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변절

암살과 안두희

한부울 2009. 2. 6. 20:23
 

암살과 안두희

 

白衣社 총사령 염동진  안기석 <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

먼저 신동아 2001년 10월호에 게재된 안기석 차장의 글을 옮겨 소개함.

金日成 간담 서늘케 한 전설적 백색 테러리스트


해방 직후 좌우대립의 시대에 우익테러를 지령한 ‘맹인장군’ 염동진은 평양 출신으로 중국에 건너가 남의사 활동에 참여했다가 일제시대 관동군에 체포돼 고문을 당하기도 했는데…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한 한 우익테러리스트의 활동과 정체.


최근 국사편찬위원회의 방선주박사와 정병준박사가 발굴한 자료는 광복 직후 좌우가 격심하게 대립했던 한국 현대사의 이면을 엿보게 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 자료(향후 미군자료)에 나오는 사람중 가장 관심을 끄는 인물은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염동진이란 인물.


중국의 남의사(藍衣社)를 본떠 만든 백의사(白衣社)의 총사령 염동진에 대한 증언자나 자료를 찾아본 결과 증언자는 직접 만나기 힘들었지만 염동진에 대한 자료와 증언 기록집은 이미 시중에 출판되거나 국사편찬위원회에 보관돼 있었다. 


백의사와 염동진에 대한 정보가 가장 광범위하고 자세하게 소개된 자료는 ‘이영신의 현대사 발굴, 비밀결사 白衣社’ 상·중·하(1993년 도서출판 알림문). 저자 이영신은 황해도 안악 출신으로 반소(反蘇) 운동에 가담했다가 1946년에 단신 월남, 1960년 9월 장면 총리의 비서로 잠깐 일하기도 했다. 그동안 ‘광복 20년’ ‘격동 30년’ 등 방송극을 집필했다. 그가 쓴 ‘백의사’는 현재 절판인데다 출판사도 문을 닫은 것으로 보여 시중에서 구하기는 힘들다.  아래에 소개하는 백의사와 염동진에 대한 이야기는 대부분 이 책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외에 백의사와 염동진에 대한 부분적인 기록은 ‘사선을 넘어서(김인호 1984년 진흥문화사), ‘해공 신익희 일대기(유치송 1984년)’, ‘인간 김일성 그의 전부(이기봉 1989년 길한문화사)’ 등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백의사 단원이었던 백근옥, 선우길영, 최의호와 조재국씨 등이 1980년대에 증언한 기록을 보관하고 있다. 학술적인 연구 중에는 백범 연구의 전문가로 알려진 도진순 창원대 교수의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서울대학교출판사)’에 백의사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일제시대 때 자료로는 일본 동경에 있는 한국연구원장 최서면(崔書勉)씨가 이영신씨에게 보낸 자료 ‘京高特秘 第3210號 金九 一黨의 愛國團員 檢擧에 關한 件’이 있는데 염동진에 대한 기본 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는 1935년 12월10일자로 경기도지사가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경성지방법원장, 상해총영사, 남경총영사 등에게 보낸 극비정보 보고서로서 중국의 남경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반 사관후보생들의 인적 사항과 동태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낙양분교 제1기 졸업생으로서 ‘김구 일당의 애국단원’으로 체포된 엄창복(嚴昌福, 당시 24세)이 진술한 내용과 다른 경로로 입수한 자료를 토대로 작성한 것. 자료를 제공한 사람은 내부인으로 낙양분교 한인반 사관후보생 92명의 신상을 소상하게 보고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자유민주민족회의 의장인 이철승씨는 전화통화에서 “염동진을 한번도 보지는 못했지만 당시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맹인이라고 들었다. 백의사는 정치적인 운동과는 관계없는 자그마한 단체였다”고 회고했다. 백의사 단원으로 활동한 사람들 중에서 상당수가 이미 사망했거나 노환이거나 해외로 이민한 것으로 알려진다. 앞에서 언급한 자료들 중에서 염동진에 대한 의문을 풀만한 내용을 집중적으로 추려 소개한다.


평양 출신으로 본명은 염응택


염동진은 중국의 남의사에 몸담고 있던 시절에 잠시 사용했던 가명이고 본명은 염응택(廉應澤). 백의사 단원들 중에는 ‘동진’을 호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1902년에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서울 선린상고에서 수학했다.


염응택은 선린상고 재학중에 이미 검은 띠를 땄을 정도로 유도 솜씨가 뛰어났다고 한다.


선린상고를 졸업한 뒤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1934년에 장개석 지도아래 있던 남경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에 입교했다. 낙양분교에 한국 독립군의 양성을 위해 한인반이 설치된 것은 1933년 12월이므로 염응택은 제1기 입교생이었다. 철기 이범석 장군은 낙양분교 1기생 생도대표였다.


낙양분교 입교 자격은 보통학교 이상의 학력자로서 만 15세 이상 35세까지 독립투쟁에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했지만 심사는 엄격했다. 당시 심사는 김구, 이청천(李靑天), 김원봉(金元鳳) 3인이 했다. 염응택은 신익희의 추천으로 이청천의 심사를 거쳐 입교했다. 신익희는 이청천과 정치적 노선을 같이 했던 사이다. 입교생들은 추천자와 심사한 사람들에 의해 김구파 이청천파 김원봉파 등으로 갈렸다.


중국 국민당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통해 한인반 사관후보생들에게 매달 11원씩을 지급해줬는데 이 과정에서 의혹이 있어 학생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염응택도 이 폭동에 가담했다가 남경에 있던 신익희에게 피신했다.


신익희는 염응택의 이름을 요춘택이라는 중국이름으로 변성명하게 한 뒤 중국군의 남경 헌병사령부 우편물 검사처의 일자리를 얻어주었다.


여기서 얼마동안 일하다가 염응택은 장개석 직속의 특무기관인 남의사로 자리를 옮겼다.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정보수집과 양동작전을 담당했던 기구)에는 남의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염응택은 이 조사통계국 소속으로 첩보공작을 위해 만주에 밀파됐다가 일본군 관동군 헌병대에 체포됐다. 이 사실은 이영신씨가 백의사 단원들로부터 들은 증언에 따른 것인데 관련 자료는 없다.   


미군자료에는 염응택이 중국 공산당에 체포되어 고문당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영신씨는 위 책에서 “분명한 것은 관동군 헌병대에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했고 그 후 관동군 정보기관의 첩보원이 되어 있었다”고 기술했다. 이영신씨는 위 책에서 염응택은 해방 후 서울역 앞에서 일본으로 귀환하던 관동군 헌병대 소속 아라가와 다께조 군조를 만난 적이 있는데 염응택을 고문한 당사자였다고 한다.


염응택이 시력을 잃게 된 것은 고문의 후유증 때문인데 고문 직후 바로 시력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서서히 악화되기 시작해 1948년 말에 완전히 시력을 잃은 것으로 알려진다. 다만 평소에 감정의 변화를 바깥으로 표현하지 않고 늘 검은 안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염응택을 시각장애자로 보기 쉬웠을 것이다.


