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SINA-신중국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한부울 2008. 8. 19. 18:50

함중(陷中)의 서식(書式)에 근거하면 마땅히 ‘명고모(明故某)’라고 써야 할 터인데, 지금 사람들은 혹 ‘유명조선 고모(有明朝鮮故某)’라고 쓰는 경우가 있으니, 어떻게 써야 합니까?”

”함중에 쓰는 것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명조선 고모라고 쓰는 것은 중국과 구별하기 위한 것인바, 혹은 ‘조선’의 아래에 국(國) 자가 있소.” 라는 내용은....


결국 중국에서 "有明朝鮮"이라 했다는 말이다.

조선 帝(天子)가 있는 곳을 중국이라 했다면 중국조선과 다르게 일반백성은 바로 앞에 유(有)를 붙이거나 맨 뒤에 나라 국(國)을 붙인다는 내용으로 이해된다. 즉 "有明朝鮮" 이나 "明朝鮮國" 또는 "有明朝鮮國"으로 할 수 있어도 "明朝鮮"은 중국에서만 쓴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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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元高麗國, 有明朝鮮國 은 있는데 有靑朝鮮國은 없을까?

격물 (2008-11-17 18:34:19) 


고려조선조에 이름을 남긴 명사와 권력자들의 무덤에 새긴 묘비명입니다, 지금도 그대로 있는지 궁금합니다. 묘비명의 내용이 너무 길어서 대부분 자르고 앞에 나오는 시작부분위주로 편집했습니다. 일부묘비명은 발췌해서 올립니다, (자료: 한국고전번역원)


고려는 송/원과 운명을 같이했고, 조선은 명/청과 운명을 같이했습니다.


유명조선과 유원고려 너무나 호기심을 자극해서 정리를 했습니다,

대명조선이 있고 대원 고려가 있습니다.  어찌된 것인지요?

황원고려가 있습니다. 유청조선, 대청조선, 황청조선은 없습니다.


유명조선을 설명하는 글에서 中國과 구분하기 위해서 유명조선 또는 유명조선국이라 썼다 합니다.

여기서 중국은 물론 명/청/송/원이 아니고 일반적인 중조정도의 의미로 보입니다. 그 당시에는 없던 국명이니까요….그러면 그냥 조선, 고려라 쓰면 중국(중조)라는 해석도 가능한 것 같습니다.

묘비명에는 고려국, 조선국으로 시작하는 것이 많고  국명 없이 벼슬이름으로 시작하는 묘비도 많습니다.


여헌선생문집 문목에 답함[答問目] / 신진보(申晉甫)에게 답함


“묻습니다. ..중략...

함중(陷中)의 서식(書式)을 《의절(儀節)》에 근거하면 마땅히 ‘명고모(明故某)’라고 써야 할 터인데, 지금 사람들은 혹 ‘유명조선 고모(有明朝鮮故某)’라고 쓰는 경우가 있으니, 어떻게 써야 합니까?”

”함중에 쓰는 것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명조선 고모 라고 쓰는 것은 중국과 구별하기 위한 것인바, 혹은 ‘조선’의 아래에 국(國) 자가 있소.”

 

(블로그)...그렇다면 중국에서는 유명조선이라 횄다는 말이다.

조선 제(천자)가 거 하는 곳을 중국이라 했다면 중국조선과 다르게 일반백성은 바로 앞에 유(有)를 붙이거나 맨 뒤에 나라 국(國)을 붙인다는 내용으로 이해 된다.

즉 "유명조선" 이나 "명조선국" 또는 "유명조선국"으로 할 수 있어도 "명조선"은 중국에서만 쓴다는 내용이다. 


問。發引時。父母喪。當何先後。而下棺時。亦何先後耶。

葬如先後其期。則先輕後重。常禮也。若同日發引。則似當尊喪在先。下棺亦如之。

陷中書式。據儀節則當書曰明故某。而今人或有書有明朝鮮故某云。當如何書耶。

陷中之題。我國人以有明朝鮮故某書之者。以別於中國也。或於朝鮮下有國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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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보감 제12권 세조조 3(世祖朝三) 8년(계미, 1463)


○ 5월. 처음에 집현전을 없애면서 소장된 책을 예문관으로 옮겨 놓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상이, 세종조에 천신만고 끝에 모은 서적이 산실될 것을 염려하여 양성지에게 명하여 유별로 수집하고 분류해서 가지런히 묶어 간직하게 하였다. 양성지가 일을 끝내고 입시해서는, 말을 더듬어 속에 품은 생각을 상세히 전달하지 못할까봐 소매 속에서 차자를 꺼내어 올렸다. 그 내용에,


"삼가 보건대, 역대의 서적을 명산(名山)에 간직해 두기도 하고 비각(祕閣)에 간직해 두기도 한 것은 유실을 대비하여 영구히 전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전조(前朝)의 숙종(肅宗)이 처음으로 경적을 간직해 두었는데, 그 도서(圖書)의 글이,

하나는 고려십사엽신사세 어장서 대송건중정국원년 대요건통구년(高麗十四葉辛巳歲 御藏書 大宋建中靖國元年 大遼乾統九年)이고

하나는 고려국 어장서(高麗國御藏書)입니다.  

숙종조로부터 663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인장의 글이 어제 것이나 다름이 없어 문헌을 상고할 만하며, 지금 내장(內藏)된 1만여 권의 서적도 대부분 그 당시에 소장되었다가 전해진 것입니다. 그러니 소장한 책의 맨 끝에 찍는 도서는 조선국제육대계미세어장서 본조구년 대명천순칠년(朝鮮國第六代癸未歲御藏書本朝九年 大明天順七年)이라고 진자(眞字)로 쓰고, 책머리의 도서는 조선국 어장서(朝鮮國御藏書)라고 전자(篆字)로 써서 여러 책에 두루 찍어 만세에 밝게 보이게 하거나, 혹은 신라 및 전조 전성기의 예에 따라 별도로 연호(年號)를 세워 표지를 삼게 하소서.  (이하생략)


계곡선생은 조선시대에 똑 같은 통정대부 벼슬을 한 세 사람에게 각기 다른 묘비명으로 시작합니다.


1. 故通政大夫守全羅道觀察使宋公墓碣銘)고 통정대부 수 전라도관찰사 송공 묘갈명/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2. 有明朝鮮國通政大夫承政院左副承旨知製敎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金公墓碣銘 유명조선국 통정대부 승정원좌부승지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김공 묘갈명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3. 通政大夫分承政院承旨贈嘉善大夫吏曹參判梁公墓碣銘 통정대부 분승정원승지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양공 묘갈명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궁금합니다. 중조의 사람과 제후의 사람?


