, 베이징주재 임시공사대리를 역임하고, 1885년에 대리공사 겸 총영사로 조선에 부임하였다.


그는 동양의 예절에 밝아 고종의 환심을 사게 되었으며 처(妻)언니인 독일인 존딱에게 서울에 ‘손탁(러시아어로는 ‘존딱’)호텔’을 경영하도록 했다. 존딱은 이렇게 민왕후의 측근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고종의 총애를 받은 베베르


베베르는 조·러 수교 조약체결을 비롯해 고종이 친러책을 펴도록 한 러시아의 매우 유능한 외교관이었다고 볼 수 있다. 후에 베베르는 고종황제로부터 황실가족에게 수여하는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을 제외하고는 일반인으로서는 최고 훈장인 충무훈장(忠武勳章)을 받기도 했다.


그는 민왕후 시해사건 때 관련 목격자들의 증언서를 사건 당일에 받는 민첩한 수완을 발휘했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일본공사와 일본정부의 은폐에도 불구하고 다른 서울주재 외교 대표들의 선두에서 일본의 만행을 밝혀내고 범인의 처벌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이범진(李範晋)은 그의 증언서에서 당일 밤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일본군대와 조선군이 궁궐을 포위했다는 급보(急報)를 받고 고종은 나에게 시간을다투어 미국공사관과 러시아공사관에 뛰어가 도움을 요청하라는 어명(御命)을 내리셨다. 나는 서쪽 담으로 기어올라가 밖을 보았더니, 정원은 군인들로 온통 가득 차 있었다. 남쪽에 있는 광화문(光化門) 쪽도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어 동남쪽 담의 구석에 있는 작은 탑에 올라가보았다. 그곳에도 밖에는 2명의 일본군인이 순찰을 하고 있었다.


나는 순찰병이 좀 멀리 간 틈을 타 약 4~5m 높이에서 밑으로 뛰어내려 궁궐을 탈출했다. 미국공사관에 도착했을 때 대궐 쪽에서 첫 총성이 들려왔다.”


고종이 이범진을 러시아공사관에 앞서 미국공사관으로 보낸 것은 당시 조선에는 궁내부 고문(宮內府 顧問)으로 미국인 레젠드르(C.W. Legendre) 장군, 군사교관으로 다이(W.M. Dye) 장군(퇴역 대령 출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당시 미국인 개신교 선교사가 150여 명이나 활동하고 있었고, 미국공사관에서 앨런(중국과 조선에서 의료선교사로 근무한 후 서울 미국공사관에 채용되었다)이 왕실에 의료봉사를 하고 있었다. 이런 연유로 고종은 위급한 상황에서 제일의 구원자로 미국공사관을 생각해 냈을 것이다.


이범진은 아무튼 미국공사관을 거쳐서 러시아공사관을 찾아가 궁궐이 일본군에 포위되었다고 알리고 구원을 요청했다. 궁궐 포위 앞뒤로 발생한 사건은 러시아인 세레딘-사바틴이 증언하고 있다.


세레딘-사바틴(당시 미국과 러시아의 외교관들은 고종에게 일본은 유럽을 두려워한다면서 유럽인 경비원을 여러 명 궁궐에 채용하도록 건의했다. 세레딘은 그중 한명이다)은 서울 러시아공사관에서 쓴 증언서에서 사전 사건모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


사건 모의


“전날 밤인 6일 밤 12시경 경복궁을 순시하고 있을 때 광화문쪽이 소란스러웠다. 광화문 앞에 조선군의 무리가 보였고, 그 뒤에 일본군 부대가 정렬해 있었다. 조선군은 7일 새벽 2시까지 큰소리로 떠들다가 조용해졌다. 궁궐 별군관(당직 사령)의 설명으로는 며칠 전 조선군 훈련대가 경찰대와 싸웠기 때문에 이 두 부대를 해산시킨다는 소문이 돌아 훈련대가 궁궐 앞에 모여 청원시위를 벌였으나 일본군 부대가 도착해 해산시켰다고 했다.


아침에 퇴근해 집에 있으니 평소에 잘 알고 지내는 한 중국인이 찾아와 밤에 궁궐에 불상사가 발생할 것이라고 은밀히 경고했다. 그러나 그 말을 흘려듣고 저녁 7시에 궁궐로 가는데 길에서 우연히 그 중국인을 다시 만났다. 그는 나가지 말라고 만류하며 밤에는 절대로 궁궐에 있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 중국인은 조선군이 오늘 밤 음모를 꾸며 궁궐을 기습할 것이라는 믿을 수 없는 말만 되풀이했다.


궁궐에는 폭동의 징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궁궐 돌담 옆과 길에는 전과 다름없이 초병(哨兵)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날 밤 유럽인 경비원 당직으로는 미국인 다이 장군과 나 세레딘-사바틴이 있었다.”


세레딘-사바틴의 증언을 보면 사건 전날밤에 조선군 훈련대와 일본군이 대궐 앞에 모여 궁궐침입 예행연습을 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그는 당일 밤에는 음모가 있을 것이라는 정보도 중국인으로부터 사전에 입수했다. 그런데도 안이하게 생각하고 대책을 세우지 않다가 결국 대궐이 포위되는 지경에 이른다.


대궐 포위에 대한 상황 설명은 현흥택 궁궐경비대 정령과 세레딘-사바틴 그리고 이학균 부령의 증언서에서 드러나고 있다. 먼저 현흥택 정령은 증언서에서 경복궁 포위 시각을 말하고 있다.