관동군 헌병대에서의 고문 후유증으로 점차 시력을 잃어가던 염응택은 치료를 위해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염응택은 평양에서 돌아온 지 얼마 뒤 중매결혼을 했는데 신부 최성률(崔成律)은 일본 나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서문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최성률씨는 해방후 정치인 암살 1호인 현준혁 암살과 관련, 남편인 염응택이 연행되자 소련민정군 사령관 로마넨코 부인을 찾아가 무고하다며 탄원해 남편을 석방시키기도 했다. 염응택이 남하 후에도 최성률은 평양에 남아 있다가 염응택의 측근인 백관옥의 인도로 1946년 3월 서울에서 염응택과 상봉했다. 최성률은 서평양경찰서에서 구타당한 뒤 유산한 이후로 염응택과의 사이에 자식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녀는 1960년대 후반까지 종로구 내수동에 살았던 것으로 알려지지만 그 후로는 행방이 묘연하다


대동단 결성  


한편 일제시대 때 만주에서 평양으로 돌아온 염응택은 평양 기림리 공설운동장 뒷 편에 있던 영명사(永明寺)에 자주 드나들었다. 이 절에는 민족주의자들과 일부 사회주의적 성향을 지닌 인사들이 모이곤 했다. 영명사의 주지는 박고봉이었는데 3·1운동 직후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에도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귀국후 스님이 된 인물.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박찬익씨의 동생이라고 백근옥씨는 증언한 바 있다.


이 고봉 스님이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에 대응할만한 조직을 만들 것을 권유해서 염응택은 1944년 8월 대동단을 만들었다. 박고봉은 백관옥과 선우봉을 염응택에게 소개했고 이들은 대동단에 입단했다. 단원 포섭은 염응택이 주로 했는데 중학생들도 포섭대상이었다. 그러나 대동단이 일제에 대항해 독립 투쟁했다는 기록이나 증언은 없다.


대동단은 해방 후 제2독립운동으로 반공산주의 운동을 할 것을 결정하고 백관옥 등 주요 단원들은 평남도당 위원장이던 현준혁씨를 1945년 9월 평양 거리에서 암살했다


이들이 먼저 서울로 피신한 뒤 교사 혐의로 체포됐다가 부인의 노력으로 석방된 염응택도 박고봉의 권유로 1945년 11월말 서울로 남하했다.


서울에서 한동안 지내던 염응택은 다시 평양으로 잠입해서 대동단 모임을 소집했다. 단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염응택은 각자 월남하기로 하고 본부는 서울로 옮긴 뒤 결사대를 파북하겠다고 밝혔다.


서울로 돌아온 염응택은 백관옥 선우봉 등을 만나 대동단을 백의사로 개칭하겠다고 밝혔다. 백의사라는 이름은 염응택이 오랫동안 구상해온 것으로 중국의 남의사와 같은 방법으로 조직을 운용하되 우리 고유의 복색인 흰옷을 상징했다.


서울 서린동의 갑부였던 오동진은 궁정동 일본인 집을 구해 백의사 본부로 쓰게 해주었다.


이영신씨가 추적한 바에 따르면 이 본부는 6·25전쟁 때까지는 백의사의 소유였다가 환도 후 법무장관을 역임했던 이인(李仁)의 손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5·16 후에는 중앙정보부가 이 집을 사들여 소위 ‘궁정동 안가’로 사용했는데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대통령이 김재규의 총에 쓰러진 곳이기도 하다


염응택은 비밀결사 백의사를 정식으로 출범시킨 뒤 궁정동에 머무르기 시작했다. 개별적으로 월남해온 대동단원들과 오동진, 신익희의 측근이었던 조중서 등이 만나 백의사의 근간과 활동 방향을 정했다.


궁정동 새 본부가 정비된 뒤 염응택은 백관옥이나 선우봉에게 누구를 만나는지 언제 돌아오는지 알리지 않고 항상 혼자 외출했고, 방문하는 사람도 항상 혼자 오도록 했다. 가령 ‘김아무개라는 분이 찾아오셨는데요’하고 전하면 일언반구도 없이 손님을 모시고 밀실로 들어가 몇 시간이고 얘기를 나눈 뒤 돌려보내곤 했다.


백의사가 설립된 뒤 염응택은 주로 염사장으로 불렸지만 공식 직함은 아니었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은 염응택이 백의사 단원들을 영입하는 은밀한 과정이었다. 단원들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염응택 혼자서 철저하게 점조직으로 얽어매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백의사 단원의 수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3만여명에 이르렀다는 설이 있으나 확인할 길은 없다.


궁정동의 백의사 본부  


백의사 본부내에는 이중으로 자물쇠가 채워진 밀실이 있었는데 여기서 백의사 단원 가입의식이 거행됐다. 신입 단원들은 먼저 염응택과 맞절하고 무릎을 끓은 채 마주앉아 오른손을 펴들었다.


나는 백의사 단원으로 입단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약한다.


하나, 나는 조국의 자주적인 정부수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한다.

하나, 나는 목숨을 걸고 백의사의 명령에 복종한다.

하나,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조국과 백의사를 배반하지 않는다.


그런 다음 자기 손가락을 베어 준비된 서약서에 그 피로 수결을 찍었다.  염응택은 단원의 수결이 찍힌 서약서를 따로 밀봉했다고 한다.


백의사는 단원을 문책할 때 ‘동지 재판’을 통해 두 가지 형벌을 가했다고 한다. 하나는 과오가 무거운 사람을 ‘출당’하는 것이었다.


그보다 가벼운 형벌은 ‘앉은뱅이 형벌’이었다. 본부 안에 마련되어 있는 독방에서 열흘 또는 한달간의 기간을 정해 근신해야 했다.


백의사는 첩보원들을 훈련시켜 북한에 보내기도 했는데 북한의 토지개혁과 관련, 반대하는 선동을 했고 소작농들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첩보원들의 보고는 38도선이 강화되면서 중단됐고 보고된 내용도 염응택의 머릿속에만 있을 뿐 남긴 것이 없다. 다만 CIC에 정보를 제공했다면 간접적인 기록이 남아있을 법하다.


따라서 북한의 유격대 활동은 백의사 첩보원들과 연계돼 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할 뿐이다. 염응택은 백의사 단원들을 경찰이나 국방경비대에 입대시키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노동총연맹 등 노동계에도 백의사 단원들을 가입시켰다.


출당을 당한 단원은 행동의 제약을 받았다. 항상 미행이 붙어 감시하면서 조금이라도 백의사 기밀을 누설할 우려가 있다 싶으면 원로회의의 결정을 거쳐 암암리에 처형하도록 되어 있었다.


백의사 활동중 일반적으로 소개된 것은 주요 정치인 암살과 관련된 것이다


현준혁 암살 외에는 김일성 암살과 강양욱 암살은 미수에 그쳤고, 이영신씨의 책에는 여운형 암살에도 염응택이 관계된 것으로 묘사돼 있으나 하수인은 백의사 단원이 아닌 외부인사였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정치깡패’였던 김두한의 배후에 염응택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영신씨에 따르면 김두한의 우익테러 행위는 모두 염응택이 지시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염응택과 김두한은 어떻게 알게 됐을까.


