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왜 고려에는 고려청자만 있어야 하는가?

한부울 2008. 11. 25. 19:04

아래 야후사전에 나타난 고려자기 해설이다.

송(宋)나라의 영향을 받은 남방요(南方窯)의 계통이고, 또 하나는 14세기 이후 원(元)나라의 영향을 받은 북방요 계통이다. 송(宋)의 화남 저장성[浙江省(절강성)] 월주요(越州窯)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

상기에서 보면 고려는 역시 송나라에 복속국이 틀림없는 것 같다.

과연 그러한가?

송은 고려의 상국이 아니라 고려를 상징하는 조정이름인줄 어찌 알겠는가?

일제지시를 받은 하수인인 어리석은 반도 사관원들이 송이 고려의 상국인 것처럼 꾸며 놓은 것을 어찌 일반 백성들이 따져 알 수 있으며 사실을 밝혀 바르게 알 수 있었겠는가 하는 말이다.

기실

신라 내에 당이었고

고려 내에 송이었다.

고려 내에 원이었으며

조선 내에 명이었고

조선 내에 청일뿐인 사실을 이렇듯 꾸며 놓고 가려놓았으니 어찌 민족의 역사가 답답하고 안타깝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때문에 신라, 고려, 조선은 바로 대륙의 황제나라였고 아시아 대륙역사에 모체인 것이다.

고려 도공 최고 목표는 청명한 가을 하늘 빛깔인 비취색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청자 굽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조금은 탁한 비취색에서 맑고 밝은 비취색으로 발전하다가 고려 말이 되면서 탁하고 거친 비취색으로 퇴보함을 알 수 있다

얼마나 엉뚱한 설명인가?

고려는 청자, 상감청자, 백자

이조는 분청사기, 백자

고려는 청색, 조선은 백색이라고 하면서 도공들이 고집해야 할 이유가 없다.

국가 지시를 받아 도공들이 도기를 제작했다고 하여도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왜 할 일 없이 자유분방한 작품성까지 막아 창조력까지 떨어뜨리는 색깔을 기어코 고집했겠는가 하는 말이다.

처음부터 그러한 사실은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한 것은 일제가 대륙조선역사를 잔디 떼듯 떼어 반도역사에 맞추기를 하기 위한 술수였다.

황우(Yellow Cattle)개통에 대륙소를 가지고 일제는 한반도 소라고 하여 변종하게 하면서 한우라고 이름을 붙여 한우는 무조건 황색이라고 하면서 통일을 시킨 후 세뇌시킨 것 하고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고려자기에 대한 잘못된 상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말 정신차리고 바라 볼 수 있는 냉정함을 가져야 한다.

모르고 있었던 사실, 잠시 착각하고 있었던 사실을 밝혀 바르게 알아야 하는 것이다.

과거 잘못된 역사에 의하여 본의아니게 허수아비나 꼭두각시가 되었고 민족역사의 자존과 존재성조차 망각하게 하는 어리석은 짓을 강요 당한데 대한 청산이 필요하고 이젠 거대한 발걸음으로 종지부를 찍을 때가 다가 왔음을 우리 스스로가 느껴야 한다.

정말 똑바로 따져 보자.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청자는 송나라 자기 지류인 청자인가?

송나라 자기를 모방한 고려자기인가?

아니면 정말 대륙자기가 고려자기 인가?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에게 귀중한 보물이 되어 지금 충격적으로 다가 온다.

이제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래 대륙지나에 보관되어 있는 고려자기와 우리가 보관하고 있는 청자를 비교한번 해보고 자금까지 알고 있었던 사실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라고 본다.

우리가 보관하고 공개 할 수 있는 것은 청자밖에없다는 점도 상기해야 한다.

********************************

http://www.wz-bgz.com/Pic/1/2/6/2005-12/571.html

송조(宋朝)란 高麗 범주 내에 있었던 政府 名, 朝廷名稱


鎏金银套装高丽瓷赏瓶 [류금은투장고려자상병]


高丽:高麗

鎏 류: 품질이 좋은 금(金). 金, 银

套 투: 덮개

裝 장: 장식하다.

