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변절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은 가난만 남기고

한부울 2006. 11. 26. 15:03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은 가난만 남기고

[오마이뉴스] 2006년 11월 15일(수) 오전 09:35


우리 사회는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의 삶에 얼마나 관심을 보이고 있을까요? 우리는 그들의 모습을 3·1절이나 광복절 때 스쳐가는 TV화면으로만 접할 뿐입니다. 그들의 삶은 우리의 무관심 속에 방치돼 있습니다.

11월 17일은 국권회복에 헌신한 분들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한 '순국선열의 날'입니다. 독립유공 가족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을 깊이 생각해 볼 때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순국선열의 날'을 앞두고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어려운 삶과 보훈행정의 문제점을 짚어보고자 합니다.<오마이뉴스 편집자 주>


[오마이뉴스 선대식 기자] 독립운동가 후손인 임미향(51·경기도 가평)씨는 2년 동안 밀린 아파트 관리비 문제를 최근에야 해결했다. 임씨의 사정을 알고 관리실에서 관리비를 감면해 준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고등학생인 두 딸을 혼자 키우는 일은 버겁기만 하다.


여느 독립운동가의 후손처럼 임씨는 "가방 끈이 짧다"고 말한다. 어렵게 화장품 가게를 열었지만 벌이가 시원치 않다. 큰 딸이 정신 지체 장애인이라 돈은 갑절로 들어간다. 작은 딸을 학원에 보내는 건 꿈도 꾸지 못한다.


임씨는 "지금까지 할아버지의 후광을 받는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면서도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사는 게 힘들어 도움을 받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임씨에게는 연금 한 푼 나오지 않는다.


임씨의 할아버지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유명한 연암 임예환 선생이다. 1962년에 건국훈장 중 두번째 등급인 대통령장이 추서될 정도로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역사적 인물이었다.


임씨는 "할아버지 집안은 평안도에서도 알아주던 가문이었지만 독립운동을 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그의 후손은 아파트 관리비도 마련하지 못하며 힘겨운 삶에 허덕이고 있다.


가난→교육 소외→가난... 악순환의 고리


 

2006년 6월말 현재 모두 5834명이 독립유공자 유족으로 등록돼 있다. 직업별 현황을 보면, 직업이 없는 유족은 3784명으로 전체의 64.9%에 달했다. 고정적인 수입이 있는 봉급생활자는 전체의 13.8%인 804명에 불과했다.


이러한 가난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교육 기회를 박탈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낳았다. 독립유공자 후손 중 가난 때문에 배움의 길을 포기한 사람은 전체의 27.8%인 1620명이다. 학력이 중졸 이하인 유족은 3259명으로 전체의 55.9%에 이른다.


가난과 교육 부재로 열악한 삶에 놓인 그들에게 지원되는 거의 유일한 혜택은 연금이다. 독립유공자의 유족은 서훈 등급에 따라 매달 32만원에서 최대 146만4천원의 연금을 받는다. 하지만 연금 액수가 적어 생활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유족들이 있고, 연금조차 받지 못하는 이들도 많다.


특히 광복 이후 사망한 독립유공자 손자녀 1135명에게는 연금이 없다. 다만 생계 곤란자(2005년에는 494명)에 한해 매달 25만원의 가계지원비가 지급된다. 그래서 많은 유족들은 정부에서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유족 가운데 기초생활수급대상자가 106명이나 된다(2006년 8월 현재).


"밥,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는다"

신오목(70·서울 제기동) 할머니는 기초생활수급대상자 중 한 사람이다. 신 할머니는 신경화 선생의 손녀다. 신경화 선생은 3·1운동에 가담한 공로로 지난 2005년 대통령 표창을 받은 독립운동가다.


그러나 신 할머니는 다른 독립유공자 후손들과 마찬가지로 결코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원래부터 가난하던 집안에 신경화 선생이 독립운동에 투신해 돈 버는 건 꿈도 꾸지 못했기 때문이다.


"농사일을 돕다 서른한 살 되던 해, 서울로 올라와 식모살이나 하며 생계를 유지했지. 나이 들어서는 근근이 파지를 주워팔아 먹고살았어. 그런데 2년 전부터 허리가 아파 일을 하지 못해. 요새는 부업으로 열쇠고리를 포장해 하나당 1원을 받고 있어."