1945년 11월 말 서울로 내려온 염응택은 남선전기주식회사 사원이던 인척 이봉렬의 집에 머물면서 백관옥과 선우봉을 접촉해서 당시 조선공산당 전위대장으로 포섭돼 있던 김두한을 납치했다. 염응택은 오동진의 집에서 김두한의 부친인 김좌진 장군은 공산주의자에 의해 살해됐다며 김두한을 설득해 우익으로 전향시켰다. 그 후 김두한이 테러와 관련해서 구속되자 염응택은 미군정 등에 있는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서 석방시켰다고 한다.


염응택은 정치인들과도 일정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낙양분교 입학 때 추천서를 써준 신익희는 환국 후 염응택을 만난 자리에서 자신이 주도하는 대한정치공작대 구상을 알리며 합류를 권유했지만 염응택은 정치적 성향의 조직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신익희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야당 정치인으로 오랫동안 활동했던 유진산은 염응택과 자주 만나 대한민주청년동맹 등 우익 청년단체들의 통합을 논의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신익희와 유진산과의 관계는 도진순 교수의 책에도 언급되어 있다. 이 책에 의하면 백의사와 연계된 정치공작대의 중앙본부장은 신익희였으며 행동대장 조중서, 사령에 염응택, 부사령 박경구, 총무부장 유진산, 청년부장 조용진 등이었다는 것.


김구와 관련해서는 복잡한 사연이 있다. 이번 미군자료는 안두희가 염응택에게 백범암살 지령을 받은 것처럼 냄새를 풍기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사정이 다르다. 앞에서 거론된 책이나 증언에도 백의사 단원이나 염응택이 백범 김구 암살에 관여했다는 암시는 없다.


다만 낙양분교 폭동사건 때 김구는 폭동에 가담했던 염응택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환국 후 염응택이 신익희와 함께 김구를 방문해 눈물을 흘리며 큰절을 올렸으나 김구는 아는 체도 하지 않고 냉대했다고 한다.


냉대했던 김구의 변화  


그러나 북한과 접한 중국지역에 우익군대를 세우는 계획서를 염응택이 작성해서 신익희 등이 이를 김구에게 보여주자 김구는 화를 풀고 중국 총통 장개석과 부총통 이종인에게 보내는 사신(私信)을 써주었다고 한다. 이 계획은 장개석 군대의 패배로 실패하고 만다.


미군자료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문은 염응택과 미군 방첩대(CIC)와의 관계이다. 이 정보보고서를 작성한 실리는 당시 내부정보 유출문제로 가명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염응택은 신익희의 부름으로 낙산장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미군 정보국에 몸담고 있는 이순용을 소개받았다. 이순용은 재미교포로 미군에 입대하여 2차대전에 참여했던 CIC소속 중사. 그후 한국 정계에 들어와 이승만 정권 아래서 내무부장관에 기용된 바 있다.


이순용은 하지 장군이 신익희의 대한정치공작대를 해체하라고 하는데 대북 정보를 제공하면 해체를 재검토할 수 있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에 신익희가 화를 내고 나가버리자 측근인 조중서가 그 역할을 백의사가 맡도록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그후 백의사와 CIC와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염응택의 주 채널은 당시 이순용의 상사였던 CIC 서울지구 대장인 미 육군 소령 위테커.


그는 궁정동 백의사 본부를 찾아와 대북 관련 정보를 제공하면 백의사 활동을 비호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위테커는 염응택과의 약속에 따라 북한에 파견할 첩보원 훈련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다. 훈련장소는 위테커의 도움으로 마련한 정릉 골짜기의 외딴집이었다. 일본인 부호의 별장으로 쓰이던 그 저택은 이후 백의사의 한 아지트로 이용된다. 저택 주변이 울창한 송림으로 둘러싸여 있어 은밀한 활동을 하기에 안성맞춤인 이 집은 9·28 수복 후 국군 HID 유격대의 비밀훈련장으로 쓰이기도 했다.


염응택은 각 산하단체 청년 가운데 열명을 선발했다. 선발기준은 매우 엄격했다. 각 지역에 파견되어 활동하는데 조금도 차질이 없도록 정확한 사투리를 구사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이 조건에 따라 각도 출신자 중에서 2명씩 선발됐다. 강인한 체력과 정신무장도 요구됐다. 대동단 대원이었던 박현영(朴玄英)이 훈련 책임자였다.


납북과정에서 사망  


백의사 단원으로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맡은 바 소임을 완수하겠다는 정신무장을 철저히 시킨 뒤 체력 훈련과 무술, 각종 무기를 다루는 기술을 반복하여 훈련시켰다. 폭파술, 적진 침투와 탈출방법, 산악돌파에 이르기까지 고도의 유격 훈련이 뒤따랐다.


소련제 각종 무기에 대한 식별법과 조작법도 가르쳤다. CIC 교관들이 비밀리에 파견되어 훈련을 도와주었다.  1946년 5월초순 첩보대가 이북으로 잠입했다.


2인 1조의 첩보대는 군사적인 첩보가 주임무였다. 각 지역별로 주둔 부대의 배치 상황과 병력수, 그리고 각 부대별 화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해서 귀환하라는 명령이었다. 소련으로부터의 무기 반입 현황을 알아내는 것도 주요 임무였다. 위테커가 염응택에게 직접 부탁한 내용이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좌우대립의 시대도 끝나자 백의사의 역할은 점차 축소됐다. 더 이상 사설단체의 음성적 역할이 필요없게 된 것이다.


정부수립 후에는 직업이 있던 단원들은 직장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100여명의 단원들은 갈 곳이 없었는데 한 단원이 육군본부 첩보과장에 취임하면서 이들중 상당수를 데려가기도 했다.


1949년 2월에는 한 인사가 염응택을 찾아와 맥아더 사령부 윌로비 소장으로부터 북한에 대한 정보를 확보하라는 극비명령을 받았다며 협조를 요청했다. 그 결과 49년 6월1일 맥아더 사령부의 한국연락사무소(Korean Liaison Office, 약칭 KLO)가 설치됐다.


백의사 잔존 단원 전원은 모두 여기에 들어가 6·25전쟁 기간 동안 첩보활동을 벌였다. 고위 공직자 중에는 여기에 소속된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염응택은 6·25 전쟁 중에 납북도중 죽은 것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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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은 金九쿠데타 기도설, 염동진 배후설은 근거없다


다음은 신동아 2001년 10월호에 게재된 도진순 교수의 글을 옮겨 소개함. 

<백범 암살관련 美발굴문서 완전분석>


염동진은 백범에 대해 적대적이라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이었다.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했다는 언급은 문서 어디에도 없다. 도진순 < 창원대교수·사학 >

 

국사편찬위원회의 방선주 박사와 정병준 박사가 귀중한 문서인 ‘김구: 암살 배경 정보(1949. 6. 29)’(이하 <문서 1>)와 ‘남한 내 우익 활동(1948. 11. 11)’(이하 <문서 2>)을 발굴함으로써, 지난 9월 초 각 신문들은 백범 암살에 대해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크게 보도하였다. 하나는 안두희가 CIC 요원(agent)이었다는 것이 밝혀짐에 따라 백범 암살에 미국의 개입을 추정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백의사 총사령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백범 암살을 지시하였다는 것이다. 미국의 관련혐의에 대해서는 필자도 이미 한두 번 분석·주장한 바 있다(‘백범 암살의 배후는 미국 CIC인가’-‘월간 말’ 1992년 5월호. ‘백범 김구 시해 사건과 관련된 안두희 증언에 대한 분석’-‘성곡논총’ 27집 4권). 반면 백의사 관련사실은 아무도 주장한 바 없는 전혀 새로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발굴된 문서에서 언급되지도 않는 명백한 오보라고 판단된다.  우선 <문서>에서 주목할 내용을 간추리면


① 안두희가 백의사 내 혁명단이라는 특공대 제1소조의 구성원이며 아울러 CIC 정보원(informer) 내지 요원(agent)이었다는 것

② 청부 암살 전문 조직인 백의사의 총사령 염동진이 암살을 지시하면 단원들은 피의 맹세를 하고 수행한다는 것

③ 염동진이 김구를 추종하는 우익 장교들의 내부 동향을 CIC 요원에게 제공하였다는 것

④ 이러한 염동진에 의하면 1948년 말 당시 김구를 추종하는 일단의 우익 장교들이 반이승만정부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 등이다.


