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민족

네이멍구 자치구[内蒙古自治区]

한부울 2008. 4. 3. 23:40
 

네이멍구 자치구[内蒙古自治区]

Nèi Měnggǔ Zìzhìqū 약자: 内蒙古, 

 

 

행정 단위 자치구


청사 소재지 후허하오터 (呼和浩特)

면적 1,183,000 km² (3위)

인구 (2002년)

 - 인구밀도 23,800,000 (23위)

20.1/km² (28위)

네이멍구 자치구(내몽골 자치구. 중국어 간체: 内蒙古自治区, 병음: Nèi Měnggǔ Zìzhìqū, 몽골어: , Öbür Mongghul-un Öbertegen Jasaqu Orun)은 중화인민공화국 북부의 자치구이다.


역사


대부분의 기간동안 중서부 내몽고 지역, 특히 허타오(河套) 지역은 남쪽의 농경 민족이었던 한족과 흉노, 선비, 거란, 여진, 몽골 등의 유목민족이 번갈아가며 영향력을 행사해온 지역이다. 내몽고의 동부는 사실상 만주의 일부로 간주되고 이 곳의 역사는 한족과 유목민의 교차라기 보다는 이 지역의 다른 민족들이 활동해온 역사이다.


주나라 동안 중부와 서부 내몽고 (허타오 지역과 그 주변)에는 누번(樓煩), 임호(林胡), 적(狄) 같은 유목민족들이 거주했다. 내몽고의 동부지역에는 동호(東胡)가 살았다. 전국시대에 조(趙)나라의 무령왕(武靈王; 기원전 340 - 295)이 내몽고 지역에 대한 팽창정책을 추진했다. 무령왕은 현재 허베이 성에 있는 적(狄)의 중산국(中山國)을 격파했다. 이후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을 무찌른 후 현재의 호흐호트 지역에 운중(雲中), 안문(雁門), 대(代) 등 3군을 설치했다. 조 무령왕은 장성을 허타오 지역을 가로질러 쌓았다. 이후 진시황은 화북과 장강 일대를 아우르는 첫번째 통일 중국 제국을 세우면서 (기원전 221) 몽념(蒙恬)으로 하여 흉노를 치게한다. 또한 새로 장성을 쌓으면서 주의 장성을 편입한다. 진시황은 구원(九原)과 운중(云中)의 두 군를 내몽고 지역에 설치하고 3만호를 이주시켜 통치를 영구화하려 하지만 진이 몰락(기원전 206)한 후 이런 노력은 중단된다. 전한 시대동안 무제가 위청(衛靑)을 보내 허타오지역을 흉노로부터 빼앗았다. (기원전 127년) 점령 후에는 흉노의 공격을 막기 위해 허타오 지역에 계속해서 정착촌을 건설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동안 삭방(朔方)과 오원(五原) 군을 설치했다. 이 시기에 내몽고 동부지역은 선비가 점령했다. 선비는 이후 흉노가 한에게 굴복한 후 이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게 된다.


후한 시대(25-220)에는 흉노가 한에 굴복하여 허타오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이주해 온 한족과 융합되기 시작하였다. 서진 시대에 허타오의 흉노의 대추장 유연(劉淵)이 한(漢)왕조(후에 趙로 개칭. 뒤의 석(石)씨가 세운 조와 구분하기 위해 前趙라고 구분함)를 이 지역에 열면서 오호십육국시대가 시작된다.


수와 당 시대는 중국이 다시 통일 되어 있었고, 황제들은 이전의 정복자들과 마찬가지로 허타오지역을 점령하고 이 곳에 한족들을 정착시켜 나갔으나 당의 몰락과 함께 이러한 시도는 다시 중단된다. 그 동안 내몽고의 동쪽에서 힘을 키워오던 거란은 이 틈을 타 요나라를 세우고 내몽고 일대를 장악하지만 후에 여진족에 멸망하고 서쪽으로 이동해 서요를 세운다. 여진족은 금나라를 세워 북중국과 만주를 지배했다.


칭기즈 칸이 몽골 부족들을 1206년에 통합했다. 1227년에는 탕구트를, 1234년에는 여진족을 점령했다. 그의 후손들은 1279년에 중국을 정복하고 원을 세웠다. 원은 1368년 한족이 명을 세우면서 다시 몽골 고원으로 되돌아왔고, 명은 현재 자리에 만리장성을 세웠다. 만리장성은 내몽고의 남쪽 경계와 대체로 일치한다.