“8일 새벽 2시 별군관(궁궐경비 당직 사령관)에게 고종의 호위경관 2명이 달려와 삼군부(광화문 앞 경비실)에 일본군과 조선군 훈련대가 운집해 있다고 보고했다. 나는 즉시 궁궐 경비병 수명을 광화문으로 급파해 상황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그들은 돌아와서 고종의 호위경관 말이 사실임을 확인해주었다. 시간이 지나 새벽 4시 조선군 훈련대 대대가 춘생문(春生門,경복궁 동북문)과 추성문(秋成門,경복궁 서북문)을 포위하였다.”


이 증언은 이미 밤 2시부터 경복궁 주위에 폭도들이 집결하여 궁궐을 포위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경복궁 포위 시간과 관련해 세레딘-사바틴도 폭도들의 광화문 최초 집합 시각만 모르고 있을 뿐 춘생문과 추성문 포위 시간대는 현흥택 정령의 증언과 거의 일치한다.


“갑자기 8일 새벽 4시에 궁궐경비대 이학균 부령(당시 궁정경비대 소속으로 다이 장군의 수석통역관)이 유럽인 궁궐경비원 숙소에 뛰어와 다급한 목소리로 일본군과 일본인 교관에게 훈련받은 조선군이 경복궁을 포위했다고 말하였다.”


이 증언은 현흥택 정령이 앞서 말한 8일 새벽 4시에 동·서쪽 양 북문을 일본군과 조선군 훈련대가 포위했다는 시간대와 일치한다. 그러나 유럽인 궁궐경비원은 이날 새벽 2시부터 폭도들이 궁궐 주위에 집결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유럽인 경비원은 숙소에서 잠을 자다가 이학균 부령을 통해서 겨우 4시경에야 알게 되었다.


세레딘-사바틴은 궁궐 포위에 관한 증언을 계속하고 있다.


“다이 장군과 나는 이학균 부령으로부터 보고받자마자 일어나 별군관실로 갔다. 그러나 2명의 부령과 최소한 6~7명의 당직 장교가 야근을 하고 있어야 하는데도 그곳에는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새벽 4시 반경에 다이 장군은 추성문 쪽으로 가서 그곳의 상황을 알아보려고 이학균 부령을 불러 동행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고종을 알현해 보고하는 것이 급선무라며 왕실내궁 쪽으로 갔다.


궁궐내 상황


다이 장군과 나, 둘이서 추성문에 다가가자 대문틈으로 번쩍이는 총검을 착용한 일본군 병사 40~50명이 도열해 있는 모습이 달빛에 환히 보였다. 일본군은 곧 우리의 순찰을 눈치채고 담쪽으로 몸을 숨겨버렸다. 다음엔 춘생문 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그쪽에도 일본인 교관에게 훈련받은 조선군 약 250~300명이 일본인 교관 4~5명의 인솔을 받으며 뭔가 상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문에 가까이 다가가자 한 조선 사람이 큰소리로 대문을 열어달라고 몇 번 외쳤다.”


고종 알현


이때의 궁궐 상황은 이학균 부령의 증언서에서 잘 나타난다. 대궐이 포위된 긴박한 상황에서 고종에게 달려간 이학균 부령은 일본인 폭도들의 궁궐포위 시점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8일 새벽 3시경(앞서 현흥택 정령은 광화문에 일본군과 조선군 훈련대의 출현시간을 2시로 말했다. 그리고 이곳은 동북쪽 춘생문에 집결한 시간을 말하고 있다) 경복궁 동북쪽 춘생문에 사복을 입은 일본인 수명과 그 뒤에 일본인 교관에게 훈련받은 조선군 훈련대 200여 명이 일본인 교관 4~5명의 지휘를 받으며 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훈련대 대장 홍계훈 정령(1882년 임오군란 때도 왕후를 구출하였으며, 이날 밤에 전사했다)이 춘생문으로 급히 가서 그들에게 왜 이곳에 훈련대가 집합해 있느냐고 물었으나 대답이 없자, 홍계훈 정령은 즉시 해산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신은 우리의 상관이 아니고 일본인 교관이 상관이니 참견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홍계훈 정령은 그곳에서 조금 떨어져 담 저쪽에 서있는 나를 불러 춘생문 앞에 일본인들과 일본인 교관이 인솔한 훈련대가 집합해 있으나, 이런 늦은 밤에 소집된 이유도 말하지 않고 해산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홍계훈 정령과 나는 궁궐상황을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 광화문쪽 경비초소로 가서 주위를 살펴보았으나 특별한 이상이 없었다. 이때 경비병이 뛰어와 보고하기를 일본군 폭도 60여 명이 서쪽 담으로 침입하고 있으며, 그중 30명은 군복을 착용하고 나머지는 사복을 입고 있다고 전해주었다. 나는 부관(副官)에게 확인하라고 지시했더니 부관이 들어와 기왓장이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고 보고했다.


4시 반경이었다. 나는 북쪽 작은 문(왕가가 거처하는 궁으로 들어가는 문)에 서서 유난히 밝은 달빛에 망원경으로 추성문 쪽에서 움직이는 약 12명의 사람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즉시 위급함을 알리기 위해 고종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위 증언서와는 달리 이학균 부령은 고종에게 급보(急報)를 하러 가는 길에 먼저 유럽인 경비원 숙소에 들러 다이 장군과 세레딘-사바틴에게 상황을 알리고 다음에 고종을 알현했다.