그런데 ② 부분에서 “백의사의 총사령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백범 암살을 지시했다”는 구절은 문서 어디에도 없다.


<문서 1>은 주정보원 염동진을 설명하면서 백의사가 청부 암살을 즐기는 테러단체이고, 암살을 명령받으면 피의 맹세를 한다는 단원의 규율을 참고로 기술한 것뿐이다. 이 가운데 안두희와 관련되는 부분의 원문은 “He(안두희: 역자) has also taken the blood oath to assassinate, were he ordered to do so by Mr. Lyum Tong Chin”이다.


언론의 오보


이것은 안두희가 실제 염동진으로부터 암살지령을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만약 암살지령을 받았다면(were he ordered to do so by Mr. Lyum Tong Chin)” 그도 다른 단원들과 마찬가지로 피의 맹세를 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가정적 조건문에서도 염동진이 ‘김구’ 암살을 지령했다는 구절은 어디에도 없다


이것은 단순한 구절의 문제가 아니라, 이 문서가 안두희를 비롯해 백범을 암살한 인물이나 조직을 파헤치는 것이 기본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서를 통독해 본 사람은 쉽게 알 수 있듯이, 문서 전반의 흐름에서 염동진-백의사와 김구의 관련은 적대적이라기보다 상호의존적이다. 먼저 <문서 1> 모두에 “김구의 밀고로 염동진이 중국공산당에 잡혀 고문을 당했다”는 구절은 염동진이 직접 언급한 것이 아니며, 또 사실과 다르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염동진은 김구의 밀고로 중국공산당에 잡혀 고문당한 것이 아니라, 일본 관동군에 체포되어 밀정이 되었다.


다음 염동진이나 백의사는 광복 이후 백범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독자적으로 활동하였으며, “염동진이 김구씨에 대해서는 때때로 격렬한 비난을 가하면서도 동시에 군사적 견지에서 김구의 장점과 가능성을 격찬한다”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염동진은 때때로 김구에 대해 비판적이기는 했으나, “염동진의 김구에 대한 비판은 중국에서 그의 독립운동을 인정하지 않는 이승만 정부 인사들에 대한 증오에 미치지는 않는다”는 바로 다음 구절을 보면 당시 염동진은 적어도 이승만 정부측보다는 김구측을 더 선호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당시 염동진은 스스로 김구를 수반으로 하는 군사정부를 원하고 있는 일종의 동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민간인(염동진)은 스스로 김구의 개인적 친구라고 말한다” “염동진의 추종자(백의사) 대부분은 김구씨의 추종자” “염씨는 김구씨와 비밀 연락과 접촉관계를 갖고 있으며, 염씨는 한국군 내부의 우익 반대파(Rightist dissidents)의 통신을 김구씨에게 전달해주는 매개자 노릇을 해왔다” “그 민간인(염동진)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이승만이 수반인 정부보다는 더 강력하고 군사적인 유형의 정부를 선호한다고 밝혔다” “그 민간인은 김구가 한국의 지도자가 되면 일본과 미국이 훈련시킨 200만의 한국군을 갖게 될 것이며, 필요한 경우 이 한국군은 그를 따라 38선을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첨부된 편지(<문서 2>)는 북한의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에서 소요와 폭동이 있은 직후 우익 군사파벌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의 형성 단계에 김구씨와 염동진씨가 같이 관여했음을 보여준다” 등에 이르면 당시 염동진은 백범과 상호의존적 관계로 보는 것이 명백하다.

 

이러한 관계의 연원은 별도의 검토를 요하지만, 적어도 1946년 찬탁·반탁과 좌우대립의 정국에서 백의사가 임시정부의 정치공작대와 연계하여 대북 테러공작을 전개한 사실은 꽤 유명하다(도진순, 1997,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76~80쪽). 1946년 3월1일 평양역 광장에서 열린 3·1절 기념대회에서 백의사 요원들은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해 수류탄을 투척하였다. 당시 소련 장교 노비첸코의 헌신적인 경호로 김일성은 무사하였으나, 노비첸코는 오른팔을 절단하는 중상을 입었다.


이후 1983년 북한과 소련은 노비첸코를 기리는 영화 ‘영원한 전우’를 공동 제작하였고, 1984년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하면서 노보시비르스크에 도착하여 노비첸코를 만났다. 올해 여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시베리아를 횡단하며 러시아를 방문할 때 노보시비르스크역에서 노비첸코의 유가족을 만날 것인지가 이슈가 된 것은 이러한 저간의 사정 때문이었다.


이상의 언급을 정리하면 위의 두 문서에 보고된 범위 내에서 염동진은 백범에 적대적이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이었다. 또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러한 염동진이 안두희에게 김구 암살을 지시했다는 언급은 문서 어디에도 없다.


김구 쿠데타 주장이 문서의 핵심


그렇다면 문서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1948년 11월 당시 김구가 반이승만 군부쿠데타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같이 연루되어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염동진을 통해서, 미군 정보장교가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이 문서는 김구 암살자인 안두희의 배후나 지령자를 밝혀낼 목적에서 작성된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1949년 이후 백범 암살이 조직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이 문서는 그와는 반대로 오히려 김구가 암살된 이유를 여순사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 쿠데타를 중심으로 찾으려고 하는 미국의 시각이 깊이 깔려 있다. 이것이 문서의 이름이 ‘김구 암살의 배경’이 되는 이유이며, 별도로 1948년 11월 초의 쿠데타 관련 <문서 2>를 첨부한 이유다.


여기서 염동진은 김구-우익의 A급 정보를 미군 CIC에 전달하는 주요 정보원으로 등장한다. 그의 의도는 우익 쿠데타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미군은 그것을 반대로 활용하였다.


쿠데타에 대한 진전된 정보를 캐내다가 CIC 요원이 난처해지거나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는 우려는 <문서 2>에서 정보제공자 염동진과 정보활용자 CIC의 묘한대립관계를 보여준다.   1948년 말 군부쿠데타 문제는 별도의 사실적 연구를 요하는 중요한 주제이지만, 분명한 것은 적어도 안두희, 나아가 이승만 정부와 미국도 당시 김구가 군부쿠데타와 관련있다고 파악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문서에서 본 바와 같이 암살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승만은 당시 “여순 반란사건에 관련된 일부 극우분자”라는 표현으로 김구를 지목하였고, 국무총리 이범석은 “여순사건은 공산주의자가 극우정객과 연락한 극좌와 극우의 공모”라고 밝혔다.