송/원/명은 우리역사와 관계가 깊고 청은 전혀 관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유청조선이든 대청조선이든 그런 묘비명은 없습니다. 어떠한 관계였는지> 청이라는 나라가 없었던 것은 아닌지? 아니면 명은 조선의 중조였는데 그 중조를 청이 괴멸시키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아닌지...그리하여 조선과 청은 불구대천지 원수가 되고…조선은 계속 청을 인정하지 않으려 애를 쓰고…

명은 무엇일까? 이성계가 선위를 하고 함흥의 북궐 즉 함흥행궁( 이 함흥은 한반도가 아닌 대륙서북에 있다)  으로 돌아가는데 이때 이성계를 돌아오게 하려고 무수히 많은 사자를 보내는데 무려 10여명이나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함흥차사이다. (- 함흥차사도 수상합니다. 이런 말은 근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합니다. 왜냐하면 1800년대 중반에 딱 한번 나옵니다.)

어쩌면 이성계는 방원에게 대권을 물려주고(분양하고) 북궐에서 왕조를 계속 이어가지 않았을까? 왕비와 사이 나쁜 방원을 피해서 북궐에서 새왕비의 자식에게 중원(고향)을 이양하기로 방원과 묵계를 하고 방원은 북궐에 있는 아버지 왕조를 깍듯이 모신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성립이 된다. (왕조실록에 없는 이야기 입니다)

조선의 문집에서 조선인을 漢人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많다. 그리고 조선에서 명나라사람을 한인이라 한다. 明人이라하지 않는다. 


胡人은 우리와 같은 북방의 아시안이 아닌 색목의 덩치 큰 서양인으로 표현이 됩니다. 이자료를 올리려했는데 어디다 저장했는지 찾지를 못해 그냥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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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좀 깁니다. 유원고려 대원고려 황원고려, 고려국, 유명조선, 대명조선, 조선국등에 관한 묘비명입니다. 물론 모두 고려조선 사람에 대한 묘비명입니다.


1. 유원고려국


有元高麗國淸平山文殊寺施藏經碑 유원 고려국 청평산 문수사 시장경비/ 동문선 /이제현(李齊賢)


태정(泰定) 4년 3월 경자일에, 첨의정승(僉議政丞) 신(臣) 흡(恰) 등이 중알자(中謁者)로 하여금 임금께 복명하기를, “원 나라 천자의 근신(近臣) 사도 강탑리(司徒剛塔里)와 중정원사 홀독 첩목아(中政院使忽篤帖木兒)가 천자의 황후로부터 명령을 받고 사람을 보내와서, ‘중 성징(性澄)과 시인(寺人 후궁의 사무를 맡은 환관) 윤견(允堅) 등이 진공(進供)한 불서(佛書) 한 벌을 청평산(淸平山) 문수사(文殊寺)에 바치고, 꿰미 돈 만금(萬金)을 시주하여 그 이식(利息)을 받아 쓰게 하되, 황태자의 황자(皇子)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하고, 각각 그들의 생신날을 택하여 중들에게 음식 대접을 하며, 경(經)을 열독(閱讀)하게 하는 것을 매년의 행사로 하라’ 하시고, 또 말하기를, ‘비석을 세워서 영구히 보이라’ 하였습니다. 신 등이 가만히 생각하오니, 불법이 중국에 들어와 시대에 따라 성하고 쇠하여 가면서 천여 년이 되었습니다


有元高麗國曹溪宗慈氏山 瑩源寺寶鑑國師碑銘 유원고려국 조계종 자씨산 영원사 보감국사비명/동문선 / 이제현(李齊賢)

근세에 대비구(大比丘)로써 불조(佛祖 석가모니)의 도를 밝혀 뒤에 오는 배우는 자들에게 길을 열어 준 이는 보각국사(普覺國師)이다. 그의 무리가 대체로 수백 수천이나 되지만, 능히 굳은 것을 뚫고 깊은 것을 움켜서 묘계(妙契)가 줄탁(啐啄 사제간(師弟間)에 의견이 서로 부합함)한 자는 오직 보감국사(寶鑑國師) 한 사람일 뿐이다.


有元高麗國輸誠守義協贊輔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彥陽府院君贈諡貞烈公金公墓誌銘 유원 고려국 수성수의 협찬보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언양부원군 증시정렬공 김공 묘지명/동문선 / 이제현(李齊賢)

공의 성은 김씨이고 휘는 윤(倫)이요, 자는 무기(無己)이며, 호는 죽헌(竹軒)이다. 또 호를 당촌(戇村)이라 하였으며, 계림(鷄林) 언양(彥陽)이 본향이다.


有元故武德將軍西京等處水手軍萬戶兼提調征東行中書省都鎭撫司事高麗宰相元公墓誌 유원 고 무덕장군 서경등처 수수군만호 겸제조정동행중서성도진무사사 고려재상 원공 묘지 /동문선 / 최해(崔瀣)


有元高麗國誠勤翊贊勁節功臣重大匡星山君贈諡文烈公李公墓誌銘 유원 고려국 성근익찬 경절공신 중대광 성산군 증시 문열공 이공 묘지명 /동문선 / 이제현(李齊賢)


有元高麗國匡靖大夫都僉議參理上護君春軒先生崔良敬公墓誌銘 유원 고려국 광정대부 도첨의 참리 상호군 춘헌선생 최양경공 묘지명 /동문선 / 이제현(李齊賢)

춘헌(春軒) 최양경공(崔良敬公)의 휘는 문도(文度)이며 자는 희민(羲民)이다.


有元高麗國忠勤節義贊化功臣重大匡瑞寧君諡文僖柳公墓誌銘 유원 고려국 충근절의 찬화공신 중대광 서령군 시문희 유공 묘지명 /동문선 / 이색(李穡)

현릉(玄陵) 공신에 문희공(文僖公)이 있으니 성은 유(柳)씨요, 이름은 숙(淑)이며, 자는 순부(純夫)이다.


有元高麗國 文殊寺施藏經碑) 유원 고려국 청평산(淸平山) 문수사 시장경비/ 익재난고

신등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 시대에 따라 성했다 쇠했다 한 지 또한 1천 년이 넘는데, 황조(皇朝)에서 '불도(佛道)가 무위(無爲)로 종지(宗旨)를 삼는 것은 성인(聖人)들의 도리와 합치되고, 광도(廣度 널리 구제하는 것)하기로 마음먹음은 인정(仁政)에 도움이 되는 일이다.' 하여, 존숭하고 신봉하기를 매우 돈독히 합니다.


