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Corea, Republic of ; 大韓民國)
삼한[三韓]
[대륙부][한반도부][열도부]
아시아 대륙의 동단(東端)에 있는 나라로 통칭, 한국이라고도 한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반도와 3,20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극북(極北)은 북위 43° 1'(함북 온성군 유포진 북단), 극남(極南)은 북위 33° 6'(제주 남제주군 마라도 남단), 극동(極東)은 동경 131° 52'(경북 울릉군 독도 동단), 극서(極西)는 동경 124° 11'(평북 용천군 마안군 서단)이다. 북쪽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중국의 만주와 러시아의 연해주에 접하고, 동쪽과 남쪽은 동해와 남해를 건너 일본에 면하며, 서쪽은 황해를 사이에 두고 중국 본토에 면한다. 조선 전기인 1413년(태종 13) 전국이 행정구역상 처음으로 경기(京畿)·충청(忠淸)·경상(慶尙)·전라(全羅)·강원(江原)·황해(黃海)·함경(咸鏡)·평안(平安)의 8도(道)로 나뉜 이래, 1896년(고종 33)에는 함경·평안·충청·전라·경상도가 각각 남·북으로 나뉘어 8도가 13도로 개편되었다. 8·15광복 이후 서울이 경기에서 분리되어 특별시가 되었고, 부산·대구·인천·광주·대전이 경남·경북·경기·전남·충남에서 분리·승격, 직할시를 거쳐 광역시가 되었으며, 제주가 전남에서 분리, 도로 승격하였다. 1995년 현재 전국은 1특별시 5광역시 14도이며, 남한에는 68시, 98군이 있다. 생활권에 바탕을 두는 지리적 지역은 북부지역(함남·북, 평남·북, 황해도), 중부지역(서울, 경기, 강원, 충남·북), 남부지역(전남·북, 경남·북, 제주도)으로 나뉜다. 북부지역은 다시 함남·북의 관북(關北)지방, 평남·북과 황해도의 관서(關西)지방, 중부지역은 서울, 경기, 충남·북의 기호(畿湖)지방, 강원의 관동(關東)지방, 남부지역은 전남·북과 제주의 호남(湖南)지방, 경남·북의 영남(嶺南)지방으로 각각 구분된다.
그러나 실제 대한민국의 역사가 결코 한반도에 국한 된 것은 아니다.
조일수호조약 즉 강화도조약이 있었던 1896년(고종 33)에 함경·평안·충청·전라·경상도가 각각 남·북으로 나뉘어 8도가 13도로 개편되었다는 것은 19세기말엽 서세동점시기에 일제가 서세에 빌붙어 역사적 초라함을 만회하고 대륙조선이란 그늘에 있었던 처지를 일거에 변신코저 동방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조건으로 근세문명을 취득하고 서슬이 시퍼런 서세의 앞잡이가 되어 대륙조선을 몰살함에 있어 1896년 고종33년 때 이미 일제가 무력으로 조정하고 장악한 대륙조선 조정에 친일 간신들을 포섭하여 대륙에 있었던 역사 전체를 한반도로 이식하는 과정에서 행정적으로 13도로 개편하였다는 것이다.
그 당시부터 조선인들 위에 군림하기를 좋아하던 일제가 조선의 지위를 찬탈하고 대륙의 이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륙 조선역사를 한반도로 이식하기 시작하였고 조선이 있었던 대륙 빈공간은 어부지리로 국민당 지나인들의 차지가 되었으며 그러한 공간에 보잘 것 없는 지나역사를 확대하여 끼우고 고쳐 대륙 조선역사를 결국 사라지게 한 암울한 역사가 있었다.
어째거나 한반도조선은 행정구역단위를 개편한 그 이후 1년도 못되는 시기인 1897년에 대한제국 건국과 칭제를 건사하게 하였지만 그러한 것은 빛 좋은 개살구 일 뿐 실제로 일제가 생명줄을 잡고 있었던 시한부적인 것이었다.
결국 한반도 조선과 대한제국은 불평등조약인 1905년 을사늑약을 거치며 1911년 한일합방을 끝으로 1만년 대륙 역사가 왜구들 손에 의하여 마침내 택도없이 한반도에 초라하게 남아 있는 조건으로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 대륙에 남아 있던 수많은 대륙 조선인들은 한반도와는 상관없이 대륙조선 회복이란 명제아래 각개별로 1948년까지 지속적 항쟁은 계속되었고 또한 활화산 같은 민족역사 회복 운동 또한 끊임없이 전개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되고 비록 사라지고 남아 있지 않는 역사이지만 그야말로 보배로운 참 역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명맥이 끊어지질 않고 한반도 대한민국 역사만이라도 존재해서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이지만 이러한 엄연한 역사사실에 근거를 두고 기반으로 하는 나라임에 틀림이 없고 웅대한 대륙역사를 직접적으로 승계받은 국명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때문에 분명코 한반도 역사는 우리의 본역사라 할 수 있는 대륙역사를 찾아 한다는 명제가 있다.
이러한 역사상황을 염두에도 두고 대한민국의 참역사를 논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1. 기원
【국가】 한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고고학적으로 볼 때 약 50만 년 전부터라고 하며, 청동기시대에 이르러서는 나라를 세웠다. 한국의 개국에 대한 이야기로는 단군신화가 전해지고 있다. 단군신화는 《삼국유사(三國遺事)》 《제왕운기(帝王韻記)》 《응제시주(應製詩註)》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에 소개되어 있으며, 우리 민족의 전통과 문화의 정신적 근원이 되었고,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뿌리로 간주되었다. 또한 단군 왕검이 세운 조선은 이성계(李成桂)가 세운 조선과 구별하여 고조선이라고 부르는데, 한국 민족이 세운 최초의 국가이다. 현재 한국에서는 단군이 나라를 세운 BC 2333년 10월 3일을 개국의 기원으로 보고, 개천절로 정하여 국경일로서 기념하고 있다.
〈국호〉 한국의 이름은 한(韓)·조선(朝鮮)·동국(東國)·청구(靑丘)·해동(海東)·대동(大東)·진(震) 등과 근역(槿域)·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금수강산(錦繡江山)·소화(小華) 등으로 불려왔다. ‘한’ 또는 ‘대한(大韓)’은 우리 민족이 한족(韓族)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생긴 말로서, 고대사회의 삼한(三韓)인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을 비롯하여, 1897년 8월 국호로 정한 대한제국(大韓帝國),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上海]에 세운 대한민국임시정부, 그리고 오늘의 대한민국은 한(韓)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은 《전국책(戰國策)》 《산해경(山海經)》 《사기(史記)》 등 중국의 고전에 일찍부터 전해지는 한국 최초의 이름으로, 고조선·단군조선·기자조선(箕子朝鮮)·한씨조선(韓氏朝鮮)·위만조선(衛滿朝(高麗)에 이어 새 왕조를 개창(開創)한 이성계도 조선이라고 국호를 정하였다. 조선이란 말에는 동방과 광명의 뜻이 담겨 있다. 즉 땅이 동쪽에 있어 해뜨는 곳의 모습을 형용한 것이라고도 하고, 선(鮮)은 선비산(鮮卑山)의 약칭으로서 선비산 동쪽의 나라를 뜻한다고도 하며, 양곡(陽谷), 즉 양달의 마을 이름이 나라 이름으로 바뀐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신 또는 [光明]의 뜻에서 전화된 것이라고도 한다. 동국·청구·해동·대동의 이름은 모두 한국이 중국 동쪽에 있는 까닭에 생겨난 명칭으로서,《동국통감(東國通鑑)》 《해동역사(海東繹史)》 《청구영언(靑丘永言)》 《대동야승(大東野乘)》 등 책 이름으로 많이 쓰였다. 진(震)이란 주역(周易)의 팔괘(八卦) 중의 ‘ a ’을 가리키는데, 이 말을 따서 이름을 붙인 것으로는 진국(震國)·진역(震域)·진단(震壇·震檀)이 있고, 또한 궁예(弓裔)가 세운 마진(摩震), 발해(渤海)의 첫 국호인 진국(震國) 등이 알려져 있다. 동방예의지국이란 중국에서 불렀던 나라 이름이다. 중국은 문화가 발달하여 예로부터 스스로 세계의 중심인 중화(中華)로 자처하고 다른 민족을 야만(野蠻)으로 보았으나, 그 중 한국만은 문화가 발달하고 도덕과 예의가 있는 나라라 하여 동방예의지국이니, 군자지국(君子之國)이니 하고 불렀다. 금수강산이란 비단으로 수놓은 듯이 강산이 아름답다는 뜻에서 부른 호칭이고, 소화란 모화사상(慕華思想)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한국이 중국 다음가는 문화국이라 하여 자칭한 이름이다. 이 밖에 삼국시대에는 고구려·백제·신라라 하였고,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한 왕건(王建)은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하였다. 고구려의 옛 정신을 이어받기 위하여 고구려를 줄여 고려라고 호칭한 것인데, 이때에는 사라센과도 교역하고 있어서 사라센 상인이 한국 이름을 서양에 전하여, 서양 사람은 고려를 코레(Coree) 또는 코리아(Corea, Korea)로 부르게 되었다. 한편 활을 잘 쏘는 나라라고 하여 동이(東夷)라고도 하였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자유와 독립을 위해 세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신을 정통으로 이어받는다는 의미에서, 1948년 7월 제헌국회에서 국호로 정하여 헌법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명시하였고, 영어로는 The Republic of Korea, 프랑스어로는 Republique de Coree, 독일어로는 die Republik Korea라고 한다.
〈국기〉 국기는 태극기(太極旗)로서, 태극과 팔괘(八卦)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태극은 우주 자연의 궁극적인 생성원리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적색은 존귀와 양(陽)을 상징하고 청색은 희망과 음(陰)을 나타낸다. 팔괘는 천지일월(天地日月)·사시사방(四時四方)을 의미하는 창조적인 우주관을 담고 있다. 따라서 태극기 전체로는 평화·통일·창조·광명·무궁을 상징한다. 한국에서 국기 제정 논의가 처음으로 거론된 것은 1876년(고종 13) 1월이었다. 이 해 일본과 처음으로 근대조약인 강화도조약을 맺을 때 일본 사신이 국기를 내건 데 대하여 당시 조선 사신은 국기가 없어서 내걸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국기를 만들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조선에서는 아직 국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지나쳐버렸다. 그 뒤 외국과의 교섭이 자주 있으면서 국기의 필요성을 느껴, 81년 충청도관찰사 이종원(李淙遠)이 제출한 태극 팔괘의 도식(圖式)에 의해 비로소 국기를 정하였다. 그러나 실제 태극기를 국기로 사용하기는 82년 8월 임오군란의 뒤처리를 위하여 박영효(朴泳孝)가 일본에 특파대사로 갈 때 처음으로 내걸면서부터이고, 국내에서 국기로 제정하여 공포·사용한 것은 83년부터이다.
〈국가〉 한국의 국가는 애국가(愛國歌)이다. 가사는 윤치호(尹致昊) 또는 안창호(安昌浩)가 지었다고 하는데, 1900년대 초기에 자주·독립의 사상이 고조되면서 널리 불렸다. 1930년대 후반 안익태(安益泰)가 작곡한 애국가는 그 동안 민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불리다가, 48년 8월 정부 수립과 동시에 국가로 결정되었다.
〈국화〉 국화(國花)는 나라꽃으로서, 한국의 국화는 무궁화(無窮花)이다. 무궁화는 옛날부터 한반도 전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었으며, 꽃이 아름답고 꽃피는 기간이 길어서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리하여 한국을 근역(槿域), 곧 무궁화 나라라고 일컬었다. 1910년 이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할 때 한국사람들이 무궁화를 나라의 꽃, 민족의 꽃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보고 일본인들은 무궁화나무를 뽑아버리는 행패를 부렸다. 이에 뜻있는 선각자들은 무궁화 심기 운동을 폄으로써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였다.
2. 자연 환경
【지형】 한반도는 제3기 중신세(中新世) 이후에 일어난 단층 및 요곡(撓曲) 운동의 결과 대체적으로 동쪽이 높고 서쪽으로 낮아진 경동지형(傾東地形)을 이룬다. 따라서 한국의 높은 산들은 대부분 동해안 쪽에 치우쳐서 지형의 등줄기를 이룬다. 그 높은 등줄기 산지는 동쪽으로는 급경사를 이루면서 동해안에 임박하지만, 서쪽으로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서서히 고도를 낮추면서 서해안에 이른다. 그들 산지 사이의 경사를 따라 서쪽과 남쪽으로 하천이 흐르고 하천 중·하류에는 비교적 넓은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산지〉 한국의 산맥 분포는 우리 국토의 지형 특색을 크게 결정짓는다. 한국의 산맥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태백산맥(太白山脈)과 낭림산맥(狼林山脈) 등 이른바 한국 방향의 산맥이다. 그리고 랴오둥[遼東] 방향의 산맥과 중국 방향의 산맥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중 강남산맥(江南山脈)·적유령산맥(狄踰嶺山脈)·묘향산맥(妙香山脈)·언진산맥(彦眞山脈)·멸악산맥(滅惡山脈)·함경산맥(咸鏡山脈) 등은 랴오둥 방향 산맥이고, 마식령산맥(馬息嶺山脈)·광주산맥(廣州山脈)·차령산맥(車嶺山脈)·소백산맥(小白山脈)·노령산맥(蘆嶺山脈) 등은 중국 방향 산맥에 속한다. 그들 산맥에는 백두산(白頭山:2,744 m)·관모봉(冠帽峰:2,540 m)을 비롯한 고봉들이 솟아 있는데, 휴전선 이남에 있는 주요 산은 소백산맥에 속하는 지리산(智異山:1,915 m), 태백산맥에 속하는 설악산(雪嶽山:1,708 m)·태백산(太白山:1,567 m) 등이다. 제주의 한라산(漢拏山:1,950 m)은 휴전선 이남에서 가장 높은 산이지만 그 성인이 육지부의 산과는 상이하다. 또 그들 산맥에는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하는 재[峙:고개]가 많이 분포해 있고 이 중 고도가 높은 재들은 대부분 휴전선 이북에 있다. 휴전선 이남에서는 대관령(大關嶺:832 m)·육십령(六十嶺:734 m)·죽령(竹嶺:689 m)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의 산지에는 일정한 고도에 평탄면이 있는데, 해발고도에 따라 고위면·중위면·저위면 등으로 나뉜다. 고위면은 해발고도 900 m 이상의 고도에 300 m 내외의 소기복을 이루면서 나타나고 중위면은 300∼700 m에 걸친 고도에 나타난다. 저위면은 원주와 충주를 잇는 선의 서쪽 남한강 하류 등지에 나타나는 평탄면으로, 해발고도 30∼70 m의 산록완사면과 70∼80 m의 저구릉성 침식지형이 여기에 포함된다. 산정에 평탄면이 생성되어 있는 경우에는 그 곳에 산성취락(山城聚落)이 형성되는 경우가 많은데 남한산성의 산성리(山城里)는 그 좋은 보기이다. 산록에는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산록완사면이 곳곳에 형성되어 있다. 그와 같은 산록완사면의 성인(成因)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으나, 제4기 한국의 기후환경과 관계가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건조기후의 영력(營力) 외에 주빙하(周氷河)기후의 영력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빙하지형은 널리 발달하지 못했으며, 다만 백두산 일대의 고산지대에 권곡(圈谷)이 있음이 보고되어 있다. 그러나 주빙하작용을 받아 형성된 솔리플럭션(solifluction) 퇴적물과 암설류(岩屑流), 유상구조토(溜狀構造土) 등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솔리플럭션 퇴적물은 한국 남해안 일대의 비교적 고도가 낮은 곳에 형성되어 있으며, 암설류는 경사가 급한 산록에 분포한다. 유상구조토는 한라산의 정상 부근과 지리산의 정상 부근에 생성되어 있다. 경기의 북한산(北漢山)·수락산(水落山), 전북의 마이산(馬耳山), 충남의 가야산(伽倻山) 등지에서 발견되는 타포니(Tafoni)는 한국이 현재보다 건조했을 때 형성되었으라고 추측되는데, 현재 그 생성환경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하천〉 압록강(鴨綠江)·대동강(大同江)·한강(漢江)·금강(錦江)·영산강(榮山江)·낙동강(洛東江) 등 대부분의 하천은 지형관계로 황해나 남해로 흐른다. 하천의 유량은 극히 불규칙하여 여름에는 홍수를 일으키는 하천이 많고, 갈수기에는 하상을 거의 노출시키는 하천들이 많다. 따라서 하천의 하황계수(河況係數)는 한강이 1:393, 낙동강이 1:372, 금강이 1:299로 다른 나라의 하천에 비하여 대단히 크다. 그와 같이 유황(流況)이 불안정하므로 홍수 때 많은 침식이 일어나고 토사가 흘러내려서 하류에 넓은 충적지를 이룬다. 하천은 대부분 심하게 곡류하지만, 산중사행성(山中蛇行性) 곡류가 대부분이며 자유사행천(自由蛇行川)은 거의 없다. 낙동강 하류와 한강 하류 등 대하천의 하류에 생성된 범람원과 대하천의 하구에 형성된 넓은 삼각주성 충적지는 대부분 중요한 농경지로 이용된다. 제4기의 기후변화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하안단구(河岸段丘)가 남한강의 상류인 단양·영월과 그 부근에서 발견된다. 단구면의 표면은 얇은 충적물로 덮여 있고, 단구는 여러 개의 단(段)으로 구성된다. 산록에 발달된 선상(扇狀)의 지형은 경남 사천시 용현면(龍見面) 덕곡리(德谷里) 일대 및 경주 불국사와 입실(入室) 일대에 분포하는데, 그 성인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다. 하천의 하류 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평야 중 대표적인 것은 한강 하류의 김포평야(金浦平野), 안성천 하류의 안성평야(安城平野), 금강 하류의 논산평야(論山平野), 만경강과 동진강 하류의 호남평야(湖南平野), 영산강 하류의 나주평야(羅州平野), 낙동강 하류의 김해평야(金海平野) 등이다.
〈해안〉 한국 국토는 반도이고, 서해안과 남해안의 해안선이 극히 복잡하여 해안선 총연장은 1만 7361 km(도서 포함)에 달하고 연안에 3,418개의 도서가 분포한다. 그들 도서 가운데 2,900개가 휴전선 이남, 518개가 휴전선 이북에 있으며, 유인도(有人島)는 전체의 약 1/3을 차지한다. 제주도(濟州島)를 비롯하여 거제도(巨濟島)·강화도(江華島)·진도(珍島)·남해도(南海島) 외, 주요 도서는 대부분 휴전선 이남의 서해안과 남해안에 분포한다. 동해안은 두만강 하구에서 부산 송도에 이르는 직선거리 809 km, 실제거리 1,727 km의 해안으로 해안선은 비교적 단순하며, 산지가 해안에 가까이 있어서 넓은 평야는 없다. 해안에 따라서 사구(砂丘)가 발달되어 있고, 경포(鏡浦)와 화진포(花津浦) 등 석호(潟湖)가 여러 곳에 형성되어 있다. 또 단속적으로 발달되어 있는 반월형의 사빈(砂濱)해안은 해수욕장으로 이용된다. 사빈해안 사이에는 암석해안이 나타나며 암석해안의 단애에는 타포니가 생성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타포니는 서해안의 암석해안에서도 발견된다.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해상에 화산도인 울릉도와 독도가 있다. 남해안은 부산 송도에서 전남 해남에 이르는 해안으로, 해안선이 극도로 복잡한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을 이룬다. 조차(潮差)는 서쪽으로 갈수록 점차 커지고 간석지가 곳곳에 형성되어 있어서 간척된 곳도 많다. 특히 남해안의 서부에는 약 2,000개 이상의 섬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어 세계에서 보기 드문 다도해를 이룬다. 지절(肢節)이 다양한 해안부와 도서부 곳곳에 뛰어나게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산재하며, 대략 여수반도(麗水半島)를 경계로 동부에 한려해상(閑麗海上), 서부에 다도해해상(多島海海上)의 두 국립공원이 지정되어 있다. 서해안은 압록강 하구에서 전남 해남에 이르는 해안으로, 직선거리는 650 km이나, 실제거리는 4,719 km에 달한다. 특히 서해안의 남부는 해안선이 복잡하여 리아스식 해안의 발달이 현저하다. 서해안은 일반적으로 조차가 큰데, 특히 아산만 일대에서는 대조(大潮) 때의 평균조차가 8.5 m 이상이 된다. 연안의 해저지형이 비교적 평탄하고 조차가 크므로 곳곳에 넓은 간석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그 간석지는 예로부터 간척의 대상이 되어 왔다. 지금까지 실시된 대규모 간척사업 중 대표적인 것은 전북 군산시(舊옥구군) 일대, 부안군 계화도(界火島) 일대, 전남 진도의 소포리(素浦里) 일대 등지에서 완공된 것들이다. 그와 같은 대단위 간척사업들로 해서 서해안은 네덜란드의 해안과 더불어 인공에 의한 해안선의 형태 변화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해안으로 유명하다. 간석지 후면에는 사빈해안이 형성되어 있어 해수욕장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해안을 따라 넓은 평지가 있고, 배후 산지가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는 해안부에서는 곳에 따라 사구의 발달도 볼 수 있다. 비교적 규모가 큰 사구는 충남 서산시 원북면(遠北面) 신두리(新斗里) 해안, 안면면(安眠面) 장곡리(長谷里) 해안, 전북 고창군 상하면(上下面) 해안 등지에 발달하였다. 그 밖에 곳곳에 암석해안도 형성되어 있고, 대천(大川)해수욕장 북쪽, 무창포(武昌浦) 해수욕장 남쪽 등지에는 파식대(波蝕臺)도 발달하였다.
〈특수 지형〉 석회암지대가 분포하는 강원과 충북 일대에는 석회암의 용식지형인 카르스트 지형이 발달하였다. 카르스트 지형의 대표적인 특징인 돌리네는 주로 원형 또는 원형에 가까운 와지(窪地)를 이루며, 여러 개의 돌리네가 합쳐진 복합 돌리네도 곳곳에 형성되어 있다. 카르스트 지역에서는 하계망(河系網)의 밀도가 낮은 것이 특징이다. 카르스트 지형에서 나타나는 석회암 동굴도 대부분 강원·충북 일대에서 발견되는데, 중요한 것은 삼척의 환선굴(幻仙窟)·초당굴(草堂窟)·대이굴(大耳窟)·신령굴(神靈窟)·용연굴(龍淵窟), 정선의 주암굴(晝岩窟), 평창의 백룡굴(白龍窟), 영월의 고씨굴(高氏窟)·용담굴(龍潭窟), 단양의 고수굴(高藪窟)·노동굴(蘆洞窟)·남굴(南窟)·지하굴(地下窟), 원성의 금대굴(金垈窟), 봉화의 평천굴(坪川窟), 울진의 성류굴(聖留窟) 등이다. 그들 동굴 안에는 종유석과 석순을 비롯한 갖가지 아름다운 동굴지형이 형성되어 있어 대부분의 석회암 동굴이 관광지로 되어 있다. 화산지형은 백두산 일대, 철원∼평강, 신계∼곡산 일대 및 제주도·울릉도 지역에 발달해 있다. 한국의 화산지형은 비교적 적게 분포하는 편이며, 그 중 대표적인 곳이 백두산 지역이다. 백두산은 1597, 1668, 1702년의 세 차례 폭발 및 용암유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대로 휴화산이다. 백두산의 산정부는 제3기의 화산 폭발로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알칼리성 조면암(租面岩)을 주로 하는 종상화산(鐘狀火山)을 이룬다. 그러나 해발고도 2,200 m 이하에서는 제4기에 용암이 분출하여 용암평원을 이루었으므로 순상화산(楯狀火山)의 형태를 보여준다. 중앙화구는 함몰되어 칼데라가 되었으며, 여기에 물이 괴어 천지(天池)를 이루고 있다. 백두산 일대에는 백두산 외에도 대연지봉(大脂峰:2,358 m)·소연지봉(小脂峰:2,115 m)·간백산(間白山:2,162 m)·소백산(小白山:2,172 m)·북포태산(北胞胎山:2,288 m)·두류산(頭流山:2,309 m) 등의 화산들이 있다. 특히 제4기 플라이스토세(世)에 백두화산대의 열하(裂)를 따라 분출한 용암류는 개마고원의 일부와 만주를 덮었는데, 그 면적은 동서 240 km, 남북 400 km에 이른다. 철원∼평강, 신계∼곡산의 용암대지도 제4기에 현무암의 열하분출로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의 열하분출의 중심지는 평강 남서부 약 3.5 km 지점에 있는 압산(鴨山:453 m)이라는 작은 화산으로 추측된다. 용암류의 일부는 한강하곡을 따라 흘러내려 전곡(全谷) 일대까지 이르른 것으로 보이며, 당시 용암류가 하상으로 흘러내려 하천력(河川礫)을 덮고 있는 것을 포천군 청산면(靑山面) 백의리(白蟻里)의 한탄강변에서 볼 수 있다. 제주도의 화산은 제3기말에서 제4기초에 걸쳐 분출된 것으로, 화산활동을 시기별로 5기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용암은 총 79회 이상 분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화산의 형태가 다르게 나타나, 한라산의 정상부는 종상화산을 이루나, 1,800 m대 이하는 순상화산을 이룬다. 산정에는 동서 약 600 m, 남북 500 m의 화구호인 백록담(白鹿潭)이 있다. 또 한라산 산록에는 약 360개의 기생(寄生)화산이 분포하는데 대표적인 것은 천당봉(天堂峰:1,707 m)·어후악(御後岳:1,025 m)·어승생악(御乘生岳:1,176 m)·성판악(城板岳:1,215 m) 등이다. 《동국여지승람》 및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002, 1007, 1455, 1570년에 화산폭발이 있었으므로 한라산도 역시 휴화산이다. 제주에는 또 김녕(金寧)의 사굴(蛇窟)과 만장굴(萬丈窟), 한림(翰林)의 협재굴(狹才窟)과 같은 용암동굴도 형성되어 있다. 울릉도는 종상화산으로서 형성시기는 제3기 말로 추정되며, 조면암과 안산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최고봉인 성인봉(聖人峰:984 m) 북쪽에 화구원(火口原)인 나리(羅里)분지가 있다. 나리분지는 2 km2 내외의 면적으로 해발고도 약 250 m에 위치하며, 분지 안에 알봉이라는 작은 화산이 있는데, 그 정상부의 소화구에는 또다른 작은 화산이 있어서 알[卵]처럼 보인다. 독도는 2개의 화산섬으로 나뉘어 있고, 최소한 2개의 화구가 관찰된다. 그러나 생성연대는 아직 불확실하다.
【기후】 한국은 유라시아대륙의 동단에 돌출한 반도로, 북위 33∼43 °에 걸쳐 남북으로 뻗어 있으며, 반도를 따라 척량부(脊梁部)를 이루는 태백산맥이 위치하고 있어 국토가 작은 데 비해 동서남북의 기후가 다양하다. 또 중위도의 온대에 위치하여 지역적인 다양성과 함께 계절적 변화에도 다채로운 추이를 볼 수 있다. 기후의 특색은 기온의 측면에서는 대륙성기후로 규정할 수 있고 강수(降水)나 바람의 측면에서는 몬순(계절풍)기후로 규정할 수 있다. 춥고 건조한 대륙성 기단인 시베리아 기단에 영향을 받는 겨울철에는 비가 적고 매우 건조하다. 이에 반해 여름철은 6월 말부터 장마전선의 영향으로 집중호우가 내려 많은 피해가 일어나기도 한다. 이러한 장마 시기가 지난 7~8월에는 북태평양 기단의 영향으로 고온다습한 기후를 보인다. 이와 같이 뚜렷한 성격의 겨울과 여름에 비해 봄과 가을은 짧지만 맑고 쾌청한 날씨가 연속되어 나타난다.
〈기온의 특색〉 한국은 위도에 비하여 연교차가 크며 여름은 무덥고 겨울은 혹한이며 길다.
⑴ 기온의 남북차:위도 10 ° 사이에 걸쳐 있어 연평균기온과 1월 평균기온의 분포에서 남북차가 뚜렷하고 무상기일(無霜期日)에서도 뚜렷하다. 연평균기온은 서울이 11.1 ℃, 제주가 14.7 ℃, 개마고원 북단의 중강진(中江鎭)이 3.9 ℃로서 남북차는 10 ℃에 달한다. 지역적으로는 남해안지방이 13∼14 ℃, 중부내륙이 10∼12 ℃, 북부고원지방이 3∼5 ℃의 분포를 보인다. 일교차는 위도와 관계없이 일반적으로 내륙지방이 크고 해안지방이 작다. 계절적으로는 겨울철 맑은 날에 일교차가 가장 크고 여름장마철에 가장 작다.
⑵ 기온의 동서차:같은 위도상의 동해안이 서해안에 비하여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시원하다. 이는 척량산맥이 북서풍을 차단함으로써 영동지방에 푄 현상이 나타나고 또 동한난류(東韓暖流)의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이다. 비슷한 위도의 인천과 강릉을 비교하면 8월 평균기온은 인천이 25.1 ℃, 강릉이 24.3 ℃, 1월 평균기온은 인천이 -4.0 ℃, 강릉이 -1.0 ℃로서, 이러한 현상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갈수록 더 두드러진다.
⑶ 무더운 여름과 긴 겨울:고온다습한 북태평양 기단이 동부아시아를 지배하는 8월에 최고기온이 나타난다. 장마가 끝나는 7월 말 이후 북태평양 기단이 확장되면 날씨가 맑아지고 이에 따라 일사량이 증가한다. 또 이 기단이 가장 큰 세력을 떨치는 한여름[盛夏]에는 지역에 따른 기온차가 별로 크지 않다. 이 때는 수평적인 기온차보다 수직적인 기온차가 더 크다. 한국의 서극(暑極)은 대구(1942년 8월 1일 40.0 ℃를 기록)를 중심으로한 영남 내륙지방이다. 이 지역은 내륙분지이므로 지면가열이 심하고 주위 산지를 넘어오는 바람이 높새 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겨울철은 개마고원을 중심으로 북부 내륙지방에 가장 빨리 시작되어 차차 남쪽으로 이동하며, 봄은 반대로 남쪽에서 빠르고 북쪽으로 갈수록 늦어진다. 따라서 겨울기간은 북부지방이 길고 남부지방은 짧으며 봄과 가을의 기간은 북부지방일수록 매우 짧다. 벚꽃 개화일이나 무상기일의 분포는 남북간의 기후 차를 잘 반영하고 있다. 한극(寒極)은 중강진으로 1933년 1월 12일 -43.6 ℃를 기록한 바 있고, 1월 평균기온은 -20.8 ℃이다.
⑷ 겨울 몬순과 삼한사온(三寒四溫):한국에서 겨울 기후의 특색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삼한사온 현상이다. 이는 북서몬순의 강약에 따라 이루어지는 기온추이의 하나의 파동현상이다. 즉 겨울철 기온은 대체로 7∼10일 주기로 내습하는 한파(寒波)에 의해 승강현상이 되풀이된다. 이 한파는 시베리아 기단의 성쇠에 따라 결정되는데 시베리아 고기압이 발달하여 남쪽으로 확장되면 한반도는 한파에 휩싸여 기온이 급격히 하강한다. 이 때 한국 주변의 기압배치는 서고동저형(西高東低型)이 된다. 고기압이 약화되면 서고동저형의 기압배치는 무너지고 중국 내륙으로부터 이동성고기압이나 때로는 저기압이 동진해온다. 이동성고기압이 통과할 때는 엄동(嚴冬) 중의 봄날씨가 되기도 하며 저기압이 통과할 때에는 눈 또는 비를 내린다. 한파는 11월 중순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2월 말까지 여러 차례 내습하는데 때로는 3월에도 ‘되돌이 한파’가 내습하여 이른바 ‘꽃샘추위’가 나타난다.
〈강수의 특색〉 습윤기후 지역에 속하여 비가 많은 편이다. 전년(全年) 강수량은 울릉도와 제주가 가장 많아 1,400∼1,800 mm이며 남해안이 1,400∼1,500 mm, 중부가 1,200 mm, 북부가 800∼900 mm로 북쪽으로 갈수록 줄어든다.
⑴ 다우지역(多雨地域)과 소우지역(少雨地域):연강수량의 지역적인 분포는 지형의 영향이 잘 반영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대체로 다우지역은 섬진강 유역과 남해안 일대, 제주도, 울릉도, 한강 중·상류, 청천강 중류, 영흥만 연안 일대로, 지형에 의한 바람받이 지역에 해당한다. 소우지역은 낙동강 중·상류(900 mm), 서해연안 도서지방, 대동강 하류지방, 개마고원 등 지형에 의한 바람그늘[風下] 지역 또는 낮은 평지이다.
⑵ 여름철 강수와 집중호우:강수의 특색 중 또 하나는 강수량의 계절적인 편중이 심한 점이다. 연강수량의 70 %가 6∼9월인 4개월 동안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 중에도 7월 강수량이 전체의 28 %를 차지한다. 여름 강수량은 장마철의 강수량과 8월의 태풍 및 국지적인 소나기에 의해 결정된다. 강수 형태는 내륙지방의 지형적인 요인, 장마전선과 제트류(jet stream)의 일치, 열대성 저기압의 통과 등으로 불규칙적이며 강우강도가 큰 집중호우형이다.
⑶ 장마:여름우계 중 가장 중요한 현상은 장마이다. 장마철의 시작은 6월 24일경이나 이른 해에는 6월 초순, 늦은 해에는 7월까지 늦춰진다. 해에 따라서는 장마를 거치지 않은 채 삼복더위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또한 장마전선이 형성되어 있으나 제대로 비가 내리지 않는 ‘마른 장마’가 있는가 하면 집중호우를 비롯한 큰 비를 가져오는 예도 있다. 장마철 중에는 일단 북상한 장마전선이 2∼3일 간 일시적으로 후퇴하면 맑은 날씨가 되는데 이것이 이른바 ‘장마 휴식 현상’이다. 또 해에 따라서는 장마가 끝나고 1주일 이상 지난 후에 다시 장마전선이 남하하는 ‘되돌이 장마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⑷ 눈·서리·안개:겨울철에는 비보다는 눈이 많다. 눈은 저기압이 통과할 때에 내리기도 하나 계절풍에 의해 지형적으로 나타나는 지형성 강설이 더 많은 편이다. 울릉도는 한국 제1의 다설지역으로 북서몬순이 동해로부터 많은 수증기를 공급받아 많은 눈을 가져오게 된다. 내륙부에서는 북동기류의 바람받이 사면인 태백산맥의 산간지방, 북서풍의 바람받이 사면인 소백산맥의 산간지방과 북부 산간지방이 다설지역이다. 또 무상기간은 남부지방에서 북부지방으로 갈수록 짧고 해안지방에서 내륙지방으로 갈수록 짧으며, 동해안지방보다 서해안지방이 짧다. 또 안개가 끼기 쉬운 조건으로는 대기 중의 수증기의 양, 약한 바람, 온도차가 큰 공기의 접촉, 응결핵 등을 들 수 있는데, 도시지역이나 해안지역은 수증기가 많으며, 분지에 안개가 많은 것은 바람이 약하고 냉각에 의한 기온역전현상(氣溫逆轉現象)이 잘 일어나기 때문이다. 도시의 경우는 대기오염으로 인한 스모그현상이 자주 발생한다.
〈기압과 바람〉 시베리아 고기압의 지배를 받는 겨울철에 기압이 가장 높고 장마전선이 정체하는 7월에 가장 낮다. 바람은 기압 경도력(傾度力)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공기의 이동 상태이므로 계절에 따른 기압배치가 바람을 결정한다. 한국은 겨울철에는 주로 북서풍이 탁월하고, 여름에는 남동풍 또는 남서풍이 탁월하다. 이는 겨울철에는 서고동저형 기압배치가 탁월하여 시베리아 고기압으로부터 바람이 불어 내려오기 때문이며, 여름에는 남고북저형 기압배치를 이루어 북태평양 고기압으로부터 바람이 불어 올라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풍향은 국지적으로 지형의 영향을 많이 받아 곳에 따라서는 특이한 탁월풍이 나타나기도 한다.
⑴ 기단과 전선:한국은 열대기단인 북태평양 기단과 한대기단인 시베리아 기단, 그 사이에 형성되는 한대전선의 움직임의 영향을 받는다. 한국을 비롯한 동부아시아의 기후를 지배하는 기단으로는 시베리아 기단과 북태평양 기단이 있으며, 그 밖에도 주로 봄철에 나타나는 양쯔강[揚子江] 기단과 초여름에 형성되는 오호츠크해(海) 기단이 있고 태풍을 몰아오는 적도기단이 있다.
⑵ 높새바람:동해 방면에서 태백산맥을 넘어 불어오는 북동 또는 동북동의 건조한 바람으로 늦은 여름에 많이 분다. 높새바람도 푄과 같은 건조풍이나 그 성인(成因)은 상이하다. 이는 일본 남해상에 태풍이 빈번히 내습할 때 또는 오호츠크해 고기압이 동해 방면까지 확대 발달하여 오랫동안 정체할 때 이 고기압역(高氣壓域)에서 한국으로 불어오는 이상건조풍이다. 높새바람은 경기를 중심으로 충북·충남·황해의 4도에 걸친 광범한 지역에 나타나는데 바람이 계속되면 가뭄이 오고 작물의 피해가 크다.
〈기후 구분〉 한국은 면적이 좁아 세계적인 규모로 보면 온대와 냉대의 점이적(漸移的) 성격을 가지나 한반도의 지리적 위치·지형 등, 기후인자의 복잡성으로 인하여 기후현상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⑴ 쾨펜 방법에 의한 구분:기온과 강수량의 평균값을 기준으로 구분한 것으로, 1월 -3 ℃ 등온선이 기준이며 이 선 이북은 냉대기후(D기후), 이남은 온대기후(C기후)이다. 1월 -3 ℃선은 금강산을 정점으로 하는 태백산맥과 태백산을 전향축으로 하는 소백산맥을 따라 남서쪽으로 내려와 충북을 양분하는 한강수계와 금강수계의 분수령인 괴산에서 북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천안 부근에서 차령산맥을 따라 서천군과 보령시의 경계를 지난다.
⑵ 온량지수(溫量指數)에 의한 구분:한국은 강수량으로 볼 때 습윤기후 지역에 속하여 식물분포를 결정하는 조건으로는 강수량보다 기온의 요소가 더 중요하므로 온량지수를 바탕으로 한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이 구분이 식물분포와 잘 들어맞는다. 즉 식생(植生)을 잘 반영하는 구분으로 남쪽에서부터 남해안기후구·남부기후구·중부기후구·북부기후구·개마고원기후구로 나뉜다.
⑶ 종래의 기후구:쾨펜의 C·D기후의 경계선인 최한월(最寒月) 평균기온 -3 ℃의 등온선으로 남부의 온대기후와 북부의 냉대기후를 나눈다. 이러한 대구분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북부의 D기후 지역을 남북의 기온차에 따라 중부와 남부로 나누고 태백·낭림산맥을 경계로 동서로 나눈다. 넓은 서안지방은 해안에서의 거리에 따라 서안형(西岸型)과 내륙형으로 구분한다. 동안지방은 난류나 바람의 영향으로 남북의 차가 있어 이것을 북부·중부·남부로 구분한다. 또 북부 고원지방은 대륙성이 강한 개마고원형으로 하고 대조적으로 해안의 영향을 항상 받는 남해안은 남해안형으로 구분한다. 그러므로 소기후구는 서안형에 북부서안·중부서안·남부서안의 3개 기후형이 있고, 내륙형에 북부내륙·중부내륙·남부내륙의 3개가 있으며, 동안형은 북부동안·중부동안·남부동안의 3개가 있다. 그 밖에 개마고원형·남해안형·울릉도형 등 3개가 있어, 모두 12개의 기후구가 된다. 그리고 남부내륙형 안에 대구 특수지역이 포함되어 13개의 소기후구로 나뉜다.