또한 CIC를 비롯한 미국 정보기관은 위의 문서 외에도 “G-2 Periodic Report” no. 164(1948. 11. 5), “G-2 Highlight” no. 332(1948. 11. 3), “Joint Weeka” (1948. 11. 6) 등에서 김구의 쿠데타와 공산주의자의 공격이 결합되는 것을 지극히 우려하였다(자세한 것은 도진순, 1997, 293쪽, 321-326쪽). 그간 이러한 보고서의 정보원(情報源)이 밝혀지지 않았는데, 이번 문서로 볼 때 염동진 등이 중요한 정보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여순사건과 이에 대한 이승만 정부의 대처는 백범 암살사건에서도 분수령의 위치에 있다.

백범 진영과 이승만 진영의 대립은 대체로 다음의 세 단계로 요약할 수 있다. 1948년 4월 백범의 남북연석회의 참석으로 서로 돌이킬 수 없는 적대화의 길을 걸었고, 1948년 말 여순사건 직후부터 1949년 초에 걸쳐 그 대립은 “죽고 죽이는 관계”로 비화되었다. 이 시기 정부조직은 신성모 국방장관 등 이승만대통령의 친위조직이 강화되었으며, 안두희를 포함한 서북청년단의 일부가 조직적으로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였다. 즉 이 시기는 한편으로는 이승만 친정체제가 강화되고, 다른 한편으로 백범 암살을 위한 구조가 정비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마지막 단계가 1949년 5월 이후 국회프락치사건과 조국전선 결성 문제가 부상하면서 시기를 못박아가면서 백범 암살이 촉구·집행되던 시기다.


이렇게 보면 “안두희가 백의사의 제1소조의 구성원이며, CIC 정보원(informer) 또는 요원(agent)이었다는 것”은 김구의 쿠데타에 대해 정보를 제공한 염동진-백의사를 설명하는 과정에 짧게 언급한 부수적인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문서 작성자인 실리(George E. Cilley)의 의도와는 별개로, 우리는 여기에서 진실로 들어가는 또 하나의 문을 발견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진실의 문


안두희는 이미 백범 암살사건과 미국의 관련에 대해 몇 번에 걸쳐 언급한 바 있다. 1984년 ‘월간조선’의 오효진과 인터뷰, 1992년 4월13일 ‘동아일보’에 특종보도된 권중희에 의한 자백, 1995년 김석용의 권유로 녹취한 테이프 121개에 담긴 그의 ‘마지막 증언’ 등이 그것이다.


먼저 1992년 4월13일자 ‘동아일보’ 특종 보도에서 ‘안두희는

① 경무부장 조병옥과 수도청장 장택상 등의 소개로 미군 OSS의 한국 책임자 모 중령 등을 소개받았고,

② 미군 OSS 한국담당 장교와 안두희의 서북청년단이 긴밀하게 정보를 교환하였으며,

③ 미군 장교는 백범을 제거해야 할 Black Tiger라고 부르며 백범 암살의 필요성을 암시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안두희는 문화방송의 박경재와 가진 인터뷰에서 위의 내용은 권중희의 강압에 의한 것이라며 부인하였다.


안두희의 말대로 위의 내용 중에는 권중희의 강압으로 잘못 포장된 부분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OSS다. 안두희는 그의 ‘마지막 증언’에서 당시를 회고하면서 “아주 그 무식쟁이(권중희)가 OSS라는 말은 어떻게 외워 가지고서 아주 잘 아는 것처럼 자기 유식을 과시한다고 OSS를 찾는데…OSS가 무슨 뭐 미국 CIA말고 뭐 또 있었던 거 같은데 나는 몰라”라고 사연을 설명하였다.


미국의 골칫거리 백범


사실 OSS는 1945년 10월 초 해체되었고, 광복 후 한국에 진주한 미 육군 24군단의 정보기관은 CIC가 대표적이었다. 때문에 OSS에 대한 언급은 사실에 맞지 않는다. OSS가 착오라고 해서 1992년 증언의 진실성에 결정적인 하자가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전반적으로 사실에 가깝다.


안두희는 1984년 오효진과 ‘자유스러운 인터뷰’에서 이미 미국과 백범 암살의 관련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언급하였다.   나는 정보에 밝았다. 미국의 정보원으로 서청원(西靑員)들이 많이 활약하고 있어서 미국 사람들이 백범을 싫어하는 것도 알았다. 언젠가는 미국의 비밀자료에서 ‘백범 제거계획’ 같은 것이 나올지도 모른다. 당시 가장 골칫거리가 백범이었으니까.(오효진, 1984, ‘안두희 고백’ (상) (하), ‘월간조선’ 7~8월호)


여기서 안두희는 자신이 미국 정보원이라고 직접 밝힌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소속된 서청원들이 미국 정보원으로 많이 일했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 백의사나 서북청년단 소속 청년들은 미군 정보원으로 많이 활동하였다. 이번 <문서 1>은 그 연장선상에서 안두희도 CIC 정보원(informer) 또는 요원(agent)이라고 밝히고 있다. 나아가 1992년 그의 ‘마지막 증언’에서도 위와 마찬가지로 미군과의 관련은 한국 경찰 수뇌들의 소개로 이루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안두희의 미국 관련 발언들은 상당히 일관되며 상호보충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고, 모순되는 내용은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안두희는 ‘마지막 증언’에서 당시 서청 등 청년단체 요원들과 경찰·군·정보원의 연결을 아주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경찰과 군부는 ‘비합법적으로 빨갱이를 때리는 데’ 청년단이 필요하였고, 서북청년단은 정부기관의 보증과 지원이 필요하였다. 특히 장택상은 그의 환갑연에 안두희를 초청하였고,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노덕술, 사찰과장, 정보과장 최운하 등 정보 전문가들은 안두희와 정보를 자주 교환하였다.


나아가 안두희는 동향인 육군 중령 김일환의 주선으로 군의 정보기관, 특히 특무대(SIS: Special Investigation Section)의 김창룡과 연결되었다. 당시 김창룡은 대위계급의 정보장교였지만 이승만 대통령, 채병덕 참모총장, 신성모 국방장관의 각별한 신임을 받은 ‘숙군의 마왕’으로 정보계의 실권자였다. 이런 안두희가, 그의 서청(西靑)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CIC 요원이며, 그의 백의사 보스인 총사령 염동진이 그러한 것처럼 CIC에 적극 협조하였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제 남은 쟁점은 안두희가 CIC 요원이라고 하더라도 1949년 암살 집행 당시 미군이 어떠한 영향력을 발휘했는가 하는 문제다.


그가 CIC 요원이라는 사실과 암살에 대한 미군의 영향력은 서로 관련 있을 가능성이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별개의 문제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도 안두희는 그의 ‘마지막 증언’에서 매우 생생하게 언급하고 있다.