有元故武德將軍西京等處水手軍萬戶兼提調征東行中書省都鎭撫司事高麗宰相元公墓誌 유원 고 무덕장군 서경등처 수수군만호 겸제조정동행중서성도진무사사 고려재상 원공 묘지(/동문선 제123권/ 최해(崔瀣)


공의 휘는 충(忠)이요 자는 정보(正甫)이니, 선대는 신라 북원이 본향이다. 11대 조부 극유(克猷)가 본국(本國 고려조)에 처음으로 벼슬하여 정의대부(正議大夫)가 되었으며, 조부 휘 부(傅)는 충렬왕조에 정승하여 첨의 중찬(僉議中贊)이 되었는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아버지 휘 관(瓘)은 작고한 첨의 찬성사(僉議贊成事)이며, 대부인 김씨는 낙랑군(樂浪郡)을 봉하였는데, 작고한 승지 휘 신(信)의 딸이다.


有元資善大夫大常禮儀院使高麗國推忠守義同德贊化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益山府院君諡文忠李公墓誌銘 유원 자선대부 태상 예의원사 고려국 추충수의 동덕찬화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익산부원군 시문충 이공 묘지명 /동문선 / 이색(李穡)

익주(益州 익산의 옛이름)의 이씨는 명성이 난 지 오래였다.


有元奉議大夫太常禮儀院判官驍騎尉大興縣子高麗純誠輔翊贊化功臣三重大匡右文館大提學領藝 文館事順天君蔡公墓誌銘 유원 봉의대부 태상예의원 판관 요기위 대흥현자 고려 순성보익 찬화공신 삼중대광 우문관 대제학 영예문관사 순천군 채공 묘지명 / 동문선 / 이곡(李穀)

공의 휘는 홍철(洪哲)이요, 자는 무민(無悶)이니 교주도 평강현(交州道平康縣)이 본향이다


2. 대원고려국


大元高麗國廣州神福禪寺重興記 대원 고려국 광주 신복선사 중흥 기 / 동문선 / 이곡(李穀)


大元制封遼陽縣君高麗三韓國大夫人李氏 대원 제봉 요양현군 고려삼한국 대부인/익재난고 /

부인(大夫人)의 성(姓)은 이씨(李氏)이니 흥례부(興禮府) 사람이다 정읍부군(井邑府君)이 졸한 뒤 부인은 과부로 40년을 수절하였으며, 명민(明敏)하고 자엄(慈嚴)해서 두 아들에게 과거 공부를 힘쓰게 하여 입신(立身)하게 하였다. 배는 벼슬이 사의서 승(司儀署丞)이고, 곡은 국시 수재과(國試秀才科)에 급제하였고 또 원 나라의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여 지금 봉의대부(奉議大夫)로서 정동행성(征東行省)의 낭중으로 있다가 또 정승이 되었고, 한산군(韓山君)에 봉작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원의 조정에서 정읍부군을 비서감 승(秘書監丞)으로 추증하고 대부인은 현군(縣君)으로 봉하였는데, 나라에서는 삼한국 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봉하였으니, 당세의 영화로 여겼다.


大元故壯仕郞遼陽路蓋州判官高麗國三重大匡興寧府院君領藝文館事諡文貞安公墓誌銘 대원 고 장사랑 요양로 개주판관 고려국 삼중대광 흥녕부원군 영예문관사 시 문정 안공 묘지명/ 동문선 / 이곡(李穀)


大元故將仕郞遼陽路蓋州判官高麗國正順大夫檢校成均館大司成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崔君墓誌대원 고장사랑 요양로 개주판관 고려국 정순대부 검교 성균관 대사성 예문관 제학 동지춘추관사 최군 묘지/ 동문선 / 이곡(李穀)


황조(皇朝) 진사로 동방에 유명한 자가 있었으니, 이르기를, “계림(鷄林) 최수옹(崔壽翁)”이다. 처음에 개주판관(蓋州判官)에 제수돠었는데 지역이 궁벽하고 직무가 골몰하여 거한 지 5개월 만에 병으로 사직하고 본국에 돌아와서 다시 원 나라에 벼슬하지 않았다. 비록 본국에서 벼슬하였으나 재주가 기이하고 뜻이 높아 당시에 용납되지 못하고, 나이 54세로 지원(至元) 6년 경진(후지원임. 충혜왕 복위 원년) 6월 10일 임인에 병으로 세상을 마치니, 장사는 아직 기일이 있다.


大元制封遼陽縣君高麗三韓國大夫人李氏墓誌銘)대원 제봉 요양현군 고려 삼한국대부인 이씨 묘지명/ 동문선 / 이제현(李齊賢)


. 15세가 지나 한산 이씨 정읍 감무(韓山李氏井邑監務) 휘 자성(自成)에게 시집가니 두 집이 원래부터 다른 성씨이요, 같은 이씨(李氏)는 아니다. 3남 1녀를 낳았다. 맏아들은 배(培)요, 둘째 아들은 일찍 죽었으며, 셋째 아들은 곡(穀)이다. 딸은 장씨(張氏)에게 출가했는데 부인보다 먼저 죽었다


3. 황원고려국


皇元高麗故通憲大夫知密直司事右常侍上護軍崔公墓誌銘)황원고려 고 통헌대부 지밀직사사 우상시 상호군 최공 묘지명 /동문선 / 최해(崔瀣)


공의 휘는 운(雲)이요, 자는 몽수(蒙叟)인데, 그 선대는 동주(東州) 창원현(昌原縣)이 본향이다.


4. 고려국


高麗故輸誠秉義協贊功臣重大匡都僉議贊成事商議會議都監事進賢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贈諡文溫公閔公墓誌銘) /병서幷序 고려 고 수성병의협찬공신 중대광 도첨의찬성사 상의회의도감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 증 시문온공 민공 묘지명/  동문선 / 이달충(李達衷)


공의 이름은 사평(思平)이요, 자는 탄부(坦夫)이며 호는 급암(及菴)이니, 충주(忠州) 여흥(驪興)이 본향이다.


高麗國贈純誠勁節同德輔祚翊贊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門下侍中判典理司事完山府院君朔方道萬戶兼兵馬使榮祿大夫判將作監事李公神道碑銘 고려국 증 순성 경절 동덕 보조 익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문하시중 판전리사사 완산부원군 삭방도만호 겸병마사 영록대부판장작감사이공신도 비명 / 동문선 제119권/ 이색(李穡)


전주(全州) 이씨(李氏)는 대성(大姓)이다. 신라의 아간(阿干) 휘 광희(光禧)가 사도삼중대광 입전(司徒三重大匡立全)을 낳고,


高麗國奉常大夫典理摠郞寶文閣直提學知製敎李君墓表 고려국 봉상대부 전리총랑 보문각 직제학 지제교 이군 묘표(/동문선 / 이곡(李穀)


高麗國正順大夫密直司右副代言宗簿令兼監察執義知版圖司事柳君墓誌銘 고려국 정순대부 밀직사 우부대언 종부령 겸감찰집의 지판도사사 유군 묘지명(/동문선 / 이곡(李穀)