이학균 부령이 왕가에 도착했을 때는 고종이 벌써 외국인 접견실과 회랑으로 연결된 별채에 앉아계셨다. 그리고 주위에는 경호원이 분주히 내왕하며 고종을 호위하고 있었다.


“이학균:왕후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고종: 왕후는 안전한 곳에 피신해 있으니 염려 말고 안심하라. 그리고 경비병은 유혈사태를 예방할 모든 대책을 강구하라. 짐은 이미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궁궐 경비병에게 발포 명령을 내렸다.”


이상의 대담으로 미루어보아 고종은 이미 새벽 4시 반 전후로 궁궐이 소란함을 알고 있었으며 민왕후는 위험한 침전인 옥호루(玉壺樓)를 떠나 어떤 피신처에 은신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 궁궐 난입


세레딘-사바틴은 당시 상황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새벽 5시경에 춘생문에서 조선군 무리의 큰 구호소리와 함성이 들렸다. 사전에 행동을 모의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몇 분 후에 추성문 쪽에서 총성이 들리고, 잠시 후 담을 넘은 일본인 폭도들이 궁궐경비병에게 발포하자, 경비병은 무기와 군복상의를 벗어 던져버리고 초소를 떠나 어디론가 달아나버렸다. 추성문 쪽의 총성을 신호로 춘생문 쪽에서도 일본인 폭도들과 조선군 훈련대가 난입하기 시작했으며 광화문에서는 일본인폭도 5~6명이 사다리를 타고 담을 넘었다. 이들은 경비병에게 몇 발의 총을 발사해 궁궐경비병을 도주시키고, 일본인교관에게 훈련받은 조선군 훈련대가 궁궐 안으로 쳐들어오도록 대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당시 경복궁 출입문은 여러 개가 있었으나 이날 밤에 폭도들은 남쪽의 광화문, 동북쪽의 춘생문, 서북쪽의 추성문 등 3개의 문으로 침입했다. 위에서 말한 상황은 경복궁 외곽 출입문으로 일본 폭도들이 난입한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왕가 내궁(內宮)의 방어와 관련해서 세레딘-사바틴이 다시 증언하고 있다.


“궁궐경비병은 총인원 1500명에 장교가 40명이었으나 5시10분경에 남아 있는 사병은 250~300명뿐이었다. 다이 장군은 제1방어선인 경복궁 외곽 문에서 후퇴해 남은 경비병을 겨우 집합시켜 제2방어선으로 북쪽 왕가의 출입문에 배치했다. 경비병은 왼쪽 길에 서서 방위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춘생문으로 난입한 일본인 폭도와 조선군 훈련대가 왕가로 출입하는 북쪽 작은문(이학균 부령이 수비한 춘생문에서 가까운 문) 틈으로 경비병을 향해 한번에 30~40발씩 3번 집중사격을 했다. 폭도들은 많은 경비병을 살해하려는 의도가 없는 듯 머리 위로 높이 총을 발사했다.


다이 장군과 나도 추성문을 통해 난입한 폭도들이 발사하는 총의 사격권 내에 들어 있었으나 나는 오른쪽 문(3개중 중간문), 다이 장군은 왼쪽의 신무문(神武門,추성문에서 가까운 문)의 담벽에 몸을 숨겨 무사했다.


다만 내 앞에서 궁궐경비병 한 사람이 총상을 입었다. 그러나 남아 있던 궁궐경비병들은 난입자들이 첫 집중사격을 한 뒤, 한 발도 응사하지 않고 총과 군복상의를 벗어던지고 어디론가 도주해 버렸다.”


이때의 상황을 이학균 부령이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동북쪽 춘생문으로 침입한 일본인과 조선군 훈련대는 내가 안에 있는 북쪽 작은문까지 왔다. 문이 잠겨있는 것을 보고 일본인 폭도 몇 명이 담에 기어올라가 담 위에서 밑에 있는 궁궐경비병을 향해 발사하는 총성이 한밤의 적막을 찢고 울리자 경비병들은 다 도망쳐 버렸다. 그러자 수명의 일본인 폭도들이 월담하여 대문 앞에 대기하고 섰던 일당에게 문을 열어주어 폭도들은 왕가의 내궁 북쪽을 점령했다.


5~6명의 사복을 입은 일본인은 칼로 무장하고 고종과 그 가족이 거처하는 곤령합(坤寧閤)으로 몰려들었다. 나는 몇 몇 남은 부하 병사들과 함께 이들을 쉽게 물리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일본인 폭도들에게 달려가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누군가가 나를 떠밀어 그만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학균 부령도 궁궐수비대가 무력하게 폭도들에게 저항 한번 못하고 총성에 놀라 도주한 사실을 자인했다.


춘생문 쪽에서 침입한 폭도들은 이학균 부령이 수비한 작은 문을, 추성문 쪽의 난입자들은 다이 장군과 세레딘-사바틴이 지키고 있던 대문 수비를 거의 같은 시간에 무너뜨렸다. 최후의 제2 방위선이 무너진 것이다.