【식물】 한국은 남북으로 긴 반도를 이루고 주요 산맥들이 동에서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지형적인 조건 때문에 위도에 따른 식물의 수평분포가 식별되며, 또한 북으로는 백두산과 남으로는 한라산이 높게 솟아 있어서 수직분포의 특성도 나타내고 있다. 한국에 분포하는 식물의 대부분은 시베리아·중국 및 일본 등지와 공통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육상 관다발식물을 중심으로 하여 세계의 식물분포를 개관할 때, 한국은 1947년 굿이 제안한 세계 37개 식물구계 중에서 중일구계(中日區系:Sino-Japanese Region)에 속한다. 한편, 중일구계에서 연평균 기온 14 ℃ 가량인 북위 35 ° 이남의 남부해안지대와 제주·흑산도 등 남해안의 도서지방은 난대아구계(暖帶亞區系)로 구분되고, 연평균 기온 5∼14 ℃ 지역으로, 북위 35 ° 이북의 한국 전역은 온대아구계(溫帶亞區系)로 구분되는데 특히 온대아구계를 세분할 때 한국은 한국구로 지칭된다. 따라서, 육상 관다발식물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식물분포구는 남부해안지대가 난대아구계에, 나머지 지역은 온대아구계의 한국구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 밖에 분포론적 연구가 이루어진 해조류(海藻類)의 경우를 보면, 한국은 태평양지역의 5개 구역 중 일본구(日本區)로 분류되고 있는데, 강제원(姜悌源)은 66년에 이것을 동해안 북부, 동해안 중남부, 남해안, 서해안, 제주의 5개 소구역으로 나누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한국산 식물을 주요 분류군에 따라서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관다발식물〉 한국에 생육하는 것으로 밝혀진 관다발식물의 총수는 약 4,200종이 되는데, 이는 전세계에 분포하는 관다발식물의 약 2 %에 해당한다. 이 중 한국 특산 관다발식물로는 금강인가목속(Pentactina)·개느삼속(Echinosophora)·미선나무속(Abeliophyllum)·금강초롱꽃속(Hanabusaya) 및 모데미풀속(Megaleranthis) 등이 있으며 특히 미선나무속은 세계에서 1속 1종밖에 없는 한국 고유식물이다. 그 밖의 관다발식물로서 희귀종은 금강인가목(Pentactina rupicola:금강산)·개느삼(Echinosophora koreensis:함남·강원 양구)·미선나무(Abeliophyllum distichum:충북 진천·괴산)·금강초롱꽃(Hanabusaya asiatica:금강산·함남·강원) 및 모데미풀(Megaleranthis sanicalifolia:지리산·설악산) 외에, 백두산이나 한라산 등 고산지대에서 극히 제한된 분포를 하는 눈잣나무(Pinus pumila)·돌매화나무(Diapensia lapponica var. obovata)와 울릉도에 국한해서 자라고 있는 너도밤나무(Fagus crenata var. multinervis) 등이 있다. 한편, 관다발식물의 수평분포를 보면 난대아구계에 속하는 한국의 남해안 일대는 이 아구의 표징종(標徵種)이 되는 종가시나무 외에 동백나무·송악·북가시나무·참가시나무·후박나무·식나무·구실잣밤나무·모밀잣밤나무·개산초와 같은 상록수들이 특징적이다. 온대아구계의 한국구에 속하는 북위 35 ° 이북의 지역은 온대림으로 대표되는 식생을 나타내고 있는데, 식물 분포의 특성에 따라서 흔히 한국구 북부, 한국구 중부 및 한국구 남부로 구분한다.
⑴ 한국구 북부:황해도 장산곶과 함남 원산만을 연결하는 선의 북쪽을 지칭한다. 한국구 중에서 높은 산이 가장 많고 고원지대도 많아서 잎갈나무·가문비나무·종비나무·분비나무·젓나무·잣나무 등 침엽수림(針葉樹林)과 신갈나무·떡갈나무·신나무·강계버들 등과 사시나무·좀풍게나무·거제수나무·박달나무·자작나무·당느릅나무·떡느릅나무·난티나무·찰피나무·나도박달나무 등의 활엽수림(闊葉樹林)이 발달하고, 소나무·진퍼리버들·좀자작나무·꼬리조팝나무·들쭉나무 등도 많다. 이 지역에 속하는 함남 신흥군과 강원 양주군의 야산에서 개느삼이 생육하고, 평북과 함남의 일대에는 눈측백의 대군락이 곳곳에 발달하고 있으며, 눈잣나무의 군락도 산록에 발달하고 있다. 또한, 평북의 묘향산과 함북의 다당포 일대는 한국 자생 죽류(自生竹類)의 북쪽 한계지역이다. 한편, 초본식물로는 평남·함남·강원 일대의 고산지대에서 볼 수 있는 금강초롱꽃과 장백연산·포대산·관모봉 등지에서 생육하는 장군풀이 특이한 종류들이고, 개병풍·돌단풍·깽깽이풀 등도 흔히 자란다.
⑵ 한국구 중부:장산곶과 원산만을 연결하는 선의 남쪽에서 충남 태안반도와 경북 영일만을 연결하는 선의 북쪽을 지칭한다. 이곳에는 금강산(1,638 m)을 비롯하여 설악산·오대산·태백산 등이 있다. 중부지방에 생육하는 주요 침엽수로서는 젓나무·구상나무·향나무·주목·노간주나무·가문비나무·소나무·잣나무·눈잣나무·눈측백들이 있고, 활엽수로는 강계버들·서어나무·산딸나무·때죽나무·초피나무·개산초 등이 북쪽 한계지역을 이루며 생육한다. 한편, 설악산의 대청봉과 중청봉 사이에 발달한 눈잦나무의 군락과 오대산의 눈측백, 금강산의 잎갈나무는 이들 분포의 남쪽 한계지가 되고, 백령도와 대청도 등 서해 도서지방에는 난류의 영향으로 후박나무와 동백나무 등 상록수(常綠樹)가 자생하는 것이 특이하다. 그 밖에 금강산의 특산인 금강인가목과 처음에 지리산에서 발견되었으나 설악산에서도 생육이 확인된 모데미풀, 충북 진천과 괴산 등지의 구릉에서 자라는 미선나무 등 특산식물이 있고, 충북 단양의 석회암지대에 생육하는 측백나무 군락도 특기할 종류이다. 중부의 보편적인 초본식물(草本植物)로는 금강초롱꽃을 비롯하여 가는장구채·할미꽃·금강봄맞이·자난초·분취·금붓꽃(애기노랑붓꽃) 등 여러 가지가 있다.
⑶ 한국구 남부:영일만과 태안반도를 연결하는 선의 이남 지역에서 난대아구계에 속하는 지역을 제외한 지역이다. 이곳에는 지리산·덕유산·가야산·백운산 등이 있으며, 주요 수종으로는 서어나무·개서어나무·신갈나무·졸참나무·떡갈나무·상수리나무·굴참나무·단풍나무·신나무·고로쇠나무 등의 활엽수가 우세하고, 이팝나무·들메나무·찰피나무·올벚나무·산벚나무·느티나무 등의 거목(巨木)들이 자란다. 그리고 이 지역의 산지에는 자생 죽류의 군락이 흔히 발달하고, 지리산의 모데미풀, 대둔산의 왕벚나무, 울릉도 성인봉의 너도밤나무·섬피나무·우산고로쇠 등 특산종이 있다. 그 밖에, 서부 해안지대에 흔히 발달하는 퉁퉁마디·갯질경이·갯완두·갯개미취·해홍나물·갯쑥부쟁이 등의 염생식물(鹽生植物)도 특이하다. 한편, 연평균기온이 50 ℃ 이하로서 한대림(寒帶林)이 발달하는 지역은 백두산을 중심으로한 해발고도 600 m 이상의 고지대와 중부지방의 해발고도 1,000 m 이상의 금강산·설악산 일대, 그리고 남부지방의 해발고도 1,300 m 이상의 지리산 산정, 1,500 m 이상의 한라산 일대에 국한되어 있으며, 눈잣나무가 표징종이 되고, 돌매화나무·시로미 등이 특기할 식물이다. 관다발식물을 중심으로 한 식물들의 수직분포는 북부 산악지대와 제주 한라산 등지에서 비교적 뚜렷하게 볼 수 있으나, 한국에는 높은 산이 없어 이상적인 수직분포의 특징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를테면, 삼림한계선(森林限界線)의 고도는 백두산의 경우가 2,000 m이고, 한라산의 경우는 그 한계선을 그을 수 없기 때문에 진정한 고산대의 발달은 볼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한라산의 식물 수직분포는 대략 해발 600 m까지를 상록활엽수림대, 1,300 m까지를 낙엽활엽수림대, 1,900 m까지 침엽수림대로 구분할 수 있고, 1,900 m 이상의 정상부에 아고산대(亞高山帶)의 식물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어 있다.
〈선태식물〉 한국산 선태식물(蘚苔植物)의 분포에 대한 연구는 잘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현재 알려진 총 종류수는 선류(Musci) 약 500종, 태류(Hepaticae)약 200종, 각태류(角苔類:Antocerotae) 3종 등 도합 700여 종에 이르고 있다. 그 중 지금까지의 연구가 주로 선류에 관한 것이고, 지역적으로도 남한에 국한된 종류들이어서 앞으로 새로운 종류가 더 많이 추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균류〉 한국에서 생육하는 고등균류(高等菌類)는 지금까지 약 620여 종이 알려져 있으나, 이에 대한 분포론적 종합 검토는 아직 없었다.
〈조류〉 한국 내륙지방의 하천이나 호수 및 연안지대의 해수에서 생육하는 조류(藻類)에는 담수조류(淡水藻類)가 약 1,400종, 해조류(海藻類)가 약 700종으로 밝혀져 있는데, 이 중에는 한국에 고유한 식물들도 밝혀져 있다. 이를테면 담수산 녹조류 미소포자과의 스트리올라타(Microspora striolata), 남조류 소구체과의 레모타(Merismopedia remota), 하마토이데아 브레비아르티쿨라타(Hammatoidea breviarticulata) 등은 한국에서 채집·동정(同定)된 신종들이고, 해조류 중에서 제주분홍말(Dasysiphonia chejuensis)과 분홍염주말(Gloeophycus koreanum)은 한국산 신속 식물들이다. 특히, 해조류에 관한 한국 연안의 지리적인 분포는 비교적 자세히 알려져 있는데, 원산만 이북의 동해안 북부지역은 일본 홋카이도[北海道]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해조상(海藻相)과 유사하여 미끌도박·다시마류와 같은 북방계 특유의 해조들과 우뭇가사리·미역·모자반 등의 온대계 해조류들이 혼생하여 그 구성비는 북방계 29 %, 온대계 51 %, 남방계 2 %, 범세계종 18 %로 되어 한국의 연안 중에서 북방계 해조류들이 가장 많은 지역이다. 한편, 원산만에서 영일만 남쪽 장까지의 동해안 중남부에는 북방계 해조류로서 마른나무·분홍치·개다시마·참빗가지 등과 구멍쇠미역·쇠미역 등이 자라고, 남방계로서는 실그물바탕말·구멍불레기말·가는잎송진내·가시우무 등이 함께 생육하는데, 그 구성비는 북방계 10 %, 온대계 70 %, 남방계 4 %, 범세계종 16 %이다. 남해안과 울릉도구는 북방계로서 홑파래·뜸부기·김류·미끌도박·바다참나무잎·안티탐니온 등과 남방계로서는 실그물바탕말·홑파래·청각·국수나물·방황게발·산호말 등이 함께 생육하는데, 이들의 구성비는 북방계 6 %, 온대계 76 %, 남방계 5 %, 범세계종 13 %이다. 서해안은 해조상이 매우 빈약하여 북방계 6 %, 온대계 71 %, 남방계 4 %, 범세계종 20 %로 남해안 서쪽과 비슷하고 싹새기 외에는 특별한 북방계 해조류를 볼 수 없는 점이 특이하다. 제주도는 뜸부기·가는빨간검둥이 등의 북방계 해조류와 그물공말·잎맥말·넓미역 등 이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남방계 식물들이 자라고 있는데, 그 구성비는 북방계 2 %, 온대계 74 %, 남방계 10 %, 범세계종 15 %이다. 따라서, 제주도는 한국 연안 지대에서 남방계 해조류가 가장 많이 생육하는 지역이라 할 수 있다. 한 가지 특기할 것은 독도는 위도상으로 동해안 중남부에 위치하고 있으나, 이 지역은 쿠로시오난류의 영향을 크게 받아 제주도와 유사한 해조류의 종 구성을 하고 있지만, 제주도의 경우보다 더 아열대성을 나타내고 홍조류(紅藻類) 식물이 우세하게 생육하고 있는 점 등으로 독도구라는 독립된 분포구를 이루고 있음이 밝혀졌다.
【동물】 한국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본토와 떨어져 남쪽에 제주도, 동쪽에 울릉도가 있다. 신생대(新生代) 제4빙기에는 빙기(氷期)와 간빙기(間氷期)가 번갈아 찾아와 평균기온이 10 ℃ 내외를 오르내렸고 해면(海面)은 얼었다 녹으면서 200 m나 오르내렸다. 그리하여 대한해협(大韓海峽)은 몇 차례 육속(陸續)되어 한반도와 일본 사이를 연결하였다. 대한해협이 마지막으로 육속된 것은 약 2만 9000년 전의 제4빙기 초기였다. 이 무렵 황해는 육지였고, 황해와 남해로 흐르는 강들은 모두 일본의 혼슈[本州] 및 규슈[九州]의 하천과 중국 대륙의 황허-양쯔강계[黃河揚子江系] 하천과 연결되어 육지는 육상동물의 통로가 되고 하천은 담수동물의 통로가 되었으므로 현존하는 한국의 육상·담수동물은 중국대륙과 일본열도의 것들과 깊은 관계가 있다.
〈동물지리구〉 한국의 동물상(動物相)은 위도와 해발고도 및 해황(海況)에 따른 변이성이 비교적 크다. 육상동물에서는 동물지리구(動物地理區)상 주로 포유류의 분포를 기준으로 하면 한국 북동소구(北東小區)와 한국 남서소구(南西小區)로 나뉜다. 한국 북동소구는 함남·함북의 고지대를 포함하며 구북구(舊北區)의 시베리아아구(亞區)에 속하고 여기에 서식하는 대표적인 동물은 모두 북방형(北方型)이며, 이 지구의 특산종 또는 중국 북동부와 시베리아 동쪽에 서식하는 종·아종 또는 근연종은 같은 시베리아아구에 속하는 일본 홋카이도, 러시아의 사할린과 관계가 깊다. 대표적인 종은 식충목(食蟲目)의 희시무르고슴도치·우수리땃쥐·야마시나땃쥐·만포땃쥐·뒤쥐·쇠뒤쥐, 토끼목의 우는토끼, 박쥐목의 아무르박쥐·긴꼬리수염박쥐·북방애기박쥐·검은토끼박쥐·북방뿔박쥐·쇠뿔박쥐, 식육목(食肉目)의 대륙목도리담비·검은담비·무산쇠족제비(흰족제비), 소목의 대륙멧돼지·백두산사슴·우수리사슴이다. 한국 남서소구는 북동소구를 제외한 한국 전역이며 구북구의 중국아구(中國亞區)에 속한다. 이 남서소구에 서식하는 대표종은 모두 남방형(南方型)이며 특산종 또는 아종도 중국의 둥베이[東北] 남부, 중국 화북(華北)·중부와 일본에 서식하는 것과 같은 종, 같은 아종이거나 매우 비슷한 종류들이다. 한국 남서소구의 대표종은 식충목의 고슴도치·토마스땃쥐·제주땃쥐·울도땃쥐·두더지, 토끼목의 멧토끼, 쥐목의 쇠갈밭쥐·날다람쥐, 박쥐목의 붉은박쥐·고바야시박쥐·문둥이박쥐·멧박쥐·긴가락박쥐·제주관박쥐, 식육목의 너구리·산달·노란목도리담비, 소목의 멧돼지, 대륙사슴·노루·고라니 등이다. 포유류뿐만 아니라 다른 무리의 동물도 북동소구와 남서소구로 나뉘며, 조류도 북방형인 북꿩·들꿩·멧닭·세가락딱따구리·백두산오색딱따구리·개미잡이 등이 있고, 파충류의 북살무사·까치살무사, 양서류의 북방산개구리 등이 북동소구에 분포한다. 이 중 까치살무사는 설악산·오대산·덕유산·지리산의 비교적 높은 지대에도 서식한다. 한국 남서소구에 분포하는 특색 있는 육상 척추동물로는 북동소구에 없는 파충류인 남생이·도마뱀붙이·살무사, 양서류인 맹꽁이·조선산개구리·금개구리 등이다. 담수어류(淡水魚類)의 분포는 압록강 상류인 개마고원 지역에는 아무르계(系) 어류가 많고 북동부(함남·북, 강원 북부)의 해안지역의 어류는 우수리 지방과 관련이 깊다. 그래서 개마고원 지역을 시베리아아구의 아무르소구(小區)에 넣고, 북동부 해안 지역은 같은 시베리아아구의 마리팀소구에 넣는다. 한국 남서부는 중국 둥베이 남부와 공통성이 커서 중국아구의 한국소구로 구분하기도 한다. 전체적으로는 한국의 육상동물 및 담수어류는 아시아 대륙과 공통인 종류가 많고 한국 특산종은 비교적 적다. 남서소구(한국 저지소구)의 조류상(鳥類相)은 중국과 공통된 종이 약 90 %나 되고 울도방울새·뿔종다리·붉은배동고비·울도오색딱따구리·제주오색딱따구리·긴부리쇠딱따구리·크낙새·참수리·들꿩 등 소수의 아종만이 한국 특산종이다. 해양동물상(海洋動物相)에서는 리만한류(寒流)의 영향을 받는 동해 북부 해역에서는 한류성인 북방형 동물, 쿠로시오난류의 영향을 받는 동해 남부·남해 및 서해 남부 해역에는 남방형 동물이 비교적 많으나 전체적으로는 한국 연해에는 온대형 종들이 가장 많다. 절지동물문(節肢動物門) 갑각강(甲殼綱) 십각목(十脚目)의 게류는 185종(아종 포함)이 있는데, 7종(3.8 %)이 북방형이고 온대형과 남방형은 각각 88종(47.6 %), 90종(49.6 %)이다. 같은 십각목에 속하는 새우류는 해산종 63종 중 북방형 10종, 온대형 34종, 남방형이 19종으로 북방형이 비교적 많고, 집게류는 57종 중 북방형 9종, 온대형 40종, 남방형 8종으로 북방형이 남방형보다 많다. 십각목을 기준으로 하면 한국 연해 해역은 동물지리상 동해·남해·황해·제주의 4구역으로 나뉘며 동해와 남해의 경계는 영일만(迎日灣), 남해와 황해의 경계는 목포(木浦) 근해가 된다.
〈동물상〉 한국의 포유류[哺乳綱]는 소목(目)·고래목·식육목·토끼목·쥐목·식충목·박쥐목의 7목에 속하는 22과(科)의 105종(種) 또는 아종으로 구성된다. 7목 중에서 박쥐목이 27종 또는 아종으로 가장 많은 종을 포함하고, 다음에 쥐목(24종 또는 아종)과 식육목(24종 또는 아종)이며 토끼목은 멧도끼·우는토끼의 2아종만이 포함된다. 한국 특산종은 멧돼지·고라니·오소리·노란목도리담비·산달·족제비·제주족제비·여우·너구리·우는토끼·멧토끼·청서(청설모)·날다람쥐·하늘다람쥐·대륙박쥐·고슴도치·뒤쥐·제주땃쥐·울도 땃쥐·야마시나땃쥐·두더지·관박쥐·제주관박쥐·문둥이박쥐·고바야시박쥐·뿔박쥐 등인데, 이 중에서 울도땃쥐·고바야시박쥐·뿔박쥐의 3종 이외의 것들은 모두 아종들이다. 한국의 조류[鳥綱]는 아비목·논병아리목·슴새목·사다새목·황새목·기러기목·매목·닭목·두루미목·도요목·비둘기목·두견이목·올빼미목·쏙독새목·칼새목·파랑새목·딱따구리목·참새목 등 18목 65과 420여 종 또는 아종이, 종수로는 371종이 있다. 이 중 56종은 미조(迷鳥), 48종은 텃새, 266종은 철새인데 원앙사촌은 절멸된 것으로 여겨진다. 철새 중에서 112종은 겨울새, 64종은 여름새, 90종이 봄·가을의 나그네새이다. 18목 중 참새목이 177종 또는 아종으로 제일 많고, 다음이 도요목(70종 또는 아종)·기러기목(37종 또는 아종)·매목(32종 또는 아종)이며, 쏙독새목에는 쏙독새 1아종, 칼새목으로는 칼새와 바늘꼬리칼새의 2아종만이 포함된다. 한국의 파충류는 거북목과 뱀목[有鱗目] 2목이 있다. 거북목에는 바다에서 사는 장수거북과 바다거북, 민물에서 사는 남생이와 자라가 있다. 뱀목의 도마뱀류에는 3과 9종 또는 아종이 있고, 장수도마뱀·장지뱀·올디장지뱀은 한국 특산종이다. 또 뱀류에는 뱀과의 대륙유혈목이·유혈목이·비바리뱀·구렁이·줄꼬리뱀·누룩뱀·능구렁이·실뱀·무자치 등 9종, 살모사과의 북살모사·살모사·까치살모사·쇠살모사 등 4종, 바다뱀과의 먹대가리바다뱀과 바다뱀 2종 등 모두 15종이 있다. 한국의 양서류에는 도롱뇽목과 개구리목의 2목이 있다. 도롱뇽목에는 도롱뇽과 1과에 도롱뇽·꼬리치레도롱뇽·네발가락도롱뇽 3종이 있고, 개구리목에는 무당개구리과의 무당개구리, 두꺼비과의 두꺼비·물두꺼비, 청개구리과의 청개구리, 맹꽁이과의 맹꽁이, 개구리과의 참개구리·금개구리·북방산개구리·산개구리·아무르산개구리·옴개구리 등 14종과 아종이 있다. 한국의 어류(魚類)는 원구강(圓口綱) 2목 2과 5종, 연골어강(軟骨魚綱) 3목 21과 59종, 경골어강(硬骨魚綱) 23목 173과 808종으로 모두 872종이 알려져 있다. 이 중 민물고기는 약 150종이다. 해산어류 중 한류성(寒流性)인 대구·명태, 난류성(暖流性)인 전갱이·삼치·조기·참치, 중간형인 꽁치·참도미·고등어·멸치 등은 경제성이 높고, 담수어류 중 큰 것은 잉어·가물치이다. 한국 특산어류는 잉어목의 어름치·쉬리·금강모치·몰개·긴몰개·참중고기·두만모재·감돌고기·청백치·조치·줄납자루·가시납지리·서호납줄갱이·각시붕어·꾸구리·돌상어·흰수마자·모래주사·돌마자·뱀가사리·경모치·수수미꾸리·새코미꾸리·미유기·눈동자개·꼬치동자개·퉁가리·자가사리 등 28종, 청어목의 열빙어·별빙어·젖뱅어·사루기·자치 등의 5종, 농어목의 황쏘가리·올꺽정이, 다목장어목의 칠성말배꼽 등 모두 36종이다. 이 중에서 한강의 황쏘가리와 전국의 어름치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해초류(海類)는 어류·양서류·파충류·조류·포유류 등의 척추동물과 함께 척색동물문(脊索動物門)을 구성하는 해산 무척추동물이다. 한국의 해초류는 2목 79여 종이 알려져 있다. 한해성·한온해성 및 난해성 종은 매우 적고 온해성(溫海性) 및 온난해성(溫暖海性) 종이 대부분이다. 미더덕은 동해·남해·서해 연해에 널리 분포하고 개체수도 많다. 멍게는 한온해성 종인데 동해(울릉도 제외)와 남해(제주도 제외, 추자군도 포함)에 많으며 우렁쉥이라고도 한다. 미더덕과 멍게는 식용으로 중요하다. 탈리아류는 해초류와 함께 척색동물문의 미색아문(尾索亞門)을 이루는데, 여기에 속하는 송곳살파는 부유성(浮遊性)으로 남해에 다산한다. 한국의 극피동물(棘皮動物)에는 바다나리류·성게류·불가사리류·해삼류의 4강이 있으며, 세계적으로 6,000종이 알려졌는데, 한국에서는 모두 140종이 알려져 있다. 모악동물(毛顎動物)은 바다의 동물성 플랑크톤으로 중요한데 세계적으로는 65종이 알려져 있고 한국에는 1목 1과 19종이 있다. 동해화살벌레는 한류성이고 나머지는 대부분이 난류성 종들이다. 한국의 절지동물로는 거미[蛛形]류·갑각류·순각(지네)류·배각(노래기)류·곤충류의 5강이 알려져 있다. 거미류에는 거미목 41과 533종이, 진드기목 약 480종이, 전갈목으로는 전갈 1종만이 알려져 있다. 갑각류의 십각류에 새우류 16과 82종, 집게류 12과 57종, 게류 18과 185종이 알려져 있다. 새우류에서 민물 또는 기수(汽水)에 사는 것에 16종이 있다. 게류 중 범게는 세계적으로 황해에만 있는 1속 1종의 게이다. 십각류 중에는 경제성이 높은 것이 많고 동해에는 한류성인 도화새우·진흙새우·왕게·대게·털게, 남해에는 보리새우·꽃새우, 제주도에는 펄닭새우, 황해에는 중국젓새우·중하·대하·밀새우·붉은줄참새우·꽃게 등을 들 수 있다. 산간 계류의 낙엽 사이에는 단각류에 속하는 옆새우류가 많이 있는데 11종이 알려져 있고 소백옆새우가 가장 흔하다. 바다에는 단각류, 특히 해조에 붙어 사는 것이 매우 다양하고 개체수가 엄청나게 많으며 바다대벌레류는 28종이 기재되어 있다. 또 갯가에 밀려드는 해조를 헤치면 톡톡 튀는 갯가톡톡벌레도 단각류이다. 단각류는 모두 145종이 알려져 있다. 등각류는 육상에서 쥐며느리류의 쥐며느리, 해조 사이에는 주걱벌레류의 어리모래무지벌레, 해안 바위에서 갯강구를 흔히 볼 수 있고, 모두 90종이 알려져 있다. 부착성 동물인 만각류는 조간대(潮間帶)의 암석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한국에는 약 60종이 알려져 있다. 가장 흔한 것은 거북손이고, 또 조무래기따개비·검은큰따개비·줄따개비가 있다. 동물성 플랑크톤의 주요 구성원인 요각류는 담수와 바다에 흔하며, 모두 170여 종이 알려져 있다. 구각류(口脚類)의 갯가재는 황해와 남해에 흔하다. 지네류는 지상에서 사는데 한국에서는 3목 9과 44종이 알려져 있다. 노래기류도 지상생활을 하며 30여 종이 알려져 있다. 한국의 곤충은 무시류(無翅類)에 속하는 낫발이목·좀목·톡토기목, 유시류(有翅類)의 하루살이목·잠자리목·메뚜기목·흰개미목·강도래목·집게벌레목·다듬이벌레목·털이목·이목·노린재목·매미목·풀잠자리목·딱정벌레목·밑들이목·날도래목·나비목·파리목·벌목·벼룩목 등 23목 약 1만 1천 종이 알려져 있다. 23목 중 나비목이 가장 많고 약 2,450여 종을 포함한다. 나비목 중에서 나비류가 약 250종이고, 나머지가 나방류이다. 딱정벌레목의 장수하늘소와 무주군 설천면 일대의 반딧불이류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장수하늘소는 동부 시베리아·중국 북동부·한국(경기·강원)에 분포하며, 몸길이 12 cm에 이르는 것도 있어 구북구 북부에서는 딱정벌레 중 가장 큰 종이다. 한국의 선형동물로는 쌍기류(雙器類)와 쌍선류(雙腺類)가 알려져 있는데, 쌍기류에 유침목 4종이, 쌍선류에 원충목 31종 및 선미선충목(旋尾線蟲目) 12종 등이 있다. 환형동물로는 갯지렁이류[多毛類]·지렁이류[貧毛類]·거머리류[蛭類]의 3강이 알려져 있다. 갯지렁이류는 바다 밑에 살고 있어 바다의 생태계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며 약 280종이 알려져 있다. 지렁이류는 약 60종이 알려져 있고, 거머리류는 아직 연구가 미흡하며 거머리·말거머리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한국산 연체동물에는 다판류(多板類)·굴족류(掘足類)·복족류(腹足類)·부족류(斧足類)·두족류(頭足類)의 5강이 알려져 있다. 다판류는 군부류라고도 하며 2목 6과 20여 종이 알려져 있으며 줄군부가 흔하다. 굴족류는 뿔조개류라고도 하며 3종이 알려져 있다. 복족류는 7목 79과의 약 360종이 있다. 육상에는 민달팽이·달팽이, 민물에는 다슬기·쨈물우렁·논우렁, 바다에는 전복·소라·대수리·밤고둥·총알고둥 등이 흔하다. 부족류는 3목 35과 약 190종이 있고, 민물에는 재첩·칼조개·말조개·민물담치 등이, 바다에는 굴·바지락·백합·꼬막·피조개·홍합·국자가리비·떡조개·개량조개 등이 잘 알려졌다. 두족류는 십완목(十腕目)의 7과 28종, 팔완목(八腕目)의 3과 8종이 알려져 있다. 십완목에는 남해와 황해에 많은 꼴뚜기와 참오징어, 동해에는 피둥어꼴뚜기, 팔완목에는 동해에 많은 문어와 남해·황해에 많은 낙지가 알려져 있다. 문어는 한해성이고, 팔완목의 집낙지는 난해성이다. 태형동물(苔形動物)은 대부분 바다의 암석이나 해조에 붙어 산다. 한국의 전 연해에서 모두 150여 종이 알려져 있다. 윤형동물(輪形動物)은 미소하고 주로 민물에서 살며, 플랑크톤으로서 중요한 무리인데, 세계적으로 1,800여 종이, 한국에서는 150여 종이 알려져 있다. 편형동물(扁形動物) 중에서 자유생활을 하는 와충강(渦蟲綱)은 바다와 민물에서 사는데 아직 연구가 미흡하다. 플라나리아는 산간 계류(山間溪流) 어디서나 돌 밑에서 볼 수 있고, 높은 산의 수온이 낮은 계류에는 산골플라나리아가 있고, 동굴에는 장님플라나리아가 있다. 흡충강(吸蟲綱)과 촌충강(寸蟲綱)은 기생충 등을 포함하는데 흡충강의 간(肝)디스토마와 폐(肺)디스토마는 한국인의 주요 기생충이며, 촌충강에는 민촌충과 갈고리촌충도 발견된다. 강장동물(腔腸動物)은 대부분 바다에서 산다. 히드로충류·해파리류·산호충류(珊瑚蟲類)의 3강으로 나뉜다. 한국에서는 해파리류에 대해서는 연구가 뒤떨어져 있고, 히드로충류 약 120종, 산호충류 약 130종이 알려져 있다. 산호충류에는 아름다운 것이 많고 제주와 거문도 연해 30∼40 m 깊이 이하의 해저에는 산호충류가 많아 특이한 해저경관을 이룬다. 해면동물은 민물에서도 소수가 살지만 대부분이 바다에서 고착생활을 한다. 석회해면강(石灰海綿綱), 육방해면강(六放海綿綱), 보통해면강으로 나뉘며, 약 180종이 알려져 있다. 제주에서 나는 육방해면강에 속하는 해로동굴해면은 길이 30 cm로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그 속에 암수 1쌍의 새우가 들어 있어 함께 산다. 원생동물(原生動物)은 단세포동물인데 바다·민물·흙 속에서 살며 동물에 기생하는 것도 많다. 세계적으로 약 3∼5만 종이 알려져 있는데, 한국에서는 조사·연구가 미흡하다. 민물에서는 섬모충류(纖毛蟲類)가, 바다에서는 쌍편모충류(雙鞭毛蟲類)가 플랑크톤으로 중요하다. 이 밖에도 한국에서는 바다에서만 사는 유즐동물(有櫛動物)·완족동물(腕足動物)·성구동물(星口動物)·의충동물(擬蟲動物), 주로 바다에서 사는 유형동물(紐形動物), 민물·바다·흙 속에서 살고 있는 완보(緩步)동물 등 여러 문(門)의 동물들이 있다.
3. 주민·인구·취락
【민족·언어·민속】
〈민족〉 한민족의 형성에 관한 연구는 아직도 어려운 과제로 남아 있는 상태이고 학설도 구구하나, 대체로 그 근간은 북방민족을 이루는 알타이족(族) 중 일부가 신석기시대 이후 만주와 한반도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이 후에 부여·고구려·예(濊)·백제 등을 세운 예맥족(濊貊族)이다. 예맥족은 대략 신석기시대 초·중기 대륙 북방으로부터 후에 만주족으로 불리는 숙신족(肅愼族)을 만주 동쪽으로 물리치면서 한반도에 유입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의 동방 진출을 이병도(李丙燾)는 지형상으로 보아 3방면으로 추정하였다. 즉, 하나는 대륙 북방에서 보하이만[渤海灣]을 끼고 한반도의 서해안 지대로 내려오고, 하나는 랴오허강[遼河] 상류지방에서 쑹화강[松花江] 유역, 압록강 유역에 진출하여 다시 척량산맥(脊梁山脈)을 넘어 한반도 동해안 지대로 들어왔으며, 다른 하나는 산둥반도[山東半島]에서 바다를 건너 서해안지대로 들어온 것으로 보았다. 이들 예맥족은 청동기와 철기시대를 거쳐 BC 1세기경 북만주의 창춘[長春] 등지에 부여·고구려를 건국하면서 읍루(婁)를 복속시키고 낙랑을 정복하면서 이들과 혼합되었고, 7세기에 이르러 고구려는 말갈(靺鞨)도 정복하여 고구려 민족의 혼성도는 더하였다. 삼국시대가 열리기 전 남쪽에 있던 삼한(三韓) 중 마한(馬韓)과 변한(弁韓)은 일찍이 북방에서 건너온 고마족[蓋馬族:예맥족]으로, 이 중 마한은 백제 건국의 기반이 되었다. 삼한의 ‘한’에 대해서는 일찍이 중국의 《시경(詩經)》 <대아 한혁편(大雅韓奕篇)>에 예맥의 맥(貊)과 관련된 듯이 기록되었고,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BC 194년 고조선(古朝鮮)의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에 의해 멸망, 바다로 남하하여 한왕(韓王)을 자칭한 데서 비롯되었다. 또한 이를 낙랑한인(樂浪漢人)들이 지연공동체(地緣共同體)의 구분으로 진한·마한·변한으로 불러 한족(韓族)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한편 진한은 한반도 북방에서 금속문화를 익힌 부족들이 비교적 늦게 남하하여 선주민(先住民)과 혼합잡거(混合雜居)하면서 그 중 사로부족(斯盧部族)이 중심이 되어 신라를 건국하였다. 한민족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예맥족을 근간으로 형성되었으나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고(古)아시아족·남방민족·중국민족·일본민족의 요소가 약간 혼성되면서 형성되어 왔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현재와 같이 압록강·두만강 이남이 완전히 한국화하여 명확한 지역개념이 확립되었고, 이 지역개념과 함께 한민족의 단일민족적 개념도 확립되었다.
〈언어〉 한국어의 기원은 알타이어족(語族)의 한 분파로서, 그 중에서도 남방퉁구스어(語)와 가장 가까운 친족관계에 있다는 것이 현재까지 대체로 일치된 학계의 의견이다. 《삼국유사》 첫머리의 고조선조(古朝鮮條)에 보이는 단군신화는 한민족(韓民族)의 시원(始源)과 아울러 알타이어족의 이동에 관련된 한국어의 분기(分岐)를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이다. 여기서 웅녀(熊女)가 천제(天帝)의 아들인 환웅(桓雄)과 맺어져 단군을 낳은 것은 태양토템인 외래 한민족과 곰토템인 선주민과의 결합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또 도읍지인 아사달(阿斯達)은 원래 알타이어로 백악(白岳)·백산(白山)·남산(南山)·양지(陽地)의 뜻이며, 국호인 조선은 곧 아사달의 한역(漢譯)이다. 즉 조선은 아사달과 같은 뜻으로 중국측의 역사서에도 오른 것인데, 이 조선이라고 불린 종족이 바로 알타이어족에서 갈라져나와 원시한국어를 구사한 한민족이었다. 역사시대로 접어들면 고대한국어는 고구려어로 대표되는 북방의 부여계(夫餘系) 언어와 신라어로 대표되는 남방의 한계(韓系) 언어로 대별된다. 물론 남방의 한계어(韓系語)는 백제·가야(伽倻)·신라어로 다시 나뉘어지나, 백제의 고지명(古地名)에서 신라어와의 공통점이 많이 발견되는 점 등으로 미루어, 오히려 그것은 격심한 방언적 차이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리고 7세기 후반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자 비로소 신라어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의 언어적 통일도 가능하였다. 10세기 초반 고려가 건국되자 그때까지 경주 중심인 신라어에서 개성 중심의 고려어, 곧 경기어(京畿語)가 중앙어로 등장하였으며 그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역시 중앙어가 되어 근대의 국어가 형성된 것이다. 즉 오늘의 한국어는 고려 중앙어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1443년(세종 25) 훈민정음 창제는 문자생활의 일대 변혁을 의미한다. 역사시대를 전후한 시기부터 지정학적(地政學的)으로 중국과 연접한 한국은 한자·한문을 수용하여 이를 매개로 한 문자생활을 영위해왔다. 그러나 한글이 만들어지자 한자차용시대(漢字借用時代)에 이은 한글문자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동기는 ① 국어는 중국어와 다르므로 한자로는 잘 통하지 않으며, ② 따라서 백성들이 마음과 뜻을 제대로 표시할 수 없고, ③ 그러므로 새로이 28자를 만들어 쉽게 익혀 일상생활에 사용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현대 한국어의 방언, 곧 그 지역적 차이는 국토 면적이 협소한 탓도 있지만, 제주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큰 편이 아니다. 서울말이 전국 어디에서나 통용됨은 물론, 제주사투리 외에는 다른 지역의 말이라도 일상적인 회화에서 소통되지 않는 방언은 거의 없다. 한국의 현대방언 구획은 북부방언·중부방언·남부방언 및 제주방언의 넷으로 크게 나눌 수 있으며, 다시 북부방언은 평안도·함경도 방언으로, 남부방언은 전라도·경상도 방언으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의 표준어는 ‘대체로 현재 중류사회에서 쓰는 서울말로 삼는다’는 원칙에 따르고 있으며 이것은 1936년, 당시 조선어학회에 의해 제정되었다. 한국어는 오늘날 한반도에 거주하는 주민과 제주·울릉도를 비롯한 각 연해 도서 주민 및 일본·중국·아메리카 대륙·유럽 등 세계 99개국의 교포 약 300만 명이 사용하고 있다.
〈민속〉 민속이란 민간·민중 속에서 형성되어 세대에서 세대로, 시대에서 시대로 이어져온 전통적인 관습의 총칭이다. 여기에는 신앙·설화·풍속·생활양식·종교의식·미신·노래·놀이·언어·속담·수수께끼 등 모든 분야가 포함된다. 크게 나누어서 자연적·역사적·사회적 조건에서 형성된 민속으로 분류할 수 있다.