高麗國江陵府艶陽禪寺重興記 고려국 강릉부 염양선사 중흥 기 /동문선 / 이곡(李穀)


“전날 태정(泰定) 갑자년에, 내가 우리 어머니를 강릉성 북쪽에 장사지냈는데, 장사를 끝낸 뒤에 절을 창건하여 명복을 빌고자 하였더니,


高麗國統合三韓壁上開國功臣上柱國三重大匡門下侍中平章事趙公墓碑銘 고려국 통합삼한벽상개국공신 상주국 삼중대광 문하시중 평장사 조공 묘비명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


고려조의 통합삼한벽상개국공신 상주국 삼중대광 문하시중 평장사 조공(趙公)이야말로 풍양 조씨(豐壤趙氏)의 비조(鼻祖)가 되는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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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신을 보내어 이자겸을 亮節翼命功臣領門下尙書都省事判吏兵部西京留守事朝鮮國公食邑八千戶食實封二千戶 (양절익명공신 영문하상서도성사 판이병부서경유수사조선국공 식읍 8천호 식실봉 2천호) 에 봉하고, 부(府)의 칭호를 숭덕(崇德), 궁(宮)의 칭호를 의친(懿親)이라 하며, 그의 아내 최씨는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에 봉하고, 아들 이지미(李之美)를 비서감 추밀원부사에 임명하고, 이공의(李公儀)를 상서형부시랑에, 이지언(李之彦)을 상서 공부낭중 겸 어사잡단에, 이지보(李之甫)를 상서호부낭중 지다방사에, 이지윤(李之允)을 전중내급사에, 이지원(李之元)을 합문지후에 임명하고, 중이 된 아들 의장(義莊)을 수좌(首座)에 임명하였다. /고려사절요 인종 공효대왕 1(仁宗恭孝大王一) 갑진 2년(1124), 송 선화 6년ㆍ 요 보대 4년ㆍ 금 천회 2년


-- 이자겸이  고려때 난을 일으킨자인데 조선국공에 봉하고 그 아내를 진한국대부인에 봉합니다.

때는 고려인데 조선이란 말을 아주 상징적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한국은 무슨의미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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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유명조선국


有明朝鮮國嘉善大夫兵曹參判李公墓誌銘 유명조선국 가선대부 병조참판 이공 묘지명(/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有明朝鮮國贈司憲府持平鄭公墓碣銘 유명조선국 증 사헌부지평 정공 묘갈명/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有明朝鮮國通政大夫承政院左副承旨知製敎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金公墓碣銘 유명조선국 통정대부 승정원좌부승지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김공 묘갈명/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有明朝鮮國司憲府監察贈嘉善大夫禮曹參判宋公墓碣銘)유명조선국 사헌부감찰 증 가선대부 예조참판 송공 묘갈명/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有明朝鮮國贈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完興府院君行通政大夫永興大都護府使崔公神道碑銘)유명조선국 증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완흥부원군 행 통정대부 영흥대도호부사 최공 신도비명/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有明朝鮮國贈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事完寧府院君行嘉善大夫濟州牧使濟州鎭兵馬水軍節制使李公神道碑銘)유명조선국 증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사 완녕부원군 행 가선대부 제주목사 제주진병마수군절제사 이공 신도비명/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有明朝鮮國賜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淸虛堂大師碑銘 유명조선국 사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 청허당대사 비명/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서산(西山) 청허대사(淸虛大師)가 입멸(入滅)하고 나서 28년이 지나 그 법사(法嗣)인 보진(葆眞), 언기(彦機), 해안(海眼), 쌍흘(雙仡) 등이 묘향산(妙香山)과 풍악산(楓岳山)에 비석을 세웠는데, 그때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의 호) 이상공(李相公)이 명(銘)을 지어


有明朝鮮國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行通政大夫承政院右承旨知製敎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柳公墓碑銘)유명조선국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행 통정대부 승정원우승지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유공 묘비명/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有明朝鮮國贈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行通政大夫工曹參議知製敎兼招討使高公神道碑銘비문(碑文)은 유명 조선국 증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행 통정대부 공조참의 지제교 겸 초토사 고공 신도비명()이라 하다./ 난중잡록 1(亂中雜錄一) 임진년 상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有明朝鮮國諸道都巡察使正憲大夫知中樞府事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事弘文館提學同知成均館事) 권공(權公 “유명 조선국 제도 도순찰사 정헌대부 지중추부사 증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사 홍문관 제학 동지 성균관사()○ 도원수 권율(權慄)이 병으로 죽었다. 그 뒤에 휘하의 여러 장병들이 행주산성에 비석을 세우고 이름을 〈행주대첩비(幸州大捷碑)〉라 하였는데 그 비문은 다음과 같다.율(慄)이 세상을 뜬 지 이미 한 돌이 되었다 / 난중잡록 4(亂中雜錄四) 기해년 만력 27년, 선조 32년(1599년)


有明朝鮮國桓王定陵神道碑銘 / 유명조선국 환왕 정릉 신도비명 /동문선 /권근(權近)/


임금이 즉위하신 지 2년이 되는 1월 신미일(辛未日)에 신 모(某)에게 명하시기를, “내가 부덕한 몸으로 하늘의 아름다운 명을 받아 일찍이 국가를 창건한 것은 조종(祖宗)의 적덕(積德)을 힘입은 것이다. 이미 삼가 4대에 시호를 추증하여 모두 왕작(王爵)을 올렸으니, 네가 선열(先烈)이신 나의 아버지의 정릉(定陵)의 비명을 지어 길이 후세에 밝게 보이게 하라.”하시었다.


有明朝鮮國承仁順聖神懿王后齊陵神道碑銘 유명조선국 승인 순성 신의왕후 제릉신도비명 /동문선

/ 권근(權近)


옛날부터 제왕이 천명을 받고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후비(后妃)의 현명함에 힘입어서 덕(德)을 같이하고 경사를 길러서 그 서업(緖業)을 길게 하였다. 하(夏) 나라의 우(禹) 임금은 도산(塗山)의 여자가 있어서 계(啓)가 능히 계승하게 되었고, 주(周) 나라에는 태사(太姒 주문왕(周文王)의 비(妃) 무왕(武王)의 어머니)가 있어서 무왕(武王)이 큰 업을 받들 수 있었으니, 하우씨(夏禹氏)와 주 문왕(周文王)의 하늘과 짝할 만한 종사(宗祀)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 거룩하도다.