세레딘-사바틴은 추성문쪽의 침입 상황을 중국 지부 러시아공관에서 쓴 증언서에서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난입자들은 추성문에서 두 방향으로 밀어닥쳤다. 한 무리는 다이 장군이 지키고 있는 문쪽으로 가고, 또 다른 무리는 내가 서있는 문으로 달려들었다. 폭도들은 다이 장군을 붙잡고 유럽인 경비원 숙소쪽으로 갔으며, 나를 잡은 일단의 폭도는 왕의 침전이 있는 곤령합과 왕후의 침전인 옥호루 쪽의 담 안으로 들어섰다. 막 유럽풍의 양옥(외국인 접견실)을 지날 무렵 여러 발의 총성이 들렸다. 별안간 총소리를 듣고 놀란 환관(宦官), 벼슬아치, 궁노(宮奴), 폭도 등 300여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일시에 뒤로 밀어닥쳤다. 60~70보 가량 떠밀려가다가 왕가에까지(곤령합과 옥호루는 별채였으나 정원으로 연결되어 있다) 진입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목재로 건축한 어떤 작은 별채에 부딪쳤다. 나는 무리와 함께 밀려가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판자에 매달렸다. 떼를 지어 밀려오던 환관과 벼슬아치, 궁노들은 내 곁을 지나 정원으로 들어가 숨어버렸다. 나만 혼자 그곳에 남게 되어 왕후의 처소에서 벌어진 만행을 목격하게 되었다.


혼자 남아 지켜본 만행


사복을 입은 일본인 폭도 5명이 긴 칼을 들고 마치 누군가를 찾는 듯 앞뒤로 뛰어다니고 있었으며 그외에도 일본인 폭도 20~25명이 단검을 들고 있었다. 출입문 2개는 각각 일본군 2명과 장교 1명 등 도합 5명이 차렷 자세로 서서 지키고 있었다.


조선군 훈련대 소대는 왕후의 침전 옥호루를 약간 등진 채 세워총자세로 정렬해 있었다. 이 소대 옆에는 풍채가 당당하고 양복을 잘 입은 한 일본인이 유럽식 긴 칼(세레딘-사바틴은 일본도를 유럽식 긴 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을 빼어 오른손에 들고 있었다.


이 자가 일본인 폭도들의 지휘자인 듯싶었다. 나는 이 자에게 다가가 영어로 ‘굳 모닝(Good morning)’ 하고 인사했다. 일본인 두목은 대답 대신 무서운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면서 영어로 다음 질문을 했다.


일본인 폭도 두목:성명(姓名)을 말하라.

세레딘-사바틴:세레딘-사바틴입니다.

일본인 폭도: 직업은 무엇인가?

세레딘-사바틴: 건축가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어서 뜻밖에 사람들에게 밀려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나의 호소를 듣고 두목은 생명은 보장해 주겠으니 그곳에서 움직이지 말고 있으라고 했다. 나는 내친김에 군인 한두 명을 붙여 호위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왕후 처소 옥호루에 있던 일본말을 잘하는 조선군 두 명을 불러 나를 보호해주라고 명령했다. 나는 이제 살 수 있게 됐다고 안심하고 왕후침전에서 일본인 폭도들이 자행하는 만행을 자세히 보았다.


일본인 폭도들은 10~12명의 궁녀들을 왕후의 침전에서 2m가 넘는 창밖의 뜰에 내던졌다. 놀랍게도 궁녀들은 한 사람도 달아나거나 소리 지르거나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머리채를 잡혔을 때도 창밖으로 던져졌을 때도 시종일관 묵묵히 침묵을 지키며 무서운 고통을 참고 있었다.


궁녀들은 옥호루에 있었으며, 뜰에 내쳐진 궁녀들은 전원이 사망한 것으로 보였으나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이런 추측을 한 이유는 내가 조선여성의 고매한 순절(殉節)정신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일본인 폭도들은 두 명의 궁녀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와 내가 서있던 곳에서 겨우 5~6보 떨어진 곳에 던지고 갔으나, 궁녀들이 살아서 호흡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내 앞에 버려진 궁녀들은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머리채를 잡혀 노대(露臺) 위에서 뜰로 내던져질 때도 앞서 말한 궁녀들과 똑같이 반항하거나 울부짖거나 신음소리를 내지 않았다. 한 궁녀는 넘어져 눈을 뜨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칼을 든 일본인 폭도 5명(3명은 사복을, 2명은 양복을 착용하고 있었다)이 붉게 달아오른 흥분한 얼굴로 눈에 살기를 띤 채 야수처럼 왕후 처소 이곳저곳을 뒤지며 왕후를 찾고 있었다.


이들 무법자 5명은 내가 현장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놀란 듯 급히 내게 뛰어와 일본어와 조선어로 내가 누구며, 무엇 때문에 이곳에 있는가를 물었다. 내 곁에서 나를 보호하고 있던 두 명의 조선군이 설명하자 그들은 다시 왕후의 침전으로 들어가려고 돌아섰다.


이때 외모가 낯익은 조선인이 이곳에 들어와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잘 만났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광경을 보고 미친 듯 날뛰던 폭도들은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그 조선인은 그들에게 나에 대해 중요한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이 순간이 내게는 가장 두려웠다.


그들은 분개하여 다시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를 보호하고 있던 조선군도 물러섰다. 어떤 자는 나의 옷깃을 잡고 어떤 자는 양복과 팔을 잡고 고함치며 위협하면서 왕후가 어디 있냐고 묻기 시작했다. 일본어와 조선어로 물어 나는 전혀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기색을 지어 보였다. 내 옷을 잡았던 자가 영어로 물었다. ‘왕후는 어디 있냐? 왕후가 있는 곳을 말하라!’


이런 순간에 일본인 두목이 나타났다. 그들은 나를 놓아주고, 두목에게 아주 공손한 태도로 나와 나를 알고 있는 조선인을 가리키며 수군거렸다. 두목은 그들의 말을 신중히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나에게 와서 아주 엄격한 어조로 물었다. ‘우리는 아직 왕후를 찾지 못했다. 왕후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가?’