⑴ 자연적 민속:인간의 생활은 자연환경의 끊임없는 영향을 받기 때문에 열대·온대·한대의 생활터전에 따라 또는 같은 지대에서도 산악·평야·해변에 따라 가옥구조·의복·식생활의 양식 및 생업(生業)을 달리하고 신앙이나 사고(思考)에도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같은 지대에서도 각 계절에 따라 다시 생활의 모습이 변한다. 한국은 국토가 온대에 속하고 3면이 바다로 된 반도라는 점에서, 또한 4계절의 구분이 뚜렷하고 우량(雨量)이 알맞기 때문에 일찍부터 농경을 주업으로 삼았으며, 토석(土石)으로 집을 짓고, 필요한 신(神)을 설정하여 신앙하고, 굿을 하는 등 동서고금의 여러 역사 중에서 가장 풍부한 민속을 지닌 나라가 되었다. 한국의 기후에 알맞는 토벽과 온돌식 가옥구조, 여기에 장롱·문갑·보료·요강 등이 알맞게 배치된 생활은 한국인의 민족성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집안에 있다고 믿는 여러 신(神), 즉 성주·제석(帝釋)·삼신·조왕(王)·업·문신(門神)·터주 등이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 농경생활에서 비롯된 세시풍속(歲時風俗)이 다양하게 뿌리를 내려, 설·대보름·입춘·한식·초파일·단오·유두(流頭)·칠석·추석·동지 등의 각종 의례와 놀이, 조상을 모시는 차례(茶禮)를 비롯하여 일월성신(日月星辰)·산신(山神)·서낭·별신(別神)·부처·왕장(王將) 등을 모시는 여러 가지 의례가 행하여진다.
⑵ 역사적 민속:민속은 오랜 시간 속에서 면면히 전승된 것이므로 역사성에 바탕을 둔 것이 많다. 단군신화에서 비롯된 산신숭배의 신앙은 오늘날 기자(祈子) 습속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삼칠기(三七祈)·백일기 또는 아기를 못 낳는 부녀들이 암석이나 신수(神樹)에 비는 행위도 단군신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밖에 악귀를 쫓고 복을 비는 행위로서 고사(告祀)·굿(씻김굿·안택굿·별신굿 등)·고수레·부적 등이 있으며, 정월이면 토정비결(土亭秘訣)을 보고 점을 치는 일 등도 유구한 역사에서 이루어진 민속 유산이다.
⑶ 사회적 민속:인간은 혼자서는 의·식·주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를 구성하고 그 속에서 많은 사람들과 밀접한 유대를 맺으며 살아간다. 이러한 사회에는 반드시 제도와 관습이 있으며 이것이 곧 민속과 직결된다. 세시풍속에 맞추어서 정초에는 설빔으로 갈아입고 어른에게 세배하며 조상의 무덤에 성묘도 하고, 만나는 사람에게 덕담을 나누는 등의 민속은 오랜 전통사회 속에서 생긴 것이다. 기우제(祈雨祭)·동제(洞祭)·별신제(別神祭)·서낭제·용왕제(龍王祭) 등의 풍습도 대중의 공감과 타당한 명분 아래 행해지는 민속이다. 한국 고유의 민속인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의례(儀禮) 등은 시대에 맞게 ‘가정의례준칙’ 등을 제정하여 이에 따르고 있다.
【인구】
〈변천〉 한국의 인구는 서력기원(西曆紀元) 초에 대략 300만 명, 조선전기에는 550만 명으로 추정되며, 중기에는 약 700만 명선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한말인 1900년경에는 1,300만 명 내외였을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지역적으로는 경상도·평안도·전라도의 순으로 많았는데, 서울을 제외한 인구분포의 패턴은 현재와 다를 바가 없으며, 또 남부지방보다 북부지방의 인구증가율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인구센서스가 행해진 이후의 인구는 1925년 1950만 명, 30년 2100만 명, 35년 2290만 명, 40년에 2430만 명, 44년에 2590만 명으로 나타났다. 그 중 약 30여 년 동안에 만주·일본 등 해외로 유출된 인구수 300여만 명을 고려하면 이 기간 중 인구는 약 2배 정도로 증가된 셈이다. 8·15광복 직후 38 °선을 기준으로 한 남북한의 인구는 대략 북한이 880여 만 명, 남한이 1,600여 만 명으로 추산되었으나, 49년 인구센서스에 의하면 남한의 인구는 약 2000만 명으로 4년 간에 약 400만 명이 증가하였다. 남한 인구는 49년 2020만 명, 55년 2150만 명에 머물렀으나, 휴전 후 인구는 격증 추세를 나타냈다. 즉, 60년에는 약 2500만 명으로 광복 직전의 전국 인구 수준에 달하였고, 66년 2900만 명, 70년 3150만 명, 75년 3500만 명, 97년 현재 4570만 명으로 세계 187개국 가운데 26위이다. 북한 인구는 60년 1000만 명, 90년 2300만 명에 달하였고 남북한을 합친 총인구는 97년 현재 6850만 명을 넘어서는 인구대국이 되었다.
현재 남한인구 : 4,813만명(2005) 북한인구 : 2,222만명(2002) 합계 약 7,000만명
〈분포〉 1925∼44년에 경북·전남·경남·경기 등은 200만 명 이상의 높은 인구분포를 보였으며, 충북은 100만 명 이하의 낮은 인구분포를 보였다. 일제강점기의 지방별 인구 증감상태는 국지적으로 인구가 집중되는 변화를 보여 중부 이북지방의 인구가 급속한 증가를 보인 반면 중부 이남지방은 증가가 미미하였다. 그것은 북부지방에서의 광공업 발달에 따른 도시화의 진척과 해외유출 인구의 증가, 그리고 일제의 사회경제정책의 결과로 보인다. 8·15광복 후에도 경북·전남·경남 등이 300만 명 이상의 높은 인구 분포를 유지해왔다. 특이한 것은 수도권과 부산권이 매우 높은 인구분포를 보이는 반면, 기타 지역은 미미한 증가 또는 감소 현상을 보여왔다는 점이다. 그것은 60년대 이후의 급속한 공업화 및 도시화의 추세를 타고 이촌향도(離村向都) 현상이 가속화하여, 농어촌 지역의 인구는 과소현상이 초래된 반면, 서울·부산 등의 대도시 및 신흥공업지역에서는 인구과밀 현상이 야기되었기 때문이다.
〈구조〉 1925∼80년의 한국의 성비(性比:여자 100에 대한 남자의 비율)는 100.0∼105.0을 보여왔다. 광복 전에는 자연증가율에 의해 점진적인 변화 형태를 보였으나, 광복 후에는 광복·전쟁·공업화·도시화 등에 따른 사회적 증가율이 크게 나타나면서 시대별·지역별 성비구조의 변화를 야기시키고 있다. 연령구조의 변화를 보면 1925∼44년에 14세 이하의 유·소년층이 증가하였고, 45세 이상에는 큰 변동이 없었다. 한편 15∼44세의 생산연령층이 감소하였는데, 그것은 그 연령층의 사람들이 대거 해외로 유출한 데서 기인한 현상으로 보인다. 45년 이후에는 해외동포의 귀국과 북한 동포의 월남 등으로 전연령층에 걸쳐 인구가 증가하였다. 70년 이후에는 가족계획 사업 등이 주효하여 유·소년층 인구의 감소가 두드러졌다. 85년의 경제활동 인구는 전인구의 약 2/5, 15세 이상 인구의 약 3/5에 해당하는 2822만 명인데, 그 중에서 1550만 명이 취업을 하고 있어 96 %의 고용비율을 보이고 있고, 93년 1980만 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지역별로는 도시에서 55년 이래 계속 취업자수가 증가하고 있는데, 그것은 도시 산업을 위주로 하는 구조 변화를 이룩한 데서 오는 필연적인 현상이다.
〈이동〉 조선시대에는 북부지방의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는데, 그것은 북부 변경지방의 방어와 개척을 위하여 남부지방의 주민을 이곳에 이주시켰기 때문이다. 1925∼44년에 함남·함북·경기·평남·평북·황해·강원 등 중부 이북 7개도의 인구증가율이 모두 전국 평균값을 상회하면서 전국 총인구 증가수의 67 %를 차지하였다. 그것은 중부 이북지방에서 광공업이 급속도로 개발됨으로써 남부지방의 인구가 그들 광공업지역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동안 인구의 국내이동은 이와 같은 남에서 북으로의 이동과 함께 인구의 도시집중 현상도 뚜렷하였다. 즉 1925년 서울을 비롯한 12개 부(府)의 도시 인구가 약 101만 명으로 전국 인구의 5.2 %를 차지하였는데, 44년에는 부(府)가 21개로 늘고, 그 인구가 341만 명으로 늘어 전국 인구의 13.2 %를 차지하였다. 한편 45년 8·15광복 당시의 재외 한국인 수는 약 500만 명으로, 그 중 일본에 210만 명, 만주에 200만 명, 소련에 20만 명, 중국 본토에 10만 명, 미국과 기타 나라에 3만 명이 있었다. 그들 해외거주 인구는 당시 국내 총인구의 약 1/6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광복 후에는 격심한 인구 이동이 있었는데, 북한동포 약 180만 명이 월남하였고, 또한 해외에서 남한으로 귀환한 교포수는 일본에서 약 110만 명, 만주지방을 비롯한 중국 본토에서 약 40만 명, 그 밖의 지역에서 약 3만 명으로 약 330만 명에 달하였다. 6·25전쟁 때에는 다시 북한에서 약 100만 명이 남하하였다. 이촌향도의 인구이동 현상은 55년경부터 시작되었으며, 60년대에 들어서자 공업화·도시화의 본격적인 진전에 따라 다수의 농어촌 인구가 도시지역 및 개발지역으로 이주하였다. 70∼90년 전기간에 걸쳐 서울·부산·경기가 전입초과 현상을 보인 반면, 강원을 비롯한 나머지 8개 도가 모두 전출초과 현상을 나타냈다. 서울과 인접지역인 경기를 비롯하여 대도시 지역과 그 주변부에는 인구집중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66년 서울과 경기의 인구는 전국 인구의 23.7 %, 부산과 경남 지역의 인구는 15.8 %이던 것이 90년에는 서울 및 경기 지역이 38.5 %로 구성비가 높아졌고, 부산 및 경남 지역의 인구도 17.2 %가 분포함으로써 한국 전체 인구 중 약 55.7 %에 달하며, 90년 현재 도시인구비율은 74.4 %를 차지해 인구분포의 불균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한편 광복이 되면서 전국에 걸쳐 살던 일본인 70만 명이 본국으로 돌아갔고, 62년 해외이주법을 공포·시행한 이래 95년 7월 말까지 약 80만 명이 해외로 이주하였다. 그들의 78.7 %가 미국을, 17 %가 남아메리카를, 6 %가 캐나다를, 4.2 %가 유럽을, 나머지가 기타 지역을 선택함으로써 한국인의 국제적 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취락】
〈촌락〉
⑴ 발달:선사시대의 주거지인 구덩식 집터[竪穴式住居址]는 빗살무늬[櫛文]토기시대와 민무늬[無文]토기시대로 나뉜다. 시대가 앞서는 빗살무늬토기시대의 것은 황해도 이북 북한 지역의 하천 하류 연안 및 해안평야의 소구릉 경사면 등지에서 약 10곳이 발견되었고, 시대가 뒤진 민무늬토기시대의 것은 압록강·두만강·대동강 및 한강 등 하천 연안평지에서 100여 곳이 발견되었다. 상고시대에는 한강·금강 유역에 마한, 낙동강 유역에 진한, 영산강·섬진강 유역에 변한이 일어나 정착농경문화를 성립시켰다.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에는 지방호족들에 의해 장원촌락(莊園村落)이 발달하였고, 또 국가의 북진정책으로 인해서 북방에 요새적 성격을 지닌 진(鎭) 취락이 많이 성립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인구가 증가하면서 국토의 10∼15 %가 농경지로 이용되었는데, 그들 농경지는 낙동강·금강·삽교천·곡교천(曲橋川)·한강·재령강·예성강·대동강·청천강 등 9개 하천유역의 하성평야(河成平野)에 집중되었다. 따라서 촌락의 분포는 결정적으로 농경지 분포의 영향을 받았는데, 당시의 중심 취락은 행정적 통제와 군사적 방어기능을 복합적으로 담당한 읍성(邑城)취락이었다. 읍성취락은 농경지대의 중심지 또는 수륙교통의 요지에 발달하였는데, 동시에 진산(鎭山)이라고 부른 요새지를 끼고 분지형의 지형에 입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한편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형성되기 시작한 동족(同族)촌락은 그 후 크게 확장되어 전국에 걸친 자연부락 단위의 한 유형이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개항과 함께 작은 어촌이 항구도시로 발전한 예가 있고, 또 철도의 개통으로 무명의 한촌이 지방중심도시로 성장한 예가 적지 않다. 일제강점기의 북한지역에서는 많은 광산촌이 개발되었고, 광산촌의 개발은 광복 후에도 태백산지구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상업적인 과수재배가 시작되자 이례적인 취락형태인 산촌(散村)의 과원(果園)촌락이 생겨났고 광복 후 과수재배 지역의 확산 및 감귤재배의 본격화로 과원촌락은 전국적인 분포를 보였다.
⑵ 입지:한국의 촌락입지는 수리·지형·교통·방위·인근 촌락과의 관계 등 자연적·사회적 조건 및 풍수지리설, 동족촌락의 형성 등 전통적 관습에 크게 지배되어왔다. 배산임수(背山臨水), 즉 산을 등지고 물을 낀 촌락입지는 한국의 가장 보편적인 취락입지의 유형이 되고 있다. 그것은 겨울에 북서계절풍의 그늘이 되면서 양지바르고, 바로 가까이에 수리가 안전한 농경지를 끼며, 아울러 음료수·땔감 등을 얻기 쉬운 촌락의 입지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 밖에 홍수의 피해가 적은 넓은 평야지대에서는 평지에 주로 입지하지만, 하천 연안에 있는 범람원이나 하구의 삼각주와 같이 배수가 잘 이루어지지 않거나 수해의 위험이 있는 곳에는 자연제방을 통해 촌락의 입지가 이루어지고 있다. 범람원을 배경으로 한 촌락은 한국의 4대강 유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데, 특히 팔당에서 뚝섬에 이르는 한강 하류의 범람원에서는 자연제방과 하중도(河中島)의 퇴적단구 등에 취락이 띠모양[帶狀]으로 형성되어 있다. 대관령 부근의 고위평탄면 지역이나 죽령 부근의 옛 화전 지대에는 기후·토양에 맞는 특수영농을 하는 촌락이 입지한다. 해안에는 기존의 어촌들 외에 전북 부안의 계화지구(界火地區), 군산의 미옥지구(米沃地區) 등 간척지에는 새로운 간척지촌락이 형성되었고, 대천·연포·만리포 등 해수욕장이 있는 해안에는 위락(慰樂)촌락이 형성되었다.
⑶ 형태:호남·나주·논산 등 대규모 평야지대와 경기·황해·관서 서부, 함남 해안부 등 답작지역에는 대부분의 촌락이 집촌(集村)을 이루어, 그것이 한국의 보편적인 취락형태가 되고 있다. 제주·철원분지 등지에도 집촌이 형성되어 있는데, 투수성(透水性)이 큰 다공질 현무암대지가 넓게 펼쳐져 있어 해안이나 침식곡의 용천(湧泉)이 주위에 괴촌(塊村)을 형성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산촌(散村)은 밭농사를 위주로 하는 북부의 고원 산악지대 및 이와 연결되는 태백산지 지역에 분포한다. 논농사 지역이면서 이례적으로 산촌이 분포하는 곳은 당진에서 서산에 이르는 태안반도 일대이고, 그 밖에 나주·대구 부근의 사과 과수원 지역, 제주의 감귤 과수원 지역 등지에 부분적으로 산촌이 분포한다.
⑷ 기능:한국은 전통적으로 벼농사가 중심이어서 모내기·김매기 등에 필요한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촌락은 농촌·산촌(山村)·어촌 중 어느 것일지라도 농업적 기능을 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농촌은 크게 논농사 농촌과 밭농사 농촌으로 구분되는데, 한국의 논농사지대는 남해안을 저변으로 하여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면서 점차 폭이 좁아지는 쐐기 모양의 지역 형태를 보이고, 밭농사지대는 대체로 연천·포항을 잇는 동쪽의 산악·구릉지대와 거기에 서쪽의 평야지대 중 수리·기후·지형 등 자연조건이 논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 포함된다. 근래 교통수단의 발달과 식생활 양상의 변화로 근교농업이 활발해졌는데, 서울 주변의 고양·광주·김포, 부산 주변의 밀양·김해, 대구 교외의 동촌, 대전 교외의 유성 등지가 대표적인 근교농업지이고, 또 서울 주변의 평택·안성·화성·시흥·안양, 충남의 천안·아산, 부산 교외의 양산 및 경춘가도 등지의 교촌(郊村)에서는 낙농업이 성하다. 그 밖에 남해안 일대의 채소류, 제주의 감귤, 대구 주변의 사과 등의 재배는 대표적인 원교농업(遠郊農業)이다. 본래 화전농(火田農) 위주인 산촌(山村)에서는 1965년 화전정리법 시행 이래 고랭지농업으로 전환하여, 여름무 등 고랭지 채소류와 씨감자·홉·약초 등을 원교농업 형태로 재배하여 대도시로 출하하고 있는데, 그 중심지는 대관령 부근, 죽령 부근 일대이다. 한국의 어촌은 대부분 반농반어(半農半漁)의 형태이다. 1950년대 말부터 원양어업에 눈을 돌려 태평양·인도양·대서양의 3대양에 진출하였고, 60년대 중반부터 어청도(於靑島)·흑산도(黑山島)·나로도(羅老島) 등 10개 도서에 어업전진기지를 두어 수산업진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성어기에는 외지 선박이 모여드는 흑산도·위도(蝟島)·연평도(延坪島) 등에 파시(波市)가 형성되어 임시 가옥들이 형성되기도 한다. 이러한 농촌·산촌·어촌 외에 다음과 같은 특수한 기능을 가지고 성장해온 촌락들이 있다. 삼국시대 이래의 역원제(驛院制)에 의해 역(驛)취락·원(院)취락·파발(把撥)취락 등이 발달하였는데, 역촌동·역삼동·말죽거리·마장동 및 역(驛)자가 붙은 전국 각지의 리·동(里洞), 양재원·장호원·이태원 등 원(院)자가 붙은 리·동, 구파발·파발막 등으로 불리는 리·동 등이 그것이다. 그 밖에 역시 교통에 관련된 기능을 가진 취락으로 삼거리·점촌(店村)·주막리(酒幕里) 등으로 불려 가촌(街村)을 형성한 막(幕)취락, 삼전도(三田渡)·삼랑진(三浪津) 등 도진(渡津)취락 및 고개[嶺下]취락 등이 있다. 행주산성(幸州山城)·해미읍성(海美邑城)·통영(統營)·만포진(滿浦鎭) 등은 방어기능을 가진 산성취락·읍성취락 및 수영(水營)·진영(鎭營) 등을 바탕으로 발전 또는 쇠미한 곳들이다. 점차 쇠퇴되고 있는 시장촌은 발안장(發安場)·안성장(安城場) 등 지명을 남겼고, 영산포(榮山浦)·마포(麻浦) 등은 조창(漕倉)취락을 이루었던 곳이다. 태백산지구에는 상동(上東)·도계(道溪)·장성(長省)·사북(舍北) 등 광산촌이 발달하여 장성은 신설된 태백시(太白市)의 일부가 되었고 경인·경수(京水) 지역의 역곡(驛谷)·주안(朱安)·동암·시흥(始興)·군포(軍浦)·부곡(富谷) 등지는 전철 등 교통수단의 발달에 힘입어 통근자취락으로 성장하고 있으며, 국민소득수준의 향상에 따라 송추(松湫)·일영(日迎)·수안보(水安堡)·도고(道高) 등 도시주변의 경승지·온천지대·해안지대 등지에 관광촌이 크게 성장해 가고 있다.
〈도시〉
⑴ 발달:조선시대까지의 한국은 전(前)산업사회였기 때문에 도시는 정치·행정·군사 등의 기능에 의해 발달하였다. 조선왕조 500년의 수도가 되어온 한성(漢城)은 1867년(고종 4) 인구 20만 명을 헤아리는 도시였고, 그 밖에 개성·평양·전주·함흥·경주·의주·충주·공주·상주·진주·광주·나주·대구 등 지방도시를 들 수 있는데, 그 지방도시들은 부(府)·목(牧)·군(郡)·현(縣)의 관아(官衙)가 소재한 행정도시였다. 76년(고종 13) 부산 개항을 선두로 인천·원산·목포·군산·마산·남포·성진·청진 등이 잇달아 개항되자, 그들 개항장(開港場)이 일본에 의한 한국의 상품시장화의 거점이 되어 근대도시로서의 급속한 발전을 하였다. 99년 경인선(京仁線)이 개통된 것을 효시로 간선철도들이 부설되자 철도교통의 요지 및 평야지대의 철도 연변에 기존도시의 근대화와 신도시 발달이 활발해졌는데, 그 중에는 일본의 식량기지화 정책에 따라 쌀 집산지·적출항 등의 기능을 가지고 발전한 도시들이 많다. 그 시기에 발달·성장한 도시로는 대전·조치원·청주·대구·진주·이리·전주·광주·부산·마산·군산·목포·사리원·평양·신의주·남포·원산·함흥·성진·청진 등이다. 1929년 부전강(赴戰江)발전소의 건설을 계기로 일본은 한국에 근대공업을 일으키고, 31년 대륙침략을 시작하자 한국을 병참기지화하여 군수공업을 일으킴으로써 광공업도시가 급속히 발전하게 되었다. 그들 광공업도시의 발전은 특히 자원이 풍부한 관북·관서 등 북부지방에서 현저하였다. 관북지방의 흥남·함흥·원산·청진·성진·길주, 관서지방의 평양·남포·신의주·해주·송림 등이 크게 성장하였고, 중남부 지방에서도 서울·인천·대구·부산·마산·대전·군산 등이 공업기능을 더하면서 성장하였다. 광복 후에는 해외동포의 귀국, 북한 동포의 월남 및 광복과 더불어 가속화된 인구의 도시집중으로 인해 도시인구가 급격히 팽창하였으며, 특히 그와 같은 인구팽창 현상은 서울·부산·대구 등 대도시에서 더욱 뚜렷하여 서울 인구는 49년 150만 명을 헤아렸다. 6·25전쟁으로 영남의 일부지역을 제외한 전국의 도시가 격심한 전화(戰禍)를 입었으나, 북한으로부터의 피난민이 도시지역에 정착함으로써 주로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한 도시 인구는 더욱 증가하였고, 특히 전쟁 중 임시 수도가 된 부산은 인구 100만이 넘는 대도시가 되었다. 60년대 이후 추진된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은 공업 위주의 도시 불균형 성장론에 입각하여 수출드라이브 정책, 도시집적화 정책, 전국의 공업입지화 정책이 추진되어 도시화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공업기능뿐만 아니라 국가의 총량적 기능이 집중되어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서울·부산·대구·인천 등 대도시를 비롯한 기존 도시들이 성숙된 공업화의 입지조건을 바탕으로 한층 팽창하였고, 울산·마산·포항·여수·창원·구미 등이 정부의 경제개발정책에 힘입어 새로운 공업도시로 크게 부상하였는데, 원자재의 수입과 제품의 수출 등 한국의 공업화에 부수되는 여건으로 임해공업도시 발달이 특히 두드러졌다. 그와 같은 도시화 과정에서 서울·부산·대구 등 대도시는 주변에 공업·주택 등 위성도시들을 거느리는 대도시권을 형성하고, 특히 서울∼부천∼인천 구간에는 주니어메갈로폴리스적인 도시회랑(都市回廊)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수도권 지역은 1995년 현재 서울특별시·인천광역시(2개군)·경기(18개시 13개군)로 이루어져 있으며, 분당·일산·중동·평촌·산본 등의 신도시들이 수도권 지역에 건설되어 수도권 지역의 공간구조 변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⑵ 기능:한국의 도시들은 대부분이 행정도시로서의 기능을 가진 소비도시였으나, 1960년대 이후 근대산업의 발달로 생산기능이 크게 활발해지면서 점차 상업도시에서 다시 종합기능도시로의 변화를 겪었다. 60년대 이후의 고도 경제성장에 따라 도시기능의 패턴이 상업기능 우위에서 공업기능 우위로 바뀌었고, 현재는, 산업구조가 고도화되면서 서비스기능이 중시되고 있다. 주요 도시들을 기능별로 분류해보면, 상업도시로 순천·원주·춘천·사천 등, 공업도시로 안양·부천·인천 등과 같은 경인지역의 도시들과 60년대 이후 공업화 중심의 경제개발계획에 힘입어 발달한 마산·진해·포항·울산·창원·구미·광양 등이 있다. 산업화·공업화에 따른 생산기능이 향상되면서 생산·교역 및 소비 등과 같은 여러 가지 기능이 함께 이루어지는 종합기능도시로 서울·부산·대구·광주·대전·청주·전주 등을 들 수 있고, 그 밖에 태백·상동 등의 광산도시, 주문진·속초·통영 등의 수산도시, 진해·원주·오산 등의 군사도시 등을 들 수 있다.
⑶ 구조:한국의 많은 도시들이 전(前)산업사회적인 내부구조를 탈피하여, 본격적으로 산업도시의 기능에 맞는 신도시구조로 변화한 것은 1960년 이후부터이다. 60년 이래 급격한 도시인구의 성장, 도시공업의 발달, 각종 공공기관의 신설과 대형화, 도시 교통수단의 변화 등은 광범위한 도시 구조의 재편성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도시구조 재편성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상업지역·공업지역·주거지역의 지역분화 현상이다. 서울·부산·대구 등 거대도시의 상업지역은 대체로 고급상점과 전문서비스업종과 같은 상업기능들이 모여 있어, 접근성이 중요한 요인이 되는 중심업무지구(CBD:central business district), 도매시장, 간선도로변의 상가 및 동(洞)단위 수준의 시장·쇼핑센터 등이 주류를 이룬다. 서울의 CBD는 최근 사무관리업무의 폭주에 따른 호텔·임대건물의 도심집중, 전문·고급상품시장의 신설, 도심 지하상가의 확대 등에 의해 그 지역이 확장, 복잡해지고 있다. 공업지역은 대부분 자연발생적인 형태로 주택지역과 혼합된 토지이용 양상을 보여왔으나, 최근 주택지의 확산 및 각종 공해의 발생 등을 이유로 정책적인 분산에 의해 지역분화가 이루어졌다.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도시 내의 거주지역은 교통수단, 도시기능, 주민의 사회·경제적 특성 등에 따라 고도의 분화현상을 보이고 있다. 서울의 경우 사회·경제적으로 안정된 계층의 거주지가 중앙부에 동심원적 형상을 이루고, 그 주위에 중위(中位) 계층의 거주지가 나타나며, 중하위(中下位) 계층의 거주지는 도심을 향하여 선형(扇形) 형상을 이룬다. 그와 같은 거주지 분화 패턴은 도시의 성장·개발의 방향, 즉 도시화의 과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한국의 도시는 인구 규모 20만 명 이하의 도시에서는 상업·관공서 등이 집결된 중심지역과 그 주변으로 거주지·상업지가 뒤섞인 주택지역이 나타나고, 그 바깥쪽으로 공업지역과 농업지역이 연속되어 전개된다. 대체로 동심원상 구조를 보이나, 공업지역은 고립 내지 분산되어 입지한다. 중심부의 상업지역은 시장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중심부를 관통하는 간선도로가 중요한 몫을 한다. 인구규모 20∼100만 명의 도시에서는 도심부에 중심업무지구가 형성되고, 그 주변에는 각종 서비스·도소매업이 집중되어 높은 토지 이용의 혼합형을 이루며, 그 주위에 주택지역·공업지역이 연속된다. 인구 100만 명 이상의 거대도시에서는 도심부에 CBD, 그 주변에 CBD와 분화가 뚜렷한 중간지역이 넓게 에워싸고 있는데, 그 중간지대에는 제2차 중심지, 즉 부도심(副都心) 또는 제3차 중심지가 형성되며, 최근에는 수많은 쇼핑센터가 발달하여 다핵화(多核化)의 경향을 나타낸다. 중간지대에는 공업단지, 각종 유통센터, 연구기관 등이 분포한다. 중간지대 밖의 외곽지역은 고속화도로·순환도로에 힘입어 주거지의 교외확장이 진척되고 있다.
4. 역사
【시대구분】 한국사에서 시대구분은 예로부터 큰 관심을 끌어왔다. 신라의 역사를 상대(上代)·중대(中代)·하대(下代), 또는 상고(上古)·중고(中古)·하고(下古)로 구분한 것은 이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대체로 왕조(王朝) 중심의 구분법이 줄곧 관용화되어왔고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다가 서양의 근대적 역사 연구방법을 받아들이면서부터 시대구분에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가 행해지기 시작하였다. 시대구분은 바로 역사를 이해하는 척도이자, 역사관의 반영이다. 지금까지 제시된 시대구분을 공통성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몇 개의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는 시간의 원근(遠近)에 의한 시대구분인데, 최남선(崔南善)·이병도(李丙燾)·진단학회(震檀學會)에서 밝힌 견해이다. 이들은 모두가 현재를 기점으로 하여 시간의 원근을 기준으로 삼아 시대를 구분한 것이다. 여기에는 서양사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는 고대·중세·근대의 3분법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둘째는 사회 발전의 단계를 기준으로 시대를 구분하고 있다. 여기에는 백남운(白南雲)·이청원(李淸源)·손진태(孫晉泰), 그리고 한우근(韓,劤)·김철준(金哲埈) 공저(共著)에서 제시된 시대구분이 포함된다. 이들은 대체로 원시사회·고대사회·봉건사회·근대사회라고 하는 사회 발전의 단계를 염두에 두고 있다. 다만 손진태의 《조선민족사개론》에서는 국가의 발전이란 측면에서 독자적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셋째는 민족의 성장과정을 기준으로 한 구분법으로서 손진태·이인영(李仁榮)의 주장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이 구분법은 실제 내용 서술에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넷째는 이인영·이기백(李基白)의 ‘개설서’에 제시된 시대구분으로서, 주제 중심 또는 지배세력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서 역사를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시대구분의 의미가 적다. 끝으로 최근에 시도되고 있는 방법은 사회 발전의 측면을 강조하면서 역사의 이해를 구조적으로 접근하려 하고 있다.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대체로 집약된, 한국사연구회의 《한국사연구입문》과 교육부에서 만든 고등학교 교과서에 제시된 시대구분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경우에는 서양의 3분법과도 맥이 통한다.
【원시사회】 원시사회는 가족이나 씨족이 사회구성의 단위를 이루면서 석기(石器)와 같은 유치한 연모를 사용한 선사시대(先史時代)의 사회를 말하는데, 한국사에서는 구석기(舊石器)시대·중석기(中石器)시대·신석기(新石器)시대의 단계를 거쳐 진전되었다. 원시사회에서는 정치생활을 엿볼 수 없었고, 경제적으로 사유재산의 개념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따라서 구성원 전원의 사회적 지위는 평등하였다. 한국의 구석기시대는 약 5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천 전곡리(全谷里), 상원 검은모루, 공주 석장리(石壯里), 제천 점말동굴, 청원 두루봉동굴, 웅기 굴포리(屈浦里) 등은 구석기시대의 유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 밖에도 한국의 여러 곳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이 계속 발굴되고 있다. 이로 보아 구석기시대에 이미 한국 전역에 사람들이 널리 퍼져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석기시대에는 가족을 단위로 하여 옮겨 다니면서 강가나 바닷가에 움막을 짓고 거친 뗀석기[打製石器]를 이용하여 사냥을 하거나 물고기를 잡아먹고 살았다. 한국의 중석기 문화는 아직 확연하게 밝혀져 있지는 않으나, 석장리의 최상층 문화와 점말동굴의 위층 문화는 중석기적 특색을 보여준다. 이 시대의 생활 단위는 여전히 가족이었으며, 화살촉·작살 같은 석기가 만들어지고, 고기잡이·조개잡이 외에 활을 이용하여 사냥하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또한 이 때에는 예술에 대한 초보적 감각을 발휘하여 울산 반구대(盤龜臺) 암각화에 나타난 사슴의 그림을 남겨놓았다. 한국에서는 중석기시대에 이어 약 6000년 전부터 신석기시대가 시작되었다. 신석기시대의 사람들은 농경과 목축 등으로 식량을 생산하였고 토기(土器)를 만들어 쓰기 시작하였다. 대체로 중석기시대의 생활방식을 이어받아 바닷가에 움집이나 귀틀집을 짓고 고기잡이·사냥·채취 등을 하는 한편, 농사짓는 방법을 터득하여 곡식을 직접 재배하였다. 빗살무늬를 새긴 토기를 주로 사용하였는데, 뗀석기와 아울러 새로이 간석기[磨製石器]도 개발하여 사용하였다. 이 시대에는 처음에 씨족이 사회의 구성단위를 이루다가 후기에는 부족(部族)이 나타나면서 협동으로 일하여 같이 분배하는 공동체사회를 이루었고, 석기제작이나 예술활동에서는 분업형태를 취하였다.
部 區分 |
한민족 국가 명 화족 국가명 |
지배연대 |
지배기간 (년) |
지배강역범위 |
대륙부 |
환(桓) |
BC7197~BC3898 |
3299 |
대륙전역 |
신시(神市) |
BC3897~BC2334 |
1563 |
대륙전역 | |
고조선(古朝鮮) |
BC2333~BC108 |
2225 |
대륙전역 | |
漢(華) |
BC202~AD7 |
209 |
전역/ 고구려강역제외 | |
新(후한) |
AD8~AD220 |
213 |
황하이북 | |
고구려 |
BC37~AD668 |
705 |
황하하류 및 이북 | |
백제 |
BC18~AD660 |
678 |
발해만 및 산동, 양자강이남 | |
신라 |
BC57~AD935 |
992 |
양자강이북 | |
당(華) |
AD618~AD907 |
289 |
지나(화) 전역/신라강역제외 | |
남송(華) |
AD960~AD1279 |
319 |
지나(화) 양자강이남/고려 강북 | |
고려 |
AD935~AD1392 |
457 |
양자강이북(중복) | |
요(거란) |
AD907~AD1125 |
218 |
대륙전역(고려중복) | |
금(여진) |
AD1115~AD1234 |
119 |
대륙전역(고려중복) | |
원(몽고) |
AD1271~AD1368 |
97 |
대륙전역(고려중복) | |
명(華) |
AD1369~AD1644 |
275 |
대륙전역(고려, 조선중복) | |
조선 |
AD1392~AD1910 |
518 |
하북, 요동 | |
청(만주) |
AD1616~AD1911 |
215 |
대륙전역(조선중복) | |
중화(화) |
AD1912~AD1948 |
36/8 |
화하, 객가 동부일부/일본침공 | |
중공(華) |
AD1949~? |
|
화하, 객가 공산당 점령 | |
한반도부 |
환, 신시, 삼한 |
BC7197~AD2006 |
9203 |
한반도부 전역 |
일본부 |
환(桓) |
BC7197~BC3898 |
|
일본부 전역 |
신시(神市) |
BC3897~BC2334 |
|
일본부 전역 | |
고조선(古朝鮮) |
BC2333~BC108 |
|
일본부 전역 | |
고구려(후한) |
BC202~AD220 |
|
일본부 전역 | |
고구려 |
AD200~AD668 |
|
일본부 전역 | |
백제 |
BC18~AD660 |
|
일본부 전역 | |
신라, 발해 |
AD661~AD935 |
8132 년 동안 |
일본부 전역(실질적 지배) | |
고려, 조선 |
AD935~AD1872 |
|
통치(고려, 조선지배) | |
일본 |
AD1872~? |
|
왜구무사정치집단 점령 |
사실 민족의 찬란한 역사를 되찾는다는 명제는 일반 촌부들 가슴에 먼저 있었으나 지식인이라 자처하며 기존 사학계를 장악하고 있는 사학자들이 있어 방해가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학연을 내세워 하나같이 스스로 왜소화하고 소(小)국가주의적 사고에서 헤어나지 못하며 일제가 그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역사사실에 목줄을 메달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이나 국가보다는 이제 그들의 영달이 우선이다.
잘못된 역사사실이 들어나고 있음에도 못 본척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거지같은 반도사를 들먹이며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암울한 우리나라 사학계 현실이다.
대륙에서 졸지에 쫓겨 난 조상님의 역사는 분명 후세 자손들이 나서 다물하여 주기를 바라며 어려운 와중에도 소중한 사서를 소수 남겼건만 그것도 모르고 왜놈들이 정서(正書)가 아니라고 하니 얼빠진 사학자들은 따라서 아니라 했다.
아주 정확하고 사실적인 정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애써 알려 하지 않았고 대륙을 지배한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처지가 애닯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벽이 두터워 전진할 수 없는 환경이기에 후일 재론키로 하고 여기서는 그만한다.
여기에 지명(地名)으로 나오는 부분이 있는데 지명(地名)모두가 고대부터 이어진 한반도부에 있는 지명(地名)이 아니라 대륙부에 있는 지명(地名)을 옮겨놓은 것 임을 먼저 숙지하고 읽었으면 한다. 그 당시 한반도부에는 정식지명으로 명명 한 자료가 현재 전혀 없으며 한반도부 전역이 고려라는 이름으로 불리웠을 가능성에 옛 고려 지명들이 잘 알려지지 않아 문제가 많다..