賞 상: 칭찬할

瓶 병: 배 부분은 크고, 목 부분은 긴 용기

 

 

 

 

 

 **************************************************

 

 

 

 

 **********************************************

 

 

 ****************************************

 

 

 

 

 

 

 

****************************************** 

 

 

 *****************************************

 

 

****************************************

고려자기 (高麗磁器)


고려시대 도자기의 총칭. 청자(靑磁)·백자(白磁)·흑유자(黑釉磁)·철유자(鐵釉磁) 등 고려시대에 제작된 자기를 일컫지만, 일반적으로는 고려청자를 지칭하는 말로 인식되어 왔다. 청자의 특징은 푸른 색조에 특색 있는 곡선, 표면의 문양 등에서 다른 도자기에서는 볼 수 없는 높은 격조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병·항아리·대접 등에서 볼 수 있는 부드러운 선은 상감청자의 야국(野菊)·운학(雲鶴)·포류수금(浦柳水禽) 같은 야취(野趣)의 정신적 깊이를 드러낸 장식문양과 더불어 다른 도자기에서는 볼 수 없는 고려적인 문양들이다. 고려시대의 도자기에는 2가지 수법이 쓰였음을 알 수 있는데 하나는 송(宋)나라의 영향을 받은 남방요(南方窯)의 계통이고, 또 하나는 14세기 이후 원(元)나라의 영향을 받은 북방요 계통이다.


고려청자의 변천


고려청자는 문종(文宗) 전후에 송(宋)의 화남 저장성[浙江省(절강성)] 월주요(越州窯)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으로, 초기의 청자는 매우 소박한 데서 출발하여 정차 기술이 숙련됨에 따라 예종·인종 때에 이르러 비색청자시대(翡色靑磁時代)를 이루며 고려청자의 진면목을 보이는 상감청자를 낳았는데 이는 순수한 고려인의 창의력에 의한 것이다.


순청자시대(純靑磁時代)

고려청자의 변천과정 중 제1기에 해당하는 1050∼1150년의 시기로 고려청자의 발생기라 할 수 있다. 고려청자의 발생시기를 단적으로 지적할 수는 없으나 송나라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기록된 청자에 관한 글 등으로 미루어 대략 11세기 초엽으로 추측된다. 이 시기에는 이른바 비색(秘色, 翡色)으로 불리는 순수한 청자색(靑磁色)을 가진 각종 청자가 제작되었는데, 이들 청자의 특색은 두껍고 고르게 발라진 유약(釉藥) 때문에 발색(發色)이 깊고 은은하며 맑음과 깊이가 느껴진다.


상감청자시대(象嵌靑瓷時代)

고려청자의 전성기인 제2기 1150∼1250년에 해당하는 시기로, 서긍의 《고려도경(高麗圖經)》의 기록으로 미루어 상감청자의 발생은 대체로 의종시대(1147∼70)일 것으로 추측된다. 상감법이란 자기를 완전히 건조시키기에 앞서 무늬를 음각하거나 새김판으로 찍고 그 자국에 백토(白土) 혹은 적토(赤土)를 메워 일단 초벌구이한 후 청자유를 발라 굽는 것인데 백토는 순백, 적토는 흑색으로 발색하여 무늬를 나타낸다. 무늬로는 운학(雲鶴)·양류(楊柳)·보상화(寶相花)·국화(菊花)·당초(唐草)·석류 등 다양한데 특히 운학 무늬와 국화 무늬가 가장 많이 쓰였고 국화 무늬는 조선시대 초기까지 쓰였다. 제2기 상감청자의 특색은 삼강무늬를 전면적으로 쓸 경우에도 배경으로서의 여백을 남길 여유를 보일 만큼 충분한 공간이 설정되고 있는 점과, 무늬가 단일 무늬의 기계적인 반복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성격이 다른 몇 가지 무늬를 통일적으로 배열하여 화폭과 같은 효과를 내고 있는 짐이다. 이 시기에는 상감청자 외에 무늬없는 청자[無紋靑磁(무문청자)]나 잡유기(雜釉器)도 만들어졌으며 제1기와는 달리 전반적으로 유색(釉色)이 엷게 나타난다.