有明朝鮮國諡號文簡公安公墓碑銘 유명 조선국 시호 문간공 안공 묘비명 /동문선 / 권근(權近)


공의 휘는 종원(宗源)이며, 자는 사청(嗣淸)이고 성(姓)은 안(安)씨니, 관향은 순흥(順興)이다. 고(考)의 휘는 축(軸)이며, 호는 근재선생(謹齋先生)이니, 원(元) 나라의 제과(制科)에 급제하였다. 中皇元制科 고려에 벼슬하여 도첨의 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었다. 졸(卒)하니, 시호를 문정(文貞)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관동 존무사(關東存撫使)로 있을 때 지은 《와주집(瓦注集)》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有明朝鮮國追贈推忠直節守文秉義輔祚功臣特進輔國崇祿大夫門下右政丞判都評議使司事兵曹事修文殿大學士領藝文春秋館事西原伯諡文簡公行光祿大夫刑部尙書集賢殿學士李公神道碑銘 유명 조선국 추증추충직절 수문병의 보조공신 특진보국숭록대부 문하우정승 판도평의사사사 병조사 수문전대학사 영예문춘추관사 서원백 시 문간공 행광록대부 형부상서 집현전학사 이공 신도비명 /동문선 / 권근(權近)


有明朝鮮國學新廟碑銘 /유명조선 국학신묘 비명 / 동문선 / 변계량(卞季良)


영락(永樂) 7년 기축년 가을 9월에, 국왕 전하(國王殿下)께서 신 계량에게 명하여 이렇게 말하셨다. “우리 선고(先考) 태조께서 하늘의 밝은 명을 받아 일찍이 국가를 창건하고 한양에 수도를 정한 다음 급히 문묘(文廟)와 학궁(學宮)을 세운 것은 선성(先聖)을 존숭하고 문교(文敎)를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내가 큰 왕업을 받들어 이에 이루어진 법을 좇아서 묘궁(廟宮)을 중수하게 하였는데, 이미 준공하였다. 학관(學官) 최함(崔諴) 등이 돌에 글로 써서 장래에


有明朝鮮國大匡輔國誠寧大君卞韓昭頃公神道碑銘 유명조선국 대광보국 성녕대군 변한소경공 신도비명 / 동문선 / 변계량(卞季良)


영락(永樂) 16년 무술년 봄 2월 5일에, 대광보국(大匡輔國) 성녕대군(誠寧大君)이 14세의 어린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측근 신하가 왕지(王旨)를 전하여 말하기를, “성녕대군 종(種)이 죽었다.


有明朝鮮國贈忠勤翊戴愼德守義協贊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義政府事晉陽府院君河公神道碑銘)유명조선국 증 충근 익대 신덕 수의 협찬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진양부원군 하공 신도비명 /동문선 제121권

/ 변계량(卞季良)


공(公)의 성은 하씨(河氏)이고, 휘는 윤린(允潾)이며, 자는 소개(所開)이니, 진양(晉陽)의 대족


有明朝鮮國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崇祿大夫密山君諡恭孝朴公神道碑銘 유명조선국 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 숭록대부 밀산군 시 공효 박공신도비명 /동문선 / 김수령(金壽寧)


밀산군(密山君) 박공(朴公) 중손(仲孫) 자(字) 경윤(慶胤)이 졸하여 장사를 지내게 되었다. 상고하여 보건대, 박씨(朴氏)는 신라에서 시작되었다. 신인(神人)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신라의 시조가 되었음은 역사에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그의 후손들이 삼한(三韓)에 퍼져 있으며 대대로 명망이 높은 이가 있었으나 밀양에 사는 자들이 가장 현저하여서 명망 있는 가문이 되었다.


有明朝鮮國輸忠衛社協策靖難同德佐翼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監春秋館事世子傅吉昌府院君諡翼平公權公碑銘)유명조선국 수충위사협책정난동덕좌익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감춘추관사 세자부 길창부원군 시 익평공 권공비명 /동문선 / 신숙주(申叔舟)


나의 벗 권공(權公)은 휘가 람(擥)이며, 자(字)는 정경(正卿)이니, 그의 선조는 본래 김씨(金氏)였다. 한(漢) 나라 명제(明帝) 영평(永平) 8년 을축에 알지(閼智)가 시림(始林)에서 탄생하여 김씨라고 일컬은 것은 일이 지극히 기이하다. 그의 후예가 박씨(朴氏)ㆍ석씨(昔氏)와 더불어 교대로 신라의 임금이 되었다. 휘가 행(幸)이라는 사람에 이르러서 안동군(安東郡)을 지키다가 고려 태조에게 인정을 받아 비로소 권(權)이라고 사성(賜姓)하고 안동부로써 식읍(食邑)을 삼았으며, 벼슬은 삼한벽상삼중대광태사(三韓壁上三重大匡太師)에 이르렀다.


有明朝鮮國純忠同德輔祚贊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驪興府院君修文殿大提學諡文度閔公墓誌銘 유명조선국 순충동덕 보조찬화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여흥부원군 수문전대제학 시문도민공묘지명 /동문선

/ 변계량(卞季良)


공의 성은 민씨(閔氏)요, 휘는 제(霽)요, 자는 중회(仲晦)요, 호는 어은(漁隱)이니, 여흥(驪興)의 대족(大族)이다. 증조 휘 종유(宗儒)는 고려 의왕(毅王)을 보좌하여 도첨의시랑 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로 시호는 충순공(忠順公)이다


有明朝鮮國特進輔國崇祿大夫韓山伯牧隱先生李文靖公墓銘)유명 조선국 특진보국숭록대부 한산백 목은 선생 이문정공 묘명/ 동문선 / 하륜(河崙)


중국에서 진사에 오르고 이학(理學)으로써 동방을 처음 밝히고 벼슬이 왕국상상(王國上相)에 이른 사람은 한산(韓山) 목은 선생 이문정공(李文靖公)이 있을 뿐이다. 지정(至正) 을사년 가을에 공이 선산(星山) 초은 선생(樵隱先生) 이문충공(李文忠公)과 더불어 예위(禮圍)를 맡았을 때, 하륜이 부족한 재주로 다행히 시험에 합격하여 제자의 예를 잡은 지가 30여년이었다. 공이 졸했으나, 직무로 인하여 나아가 영전에 울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태까지 슬픔이 잊히지 않더니, 이제 그 막내아들 종선(種善)이 양촌 권근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와서 묘명(墓銘)을 청하였다.


有明朝鮮國奮忠仗義同德定社佐命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晉山府院君修文殿大提學領經筵春秋館書雲觀事世子師諡文忠河公墓誌銘유명조선국 분충장의 동덕정사 좌명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진산부원군 수문전대제학 영경연 춘추관서 운관사 세자사 시문충 하공 묘지명 /동문선 / 윤회(尹淮)


하씨(河氏)의 조상은 진주(晉州)에서 나와 한 고을의 명망 있는 집안이 되었다. 좌사낭중(左司郞中) 휘 공진(拱辰)으로부터 고려에 벼슬하여 현왕조(顯王朝)에 공을 세워 오랑캐를 평화롭게 하고 적을 물리쳐 일대의 명신이 되었다. 그 뒤에 탁회(卓回)라는 분은 고왕조(高王朝)에 벼슬하여 사문박사(四門博士)가 되었고, 박사로부터 사대(四代)가 잇달아 과거에 올라 대대로 명망 있는 사람이 있어 경사를 심고 선행을 쌓아서 공에 이르러 가문이 더욱 번창하였다.