왕후는 어디 있느냐?


두목에게 나는 조선의 궁중법도에 따라 왕후를 볼 수도 없으며, 침전도 알 수 없다고 설명했다. 두목은 나의 이런 말을 이해한 듯했다. 그러나 나를 알고 있는 조선인이 내가 현장에 있는 것이 불안한 듯 일본인 두목에게 내가 틀림없이 왕후의 은신처를 알고 있을 것이라고 설득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나를 유일한 유럽인 증인으로 남겨두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사정이 급해지자 나는 일본무사(武士)는 한번 한 약속은 꼭 지킨다는 말을 상기하고 급히 두목에게 쫓아가 약속을 지켜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마침내 두목은 나를 지키던 2명의 조선군인에게 나를 옥호루 밖으로 내보내라고 지시했다. 두 명의 조선군인 호위를 받으면서 광화문까지 나오는데, 여러 장소에서 많은 일본군을 보았다. 그리고 특히 한 곳에서는 150여 명의 일본군과 장교가 있는 것을 보았다. 아마 그곳에 고종이 계시는 것 같았다. 광화문을 나온 시각은 아침 6시였다. 왕후의 처소에서 광화문까지는 약 10~15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5시50분경까지 내가 왕후의 처소에 있었던 동안 그곳에서 일본인 폭도들은 왕후를 찾아내지 못했다. 러시아 공사관(현 경향신문사 옆)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6시30분경이었다. 위급한 궁궐 사태의 현장 목격자로 내가 본 모든 것을 대리공사 베베르에게 증언하였다.”


중국 지부 러시아공관에서 그가 쓴 증언서에서는 제물포(인천) 외항에 정박하고 있던 일본 해군함정 2척 중 1척이 10월10일 밤 제물포에서 사복을 입은 일본인들과 군인을 태운 뒤 몰래 일본으로 떠났다고 말했다. 그는 이밖에도 10월9일 저녁으로 예정된 일본행 정기여객선이 9일 새벽, 예고 없이 제물포에서 일본인 승객들을 태우고 떠났다는 증언도 했다.


(세라딘-사바틴은 제물포에서도 한때 거주했으며, 독립문을 비롯한 러시아공사관과 정교회 등을 설계했다. 그리고 러시아 동청철도(東淸鐵道) 여객선 제물포 지사장을 역임했다. 사건 발생 다음날인 10월9일에는 그의 입을 막기 위해 친일 내각이 그에게 내무부 고문직을 제의했으나 거절했다.


명성황후의 최후

 

                           Queen Min's assassin's attack her in her quarters.


세레딘-사바틴이 옥호루에서 떠난 이후 상황은 한 무명 상궁(尙宮)이 증언하고 있다.


현장에 있던 무명 상궁은 명성황후의 최후를 이렇게 증언하였다.


“일본 폭도들은 왕후와 궁녀들이 있는 방쪽으로 왔다. 이때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稙)이 일본 폭도들에게 왕후가 있는 방 앞에서 양팔을 들어 가로막고 궁녀들뿐이니 들어가지 말라고 만류했다. 이 순간 일본인 폭도들은 칼로 이경직 대신의 양팔을 내리쳐 그는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이경직은 이날 밤 사망했다.)


일본인 폭도들은 괴성을 지르며 방에 난입해 왕비가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왕후와 궁녀들은 왕후가 이곳에 있지 않다고 대답했다. 왕후는 갑자기 회랑(궁궐내의 복도)을 따라 급히 달아났다. 그 뒤를 한 일본인 폭도가 쫓아가 왕후를 잡고 마룻바닥에 넘어뜨린 후 왕후의 가슴을 세 번 발로 짓밟고, 칼로 찔러 시해했다.


나이 많은 한 상궁이 수건을 꺼내 왕후의 얼굴을 덮어주었다. 그후 얼마 지나 일본인 폭도들은 왕후의 시신을 가까운 숲속으로 운구(運柩)해 갔다. 더 이상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나, 궁궐의 한 환관(宦官)을 통해서 일본인 폭도들이 왕후의 시신을 화장(火葬)하는 것을 목격했다는 말을 들었다.”


위의 무명 상궁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인 폭도들이 왕후의 침전에 난입했을 때, 왕후도 처음에 궁녀들과 같이 왕후는 이곳에 계시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왕후는 갑자기 복도를 따라 결사적으로 그곳에서 빠져나가려고 시도했다. 이 때문에 폭도들은 왕후로 짐작했던 것이다.


아마도 앞서 세레딘-사바틴의 증언으로 미루어보아 폭도들은 이곳에서 궁녀들을 하나씩 밖으로 내던지며 극도의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후는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폭도들에게 당하는 것보다는 탈출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신을 운구하여 화장했다는 말은 현흥택 정령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현흥택 정령은 진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인 폭도들은 왕후의 은신처를 말하라고 사정없이 나를 때렸으나, 끝내 모른다고 했다. 폭도들은 고종이 계시는 곤령합으로 나를 끌고가 왕후가 있는 곳을 말하라고 했다. 모른다고 하자 폭도들은 각감청(閣監廳)으로 다시 나를 끌고 가서 왕후가 계신 곳을 자백하라고 또 때렸다. 이때 갑자기 곤령합에서 여러 발의 총성이 들렸다. 나를 잡고 있던 일본인 폭도들은 곤령합으로 급히 뛰어갔다. 그후부터 일본인 폭도들은 더 이상 왕후의 피신처에 대해 묻지 않았다. 나는 곤령합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궁금해 그리로 가보았다.


