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민족

2008년 티베트와 1905년 조선

한부울 2008. 3. 30. 00:22

 

2008년 티베트와 1905년 조선

[디지털타임스] 2008년 03월 28일(금) 오전 08:00

 

 

서기 641년. 당나라 수도 장안을 출발한 당태종의 금지옥엽 문성공주는 토번(티베트)의 국경 앞을 흐르는 도당하(倒撞河) 앞에 선다. 도당하는 `거꾸로 흐르는 강'이라는 뜻이다. 토번으로 가는 길 내내 장안을 향해 동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떨구던 공주는 서쪽으로 물길을 바꿔 흐르는 도당해를 보고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다. 공주는 얼마 후 마중을 나온 토번의 왕 송첸 캄포와 결혼하고 토번의 국모가 된다.


중국과 티베트의 악연은 지금으로부터 140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송첸 캄포 재위 시절 토번은 세계최대 제국이었던 당나라도 어찌 못했던 강국이었다. 문성공주는 이런 토번을 달래기 위한 화번(和蕃:주변국과의 화친을 위한)의 제물이었다.


이렇게 중국과 인연을 맺었던 티베트가 지난 몇 주간 세계와 단절된 채 독립시위로 큰 고초를 겪었다. 독립을 갈망하는 티베트 사람들의 시위와 중국 정부의 강경 진압이 쪼가리 영상과 전언으로 일부 알려지긴 했지만, 전모를 알기에는 부족했다. 이러는 사이 중국정부는 티베트 사태 종료를 선언했다. 아마도 적지 않은 티베트 사람과 중국 경찰들이 상하고 죽었을 것이다.


이번 티베트 시위의 발단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탄생으로 맺어진 중국과 티베트간의 두 번째 악연에 기인한다. 중국은 1951년 자원 확보와 군사적 목적 등을 이유로 티베트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외교권을 박탈한다. 이후 한인 대거 이주정책과 문화혁명 등을 통해 티베트의 한화(漢化)를 추진한다. 티베트는 독립을 향해 꾸준히 저항에 저항을 거듭하지만 번번이 좌절을 맛본다.


이번 독립 시위 과정에서 세계를 향해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려는 티베트인들의 모습은 처절하기까지 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맨발로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시위현장의 참혹함을 알린 승려와 학생들, 각 국 정부를 향해 연일 눈물어린 호소를 한 해외 거주 티베트인들, 지난 1958년 이후 인도 다람살라에서 망명정부를 이끌고 있는 달라이라마의 눈물겨운 정치ㆍ외교적 행보가 그렇다.


하지만 그 결과는 그리 좋아 보이질 않는다. 중국 정부의 강력한 봉쇄정책으로 이번 사태는 그 실상조차 파악하기 어렵다. 더구나 경제대국 중국의 위세에 눌려 세계 각 국은 "평화적 해결을 바란다"는 외교적 발언만 쏟아낼 뿐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외국의 한 방송국 TV 카메라 앞에서 티베트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울분을 토하던 한 티베트인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런 티베트의 모습이 왠지 낯설지 않다. 지금으로부터 103년 전, 일본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며 우리를 그들의 속국으로 만들었던 을사늑약(乙巳勒約) 당시 이 땅 백성들의 모습이 아니던가.


일제의 눈을 피해 독일의 빌헬름 2세 황제에게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호소했던 대한제국의 고종황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국치의 분함을 못 이기고 순절한 이준 열사, 3.1운동과 6.10만세 운동을 이끌었던 유관순 열사와 이름 모를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바로 그들이다.


하지만 우리의 이런 피맺힌 절규를 당시 세계는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강대국으로 부상하던 일본의 철저한 봉쇄정책과 일본과의 이익 도모를 우선순위에 둔 열강들의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2008년 티베트인들과 1905년 조선인들은 세계를 향해 `구원을 위한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했지만, 약자라는 이유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강자의 논리가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입과 귀를 멀게 하고, 그 역사까지 왜곡했기 때문이다.


김응열기자 디지털타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