有明朝鮮國推忠翊戴開國功臣輔國崇祿大夫興寧府院君諡良度安公墓誌銘)유명조선국 추충익대 개국공신 보국숭록대부 흥녕부원군 시양도 안공 묘지명 /동문선  / 윤회(尹淮)


안씨(安氏)의 조상은 (順興)의 명망있는 가문이었다. 급제(及第) 휘 석(碩)이 학문에 힘을 써서 집안을 일으키더니, 얼마 안 되어 깊이 숨어 자취를 감추어 시골의 착한 선비가 되었다.

그가 문정공(文貞公) 휘 축(軸)을 낳았는데 원조(元朝)의 제과(制科)에 합격되어 고려를 도와 벼슬이 첨의찬성사 흥녕부원군 영예문관사(僉議贊成事興寧府院君領藝文館事)에 이르렀고, 문장과 정사로 일대의 명경(明卿)이 되었다.


有明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領集賢殿經筵春秋館事 世子傅贈諡文敬許公墓誌銘 유명조선국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영집현전경연춘추관사 세자부 증시 문경 허공 묘지명 /동문선 / 남수문(南秀文)


정통(正統) 4년 기미 겨울 12월 임인일에 의정부 좌의정 허공(許公)이 병으로 사제(私第)에서 졸하니, 나이 71세였다. 태상(太常)에서 문경(文敬)이라 시호를 내렸고


有明朝鮮國崇祿大夫判中樞院事修文殿大提學兼判戶曹事仍令致仕諡靖肅公安公墓誌銘 유명조선국 숭록대부 판중추원사 수문전대제학 겸판호조사 잉령치사 시정숙공 안공 묘지명 /동문선 / 남수문(南秀文)


판중추(判中樞) 잉령치사(仍令致仕) 시정숙(諡靖肅) 안공(安公)을 장사한 지 다음해 여름에 관찰사로 있는 둘째 아들이 공의 행실을 써서 무덤의 명(銘)을 구하였다. 내가 욕되이 계가(契家 집안끼리 사이가 돈독함을 말함)가 되기에 의리상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삼가 상고하건대, 공의 휘는 순(純)이요, 자는 현지(顯之)니, 본관은 순흥(順興)이었다.


이 묘는 유명 조선국(有名朝鮮國) 증(贈)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 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 반남부원군(潘南府院君)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박공(朴公)과 정경부인(貞敬夫人) 임씨(林氏)를 합장한 묘이다.

공의 휘는 응복(應福), 자는 경중(慶仲)이다. 박씨는 옛 신라의 국성(國姓)으로 동방의 대족(大族)이 되었다. 고려 말기에 상충(尙衷)이라는 분이 있어 곧은 절조로 명성이 드러나서 반남 선생(潘南先生)이라 일컬어졌고,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휘 은(訔)이 태종대왕을 섬겨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는데 이분이 공의 7대조이다./ 상촌선생집 제25권 / 대사헌 박공과 부인 임씨의 합장 묘지명(大司憲朴公夫人林氏合葬墓誌銘)


有明朝鮮) 유명 조선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윤공 집 성백(尹公集成伯)이 죽은 뒤에 널이 없고 그 사당만이 서울의 서쪽 반송방(盤松坊)에 있는데, 그의 아들 이선(以宣)ㆍ이징(以徵)과 조카인 이건(以健)ㆍ이성(以性)이 돌을 깎아 비석을 세우고 명(銘)을 청하여 새기려 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송자대전(宋子大全) 제171권  교리(校理) 증(贈) 부제학(副提學) 윤공(尹公) 묘비명(廟碑銘)


‘嗚呼有明朝鮮國昌寧成悌元妻宋氏之墓 아, 유명 조선국 창녕 성제원의 아내 송씨의 묘[]’라 하였다. 그런데 동주의 자손이 공주(公州)에 살면서 제사를 지내지 않기 때문에 우리 종가(宗家)에서 참봉 부군을 제사 지낼 때는 반드시 주과(酒果)를 올린다. / 송자대전(宋子大全)   은진 송씨(恩津宋氏) 가전(家傳)


有明朝鮮國右贊成兵曹判書兼判義禁府事琴軒李先生墓誌銘)유명 조선국 우찬성 병조 판서 겸 판의금부사 금헌 이 선생 묘지명(/ 순암선생문집


공의 휘는 장곤(長坤), 자는 희강(希剛), 호는 금헌(琴軒), 관향은 벽진(碧珍)이니 ‘기묘팔현(己卯八賢)’의 한 사람이다. 라고 불렸다.


有明朝鮮 國學新廟)유명 조선국학 신묘(비명 /춘정집


영락(永樂) 7년 기축년(1409, 태종 9) 가을 9월에 국왕 전하께서 신 계량(季良)에게 명하시기를, “나의 선고(先考) 태조께서 하늘의 밝은 명을 받아 비로소 국가를 창건하고 한양에 수도를 정하여 급히 문묘(文廟)와 학궁(學宮)을 건립한 것은 선성(先聖)을 높이고 문교(文敎)를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내가 왕업을 계승하여 이미 이루어진 법을 따라서 문묘와 학궁을 중수하게 했는데 이미 준공되었다. 학관(學官) 최함(崔諴) 등이 사실을 비석에 새겨 장래에 보이기를 청했으니, 그대가 기록하도록 하라.” 하셨다. 신 계량은 명을 받고 황공하여 물러나와 그 전말을 살펴보니 다음과 같았다.


有明朝鮮國 유명 조선국 온인공용순효 대왕(溫仁恭勇順孝大王) 후릉지(厚陵誌)/ 춘정집


영락(永樂) 17년 기해년(1419, 세종 1) 가을 9월 26일 무진에 온인공용순효 대왕께서 승하하시니, 우리 성덕신공(聖德神功) 상왕 전하와 우리 주상 전하가 슬퍼하고 사모함이 절실하고 지극하여 상례(喪禮)를 행하는 데 예를 다했다. 주상 전하는 많은 신하를 거느리고 존호를 받들어 올리고, 이듬해 경자년(1420, 세종 2) 1월 3일 임인에 예로써 송경(松京) 해풍군(海豐郡)의 정안왕후(定安王后)를 모신 후릉(厚陵)에 합장하니,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다.