지금 한반도부에 지명(地名)은 대륙부에서 한반도부로 쫓겨 들어오면서 우리 민족 조상님들이 대륙생활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대륙부지명과 똑 같이 임시로 붙어놓은 지명(地名)이란 점과 그러한 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한민족 역사를 축소하기 위한 도구로 확대 재생산 하면서 한민족 자체를 말살하려고 도모한 원숭이같은 왜놈들의 몹쓸 짓이 어울려 만들어 진 것이라고 할 때 특히 한반도 지명 명명사실을 분명하게 연구할 필요성이 있고 역사기록과 전혀 다른 위치문제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에서 왜곡된 역사란 사실을 알면서도 비판없이 무작정 따르는 것은 어리석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대륙역사에서 존재한 우리 역사찾기가 먼저라는 것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신석기시대 말기에 이르러 농경이 보다 발달하여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서 사람들은 금속문화를 알게 되었다. 청동기와 철기로 대표되는 금속문화는 바로 고대사회의 특성으로서, 그것은 국가 성립의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한국의 청동기문화는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대략 기원전 10세기경 북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때의 유물로서 세형동검(細形銅劍)·잔무늬거울[細文鏡]·동모(銅? 등이 각지에서 출토되고 있고, 아울러 반달돌칼[半月形石刀]·홈자귀[有溝石斧] 등의 간석기와 민무늬토기가 다수 발견되었다. 도구의 개발과 농경기술의 발달로 생산력이 증대되었고, 그만큼 농업의 비중이 증가되었다. 한편 청동으로 만든 칼과 창으로 무장한 부족들은 이웃 부족들을 정복하여 공납(貢納)을 받아들임으로써,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성립되고 정치적 사회가 나타나게 되었다. 종래에는 이를 부족국가라고도 하였으나, 근래에는 성읍국가(城邑國家) 또는 읍락국가(邑落國家)라고 한다. 도처에 형성된 이들 읍락 중심의 정치적 사회는 정복 활동을 통하여 보다 큰 정치집단으로 발전해갔고, 점차 그의 권력을 강화하여 지배조직을 확대해 갔는데, 최초의 연맹왕국(聯盟王國)은 단군이 세웠다고 하는 고조선(古朝鮮)이다. 고조선 역시 초기에는 읍락 중심의 사회였으나, 후기에는 동방사회의 중심세력을 형성한 커다란 연맹왕국으로 발전하였다. 고조선은 대동강(大同江)과 랴오허강[遼河] 일대에 걸치는 광대한 연맹체로서, 엄한 법률로 사회 질서를 유지하면서 지배세력을 강화하였다. 고조선 초기에는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발전하였으나, 후기에는 철기문화를 알게 되었고, 이 시기의 지도자는 이주민 집단을 이끈 위만(衛滿)이었다. 위만은 중국의 통일왕조인 한(漢)나라와 자주 충돌을 일으켜 한무제(漢武帝)가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을 때, 고조선은 이에 대항하여 1년간이나 싸웠으나 BC 108년 끝내 왕검성(王儉城)이 함락되었다. 고조선이 망한 이후 철기문화에 기반을 둔 새로운 연맹왕국들이 성립되었다. 북쪽에서는 부여(扶餘)·고구려(高句麗)·동예(東濊) 및 옥저(沃沮)가 일어났고, 남쪽에서는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의 삼한이 일어났다. 철기의 사용은 생활의 모습을 여러 모로 변화시켰는데, 특히 철제 농기구에 의한 농경 방법이 발달하여 경제기반이 급속히 확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목축이 성하였고 어업도 발달하였으며, 부족 상호간의 교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여러 계통의 문화가 융합되어 고대국가의 기초가 마련되어갔다. 한국의 고대국가는 고구려·백제·신라의 3국에서 비롯된다. 철기문화가 널리 보급되면서 정복전쟁이 활발해지고 농업경제가 진전되어 사회분화(社會分化)가 분명해져갔다. 따라서 왕권을 장악한 지배자는 중앙집권적 체제를 강화하였고, 밖으로 정복국가, 영역국가의 기틀을 다져갔다. 1세기 태조왕(太祖王) 때 고대국가를 수립한 고구려는 압록강 유역을 중심으로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이어서 4세기초 미천왕(美川王) 때에는 낙랑군(樂浪郡)을 축출하고 대동강 유역으로 진출하였다. 백제는 위례성(慰禮城)을 중심으로 한강 유역에서 일어났는데, 3세기 고이왕(古爾王) 때 고대국가의 체제를 갖추고 정치적 발전을 보였다. 한편 경주평야에서 일어난 신라는 4세기 내물왕(奈勿王) 때 주변 지역을 정복하고, 김씨 중심의 왕권을 강화하여 고대국가로 성장하였다. 이들과 아울러 낙동강 하류에는 가야연맹(伽倻聯盟)이 독자적 발전을 보였으나,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6세기에 신라에 병합되었다. 3국의 융성은 3국 간의 경쟁적 각축 속에서 이루어졌다. 고구려는 모용씨(慕容氏)와 백제의 침입으로 한때 시련을 겪었으나, 소수림왕(小獸林王) 때 불교를 수용하고 태학(太學)을 세우며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이어서 광개토왕(廣開土王)·장수왕(長壽王) 때에는 밖으로 비약적 발전을 보였다. 그리하여 5세기에 고구려의 판도는 북으로 쑹화강[松花江], 남으로 아산만과 죽령(竹嶺)에 이르는 선, 동으로 동해안, 서로 랴오허강까지 이르는 대제국이었다. 서울도 산골짜기의 국내성(國內城)에서 넓은 평야가 있는 평양성(平壤城)으로 옮겨 정치·경제 제도를 완비하고 문화를 꽃피웠다. 또한, 백제는 4세기에 벌써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의 체제를 정비하고, 밖으로 마한을 완전히 복속시키고 서쪽으로 동진(東晉), 남쪽으로 왜(倭)와 통하면서 국제적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5세기 말부터 국세가 약해져 성왕(聖王)이 서울을 사비(泗?부여)로 옮기고 한때 중흥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가장 늦게 일어난 신라는 5세기 초 지증왕(智證王) 때 우경(牛耕)·수리 사업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뒤이은 법흥왕(法興王) 때에는 율령을 반포하고 연호(年號)를 사용하며 불교를 공인하는 등 내정개혁을 단행하여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로서의 통치체제를 갖추었다. 마침내 6세기 중엽 진흥왕(眞興王) 때에는 대외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 화랑도(花郞徒)를 중심으로 한 신라군은 한강 유역·낙동강 유역을 장악하고, 더 나아가 동북으로 함흥평야에까지 진출하였다. 3국의 발전은 중국의 왕조 교체와 깊은 관계를 가지면서 복잡하게 전개되었는데, 마침내 신라는 당(唐)과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다시 고구려·백제 유민과 힘을 합쳐 당의 세력을 이 땅에서 내쫓고 자주적인 통일을 성취하였다. 고대사회의 발전은 676년 신라의 삼국 통일로 급변하였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 왕실은 골품제(骨品制)를 확립하여 귀족세력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중앙의 정치체제를 정비하고 넓어진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9주(州) 5소경(小京)을 설치하였다. 당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무역이 발달하였고 당에는 신라방(新羅坊)이라는 신라인의 거주지까지 생겨났다. 한편 삼국의 문화를 종합하면서 보다 넓은 기반 위에서 새로운 문화를 꽃피워, 문학·과학·예술의 각 분야에서 민족 문화의 토대가 확립되어갔다.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도 더욱 발달하여 불교왕국을 이룬 가운데 원효(元曉)·의상(義湘)·혜초(慧超) 등의 고승이 활약하였고, 불국사·석굴암·봉덕사종과 같은 문화재를 남겼다. 남쪽의 신라와 상대하여 북쪽에서는 발해(渤海)가 고구려의 옛 전통을 계승하여 만주지역을 통치하였다. 당과 교류하면서 유교적 정치제도를 도입한 발해는 8~9세기에 걸쳐 독특한 발전을 보였으나, 거란족에 의해 패망한 이후 만주는 우리 역사에서 떨어져나갔다. 통일신라는 말기에 이르러 왕권이 약해지면서 6두품(六頭品) 세력이 대두하고, 지방에서 호족(豪族) 세력이 성장하면서, 마침내 후고구려(後高句麗:마진·태봉)와 후백제(後百濟), 그리고 신라로 다시 분열되었다.
【중세사회】 10세기 초에 이르러 고대사회는 중세사회로 전환되어갔다. 918년 고려를 세운 왕건(王建)은 호족세력을 기반으로 후삼국(後三國)의 사회 혼란을 수습하고 민족을 재통일하였다. 고려를 건국한 주체세력은 보다 능률적인 중국의 관제를 도입하고, 과거제도(科擧制度)를 마련하는 한편, 유교정치사상을 통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완성하였다. 또 이 때에는 사회적·문화적 혁신이 단행되어 민족의식이 강화됨으로써 3차례에 걸친 거란족의 침입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귀족 중심의 고려시대에는 신라보다도 문화의 폭이 크게 확대되어 지방호족이 문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고, 불교문화와 유교문화가 융합되었다. 불교는 전기에 의천(義天)을 중심으로 천태종(天台宗)이, 후기에는 지눌(知訥)을 중심으로 조계종(曹溪宗)이 발달하였는데, 불교의 발달로 3차례에 걸쳐 대대적으로 대장경(大藏經)이 조판되었다. 또한, 과거제도가 실시되면서 한문학·역사학도 발달하였는데, 최승로(崔承老)·정지상(鄭知常) 등의 학자가 유명하였고, 김부식(金富軾)이 쓴 《삼국사기》는 현존하는 가장 오랜 역사책이다. 예술에서는 고려청자로 널리 알려진 공예 부문이 특히 발달하였다. 그릇 표면에 음각(陰刻)을 하여 무늬를 넣는 순수청자에 이어, 제작된 백토나 흑토를 그릇 표면에 새겨넣어 무늬를 나타내는 상감청자(象嵌靑瓷)는 고려에서 독특하게 발달한 작품이다. 한편 중세사회에서는 토지제도와 조세제도가 경제생활의 기본구조를 이루고 사회의 경제기반을 마련했는데, 특히 지배세력의 성격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성립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귀족을 중심으로 전시과(田柴科)가, 이어서 조선시대에는 양반을 중심으로 과전법(科田法)이 실시되었는데, 모두가 지배층인 귀족이나 양반을 중심으로 토지가 분배되었고, 제도적으로는 토지 국유(國有)를 원칙으로 하여 지배층은 조세를 받을 수 있는 수조권(收租權)만 가지며 농민은 토지의 경작권만 가지게 하였다. 그러나 고려왕조가 동요하는 12세기 이래로 귀족들의 토지 사유화 경향이 나타나, 13세기에는 전국에 농장(農莊)이라는 대토지 소유제가 형성되었고, 그것은 소수 권문귀족(權門貴族)의 사유지였을 뿐만 아니라 면세(免稅)·면역(免役)의 특권을 누렸다. 농장의 소유주인 귀족들은 부재지주(不在地主)였으며, 농장의 경작은 전호(田戶)나 노비(奴婢)가 담당하였는데 이들의 위치는 농노(農奴)와 다를 바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왕조의 과전법 체제하에서도 마찬가지로 농장의 소유주가 양반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농장의 증대는 국가의 공전(公田)을 침식하였고, 따라서 국가재정의 궁핍을 초래하였다. 국가 재정의 궁핍은 왕조의 동요를 초래하여, 귀족정치의 혼란에 이어 나타난 무인집권, 그리고 밖으로 몽골[蒙古]과의 항쟁을 통하여 위기를 맞은 고려왕조의 붕괴를 재촉하였다. 귀족사회의 모순은 이미 1126년 이자겸(李資謙)의 난, 35년 묘청(妙淸)의 난, 70년 무신란(武臣亂)으로 나타나 마침내 60년에 걸친 변태적인 무인집권을 초래하였고, 뒤이어 몽골의 침입, 원(元)의 정치적 간섭이 행해졌다. 조선왕조는 이와 같은 내외의 시련을 해결하는 방향에서 출발하였다. 일찍이 14세기에 충선왕(忠宣王)과 공민왕(恭愍王)을 도와 개혁을 시도한 새 왕조의 주동세력인 사대부(士大夫)들은 국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사회의 융합을 꾀하는 한편,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추진하여 국가의 역량을 키우려 하였다.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 개혁의 주도세력인 사대부들은 양반이란 명목하에 정치·사회의 주도 계층으로 성장하면서 지배 신분을 확립하였다. 그리하여 15세기에는 태종(太宗)·세종(世宗)·세조(世祖)를 중심으로 권력구조가 개편되고 중앙집권체제가 강화되면서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세종 때에는 국토가 압록강·두만강까지 확장되었다. 또 산업발전과 실용적 학문의 발전으로 민족문화가 크게 피어났으며, 그 중에서도 1446년(세종 28) 반포된 훈민정음, 즉 한글은 민족문화의 새 장을 열었다. 그러나 15세기의 이같은 개혁운동은 14세기 붕괴 직전에 이른 중세사회를 재편·강화하려는 움직임으로써, 고려와 조선의 교체는 중세사회 내부에서의 변혁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모순과 한계를 지니고 있던 조선왕조는 16세기 이래 다시 동요되어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면에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때에 임진왜란(壬辰倭亂)·병자호란(丙子胡亂) 등 커다란 외적 시련을 맞아 17세기에는 그 수습에 힘쓰는 한편 대책을 세워야 했으나, 고식적이고 미봉적인 타결책은 역사의 새로운 방향과 부합되지 못하였다. 특히 왜란으로 인한 농촌사회의 피해는 극도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란 이전에 이미 불붙은 당쟁(黨爭)은 더욱 격화되어 전체 양반사회를 분열과 침체에 빠뜨렸고, 전통적 신분체제를 크게 와해시켜 갔다. 한편 농촌사회에서는 농장이 계속 확대되어 대부분의 농민들은 소작전호(小作田戶)의 위치에 얽매여 있었다. 그러나 농업 기술과 상업적 농업의 보급으로 부(富)를 얻을 수 있었던 일부의 농민들은 자작농(自作農)과 소작농(小作農)을 겸하거나 경영형 부농(經營型富農)으로 성장하여 종래와 같은 봉건적 지배를 점차 탈피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양반지배층은 성리학(性理學)을 교조적(敎條的) 이데올로기로 여기고 있었다. 고려시대의 불교에 대신하여 조선시대의 양반 사대부들이 새로운 사회질서를 위해 수용한 성리학은 16세기에 이르기까지, 다시 말하면 중세사회 체체 내에서는 사회개혁과 사회체제의 정비를 위해 긍정적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였다. 서원(書院)을 중심으로 융성한 성리학은 형이상학적 국면으로 발전하여 이황(李滉)·이이(李珥)와 같은 철학자를 배출하였고, 윤리적 측면이 강조되어 예학(禮學)으로 전화(轉化)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이래로 기존 사회질서의 변화로 인하여 사회적인 기능을 상실하자, 성리학의 전근대성(前近代性)을 탈피하려는 새로운 사상체계인 실학(實學)이 대두되었다.
【근대사회】 한국사에서의 근대사회의 태동은 실학(實學)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중세사회는 17·18세기에 이르러, 특히 사회·경제 분야에서 전통적 사회의 특성을 잃고 있었다. 사회붕괴의 여건이 바탕이 되어 사상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근대사회를 지향하는 사조(思潮)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전통적 사회체제를 청산하고 새로운 사회를 이루려는 일련의 사상체계인 실학이 발달하였다.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정약용(丁若鏞) 등 중농적 개혁사상을 주창한 실학자나, 유수원(柳壽垣)·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 등과 같이 상공업 중심의 개혁안을 제시한 실학자 모두가 비현실적인 문제의 해결을 목표로 사회 개혁과 제도 개편을 주장하였다. 비록 실학이 유교적 기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고, 실학자들의 개혁안이 모두가 실천되지 않았다 해도, 그것은 서서히 근대사회로 지향하는 데 기여하였다. 중세사회의 태내(胎內)에서 근대 지향적인 사상으로 발달한 실학은 개항(開港) 이후의 개화사상으로 연결되어 한국 근대사상에서 하나의 맥락을 이루게 되었다. 일부 지식인들에 의하여 실학사상이 제시되었으나, 19세기의 정계는 세도정치(勢道政治)로 말미암아 파국을 맞았다. 정치 기강의 문란으로 국가재정이 어려워지고, 농촌경제는 파탄에 빠졌다. 아울러 동요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한 신분제는 양반 중심의 지배체제에 커다란 위기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농민들의 의식이 점차 높아져 곳곳에서 민란(民亂)이라 지칭되는 민중운동이 일어났다. 이 때 밖으로부터는 가톨릭과 함께 서양세력이 접근해와 양반사회를 더욱 위협하였다. 이러한 때에 집권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전제왕권(專制王權)을 재확립함으로써 조선이 처한 위기를 극복하려 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마침내 1876년 개항을 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은 오랜 유교적 전통사회로부터 새로운 근대사회로의 지향이 가속화되었다. 정치제도 개혁과 외교관계 혁신, 교통·통신·의료·교육 등에서의 근대 문물 도입 등이 서서히 추진되었다. 그러나 근대사회를 예비하지 못한 정계(政界)는 개화사상과 척사사상(斥邪思想)의 갈등 속에서 임오군란(壬午軍亂:1882)·갑신정변(甲申政變:84)·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94)·갑오개혁(甲午改革:94)·을미사변(乙未事變:95)·아관파천(俄館播遷:96) 등 극심한 혼란을 거듭하면서 제국주의 세력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길을 잃었고, 한반도는 거문도사건(巨文島事件:85), 청·일전쟁(淸日戰爭:94), 러·일전쟁[露日戰爭:1904] 등에서와 같이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러나 한편 침략세력에 대항하는 민족적 각성과 근대문화에 대한 선각 지식층의 이해가 깊어지면서 독립협회(獨立協會)가 조직되고, 자주자강운동(自主自强運動)이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일어나 99년 근대국가로서의 대한제국이 수립되었다. 대한제국은 관제를 개혁하고 교육시설을 확충하며, 민의가 반영되는 개혁정치를 실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끝내 열강의 간섭을 배제하지 못하고, 무력을 앞세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1910년 이후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한민족의 민족운동을 탄압하고 경제적 착취를 강행하여 한국의 사회와 문화를 해체해 갔다. 그럼에도 한민족은 이에 굴하지 않고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수호하고자 궐기하였으니, 그것은 일본의 야심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을미사변 이래 의병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의병의 항전은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시해와 단발령(斷髮令)에서 비롯되었는데,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의 강제체결로 본격화되고, 1907년 고종(高宗)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최익현(崔益鉉)·신돌석(申乭石)·허위(許蔿) 등은 의병대장으로서 대대적인 대일항쟁(對日抗爭)을 전개하였다. 의병들은 산간 벽지를 근거로 유격전을 벌이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나 10년 국권피탈을 계기로 점차 활동의 기반을 잃어 이후 만주와 시베리아로 자리를 옮겨 영속적으로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을 전개하였다. 한편 을사조약의 체결을 전후하여 전국적으로 활발히 일어난 애국계몽운동은 10년 이후에도 줄기차게 국내외에 확산되었는데, 일제의 무단통치(武斷統治)로 활동이 어렵게 되자 신민회(新民會)와 같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하였다. 3·1운동은 이와 같이 국내외에서 추진된 거족적 구국운동의 결실이었다.
【현대사회】 19세기 유럽에서는 봉건시대(封建時代)의 잔재인 신분적 특권과 지방분권적 요소를 일소하고 국민적 통일의 완성을 요구하는 시대사조(時代思潮)가 강력히 대두되었다. 보통 국민주의 또는 민족주의(nationalism)라고 일컫는 이 사상의 영향으로 국제사회에서는 하나의 독립된 국가임을 요구하고, 자국(自國) 내에서는 국민의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주장하는 국민국가(國民國家)의 출현을 보았다. 국민국가란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국가이다. 유럽에서 18세기에 발흥된 국민주의 또는 민족주의는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벨기에·그리스를 비롯하여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로 하여금 독립을 쟁취하게 하였고, 수세기 동안 분열되어 있었던 독일이나 이탈리아로 하여금 국가의 통일을 완수하게 하였다. 제국주의의 침탈로 인하여 식민지로 전락해 있던 아시아·아프리카에서의 국민주의 운동은 독립형(獨立型)으로 추진되었으며, 중국·인도·한국이 그러하였다.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스와라지운동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국민주의 또는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비롯된 것이며, 그 결과 세워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민국가라 이름할 만하다. 말하자면 1919년은 한국 현대사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의 세계사는 격랑과 같이 소용돌이쳤다. 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났고, 14년에는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으며, 이를 수습하고자 20년 국제연맹이 조직되었으나, 전체주의(全體主義)가 곧이어 나타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을 침탈한 일본은 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을, 37년 중·일전쟁을, 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세계사를 동요시켰다. 우리 민족의 현대사는 바로 이러한 세계사의 움직임과 이어져 전개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뒤처리를 위하여 제창된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는 그 동안 망명활동과 비밀결사, 혹은 교육활동·종교운동 등에 의지하여 소극적으로 전개되어오던 독립운동을 전국적인 대규모 민족운동으로 표면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어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비록 망명정부(亡命政府)였지만, 3·1운동에 나타난 국민의 힘의 반영이며 또한 한국 국민의 정치의식이 이미 새로운 단계에 도달하고 있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일제의 대륙침략전쟁이 확대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우리 민족의 독립투쟁도 거세어져 국내에서는 26년 6·10만세사건, 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고, 국외에서는 20년의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를 거쳐, 40년 광복군(光復軍) 창설을 보았다. 마침내 45년 8월 한민족은 35년 간에 걸친 민족적 시련을 극복하고 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민족의 광복은 그대로 독립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국토분단의 비극과 민족분열이라는 또 다른 시련을 가져왔다. 역경 속에서 48년 8월 이승만(李承晩)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을 출범시켰으며, 민족사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민주주의를 추구하면서 새 국가로의 발전을 다짐하였다. 50년 6·25전쟁의 민족적 비극을 맞았으나 자유당(自由黨)의 제1공화국, 민주당(民主黨)의 제2공화국, 공화당의 제3공화국, 유신 후의 제4공화국, 10·26 후의 제5공화국·제6공화국을 거쳐 제7공화국의 문민정부가 수립되었다. 정치적으로 민주주의 확립을 위한 노력이, 경제적으로 자본주의 산업체제의 수립이 추구되면서 사회적으로 복지사회를 지향하며, 대중문화가 확산되어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이같은 민족적 과제 속에서 문민정부는 세계 속의 한국, 한국의 세계화를 지향하면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다.
5. 정치·외교·군사
【법체제】 8·15광복 후 미군정(美軍政)이 실시되는 동안 한국은 미군정장관의 포고·법령·고시 등의 적용을 받았다. 그리고 군정법령 제11호로 일제강점기의 법령 중 치안유지법·정치범죄처벌법·출판법 등을 비롯한 악법이 폐지되었으나, 군정법령 제21호로 일제강점기의 법령 대부분이 그대로 효력을 유지하였는데, 이것은 건국을 앞둔 과도기의 부득이한 조치였다. 광복 후의 사상적 대립과 사회적 혼란 속에서 제헌국회(制憲國會)가 소집되어 1948년 7월 17일 대통령제 및 단원제 국회를 통치체제의 골자로 한 대한민국헌법이 공포됨으로써 역사상 최초로 국민주권·권력분립·기본권 보장 등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담은 헌법체제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헌법에 입각하여 7월 17일 법률 제1호로 정부조직법이 공포되고,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국회법(1948)·법원조직법(49)·검찰청법(49)·국군조직법(48)·지방자치법(49)·국가공무원법(49) 등의 주요 조직법과 국세징수법(49)·관세법(49)·농지개혁법(49)·재정법(51) 등도 공포되었다. 또한 국가보안법(48)이 제정되었고, 노동3법(53)과 형법(53)·형사소송법(54)·민법(60)·민사소송법(60)·상법(62) 등의 기본육법(基本六法)을 차례로 정비하였다. 6·25전쟁의 참화를 겪으면서 행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발췌개헌’과 ‘사사오입 개헌’ 등이 이루어졌고, 4·19혁명 후에는 영국식 의원내각제를 채택하여 국회를 참의원과 민의원의 양원제로 하는 시행착오의 과정을 겪었다. 이로써 종래의 의원내각제 요소를 가미한 대통령중심제가 폐지되었다. 그러나 61년 5·16군사정변으로 일부 헌법기능이 정지된 가운데 조사정변주체세력이 주축이 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61년 7월 ‘구법령 정리에 관한 특별조치법’(법률 659호)을 제정하고 법령정리위원회를 설치하여 일제강점기의 구법령을 모두 폐지하고 그에 대치될 법령 제정에 착수함으로써 비로소 주권국가로서의 형식적 면목을 갖추었다. 63년의 제5차개정 헌법은 다시 대통령제를 채택하여 행정부의 권한을 한층 강화하였다. 72년 10월 이후 이른바 유신체제하에서는 전통적인 민주주의체제가 많은 제약을 받았다. 이 시기에는 국세기본법·농지기본법·산업기지개발촉진법·민방위기본법·부가가치세법·사회안전법·의료보험법·모자보건법 등 수많은 법률이 여·야 국회의원의 극한적인 대립 속에서 제정·개정되었다. 노동3법의 개악 등으로 근로자들과 일반국민의 기본권이 많은 제약을 받았고, 법규사항(法規事項)이 대폭적으로 대통령령에 위임되는 등의 변칙성을 보였다. 80년 제8차개정 헌법은 유신체제하의 제약들을 폐지하여 인권불가침성을 확인시켰고, 국회의 지위를 회복시켰으며, 복지사회구현을 위한 법체제 마련에 노력하였다. 87년 개정된 현행 헌법은 대통령직선제 및 대통령단임제를 규정하여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한 정부 선택 보장과 평화적 정권교체의 전통을 확립하였으며, 대통령 권한의 합리적 조정과 국회기능 활성화를 통한 국가권력의 균형과 조화를 도모함과 아울러 헌법재판소의 신설 및 법관 임명 절차의 개선 등을 통해 사법권 독립의 실질적 보장과 헌법의 실효성을 제고할 수 있도록 하였다. 더욱이 김영삼정부에서의 개혁입법 추진으로 국민의 기본권 신장과 복리증진 및 국민생활의 기본수요를 충족시키는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법률정비에 노력하고 있다. 행정소송에서는 기존의 행정심판전치주의에 따른 2심제를 개선하여 행정소송 3심제를 채택하여 국민의 권리구제 강화와 국민편익을 도모하고, 세계화·지방화 등 행정환경과 행정수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강력한 정부를 구현하기 위해 정부조직법을 개정하였으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촉진하기 위해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90)과 남북협력기금법(90)을 보완하였다. 아울러 실질적 법치주의 구현 및 사법민주화를 위한 사법개혁을 비롯한 여러 개혁정책에 따른 법률 개폐로 인한 법체제의 정비가 이루어지고 있다.
【정당】 8·15광복 이후 정치활동이 자유로워지자 좌경세력이 중심이 된 건국준비위원회, 우익민주세력인 한국민주당, 지하공산세력인 조선공산당을 비롯하여 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인민당 등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근대적 의미의 정당활동이 인정된 것은 1946년 11월 23일에 발포된 미군정법령(美軍政法令) 제55호 ‘정당에 관한 규칙’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따르면 당원수가 3인 이상이면 정당이 성립되는 데다가 당시에는 좌우익간의 대립이 심하여 주도력을 가진 정치적·사회적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다만 혈연·지연 중심의 소규모 사회적 연대관계가 존재하였으므로 수많은 군소정당들이 난립하였다.
〈제1공화국〉 한국의 정당이 의회주의 정당으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제헌국회가 성립된 이후부터이다. 48년 제헌국회의원선거에는 48개 정당들이 참가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 55명, 한국민주당 29명, 대동청년단 12명, 조선민족청년단 6명, 기타 정당 13명, 무소속 85명이 선출되었다. 그 해 제정된 제1공화국 헌법에는 정당에 관한 규정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으며 별도의 정당 법규도 없었으므로 정당의 보호나 규제에 관한 법적 근거가 없었다. 국회의원이 있는 정당은 원내교섭단체라는 국회법에 의한 대우를 받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 만큼 정당의 성립도 용이하여 군소정당이 난립하고, 무력하게 해산당하기도 하였다. 50년 총선거가 끝난 후 대통령 이승만은 그 동안의 초당적인 카리스마적 태도를 바꾸어 52년 자유당을 창당하였으며, 54년 제3대 국회의원선거를 통하여 자유당은 국회에서 다수를 차지하였다. 그 해 11월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이 이루어지자 제1야당인 민주국민당(49년 한국민주당과 대동청년단이 통합)은 자유당 탈당의원 및 흥사단을 흡수하여 56년 9월 민주당을 발족시켰다. 58년 제4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자유당 126명, 민주당 79명, 무소속 27명, 기타 1명이 당선되었는데, 이로써 군소정당들은 몰락하고 양당제도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권위주의에 치중된 자유당은 정권의 안정과 지속을 위하여 강제적 수단을 자주 사용하였으며, 이에 야당은 여당에 전적으로 반대하는 투쟁으로 일관하였다. 제1공화국 당시의 혁신정당으로는 진보당을 비롯하여 노농당(민족주의 민주사회당)과 민주혁신당이 있었으며, 기타 주요 보수당으로는 통일당·대한여자국민당·삼민당·대한국민당·국민회 등이 있었다.
〈제2공화국〉 60년 4·19혁명으로 자유당은 해체되고 민주당세력이 확대되면서 그 동안 억압받았던 혁신세력이 대거 등장하였다. 그러나 그 해 민의원선거에서는 민주당 175명, 자유당 2명, 통일당 1명, 무소속 49명, 기타 1명과 혁신세력으로 사회대중당 4명, 한국사회당 1명만이 당선되었으며, 참의원선거에서도 민주당 31명, 자유당 4명, 무소속 20명, 기타 1명과 혁신세력으로 사회대중당 1명, 한국사회당 1명만이 당선되었다. 이와 같이 국민들은 온건보수정당인 민주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하였다. 그러나 민주당은 신·구파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61년 2월 민주당과 신민당으로 양분되어 집권당으로서의 국민통합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 후 계속 체제의 취약성을 나타내다가 5·16군사정변으로 정당들은 해체되고 63년 1월까지 정당활동이 금지되었다.
〈제3공화국〉 62년에 제정된 정당법은 법률적인 규제를 통하여 군소정당, 특히 혁신계 정당의 출현가능성을 제도적으로 배제하였다. 63년 2월 5·16군사정변 주체세력에 의한 민주공화당이 등장하였고, 야당은 난립상태에 있었다. 제6대 국회의원선거에는 12개 정당이 참가하여 여당인 민주공화당 110명, 친여세력인 자유민주당 9명, 재야(在野) 3당인 민정당 41명, 민주당 13명, 국민의당 2명이 당선되었다. 민주공화당은 집권당으로서 반공안보와 조국근대화를 내세웠다. 65년 민정당과 민주당이 통합하여 민중당으로 발족하였으며, 민중당은 신한당과 합당하여 67년 2월 신민당을 창당하였다. 그 해 국회의원선거에서는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전체의석의 2/3가 넘는 129석, 신민당 45석, 대중당 1석으로 군소정당들의 후보는 완패하였다. 69년 정당활동은 주로 대통령의 3선 개헌처리를 둘러싼 여·야간의 격돌로 나타났다. 71년 제7대 대통령선거의 결과는 대통령 박정희가 3선되었으며, 제8대 국회의원선거의 결과는 여·야의석의 근소한 차로 균형국회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제1야당인 신민당이 당권 경쟁과 원내 파벌 간의 대립을 일삼는 동안 72년 대통령의 10·27특별선언으로 국회와 정당이 해산되고 정치활동이 중지되는 이른바 10월유신을 맞이하였으며, 12월 27일 장기집권의 초석이 된 유신헌법이 공포·발효되었다.
〈제4공화국〉 72년 12월 23일 제8대 대통령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선거로 선출되었으며, 73년 2월 제9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 73명, 신민당 52명, 민주통일당 2명, 무소속 19명이 당선되었고,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된 국회의원 73명은 민주공화당과는 별도로 친위집단인 유신정우회(약칭 유정회)라는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였다. 따라서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유정회로 인하여 집권당으로서의 기능이 크게 위축되었다. 78년 10월 제10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주공화당 68명, 유정회 77명, 신한민주당 61명, 민주통일당 3명, 무소속 22명이 당선되어 민주공화당과 유정회가 다수의석을 차지하였으나, 득표율에서는 신한민주당이 32.8 %로 31.7 %를 얻은 민주공화당을 앞질렀다. 신한민주당이 이를 바탕으로 민주화운동을 강화함에 따라 그에 대한 탄압도 가중되었다. 결국 79년 10·26사태가 발생하여 80년 10월 27일 새 헌법이 발효되었고, 그에 따라 국회와 각 정당들은 자동 해산되었다.
〈제5공화국〉 81년 2월 25일 새 헌법에 따라 3월 3일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3월 25일 실시된 제11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민주정의당 151석, 민주한국당 81석, 국민의당이 25석을 획득하였다. 85년 2월 12일 제12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신한민주당이 대도시를 석권, 50석을 차지하면서 정계에 새로운 돌풍을 일으켰다. 신한민주당은 86년 2월 기습적으로 대통령직선제 개헌서명운동을 전개하여 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발전시켰으며, 이로써 6·29선언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제6공화국〉 87년 6·29선언으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이 여·야 합의로 발의되어 10월 27일 국민투표로 새 헌법이 확정되었다. 88년 2월 25일 새 헌법에 따라 노태우가 제13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제6공화국은 민주화의 추진, 5공과의 단절, 올림픽 이후의 중간평가 등의 문제를 안고 출범하였다. 4월 26일 제13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민주정의당 125석, 평화민주당 70석, 통일민주당 59석, 신민주공화당 35석, 한겨레민주당 1석, 무소속 9석을 획득하여다. 그 결과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이 33.9 %를 차지함으로써 여소야대(與小野大) 국회가 형성되어 5공비리 청산과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규명 등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중간평가가 유보되고 자치단체장선거가 연기되면서 민주화에 역행하는 현상들이 나타났다. 이어 90년 1월 22일 다가오는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에서의 승리를 위해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3당이 합당함으로써 민주자유당이 탄생하였다.
〈현재〉 92년 12월 18일 민주자유당의 김영삼이 제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93년 2월 25일 문민정부가 출법하였다. 이어 3월 24일 제14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었고, 그 결과는 민주자유당 116석(38.5 %), 민주당 75석(29.2 %), 통일국민당 24석(17.3 %)로 나타났다. 이는 3당통합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적 분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결국 정국판도를 3당통합 이전인 13대 초기의 여소야대 상황으로 되돌려 놓았다.
〈한국 정당의 특징〉 8·15광복 이후 수많은 정당들이 이합집산(離合集散)의 과정을 거쳐 왔다. 그 중에서도 주요 정당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민주당 → 민주국민당 → 민주당 → 민중당 → 신민당 → 민주한국당·신한민주당 → 평화민주당 → 민주당의 순서로 이어져 온 야당세력과 둘째, 제1공화국의 대부분을 집권한 자유당(52∼60) 셋째, 제3·4공화국의 집권당인 민주공화당(63∼80) 넷째, 제5공화국의 여당으로 출발한 민주정의당 다섯째, 제6공화국 때 3당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 등 5대 정당세력을 들 수 있으며, 그 밖의 정당들은 군소정당에 불과하였다. 이와 같은 정당사를 통해서 볼 때 다음과 같은 특징이 발견된다. ① 한국 정당은 국민의 정치의식화, 정치인구의 결집과 훈련, 의회정치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② 한국 정당은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인물중심주의의 취약성을 지녔다. ③ 주요 정치적 변혁이 정당에 의하여 주도되지 않았다. ④ 한국의 주요 정당들은 특정 사회세력이나 특정 이념을 대변하기보다는 국민 전체를 대변하는 범국민적 정당을 지향하였다. ⑤ 정당에 대한 일반국민의 부정적 견해 또는 무관심이 오히려 특정 집단의 물리적 힘에 의한 정치변혁의 길을 열어 주었으며, 정당은 이전의 모든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불안에 대하여 1차적 책임을 지는 속죄양이 되기도 하였다. ⑥ 정치변동이 심하여 한국의 정당들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단명(短命)할 수밖에 없었다. ⑦ 집권당은 권력 정점의 주도로 창당되며, 야당은 권력접근봉쇄에 대한 반발로 인맥집단화(人脈集團化)됨으로써 정당의 자율성과 다원성이 결여되고 경직성·단순성·종속성·분열성이 비교적 높았다.
【정부와 의회】 정부와 의회의 관계는 한 나라의 정부형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한국의 경우는 건국헌법(제1공화국)에서 현행 제6공화국 헌법에 이르기까지 6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⑴ 제1공화국 초기의 정부형태는 헌법 제정 당시의 대립된 정치세력 간의 정치적 타협으로 말미암아 의원내각제 요소가 가미된 대통령제였다. 그러나 1954년 11월 제2차 개헌(사사오입개헌)으로 정부형태는 의원내각제 요소를 거의 청산한 대통령제가 되었다. 그 결과 국회보다 정부인 대통령의 권한이 강화되어 K.뢰벤슈타인이 말하는 신대통령제로 전락하였다.
⑵ 제2공화국의 정부형태는 의원내각제의 이념형으로 간주되는 영국형 의원내각제에 해당한다. 당시의 의원내각제는 국회에 대한 정부(내각)의 연대책임과 내각의 국회해산권은 물론, 행정권의 이원적 구조, 입법권과 행정권의 균형, 국회와 정부의 협조관계 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5·16군사정변으로 구성된 박정희정부는 국가재건비상조치법에 따라 국가의 최고통치기관으로서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하고, 이에 모든 국가권력을 집중시켰다. 즉,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국회의 권한을 대행하며,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하여 구성되는 내각은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연대 책임을 지고, 대법원장과 대법원 판사까지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제청에 의하여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군사정부에서 정부와 의회의 관계는 전혀 새로운 정부형태를 의미하는 회의제(assembly government)의 한 유형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⑶ 제3공화국에서는 정부의 국회해산권과 국회의 정부불신임권이 인정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되는 대통령이 정부의 수반이었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는 대통령제에 해당하는 정부와 의회의 관계를 나타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의원내각제 요소와 철저한 정당국가적 경향이 반영되었기 때문에 그 정부형태는 결코 고전적 의미의 대통령제라고 할 수는 없다.
⑷ 제4공화국의 정부형태는 정부와 의회의 관계에서 정부인 대통령이 의회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제에서 볼 수 없는 이질적인 요소를 많이 담고 있었다. 예컨대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선출방식, 대통령의 국회해산권, 일부 국회의원에 대한 추천권, 절대적 긴급조치권 등은 고전적 의미의 대통령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제도이다.
⑸ 79년 10·26사건과 12·12사태, 80년 5·17비상계엄 선포, 광주민주화운동 등 일련의 격동기를 겪으면서 탄생한 제5공화국의 정부형태는 대통령제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의원내각제 요소가 가미된 것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선거인단의 간접선거로 선출된 7년 단임(單任)의 대통령은 비상조치권·계엄선포권·국회해산권·국민투표회부권·헌법기관구성권 등의 권한행사를 할 수 있어 정부가 국회에 대하여 절대적 우위를 가지는 관계에 있었다.
⑹ 제5공화국의 정통성과 개헌에 대한 논란이 일면서 87년 6월 민주항쟁과 6·29선언 등을 기점(起點)으로 한국 헌정사상(憲政史上) 최초로 여·야 합의에 의한 대통령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제6공화국은 대통령제를 채택,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한 정부선택을 보장하였으며, 아울러 대통령 5년 단임제에 의한 평화적 정권교체의 전통을 확립함으로써 민주국가발전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또한 대통령의 비상조치권·국회해산권을 폐지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국정감사권 등을 부활시키는 등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의 권한을 강화하여 그 기능을 활성화함으로써 정부와 의회 간에 권력의 균형과 조화를 도모하였다.
【사법제도】 사법제도란 법원과 소송에 관한 제도 및 기타 사법권의 작용에 속하는 제도 전체를 말한다. 현행 헌법에 따르면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하며(101조 1항), 사법권의 독립을 위하여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하고(103조), 탄핵 또는 금고 이상의 형(刑)의 선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파면되지 아니하며, 징계처분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정직(停職)·감봉(減俸) 기타 불리한 처분을 받지 아니하는 것으로(106조) 되어 있다. 현행 헌법은 종래 대법원 판사를 대법관(大法官)으로 바꾸고, 대법원장은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며,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고, 일반법관은 대법관회의의 동의를 얻어 대법원장이 임명하도록 규정하고 있다(104조). 법원에는 최고법원인 대법원과 하급법원으로서 고등법원·특허법원·지방법원·가정법원·행정법원이 있으며, 그 외에 헌법상 인정되는 특별법원으로서 군사법원(110조 1항)이 있다. 사법제도는 원칙적으로 3심제로 운영되며, 행정소송은 제1심이 고등법원이 되고 제2심은 대법원이 되어 2심제를 채택하고 있으나, 대통령선거소송과 국회의원선거소송은 대법원의 전속관할(專屬管轄)로 단심제로 하고 있다. 다만 비상계엄하의 군사재판은 단심제로 하는 경우도 있다(110조 4항). 재판은 반드시 공개주의 원칙에 따르도록 되어 있으나, 헌법(109조)과 법원조직법(57조 1항)에 의하여 예외적으로 공개하지 아니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심리를 비공개로 하는 경우라도 판결의 선고는 반드시 공개하여야 한다. 현행 소송제도로는 민사소송·형사소송·행정소송·가사소송·헌법소원 등이 있다. 행정소송의 경우는 특수성을 인정하여 행정심판 전치주의(前置主義)·2심제·출소기간의 제한 등 특례를 인정하고 있으며, 헌법소원의 경우는 헌법재판소제도를 채택하여 ① 위헌법률심판권, ② 탄핵심판권, ③ 정당해산심판권, ④ 기관 간의 권한쟁의심판권, ⑤ 헌법소원심판권을 인정하고 있어 법원의 관할로서는 다만 선거소송·위헌법률심판제청권만이 인정되고 있다.