한 열흘에 한 번씩 일주일에 한 번씩 그 미군 중위, 미군 저 24사단 중위가 있잖아요? 중령 대신 나한테 뭐 연락하갔다 그러구 자주 좀 서로 통하자고 얘기하던 중위가 - 그런데 중윈지 대윈지 잘 모르겠어요. - 나타나는 데 마이켈이라는 건 알지, 언제 뭐 중위 옷 입고 올 적도 있고, 대위 계급장 달고 올 적도 있고, 절반 이상 사복을 입고 올 적도 있고, 그런 친군데, 자주 드나드는 거예요. 특히 우리 정부가 생겨서 5·10선거가 끝나구서 자주 오는데…젊은 사람인데도 나보단 4, 5세 2, 3세 아랜 데도 나보다 아는 거 많고, 정치적인 얘기만 자꾸 물어보니 내가 정치 같은 걸 알 리가 없지요…어디서 배웠는지 우리 한국말은 자주 쓰는 데…한국말로 하다가 영어두 섞어서…나두 이제 쪼끔씩 영어를 배우는 겁니다.(‘마지막 증언’, 184.)

 

이 증언에 따르면 안두희의 접촉대상인 미군은 두가지 차원이었다. 하나는 미24군의 중령급 인물과 간혹 접촉하였는데, 문서 작성자 실리(George E. Cilley) 소령도 이 레벨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실무선의 중위급 인물 마이클이며 이 사람에게 영어를 배울 정도로 자주 접촉하여 정보를 교환하였다. 필자로서는 CIC 정보장교 명단에서 마이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정보장교들은 원래 본이름과 계급을 노출하지 않기 때문에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예컨대 맥아더 사령부의 일개 사병이던 노만 존슨은 한국전쟁기에 여러 이름과 20개 정도의 계급장을 가지고 다니면서 다양한 역할을 하였다(노만 존슨, 1994, ‘한국작전’, 삼진기획). 따라서 구체적인 안두희의 증언은 매우 신뢰할 만하다. 마이클 중위는 서북청년단에 자주 찾아와서 안두희가 모르는 ‘빨갱이 계통 정보’를 주었으며, 그것은 한국 경찰과 특무대의 정보와 일치하는 ‘고급 수준의 것’이었다.


마이클이 준 소위 정보 소스 같은 걸 일일이 뭐 인천에 김일한이 같은 놈한테 전화 걸어서 알아보고, 또 특무대 본부의 장대위를 불러서 알아보고 심지어 지금은 정정당당히 대한민국 경찰관 형사가 돼 있는 노덕술이 같은 거, 혹은 그 외에 몇몇 사람들을 일부러 만나서 지나가는 척하고서 얘기를 슬슬 물어보게 되면은, 이거 대개 앞뒤 꼬리가 맞는 얘기예요. 맞는 얘기니까 자연히 나도 이 사람을 중시하게 되고, 이 사람의 얘기를 내가 중요 소스로 인정 안할 수 없게 되지요.(‘마지막 증언’ 185)

 

이 정보꾼 마이클은 백범과 한독당의 동향, 특히 ‘혁신보(革新報)’의 양근환의 동향에 각별히 주목하고 있었다. 이러한 마이클의 정보와 평가는 노덕술이 있는 한국경찰, 김창룡의 특무대 정보는 물론, 백범 암살을 기획·주도한 김지웅의 정보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거 물어보게 되면 김지웅이도 어떻게 알아보는지 여기저기 알아보고, 특히 양근환이는 주변 사건을 갔다가 아주 정확하게 마이켈 중위하고 이제 맥이 딱 맞아 들어가요.…그러니 점점 김지웅이를 중요한 정보소스로 인정 안할 수 없게 됐습니다.(‘마지막 증언’ 185)


이상을 요약하면 안두희와 서북청년단은 경찰, 군 특무대와 연계되어 있었으며, 미군 정보장교와도 정기적으로 만나 백범과 한독당에 관한 정보를 논의했으며 그것은 백범 암살을 기획한 김지웅의 정보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조심성이 많은 안두희로서는 백범 암살을 함부로 집행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정부 요인들의 견해를 탐문하고, 미국의 눈치를 보고 난 뒤에 실행하였다.


미국측 공식문서에서는 백범 암살 당시 미국의 개입 여부를 엿볼 수는 없는가? 아마도 정보문건 계통에서는 앞으로 발굴될 가능성이 있지만, 현재로서는 1949년 2월 “백범이 통일정부의 수반이 되기 위해 잘못된 좌우합작을 시도하고 있다”는 대단히 비판적인 보고서 두 건을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G-2 Perodic Report’ no. 1052(1949. 2. 1), no. 1055(1949. 2. 4)


한편 공간된 ‘미 외교문서(FRUS)’에서는 그 성격상 암살사건의 전말을 보여주는 문건은 찾을 수 없다. ‘미 외교문서’에서 백범 암살사건과 관련하여 주한 미대사 무쵸가 미 국무성에 보낸 전문은 세 가지로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 수록된 것은 1949년 6월27일 오후 5시발의 3급비밀 지급(Confidencial Priority) ‘전문 788호’가 유일하다.

 

안두희, 미국정보장교와 정기적 회합


외교문서의 공간은 적절한 세탁절차를 거치기 때문에 예상한 바와 같이 특별한 내용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전문은 ‘안두희는 한독당원’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해서 암살 사건을 한독당 내 노선 대립의 일환으로 다루고 있다. 다만 “김구가 국민의 추앙을 받고 있고 암살사건에 대해 모든 사람이 비난하고 있으므로 장례식에서 큰 혼란이 예상되나, 경찰과 군대의 주도면밀한 준비로 한국정부는 이를 충분히 수습할 수 있을 것”으로 밝히면서 장례식 이후의 정국의 추이를 정확하게 예견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되는 대목이다.


이 전문에서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전문의 발신 일시, “6월27일 오후 5시”다. 안두희의 ‘마지막 증언’을 분석해보면, 암살 이튿날인 27일 그는 채병덕 참모총장의 지시로 헌병사령부에서 김창룡의 특무대로 이송되어 “호텔 같은 감옥”에서 취조대신 대대적인 의료진단 서비스를 받았다. 그 후로도 신문도 보고 라디오도 들으면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암살사건이 일어난 지 근 2주가 되는 7월 8일부터 ‘우호적인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컨대 무쵸 미대사의 보고는 안두희에 대한 취조와 전혀 관계없이 마련된 것이다.


이 점에서 미국은 암살사건에 대한 시나리오를 이미 알고 있었거나 적어도 이승만 정권과 보조를 같이 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이러한 정보 활동을 기반으로 해서 미군 철수의 혼란기에 일어난 백범 암살사건을 능란하게 처리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백범 암살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부인하기 힘들다. 오히려 문제는 개입의 범위와 강도일 것이다. 현지 CIC 정보장교 차원이었는지, 대사관까지 개입된 수준이었는지, 본국 정부 정책의 일부였는지가 불분명할 뿐이다. 미국에서 출간된 한 책에서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국 대외공작사의 암살사건에서 김구 암살이 첫 사례로 리스트에 올라 있는 것으로 밝혀져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문서 1>에서 언급한 백의사가 백범 암살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면 그럼 누가 백범 암살을 지시한 것인가. 이를 위해 다시 그간의 연구를 존중하면서 광복 직후부터 암살사건까지 안두희의 활동을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안두희는 1945년 12월 ‘신의주 학생사건’의 여파로 자신이 수사대상에 오르고 1946년 북한의 토지개혁으로 집안 재산이 몰수되자 ‘극단적인 반공주의자’로 월남을 결심했다. 1947년 봄 신의주에서 사리원을 거쳐 해주 용당포에서 밀항으로 월남한 안두희를 처음 맞이한 것은 서북청년단이었다. 안두희는 서북청년단 부위원장이자 실세인 김성주와의 친분으로 얼마 후 서청의 서울 제1지부이며 본부 직속인 ‘종로지부’의 ‘사무국장’이 되었다. 극단적인 반공·반북주의자인 안두희가 백의사 요원이 된 것은 너무 당연해 보인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안두희나 서북청년단·백의사 요원들은 한편으로 경찰 및 군의 정보기관과 깊이 연결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미군 정보기관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러한 안두희가 백범암살의 구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여순사건 이후 1948년 후반부터다.