대왕은 우리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의 둘째 아드님으로서 타고난 바탕이 온화하고 인자하며 공손하고 근신하며 용맹과 지략이 남달리 뛰어났다. 고려에 벼슬하여 여러 차례 벼슬이 올라 장상(將相)에 이르렀다. 항상 태조를 따라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아, 이곳은 유명조선국(有名朝鮮國) 고(故)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심군 광세(沈君光世) 덕현(德顯)이 묻혀 있는 곳이다. /택당선생집(澤堂先生集) / 심 사인의 묘표[沈舍人墓表]


6. 대명조선국


송자대전(宋子大全) 《삼학사전(三學士傳)》


하고는 곧 옷을 벗어 땅에 던지고 벌거벗은 채로 말하기를,

“듣건대, 너의 나라는 형살(刑殺)할 때에 반드시 마디마디 저며서 죽인다고 하던데 왜 빨리 이 형벌을 시행하지 않느냐?”

하였다. 그러고는 공이 붓을 찾아 종이에다 쓰기를,

“대명 조선국(大明朝鮮國) 유신(縲臣, 옥(獄)에 갇힌 신하) 홍익한(洪翼漢)은 척화(斥和)한 사실의 내용을 분명하게 진술할 수 있으나, 언어가 서로 익숙하지 못하니 문자(文字)로 써서 고(告)하겠다. 대저 사해(四海)의 안이 모두 형제가 될 수는 있으나, 천하에 두 아비를 가진 자식은 없는 것이다. 조선(朝鮮)은 본디 예의(禮義)를 숭상하였고, 간신(諫臣)은 오직 직절(直截)을 풍도(風度)로 삼기 때문에 지난해 봄에 마침 언책(言責)의 직임을 받고 나서, 너의 나라가 장차 맹약(盟約)을 어기고 칭제(稱帝)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였다


大明朝鮮國大圓覺寺碑銘 대명 조선국 대원각사 비명 /동문선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주상전하께서 즉위하신지 10년인 갑신년에 공이 이뤄져서 정치는 안정되고, 예는 질서를 갖추고 악(樂)은 화평하여 국가가 한가하고 백성과 만물이 성하고 평안하니, 주상은 드디어 지도(至道)에 정신이 엉기고, 현교(玄敎)에 묵묵히 염원하여 억조의 창생과 더불어 함께 덕의 본을 세우고, 같이 수역(壽域)에 오르기를 생각하여, 여래(如來)가 일대에 설법한 삼장(三藏) 12부(部) 중에 오직 대원각(大圓覺)이 진돈교(眞頓敎)의 진전(眞詮)이므로, 정치하는 여가에 친히 구결(口訣)을 정하여 한(漢)ㆍ언(諺)을 다 붙여서 장차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대승(大乘)의 도를 들을 수 있게 하였다.


資憲大夫戶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莩摠管兪公神道碑銘)자헌대부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유공 신도비명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고(故) 판서 유공(兪公)이 중종(中宗)ㆍ인종(仁宗)ㆍ명종(明宗)ㆍ선조(宣祖) 등 4조(朝)를 차례로 섬기다가 융경(隆慶) 경오년(1570, 선조 3)에 죽었는데, 공의 휘(諱)는 강(絳)이요, 자(字)는 강지(絳之)이다.


朝鮮故黃胡安公神道碑銘 조선 고 황호안공 신도 비명/ 속동문선 / 김종직(金宗直)


판중추부사(故判中樞府事) 호안공(胡安公)은 바로 그 사람이다.

공의 휘는 치신(致身)이요 자는 맹충(孟忠)이니, 세계(世系)는 남원부(南原府)장수현(長水縣)에서 나왔다.


高靈府院君申叔舟文忠公墓碑銘 고령부원군 신숙주 문충공 묘비명 /속동문선 / 이승소(李承召)


그윽이 보건대 세상이 쇠해서 하늘이 장차 일으키려면 반드시 성스러운 임금과 어진 신하를 내서 함께 한 세상을 바로잡아 거룩한 정치의 기반에 오르게 한다. 그러므로 은(殷) 나라가 쇠해서는 때마침 부열(傅說) 같은 이가 나와서 고종(高宗)을 도와 중흥(中興)의 업을 이룩하였고, 주(周) 나라가 쇠해서는 방숙(方叔) 같은 이가 있어 선왕(宣王)을 도와 옛 땅을 회복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상고해 보면 부열은 보상(輔相)의 업은 있었으나 무공(武功)은 드날리지 못했고 방숙은 정벌의 공은 있었지만 상업(相業)은 나타내지 못했으니, 어찌 우리 문충공처럼 천부(天賦)의 오롯한 재주로 운수를 응해 나서, 성주(聖主)를 보좌하여 문모(文謨)와 무략(武略)으로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정승이 되어 넘어지는 나라를 붙잡아 태산처럼 편안하게 한 것만 같겠는가. 우리 동방에 나라가 생긴 이래로 인신(人臣)으로서 공덕이 장한 이는 대개 이 한 분일 것이다. [우리역사의 비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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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의 유명(有明)에 대한 소고(小考)

 

                                                      은신군(恩信君) 묘비


산야(山野)에 무수히 존재하는 석비(石碑)에는 그 비석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글귀가 새겨져 있기 마련인데,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긴 인물인 경우에는 대개 직함(職銜)이 이름과 함께 나란히 새겨져 있다. 한문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이었으므로, 대부분 한자로 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비석의 인물이 조선시대 사람인 경우에는 직함의 서두에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이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다. 신라 시대의 인물이면 '유당신라국(有唐新羅國)', 고려 시대 인물이면 '유원고려국(有元高麗國)'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이런 식의 표기는 고위 관직을 지낸 사람의 신도비(神道碑)나 묘갈(墓碣)인 경우에 특히 많은데, 이 '유명(有明)', '유당(有唐)' 등의 단어와 관련하여 풀이가 제각각이다.


어떤 사람은 '명나라에 속한 조선국'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명나라의 조선국'이라고도 한다. 또 혹자는 '명나라 시대의 조선국'이라고도 하는데, 과연 어떤 해석이 적절한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한자 '유(有)' 자(字)의 뜻에 착안하여 '명나라의 속국(屬國)인 조선'이라는 식으로 설명한다. '명나라에 있는 조선국'이라는 해석으로, 사대주의(事大主義)의 한 단면이라는 것이다. 국사편찬위(國史編纂委)의 문답 게시판 답변은 '유(有)는 위대하다, 크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대명(大明)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명나라를 높이고자 한 표현이지, 조선이 명의 속국임을 부각하기 위해 쓴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전문 서적이나 고문헌 국역본에서는 그와 같은 식으로 '유명(有明)'이나 '유당(有唐)'을 한글로 풀어서 쓴 사례를 찾기 어렵다. 그렇게 풀이할 필요성이 적어서일까, 아니면 그런 식으로 풀이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때문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 연원을 살펴보던 과정에, 유명(有明)의 '유(有)'가 발어사(發語辭)에 불과하다는 내용을 접할 수 있었다. 유 자는 명사 앞에 붙는 접두사의 하나로서, 옛날에는 여러 단어에 사용되었으나 점차 유주(有周), 유당(有唐), 유송(有宋), 유명(有明)과 같이 국명(國名) 앞에만 붙는 발어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발어사는 문장을 시작하기 위해 사용하는 어조사의 하나로, 아무런 뜻이 없다.