기초수급대상자인 할머니는 매달 30여만 원의 가계지원비와 20만원의 생계주거비를 받는다. 하지만 집세·전기세 등을 내고 뇌사상태인 동생의 가족에게 돈을 보내면 남는 돈이 없다. 신 할머니는 "요즘 밥이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는다"며 "밥을 먹는 날에도 반찬은 김치뿐"이라고 말한다.


할머니의 삶이 비틀어진 건 가난의 대물림과 교육의 부재 탓이다. 이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삶을 옥죄는 하나의 공식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신경화 선생이 독립운동을 한 후과로 지독한 가난만을 물려받았고 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독립유공자 유족증에 쓰인 자신의 이름을 읽지 못했다.


"누가 대한민국을 이렇게 세웠는데..."

 

다른 독립운동가처럼 윤효업 선생도 자식들에게 재산이라 할 만한 것들을 물려주진 못했다. 윤효업 선생이 독립운동에 쓸 무기를 만들기 위해 집안의 모든 쇠붙이를 가져가 집안에 밥그릇과 숟가락이 없었다고 한다. 윤 할아버지 가족은 밥과 소금물로 끼니를 때운 것도 한두번이 아니다.


학교에 다니는 것은 사치였다. 결국 윤 할아버지는 학교에 다니는 것을 포기했다. 윤 할아버지의 누이인 윤병옥(69) 할머니는 동생의 삶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동생은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전국에 약을 팔러 다녔지. 그 뒤로는 공사장을 전전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며 서울역 같은 데서 노숙했어. 그 모습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 지금도 열 가지가 넘는 병에 걸렸으니…."

현재 윤 할아버지는 연금을 받지 못한다. 대신 기초수급대상자에게 나오는 30여만 원의 생계주거비를 포함해 45만 원 정도를 받는다. 윤 할아버지는 변기와 싱크대가 맞붙어있는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윤 할머니는 "쓰레기가 넘쳐나는 집에 살던 동생이 안쓰러워 보증금 500만원을 빌려 집을 마련해 줬다"고 말했다.


"동생이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사람답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윤 할머니 눈에 눈물이 맺혔다. 윤 할머니는 "누가 대한민국을 이렇게 세웠는데…"라며 말을 끝맺지 못했다.


독립유공자 가족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 이유

독립유공자의 어려운 삶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매년 3·1절, 광복절이면 TV화면에서 그들의 힘겨운 삶을 느낄 수 있다. 국가보훈처 국정감사에서도 매년 지적된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한국 사회의 무관심 탓이 크다.


이뿐 아니다. 독립운동가 김만식 선생의 사위인 김만(48·서울 봉천동)씨는 "독립유공자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김씨는 "국가보훈처 직원들은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불쌍해서 도와주는 사람쯤으로 생각한다"며 "심지어는 내가 구걸하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고 밝혔다.


유럽·미국 등에서는 충분한 경제적 보상과 함께 유공자들과 그 유족들을 최대로 예우하는 보훈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프랑스는 전국 각지의 거리·광장 등에 레지스탕스들의 이름을 붙여 유공자를 기념하는 등 그들의 사회적 예우에 힘쓰고 있다. 유족에게는 연금지급뿐 아니라 기업체 의무고용 규정을 마련해, 취업을 보장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보훈 업무를 담당하는 보훈부의 직원 숫자는 연방정부의 14개 부서 중 국방부에 이어 2번째로 많고 예산 규모는 586억 달러(약 55조원, 2001년 기준)로 전체 예산의 2.7%를 차지한다. 2006년 예산 규모가 2조7천여억 원(정부 예산의 1.65%)인 우리의 국가보훈처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지난달 19일 한명숙 총리는 국가보훈위원회를 열어 친일반민족행위자에게 환수한 재산을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는 2008년까지 전반적인 보훈보상체계 개선방안을 마련할 계획이어서, 실제로 이 정책이 언제 시행될지는 알 수 없다.


서혜석 열린우리당 의원은 국가보훈처 국정감사가 진행된 10월 23일, "독립유공자가 있기에 현재의 우리가 있다"며 "이분들의 유족이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고 이웃과 사회, 국가에서 예우와 대우, 존경을 받고 살 수 있도록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