17세기에는 만주족이 몽골족을 복속시키고 1644년 명을 정복한 후 청을 세운다. 만주족의 청조는 몽골을 외몽골과 내몽골 등으로 나누어 지역별로 다른 방법을 통해 통치한다. 일반 몽골인들은 자신의 맹 바깥으로 여행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반면 알탄 칸(1507-1582) 때부터 거주하기 시작하던 한족 농민들이 19세기 후반부터 대량으로 유입된다. 만주족의 중국화와 러시아의 위협 때문에, 청 정부는 한족 농민들로 하여금 몽골과 만주로 이주하도록 장려하게 되고, 이 정책은 이후의 정부들에 의해서도 계승된다. 이 지역에 건설된 철도는 한족의 이주를 촉진하였다. 토지는 몽골의 왕자들이 매각하거나, 한족 농민들에게 임대되거나 혹은 아예 유목민들의 땅을 빼앗아 한족 농민들에게 주는 방법으로 제공되었다.


신해혁명이 일어나 후 중화민국 시기동안 외몽고는 소련의 도움을 받아 독립할 수 있었지만, 내몽고는 중국의 한 지역으로 재편된다. 러허(熱河) 성, 차하르(察合爾) 성, 수이유안(綬遠) 성 등이 신설되었고, 훌룬부이르는 헤이룽장 성 안에 머물게 했다. 중화민국에서 발행되는 몇몇 지도는 아직도 이 행정구역을 따르고 있다.


만주는 1931년부터 일본의 괴뢰정부인 만주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후룬부이르나 지림 맹은 만주국의 판도에 들어있었다. 1933년부터는 러허 성도 만주국에 속하게 된다. 이 지역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45년까지 만주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1937년에는 중화민국과 일본이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몽골의 왕자였던 뎀추그동루브(Demchugdongrub; 德王)은 내몽고의 남은 부분 (수이유안 성과 차하르 성)의 독립을 선언하고 몽강국(蒙疆國)을 선언한다. 이 나라는 만주국과 일본만 승인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내몽고는 일본의 괴뢰정부가 되었다. 수도는 허베이 성의 장베이(현재, 장자커우시 장베이현; 張家口市 張北縣)에 설치되었고, 그 통치력은 서쪽으로 호흐호트까지 미쳤다. 1945년 8월, 팔월폭풍작전(소-일 개전)때에 몽강국은 소련과 외몽고의 군대에 의해 점령된다.


2차대전이 끝나면서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의 지원을 받으면서 만주지역을 접수하게 되고 1947년에는 소련의 국가 정책에 따라 네이멍구 자치구를 설립한다. 처음에는 오직 훌룬부이르 지역만 차지하였다. 50년대에 접어들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었고, 중국 본토에 대한 지배를 확립하였다. 네이멍구 자치구는 서쪽으로 확대되었다. 결국 대부분의 몽골족 인구는 이 지역에 속하게 되었고, 현재의 길쭉한 모양의 네이멍구 자치구가 생기게 되었다. 1969년 문화혁명 당시 네이멍구 자치구의 많은 부분이 이웃하고 있는 성들에게 분양된 적이 있었으나 1979년에 복귀된다.


중화제국주의로부터 네이멍구의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이 있으나 티베트, 동투르키스탄, 타이완과는 달리 네이멍구에 대한 외부의 지원은 미미하다.


주민


한족이 네이멍구 자치구 주민의 80%를 차지한다. 몽골족들은 17%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다우르족, 에벤키인, 오로치인, 후이족, 만주족, 한국인, 러시아인, 기타이다.


2000년의 네이멍구 자치구의 민족

민족 인구  %

한족 18,465,586 79.17%

몽골족 3,995,349 17.13%

만주족 499,911 2.14%

후이족 209,850 0.900%

다우르족 77,188 0.331%

에벤키족 26,201 0.112%

한국인 21,859 0.094%

러시아인 5,020 0.022%


행정 구역


9개의 도시가 위치해 있다.


후허하오터 (呼和浩特市 병음: Hūhéhàotè shì)

바오터우 (包头市 Bāotóu shì)

우하이 (乌海市 Wūhǎi shì)

츠펑 (赤峰市 Chìfēng shì)

퉁랴오 (通辽市 Tōngliáo shì)

오르도스 (鄂尔多斯市 È'ěrduōsī shì)

후룬베이얼 (呼伦贝尔市 Hūlúnbèi'ěr shì)

바얀나얼 (巴彦淖尔市 Bāyànnào'ěr shì)

울란차브 (乌兰察布市 Wūlánchábù shì)


3개의 멍이 위치해 있다.

시린골 멍 (锡林郭勒盟 Xīlínguōlè méng)

아라산 멍 (阿拉善盟 Ālāshàn méng)

싱안 멍 (兴安盟 Xīng'ān mé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