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돌의 땅, 중앙아시아
[매일경제] 2008년 08월 22일(금) 오후 05:50
1877년 4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은 총리였던 디즈레일리에게 "만일 러시아군이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면 짐은 너무 수치스러워 즉시 왕위에서 물러날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통치했던 빅토리아 여왕이 왕위를 걸고 지키려고 한 땅은 콘스탄티노플 북쪽, 즉 중앙아시아다. 중앙아시아는 역사적으로 가장 오랫동안 구체화되지 않았던 지역이다.
영국과 러시아가 패권 다툼을 하기 전에는 지도에도 없는 땅이었다. 그저 여러 부족과 수많은 나라가 명멸하면서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주는 통로에 불과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중앙아시아는 열강이 대립하는 각축장이 됐다. 자원 확보와 민족ㆍ종교 갈등으로 인해 이 지역은 점점 세계의 관심지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앙아시아에는 현재 수많은 나라와 민족이 존재한다. 최근 러시아와 충돌을 빚은 그루지야에서부터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을 비롯해 위구르, 티베트, 카슈미르 지역 등이 이곳에 존재한다. 이땅은 고대 이래 지금까지 유럽, 러시아, 중국, 아라비아, 인도문명이 충돌하면서 발전해나가는 완충지대다.
20년간 더 타임스의 중동 및 아시아 특파원을 지낸 피터 홉커크가 쓴 '그레이트 게임'(정영목 옮김)은 19세기 중앙아시아를 놓고 벌인 영국과 러시아의 갈등과 경쟁을 정밀하게 정리한 책이다.
인도를 차지한 영국과 얼어붙은 땅을 피해 남하를 계속하던 러시아의 충돌은 어찌 보면 필연적인 것이었다. 더구나 중앙아시아는 힘의 공백지대였기 때문에 두 제국의 쟁탈전은 더욱 치열했다. 두 제국이 전면전만을 벌인 것은 아니다. 애국심과 모험심에 가득 찬 두 나라의 젊은이들이 순례자나 상인으로 변장해 이 땅에 뛰어들었고 부족의 지도자들을 만나 정세를 살폈다. 그들은 서로 죽이기도 하고, 낯선 땅에서 이교도라는 이유로 현지인들에게 처형되기도 했으며 그들과 동지가 되기도 했다.
쟁탈전은 수차례에 걸쳐 계속됐다. 첫 대결은 1907년 양국이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티베트, 카프카스 등을 분할 점령하는 조약을 맺으면서 끝이 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원주민들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없었다. 이로 인해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등 카프카스 지역 국가들은 러시아연방에 편입됐다. 티베트 인도 등 남쪽은 영국의 지배로 남았다가 훗날 영국이 떠나면서 독립을 하거나 중국의 손에 넘어갔다.
중앙아시아를 놓고 벌어진 세 번째 다툼은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다시 불거졌다. 이번 쟁탈전은 러시아와 영국의 싸움이 아니었다. 국제사회 질서를 지킨다는 명분 아래 미국이 뛰어들었고, 영국 캐나다 네덜란드를 비롯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군대가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면서 중앙아시아는 더욱 복잡한 경우의 수로 빠져 들어간다.
게임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옛 소련 치하에 있는 카프카스 지역 국가들이 독립하자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산 하나만 넘으면 말과 인종이 달라진다는 복잡한 정체성을 지닌 카프카스 지역이 화약고가 된 것이다. 그 땅에 매장돼 있는 석유와 제국들의 야욕이 이 갈등에 불을 질렀고, 갈등은 그루지야와 오세티야의 충돌로 드러났다.
중앙아시아는 이렇게 다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다. 새로운 '그레이트 게임'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책의 주인공은 위대한 사람들이 아니다. 변장을 하고 중앙아시아에 뛰어든 청년 장교들, 부족장과 스파이가 주인공이다. 그레이트 게임은 바로 이들에 의해 시작됐다. 사실 중앙아시아 지역에 대한 역사적 이해는 매우 낮다. 이 책은 중앙아시아 지역의 역사적 근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허연 기자]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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