그냥 '명조선국(明朝鮮國)'이라고 하면 '밝게 빛나는 조선국'인지 '명나라 조선국'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명(明)'이 '명나라'라는 것을 확실하게 표현하기 위해 '유명(有明)'이라는 단어를 쓴 것이다. 바로 앞 문단에서 언급된 것처럼, 유당(有唐), 유명(有明) 등은 국명을 나타내는 일상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특별히 명나라를 높이거나 조선을 폄훼한 표현은 아니다.


결론하여 말하면, '유명(有明)'은 그냥 '명나라'로 풀이하는 것이 타당하다. '유명조선국'은 '명나라 시대의 조선국[明代朝鮮國]' 정도로 풀이하면 되며, 굳이 '명나라에 속한'이나 '명나라에 있는' 등과 같이 적극적으로 사대주의적 의미를 내포할 필요는 없다.


'조선국(朝鮮國)' 또는 '대조선국(大朝鮮國)'으로 썼으면 되었을 것을 하필 '유명조선국'으로 하였으니, 이것 또한 사대주의적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황명조선국(皇明朝鮮國), 대명조선국(大明朝鮮國) 등의 표현이 금석문(金石文)에 종종 보이는데, 이렇게 하지 않고 유명조선국이라고 적었던 것이, 그리고 그것이 보편화 되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유학(儒學)의 논리에 따르면 천하(天下)에 황제국(皇帝國)은 단 하나이고 나머지는 모두 제후국(諸侯國)이다. 따라서 신라나 조선이 스스로 황제를 칭하지 않는 이상, 국명과 직함을 자세히 기술함에 있어서 황제국의 국명을 제후국 앞에 쓰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마치 지금 '민주주의'가 최선(最善)의 정치 체제이고 다른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적어도 동양의 전재군주제 질서 아래에서는 그렇다. 특히 성리학(性理學)이 통치 이념으로 작동하던 당시 사회라면.


명나라가 망한 후에 '유청조선국(有淸朝鮮國)'이라고 하지 않고 '유명(有明)'을 계속 썼던 것은 오랑캐라고 멸시하던 청나라를 상국(上國)으로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숭명의리(崇明義理)에 입각한 것이든, 소중화(小中華) 의식의 발로이든, 조선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한계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유명조선국'으로 표기한 것을 두고 필요 이상으로 우리 선조들을 답답하게 생각하거나 탄식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하여간, 이러한 해석이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이유를 추가해 보면, 조선왕조 때 국왕이 승하하면 그 신위(神位)를 종묘(宗廟)에 모시는데, 위판(位版)에 명나라에서 준 시호(諡號)를 적을 때 그 시호 앞에 '유명증시(有明贈諡)'라는 글자를 썼다. '유명조선국'을 '명나라에 있는'으로 풀이한다면 '유명증시'를 풀이할 길이 없다. '유명증시'의 뜻이 '명나라가 준 시호'이니, '유명(有明)'을 역시 '명나라'라고 하는 것이 합리적이겠다. 첨언하면, 조선 태조 건원릉(健元陵)의 묘비명은 '유명시강헌조선국태조(有明諡康獻朝鮮國太祖)...'이다.


또 중국(中國)의 관직을 얻은 인물인 경우에는 중국 관직과 고려 또는 조선의 관직을 모두 표기하기도 하였는데, '유원자선대부태상예의원사 고려국...' 또는 '유명수군도독 조선국...' 등이 그 일례이다. 이 역시 '원나라의 자선대부 태상예의원사이며, 고려국의 ...'이나 '명나라의 수군도독, 조선국의 ...'으로 풀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유명(有明)을 '명나라에 속한'이나 '명나라에 있는'과 같은 식으로 풀이해야 할 근거가 약하다는 것이 이 글의 결론이다.


[이하는 점검이 필요함] 국사편찬위의 말대로 '유명(有明)'을 '위대한 명나라'와 같이 풀이할 수도 있겠으나,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후학(後學)들이 명나라가 망한 후의 청나라를 두고 '유청(有淸)'이라고 한 사례가 있는 것을 보면 그렇게 해석할 여지는 거의 없다고 하겠다. (어떤 문헌에서 '有淸'을 본 기억이 있는데, 다시 찾지 못하겠음. -_-?)


무자(2008년) 4월 초7일, 선성(宣城) 김하은(金河銀)

[사이버조선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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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후자 사이버조선왕조에 실린 글은 여태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수준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는 그리고 특별할 것이 없는 평이한 해석이다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앞선 격물선생께서 남겨주신 글에서 보면 우리가 알지 못하던 내용, 상당히 충격적이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귀중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함중(陷中)의 서식(書式)을 《의절(儀節)》에 근거하면 마땅히 ‘명고모(明故某)’라고 써야 할 터인데, 지금 사람들은 혹 ‘유명조선 고모(有明朝鮮故某)’라고 쓰는 경우가 있으니, 어떻게 써야 합니까?”

”...함중에 쓰는 것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명조선 고모(有明朝鮮故某) 라고 쓰는 것은 중국과 구별하기 위한 것인바, 혹은 ‘조선’의 아래에 국(國) 자가 있소.”

라고 한 것을 보면 중국 (中國) 이란 무거운 존재성을 나타내고 있는데 중국이라함은 나라 국()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앙상징적인 정부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때문에 지금 지나(화하)26에 버젓이 나와 있는 당, 원, 송, 명, 청을 나라 개념으로 보고 이해하면 반도사관에 벗어나지 못하는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차에 재고해야 마땅한 것인데 지나 화하26사에서 당, 원, 송, 명, 청을 나라인 것처럼 꾸민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애매한 헛점을 노려 끼워넣기를 한 것이다.

나라가 아니라 상징적인 중앙정부를 지칭하는 정치적인 호칭이 맞을 것 같다.

즉 조선이 말하는 중국을 중앙정부라고 해석하는 것은 중앙정부입장에서도 그렇지만 조선왕조도 땔래야 땔 수 없는 혈연관계를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늘 상(上殿)으로 모시실 수밖에 없는  의예(儀禮)가 있어 분명히 대륙신라, 고려, 조선황실이었다고 보아지는 것이다.

아직 확실한 구도가 잡히는 것은 아니지만 바로 우리가 찾고 연구하면서 밝혀내어야 할 진실문제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