동향인 김일환의 소개로 안두희가 김창룡을 만난 그날 저녁이다. 백범 암살의 핵심 실무를 담당한 김지웅(金志雄)과 홍종만(洪鍾萬)은 목로주점에서 안두희를 만나 한독당 가입을 권유하는 단계부터 안두희는 거대한 암살 구조에 편입되었다. 결국 1949년 1월 말 ~ 2월 초 홍종만은 안두희를 김학규에게 소개하였고, 안두희는 입당 절차를 밟게 되어 4월14일자의 한국독립당 당원증을 발급받았다. 

그 후 암살이 구체적으로 집행되는 단계에서는 안두희의 직속 상관인 장은산 포병사령관이 날짜를 박아서 채근하였다. 6월23일 안두희가 지시받은 경교장 습격사건을 시행하지 않자, 6월25일 장은산은 안두희에게 다음과 같은 최종 명령을 하달하였다.


무조건 내일 들어가서, 그전과 같이 일요일이니까, 그저 안중위가 놀러왔다는 것처럼 얘기허구, 가서 어저께 왜 공주 안 가셨냐는 거 물어보구, 또 김구 선생 있으면 올라가서 얘기하다가 그런 계제가 되구 타임(time)이 되어 해야 겠으면 해라.…너밖에 할 사람 없다. 우리가 도원결의(桃園結義)는 안 했지만은 이거 할라구 약속했던 것 아니냐?(‘마지막 증언’ 193)


장은산은 당시 알리바이를 위해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는데, 입원실 문을 나서는 안두희의 손을 잡고 장개석 국민당정부의 특별 테러단체인 남의사(藍衣社)의 사칙(社則)과 행동관례(行動慣例)를 언급하면서, ‘만약 일이 실패하면 너도 갈(죽을) 수 있다’고 협박하였다고 한다.


남의사의 사칙과 관례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백의사 단원인 안두희가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이상을 요약하면 암살 공모자는 김지웅·홍종만이었으며, 구체적 지령자는 장은산 포병사령관이었다. 그 배후로는 안두희가 후송된 특무대의 김창룡, 특무대 이송을 지시한 채병덕 참모총장, 안두희의 재판을 담당한 원용덕, 이들의 상관인 국방장관 신성모 등이 그간 구체적으로 거론된 바 있다.


문제는 이승만 대통령의 관련 여부인데, 이에 대해서도 안두희는 자세하고 흥미 있는 증언을 남긴 바 있다(‘일요신문’ 1996. 11. 3). 이에 따르면 ① 안두희는 1949년 6월20일 채병덕 참모총장, 신성모 국방장관 등과 함께 경무대를 방문하였으며, ② 대통령은 안두희에게 악수를 청하며 ‘으음, 자네가 안소위인가. 신장관에게 얘기 많이 들었네’라고 말하고 백범이나 한독당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으며, 다만 집무실을 나올 때 ‘높은 사람 시키는 대로 일 잘하고 말 잘 듣게나’ 했다는 것이다. ③ 퇴근 무렵 장은산 사령관에게 경무대 방문을 보고했더니 그는 빙그레 웃으며 ‘그것 봐. 내 말이 맞지’ 하더라는 것이다. 즉 안두희가 잘 움직이지 않자 신성모·채병덕·장은산 등이 경무대 면담을 추진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안두희는 “내게 뒤가 있다는 걸 확인한 뒤 최종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과의 관련


안두희 이외 이승만 관련에 대한 증언으로는 “김익진 검찰총장이 영감님(이승만 대통령)이 노망이 들어서 한 일”이라며 양해를 구했다는 최대교 서울지검장의 증언, 1960년 4월 민주화운동 직후 장은산의 고백을 폭로한 고정훈의 증언, 사건 후 경무대에 보고하러 가니 ‘이박사가 이미 알고 있더라’던 당시 헌병부사령관 전봉덕의 증언 등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관련 여부에 대해서는 좀더 신중한 조사가 필요하지만, 당시 우익 내 정치적 대립구도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요컨대 위의 문서는 여순사건 이후 백범 암살이 구체적으로 집행되는 구조와 지령 구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기존의 연구성과나 증언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백범 암살 당시는 정부 수립 이후 근 1년이 되어, 백의사·서청 등 민간단체 요원들도 이곳 저곳으로 흩어진 시기이고 보면, 역시 군과 경찰에서 안두희와 연결되었던 사람들의 영향력이 민간단체보다 더 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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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김구 암살 관련 배경정보’ 전문번역 소개

백범 암살관련 美발굴문서 완전분석

 

미군방첩대(CIC) 조지 E.실리 소령이 작성한  ‘김구 암살 관련 배경정보’ 전문번역

 

본인은 방첩대(CIC) 일원으로 한국에서 근무하는 동안 업무상 다수의 한국인과 접촉하였다. 이들 가운데 흥미롭고도 가장 악명 높은(the most malignant) 인물은 흔히 “맹인장군(Blind General)”으로 알려진 염동진(Lyum Tong Chin)이다.


이 사람은 일제시기 강력한 적이었던 한국인에 의해 중국공산당에 넘겨졌으며, 중국공산당 정보부의 고문으로 눈이 멀었다. 그 배신자가 오늘날 가장 유력한 한국 정치인 중의 하나이며, 가장 사랑받는 애국자의 한 사람인 김구다. 일단의 장교 파벌을 주로 조종하는 그의 정당(한독당: 번역자)이 저지른 무책임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의 인기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염씨는 규모나 구성을 단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인 비밀조직의 대표다. 그는 자신의 견해와 추종자의 구성에 대해 말을 아끼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 왔다. 외부인들은 그를 청부 살인자, 국수주의적 광신도들로 구성된 방대한 지하조직의 대장(총사령: 역자)으로 알고 있다.


염씨는 본인(실리)을 신뢰해서 이미 보고서로 제출한 바 있는 많은 정보를 제공하였으며, 그 외에도 아주 민감하거나 아직 검증되지 않아서 보고서에 기재할 수 없는 많은 정보를 알려주었다.

염씨는 파시스트 성향의 반공 지하조직을 설립했다.  