고종은 장안당(長安堂)으로 벌써 옮겨가셨고, 곤령합에는 왕후가 피살된 채로 누워 계셨다. 나는 주위에 일본인 폭도들이 아직 있었기 때문에 다시 돌아서 나왔다. 그후 왕후의 시신을 동쪽 정원에서 화장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급히 그곳으로 달려가 보았다. 화장장에 있는 시신의 의복이 여자옷인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였다.”


이처럼 현흥택 정령은 왕후의 시신을 왕의 침전인 곤령합에서 보았다고 했다. 그러면 왕후의 시해시점은 세레신-사바틴이 약 20~30분간 옥호루 현장에 머물러 있다가 떠난 시간인 새벽 5시50분 이후인 10월8일 아침 6시 직전이나 직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종의 증언


누가 왕후를 시해했는가는 고종의 증언서에서 밝혀지고 있다.

이칙서는 고종이 국내부 고문으로 있던 미국인 레젠드르의 통역관을 통해 발표한 것이다.


“짐(朕)의 면전에서 전 조선군부 고문 일본인 오카모토 그리고 스즈키, 와타나베가 군도를 들고 침전(寢殿)에 난입해, 오카모토와 스즈키가 왕후를 잡아 넘어뜨리고….”


여기서 고종은 실신해 더 이상 말을 계속하지 못했다. 다음에 왕세자의 말로는 왕후가 밖으로 피해나가자 오카모토와 스즈키가 왕후의 뒤를 쫓아갔다고 말했으나 아마도 피신에 성공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종은 후에 와타나베가 칼을 들고 왕후의 뒤를 쫓아가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이것이 고종이 레젠드르의 통역관을 시켜 발표한 명성황후의 최후에 대한 증언의 전부다. 지금까지가 사건 관련자들의 증언서를 토대로 본 명성황후 시해 당일 밤에 벌어진 광경이다. 남은 증언서는 왕후 시해사건의 보충적인 자료 혹은 해명서다.


고종은 사건 이전에 왕후의 신변을 염려해 서양인 궁궐경비원까지 고용했다. 그런데 러시아 경비원 세레딘-사바틴은 폭동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중국인으로부터 받고도 방어대책을 건의하거나 세우지 않고 경비원 숙소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리고 시해 당일 밤 궁궐경비대는 새벽 2시에 이미 일본군의 수상한 동태를 파악했으나 안이하게 경비하다가 4시30분경에야 고종에게 급보를 전했다. 고종은 왕후가 안전한 곳에 피신했다고 답변했으나 당시의 급박한 정황으로 보아 마땅한 피신처를 찾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을 것이다.


아마도 고종은 등잔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왕의 침전만은 감히 침범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으로 왕후를 침전인 옥호루에서 고종의 침전인 곤령합으로 부르고,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왕후를 일반 궁녀와 같은 복장을 하고 궁녀들과 함께 앉혀 폭도들의 눈을 피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도한 일본인 폭도들은 곤령합마저 서슴없이 유린하고 말았다.


봉건 군주국가에서 마땅히 조선군은 왕실 수호와 국토방위에 헌신해야 했다. 그런데도 조선군 훈련대 일부는 일본 폭도들의 역모에 가담해 그들의 졸개로 궁궐 침입에 가세했다. 연약한 조선 궁녀들은 일본 폭도들의 폭력과 협박 앞에 굴복하지 않았으나 1500명의 궁궐경비병은 겁을 먹고 무기와 군복상의를 벗어던지고 도주해버렸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 민족사의 수치인 국모시해(國母弑害)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끝)


박종효·전 모스크바대 교수 

발행일: 2002 년 01 월 01 일 (통권 508 호)

쪽수: 472 ~ 485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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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ulmi Incident (을미사변, 乙未事變) is the term used for the assassination of Empress Myeongseong which occurred in the early hours of October 8, 1895 at Okho-ru (옥호루, 玉壺樓) in the Geoncheong-gung (건청궁, 乾淸宮), which was rear garden of the Gyeongbok Palace.


Viscount Miura Gorō, Japanese legation minister.

Okamoto Ryūnosuke (岡本柳之助), a legation official[18]and former Japanese Army officer

Hozumi Torakurō, Kokubun Shōtarō, Hagiwara Shujiro, Japanese legation officials

Sugimura Fukashi (杉村 濬), a second Secretary of the Japanese Legation

Adachi Kenzo, editor of Japanese newspaper in Korea, Kanjō Shimpō(漢城新報, also called Hanseong Shinbo in Korean)

Kusunose Yukihiko, a general of Imperial Japanese Army

Kunitomo Shigeaki (國友重章), one of the original Seikyōsha (Society for Political Education) members

Shiba Shirō[19](柴四朗), private secretary to the Minister of Argriculture and Commmerce of Japan, and writer who studied political economy at The Wharton School and Harvard University

Sase Kumadestu (佐瀨熊鐵), a physician

Terasaki Taikichi (寺崎泰吉)

Nakamura Tateo (中村楯雄)

Horiguchi Kumaichi (堀口 九萬一)

Ieiri Kakitsu (家入嘉吉)

Kikuchi Kenjō (菊池 謙讓)

Hirayama Iwahiko (平山岩彦)

Ogihara Hidejiro (荻原秀次郎)

