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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되는 광화문 용마루 취두

한부울 2006. 12. 4. 23:33
 

철거되는 광화문 용마루 취두

[연합포토] 2006년 12월 04일(월) 오후 02:59

 4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경복궁 광화문 제모습 찾기 선포식'에서 광화문 지붕의 용마루 취두가 철거되고 있다.


광화문이 경복궁 중심축에서 벗어난 까닭


[연합뉴스] 2006년 12월 04일(월) 오후 02:56

                                       확답은 없어, 진북-자북의 차이 가능성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현재의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은 1865년 경복궁 중건 당시를 기준으로 할 때 위치도 다르고 건물 방향도 다르다.


경복궁 복원 계획의 일환으로 문화재청이 중건 당시와 지금의 광화문을 비교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원래 광화문은 지금의 광화문에서 남쪽으로 14.7m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건물 방향 또한 5.7도 가량 차이가 난다.


문화재청이 추진하는 광화문 복원은 고종 중건 당시 기준으로 자리와 위치를 바로잡고자 한다.


광화문 위치가 옮겨진 까닭이야 급격한 도시화에 의해 경복궁 영역이 축소됨에 기인한 것으로 손쉽게 알 수 있지만, 건물 방향은 도대체 왜 틀어졌을까?


1910년 조선을 병탄한 조선총독부는 서울을 재정비하게 된다. 경복궁의 중심인 근정전 바로 앞쪽에 총독부 청사를 신축하고, 그 남쪽 남산에는 조선신궁(朝鮮神宮)을 배치했다. 지금의 광화문은 이 두 건축물을 연결하는 남북축 선상에 맞추어 건물 각도가 재배치됐다.


경복궁 중심축을 기준으로 동쪽으로 5.7도 벗어난 건물 방향은 곧 총독부의 남북축이기도 했다.


하지만 왜, 무엇을 기준으로, 지금의 광화문이 고종 중건시의 경복궁 중심축에서 벗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만한 해답을 찾기 곤란하다. 조선총독부 혹은 조선신궁에 맞추어 광화문 중심축 방향이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총독부 청사와 조선신궁은 왜 굳이 경복궁 중심축과 5.7도 차이가 나야만 했는지를 아울러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만한 답변이 없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배병선 건조물실장이나, 경복궁에 대한 많은 연구성과를 낸 경주대 이강근 교수 같은 이도 한결같이 "모르겠다"거나 "그에 대해서는 심각히 고민해 보지 않았다"고만 답변할 뿐이다.


이 교수는 "기록에 의하면 경복궁을 중건할 때 건물 방향은 남향인 임자병향(壬子丙向)으로 놓았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의 경복궁과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심각하게 생각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학계의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제가 조선(왕조)의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일부러 경복궁 중심축과는 벗어난 남북축을 설정하고 이를 따라 총독부 청사와 광화문, 조선신궁을 건설했다"는 속설만이 그럴 듯하게 통용되고 있을 뿐이다.


이를 둘러싼 더 합리적인 이유는 찾을 수 없을까?


이와 관련해 무엇보다 측정 방식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즉, 식민지시대 서울 도시계획이 근대적인 서구식 측량법을 응용했다면, 그 이전 조선시대 건축은 풍수지리학적인 개념과 전통적인 측량법을 사용한 데서 차이가 빚어졌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해가 뜨고 지는 궤적에 따라 형성되는 북쪽인 진북(眞北)과 지구 자기장(나침반)이 형성하는 북쪽인 자북(磁北)의 차이가 주목을 끈다. 현재 진북과 자북은 5도 가량 차이가 난다. 경복궁의 중심축과 현재의 광화문 중심축간 괴리와 거의 합치되는 수치다.


이를 존중한다면 중건된 경복궁은 나침반을 이용한 자북을 응용한 반면, 조선총독부에 의한 광화문 재배치는 진북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 한국천문연구원 안상현 박사는 "이것이 확실한 원인으로 설명되기 위해서는 다각도의 분석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