【지방자치】 지방자치는 민주정치의 개념상 필연적인 것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풀뿌리민주정치(grass roots democracy)라고도 한다. 한국의 지방자치제는 건국헌법에 규정된 지방자치조항(78장 96조)에 의거하여 지방자치법이 제정·공포됨으로써 확립되었으나, 61년 5·16군사정변으로 지방의회(地方議會)가 해산되면서 그 후 제3공화국(헌법부칙 7조 3항), 제4공화국(헌법부칙 10조), 제5공화국(헌법 8장)을 거치면서 명목상의 규정으로만 존재하였다. 그러나 제6공화국에 들어와서 헌법규정(8장)에 따라 새로이 지방자치법을 제정하여 지방자치단체의 종류와 그 조직 및 운영에 관한 사항을 정하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기본적 관계를 정함으로써 지방자치행정의 민주성과 능률성을 도모하며, 지방의 균형적 발전과 한국의 민주적 발전을 기함을 목적으로 출발하였다. 지방자치단체는 크게 ① 특별시와 광역시 및 도(道), ② 시(市)와 군(郡) 및 구(區)로 구분하며, 특별시와 광역시 및 도는 정부의 직할하에 두고, 시는 도의 관할구역 안에, 군은 광역시 또는 도의 관할구역 안에 두며, 자치구(自治區)는 특별시와 광역시의 관할구역 안에 두도록 하고 있다. 헌법과 지방자치법에 따라 지방자치단체에는 지방의회를 두며, 지방의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의 장(長)은 직선으로 선출하고, 그 임기는 각각 4년으로 규정되어 있다. 통합선거법인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94. 3)에 따른 최초의 지방의회의원 선거와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95년 6월 27일에 동시 실시되었다. 지방자치단체는 헌법규정(117조 1항)에 따라 ① 주민의 복리에 관한 사무처리권, ② 자치입법권, ③ 재산관리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지방재정의 영세성으로 인해 재정자립도가 낮고, 광역행정·개발행정·사회복지행정에 따라 중앙집권화 경향이 나타나는 등의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외교】
〈개관〉 한국 정부는 안보·경제복지·국위선양·조국통일을 외교정책의 기본목표로 삼고, 구체적인 상황변화에 따라 그 우선순위와 내용을 조정해 나갔다. 건국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한국은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과 미약한 국력 때문에 주변정세나 국제질서에 영향을 주기보다는 이에 적응하는 형태로 외교정책을 수립해 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상황변화에 대한 장기적인 예측을 할 수 없었고, 외교적 선택이나 영향력의 범위도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의 외교정책은 발전을 거듭하여 그 활동범위가 계속 확대되어 왔다.
〈1950년대의 반공안보외교〉 1950년대는 동서냉전체제와 세계정치질서의 양극화 현상의 영향을 받아 한국의 경우 6·25전쟁과 국토분단을 초래함으로써 반공국가의 건설과 안보가 주요 과제로 제기되었다. 특히 이데올로기가 강조되었던 냉전체제하에서 세계의 국가들은 자국의 국방과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미국 또는 소련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였다. 이에 한국의 안보외교정책도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 간의 유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한미공동방위조약(韓美共同防衛條約)이 그 주축이 되었으며, 이를 기초로 대(對)유엔외교도 강화되어 유엔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60년대의 경제건설외교〉 60년대 한국의 국내정치는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으로 격동기에 있었으나, 국제적으로는 냉전체제의 완화와 더불어 제3세계가 국제정치의 새로운 세력으로 대두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한국 정부는 경제발전을 국가의 최우선 목표로 설정하였다. 특히 경제건설이 수출과 국제협력을 바탕으로 추진됨에 따라 경제외교에 중점을 두었고, 한일회담의 타결과 수출진흥 및 차관도입을 위한 외교활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이와 함께 중립국에 대한 외교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여 수출증대와 국위선양에 기여하였고, 안보면에서도 한미 간의 유대강화와 ASPAC의 창설 및 월남파병을 통하여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70년대의 평화통일외교〉 70년대는 강대국 간의 데탕트 및 미국 세력의 상대적 약화와 함께 세계정치질서가 다원화되었고, 이념보다는 국가이익이 상대적으로 중시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를 이용한 북한의 전쟁도발 가능성이 증가되어 평화정착과 통일이 주요 과제로 제기되었다. 한국 정부는 이러한 정세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남북대화와 6·23평화통일외교정책 및 평화통일 3대원칙을 선언하는 등 평화통일의 기반을 조성해 나갔다.
〈80년대의 선진·북방외교〉 80년대 제5공화국의 국정지표는 선진조국을 건설함으로써 민족의 염원인 조국통일을 평화적·민주적으로 달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정부는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억제하고 평화를 정착해야 함은 물론, 한미안보체제의 유지·강화 및 주한미군의 주둔, 자주국방의 달성을 위하여 미국과의 협력을 유지하는 한편, 일본 등 기타 우방국들과의 협력관계도 강화해 나갔다. 또한 북한에 의한 전쟁발발의 억제와 남북한 간의 대화 및 교류 증진, 4강의 남북한 교차승인(交叉承認),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 등과 관련하여 공산권 국가들과도 적극적인 외교적 접촉과 교류를 추진하였다. 제6공화국에 들어와서는 북방정책이 추진되고 북한에 대한 기존의 소모적 경쟁외교를 지양함에 따라 대북우위(對北優位) 확보에 중점을 둔 제5공화국의 정책기조에 변화가 이루어졌다. 87년 민자당 총재 노태우의 7·7선언이 바로 이러한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 경제는 수출주도형이므로 정부는 지속적인 수출증대와 기술 및 자본투자의 증진을 통하여 대외진출을 확대하는 데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 왔으며, 이러한 대상에는 공산권 진출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자원빈국(資源貧國)인 한국은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위하여 자원의 안정적 확보가 절실하기 때문에 자원보유국들에 대한 경제외교도 강화해 왔다.
〈90년대의 외교방향〉 제6공화국의 지속적인 경제발전과 민주화 및 북방외교의 성공적 추진을 기초로 90년대 한국 외교정책이 추구할 기본방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 포괄적 안보개념에 바탕을 둔 한미안보협력을 강화하면서도 북방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전방위(全方位)외교를 구현해 나가야 하며 둘째,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의 중간단계인 ‘남북연합’을 실현하기 위하여 국제적 협력과 지지를 확보하는 등 평화통일외교를 전개해 나가야 한다. 셋째, 지속적인 경제발전 및 번영을 위하여 경제통상·과학기술 등 선진국 지향의 실리외교를 강화하고 넷째, 태평양시대의 구현을 위하여 대아태지역협력(對亞太地域協力)을 주도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국제사회에서 국력에 상응하는 책임과 역할을 분담하고 각계각층의 국민이 동참하는 평화·문화 외교를 전개해 나가야 한다. 이상과 같은 방향으로 외교정책을 추진함에 있어서 정부는 당면이익에 국한된 단기적 안목에서보다 중장기적 안목에서 종합평가하여 안보·통일·복지·국익(國益)의 4가지 외교목표가 상충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통일정책】
〈제1공화국〉 한국은 1948년 초기부터 유엔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라는 통일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래서 그 해 8월 제헌국회는 결의문을 통해 북한에서 자유선거를 실시하여 한국 국회에 공석으로 남아 있는 100석의 의석을 채우도록 촉구한 바 있다. 6·25전쟁 직후에는 통일문제를 미수복지역에 대한 수복의 개념으로 보고 ‘무력에 의한 북진통일’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정부는 제네바회담 이후 유엔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에 의한 통일을 정책기조로 삼았다.
〈제2공화국〉 장면내각의 통일정책은 ‘대한민국 헌법절차에 의한 유엔감시하의 인구비례에 따른 남북한 총선거’였다. 이승만정부의 통일정책을 그대로 지향하면서 북한 불승인원칙하에 2개의 한국을 부인하는 할슈타인원칙을 고수하였다. 당시 혁신계 정당들은 남북협상과 중립화 통일안을 제시하였으나,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부가 수립되어 반공을 국시로 내세움에 따라 그러한 혁신계 정당들의 제의는 일축되었고, 군사정부는 유엔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안을 유일의 통일방안으로 재확인하였다.
〈제3공화국〉 박정희정부는 장면내각의 통일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선건설 후통일(先建設後統一)’이라는 원칙에 보다 역점을 두어 통일방안의 논의보다는 통일을 위한 역량을 배양하는 데 힘쓰는 ‘통일역량 배양정책’을 내세웠다. 즉, 북한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의 우위를 확보한 후에 한국의 제도를 북한에 확대해 나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초 미·소의 데탕트가 진행되고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개선됨에 따라 그 여파가 한반도에도 파급되어 한국 정부는 60년대에 조성한 국력을 바탕으로 평화통일정책을 추구하였다. 요컨대 박정희정부는 가능한 문제 또는 비정치적인 문제부터 해결해 나가면서 점진적으로 통일로 접근해 나가자는 것이다.
〈제4공화국〉 1973년 6월 23일 ‘평화통일에 대한 외교정책 특별선언’을 발표하고 대북정책과 통일정책을 일원화시켰다. 이 선언을 통해 한국 정부는 남북한 유엔동시가입에 반대하지 않으며,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와도 문호를 개방할 것을 천명하였다. 또한 정부는 74년 8월 15일 평화정착, 문호개방과 신뢰회복, 통일성취라는 평화통일 3대 기본원칙을 제시하였다. 결국 박정희정부의 통일정책의 이론적 근거는 단계적·점진적 접근방법에 기초한 기능주의적 통합이론과 안정형 분단 유지를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독일모델을 따랐다고 볼 수 있다.
〈제5공화국〉 1982년 1월 22일 한국이 추구하는 평화통일방식으로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을 천명하고, 이를 북한이 수락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 통일방안은 당시까지 한국 정부가 제시한 모든 통일정책을 집대성한 것으로서 단계적 접근방법에 의한 구체성과 실현성에 중점을 둔 ‘선평화 후통일’의 기본원칙에 기초한 것이다. 즉, ‘잠정협정’을 통해 남북한 상호간에 신뢰를 회복하고, 민주통일에 이르는 단계에서 남북한 주민의 뜻을 대변하는 남북대표로 가칭 ‘민족통일협의회의’를 구성하여 그 기구에서 통일헌법을 기초하며, 그 통일헌법이 6천만 민족의 자유로운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되면 그에 따라 민주적 총선거를 실시, 통일국회와 통일정부를 구성하여 ‘통일민주공화국’을 수립하자는 것이다.
〈제6공화국〉 1989년 9월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발표하면서 “민족자결의 정신에 따라 자주적으로, 무력행사에 의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민족대단결을 도모하여 민주적으로”라는 통일의 3원칙과 신뢰구축협력→남북연합→단일민족국가건설의 3단계로 통일을 실현시켜 나가겠다고 천명하였다. 통일의 과도기적 체제로서의‘남북연합’은 남북관계 전반에 대한 최고협의결정기구로서 ‘남북정상회담’을 두고, 남북한 정부대표로 구성되는 ‘남북각료회담’과 남북한 동수(同數)의 국회의원으로 구성되는 ‘남북평의회’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또한 남북연합체제하의 각료회의와 평의회 일부를 지원하고 합의사항 이행 등 실무를 위해 공동사무서를 두며, 서울과 평양에 상주 연락대표를 파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통일방안은 남북연합의 발족을 계기로 민족공동체의 회복과 발전을 도모하는 여러 가지 공동사업들을 추진하기 위해 비무장지대의 적성지역을 ‘평화구역’으로 설정할 것을 제의하였다.
〈현재〉 1993년 7월 6일 화해·협력과 남북연합의 단계를 거쳐 1민족 1국가의 통일조국을 실현한다는 3단계 통일론을 제시하였으며, 정책기조로 ① 민주적 절차 존중(국민적 합의), ② 공존공익, ③ 민족복리의 3가지를 강조하였다. 3단계 통일론은 첫째, 남북한이 냉전구조의 산물인 적대와 불신관계를 청산하고 신뢰를 회복해 나가면서 화해와 협력의 관계로 발전하는 단계이며 둘째, 남북한의 관계개선이 어느 정도 활성화되고 정례화되면서 제도화된 남북기구들이 나타나는 남북연합의 단계이고 셋째, 남북평의회에서 제정한 통일헌법을 바탕으로 1민족·1국가·1체제·1정부의 형태로 통일을 이루는 통일국가단계이다. 한편 김영삼정부는 김일성 사망 등 급변하는 한반도 정세에 맞추어 종합적 통일 청사진으로서 ‘한민족공동체 건설을 위한 3단계 통일방안’을 천명하였다. 이 통일방안은 약칭 ‘민족공동체 통일방안’ 또는 ‘공동체 통일방안’이라고도 한다. 이 통일방안의 기본철학은 자유와 민주를 핵심으로 하고, 1체제·1정부를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그리고 통일과정에서는 ‘국가통일’보다는 ‘민족통일’을 우선시하고, 특히‘7천만 한민족공동체 통일’과 ‘자유민주주의체제’를 강조하고 있다.
【군사】 1946년 1월 15일 국방경비대(國防警備隊)가 창설되면서 사관학교가 개교하게 되어 병사들을 모집함으로써 통일된 조직을 갖춘 군사기구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3상회의(三相會議)에서 결의된 신탁통치안의 집행과 문제점을 토의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미국이 단독으로 남한지역에 정식 국방군을 조직한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었으므로 국방경비대는 그 출발부터 정규군으로서가 아니라 국내의 치안질서 유지와 주요 시설의 경계 등을 주임무로 하는 기존경찰의 보조예비대라는 성격을 띠고 창설되었다. 이처럼 국방경비대는 독립국가의 정식 군대가 아닌 관계로 군대의 장비를 제대로 지급받을 수도 없었고, 게다가 일본식 군대에서 미국식 군대로 갑자기 바뀌면서 혼란을 경험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남한 1개도에 1개 연대를 각각 둔다는 계획 아래 확장을 계속하여 47년 12월 1일 제1·제2·제3여단이, 48년 4월 29일 제4·제5여단이 창설되었다. 정부 수립 당시 육군의 규모는 5개 여단 예하 15개 연대, 병력 5만 명에 이르렀다. 49년 5월 12일 국방기구를 간소화하고 모든 자원과 역량을 부대의 증강에 투입하기 위한 조치로서 육군의 각 여단을 사단으로 승격시켰다. 그 결과 육군은 제1·제2·제3·제5·제6·제7·제8사단을 보유하게 되었고, 서울에는 수도경비사령부가 창설되어 6·25전쟁 당시에는 8개 사단이 있었다. 이후 3년 간의 전쟁을 겪으면서 한국군은 풍부한 실전경험과 화력증강으로 전투력이 향상되었으며, 연속해서 생기는 훈련소에서 공급되는 인원으로 인해 작전부대의 재편성과 증설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50년 11월경에는 한국군의 규모가 10개 사단으로, 52년 11월에는 12개 사단으로, 53년 2월에는 14개 사단으로 확장되었다. 교착된 전선에서의 전투손실은 크게 감소한 반면, 신병은 매주 7,200명 정도로 계속 보충되어 53년 4월에는 한국군의 실병력이 미국의 허가선인 46만 명 선을 돌파하였다. 이에 유엔군 총사령관은 한국군의 인가병력을 65만 5000명으로 증가시키고, 20개 사단을 한국군 건설의 최종목표로 삼는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에 따라 육군본부는 그 해 4월 21일 양양에 제22사단과 제25사단을, 6월 18일 논산 제2훈련소에 제26사단을, 광주에 제27사단을 창설하여 총 18개 사단을 보유하게 되었고, 나머지 2개 사단은 한미간의 갈등으로 말미암아 그 편성이 지연되어 휴전 이후에 이루어졌다. 한국군의 건군과정은 휴전에 즈음하여 현대적인 군사기구를 완성함으로써 일단락되었고, 이후에는 한국군 고유의 군사전통과의 조화를 모색해 나가는 가운데 군사적 근대화와 국방체제의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안전보장】 국가안전보장은 외국의 침략이나 국내 반정부집단의 체제파괴(體制破壞) 또는 반란에 대해 국가가 자기의 생존을 위하여 모든 조치를 강구함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안전보장은 분단국인 한국에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한국의 안보는 분단국가적 상황과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 주변강대국들의 이해대립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안보의 위협이 이중으로 가중되는 군비경쟁구조(軍備競爭構造)를 형성하여 경제발전과 사회안정 및 외교신장 등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지금까지 분단국으로서의 한국의 안전보장에 대한 위협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① 한 민족이 같은 생활방식하에서 살다가 인위적으로 분열되었을 때는 통일지향성(統一指向性)을 강하게 나타내는데, 이 경우 분단된 각 개체는 통일을 자기 나름의 이념이나 체제를 중심으로 이루려 하기 때문에 분단국은 원천적으로 격렬한 충돌이나 경합의 소지를 지니게 된다. 더구나 남북한은 6·25전쟁까지 경험함으로써 적대감과 불신감이 더욱 심화되어 왔다. ② 지정학적(地政學的)으로 한반도는 북한을 지원하는 중국이나 러시아와 육속(陸續)되어 있고 한국을 지원하는 미국이나 일본과는 해양으로 떨어져 있는데다가 한국 인구의 24 % 와 정치·경제·군사 등의 모든 분야가 집중되어 있는 수도권이 휴전선에 너무 근접해 있어서 북한의 전격전(電擊戰)에 취약성을 안고 있다. 그러나 최근 세계정치의 탈냉전화(脫冷戰化)와 동북아 지역질서의 재편, 남북한의 유화정책(宥和政策) 등으로 안전보장에 대한 위협이나 안보상황이 달라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 대상과 내용에서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과거의 냉전체제하에서는 북한의 적화통일과 군사도발만을 위협의 대상으로 삼고 안보문제를 군사적 측면이나 정치이념적 차원에서만 다루었으나, 최근에는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국가능력이 강조됨에 따라 군사능력뿐만 아니라 경제·과학·사회·문화 등 전 영역에서의 국력의 강화가 안보정책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한·미연합전략과 미국정보통신체계에 주로 의존해오던 기존의 대미(對美)군사관계의 편중에서 점차 탈피하여 자주국방체제의 확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안보문제에 대한 전통적 개념이 약화되고 그 의미가 확대되면서 지금까지 안보정책의 독점적 주체였던 정부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인식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즉, 새로운 안보상황에 대응하여 국가전체가 동원할 수 있는 총체적 역량을 결집시키기 위해서는 정부의 독점적 지위를 낮추고 국민적 자발성과 안보문제에 대한 포괄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6. 경제·산업
【자본주의의 성립과 발전】 개화사상가(開化思想家)로 알려진 유길준(兪吉濬)은 《서유견문(西遊見聞)》에서 이미 한국에는 오늘날의 주식회사나 합자회사와 같은 사회기업의 제도가 있었다고 지적하면서 장통사(長通社)·연무국(煙務局)·보영사(保社)·혜상국(惠商局)·장춘사(長春社)·광인사(廣印社) 등이 그 본보기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사례로 미루어 개항기(開港期)에는 상공업 분야에 근대적인 경영방식이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882년의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을 시발점으로, 1906년 7월에 있었던 광업법(鑛業法)의 공포를 개항의 완결점으로 볼 수 있다. 1896년 미국이 운산금광(雲山金鑛)의 개발권을 가졌고, 뒤이어 독일·영국·일본 등의 자본이 광업 분야에 진출하였다. 광공업 분야에 선진국가의 자본이 밀려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상업 분야에 대한 진출은 더욱 뚜렷하였다. 이와 같은 외국인 상권(商權)의 신장 추세에 대처하기 위하여 유길준은 《서유견문》에서 서구식의 주식회사 형태의 상사회사(商事會社)를 설립할 것을 강조하였는데, 외국 자본의 진입과 그 신장 추세를 막기 위해서는 근대적인 상법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개항과 더불어 전통적인 천상적(賤商的) 신분제도가 해체됨에 따라 상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급격한 증가 추세를 보였다. 12년에 이르러 한국인의 직업별 인구 구성은 농림업 인구 1,208만 2,520명에 비하여 상업 및 교통운송업 인구가 99만 365명으로 2위를 차지하였다. 3위는 공업 인구로 20만 8,315명이었으며, 자유업 인구가 17만 5,995명이었다. 개항기에 싹튼 상업 종사자의 인구 증가는 12년에 이르러 농림업 인구 다음가는 비중을 차지하는 결과를 빚었다. 인천·부산·원산·진남포·목포·군산·마산포·성진·신의주·경성(서울)·청진 등 11개소의 개항장이 도시로 발전하여 촌락사회주도형(村落社會主導型)인 한국의 전통사회에 도시사회의 면모가 부각되었다. 개항장에는 촌락사회로부터 유입되는 인구이동 현상이 일어났고, 개항장에 유입된 한국인들은 상공업 등의 새로운 직업에 종사하는 임금노동자라는 직업인으로 변신하였다. 22년에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런데 22년에 공업에 종사하는 한국인수는 35만 8,205명이고, 상업 및 교통업에 종사하는 한국인수는 97만 1,195명으로 합계 132만 9,400명을 헤아렸다. 이 중에서 임금노동자로 일하는 한국인 수가 91만 8,603명(남자 88만 2,291명, 여자 3만 6,312명)이었으니 상공업 총인구수의 61.6 %가 임금노동자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한말에는 민족자본을 투입, 의류품(衣類品)을 근대적 기계생산으로 직조하게 되어 1910년경까지 서울에서 기계적인 방법으로 의류품을 직조하는 공장수가 38개소에 이르렀다. 직기대수는 면포(綿布)공장에 199대, 견포(絹布)공장에 29대, 교직물공장에 29대가 설치되었다. 직공수는 면포 직조공장에 125명, 견포공장에 44명, 교직물공장에 40명이 취업하고 있었다. 이것은 기계적인 방법으로 의류품을 직조하는 이른바 작은 산업혁명의 성격을 지닌 역사의 한 토막으로 볼 수 있는 사실이다. 23년에 경성상공회의소(京城商工會議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서울에는 11개소의 직포공장이 운영되고 있었다. 주요 직포공장의 경영규모는 대창(大昌)무역주식회사가 20만 원의 자본금에 종업원수 60명이었고, 11년에 설립된 경성직유회사(京城織維會社)는 15만 원의 자본금에 종업원수 108명이었으며, 11년에 설립된 경성직물공사(京城織物公司)는 20만 원의 자본금에 81명의 종업원을 거느리는 규모였다. 10년경에 설립된 38개소의 직포공장들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으나, 다만 종로상인들이 경영한 동양염직회사(東洋染織會社)만이 잔존하여 직포 업계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직포업이 처음부터 한국의 민족산업으로 발판을 굳히고 발전을 거듭하여 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11년에 설립된 경성직유회사는 17년에 이르러 김성수(金性洙)가 인수하여 역직기(力織機) 40대를 갖춘 근대적 직포공장의 체모를 갖추었고, 19년 10월 경성방직주식회사(京城紡織株式會社)로 발전하였다. 한국의 민족자본은 발빠르게 은행업의 경영에 진출하였다. 1897년 한국의 귀족층과 상인층을 상대로 일본인들이 은행업의 경영을 권유하여 한성은행(조흥은행의 전신)이 설립되었는데, 이 때부터 1920년에 이르기까지 민족자본에 의하여 13개의 은행이 설립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접어들자 이들 민족자본 은행들은 강제로 조선상업은행(朝鮮商業銀行)과 조흥은행(朝興銀行)에 통합되었다. 그리고 은행업이 전비조달(戰費調達)의 창구로 이용됨에 따라 민족자본은 모조리 전쟁채권(戰爭債券)으로 휴지화되었다.
【국민경제의 기반확립】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함으로써 한국은 1945년 8·15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단일 국민경제를 건설하기에는 여러 가지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다. 전쟁에 인적·물적 자원이 강제동원되어 민족경제는 황폐된 데다 남북으로 분단되어 생산체제가 혼란을 겪게 되었다. 남한에 남아 있던 생산시설은 일본 내의 산업과 계열화되었고 북한으로부터의 전력공급이 끊겨 가동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한편, 해외로부터 교포들이 유입하고 월남인들이 늘어나 비축물자는 바닥나고 생활필수품은 품귀현상을 보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미군정 당국은 3년 동안 점령지역구호계획(GARIOA) 자금에 의한 약 4억 6034만 달러를 원조하였다. 이 원조에 의하여 도입된 물자는 식량·피복·직물 등의 생활필수품이 49.2%를 차지했으며 농업용품·석유 등도 들여왔다. 당시 무허가 사무역이 성행하였는데 일본으로부터 품귀물자를 수입하였고, 중국의 마카오·홍콩 등과도 물자교역이 이루어져 긴급한 민생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러다가 48년 자유민주체제의 정부가 수립되면서 국민경제의 건설을 시도하게 되었다. 이승만정부는 국민의 여론을 수렴하여 국민 각 계층을 위한 정책을 제시하였다. 농지개혁을 실시하여 소작제를 철폐시킬 것과 기업활동을 보장하여 개인의 창의를 발휘케 하며, 근로자들에게도 이익이 균점되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6·25전쟁까지 2년 간에 걸쳐 실시되어 면방직공업의 시설복구와 개선에 힘써 일제강점기 말의 수준을 능가하기에 이르렀고, 전력은 수력·화력발전소를 건설하여 48년 말에는 27만 2825만 kW의 전력을 공급할 수 있었다. 석탄생산은 정부의 재정금융지원으로 8·15광복 후 대비 5배나 늘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회복세는 6·25전쟁으로 인하여 끝나고 말았다. 남한이 입은 경제적 피해는 생산시설의 42 %, 공장건물의 46 %가 파괴되는 막대한 것이었고, 사회간접자본을 비롯하여 산업활동의 중추부문을 잃게 되었다. 특히, 한국산업의 심장부로 불리던 경인지방에 밀집해 있었던 섬유공장은 거의 다 파괴되었다. 더욱 격심한 피해는 전비조달을 위한 재정금융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막대한 재정지출을 중앙은행에서 차입했기 때문에 통화발행액이 격증하여 인플레이션을 가속시켰다. 물가상승은 가히 폭발적이어서 전국 도매물가지수는 47년을 100으로 할 때 전쟁이 끝난 53년 말에는 5,446 %로 치솟았다. 이러한 경제 여건에서 기업은 장기적인 생산활동보다는 유통부문에 집중하였고 인플레이션 체질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전후복구를 위해서 외국원조를 적극 받아들이기로 한 정부는 52년 미국과 ‘경제조정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고, 54년에는 ‘한국경제원조에 관한 대한민국과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과의 조약’을 조인하였다. 53~61년 미국으로부터 약 22억 8천만 달러를 무상제공받았고, 부족한 재원은 산업복구국채 및 산업금융채권으로 충당하였다. 이 기간 중 연평균 4.7 %의 경제성장률을 보였으며 공업부문의 비중이 60년에는 20.5 %로 커져 산업구조가 개선되었다. 50년대 후반에 제분·제당업은 급속히 발달하여 60년대 초에는 생산과잉을 나타냈으며, 섬유·화학·제지·공업 등도 비교적 활발하였으나, 제철·제강·기계 공업 등의 부문은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다. 즉, 소비재 위주의 공업건설에 치중하게 되고 기간산업부문은 경시되었으며, 원료의 90 % 이상을 수입에 의존함으로써 건전한 국민경제의 발전에는 문제점을 보였다. 이와 같이, 8·15광복 후부터 61년까지의 한국경제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노출시켰으나 미군정 기간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시체제를 철폐하였으며, 이승만정부의 12년 간은 자유경제체제를 확립하고 6·25전쟁의 전후복구사업을 통해 국민경제건설의 기반을 닦았다고 할 수 있다.
【정부주도의 경제개발】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들어선 박정희정부는 민생고 해결을 내세워 정부가 국민경제 전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개발정책을 계획하게 되었으며, 62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66)을 정식으로 시작하였다. 그 후 한국경제는 경제개발정책에 의하여 성장·발전을 거듭하였는데 4차례의 5개년계획을 성공리에 마쳤으며, 전두환정부 기간에 시작된 제5차(82~86)부터는 경제사회발전5개년계획으로 명칭을 바꿔 추진하였고, 91년에 제6차(87~91)로 마무리되었다. 경제계획은 1950년대 이승만정부와 그 후의 장면내각에 의해서도 입안되었는데, 6·25전쟁으로 인한 피해복구에 중점을 두고 미국의 무상원조를 바탕으로 수입대체산업을 건설하겠다는 정도였다. 이에 비하여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외국자본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공업부문을 집중지원해 공산품을 수출한다는 불균형성장전략을 채택하였다. 제1~4차 계획은 기본목표를 자립경제구조의 실현에 두었고, 제3차 계획부터 지역개발의 균형을 이루고자 했으며, 제4차 계획부터는 사회개발을 촉진하고 공업화에 따른 빈부격차를 해소하려고 했지만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경제안정기조의 정착은 제5차 계획의 기본목표로 제시되었고, 제6차 계획은 경제선진화와 국민의 복리증진을 기조로 삼았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개발전략은 불균형성장론(不均衡成長論)에 기초를 두고 공업을 전략산업으로 집중육성하여 농업 등의 산업에 선도산업의 발전효과가 파급되도록 전략을 펴나갔다. 한편, 제1차 계획에는 대외지향적인 개방체제의 개념이 확실하게 정립되지 못했으나 제2차 계획 이후 공업화 전략을 꾸준히 추구하였다. 각 계획에서 세웠던 목표와 실적을 대비하면 경제성장률·국내투자율·상품수출증가율 등의 총량적 성장지표들은 제4차 계획기간(77~81)을 예외로 하면 목표를 초과달성하였음을 보여준다. 이 가운데 국민총생산(GNP) 성장률은 매우 높아 불변가격 기준으로 기간평균 5.8~10 %를 실현하였고, 그 규모를 경상가격 기준으로 살펴보면 제1차 계획기간 말인 66년 말의 37억 달러에서 91년 말의 292억 달러로 25년 간 7배 가까이 늘어났다. 1인당 국민총생산 역시 같은 기간에 125달러에서 6,757달러로 53배나 격증하였다. 이러한 경제성장은 수출신장에 힘입은 바가 큰데 수출규모는 66년 말의 2억 5천만 달러에서 91년 말의 718억 7천만 달러로 286배나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특히, 86년은 무역수지가 흑자를 기록했으며 노태우정부의 89년까지 이어졌으나 그 후는 과소비 풍조의 만연과 복지에 대한 욕구가 늘어나 수입이 수출을 초과하였다. 수출품목은 60년대에 합성섬유·화학섬유 등 소비재가 주로 수출되었으나 차츰 중간재와 시설재의 비중이 늘어났으며 제6차 계획기간 말에는 경공업제품과 중화학공업제품의 수출액비율이 38:62로 역전되었다. 이와 같은 수출신장률은 국내의 산업기반보다는 금융·세제면의 각종 특혜를 중심으로 하는 정부의 수출지원정책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취약점이 많았다. 산업구조면에서는 1차산업(농림어업):2차산업(광업·제조업·건설업):3차산업(사회간접자본 기타)의 비율이 62년의 36.6:6.3:47.1에서 91년의 7.7:42.9:49.4로 변화하여 30년 간 광공업의 비중이 크게 늘어난 반면 농림어업은 현저하게 줄어들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높은 경제성장과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자본과 기술을 해외에 의존했기 때문에 총외채는 91년 말 현재 391억 달러에 달해 원리금을 갚아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또한 외채차입과 수출신장을 바탕으로 하는 공업화는 여러 가지 취약점을 나타냈다. 저임금에 기초한 수출확대는 빈부의 격차를 더욱 확대시켜 노사 간의 갈등을 낳았고, 중화학공업에 대한 과도한 투자는 독점자본을 강화시켜 중소기업의 희생을 초래했으며, 산업구조면에서도 수출제일주의는 이농인구의 증가와 농업노동력의 감소를 가져왔다. 그리고 주택보급 등의 사회개발면에서의 계획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여 복지에 대한 기대와 욕구를 증대시켰다. 대외적으로는 국제 자원파동이나 수입규제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어 국제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기술개발이 중시되었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의 62년 이후의 경제는 장기적인 건전한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여 경제규모가 확대되는 양적인 성장을 이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소득분배(所得分配)의 불평등과 자원배분(資源配分)의 비효율성을 극복하면서 성장을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남겼다. 이러한 과제에 대응하여 제7차 계획(92~96)이 수립되어, 21세기 경제사회의 선진화와 민족통일을 지향하는 기본목표를 잡았으나 김영삼정부의 신경제5개년계획(93~97)으로 대체되었다. 이 경제계획은 경제제도의 개혁을 통한 성장잠재력의 극대화를 기본목표로 삼고 있다.
【한국경제의 현황과 과제】 한국 경제는 세계가 주목하는 고도성장을 이룩하여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둔 신흥공업국(NICs)으로 나서게 되었다. 87년 현재 경제규모로서는 세계 17위, 무역규모로서는 세계12위 수준에 이르렀고, 1인당 국민소득도 94년에 1만달러를 넘어섰다. 또한 86년부터 이른바 3저(三低)현상의 호기를 맞아 수출이 가속화됨으로써 국제수지가 흑자를 기록해 그 동안의 만성적인 국제수지 적자와 외채 압력에서도 벗어나게 되었다. 88년 말 총외채규모는 312억 달러이나 대외자산 239억 달러를 감안한 순 외채 규모는 73억 달러이다. 그러나 경제규모의 팽창과 함께 세계 속의 지위 상승에 따라 우리 경제는 종전과 다른 새로운 국내외의 여건변화에 직면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세계무역기구의 출범으로 GSP (일반특혜관세제도)와 같은 국제무역의 특혜가 사라진 반면, 발전단계에 상응하는 책임과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특히 국제수지 흑자가 대폭 확대됨에 따라 선진국의 한국상품 수입규제와 아울러 원화의 절상, 국내시장 개방 압력이 거세졌다. 한편 국내적으로는 80년대의 민주화·자율화 과정에서 그 동안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온 농민·근로자·중소기업·영세민 계층의 소득 보상 요구가 높아졌으며 복지와 균형문제가 선결해야할 과제로 등장하였다. 특히 임금인상과 새로운 노사관계의 정립과정에서 기업의 수출경쟁력이 약화되었으며, 흑자에 따른 잉여자금의 확대가 부동산 투기 등으로 유동화되면서 인플레 압력을 높이는 가운데 개방화에 따른 수입소비재 유입과 과소비풍조 확산의 우려를 낳고 있다. 후발공업국이 선진경제 진입에 성공한 예는 그다지 많지 않다. 우리 경제는 과거 일본의 예와는 달리 국제경제 환경이 상대적으로 불리한 여건 속에 선진경제로의 진입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향후 도래하는 국제화·민주화·지방화 추세에 대응하여 구조조정 과정의 충격을 최소화하고 동태적인 수출경쟁력의 비교우위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가 최대의 과제이다. 따라서 국제화에 따른 국내산업의 경쟁력을 제고하고, 자율화·민주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복지요구와 성장력을 조화시키면서, 안정·균형 성장을 지속하여 국민경제의 질적 발전을 꾀하여야 한다. 이러기 위해서는 기업의 자립 체질강화와 부동산투자 등의 투기심리 근절, 그리고 첨단기술부문에 대한 연구개발투기의 확충이 중요하다. 이러한 과제를 순조롭게 해결한다면 향후 21세기에는 선진경제로 진입하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될 것이다.
【산업】
〈성장과 구조〉 한국의 경제는 8·15광복 이후 1961년까지의 국민경제의 기반성립기와 62년 이후의 정부주도의 경제개발기로 크게 나눌 수 있다. 61년 이전은 6·25전쟁의 피해복구에 힘써 경제성장률은 꾸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58년의 6 % 미만이 가장 높은 기록이었으나, 62년을 기점으로 하는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성공적 추진으로 경제규모가 놀랍게 늘어나 94년 현재 세계 11위, 무역규모는 세계 12위 수준에 이르렀고, 1인당 국민총생산(GNP)도 95년에 1만 달러를 넘어섰다. 산업구조(産業構造) 또한 1차산업의 비중이 급속히 떨어진 데 비하여 2차산업의 비중이 증대하여 93년 말 현재 1차산업:2차산업:3차산업의 비율은 7.1:41.0:51.9로 선진공업국의 구성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개발전략이 수출주도형 공업에 치중한 결과 산업부문 간 또는 동일부문 내에서도 불균형 성장이 불가피하게 나타났으며, 수출산업과 내수산업 간에도 격차가 벌어졌다. 또한 부존자원과 자본이 빈약한 상황 속에서 추진되어 온 외향적 성장 전략으로 인해 한국 경제의 대외의존도가 심화되었으며, 이로 인한 국제수지의 적자가능성을 안고 있는 취약면이 지적되고 있다.
〈농업〉 한국의 농업은 생활의 근간으로서 장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바, 그 기원은 신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개더미[貝塚]·분묘·집터[住居址] 등에서 출토된 석기류·골제품을 보면 이미 BC 4~BC 2세기에 원시적 농경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한사군의 설치로 고조선의 농경기술이 혁신되었음은 낙랑고분에서 나온 철제농구로 짐작할 수 있다. 한편, 한반도 중남부에 정착한 한민족은 BC 4∼BC 3세기경 북방문화와 벼농사[稻作]의 전래로 농업을 급진적으로 발전시켰는데 이 시대에 이미 육도작(陸稻作)이 시작된 것 같다. 이어 수도(水稻)가 들어와 삼국시대에 크게 발달하였다. 신라에서는 농업과 관련이 깊은 기상학·천문학의 발달로 이미 농경문화를 확립시켰다. 고려시대에는 돌려짓기방식[輪作方式]·계단식 경작을 채택, 양곡증산과 농토확장에 주력하였다. 또 14세기 초에는 원나라에서 목면(木綿)이 전래되어 한국의 의생활(衣生活)의 주류를 이루었고, 목축업의 효시라 할 목마장(牧馬場)이 설치되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농업기술과 농업경영면에서 크게 발전하였는데, 전기의 융성에 비해 중기에는 제도상의 모순의 표면화와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으로 위축되었고, 다시 세도정치로 인한 삼정문란 등으로 농민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19세기 개화기에 이르러서는 일제 자본주의의 침투로 토지의 약탈이 시작되더니 급기야는 국권피탈로 전국 농지가 일제의 전쟁식량기지화되었다. 이후 신품종의 도입, 일제 농기구의 보급, 비료공장의 건설 등으로 농업발달을 기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그들의 원시적 자본축적이 목적이었으므로 영농계층의 영세화가 가속되어 전 농가의 83 %가 소작인으로 몰락하였다. 8·15광복 후의 혼란기를 극복하고 성립된 이승만정부는 49년 ‘농지개혁법’을 공포·실시하였으나 농민을 곤궁으로부터 해방시킬 수는 없었고, 농업국이면서도 식량부족 타개를 외곡도입에 의존해야만 하였다. 그리하여 62년부터 실시된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더불어 비로소 농촌근대화작업이 구체화되었는데, 박정희정부는 다수확 신품종의 개발과 보급, 농기구의 기계화 등과 함께 농촌 새마을운동을 적극 추진한 결과 77년에는 식량자급체제로 들어섰고 농가경제도 도시와 같은 수준으로 향상되어 갔다. 그러나 토지이용면에서 볼 때 경지는 93년 말 현재 전체 국토면적의 20.7 %(논 13.1 %, 밭 7.6 %)에 불과하고 재배작물도 곡류에 치우쳐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식량자급도도 86년 44.5 %, 93년 33.9 %로 점차 하락세에 있다. 따라서 관개시설 확충에 의한 전천후 영농, 영농의 기계화, 단위수확량의 증대, 특산품 개발 등을 통한 농업 구조의 개선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축산업〉 한국의 가축은 옛날부터 축력이용(畜力利用)을 위해 사육되어 왔으나 식용을 위한 축산정책은 일제강점기에 일종의 수탈수단으로 그 기반이 구축되었다. 8·15광복 후 58년의 축산부흥5개년계획으로 가축의 양적 증식뿐만 아니라 사료자원의 개발, 기술향상 및 방역사업의 강화, 목초지 조성의 추진, 유통구조의 정비 등으로 축산업의 발달을 도모하여 60년대 이후로는 유축농업이라는 부업적 위치에서 탈피하여 기업화·산업화의 방향으로 대형화되기 시작하였고, 다양한 유가공제품의 개발로 일반대중의 수요 또한 증대되었다.