Kobayakawa Hideo (小早川秀雄), editor in chief of Kanjō Shimpō

Sasaki Masayuki and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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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成皇后(1851—1895)


明成王后(注意,朝鲜那个时候还是中国的属国呢,她只能够叫王后,不能够叫做皇后) 孝慈元圣正化合天明成太皇后(1851—1895)即朝鲜历史上的闵妃,本名闵紫英或译闵慈英,骊兴人。她是朝鲜王朝高宗的王妃,骊兴闵氏外戚集团的核心人物、朝鲜历史上女性掌权的延续。

1851年(辛亥年,朝鲜哲宗二年)阴历九月廿五生于骊州近东面蟾乐里,是佥正赠领议政骊城府院君纯简公闵致禄的女儿。1866年(丙寅年)十六岁入宫,并册封为王妃,是为闵妃,行家礼于汉阳的云岘宫(兴宣大院君之府第)。

本图片据称为明成皇后照片,真实性待考。(注:据韩国的历史学家研究:明成皇后生前酷爱摄影,曾有一定数量的照片留下,但被日本暗杀后却再也没有人见到过她的照片。现在所能看到的所谓“玉照”,可能都是日据时有意伪造的。)

闵妃为朝鲜王朝高宗之王妃,纯宗之母。高宗幼时即位,其生父兴宣大院君李是应摄政,一味采取闭关锁国路线。而后闵妃鼓励高宗采取开化政策并引入日本势力,在朝野扶植亲信,推举亲族出任要职,排斥大院君势力,两派互斗不断,导致党争激烈,政权更迭动荡。过程之中闵妃与亲日之改革开化派势力渐行渐远,偏向亲华,多次利用清朝势力扫除政敌以求掌权。 至甲午战争(韩国称:清日战争)日本战胜中国之后,遭亲日开化派夺权而失势之闵妃欲转与俄罗斯合作对抗日本,因而引发1895年乙未年(高宗三十二年,光绪二十一年)10月8日的“乙未事变”,日本公使三浦梧楼领日本浪人及乱军入侵景福宫,于玉壶楼弑杀闵妃,并焚毁其遗体,并胁令高宗废她为庶人,直至两年后1897年,高宗改国号为大韩帝国,自行称帝,才将闵妃复位并追谥为明成太皇后,并厚葬于南杨州市金谷洞的洪陵。

由于闵妃(即:明成皇后)初期主张开放政策,后期力抗日本并身死殉难,所以深受韩国后世人民欢迎。韩国的后世史家称她为“伟大的铁女子”。


身世


明成皇后1851年10月19日出生于韩国京畿道骊州郡的闵氏贵族。明成皇后八岁时父母双亡。高宗15岁时,其父兴宣大院君决定为其订婚。由于明成皇后出身贵族又是孤儿,没有复杂的政治背景,正合兴宣大院君的心意,而被选入宫中。明成皇后为人严谨很少奢华。和其他皇后很不同,她入宫之后极少娱乐消遣。高宗与明成皇后起初很合不来,终日花天酒地。而明成皇后则终日在书房内读书学习。虽然明成皇后没有父母做靠山,但她却能发展自己的势力。20岁时,明成皇后就开始经常出宫,积极参加政治。兴宣大院君对她很不满。当明成皇后为高宗生的第一个儿子夭折时,兴宣大院君与明成皇后的矛盾公开化,指责明成皇后不能给高宗生育健康的继承人。他要求高宗与另一个皇妃生子,并得一健康男婴。兴宣大院君定其为高宗继承人。对此,明成皇后利用自己的势力奋力反击,逼兴宣大院君将大权交给22岁的高宗。明成皇后随后将高宗的妃子和儿子驱出宫外,贬为庶民。不久后,那孩子就死了。一些人自指责是明成皇后策划。明成皇后后为高宗生有第二个儿子纯宗。但纯宗生下来也一直是体弱多病。高宗从没接受过正规的教育。因此接管大权后,经常需要明成皇后帮忙打理国内外事务。高宗开始仰慕明成皇后的聪明与智慧。两人感情也有了长足发展。渐渐地,明成皇后成为了高宗的靠山。在朝鲜王朝内忧外患时期,两人感情发展甚深,同甘苦成为名副其实的夫妻。明成皇后被害之后,高宗非常伤心,将自己锁在屋内,拒绝处理与日本人的事情。兴宣大院君提议将明成皇后贬为庶民。高宗反驳说自己宁愿去死也不会玷污这个拯救了韩国的女人。出于反抗,高宗一直拒绝签署其父和日本人提出一系列条令和条约。


明成皇后与袁世凯


前段时间在大陆热播的韩国历史大戏《明成王后》以正剧的形式塑造了一位三韩国母闵妃的一生,但是该片应该是故意漏掉了一段恋情,那就是明成王后与袁世凯的一段感情。

1882年,袁世凯随淮军将领吴长庆进驻朝鲜,当时袁世凯23岁,年轻英俊,一点也不象后来的矮胖子,在吴1885年去世后,升任为大清国驻朝鲜总理交涉通商事宜的全权代表,袁世凯设计帮助韩王和王妃明成王后也就是闵氏除掉政敌大院君,得到了朝鲜最高统治者的赏识,当时执掌朝鲜大权的其实是闵妃,她听从袁世凯建议,组建义勇团,并任用袁世凯为练兵大使,使义勇团成为维护闵妃统治集团统治的重要力量。