그의 추종자들은 대부분 김구씨의 추종자다. 이 지하조직은 남한·북한·만주와 중국 전역에 뻗어 있다. 작금의 사태에 비추어 어느 정도로 그의 공작이 실행되고 어떤 통신망을 유지하고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이 지하조직의 주요 목적은 모든 “공산주의자들”과 “반정부” 정치인들을 암살하는 것이다. 조직에는 군인, 해안경비대, 세관원, 경찰관, 소방관, 정부 관리, 정치인, 상인, 산업가, 밀수꾼, 농부, 보통 시민 등 한국의 모든 계층을 망라하고 있다. 조직의 대다수는 수많은 좌우익 청년단체의 회원이기도 한 청년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조직 내부에는 “혁명단(Revolu-tionary Group)”이라는 특공대(Special Attack Corps)가 있다. 특공대는 5개의 소조로, 각 소조는 4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민주 한국과 한국 민족주의의 부활을 방해하는 자를 암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오면, 소조의 구성원들은 애국자로 죽겠다는 피의 맹세를 한다. 안두희(Ahn Tok Hi)는 이 비밀조직(백의사: 역자)의 회원이자 혁명단 제1소조의 구성원이다. 나는 그가 한국 주재 CIC의 정보원(informer)이었으며, 후에는 요원(agent)이 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염동진으로부터 암살을 명령받았다면, 안두희도 역시 피의 맹세를 했을 것이다

(He has also taken the blood oath to assassinate, were he ordered to do so by Mr. Lyum Dong Chin). 확인하거나 부인하는 그 어떤 보고서도 없지만, 저명한 한국 정치인 장덕수와 여운형의 암살범들도 이 지하조직의 구성원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대략 20개월간 염씨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으며 그의 신뢰를 저버린 적이 없다. 나는 그가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중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때때로 나는 그가 미국 요원들과 인터뷰할 때 동석한 바 있는데, 그때마다 그는 통역을 활용했다. 그는 나 이외 어느 누구에게도 영어로 말한 적이 없다. 이것은 그 자신도 인정하고, 그와 가까운 여러 사람들의 관찰로도 그러하다.


그가 지휘하는 조직은 백의사(“White Clothes Party” 또는 “White Clothes Society”)로 알려져 있다. 한국인들은 전통적으로 묘한 모양의 흰옷을 입기 때문에 백의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백의사라는 조직 이름은 또한 한국의 모든 계층에 이 조직원이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조직원들은 부여받은 각각의 활동과 임무에 관해 비밀을 지킬 것을 맹세한다.


편지는 북한의 황해도, 평안남도, 평안북도에서 소요와 폭동이 있은 직후 우익 군사파벌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에 김구씨와 염동진씨가 관여했음을 보여준다.


나와 관계를 유지하는 동안에도 염씨는 여러 차례 생명의 위협을 당했으나, 이런 사실이 공표되거나 경찰에 보고된 적은 없다. 죽기로 맹세한 60명의 청년들이 하루 24시간 내내 그를 경호하고 있다. 염씨는 김구씨와 비밀 연락과 접촉관계를 갖고 있다. 염씨는 한국군 내 우익 반대파(Rightist dissidents)의 통신을 김구씨에게 전달해주는 매개자 노릇을 해왔다. 이 우익 반대파는 고급 장교로 구성되어 있었다/있다.


한국 내 CIC 사령부에 제출되는 보고서들은 비밀로 분류되어 있다. 한번은 내가 직접 제출되는 정보의 보안장치를 확인하기 위해 한국인 요원들을 매개로 점검해본 적이 있다. 그 결과 중요한 정보가 있는 한 비밀보고서의 내용이 유포되어 김구씨에게 전달된 것을 발견하였다. 그 후 이러한 유출을 우려해 한국주재 CIC 사령부 정탐과 책임장교와 전라남도 지구 CIC 사무소 광주 책임장교에게 문서가 아닌 구두로 보고되었다.


김구씨의 암살과 관련하여 아래의 보고 사본을 제출한다.


<문서 2> 


1. “1948년 11월9일자보고, 제목: ‘남한 내 좌익(우익의 오류라고 판단됨: 역자)의 활동과 추정되는 계획’ 제3단락 참조할 것. 이하의 정보는 서울의 영향력 있는 민간인들의 지도·지원으로 한국군 장교들이 계획 중인 쿠데타에 대한 진전된 정보를 획득하는 과정에 한 요원이 어려움을 당할 경우,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어떻게 지원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 제출되었다. 쿠데타 집단들은 좌익 성향이 아니고, 파시스트 유형의 배경을 지니고 있다.


2. 광주지구사무소의 한 요원은 CIC 작전 중 서울의 한 민간인과 친해졌으며, 광주지구 사무소로 전근 갈 때 그 민간인이 광주 주둔 국군 제5여단 제4연대 연대장에게 개인적인 추천서를 써줄 정도로 신임을 얻게 되었다.

3. 그 민간인은 스스로 김구의 친구라고 말하지만, 일부 사람들 사이에는 중국에서 그의 독립 운동을 인정하지 않는 이승만정부 인사들에 대한 증오만큼 되진 않지만, 김구에 대한 그의 증오도 적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그 민간인은 이승만 수반의 현정부보다 더 강력하고 군사적인 유형의 정부를 선호한다고 여러 차례에 걸쳐 밝혔다. CIC 요원은 현재 국군 제4연대 연대장을 매개로 하여 그 민간인으로부터 서신을 받고 있다.


4. 제4연대 장교들의 참모회의에서 김구를 수반으로 하는 군사적 유형의 정부가 수립되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여러 차례 표명되었으며, 그럴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러한 정부가 수립되면 북한군도 내부의 친소장교를 일소하고 김구의 파시스트형 정부에 합류할 것이라 주장한다. 그 요원은 많은 장교들과 경찰 관리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비록 현재는 배후인 미국의 능력, 힘과 위신 때문에 이승만 정부가 요구되지만, 이러한 유형의 정부가 결코 군사적 기반을 통하여 한국의 통일문제를 해결하거나, 한국을 재건하여 국가 중의 국가가 되도록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5. 여기서 언급하는 그 민간인은 한국 주재 CIC의 일부 인사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가장 명백하고 독특한 특징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토론하길 싫어하며, 김구씨에 대해서는 때로는 격렬하게 비난하면서 동시에 군사적 견지에서 김구의 장점과 가능성을 격찬한다는 점이다.


그 민간인은 김구가 한국의 지도자가 되면 일본과 미국이 훈련시킨 200만 한국군을 갖게 될 것이며, 필요한 경우 이 한국군이 그를 따라 38선을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민간인은 과거에 CIC에 잘 복무하였으며, 군사과학과 전술에 조예가 깊다. 그는 클라우제비츠의 저작을 숙독하고 연구했다. 그는 중국 중경의 군사대학을 졸업했으며 1935년 그곳에서 현재 조직(백의사)의 핵심을 만들었다. 그는 모든 정치조직, 육군 및 해군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 조직원을 침투시켰고 모집하였다. 이들 요원의 다수는 1947~48년 동안 CIC 임무를 추진하기 위해 활용되었다.”


이 보고가 한국인 요원의 손에 들어갈 위험성 때문에 과거에는 그 민간인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 그 민간인의 이름은 백의사의 대장(총사령: 역자) 염동진이다.


주한미군사령부에는 수많은 한국인과 여타 외국인들이 통역관, 번역관, 고문관으로 고용되어 있기 때문에, 이 정보는 기록물로 작성되지 않았으며, 미군 관련 요원들이 1948년 12월 본국으로 귀환함에 따라 (CIC의) 전체 조직망은 해체되었다.[파주염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