〈임업〉 1788년 정조(正祖)는 송금절목(松禁節目)이라는 산림보호령을 반포(頒布)하고 조림사업에 힘썼다. 그러나 1865년 청나라가 압록강·두만강 일대 원시림에 대한 벌채권을 주장한 이래 러시아·일본이 그에 합세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 군용확보를 위한 벌채와 군용목재의 확보, 6.25전쟁으로 인한 전화(戰火) 등으로 한국의 산림은 황폐화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1951년 산림보호 임시조치법이 공포되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61년 산림보호법 제정 이후 비로소 적극적인 산림정책을 실시하였다. 즉, 연탄·토탄 등의 사용을 권장하여 임산물의 연료사용에 대체하고, 임정기술(林政技術)의 개발·보급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제1차 치산녹화(治山綠化) 10개년계획을 4년 앞당겨 78년에 완수한 박정희정부는 79년부터 제2차 10개년계획을 추진하였다. 94년 말 현재 한국의 삼림면적은 645만 6000 ha, 입목축적은 2억 9580 m3로서 ha당 축적은 46 m3에 불과하다(독일 266 m3, 일본 124 m3). 그러나 정부의 계획대로라면 2030년대에는 산림면적과 입목축적이 560만 ha 대 4억 1600만 m3로, ha당 입목축적은 74.4 m3가 되며, 이때의 목재생산 기대량은 연간 1300만 m3에 달하게 된다.
〈수산업〉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좋은 조건임에도, 예로부터 뱃사람을 경시하는 풍조와 일제의 수탈정책으로 인하여 수산업 또한 낙후성·영세성을 면하지 못하다가, 1958년 원양어업의 시작과 더불어 수산업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어선 보유는 동력선의 경우 67년의 1만 989척, 17만 9117 톤에서 93년 현재 7만 2838척, 90만 3912톤으로, 척수 563 %, 톤수 405 %가 증가한 데 비해 무동력선은 척수·톤수가 모두 감소되고 있어 어선의 대형화·동력화가 진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업별로는 원양어선 0.7 %, 연근해어선 54.8 %, 양식어선 39.4 %, 내수면어선 3.1 %로 연근해어업과 양식어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어획량의 경우도 93년 말 현재 총 333만 5531 M/T으로 그 중 원양어업은 22.2 %를 차지하고 있다. 수산물 수출량도 증가추세에 있으나, 200해리 경제수역 선포, 유가(油價) 인상, 좌초된 유조선의 기름유출, 그리고 적조(赤潮)현상 등의 악재들이 순조로웠던 어업경영에 제동을 걸고 있는 실정이다.
〈광공업〉 지질적 특성으로 백금과 석유를 제외한 다종다량의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었으나 19세기까지는 광업개발이 순조롭지 못한 데다가 한말의 광업정책의 결여로 광산채굴특권을 열강에게 내주었다. 거기에 1915년 일제의 조선광업령 공포로 한국의 광업은 일본인이 거의 독점하여, 그들의 약탈은 금의 경우 32만 4636 kg에 이르렀는데, 이는 70년대 한국의 연평균 산금량 593 kg의 547배에 달하는 양이었다. 그리하여 60년대 이전까지 한국 광업은 극도의 침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60년대 초부터 수요가 증가하였고, 2차에 걸친 석유파동과 정부의 ‘석탄생산극대화정책’으로 증산이 거듭되어 88년도에는 2429만 5000 톤으로 정점에 이르렀으나 그 후 유가(油價) 하락, 가스연료의 보급, 국민의 청정(淸淨)에너지 선호 등으로 수요 및 생산량이 크게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 또한 지하자원의 북한지역 편재, 광업생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무연탄광업의 편중 등으로 영세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 있으며, 그나마 탄층의 심부화(深部化)가 가속되어 채탄조건이 날로 악화되고 있고, 정부에서도 ‘석탄산업합리화정책’을 수립, 전국 총 25개 탄광(95년 현재) 중 경제성이 기대되는 10여 개 대규모 능률탄광에 의한 적정생산을 유지하고 경제성이 없는 다른 비능률탄광은 폐광화를 유도하고 있어, 89년 말 이후 폐광이 급속히 확산되어 탄광산업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석탄의 경우 전국 매장량이 95년 현재 15억 7000 톤에 달하나 가채량은 7억 3000 톤이다. 한편 공업분야에서는 60년대 이후 근대공업으로의 탈바꿈이 시작되었는데, 60년대에는 산업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동력증산과 시멘트·화학비료·합성섬유와 기타 수입대체산업의 육성에 주력하였고, 70년대에는 화학·기계·철강 등 중화학공업에 역점을 둔 기간산업 육성에 주력한 결과 신흥공업국으로 발전하였다. 8·15광복 직후 모든 제품을 수입에 의존하던 실정에서 94년 말 현재 공업단지만도 국가지정 27개 지역 2억 6022만 km2, 지방지정 127개 지역 1억 8687만 km2에 달하는 중화학공업 위주의 공업국으로 성장하였다. 93년 현재 전체 산업 중 광공업 구성비는 광업 0.3 %, 제조업 27.1 %이며, 94년도의 제조업 주요지수(90년 대비)는 생산지수 134.4, 출하지수 137.7, 재고지수 142.1, 생산능력지수 118.6을 나타내고 있다.
〈상업〉 한국의 상업은 신라 때의 동시(東市)·서시(西市)를 중심으로 한 좌상(坐商)의 성립과 향시(鄕市)의 설치, 고려시대의 상설시장인 시전(市廛)의 건립, 조선시대의 공랑(公廊)·경시전(京市廛)의 경영 등으로 유지·발전되어 왔으며, 국민총생산의 신장에 따라 급성장하여 1993년의 도·소매업 전체의 연간판매액은 146조 4152억 원에 이른다. 도매업 대 소매업의 구성비율을 보면, 종사자수는 28.1 % 대 71.9 %, 사업체수는 13.1 % 대 86.9 %, 판매액은 53.3 % 대 46.7 %로 도매업의 대형화와 소매업의 영세성이 매우 대조적이며, 도매업체의 61.5 %, 소매업체의 32.4 %가 서울·부산에 집중되는 이중적·파행적(跛行的)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최근에는 시장개방에 대비하여 규모를 대형화하면서 주차장 등 편의시설을 넓혀나가고 있고, 저가할인매장과 편의점(CVS)도 늘어나 유통구조의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다.
【재정】 8·15광복 후 50년대까지 미국의 원조에 의해서 세입이 충당되어 이승만정부의 재정역할은 제대로 수행되지 못했다. 60~70년대는 생산능력의 증대를 위한 경제개발에 중점을 두었고, 80년대의 재정의 역할은 생활의 질을 개선시키고자 하는 사회개발로 방향이 전환되었다. 90년대 들어서면서 교육, 사회보장 및 복지, 주택 및 지역사회개발 지출이 증대하여 경직성 경비가 총세출의 70 %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한국의 재정 규모는 국가의 경제적 기능이 확대됨에 따라 팽창일로에 있는데, 중앙정부의 일반회계 세출규모가 63년 728억 원에서 93년 37조 2680억 원으로 511배가 증가하였다. 재정수지는 70년대까지 만성적인 적자를 면하지 못하였으며, 재정적자의 보전은 70년대 중반까지 한은차입과 차관도입에 의존하다가 70년대 후반 이후에는 주로 국채발행에 의존하였다. 80년대 이후 안정기조하의 예산 편성으로 84년부터 일반정부(중앙 및 지방자치단체) 재정수지가 흑자로 돌아섰으며, 통합재정(세출 및 순융자) 수지도 86~87년 흑자로 돌아섰으나 그 이후는 복지지출 증대로 다시 재정적자를 기록하였다. 93년 7월에 발표된 신경제5개년계획에 포함된 재정개혁 방향은 조세의 공평성과 효율성을 제고하여 국가경쟁력 제고와 국민편익을 증대시킨다는 것이었다. 우선 재정기능의 정상화를 위하여 92년 19.4 % 이던 조세부담률을 97년에 22~32 % 수준까지 높여 재정능력을 확충하기로 하였고, 둘째는 소득세기능 및 재산과세를 강화하고 소비과세의 개선을 도모하여 세제의 개혁을 단행하며, 마지막으로 재정제도의 운용방식에서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여 효율적인 재정운용을 뒷받침하도록 재정제도의 효율화를 추구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지역개발을 위한 국가 전체의 가용 재원이 효율적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지역개발종합계획’ 제도도 도입한다는 것이다.
【무역】 한국은 수출주도형 공업화 전략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경제성장에 따른 무역규모도 크게 증가하였다. 교역규모는 1962년 4억 8천만 달러에서 94년 1984억 달러로 약 412배나 증가하였다. 수출의 경우 같은 기간 중에 5500만 달러에서 94년 960억 달러로 1,745배가 늘어났고, 수입은 또한 4억 달러에서 94년 1023억 달러로 255배 증가하였다. 무역수지는 80년대 초반까지만해도 적자에 시달렸으나 87년부터는 3저(低)현상의 호기를 맞아 수출이 급증하여 흑자로 돌아서는 전환기를 맞았다. 그러나 90년 이후 임금의 급상승과 후발개도국의 급성장 등으로 대내외 수출여건이 악화되면서 다시 적자로 반전되었다. 한국의 수출은 60~70년대 초반까지 섬유·합판·신발류 등 경공업 제품이 주종을 이루었으나, 70년대 후반부터 88년까지 철강·기계·선박·전자제품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리고 89년부터는 신발류 등의 수출이 부진을 보인 반면 전자제품(반도체 등)·섬유제품·기계류(자동차 등) 등의 수출이 큰 폭으로 늘어나면서 수출 주종품목으로 부상하고 있다. 수출시장별로는 과거 한국의 수출 증대에 크게 기여한 미국·일본·EC 등 3대 선진국 시장에 대한 수출 비중이 89년 이후 크게 낮아지고 있다. 이에 반해 중국과 동남아시아 등 개도국에 대한 수출 비중은 증가하고 있다. 한편 수입에서 주종을 이루고 있는 기계류의 비중은 74년 27 %에서 94년 36.5 % 로 증가하였다. 수입시장별로는 대일(對日)비중이 94년 중 24.8 % 로 일본에 대한 수입의존도가 여전히 높고 대중국(對中國)비중이 5 %로 급증하고 있다. 따라서,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와 환경보전을 내세우는 급변하는 교역여건에서 건실한 수출증대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수출 주체인 기업이 과감한 기술개발투자를 통하여 제품의 고부가가치화 및 고급화, 품질개선과 신제품개발 등을 적극 추진하여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수입자본재의 국산화 추진 및 이를 위한 기술개발, 그리고 수입선 다변화도 시급한 과제이다.
【금융】 1950년대 중반 은행법의 시행 등으로 금융제도 기반이 구축되었으며, 60년대 들어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실시와 함께 이의 효율적인 지원기능을 담당하는 금융체제로 발전해 갔다. 70년대 들어 경제체질강화를 위해 8·3긴급경제조치를 단행함과 동시에 단자회사·상호신용금고·종합금융회사 등 비은행 금융기관의 신설·정비를 통해 사금융의 제도금융권 흡수와 금융구조의 다원화가 추진되었고, 80년대 들어서는 경제 운영방식이 민간시장 기능 중시로 바뀌면서 시중은행이 민영화되고, 금융시장의 진입규제도 완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금융부문은 상업정책의 주요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여 경제발전에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이에는 정부의 금융기관에 대한 과도한 개입이 따랐고, 지나친 관권의 개입으로 자금분배상의 왜곡, 금융기관의 비효율적인 경영 등 부작용이 나타났다. 이에 따라 90년대 들어 금융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노태우정부는 금융개혁을 단행하였다. 우선 정부는 91년 8월 4단계 금리자유화계획을 발표하여 추진하였으며, 92년 1월에는 주식시장을 개방하여 일부 국내 상장주식의 일정한도 내 외국인투자를 허용하였다. 또한 93년 6월 신경제5개년계획과 제3단계 금융자율화 및 시장개방계획을 발표하여 97년까지의 금융개혁과 시장개방일정을 제시하고, 같은 해 8월에는 모든 금융기관과의 거래에서 실명(實名)을 의무화함으로써 금융거래정보의 비밀을 보장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었고, 금리자유화가 단계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이러한 금융개혁과 금융시장개방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가입일정 등에 따라 그 속도가 더욱 빨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금융시장에서 한국 금융기관의 경쟁력 제고가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국민 생활】 한국사회는 지난 30여년간 산업화와 그에 따른 도시화로 인하여 전통적인 한국인의 삶의 양식으로 크게 변모 되어왔다. 전체 국민생활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주요지표의 변화를 보면 다음 [표]와 같다. 우리나라 산업구조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게 낮아져 농촌은 인구감소와 함께 낙후현상을 경험하고 상대적으로 도시는 팽창되어 산업시설의 집중과 인구과밀 현상이 발생하였다. 이촌향도와 도시중심의 사회개발에 따른 도시의 과대성장과 인구집중은 각종 도시문제를 야기시키고 도시하류층을 형성시키기도 하였으나 한편에서는 도시생활의 확대팽창으로 많은 국민들이 보다 양질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였다. 한편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전통적인 사회조직과 가치관은 새로운 가치관과 사회조직의 원리로 대체되었다. 친족이나 지역연고성의 비중은 약화되고 합리적이고 공식적인 원리가 점차 사회조직의 원리로 정착되고 있으며, 출산률의 저하와 사회이동의 증가에 따라 가족형태는 소규모 핵가족이, 그리고 가족내 관계는 가부장권의 약화와 여성의 지위향상에 따른 평등한 가족이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등 가족, 여성, 결혼등에 대한 새로운 관념이 등장하였다. 한편 지난 30여년간의 경제성장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생화릉 가능케 하였으나, 지역간 불균형발전, 도농(都農)간 빈부격차와 격차의 심화에 따른 사회심리적 소외현상과 갈등을 야기시키고 있다. 대중매체의 발전과 확대보급은 전국민이 균등하게 폭넓고 다양한 사회문화생활의 영위를 가능하게 하며, 지리적 폐쇄성을 극복하여 국민생활을 하나의 의식과 관심권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정치적 이유와 경제적 필요에 의해 정부의 확대 강화되어왔다. 경제성장을 위한 국민의 동원, 각종의 혁신을 위한 새마음운동과 같은 관주도의 운동이나 정치적 필요에 의한 행정력을 강화시켜 관료행정이 국민생활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였으며, 또한 사회의 다양한 조직들도 점차 관료적 형태를 띄어감에 따라 전사회의 관료제화가 심화되고 있다. 한편 국민들의 의식수준 향상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민주주의가 점차 확대발전되어, 93년에는 민간정부가 출현되고, 95년에는 지방자치가 실시되는 등 정치적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한 기틀을 다져놓았다. 생활, 교육, 의식 수준의 향상은 사회각종 부문에서 관이나 특정계층 편의 위주의 일방적인 관행보다는 주민의 적그적인 의사표현과 참여를 통한 환경운동, 시민운동 등의 보다 낳은 삶에 대한 요구와 주인의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한국사회에 현대적인 삶이 파급되면서 이에 따른 대중사회의 특성을 복합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급격한 도시화에 따른 농촌의 고령화와 낙후, 소비나 향략중심의 도시문화가 매스미디어를 통해 급속하게 확대되면서 나타나는 가종 비행과 사회문제, 급속한 산업화에서 오는 환경파괴, 정치적 격변속에서의 지역간 대결, 빈부격차의 심화에서 오는 계층간 위화감, 서구문화의 급속한 유입에따른 가치관의 혼란 등의 부작용을 유발하였다. 일부 부유층의 과소비와 향량적 문화, 서구문화의 무절제한 수용, 사회에서의 심리적 좌절과 감정적 유대 등이 확산되고 있다. 한편 중류계층의 확대와 다양한 사회문화적 욕구는 각종 오락과 여가활동의 확대를 통한 각종 문화 와 레저산업, 프로스포츠 활성화 등 대중문화현상이 확대팽창되고 있다. 지난 30여년 동안의 경제적 발전에 따른 풍요로운 생활, 정치적 민주주의의 확대, 다양한 사회문화적 요구의 충족, 서구문화의 급격한 유입과 전통문화의 파괴 등 국민생활의 변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같은 급격한 한국인들의 생활변화는 주로 물량적인 확대와 팽창이 중심을 차지하는바, 앞으로는 물량적인 측면 뿐 아니라 한국인의 삶의 질을 진정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질적인 측면의 변화가 함께 이루어지는 방향으로의 변화가 요구된다.
【교통·통신】
〈교통〉 한국의 도로교통은 삼국시대부터 역원제(驛院制)와 함께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전국의 간선교통은 서울[漢城]을 중심으로 방사상(放射狀) 형태를 이루어 의주·경흥·평해(경북 울진)·동래·제주·강화 등의 6개 방면으로 발달하였다. 1900년대 초 옛길이 신작로(新作路)로 바뀌고, 이어 11년에 관용 자동차 2대가 도입되면서 자동차 교통시대가 열렸다. 또 12년에는 택시·버스 교통이, 28년경부터는 화물자동차교통이 형성되었다. 6·25전쟁을 계기로 군사적 목적에 의하여 확장된 남한의 도로는 62년 이후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면서 크게 발전하여 산업도로·고속도로·관광도로 등이 건설되었다. 수송의 고속화와 지역 간의 연계성을 증대시켜 전국을 1일생활권으로 묶은 고속도로는 68년 12월 경인고속도로를 시작으로, 70년대에 경부·호남·남해·영동·구마 등의 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그 후 동해·부마·올림픽고속도로 등이 계속 건설되었다. 89년 10월 대구~춘천 간 중앙고속도로가, 91년 12월 인천~목포 간 서해안고속도로가 각각 착공되어 교통량의 분산과 지역발전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보인다. 남한의 도로교통량은 수도권·부산·대구·광주·대전 등의 대도시 및 그 주변지역과 대구∼부산, 포항∼부산∼마산, 서울∼춘천 등의 구간에 집중되어 있고, 고속도로는 경인·경부·구마 고속도로에 집중되어 있다. 93년 현재 남한의 도로 총연장은 6만 1296 km로, 이것은 고속국도·일반국도·특별시도·지방도·시도·군도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93년 현재 도로포장률은 84.7 %이다. 자동차 대수는 60년에 3만 751대이던 것이 82년에 64만 6996대, 93년에 627만 4008대로 크게 증가하였다. 철도교통은 1899년 9월 노량진∼제물포 33.2 km의 경인선 개통으로 시작되었고, 1900년 7월 현재의 서울역까지 연장되었다. 그 후 일제는 대륙침략과 식민지 수탈을 목적으로 1905년 이후 경부선·경의선·호남선·경원선·중앙선 등을 건설하였고, 태평양전쟁을 계기로 경부선과 경의선을 복선화(複線化)하였다. 8·15광복 후 남한에서는 산업개발, 지역 간의 상호결합 및 각 경제권 간의 신속한 교통연락을 위하여 태백선·영동선·3비인입선·호남정유선·종합제철선 등의 산업철도(産業鐵道)를 건설하고, 충북선과 경북선을 연장하였으며 경인선과 호남선 일부를 복선화하였다. 철도 형태는 서울을 중심으로 8·15광복 전에는 X자형을, 그 후에는 방사상 형태를 이루었고, 지형상의 특수성 때문에 중앙선의 죽령에 루프식, 영동선의 통리∼나한정 구간에 스위치백식, 개마고원의 장진선·부전선에 인클라인식 등의 특이한 형태도 있다. 철도교통은 전철화(電鐵化)로 큰 변화를 가져왔다. 73년 이후 청량리∼제천∼고한∼백산 간, 철암∼북평 간 산업선이 전철화되어 무연탄·각종 광산물 등을 신속하고 안전하게 대량으로 소비시장에 운반하고 있다. 또한 74년 이후 서울∼인천, 서울∼수원 및 신설동∼잠실종합운동장 간의 개통에 이어, 서울순환철도(2호선), 당고개~금정,지축~오리, 산본~안산 간 등의 지하철이 완성되어 서울에 집중되어 있는 인구 및 산업시설의 분산과 함께 새로이 도시교외 지역을 형성하고 있으며, 수도권 및 부산에 지하철이 확충 또는 신설되고 있다. 철도교통은 주로 무연탄·시멘트·유류·광석·비료·양곡 등 중량이 큰 화물을 수송한다. 철도 총연장은 광복 당시 전국 32개 노선에 6,362 km(남한 3,642 km)였으며, 93년 말 현재 선로궤도 연장은 전국 57개 노선에 6,517 km이다. 화물수송은 중앙선·영동선·태백선·경부선 등에 집중되어 있다. 또한 92년 6월 착공되어 2001년 완공예정인 경부고속철도는 서울~부산 간을 2시간에 달릴 수 있는 초고속 수송수단으로 경부선 수송능력의 2배의 역할을 담당할 것이며, 기존 철도와 고속도로의 여객수요를 대량 흡수하여 고속도로의 운행속도 향상과 기존 철도를 화물 위주로 전환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하천은 내륙교통(內陸交通)이 발달하기 전에 주요 내륙교통로의 구실을 하였다. 이에 따라 하천 연변에는 도(渡)·진(津)·포(浦) 등의 문자가 붙은 도진취락(渡津聚落)이 발달하였다. 대동강 연안의 평양·송림, 한강 연안의 서울·충주·여주·양화진, 금강 연안의 공주·부여, 압록강 연안의 의주·만포, 예성강 연안의 벽란도, 낙동강 연안의 구포·안동, 금강 연안의 부강·강경, 영산강 연안의 영산포, 섬진강 연안의 하동 등은 하천을 끼고 발달한 도읍들이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내륙수운은 계절에 따른 수량의 변화 및 중부지방 이북의 하천이 겨울에 결빙되는 등의 불리한 여건 외에, 도로·철도 등의 육상교통수단에 그 기능이 넘어가면서 급격히 쇠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상교통은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3포(제물포·부산·원산)가 개항되면서 시작되었다. 84년에는 조운을 원활히 하기 위해 운송국(運送局)을 설치하고 창룡호(536 톤)·현익호(709톤)·해룡호(1,027톤) 등 증기선 3척을 독일에서 구입하였다. 일제는 대외 통상무역의 신장과 대륙침략 정책의 일환으로 1915년 이후 원산∼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하여 일본·중국 방면의 대외항로를 개설하였으며, 30년 이후는 일본과 대륙의 거리를 단축시키기 위하여 청진·나진·웅기 등을 발전시켰다. 광복 이후 해상교통은 57년경부터 원양어업(遠洋漁業)에 발맞추어 새로운 활기를 띠었으며, 70년대에 이르러서는 경제건설과 무역신장에 힘입어 물동량이 급증함에 따라 부산·인천항이 확장되었고, 동해·울산·포항·삼일항 및 군산외항 등이 건설되었다. 현재 연안항로는 육지와 황해 및 남해도서 간에 많고 부산∼제주, 목포∼제주, 목포∼홍도, 포항∼울릉도 등의 항로에는 최신형 쾌속정(快速艇)이 운항되고 있으며, 인천∼백령도, 군산∼어청도, 목포~흑산도 등의 노선에는 명령항로(命令航路)가 개설되어 있다. 국제선으로는 70년 6월 부산∼시모노세키[下關]의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이 개통되어 운항되고 있다. 화물수송은 동남아·중동지방·북아메리카·일본 등지와 빈번하다. 95년의 등록선박은 4,952척에 635만 1116톤이며, 주요화물별로 본 수송비율은 유류(油類) 41.6 %, 시멘트 14.3 %, 광석류 1.9 %, 석탄 1.3 %, 기타 41.2 % 등이다. 또한 외항화물(外航貨物)의 입항은 2억 2272만 1363 톤이고 출항은 6285만 2092톤이었다(1992). 하역 능력은 포항·부산·인천·동해 등의 항구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항공교통은 1929년 4월 일본항공회사(JAL)가 도쿄[東京]에서 서울·대구·평양 등지에 화물과 우편물의 정기수송을 개시하면서 시작되었다. 8·15광복 후 48년 10월 대한국민항공사(Korean National Airlines:KNA)가 설립되어 서울~부산 간을 중심으로 국내선을, 54년 이후 서울∼타이베이[臺北]∼홍콩을 잇는 국제선을 운항하였다. KNA는 62년에 대한항공(Korea Airlines)으로 이름을 바꾸어 국영으로 운영되다가, 69년 한진상사가 인수하여 다시 민영이 되었다. 특히 88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88년 2월 아시아나항공이 설립, 12월부터 국내선에 취항하면서 2개 회사의 경쟁시대로 접어들었다. 89년 시행된 해외여행 자유화 시책으로 항공수요가 급증하여 김포국제공항 등이 포화상태에 있다. 한편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의 간석지를 매립하여 92년 11월 착공된 영종국제공항은 동북아시아 최대·최첨단 시설로 건설되고 있다.
〈통신〉 전신·전화가 발명되기 전에는 한국에서 통신수단으로 역원제·봉수제 등이 있었으나, 현대적 의미의 통신은 1884년 4월 22일 우정총국(郵政總局)이 설치되고, 그 해 11월 18일 최초로 5종의 우표를 발행하면서부터 시작되었 다. 그 후 갑신정변으로 인해 잠시 침체되었다가 95년 6월 서울과 인천에 우체사(郵遞司)를 설치하면서 우편사업이 재개되었다. 97년 5월 워싱턴에서 개최된 만국우편연합(UPU) 제5차 총회에서 연합의 개정조약에 서명하였고, 1900년 만국우편연합에 가입함과 동시에 선진국과 동일한 제도 아래 외국과의 우편업무가 개시되었으며, 그 관리기구인 통신원(通信院)이 설치되어 우체국의 증설, 우표의 국내인쇄, 우편엽서 등을 취급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식민 위주의 통신정책이 시행되었으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우편업무도 체신부가 관장하여 자주적 우편사업을 운영하게 되었다. 5·16군사정변 이후 ‘1면(面) 1우체국 정책’을 추진하여 8·15광복 당시 646개이던 우체국이 66년에는 1,728개국으로 늘어났다. 83년 우편취급소 제도를 시행한 이후 95년 현재 우체국은 3,394곳에 이른다. 1970년 7월 1일부터는 5자리 우편번호제가 실시되었고, 88년에는 이용자 중심의 6자리 번호체계로 개편하였다. 경제성장과 함께 발전한 우편서비스는 현재 우편주문판매·국내특급우편·민원우편·전자우편제도 등을 시행하고 있다. 94년 8월에는 만국우편연합 제21차 총회가 서울에서 열려 172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서울우편전략’을 채택하였으며, 1~4종으로 분류되던 우편물이 94년 10월부터 빠른우편과 보통우편 2종류로 종별체계를 간소화시켰다. 한편 근대적 전신·전화 체계는 1885년 9월 28일 한성과 제물포 간의 전신시설 개통과, 1902년 3월 20일 한성과 제물포 간의 전화가 개통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 해 6월에는 한성전화소에서 전화교환업무를 개시하여 시내전화업무가 시작되었으나 1905년 4월 한·일통신협정의 체결로 통신권을 일본에게 빼앗겼다. 45년 12월 한·미 간 최초의 국제직통무선전화가 개통되었으나 6·25전쟁으로 인해 전신·전화 시설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52년 1월 국제전기통신연합(ITU)에 가입하였으며, 65년 12월 가입전신(텔렉스) 업무를 개시하여 경제개발을 위한 효과적인 통신인프라 조성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70년에는 위성통신지구국 운영을 시작하고 전화청약 우선순위제도 및 전화가입 청약가납금제도를 시행하여 백색·청색 전화제도가 실시되었다. 71년 3월 서울~부산 간 장거리자동전화(DDD)가 개통되었으며, 75년 11월에는 가입전화 시설이 100만 회선을 돌파하였다. 그 후 지속적인 전화수요에 대처하고 전기통신분야를 국가전략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하여 82년 1월 1일 한국전기통신공사가 발족되었으며, 3월에는 데이터 통신 서비스를 위한 한국데이터통신(주) 가 설립되었다. 83년 8월 미국·일본 등 24개국 27개 지역에 국제자동전화(IDD)가 개통되었으며 전신전화가입 청약가납금제도가 폐지되었다. 같은 해 12월 전기통신기본법과 공중전기통신사업법이 제정되었다. 84년 3월에는 차량전화 및 무선호출 서비스 제공을 위하여 한국이동통신서비스(주)가 설립되어 같은 해 5월 7일 서울에서 자동방식의 차량전화가 개통되는 등 새로운 개념의 무선통신 서비스가 도입되기 시작하였고, 86년 3월에는 전화번호표시방식의 무선호출서비스도 개시되었다. 이후 지속적인 기술개발과 정보화 사회를 위한 통신전략의 개념 아래 정부의 집중적인 투자가 이루어져 87년 가입전화시설 1000만 회선을 달성하였으며, 93년에는 2000만 회선을 돌파하여 세계 제8위의 통신시설 보유국이 되어 1가구 1전화시대로부터 개인이 전화를 보유하는 개인통신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한편 94년 12월 체신부가 정보통신부로 개편되어 국가 정보기반 구축과 산업경쟁력 강화를 도모하고 21세기 정보화시대에 대비한 초고속 정보통신망 구축에 주력하고 있으며, 전기통신에 이어 정보통신이 통신산업의 중핵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정보가 전기통신과 컴퓨터 기술에 의해 처리되면서 전기통신은 정보통신으로 확대되어 불리게 되었으며, 다양한 정보의 통신을 가능하게 하는 B-ISDN(광역종합정보통신망), IN(지능망시스템)의 확대와 이동통신의 주류인 아날로그 셀룰러시스템에서 디지털로 전환된 디지털이동통신시스템으로 통신서비스의 전체수요가 차츰 발전하고 있다. 또한 95년 8월 국내 최초의 통신·방송 복합위성인 무궁화호가 발사되어 한국 통신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전기통신사업은 국가기간산업으로서 독점사업자 체제를 유지해왔으며, 90년 7월 체신부의 통신사업 구조조정안에 따라 한국통신은 정보통신사업에, 데이콤은 국제 음성통신사업에 참여하여 본격적인 경쟁체제를 출범시켰다. 정보통신부는 98년의 통신시장 전면개방에 대비하여 95년 7월 ‘통신사업 경쟁력 강화방안’을 발표하고 95년 하반기 중에는 국제전화·개인휴대통신·주파수공용통신·발신전용휴대전화·무선데이터통신·무선호출·전용회선사업 등에 대한 신규사업자의 참여를 허용하고, 96년에는 시외전화·위성통신서비스·저궤도 위성통신에도 신규진출을 허용하는 등 완전한 경쟁체제로 바뀌었다. 한편 21세기 국가경쟁력의 핵심기반이 될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계획인 KII (Korea Information Infrastructure) 계획을 수립하고 1994~2015년까지 광케이블망 구축사업과 ATM(비동기모드)교환망을 단계적으로 도입하게 되며, 이러한 국가 초고속정보통신망을 통해 전자민원·입체영상회의·원격의료·원격교육·주문형 비디오·전자도서관·지리정보시스템·슈퍼컴퓨터 간 병렬처리 데이터 전송·고화질(高畵質) TV의 영상정보통신서비스 등을 실현하게 된다.
7. 사회·문화
【사회계층】 농업중심의 전통적인 한국사회는 해방이후 특히 60년대에 들어와 자본제적 생산양식을 수용하고 산업화를 추진하였다. 자본주의적 산업화는 직업분화와 경제활동의 중심을 비농업분야로 하며, 대다수의 사회구성원들을 자본가, 경영자, 노동자라는 근대적인 계층, 계급으로 변화를 가져온다. 또한 합리성과 효율성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사회전반에 관료제화가 확대하여 새로운 중간층과 도시자영업자들을 양산한다. 한국사회도 지난 30여년 동안 산업사회에 독특한 사회적 불평등현상인 계층, 계급의 구조화가 진행되어 왔다. 한국사회의 계층, 계급구조를 인구센서스 결과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 [표]와 같다.
이 [표]를 보면 한국사회에 자본주의적 계급분화가 얼마나 빨리 진행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전체적인 양적 구성의 변화는 농어민층의 급격한 감소와 이들의 노동계급, 비영농자영층, 신증간층으로의 변화가 골격을 이룬다. 농어민층의 급격한 감소와 노동자계급의 급격한 증가는 한편에서 한국사회의 급격한 산업화 과정속에 필요한 노동력의 대량창출에서 기인한다. 자보가계급도 일정한 성장을 보이는데, 일제시대 자본을 형성하지 못했던 자본가계급은 해방후 일제하의 귀속재산 불하처리 과정에서 자본가계급으로 형성되고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자본을 축적하여 핵심 지배계층이 된다. 한편 해방이후 한국사회의 시급한 과제였던 반봉건제의 해체는 농지개혁을 통해 이루어진다. 농지개혁은 1949년에 시작되어 지지부진하다 57년에 일단락 되었는데, 농지개혁이 농민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못하고 그 내용이 유상분배 원칙을 이루어져 대다수 농민들이 소규모의 토지를 소유한 자작겸소작의 영세농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50년대에 이루어진 일제하 귀속재산과 농지개혁등의 반봉건제의 해소와 한국자본주의의 재편성을 통해 한국사회는 근대적 계층, 계급구조가 정착되어간다. 귀속재산으로 형성된 산업자본 형태의 자본가계급은 국가자본과 미국원조로 이루어진 대부자본 형태의 국가자본이 사적자본으로의 전화를 통해 사적 독점자본으로 되어가면서 독점자본가계급을 형성한다. 한편 50년대말이 되면 노동인구가 10 %선에 육박할 정도로 일정한 양적 성장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50년대 경제구조의 취약성은 농촌과 도시에 방대한 산업예비군을 누적시켰다. 국가주도의 축척과정에서 독점자본은 비약적으로 성장하여 70년대 초를 거치면서 국민경제에 대해 배타적인 지배력을 행사하는 재벌의 틀을 갖추게 된다. 반면 빈곤과 잠재적 실업상태에 있던 대다수의 농민층은 한국사회의 공업화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도시로 이주하여 노동자계급으로 되거나 또는 구중간계급인 비영농자영층, 도시빈민으로 전화하였다. 70년대에 들어서 산업노동자는 급속한 성장을 이루어 노동인구의 24. 1 %를 차지한 반면, 농어민총은 60년대의 노동인구의 2/3에서 70년대에 1/2로 저하한다. 이 과정에서 도시와 농촌의 산업예비군들도 비율에 있어서는 일정한 저하를 보이며, 신, 구 중간제계층은 지속적인 성장을 한다. 70년대에 고도축적을 통하여 노동자계급은 85년에는 노동인구 45 %를 점하게 되어 전체 노동인구의 가장 큰 범주가 되며, 농어민층은 1/4수준으로 축소된다. 화이트칼라층의 확대에 따른 신중간제계층도 지속적인 성장을 하여 8 %수준을 상회하고, 도시의 소브르주아적 및 반프롤레타리아적 자영업자도 꾸준히 증가하여 21.6 %를 차지하는데 특히 소부르주아적 부분이 빠른 성장을 보인다. 현재의 계급구조의 기본형태는 70년대 후반에 갖춰졌다. 중화학공업 중심의 산업구조의 정착과 이를 통한 계급구조의 형성은 이후 현재까지 연장된다. 그러나 90년대에 농촌인구의 절대적 감소로 농민층의 이농현상은 감소할 것이며 이에 따른 도시 비영농자영층은 감소할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성장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서비스분문의 확대팽창에 따른 서비스부문 노동자의 일정한 성장은 계급구조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80년대 말까지 비약적으로 성장한 독점자본은 지배력을 더육 심화시켜 한국사회의 핵심지배계층을 이루고 있으며 노동자계급은 인구의 절반에 달하여 크게 성장한 민중운동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 30여년 간 정부주도의 근대화정책은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자본주의적인 근대적 계층, 계급 구조를 정착시켰다. 그러나 정부의 인위적인 산업화추진과 계급구조 형성은 소수 지배계층과 대다수 피지배층간의 계급간 갈등을 심화시키고 국민들간의 위화감을 조성시키기도 하였다. 앞으로의 자본주의적 산업화의 심화에 따른 노동자계급의 성장은 사회계급간 갈등의 심화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갈등의 제도화 장치뿐 아니라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노동계급을 비롯한 피지배계층에 대한 균형적인 사회정책적 대책마련이 시급하다.
【사회보장】 현대국가에 있어서 사회정책의 핵심은 방빈(防賓)의 특성이 있는 사회보장에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1960년대 이후에 사회복지의 기본적 제도인 사회보장에 관한 입법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사회보장은 주로 사회보험과 공적부조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전자의 입법으로는 공무원연금법(60년), 군인연금법(63년), 산업재해보험법(64년), 의료보험법(77년), 최저임금법(86년), 국민복지연금법(89년) 등이 있고, 후자의 입법에는 군사원호법(61년), 생활보호법(62년), 아동복리법(62년), 재해구호법(63년), 의료보호법(77년), 노인복지법(81년), 아동복지법(81년), 장애자복지법(81년), 유아교육진흥법(82년) 등이 있다. 특히 83년에는 사회복지서비스 각 분야의 전달체계를 합리화, 체계화하기 위하여 사회복지사업법(83년)이 개정되어 사회복지의 새로운 시기를 대비했다. 60년 1월1일 사회보험방식에 의한 공적연금으로 제도화 되어 공무원의 건강진단, 질병, 부상, 폐질, 분만, 퇴직 또는 사망에 대하여 적절한 급여를 실시 경제생활안정과 복리향상에의 기여를 목적으로 하고 있고, 그 적용대상을 중사이상의 범위를 직업군인에 한정하고 있는 군인연금제도가 63년부터 실시되었으며 74년부터는 사립학교교원연금제도가 실시되었다. 또한 산재보험의 경우, 입법 다음해인 64년부터 실시하여 초기에는 500인 이상의 사업장에 국한하였다가 점차 그 적용범위를 확대하여 적용 사업장이 82년에는 7만 4200개, 그리고 88년까지는 16개업종의 5인이상 사업장까지 확대적용하였다. 77년 의료보험을 시작으로 79년부터 공무원 및 사립학교교직원의료보험이 실시되었으며, 80년에는 직업군인과 그 가족에도 적용이 확대되었고, 87년에는 전국민 의료보험을 실시했으며, 88년에는 의료보험제도가 농어민에까지 확대되었고, 89년에는 도시자영자에게도 의료보험이 실시되었다. 한편 90년대 들어와서는 국민복지의 실질적인 향상을 위해, 90년에 근로자주택건설의 발표와 함께 임대주택이 건설보급되고 있으며, 93년부터는 노동은행설립도 준비하고 있다. 또한 95년부터는 고용보험의 실시가 고려되고 있으며, 92년부터 사회복지 전문요원 제도를 도입하여 92년 현재 당초 계획인 2,000명 중 절반이상이 배치되어 근무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원성이라는 제도적 취약성을 보이는 의료보험은 공영주의에 의해 조직된 의료보험관리공단과 조합주의에 한국의료보험연합회의 양립은 의료의 완전한 사회화라는 시각에서 시련을 던져주고 있다. 또한 30여년동안의 경제성장과정속에서 지속적으로 억눌려왔던 근로자들의 권리향상을 위한 노동법이나 각종법률 등은 아직까지 사회복지의 향상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전체 사회보장비도 70 %이상이 사회보험이고 공적부조는 20 %, 사회복지서비스는 3 %정도로 제도간 불균형과 함께 지나치게 수익자부담원칙을 고수하는 문제점도 존재한다. 60년대 부터 실시된 한국의 사회복지를 보면 초기에는 공무원이나 군인등의 일부 한정된 계층을 중심으로 이들의 지원을 획득하기 위해 선별적으로 실시되었다. 그러나 국민경제의 향상과 사회 각계각층의 요구증대로 그 범위와 내용이 점차 확대되었으며, 특히 87년 사회민주화 운동을 통한 삶의 질의 향상에 대한 요구는 성장위주의 국가발전에서 국민의 복지를 확층하는 균형적인 발전을 추구토록 하여, 80년대 후반부터 다양하고 실질적인 사회보장이 점차확대 실시되고 있는 추세이다. 지난 30년간 경제성장위주의 개발정책으로 빈부간 불균등이 심화되었고, 저임금과 인플레이션으로 근로자 및 농어민 대다수의 국민이 사회복지에서 소외되어왔다. 현재 한국의 사회복지에 투입되는 비용은 대략 GNP의 3 % 수준에 불과하여 서구 복지국가라고 볼 수 있는 나라들의 30~40 % 수준과 비교할 때 매우 낮은 수준인 것이다. 아직도 많은 국민들이 상대적인 빈곤과 질병 등의 생활고를 겪는 상태가 존속하기 때문에 복지사회의 건설을 위해서는 소외된 계층을 포함하는 전국민대상을 포용하는 과감한 사회보장제도의 확립이 요구된다.