当时闵妃美貌无比,有世界第一美女之称,她感激袁世凯帮其除掉大敌,又仰慕袁世凯的风采,有毅以身相许,袁世凯也是一人不甘寂寞,两人随即私通了,但为了不引人怀疑,闵妃想出一条计策,便回母家将其妹妹碧蝉介绍许配给袁世凯,碧蝉虽姿色不如其姐姐,但也是倾国之貌,且立志非英雄不嫁,在王妃的鼓惑下,同意了这门婚事。过门之后。闵妃几乎每天都借探望妹妹之名来袁世凯家,不久便被其妹发现,碧蝉知道之后气愤无比,向袁世凯哓以厉害,袁世凯也担心与一国之母私通之事暴露之后会影响甚大,便又按照碧蝉的方法,从河南带回自己的一个姨太太,谎称正室,主持家务,闵妃对此恨之入骨,便联合那个姨太太一起算计碧蝉进行报复。

后来日军开始进攻朝鲜,袁世凯回国,随同带上了闵妃和他的两个婢女,回国之后,袁世凯不知出于何种原因,将两个婢女也收为侧室,并按年龄大小分别成为二四两姨太太,碧蝉仅排为第三,原想成为正室的碧蝉现在还经常受到大姨太太的打骂,终日郁郁寡欢,喜怒无常,袁世凯自认有愧于她,也就随着她,对她的待遇比其他几位姨太太要特殊一些。


相关年表


1863 朝鲜哲宗去世,无子,十二岁李载晃继位,是为高宗,由生父李罡应襄政,称兴宣大院君。大院君政权由此成立。

1866 高宗大婚。闵致禄十六岁女儿闵慈英,册封为王妃,是为闵妃(后追谥为明成皇后)。

1868 获高宗宠爱的李尚宫诞下一子。

1871 朝鲜王朝饱受空前的内忧外患。闵妃得子,却年幼夭折。闵妃说服高宗亲政,朝野掀起倒大院君风潮。

1873 高宗年满廿一岁宣告亲政,大院君被迫隐退。

1874 闵妃又得一子(即后来朝鲜王朝最后一位国王纯宗)

1875 日本开始武力威胁朝鲜国。

1876 日本威逼朝鲜王朝缔结《江华岛条约》,朝鲜国门打开。后再签订《日朝修好条约》。

1882 朝鲜大旱,人心浮动,军人起事,是为“壬午军乱”。大院君利用局势袭击闵妃,闵妃扮成宫女避难忠州。高宗请大院君主政,大院君第二次上台。 清朝政府为防日本借机入侵朝鲜,决依制出兵朝鲜。大院君复出执政33天被囚。9月政局明朗,闵妃在清军护卫下回汉城(首尔)。朝鲜政府再次改组,戚族执政。

1883 法国夺取中国藩属国越南,清政府从朝鲜撤出部分军队应战,仅留袁世凯驻守朝鲜。

1884 日本支援开化党发动政变,惨杀朝鲜重臣多人,是为“甲申政变”。驻朝的袁世凯镇压,开化党执政三天垮台。中日就朝鲜问题进行谈判,最终签订《天津条约》,中日共管朝鲜。为牵制日俄,李鸿章促朝鲜开放门户,以夷制夷。

1885 朝鲜请清政府派遣外务顾问主理洋务,李鸿章派其幕中德国人穆麟德往朝鲜国。不意穆为沙俄收买,向闵妃集团鼓吹朝鲜“引俄拒清”。李鸿章发觉后,立即罢斥穆麟德。为牵制闵妃,李鸿章下令放还大院君。大院君在袁世凯护送下乘北洋水师军舰返朝鲜。

1894 朝鲜发生东学党起义,朝鲜政府依惯例请清军平乱,日本不请自至。后起义军议和,日本拒绝撤军,挑起甲午中日战争。中国军队失利,日本对朝鲜加大压迫,要求朝鲜政府按日本方案改革,逐华兵、废华约,朝鲜政府拒绝。日军包围朝鲜王宫。朝鲜亲日派密谋推翻闵妃政权,由大院君重新执政。日军攻入朝鲜王宫,将高宗和闵妃软禁,随后成立亲日派政著手改革。史称“甲午更张”。

1895年1月 在井上馨的压力下,高宗率世子、宗亲大臣赴太庙向列宗列祖誓告“独立”。4月,日本迫使清政府签订《马关条约》,正式宣布中国放弃对朝鲜宗主权。中国退出朝鲜,闵妃失去靠山后,谋求接近俄国抗日。日本开始对闵妃动杀机。

1895年10月8日,日本用极其残忍手段杀害闵妃,史称“乙未事变”。

1896 日本逐渐侵夺朝鲜独立和主权。2月高宗逃进俄国驻朝公使馆,一年后才返王宫。

1897年1月 高宗改朝鲜国号为“大韩帝国”,改年号光武,追谥闵妃为“明成皇后”。

1898 大院君去世。

1906 日本设置朝鲜统监府,任命伊藤博文为第一任韩国统监。

1907 日本迫韩国签订第三次日韩协约,将朝鲜半岛变为日本的保护国。高宗被迫退位,纯宗登位,改元隆熙。

1909 伊藤博文被韩国爱国志士安重根刺杀身亡。

1910年8月22日 日本迫使韩国签订《日韩合并条约》。10月1日,统监府改为朝鲜总督府,开始对朝鲜半岛长达35年的全面殖民统治。日本封纯宗为昌德宫李王,退位的高宗太上皇为德寿宫李太王,均列入日本皇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