쇠퇴기의 청자

고려청자의 쇠퇴기인 제3기 1250∼1350년에 해당하는 시기로 그 기간은 1세기로 보나, 실제로는 몽골이 침입한 14세기 후반까지 1세기 반이나 된다. 이른바 국가의 말기적(末期的) 증상이 미술에도 반영되어 청자기의 퇴조를 보이는데 청자의 표면이 황록색조를 띠거나 비색을 잃으면서 상감의 무늬도 산만하고 조잡해지며 같은 무늬를 반복 사용하는 등 무의미한 도안으로 바뀐다. 기형에 있어서는 매병(梅甁)이 줄어드는 대신 접시류가 늘고 대접은 안이 깊어지고 측면이 평평한 광구대(廣口臺), 바닥이 좁아진 변형된 매병 등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진사(辰砂)·화청자(畵靑磁)같은 특수한 상감청자가 만들어지는 외에 철채자기가 등장하기도 한다. 무늬는 시대가 내려갈수록 간단해지고 천박해지면서 조선시대 초기의 분청사기 및 백자철회와 연결된다.


청자의 종류


순청자

다른 색을 이용한 장식이 없고 비색 1가지로 되어 있어서 색조와 형태를 그 생명으로 하는 청자이다. 여기에는 소문(素文)청자·양각(陽刻)청자·음각(陰刻)청자·상형(象形)청자·투각(透刻)청자 등이 있다.


상감청자(象嵌靑磁)

그릇이 마르기 전에 무늬를 선각(線刻)하고 백토나 흑토로 메워 초벌 구이한 다음 유약을 바르고 구운 것이다. 간혹 진사(辰砂)를 섞어서 밝은 홍색을 낸 것도 있다. 또 흑토상감(黑土象嵌)의 배경 위에 넓은 화판(花瓣)의 백토상감(白土象嵌)을 한 모란·보상화 무늬를 두어 흑백의 윤곽을 인상적으로 부각시킨 것도 있다.


퇴화무늬청자[堆花紋靑磁(퇴화문청자)]

백토 혹은 적토를 물에 개어 점을 찍거나 붓으로 선을 그려 무늬가 도드라지게 장식한 것이다.


화청자(畵靑磁)

백로·적토 혹은 철채(鐵彩) 등으로 무늬를 그린 후 청자유약을 바른 것이다.


진사청자(辰砂靑磁)

진사를 발라 장식한 후 유약을 바른 것이다.


화금청자(畵金靑磁)

금니(金泥)로 무늬를 넣어 900℃ 전후로 한 번 더 구워낸 것이다.


명문청자(銘文靑磁)

음각·상감·흑필(黑筆) 등으로 표면에 명문을 새긴 것을 말한다. 명문의 종류로는 시명(詩銘)이 있는 것, 연호나 간지(干支)가 있는 것, 납입소(納入所)명이 있는 것, 기타 잠명(雜銘)이 있는 것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고려백자

고려의 백자는 중국 화난[華南(화남)] 경덕진요산(景德鎭窯産)인 청백색이 도는 백자의 영향으로 발생하였다. 백자는 청자보다 약간 뒤늦게 들어왔지만 청자와 함께 독자적인 발달이 이루어져 기형(器形)·문양 등에서도 송(宋)·원(元)의 백자와 분간하기 힘들 만큼 정교한 작품이 생산되었다. 백자요지(白磁窯址)로서는 경기도 용인시(龍仁市) 이동면(二東面) 서리(西里)와 반곡마을에 있는 가마자리가 매우 주목된다. 1960년대에 발견된 이 가마는, 한국에서는 청자보다 수적으로는 적지만 백자도 9∼10세기에 이미 생산되었다는 분명한 증거가 된다. 고려 백자는 조선시대의 백자로 이행해 가는 과정으로 그 종류에는 소문(素文)·양각·음각·상형(象形)·상감백자 등이 있고, 전라북도 부안군(扶安郡) 보안면(保安面) 유천리(柳川里)가 백자 요지로 유명하다.

[야후사전]

***************************

한국에 존재하고 있는 고려청자들...

푸른색을 띤 것들만 골라 보관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하는 청자.

국립중앙박물관, 호암미술관, 간송미술관 등 소장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