【노동문제】 노동이라는 육체적, 정신적 활동이 어떤 사회관계 속에서 어떤 사회적 형태로 행해지는가는 시대에 따라 다르나, 현대사회의 시대적 형태는 자본주의하의 임금노동, 즉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자가 그가 갖고 있는 유일한 상품인 노동력을 판매하여 그 댓가로 임금을 획득하고 그것에 의하여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의 담당자 문제가 노동문제로서 주요한 사회문제화가 된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노동(賃勞動)은 노예나 농노와는 달리 노동력의 판매자인 노동자가 사회적으로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주체가 되어 있고 자본측은 노동력을 계약에 의해 생산의 한 요소로서 고용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 노동문제는 임노동의 재생산과정에서 자본과 임노동 자체의 존속 전개에 대한 장애로서 발생되고 진전되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노동의 재생산과정의 일환으로서 그것과의 직접적인 관련성 위에서만 성립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문제는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이윤을 둘러싼 문제가 기본이 되며, 나아가 사회, 정치적인 측면에서의 이해의 갈등관계가 성립한다. 그런데 임노동의 전체조건이라 할 수 있은 자유노동자층의 형성은 자본축척과정과 맥락을 함께 한다. 우리의 경우 그 시원은 자본주의 맹아기인 조선후기로 소급할 수 있으나. 봉건적 신분관계를 벗어난 자유노동자의 집단이 가시화된 것은 부두노동이나 철도노동 등에 임노동자가 증가한 개황기(1876~1910)무렵이라 할 수있다. 당시 자유노동자층은 전체인구의 극소수에 불과했으며, 일제의 토지조사사업(1910~1918)에 의한 영세농이나 소작농의 농지상실과 1930년대 이후 일제의 의한 식민지 공업화가 촉진되면서 양적인 팽창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해방 후 50년대까지도 농지개혁을 통한 잠재적 실업상태의 광대한 농민층은 단지 일부만이 도시로 유입되어 임노동자화 했을 뿐 전체인구의 70 % 이상이 잠재실업의 형태로 농촌에 잔존하여 임노동자화 되지 못하였다. 60년대 이후 수출중심의 대외의존적인 경제개발과 공업화가 실시되면서 한국에 본격적인 노동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한다. 60년대 이후 수출품 생산을 위한 외형적 공업화의 추진을 통한자본주의 세계체제로 편인된 한국은 주변부 자본주의 축척과정을 밟아가게 되며, 이로부터 임노동의 양적, 질적인 성장과 함께 노동문제의 기본률이 형성된다. 66년부터 70년까지 81만명, 71년부터 80년까지 190만명, 81년부터 85년까지 101만명 등 총 380만명 이상의 농촌인구가 도시로 유입되어 일부는 공식부문의 임노동자로 고용되고 나머지 일부는 소생산자나 잡업중심화에 따라 노동의 사회화가 진전되었다. 노도의 사회화란 상호 고립적으로 영위되어온 노동이 자본의 휘하에 조직되는 현상을 지칭하는데, 결국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전일화 되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70년대를 거치면서 뚜렷한 위치를 확보한 독점자본들은 중화학공업의 추진에 따른 외자도입과 수출증대를 축으로 규모의 경제를 강조하면서 재벌기업을 중심으로 자본의 편증과 거대화를 촉진하며 독점을 실화시켜왔다. 30대재벌의 평균 계열기업수가 1970년에 4.2개, 82년 13.4개, 그리고 89년에는 17.1개로 급속히 증가하였으며, 출하액은 77년의 43/1 %에서 87년의 37.3 %로, 수출은 83년 38.5 %에서 85년 41.3 %로 증가하였고, 고용면에서도 77년의 20.5 %에서 85년 17.9 %로 약간 감소하였으나 한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한편 임노동층의 노동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0년 약 15 %에서 70년 30 %, 80년 46 %, 그리고 85년에는 53 %이상으로 확대되었다. 한국의 임노동의 역사와 현황은 자본축척의 일반법칙을 기초로 하되 거기에 경제외적 주변적인 요소까지 결합된 특수성을 가지고 전개되어 왔다. 자본측은 노동과정에서 경공업이 중심을 이루던 60년대 중엽까지는 직접통제를,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는 기술적 통제를 그리고 80년대 중엽까지는 관료적 통제를 통하여 일방적인 지배력을 행사했으며, 국가의 강력한 행정력과 경찰력 또한 노동과정 외부에서 자본가들으. 지배력을 더욱 굳건히 하였다 그러나 80년대 중엽이후 90년대에 들어와 노동자들의 힘의 증대를 통한 조직력적인 대응은 자본가들과 국가의 일방적인 지배관철을 불가능하게 하였으며, 노동자들의 요구에 일정한 양보를 하게하여 노동자들의 실질적인 생활향상이 진전되었고, 노동동제방식도 강제적인 통제방식보다는 동의에 기초한 이데올로기적이고 헤게모니적인 통제방식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한국의 임노동과 자본 및 국가의 관계는 임노동의 절대적인 힘의 미약과 자본 및 국가의 우세속에 잠재적인 갈등요소가 많다. 다라서 이러한 임노동과 자본간의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는 자본-임노동관계의 실질적인 힘의 균형유지와 노동문제의 제도화가 요청된다.
【노인문제】 인구의 고령화에 따른 노인인구의 증가는 현대사회의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노인인구의 증가는 세계적인 현상으로서 한국도 해방이후에 3 %대에 머물던 65세 이상의 인구가 80년대에는 3.8 %, 90년대에는 5.0 %, 그리고 95년에는 5.4 %로 급증하기 시작하였다. 노인인구의 증가는 출산율의 감소와 보건위생의 발달 사망율의 감소 등과 밀접히 관련되며 2010년에는 전체 인구의 10 %선에 육박할 전망이다. 한편 노인문제의 핵심은 빈곤, 질병, 고독이라 하겠는데 이는 급속한 사회변동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핵가족화, 평균수명의 연당, 도시취업인구 증가로 인한 노부모와의 별거, 정년퇴직으로 인한 생활수단의 상실 등의 생활리듬의 변화와 직결된다. 한국인의 핵가족율은 1964년의 64.7 %에서 75년 67.7 %, 85년 68.8 %로 증가하였고, 평균수명은 60년 55.3세에서 70년 63.2세, 80년 65.8세, 그리고 90년에는 71.3세로 길어졌고, 또한 노인독신가구율도 85년 8.8 %에서 88년에는 12.7 %로 급증하는 추세에 있다. 이러한 사회변동은 도시의 문제로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농촌의 경우가 더욱 심각하다. 도시는 의료, 오락등의 문화적 환경조건이 농촌보다 양호하며, 따라서 농촌에 거주하는 노인문제가 보다 심각하다. 88년 현재 노인 단독가구는 대도시의 경우 14.7 %, 중소도시 17.0 %임에 비해 농촌의 경우는 30.9 %나 되어 노인 독거에서 볼 수 있는 외롭고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는 노인이 많다. 전체인구중 60세 이상의 노인의 거주율도 1990년 현재 시부지역 이상의 도시에 5.6 %가, 군부이하의 농촌지역에는 13.5 %가 거주하여 농촌에 2배이상이 거주하고 있다. 농촌지역의 노인들은 도시에 취업하고 있는 자식들과 떨어져 고통스러운 농업노동에 종사하며, 충분한 영향과 휴식 및 오락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농촌노인들은 이처럼 빈곤과 건강 및 가족간의 유대단절등의 심리적 고통을 받고 있는 반면, 도시의 노인들은 빈곤, 무력감 등을 경험하고 있다. 그런데 노인문제의 해결은 노인들의 요구에 기초하여 복지정책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한 조사결과에 의하면 전체노인들 중의 79.2 %가 건강악화, 79.5 %가 생활비 마련의 어려윰, 81 %가 배우자의 사망 등를 어려운 문제로 여기는 것을 보아서도 노인문제의 핵심인 질병, 빈곤, 소외문제의 해결이 가장 절실하다. 빈곤과 질병을 위해서 물질적 원조가 필요하고, 고독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서적 원조가 필요하다. 노인들의 경제적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 정년의 연장, 연금제도의 확대와 일터의 제공등 다양한 소득보장정책과 공적부조가 절실하며,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의료보험의 확대 및 사회 재활 프로그램의 확층 등이 필요하고, 심리적 고독감을 해소하기 위해 노인공동체문화등을 형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한편, 노인문제의 책임소재에 대한 조사결과를 보면, 1980년에는 자신 (54.7 %), 가정(33.35 %), 국가(15.3 %)라고 하였으며 1994년의 경우 자신(40.6 %), 가정(18.9 %), 사회(15.9 %), 국가(24.6 %)로 나타나 사회 및 국가적 차원의 노인복지에 대한 요구가 급증하고 있다. 또한 자식과의 동거희망에 대해서도 81년의 83.3 %에서 94년에는 36.7 %로 급격히 줄어들고 있어 자녀에 대한 의존 보다는 독립적인 노후생활의 영위를 선호하는 추세로 바뀌고 있다. 이에 따라 더 이상 노인문제는 가족의 문제가 아닌 국가, 사회적 차원의 문제임이며 이에 대한 국가적인 사회정책적 대처가 시급하다. 그러나 한국은 국가예산대비 노인복지예산이 1988년 0.02 %에서 90년 0.17 %, 그리고 94년에는 0.11 %로 아주 미미한 실정이다. 사회변동과 함께 노인들은 가족이라는 전통적인 사적 부양제도에 더이상 방치할 수 없고, 국가나 사회에 의한 사회적 노인 복지기구의 확충과 공공복지의 확대가 필수적인 상황에서 국가의 제도적인 대책과 재원확보가 절실히 요구된다. 복지국가의 기본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최저생활의 보장과 기회균등의 제공이 노인들에게 일차적으로 구현되도록 해야하며, 이를 통한 노후생활이 안정화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매스 커뮤니케이션】 단일 언어의 사용과 비교적 높은 문자 보급률 및 교육수준의 향상 등으로 한국의 언론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빠른 성장을 보였다. 한국 헌법은 건국 후 현재까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데,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21조 1항)고 규정하는 한편, “언론·출판은 타인의 명예와 권리 또는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하여서는 아니된다. 언론·출판이 타인의 명예나 권리를 침해할 때에는 피해자는 이에 대한 피해의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21조 4항)고 하여 언론의 자유와 함께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법률에 근거한 언론단체로는 언론중재위원회(言論仲裁委員會)·방송위원회(放送委員會)·종합유선방송위원회(綜合有線放送委員會)·한국방송광고공사(韓國放送廣告公社) 등이 있다. 그 밖에 주요 언론단체는 언론연구원(言論硏究院)·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全國言論勞動組合聯盟)·신문협회(新聞協會)·편집인협회(編輯人協會)·기자협회(記者協會)·방송협회(放送協會), 출판문화협회(出版文化協會)·잡지협회(雜誌協會) 등이 있으며, 언론학회(言論學會)를 비롯하여 다양한 직능별 연구 또는 친목단체들도 있다. 서울과 지방의 각 주요대학에는 언론관련 학과가 설치되어 학부와 석·박사학위가 개설되어 있다.
〈신문〉 94년 말 현재 등록된 일간지는 118개인데 서울에서 발간되는 종합 일간지가 10, 경제지 5, 스포츠 신문 3, 영어신문 3, 중국어신문 1종이며, 지방에서도 각 도에서 2종 이상의 일간지가 발행되고 있다. 통신사는 전국의 신문사가 공동으로 출자하여 설립한 연합통신(聯合通信)과 북한 뉴스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내외통신(內外通信)이 있다. 연합통신은 세계 각 나라의 주요 통신사와 제휴하여 외국의 뉴스를 국내에 공급하는 한편, 국내뉴스를 해외로도 송신하고 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신문이 발간된 것은 정부기관인 박문국(博文局)이 1883년에 창간한 《한성순보(漢城旬報)》였다. 그 후에 창간된 여러 신문들은 한말과 일제강점기에 국민계몽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구국(救國) 항일투쟁을 이끌기도 하였다. 8·15광복 후에는 반공 ·반독재·민주화를 위해 노력도 하였다. 5·16군사정변 이후에는 정부의 언론통제정책으로 발행의 자유가 제한되고 새 신문의 창간이 봉쇄되었으며, 한국신문협회를 중심으로 지면과 가격의 카르텔을 실시하여, 증면과 가격을 신문의 자율에 맡기지 않고 일률적으로 통제하였다. 또한 전국의 언론인은 정부가 발급하는 보도증(프레스카드)을 소지하도록 하였다. 더구나 80년 전두환정부에 의한 대규모 언론통폐합으로 신문·방송·잡지 등의 언론기관이 줄어들기까지 했다. 그 후 87년의 6·29선언 이후에 88년 노태우정부가 출범하면서 정기간행물의 등록제한을 철폐하여 여러 종류의 신문이 일시에 출현하였다. 6·29 이전과 현재의 일간과 주간의 수적 증가를 대비하면 다음과 같다. 90년대에는 대부분의 일간지가 조간으로 발행되는 추세인데 중앙에서 발행되는 종합 일간지 가운데는 《문화일보》와 《국민일보》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조간이다. 전두환정부 이후의 또 다른 특징은 증면(增面) 경쟁이다. 6·29선언 당시에는 1일 12면의 발행에 머물렀는데 그 후 16면(1988.4)으로 늘었다가 20면(89.10). 24면(90.7), 32면(93.4)으로 계속 증가하였다. 94년부터는 증면경쟁이 더욱 치열해져서 지면을 종합뉴스·경제·스포츠 등으로 부문별 편집하면서 1일 48면을 발행하는 신문도 있다. 언론기업이 대규모화하는 동안 전반적인 한국경제의 성장과 더불어 한국인의 해외진출이 늘어나자 80년대에는 일간지의 해외판 현지발행도 본격화되었다. 일간지의 해외판 발행은 70년대부터 시작되었는데, 가장 많은 해외판을 발행하는 《한국일보》는 12개나 되며, 《중앙일보》가 9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각각 4개씩이다. 해외판을 발행하는 도시는 《한국일보》의 뉴욕·LA·샌프란시스코·시애틀·시카고·위싱턴·호놀룰루·상파울루·싱가폴·부에노스아이레스·밴쿠버·토론토, 《중앙일보》의 뉴욕·LA·샌프란시스코·시애틀·시카고·워싱턴·호놀룰루·부에노스아이레스·토론토, 《동아일보》의 LA·워싱턴·상파울루·시드니, 《조선일보》의 뉴욕·시카고·위싱턴·상파울루, 《서울신문》의 호놀룰루, 《세계일보》의 뉴욕 등이다.
〈방송〉 공영방송과 상업방송이 병존하고 있다. 그러나 방송은 현재 커다란 전환점에 서 있다. 텔레비전은 ① 공중파 5개 채널, ② 95년에 개국한 4개 지역민방, ③ 95년에 개국한 유선방송(CATV) 31개 채널, ④ 95년에 전파를 발사하여 96년부터 방송이 시작되는 위성방송 등으로 ‘다매체 다채널’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공중파 방송은 한국방송공사(KBS)와 문화방송(MBC)·서울방송(SBS)의 3개 방송사가 방송하는 4개 채널의 종합 텔레비전과 교육방송이 있다. 라디오방송국은 종교방송인 기독교방송(CBS:서울 외에 5개 지방본부)·극동방송·아세아방송·불교방송(BBS)·평화방송(PBC)이 있다. KBS는 서울본사를 중심으로 25개의 지방방송국이 있고, MBC는 중앙과 지방을 합쳐 20개의 독립된 방송사가 프로그램을 공급받는 형태로 전국 방송망을 형성하고 있다. 95년에 개국한 4개 지역민방과 31개의 CATV 전문채널과 96년부터 방송이 시작되는 위성방송 등으로 채널의 수가 급격히 늘었다. 방송사 종사원은 81년 이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언론연구원의 조사자료에 의하면 방송사 종사인원은 1980년에 7,065명이었으나 매년 증가하여 94년에는 1만 3384명으로 늘었는데 이는 95년에 개국한 부산·대구·광주·대전의 4개 지역 민간방송과 유선방송 종사자가 제외된 숫자로서 이를 포함하면 훨씬 많아진다. 방송운영의 기본적인 방향을 결정하고 방송의 공적 책임 및 공정성과 공공성을 유지하며 질적 향상을 도모하기 위한 기구로, 각각 9인의 위원으로 구성된 방송위원회와 종합유선방송위원회가 있고, 방송에 관한 연구와 인력개발 등을 목적으로 하는 방송개발원(放送開發院)이 있다.
〈출판〉 1994년 말 현재 출판사 수가 1만 사(社)를 넘어섰으며 도서 발행도 2만 9564종, 1조 5232만여 부(部)로 21세기 정보화시대를 미리 준비하게 해 주는 기술과학·철학·아동 분야가 늘어나는 추이를 보여 준다. 이 중 잡지는 노태우정부 이후 크게 늘어나 사보(社報) 등 무가지(無價誌)를 포함하여 총 8,724종이 발행되었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차츰 나이와 직업에 따라 시장을 세분화하고 있으며, 《리더스다이제스트》를 비롯하여 《뉴스위크》 《행복이 가득한 집》 《지오》 《엘르》 《마리끌레르》 《휘가로》 《앙팡》 《에스콰이어》 등 외국의 지명도 높은 잡지사들과 라이센스 계약을 체결, 국제화를 시도하는 잡지들도 늘어나고 있다. 편집은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읽는 즐거움을 더해 주고 있는 반면, ‘무역 관련 지적재산권 협정’가입에 따라 95년부터는 해외 저작권료 부담을 극복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그동안 영세한 시설을 보유하였던 인쇄계는 시디-롬(CD-ROM) 타이틀 등 전자출판이 본격화되고 다품종 소량 생산체제가 자리를 잡아가자 이에 발맞추어 첨단 인쇄기를 도입, 이제는 인쇄물을 해외에 수출할 만큼 성장하였다. 출판유통 분야는 가장 낙후된 분야로 꼽혀왔으나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대규모 자본을 투입하여 물류비용 절감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광고비는 식음료·서비스오락에 이어 3위를 차지할 만큼 많으나 오히려 도산의 원인이 되기도 하여 합리적인 경영이 요구된다. 금세기 말까지 완공할 예정으로 경기 파주에 추진되고 있는 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 조성에 발맞추어 생산과 유통의 합리화를 꾀하려는 업계의 관심과 기대가 크다.
〈광고〉 경제성장에 따라 광고산업은 1970년대 이후 매년 10 % 가 넘는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93년의 국내 광고비 총액은 약 3조 2271억 원이었다. 이 가운데 신문이 1조 3326억 원, TV 8950억 원, 라디오 1372억 원, 잡지 1239억 원, 옥외광고와 교통광고 등 기타 매체 광고가 7380억 원으로 국민총생산(GNP)의 1.2 % 를 차지한다. 80년 이후 평균 15 % 전후의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한국의 광고시장은 규모면에서 세계 12위, 아시아 2위이다. 그러나 전세계 광고비의 90 % 이상이 선진국에서 집행되고 있기 때문에 절대 규모가 큰 것은 아니다. 한국 광고시장의 규모는 아시아 1위인 일본 광고시장의 9~10 % 에 불과하다. 광고시장의 업종별 광고비 지출은 식품과 음료산업이 전체 광고비의 15 % 전후를 차지하고, 그 다음이 서비스와 오락산업, 의류산업, 전기·전자산업, 출판업 등이다. 식품과 음료는 점유율이 줄어드는 반면 의류와 섬유산업은 증가하는 경향이다. 서비스와 오락산업의 점유율도 높아지고 있어 한국의 주요 광고주의 산업이 변하고 있는 추세이다. 방송광고의 경우에는 한국방송광고공사가 대행 위탁하는 방송광고물 외에는 광고를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데, 방송광고공사는 방송광고를 대행하여 조성하는 공익자금(公益資金)으로 방송과 문화·예술의 진흥사업을 지원한다. 방송위원회를 비롯하여 언론중재위원회·언론연구원 등의 여러 언론단체도 이 공익자금으로 운영된다. 다만 정부의 광고는 한국언론회관(프레스센터)이 대행하고 있다.
【종교·사상】 한국의 종교는 불교·그리스도교·유교 및 신흥종교의 네 부류로 대별된다. 불교와 유교는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가진 동양문화권의 유산으로 토착화가 이루어진 한국의 전통종교이다. 그리스도교는 서양문화의 산물로서 가톨릭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가 각각 유럽과 미국의 영향 아래 이식(移植)·성장하여 온 종교이다. 신흥종교는 불교·그리스도교·유교처럼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제도종교에 비하여 성립시기가 오래되지 않은 종교를 말한다. 여기에는 원불교(圓佛敎)·천도교·대종교·통일교(統一敎) 등과 기타 사이비 종교가 포함된다. 한국의 종교 실태를 알기 위하여서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배경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① 왕조의 교체와 더불어 새로운 지배이념으로서 새 종교가 등장하였고, ② 이러한 사실 때문에 종교 간에는 알력과 갈등이 생겨났으며, ③ 중국에 대한 사대(事大)와 민족의 자주적 독자성 사이에 잠재된 대립적 견해가 가끔 표면화하였고, ④ 토속신앙으로서 산악·일월성신(日月星辰)·거석(巨石)·고목(古木) 등 다신교적(多神敎的)·애니미즘적 원시신앙과, 샤머니즘적 무속신앙(巫俗信仰)이 공존하여 고도의 지성이 아니고서는 불교·유교의 형이상학(形而上學)이나 철학은 물론,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논리를 이해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한국의 종교인구 비율은 91년 말 현재, 54.0 %로 종교유형별로 보면, 불교 51.2 %, 개신교 34.4 %, 가톨릭 10.6 %, 유교 1.8 %, 원불교 0.6 %, 천도교 0.3 %, 기타 1.1 %로 구성되어 있다. 근래 한국 종교계는 그리스도교의 교세가 두드러지게 확장되어, 바야흐로 신생 그리스도교국의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불교〉 한국에 들어온 공식 연대는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이다. 백제는 그 후 384년에 불교를 받아들였고, 신라는 527년(법흥왕 14)에 국가의 공인을 받았다. 삼국에서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왕실이었다. 고구려나 백제 왕실에서의 불교 수용태도는 사찰을 지어 불상(佛像)을 모시고 불공을 드리면 곧 현실적인 이익이 있다는 기복적(祈福的)인 관점에서 생겼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신라에서의 불교 공인에는 보다 탐구적·구도적 자세가 엿보인다. 고구려의 불교는 지배자들의 몰이해로 큰 구실을 하지 못하고 승려들은 신라나 백제, 또는 일본으로 가 그 뜻을 폈다. 백제의 승려들은 백제 멸망과 더불어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고대문화를 꽃피웠다. 신라에서는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자기 종파적인 사상의 이해에서 탈피하여 불교사상 전반에 대한 종합적인 이론체계가 세워짐과 아울러, 대중불교의 성격이 나타나면서 그 기반이 확대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는 이러한 대승불교(大乘佛敎)의 보살도(菩薩道)로 훈련된 청년 엘리트와 국왕과 대신·장군들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신라의 정치이념도 화엄사상(華嚴思想)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경제·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의 활동도 화엄을 비롯한 법화(法華)·열반(涅槃)·능가(楞伽)·기신(起信)·승만(勝)·유마(維摩)·반야(般若) 등 대승경론(大乘經論)의 철학이 원광(圓光)이나 자장(慈藏)·원효(元曉) 등에 의해 보급됨으로써 찬란한 개화(開花)를 하였다. 한국 민족이 세계에 자랑하는 찬란하고 존귀한 문화유산은 대개가 이때의 사상과 신심(信心)의 뒷받침 아래 이룩된 것들이다. 석굴암(石窟庵)과 불국사(佛國寺), 상원사(上院寺)·봉덕사(奉德寺)의 종(鐘), 미륵반가사유상(彌勒半跏思惟像), 기타 국보들이 모두 신라불교문화의 편모를 보여주고 있다. 고려시대에도 국가의 보호 아래 불교는 번영을 누렸다. 태조는 사찰을 세워 불교를 숭상하고 연등회와 팔관회 등을 개최하였으며, 광종 때에는 과거제도에 승과를 두고 급제자에게 법계를 주어 그 권위를 높였다. 그러나 당시의 불교는 바람직한 개혁으로 쇄신되지 못하고 도참사상(圖讖思想)을 강조하기에 이르렀으며, 교리(敎理)의 연구를 통해 보살도의 실천을 강조하는 어려운 길을 버리고 모두가 안이한 밀교적(密敎的) 주술만을 강조하는 의식주의(儀式主義)로 일관하였을 따름이다. 그러한 가운데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나타나 천태종(天台宗)을 창시하고 이론과 실천 양면을 강조하는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제창하였으며, 원효정신의 재흥(再興)을 꾀하여 또 하나의 민족적 위업인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완성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었다.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도 당시 불교의 타락을 비판하면서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실천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여기에 바탕이 되는 이론이 돈오점수(頓悟漸修)였다. 그러나 원나라의 간섭기에 접어들면서 불교계의 혁신운동은 단절되고, 당시 불교사찰이 권문세족의 후원 아래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는 등 세속화되어, 고려 말의 불교는 성리학을 수용한 신진사대부들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부패와 타락은 결국 조선왕조의 출현과 더불어 숭유배불(崇儒排佛)을 공식적으로 정책화하게 만든 주원인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抑佛政策)으로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하고 또 7종파를 선(禪)·교(敎) 양종으로 통합, 사찰의 건립도 억제하였다. 그러나 불교가 국가의 지도이념으로서의 지위는 잃었지만, 민간에서는 여전히 신봉되어 그 사회적 기반을 유지하였다. 이와 같은 어려운 상황하에서도 임진왜란 때에는 결연히 궐기하여 국가와 민족의 생존을 위해 왜적을 무찌르고 난국을 극복한 것은 호국(護國)·호민(護民)·호법(護法)의 강인한 전통을 이어받은 결과였다. 개화기의 한국 불교는 조선왕조의 억불정책에서는 벗어났으나 일제강점기에는 강력한 동화정책으로 말미암아 일본 불교에 예속되었다. 이에 한용운(韓龍雲) 등과 같은 인사들은 ‘조선불교유신론’을 내세워 불교의 자주성 회복과 쇄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미 500여 년에 걸쳐 탄압과 멸시와 푸대접으로 모든 발전과 개혁의 자유활동을 폐쇄당해 인습화된 한국 불교를 유신(維新)하고자 한 그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했다. 광복 후 한국 불교가 맞이한 정세는 역시 그 유신을 가능하게 할 만큼 좋은 사정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8·15광복 후 50년을 지내 오는 과정에서 한국의 불교계는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1970년대에 일대혁신운동을 일으켜 승려의 자질 향상, 교육의 쇄신, 포교의 다양화 등을 추진하였으며, 세계불교연합회를 창설하여 한국불교의 지도력과 공신력을 높였다. 현재 한국 불교 주요 종단으로 조계종(曹溪宗)과 태고종(太古宗)이 있고, 그 밖에 법화종(法華宗)이 두 파, 총화종(總和宗)·천태종·진각종(眞覺宗)·일승종(一乘宗)·불입종(佛入宗)·정토종(淨土宗)·화엄종(華嚴宗)·보문종(普門宗)·법상종(法相宗)·용화종(龍華宗)·원효종(元曉宗)·진언종(眞言宗)·천화불교(天華佛敎)·미륵종(彌勒宗) 등 23개 종파가 있다.
〈유교〉 유교문화가 도입된 것은 중국과의 교류가 있은 때로부터 시작된다. 고구려의 제천의식인 동맹(東盟)은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의 회맹(會盟)을 방불케 하며,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의 비문이나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유교의 음양사상(陰陽思想)을 나타낸 것들이 있다.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에 태학(太學)이라는 유교 교육기관을 세우고, 또 전국에 경당(堂)을 두어 오경(五經)과 사·문(史文)을 가르쳐 인재를 길렀다. 백제에서도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둔 것은 일찍부터 유학(儒學)이 인간교육의 지표가 되어왔음을 말한다. 신라에서도 유교의 윤리강령을 널리 중시하여 불교 및 선도(仙道)와 함께 화랑(花郞)들의 생활지침이 되었다. 그 기본은 충(忠)·효(孝)·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에 있었다. 682년(신문왕 2)에는 유교교육기관인 국학(國學)이 설립되고, 788년(원성왕 4)에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설치하여 관리를 임용할 때 일정한 유학지식을 터득하도록 요청하였다. 9세기의 최치원(崔致遠)은 유·불·선(儒佛仙) 3교(敎)에 통달한 학자로서, 시무책 10여조(時務策十餘條)를 만들어 국정쇄신을 기하였으며, 원효의 아들 설총(薛聰)도 탁월한 유학자였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유교는 더욱 중시되었는데, 958년(광종 9)부터 실시된 과거제도는 정치이념 속에 유교이념이 짙게 배어 있음을 의미한다. 성종은 최승로(崔承老)의 상소에 따라 연등회(燃燈會)·팔관회(八關會) 등 불교행사를 중지하게 하는 한편 국자감(國子監)을 설치하였고, 인종은 지방에 향학을 설치하였다. 또 최충(崔?은 1055년(문종 9)에 사숙(私塾)을 두었는데, 이때 이래로 사숙 12개소가 생기고 그곳의 학도들은 12도(徒)라 하여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원(元)과의 교류과정에서 도입된 주자학(朱子學)은 고려 말기의 학문과 사상에 새로운 전환의 계기를 가져왔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유교는 지배이념으로서의 자리를 굳히고 또 종교적 성격을 뚜렷이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중앙에는 성균관(成均館), 지방에는 향교(鄕校)와 사립(私立)의 서원(書院)이 설치되어 인재양성과 제사가 거기서 이루어졌다. 숭유배불 정책이 정립되기까지는 원으로부터 주자학을 도입한 안향(安珦)과 그 뒤를 이어 주자학을 공부한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길재(吉再) 등의 공이 크다. 세종은 유교이념에 입각하여 집현전(集賢殿)을 만들고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중요성을 고취하기도 하였지만, 그의 종교정책은 모든 종교에 관용적인 기본입장을 가진 것으로 그 의의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조선시대 주자학의 이론 전개는 중국 유학이 우주론적 관심을 앞세운 데 비해, 인간의 심성문제에 관심을 집중한 사실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서경덕(徐敬德)·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이이(李珥) 등이 그러한 이론을 발전시킴으로써 한국의 유학을 빛냈다. 유교에서는 천(天)이 인간생명의 근원이며 백성을 살피고 있는 주재자(主宰者)이다. 천은 인간에게 내면적 덕성을 부여하였으므로 따라서 인간은 천으로부터 받은 명(命)인 성(性)을 따라야 한다. 이것이 곧 도(道)이고 성(誠)이다. 그러므로 유교는 인간 속에 내재된 성을 천으로까지 닿도록 성을 다해야 한다는 점에서 종교성을 지닌다. 그런데 한 인간은 그 생(生)을 부모로부터 받았고, 그 부모는 다시 조상으로부터 그 생을 받은 것이며, 그 조상은 다시 거슬러 올라가 천으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았으므로 조상숭배는 단순한 윤리를 넘어 종교적 의미를 가진다. 그리하여 유교의 종교의식은 제사로 집약되었다. 유교의 제사는 천지에 대한 제사와 조상에 대한 제사 및 성현(聖賢)에 대한 제사로 구분되는데, 이를 각각 교사(郊社)·조묘(祖廟)·문묘(文廟)라 한다. 이러한 제사의례는 엄격한 규정을 낳았고, 이로 말미암은 의례의 복잡화와 논의의 형식화는 본래 유교가 중요시했어야 할 심성도야의 실천적 수행을 소홀히 하고 공리공론(空理空論)과 형식적 의례의 관습화만을 촉진시켜, 지배체제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사상적 능력을 가지지 못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폐쇄적인 소규모 조직으로 분산되어 있다가 광복 후에 이를 재구성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김창숙(金昌淑)을 성균관장으로 추대하여 유도회(儒道會)를 설립하고 성균관과 전국 향교를 유교교단으로 조직하는 등 혁신을 위한 노력을 하였지만, 1956년부터 63년에 걸친 유림의 분규로 유교가 사회의 지도적 기능을 수행하지는 못하였다.
〈그리스도교〉 ⑴ 가톨릭:조선시대에 가톨릭이 알려진 것은 해마다 몇 차례씩 베이징[北京]에 다녀오던 사신들의 손을 거쳐 수입된 가톨릭 관련 서적을 통해서이다. 실학자 이수광(李光)은 1614년(광해군 6)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가톨릭을 소개했고, 뒤이어 이익(李瀷)은 안정복(安鼎福) 등과 함께 가톨릭 서적을 연구하였다. 그 후 18세기 말엽 권철신(權哲身)·정약전(丁若銓)·이벽(李檗) 등은 교리연구의 모임을 만들어 가톨릭교리를 배웠고, 1783년(정조 7) 이승훈(李承薰)은 베이징에 가서 영세를 받고 돌아와 동지들에게 영세를 베풀었다. 이렇듯 외국인 성직자의 선교 없이 평신도끼리 교회를 세운 것은 가톨릭 교회사상 유례가 없는 일로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후 95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서울에 들어와 4,000여 명의 교인을 지도하게 되었으나, 한국 가톨릭은 이후 수차의 대박해(1801, 39, 46)를 겪는 동안 많은 순교자를 내었다. 이러한 박해 속에서도 교세가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의 혼란과 민생고에 시달린 사람들이, “모든 인간은 천주 앞에 평등하다”는 사상과, 현실에서 벗어나 영생할 수 있다는 내세적 교리에 공감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한국가톨릭이 국가의 공인을 받은 것은 1886년 5월의 일이다.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가 나온 지 100여 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가톨릭은 선교의 자유를 얻은 뒤 고아원과 양로원을 설치 운영하였고, 교육·언론을 통하여 애국계몽운동에도 참여하였다. 그 동안에 한국 가톨릭교회는 장족의 발전을 이룩, 1968년 24명의 복자(福者)가 탄생하였으며, 69년 김수환(金壽煥) 대주교가 추기경(樞機卿)이 되었고, 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은 84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하여 103위 성인(聖人)의 시성식(諡聖式)을 집전하였다. 한국가톨릭교회는 현재 3개의 대교구(大敎區:서울·대구·광주)와 11개의 교구(인천·수원·대전·춘천·원주·안동·청주·부산·마산·전주·제주)로 나뉘어 사목활동을 펴고 있다.
⑵ 개신교:한국에 개신교가 들어오는 데에는 별다른 큰 박해는 없었다. 그것은 한국이 구미(歐美)의 여러 나라와 수교조약(修交條約)을 맺은 뒤에 선교사들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한국에 관심을 둔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는 독일인 귀츨라프였는데, 그는 1832년(순조 32) 충청도의 고대도(古代島) 등 도서에 상륙, 전도활동을 하면서 입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 소속의 선교사인 R.J.토머스, J.로스, J.매킨타이어 등이 입국하였다. 토머스는 66년(고종 3) 상선인 제너럴셔먼호(號)에 편승하여 평양에 왔다가 순교하였고, 로스는 73년 만주에 와서 한국인을 찾아 전도하며 신약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국내에 보급, 선교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 매킨타이어도 만주에서 활동하였다. 한국인으로서 개신교의 한국 선교에 지대한 공을 남긴 사람은 이수정(李樹廷)이다. 그는 82년 임오군란 뒤 수신사(修信使) 박영효(朴泳孝)를 따라 일본에 가서 4년 간 그곳에 머물면서 입교하여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등 선교준비에 몰두하다가 86년에 귀국한 후 붙잡혀 처형되었는데, 그가 번역한 성경 《마가복음》은 후에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가지고 입국하였다. 또 서상륜(徐相崙)도 역시 만주에서 성경번역에 동참했으며, 나중에는 그것을 목판에 새겨 인쇄하여 직접 보급하러 다니기까지 했다. 84년 서상륜은 황해도 장연에 있는 소래[松川]에 교회를 세웠는데, 이것이 한국 개신교 교회의 요람이었다. 85년 구미 여러 나라와의 수교조약이 체결되자 미국선교사 언더우드(북장로교회), 아펜젤러(감리교회)가 입국하였고, 89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회에서 J.H.데이비스가, 그리고 영국 성공회(聖公會)의 C.J.코프와 벤슨 주교가 입국하였다. 뒤이어 96년에는 미국 감리교회의 리드와 J.P.캠벨 부인이 입국하였으며, 또 같은 해에 캐나다 장로교회가, 그리고 1904년에는 미국 제7안식일 예수재림교회가 들어왔고, 1907년 성결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렇듯 개국·개화의 물결을 타고 한국에 입국, 선교에 착수한 것은 주로 미국 각 교파 소속의 선교사들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신사참배의 강요를 거부하여 핍박을 받았고, 6·25전쟁 중에 입은 상처는 엄청나 많은 사람들이 학살, 또는 납치당했고, 수많은 예배당이 잿더미가 되었다. 그러나 60년대 이후 크게 성장하여 급변하는 사회변동 과정에서 효과적으로 대처하여 윤리적 가치관의 학립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그 동안의 활발했던 분야는 한국적 신학의 수립과 토착화 논의, 신학자 배출과 행동반경의 확대, 신·구교의 성서공동번역, 다른 종교와의 대화, 평신도 신앙운동의 활성화, 선교 매스미디어의 확대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개신교가 안고 있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도 여전히 남아 있다. ① 교단의 분열현상, ② 농촌교회와 도시교회의 양극화, ③ 교회 내 청소년교육의 부진과 신자수 감소, ④ 교회의 기복적 샤머니즘화 현상 등이다.
〈신흥종교〉
⑴ 천도교(天道敎):천도교는 철종 때에 일어난 동학(東學)을 계승하고 1906년(광무 10)에 천도교라 개칭한 한국의 독특한 종교이다. 그 교리에는 유(儒)·불(佛)·선(仙) 3교는 물론, 그리스도교와 토속신앙인 한울님사상, 주술(呪術) 등의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 교조(敎祖) 최제우(崔濟愚:1824∼64)는 1861년(철종 12)경 교리를 완성하고 포교를 시작, 4년 뒤 붙잡혀 처형될 때까지 경상도 일대에서 교단을 형성하였다. 2대 경전인 《용담유사(龍潭遺詞)》 《동경대전(東經大全)》에 의하면 의지(意志)의 신인 한울님의 가르침을 성(誠)·경(敬)·신(信)으로 실천하고, 그것을 위해 수심정기(守心正氣)하여 시천주(侍天主)할 것을 강조한다. 수도의 격식으로는 주문을 외고 영부(靈符)를 지니는 것을 중요한 일로 여긴다.
⑵ 원불교(圓佛敎):교조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이 1916년 26세 때 홀연히 깨달은 바 있었는데, 그때의 심경을 “만유가 한 체성(體性)이며 만법(萬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生滅) 없는 도(道)와 인과응보(因果應報)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뚜렷한 기틀을 지었도다”라고 하고, 다음해부터 간척사업과 저축운동 등 사회개척사업을 하면서 일제의 탄압을 피해 24년 불법연구회라 칭하였다가 2대 종법사 송규(宋奎) 때 8·15광복을 맞아 원불교라 개칭하였다. 교리는 43년에 지은 《정전(正典)》에 전하는데, 그 교리를 보면 일원상(一圓相)의 진리를 중심으로 신앙문(信仰門)과 수행문(修行門)을 내세우고 있는데, 신앙문은 마음을 닦고 천지은(天地恩)·부모은(父母恩)·동포은(同胞恩)·법률은(法律恩)의 4은에 보답하는 것을 밝힌 것이며, 수행문은 사람이 정신을 수양하고 사리를 연구하여 본래의 맑은 마음을 드러내야 함을 가르친 것이다. 51년에는 원광대학을 세움으로써 원불교 사상을 정착시키는 발판을 만들었다.
⑶ 기타:그 밖에 대종교(大倧敎)는 단군신앙을 고취하는 민족신앙적 특색을 가지고 있으며, 이와 같은 경향을 가진 것에 한얼교가 있다. 국제도덕협회(國際道德協會)는 불교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 밖에도 증산교(甑山敎)의 유파 등 민간신앙에 바탕을 둔 신흥종교와 외래(外來)의 바하이·이슬람·천리교(天理敎) 등이 그 기반을 굳혀가고 있다.
【예술】
〈문학〉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한국에는 개화문명이 본격적으로 싹트기 시작했다. 동학농민운동과 그리스도교 선교활동과 일본이 강요한 1894년의 갑오개혁이 근대화작업을 촉진시켰다. 오늘의 현대문학(신문학)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⑴ 개화기문학:현대문학사에서 최초로 꼽히는 것은 1906년에 발표된 이인직(李人稙)의 신소설 《혈(血)의 누(淚)》이며, 최초의 신시(또는 新體詩)는 최남선(崔南善)이 1908년에 발표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이다. 이 무렵의 문학을 ‘개화기문학’이라 하며, 좁은 의미에서 이것을 ‘신문학’이라고도 한다. 이인직의 《귀(鬼)의 성(聲)》 《은세계》 《치악산》, 이해조(李海朝)의 《자유종》 《빈상설(上雪)》 《모란병(牡丹屛)》 《춘외춘(春外春)》, 최찬식(崔瓚植)의 《추월색(秋月色)》, 구연학(具然學)의 《설중매(雪中梅)》, 조일제(趙一齊)의 《장한몽(長恨夢)》 등 신소설과, 이 무렵의 창가(唱歌)로서 최남선의 《경부철도가(京釜鐵道歌)》 등이 모두 개화기문학에 포함된다. 그 주제는 젊은이들과 여성의 해방, 관습의 개혁, 계급타파 등 근대적 자각을 나타낸 것이 많으며 시와 소설이 대개 과거의 양식을 버리고 본격적인 문학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⑵ 계몽문학:신소설 이후 1910년대 말까지는 이광수(李光洙)의 독무대로서, 그의 역할이 주목된다. 10년에 발표된 그의 처녀작인 단편 《어린 희생》은 신문학사상 최초의 단편이다. 장편 《무정(無情)》(1917∼18)은 최초로 성공한 근대 장편소설로서 한국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 후 《흙》 《재생(再生)》 《개척자》 《마의태자》 등 장편 및 역사소설을 많이 남겼다.
⑶ 예술지상파의 문학:《창조(創造)》 《폐허(廢墟)》 《백조(白潮)》 등의 동인지가 등장하여 이광수의 문학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이광수의 문학이 민족을 계몽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겠다는 목적의식을 분명히 함으로써, 문학이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반박하고 나선 대표적인 작가는 김동인(金東仁)이었다. 주요한(朱耀翰)·염상섭(廉想涉)·전영택(田榮澤)·홍사용(洪思容)·박종화(朴鍾和)·이상화(李相和)·현진건(玄鎭健)·나도향(羅稻香) 등이 비록 계보는 달랐지만 문학의 경향은 모두 같았다. 이들의 문학은 그 후 ‘예술지상파(藝術至上派)의 문학’이라 불렸으며, 19년에 처음으로 순문예지 《창조》가 나온 데 이어 여러 동인지들이 나왔으나 23년경부터 이들은 ‘프로문학’의 도전을 받기 시작하였다.
⑷ 프로문학:프로문학이란 프롤레타리아의 문학을 약칭한 것으로 무산계급의 해방을 위한 계급투쟁으로서의 문학을 표방했으며, ‘신경향파(新傾向派)의 문학’으로도 불렸다. 이것은 소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문예사조에 입각해서 사회주의 사상을 고취한 문학이며, 백조파(白潮派) 김기진(金基鎭)이 23년 《개벽(開闢)》지에 《클라르테 운동의 세계화》를 연재하여 프로문학시대의 막을 열었다. 여기에 박영희(朴英熙)가 합세, 프로문학운동을 적극화시키면서 25년에는 카프(KAPF: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가 조직되고 최서해(崔曙海)·이기영(李箕永)·조명희(趙明熙)·임화(林和) 등의 활동이 20년대 말까지 왕성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20년대 후반에 이르러 프로문학은 잃어버린 예술성 때문에 김기진과 박영희 사이에 논쟁이 일어나고, 31년과 34년 두 차례에 걸쳐 카프 소속의 70∼80명이 한꺼번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35년에는 해산계를 내고 와해됨으로써 그 후 우리 문학은 ‘순수문학’시대로 접어들었다.
⑸ 순수문학:순수문학의 주축이 된 문인은 구인회(九人會)에 속한 이태준(李泰俊)·이효석(李孝石)·유치진(柳致眞)·정지용(鄭芝溶)·김기림(金起林) 등인데, 이들은 모두 이념적으로 사회주의 문학에 반대했고 문학이 사회운동의 수단으로 예속되는 것도 반대했다. 그리하여 사상성·목적성·사회성이 배제된 순수문학 이론이 평론가 김환태(金煥泰)에 의해 정립되었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돈(豚)》, 김유정(金裕貞)의 《봄봄》 《동백꽃》 《금따는 콩밭》, 이상(李箱)의 《날개》 《봉별기(逢別記)》, 유진오(兪鎭午)의 《김강사와 T교수》, 이무영(李無影)의 《흙의 노예》, 최정희(崔貞熙)의 《인맥(人脈)》 《지맥(地脈)》, 김동리(金東里)의 《무녀도(巫女圖)》 《바위》 등이 모두 이 시대의 대표작이다. 그리고 김기림에 의한 모더니즘 운동과 함께 이상의 연작시 《오감도(烏瞰圖)》와 김광균(金光均)의 《와사등(瓦斯燈)》, 박용철(朴龍喆)의 《떠나가는 배》, 정지용의 《백록담》, 신석정(辛夕汀)의 《너는 비둘기를 부러워하더구나》 등 순수파의 수작들이 이 시대에 나왔다. 한편 이같은 문학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서정성(抒情性)과 예술성을 살린 작품 김영랑(金永郞)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육사(李陸史)의 《광야》 《청포도》 등은 민족의식이 잘 표현되었고, 20년대부터 민요적 전통을 계승해 온 김소월(金素月)의 《진달래》 《산유화》 등 많은 시는, 서정적 가락으로 민족의 애환을 읊어 공감의 폭을 넓혀가며 일제강점기의 시단을 장식했다. 또 한용운(韓龍雲)의 《님의 침묵》은 기교와 주제의 깊이, 특히 항일정신과 신앙심 및 서정적 감각을 모두 조화시킨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⑹ 암흑기:순수문학은 그 후 암흑기를 맞이한다. 시인 윤동주(尹東柱)는 ‘조선인 학생민족주의 사건’으로 일본 후쿠오카[福岡] 감옥에서 복역 중 생체실험으로 옥사한 것이 거의 확실하며, 이육사(李陸史)는 베이징[北京] 감옥에서 옥사했고, 이윤재(李允宰)·한징(韓澄) 등 국어학자들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사했다. 37년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킨 후 39년 친일·반민족 문학단체인 조선문인협회를 조직했다. 41년 당시의 대표적 문예지 《문장(文章)》을 폐간시키고, 그 해 《인문평론(人文評論)》을 《국민문학》으로 바꾸어 한국어 반 일본어 반의 체제를 일본어 일색으로 바꾸게 하였다. 또 40년에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민족지를 폐간시켜 한국어에 의한 문학활동을 말살시키려고 하였다. 한편, 유진오·김동인 등 소설가와 주요한·김소운(金素雲)·노천명(盧天命)·김동환(金東煥)·서정주(徐廷柱) 등 시인과 최재서(崔載瑞)·박영희·김기진·김문집(金文輯)·백철(白鐵) 등 평론가들이 더러는 심하게, 더러는 소극적으로 반민족적 친일문학을 발표했다. 이로써 40년대 전반은 암흑기로 기록된다.
⑺ 해방문학:45년 8·15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문학은 ‘해방문학’의 시기를 맞는다. 모국어를 마음껏 구사할 수 있는 문학시대, 표현의 자유를 얻은 문학시대, 민족적 자각과 함께 민족적 유산에 대한 모든 발견과 연구가 가능해진 시대로서 문인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38선에 의한 국토분단으로 문단도 남북으로 갈라졌으며, 서울에서는 좌우익의 문학단체가 양립하여 48년의 정부수립 전까지 시인 임화를 비롯하여 이태준·박태원(朴泰遠)·김동석(金東錫)·이원조(李源朝) 등이 월북했다. 그리고 해방문단은 그같은 이념의 갈등이 문학논쟁으로 나타나서 김동리·조연현(趙演鉉) 등 순수문학파와 김동석 등 프로문학파의 논쟁은 매우 치열했다. 그 후 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좌익문인은 사라지고 순수문학이 한국문학의 주류를 형성했으나 곧 6·25전쟁이 일어났다.
⑻ 전쟁문학:6·25전쟁을 겪으면서 한국 문학은 본격적으로 이념적 갈등을 소재로 한 문학을 가졌고 현실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쳤다. 이때부터 50년대 말까지의 문학은 주로 ‘전쟁문학’의 테두리에 포함되며, 53년 휴전 후의 문학을 ‘전후문학’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시대의 문학이 전쟁 전의 문학과 다른 것은 해방문단에서의 좌우익 문제가 주로 이념적 논쟁 형식으로만 나타난 데 비하여, 전쟁 당시와 그 후의 문학은 실제로 피를 흘리는 비참한 양상을 표현하는 것으로 나타난 점이다. 장용학(張龍鶴)의 《요한시집》 《상립신화(喪笠新話)》 《현대의 야(野)》에서는 특히 6·25전쟁의 참혹한 양상으로서의 좌우익의 유혈과 이념의 극복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황순원(黃順元)의 《학》이나 이범선(李範宣)의 《학마을 사람들》, 오유권(吳有權)의 《방아골 혁명》, 강용준(姜龍俊)의 《철조망》, 하근찬(河瑾燦)의 《수난이대(受難二代)》 등은 모두 동족상잔의 참상을 고발한 작품들이다. 그리고 강신재(姜信哉)의 《임진강의 민들레》, 박경리(朴景利)의 《시장과 전장》, 정한숙(鄭漢淑)의 《끊어진 다리》 등 장편도 모두 문제작이다. 그 후 60년대에 들어와서는 4·19혁명으로 이승만정부가 무너지고 젊은이들의 현실참여 의식이 커졌다. 특히 50년대 후반기에 등장한 평론가들 중 김우종(金宇鍾)·김병걸(金炳傑) 등이 선두가 된 참여문학운동은 그 후 범문단적 양상으로 확대되었고, 60년대 후반부터는 백낙청(白樂晴)·염무웅(廉武雄)·구중서(具仲書) 등에 의하여 그 운동이 확대되고 시인 김수영(金洙暎)에서 김규동(金奎東)·신경림(申庚林) 등으로 이어지며 70년대까지 각계로 확산되었다. 그러므로 60~70년대의 문학의 주류는 참여문학이면서 계속 순수문학과의 논쟁이 거듭된 셈이다.
⑼ 70년대 이후의 문학:60년대의 평론가들에 의해 주도된 참여문학운동은 70년대에 이르러 범문단적 경향으로 확산되어갔다. 특히 70년대의 유신체제와 도시산업의 발달 및 남북공동성명의 세 가지 특성은 참여문학에서 두드러진 주제가 되거나 또는 정치적 사건으로 나타났다. 황석영(黃晳暎)의 《객지》, 이문구(李文求)의 《장한몽》, 윤흥길(尹興吉)의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조정래(趙廷來)의 《청산댁(靑山宅)》, 김정한(金廷漢)의 《인간단지》 등이 모두 도시산업화로 인한 후유증을 주로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60년대에 시인 신동엽(申東曄)의 《껍데기는 가라》, 최인훈(崔仁勳)의 《광장》 등으로 나타난 통일지향적 분단문학은 70년대에 윤흥길의 《장마》를 비롯해서 그 후 박완서(朴婉緖)의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문순태(文淳太)의 《잉어의 눈》 등과 함께 분단 이후 한국 문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80년대에는 과거의 반공논리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따르면서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등장하여 분단문학에 새로운 분수령을 형성했다. 한편 70년대 이후에는 부와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이른바 민중에 대한 관심이 증대됨으로써 황석영의 《장길산》 같은 대작이 나오고, 김지하(金芝河)·신경림(申庚林)·정호승(鄭浩承) 등의 시작 활동이 많아지면서 민중문학의 유파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70년대의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운동 등은 마침내 정치적 권력과 문인의 갈등으로 이어져서 김지하·이호철(李浩哲)·임헌영(任軒永)·김우종·정을병(鄭乙炳)·장백일(張伯逸)·고은(高銀)·백낙청·한수산(韓水山)·정규웅(鄭奎雄)·김병걸 등 다수 문인의 체포·고문·투옥 등의 사건이 이어졌다.
⑽ 기타:한국문학에서 ‘발표지’는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개화기 문인들은 스스로의 자금으로 책을 발간하는 형식으로 시작되었는데, 《창조》 《폐허》 《백조》 등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그 후 20년대 초부터 30년대까지 《영대(靈臺)》 《금성(金星)》 《장미촌(薔薇村)》 《조선문단》 《시문학》 《문예공론》 《해외문학》 등이 식민지체제하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우리 문학을 키운 공적은 매우 크다. 이와 같은 문예지들은 거의 문인들 자신의 희생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8·15광복 후에는 《문예》 다음으로 50년대에 《현대문학》이 등장하여 현재까지 한 번도 결간 없이 발간되는 가운데 수많은 신인을 배출시켰는가 하면, 《자유문학》 《사상계》 《문학예술》 등 문예지와 종합지의 역할도 컸다. 그 후 현재까지 《문학사상》 《한국문학》 《시문학》 《현대시학》 등 월간문예지도 계속 발간되면서 한국문학 발달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등록 문인은 약 2,000명에 이르며, 등록되지 않은 문인까지 모두 합한다면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연극〉 연극의 시초는 의식(儀式)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불가사의한 자연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우주를 지배하는 절대자에게 감사하는 고대의 의식이 곧 연극 그 자체였다. 한국 최초의 연극에 대한 기록은 《삼국지(三國志)》의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나타난다. 3세기경 이미 한반도에서는 1년에 한두 번 부족(部族)들이 한데 모여 소박한 놀이와 의식을 가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경천(敬天)·농사 또는 부족의 단결을 위해 거행되었음은 물론이다. 한반도를 통일한 신라에서는 검무(劍舞)가 성행하고, 이미 탈[假面]을 쓰고 하는 춤이 민간에서도 유행했는데, 오늘날 알려져 있는 처용(處容)의 노래와 춤도 이 때의 산물로 여겨진다. 고려시대에는 연등회(燃燈會)나 팔관회(八關會)가 국가적인 행사로 열렸는데, 이같은 공의(公儀)가 민중의 놀이로 세속화되면서 광대(廣大)와 재인(才人)이 나타났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판소리는 이들 광대와 재인의 산물이다. 판소리는 본래 음악으로만 여겨져 왔으나, 연극의 모든 요소를 지닌 특이한 성격의 악극으로 간주되기 시작하였다. 또, 조선시대의 놀이 중에서 현재 우리에게 가장 낯익은 것으로 탈춤[假面劇]이 있다. 서구의 연극처럼 대본(臺本)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인 대사와 춤과 익살, 그리고 가면을 통한 성격표현 등 특이한 형태로 이어지는 이 가면극은 현대연극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근대적인 의미의 첫 옥내극장(屋內劇場)은 1902년 12월에 세워진 협률사(協律社)였다. 그러나 개화의 물결을 타면서, 서구 연극을 의식한 근대적인 연극의 공연은 1908년에 개관된 원각사(圓覺社)에서 시작되었다. 이인직(李人稙)의 신소설 《은세계(銀世界)》를 극화하여 그 무대에 올렸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의 신연극이라는 견해가 통념이지만 내용으로 보아 최초의 신극일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 다음에 나타난 것이 10년대 초기, 임성구(林聖九)의 혁신단(革新團)에 의해 상연된 《불효천벌(不孝天罰)》 《육혈포강도(六穴砲强盜)》 등 일련의 신파극(新派劇)이었다. 이에 대한 관객의 반응은 대단해서 서울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당시 새 연극을 소개하는 데 앞장선 사람은 임성구를 비롯하여 윤백남(尹白南)·조일제(趙一齊)·이기세(李基世) 등이며, 또 20년대 초에 근대극을 담당할 후진 양성에 힘쓴 현철(玄喆)이 있다. 이 무렵 도쿄[東京] 유학생들은 극예술협회를 발족시키고 신파극에서 탈피한 본격적인 연극을 지향하였으며, 23년 박승희(朴勝喜)를 중심으로 토월회(土月會)가 창립되어 신극운동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20년대에 활약한 대표적 극작가로는 김우진(金祐鎭)·김운정(金雲汀)·박승희·조명희(趙明熙) 등이 있다. 주로 일본에서 외국문학을 전공한 유학생이 중심이 되어 31년 7월 발족한 극예술연구회는 진정한 신극운동을 표방, 활발한 소극장운동을 계획하였다. 이 모임의 대표적인 인물은 김진섭(金晉燮)·유치진·이헌구(李軒求)·서항석(徐恒錫)·이하윤(異河潤)·정인섭(鄭寅燮)·함대훈(咸大勳)·홍해성(洪海星) 등이다. 특히 유치진은 그 후 60년대까지 꾸준히 창작과 연출을 계속하면서 《토막(土幕)》 《버드나무 선 동리 풍경》 《마의태자》 등 많은 희곡을 발표하였다. 그 동안 이들 본격적인 연극지향파와는 달리 오락성과 상업주의에 몰두한 극단도 많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주로 동양극장(東洋劇場)과 단성사(團成社)를 무대로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이윽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의 마지막 발악은 연극계에도 예외없이 일대 타격을 가하였다. 작품의 철저한 사전검열, 전쟁찬양 내용의 강요, 극장 내의 가차없는 임검 등 일제의 탄압은 연극계를 질식시켰다. 45년 8·15광복과 함께 역사상 처음 누리는 자유로운 활동기를 맞아 한국 연극계도 소생하여 우후죽순처럼 많은 극단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가 그랬듯이 연극계도 좌우익으로 양분되는 시련을 겪은 끝에, 48년 정부가 수립되고 49년 10월 국립극장이 창설되자 신협(新協)과 극협(劇協)이 전속되어 《원술랑(元述郞)》 《뇌우(雷雨)》 등을 공연하였다. 6·25전쟁의 참극을 겪고 재기한 50년대 말엽과 60년대를 흔히 한국 연극의 르네상스 시대라고도 부른다. 대학생이 중심이 된 제작극회(製作劇會)라든지, 실험극장·산하(山河)·민중극장·자유극장·광장(廣場)·가교(架橋) 등 많은 극단이 탄생하고 우수한 극작가·연출자와 연기자를 배출하였다. 특이한 민속적 희극을 써 온 오영진(吳泳鎭)을 비롯, 차범석(車凡錫)·임희재(任熙宰)·이용찬(李容燦)·하유상(河有祥)·이근삼(李根三) 등 극작가와 이진순(李眞淳)·오사량(吳史良)·허규(許圭)·김정옥(金正鈺)·이승규(李昇珪) 등 연출가는 이 소극장운동기의 소산이다. 70년 중반부터 나타난 한국 고유의 전통적인 민속가면극 운동도 주목할 만하다. 바야흐로 한국의 연극은 서구의 연극을 수용하는 한편, 한국 고유의 연극을 되살리려는 노력도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
〈영화〉 한국영화의 최초의 작품은 1919년 김도산(金陶山)이 연극의 한 부분으로서 만든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라는 연쇄활동사진극(連鎖活動寫眞劇)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사진극이 단성사에서 상연되어 장안에 화제를 뿌렸지만, 역시 이것은 어디까지나 신파연극(新派演劇) 도중에 스크린을 내리고 연극장면의 일부를 그 속에 옮겨놓은 방편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최초의 극영화 작품은 23년에 윤백남(尹白南)이 만든 《월하(月下)의 맹세》이다. 그 후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스토리 위주의 영화가 등장하였는데, 이경손(李慶孫)의 《장한몽(長恨夢)》, 왕필렬(王必烈)의 《해(海)의 곡(曲)》 등이 곧 그것이다. 초창기의 영화는 제목이 말하듯이 대중이 이미 다 알고 있는 야담이나 통속소설을 필름에 담는 정도의 것이었다. 일제의 탄압을 무릅쓰고 민족의 울분과 저항정신이 담긴 영화를 처음 만들어낸 것은 나운규(羅雲奎)였다. 그는 1900년 함북 회령에서 태어나 36년에 요절한 불운의 예술인이었지만, 그가 처녀감독하고 주연도 겸한 《아리랑》(26)은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작품이다. 그는 《아리랑》의 주인공을 광인(狂人)으로 설정, 교묘히 일제의 검열을 피하였다. 주인공은 일제의 앞잡이인 악덕지주를 낫으로 찔러죽이고 일경을 구타하는 등 광인의 행위를 통해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설움과 분노를 폭발시켰다. 그는 또 《풍운아(風雲兒)》 《아리랑》 1·2편 외에 최초의 문예영화인 《벙어리 삼룡(三龍)》 등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이 무렵의 영화는 무성영화(無聲映畵)로 꼭 필요하다고 느낀 대사(臺詞)는 화면에 자막(字幕)으로 넣기도 하였지만, 변사(辯士)가 영화의 내용을 이해시키는 데 거의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한국영화가 무성영화시대에서 토키시대로 전환한 것은 35년의 《춘향전》부터이다. 나운규 이후 두각을 나타낸 감독은 이규환(李圭煥)과 최인규(崔寅奎)였다. 이규환 역시 민족정신이 투철한 영화인으로 《임자 없는 나룻배》(32) 《나그네》(37) 등을 통해 민족의 비애를 표현했고, 최인규는 《국경(國境)》 《수업료》 등을 발표하였다. 35∼39년에 청구영화사, 고려키네마사 등 20여 영화사가 설립되면서 영화제작에 대한 의욕은 대단했으나, 그 제작 편수는 미미하여 35년에 17편, 36년에 5편, 37년에는 4편에 불과하였다. 이와 같은 부진은 영화사의 영세성과 일제의 검열 강화가 그 원인이었다. 일제는 40년에 조선영화법을 제정·공포하고, 42년에는 사단법인 조선영화주식회사를 발족시켰는데, 이것은 영화제작을 극도로 억제하고 그들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려는 일련의 조치였다. 45년 8·15광복과 함께 그 동안 뿔뿔이 흩어진 영화인들이 속속 모여들어 일제강점기의 조선영화주식회사를 인수, 조선영화건설본부(위원장 尹白南)를 설립하고 미군정하의 뉴스영화제작을 맡았다. 이 무렵 좌익계열은 따로 조선영화동맹을 조직하였다. 46년 고려영화사에서 《자유만세》를 제작, 조국광복의 감격을 마음껏 구가하면서 이구영(李龜永)의 《안중근사기(安重根史記)》, 윤봉춘(尹逢春)의 《윤봉길의사(尹奉吉義士)》, 이규환의 《민족의 절규》, 김영순(金永淳)의 《불멸의 밀사》, 최인규의 《독립전야(獨立前夜)》 등이 잇달아 나왔다. 6·25전쟁의 와중에도 영화인들은 《태양의 거리》 《낙동강》 《고향의 등불》 등을 제작하였다. 휴전 후인 55년 15편에 불과한 제작편수도 59년에는 108편으로 증가했는가 하면 전후세대의 새 감독들이 등장, 영화가 본격적인 예술로 탈바꿈하기 시작하였다. 김기영(金綺泳)의 《십대의 반항》, 유현목(兪賢穆)의 《오발탄(誤發彈)》, 신상옥의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강대진(姜大振)의 《마부(馬夫)》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영화인들은 시야를 해외로 돌리기 시작, 55년 제2회 아시아영화제에 옵서버로 처음 참가하고 제4회 아시아영화제에서는 이병일(李炳逸)의 《시집가는 날》이 특별희극상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많은 한국영화가 샌프란시스코·베를린·베니스·칸 등 해외 영화제에 속속 출품되었다. 이리하여 60년대는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누린 셈이었다. 60년대의 문제작으로는 김수용(金洙容)의 《갯마을》, 박상호(朴商昊)의 《비무장지대》, 이만희(李晩熙)의 《만추(晩秋)》, 정진우(鄭鎭宇)의 《초우(草雨)》, 이성구(李星究)의 《장군의 수염》 그리고 최하원(崔夏園)의 《독짓는 늙은이》 등을 꼽을 수 있다. TV의 대중화에 따른 영화계의 타격은 심각하였다. 70년대에 들어와서는 해외 영화제에서 변변한 수상 기록도 거의 없는 부진의 늪을 헤매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별들의 고향》의 이장호(李長鎬), 《영자의 전성시대》의 김호선(金鎬善), 《바보들의 행진》의 하길종(河吉鍾) 등 전후 감독들의 활약은 다행한 일이었다. 80년대에 접어들어 한국영화는 70년대의 침체기를 벗고, 유수한 국제영화제에 출품하는 등 그 활동의 영역을 넓혀 나갔다. 한국영화의 국제무대 진출에 앞장선 감독들로 《피막(避幕)》 《여인잔혹사(女人殘酷史)》 《물레야 물레야》의 이두용(李斗鏞), 《만다라》 《길소뜸》의 임권택(林權澤), 《바보선언》의 이장호, 《땡볕》의 하명중(河明中), 《깊고 푸른 밤》의 배창호(裵昶浩)를 들 수 있다. 이들이 기울인 노력은 마침내 80년대를 빛내는 몇 개의 수상기록을 남겼다. 그것은 강수연(姜受延)이 87년 제44회 베니스국제영화제와 제9회 낭트3대륙영화제에서 《씨받이》(임권택 감독)에서의 연기로 여우주연상을, 신혜수(申惠琇)가 88년 제12회 몬트리올 국제영화제에서 《아다다》(임권택 감독)의 연기로 여우주연상을, 이장호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가 87년 제2회 도쿄 국제영화제에서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을, 강수연이 89년 제16회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아제 아제 바라아제》(임권택 감독)에서의 연기로 최우수여우상을, 배용균(裵鏞均)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 89년 제42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는 등, 국제무대에서 당당히 어깨를 겨루었다. 이러한 경향은 곧바로 90년대까지 이어졌다. 심혜진이 90년 제12회 낭트3대륙영화제에서 《그들도 우리처럼》(박광수 감독)의 연기로 여우주연상을, 장길수(張吉秀) 감독의 《은마(銀馬)는 오지 않는다》가 91년 제15회 몬트리올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이혜숙)·각본상(장길수)을, 정지영(鄭智泳) 감독의 《하얀전쟁》이 92년 제5회 도쿄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과 감독상을, 박종원 감독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92년 제16회 몬트리올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제작자상을, 이덕화(李德華)가 93년 제18회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살으리랏다》(윤삼육 감독)에서의 연기로 남우주연상을, 《서편제(西便制)》가 93년 제1회 상하이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임권택)과 여우주연상(오정해)을 받았고, 장선우(張善宇)감독의 《화엄경(華嚴經)》이 94년 제44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알프레드 바우상을, 정지영감독의 《허리우드 키드의 생애》가 94년 제42회 산세바스챤 국제영화제에서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을 각각 수상하였다. 1994년 제16회 낭트 3대륙영화제에서는 《장미빛 인생》(김홍준) 감독이 여우주연상(최명길)을 수상하였다. 90년대는 20세기를 마감하고 21세기로 접어드는 길목이기도 해서 다양한 영화제작이 시도되었다. 대작영화로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와 《태백산맥(太白山脈)》, 김호선의 《애니깽》, 영화의 형식미를 살린 이명세(李明世) 감독의 《첫사랑》, 어른을 위한 동화인 박철수(朴哲洙) 감독의 《오세암(五歲巖)》, 액션코미디물인 강우석(姜祐碩) 감독의 《투캅스》 등이 등장, 백가쟁명(白家爭鳴) 시대가 되었다. 90년대 들어 또 하나의 변화된 상황은 삼성(三星)·대우(大宇)·선경(鮮京) 같은 대기업들이 영상산업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또한 서울종합촬영소의 준공으로 한국영화의 국제화·미래화가 앞당겨졌다.
〈음악〉 고대로부터 전래된 한국 전통의 음악과 중국 및 서역(西域) 등지에서 전래된 음악을 국악(國樂)이라 하고, 주로 갑오개혁 이후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보급된 찬송가를 비롯한 다른 서양음악 등을 편의상 양악(洋樂)이라고 한다.
⑴ 국악:국악은 사용하는 악기와 곡목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① 아악(雅樂):중국 주(周)나라 때와 그 이전의 음악을 말한다. 1116년(예종 11) 송(宋)나라 휘종(徽宗)이 대성아악(大晟雅樂)을 보내왔는데, 이것이 중국아악이 한국에 들어온 최초의 일이다. 아악은 태묘(太廟)·사직(社稷)·선농(先農) 등의 제사(祭祀)와 연향(宴享)에 쓰였고, 이때의 악기로는 편종(編鐘)·편경(編磬)·금(琴)·슬(瑟) 등이 있었다. 특히 세종(世宗)은 박연(朴堧) 등을 독려하여 아악을 크게 중흥시켰고, 유신(儒臣)들의 절대적인 뒷받침으로 한때 찬연대비(燦然大備)하였으나 연산군(燕山君)의 난정(亂政)과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으로 쇠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숙종(肅宗)·영조(英祖)·정조(正祖) 때는 악기조성청(樂器造成廳)과 악기도감(樂器都監)을 두고 편종·편경 등의 아악기를 재정비하는 등 아악의 재건에 힘을 기울여 아악이 재생하는 듯했으나, 1910년 제향(祭享)의 폐지와 더불어 아악이 자취를 감추게 되어 지금은 오직 경학원(經學院)과 공자묘(孔子廟) 제향에 그 잔영(殘影)이 남아 있을 뿐이다. ② 당악(唐樂):중국 당(唐)·송(宋)나라 때의 속악(俗樂)의 통칭으로, 한국에 전래된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문헌상으로는 《삼국사기》에 “신라 문무왕(文武王) 4년에 당악을 배우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 <악지(樂志)>에 실린 송나라의 사악(詞樂)에는 석노교(惜奴嬌)·태평년(太平年) 등의 43편이 있으나 현재까지 전하는 곡은 낙양춘(洛陽春)과 보허자(步虛子)의 2곡뿐이며, 이것도 당악의 원형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향악화(鄕樂化)되었다. 조선 성종(成宗) 이전까지 성하던 당악은 이와 같이 차차 향악 속에 흡수·동화되어 그 자취를 거의 감추었다. ③ 향악(鄕樂):고대로부터 전래하는 한국 고유의 음악을 이르나, 최치원(崔致遠)의 《향악잡영(鄕樂雜詠)》에서는 당(唐) 이전에 들어온 중국·서역 계통의 외래음악(外來音樂)은 모두 향악에 포함시키고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의 한국 고유의 음악은 조선 전기에도 거의 전승된 것이 없고, 고려시대의 향악(고려시대에서는 俗樂이라 했다)도 차차 자취를 감추어 조선 선조(宣祖) 때의 《금합자보(琴合子譜)》에는 겨우 정석가(鄭石歌)·사모곡(思母曲)·한림별곡(翰林別曲) 등이 전할 뿐이다. 또한 고려시대의 속악으로서 조선 후기까지 전승된 것은 정읍사(井邑詞)·동동(動動) 등의 몇 곡에 불과하다. 그러나 세종(世宗)은 여민락(與民樂)·보태평(保太平)·정대업(定大業) 등을 직접 창작하여 향악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 ④ 속악(俗樂):민중과 더불어 자라온 한국 고유의 민간음악(民間音樂)으로서 가사(歌詞)·시조(詩調)·판소리·민요·잡가(雜歌)·산조(散調)·시나위·농악(農樂:매굿)·무가(巫歌)·범패(梵唄) 등이 이에 속한다. 국악은 또한 아악과 속악으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이때의 아악은 당악과 향악도 포함하여 넓은 의미의 정악(正樂)이라 하고, 민간음악 중에서도 아정(雅正)한 음악인 영산회상(靈山會相)·가곡·가사·시조 등을 좁은 의미의 정악이라고 할 수 있다. 정악은 궁중 또는 양반계급에서 연주된 음악이며, 속악은 민중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민중의 애환(哀歡)과 더불어 함께 자라온 ‘민중음악’인 것이다. 특히 향악과 속악은 동양 3국(한국·중국·일본)에서 한국음악의 독창성과 우위성을 증명하는 음악이라 하겠다. 국악발전사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세종대왕의 업적인데 왕은 1447년(세종 29) 향악을 기보(記譜)하기 위하여 정간보(井間譜:한국 최초의 有量樂譜에 속한다)를 창안하였고, 49년에는 고취악(鼓吹樂)과 향악에 바탕하여 보태평·정대업 등을 창작, 54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으로 연주되고 있다. 또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중심으로 한 호한(豪悍)한 정재(呈才)에 속하는 봉래의(鳳來儀:여민락·致和平 등으로 구성된다)를 제정(制定)하여 성업(聖業)을 이룩하였다. 성종(成宗) 또한 고려시대부터 전하는 악가(樂歌)를 개작(改作)·개산(改刪)하고 당악기의 일부를 고치는 한편, 《악학궤범(樂學軌範)》을 찬정(纂定)하는 등 국악사상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이와 같이 세종 때 이룩한 음악은 세조(世祖)가 이어받고, 성종은 다시 이를 정리 집대성(集大成)하여 기록함으로써 그 궤범을 후세에까지 남겼다. 일제강점기에도 국악은 조양구락부(朝陽俱樂部)·원각사(圓覺社)·협률사(協律社)·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 등을 통해 그 명맥이 이어져 왔다. 한편 음악가로는 3대 악성(三大樂聖)으로 꼽히는 왕산악(王山岳)·우륵(于勒)·박연(朴堧)을 비롯하여 근대의 5명창(名唱)인 김창환(金昌煥)·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정정렬(丁貞烈)·김창룡(金昌龍) 등이 있다. 8·15광복 후의 국악은 1951년 국립국악원(國立國樂院)이 정식으로 발족함으로써 연구와 연주 활동의 태동(胎動)이 보이기 시작하였고, 학교에서의 국악 교육은 54년에 개설된 덕성여자대학의 국악과가 처음이었으나 56년에 폐과되었고, 현재는 서울대학 대학원·서울대학·한양대학·전주 비사벌국악고교·이화여자대학·추계예술대학·중앙대학·국악고교 등에서 국악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⑵ 양악(洋樂):한국에 양악이 처음 소개된 것은 이규경(李圭景: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의한 것으로, 이 책에는 불완전하나마 양악의 기보법과 지극히 간단한 화성(和聲)에 관한 것이 일부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양악이 직접적으로 들어온 것은 1895년 이후, H.G.언더우드, H.G.아펜젤러 등의 선교사에 의하여 전도(傳道)와 더불어 찬송가가 보급되면서부터이며, 특히 1900년(광무 4)에 창설된 시위연대군악대(侍衛聯隊軍樂隊)에 의하여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그리고 학교교육에서 창가(唱歌:서양음악)를 가르친 것은 1909년 조양구락부에 서양악과(西洋樂科)를 두면서부터이다. 이것은 양악 전문교육의 효시(嚆矢)이며, 10년에는 이화여자전문에 음악과를 둠으로써 양악교육은 차차 본궤도에 올랐는데, 그 발전과정은 ① 섭취시기(1884∼1945), ② 토착화 시기(45∼62), ③ 현대화 시기(62∼현재) 등의 3기로 나눌 수 있다. 현대화 시기를 62년 이후로 보는 것은 ‘서울국제음악제’가 이 해에 처음 열렸기 때문이다. 제1·2기에는 김인식(金仁湜)·이상준(李尙俊)·김형준(金亨俊), 독일인 F.에케르트, 백우용(白禹鏞)·정사인(鄭士仁)·김영환(金永煥)·홍난파(洪蘭坡)·현제명(玄濟明) 등의 활약이 매우 컸다. 8·15광복 이후에는 고려교향악단·해군정훈음악대·서울교향악단·국립교향악단·국제오페라사(社)·국립오페라단·김자경(金慈璟) 오페라단은 물론, 이화여자대학·서울대학·연세대학·경희대학·한양대학 등의 음악대학을 통하여 양악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며, 또한 작곡가 안익태(安益泰)·윤이상(尹伊桑),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鄭京和), 피아니스트 김영욱(金永旭)·백건우(白建宇), 지휘자 정명훈(鄭明勳), 소프라노 조수미(曺秀美) 등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세계적 음악가가 속출하였다.
〈미술〉 1945년 8·15일 광복은 다른 모든 분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국 현대미술의 새 장을 여는 기점이었다. 일본의 압제와 왜곡에 의하여 단절된 한국 전통미술의 창조적 계승과 세계미술에 대한 참가가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미·소 양국군이 분할 점령한 3년간은 좌·우 세력의 사상적 대립 속에 놓여짐으로써 미술계도 45년 10월의 ‘해방기념전’ 이후 좌·우익으로 갈라져 치열한 이데올로기 논쟁으로 시종하였다. 정부수립 전인 47년 김인승(金仁承)·박영선(朴泳善)·이봉상(李鳳商)·장발(張勃) 등 온건한 사실파(寫實派)의 미술문화협회(美術文化協會)를 비롯하여 새로운 조형미술을 지향하는 신사실파(新寫實派)의 미술단체 등 여러 조직이 발족하였으나, 49년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國展]가 창설되어 사실파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한편, 김환기(金煥基)·남관(南寬)·유영국(劉永國)·김영주(金永周) 등의 추상파 화가들은 별도의 그룹을 형성하였다. 50년의 6·25전쟁으로 한때 미술계도 혼란에 빠졌지만, 이를 계기로 국제적인 현대미술과의 접촉이 활발해져 추상미술이 급속하게 보급되었으며, 또한 북한의 많은 미술가들이 남하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50년대 후반부터는 각 유파의 단체전(團體展)·그룹전·개인전이 활발해지는가 하면 프랑스·미국 등지로 건너가 본격적인 미술수업을 하는 것이 하나의 새로운 풍조처럼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각 대학의 미술교육도 궤도에 올라 더욱 활기를 띠고, 젊은 미술가들은 국전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적인 미술에 저항하면서 성장해 갔다. 이 시기의 주요 그룹전으로는 ‘모던아트전’ ‘창작미술전’ ‘신조형파전(新造形派展)’ 등을 꼽을 수 있으며, ‘현대작가초대전(조선일보사 주최)’은 하나의 종합적인 현대미술 추진체였다. 60년대에 접어들자 추상미술이 화단적(畵壇的)으로도 단연 큰 비중을 차지하여 ‘현대작가초대전’을 비롯하여 ‘문화자유초대전(文化自由招待展)’ ‘신인예술상미술전(新人藝術賞美術展)’ ‘액추얼전(展)’ 등이 성행하였다. 이 무렵, 프랑스에서 돌아온 화가에게서는 초현실주의 경향이 두드러졌고, 미국에서 돌아온 화가에게서는 추상표현주의 경향을 엿볼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동양적 환상이나 신화의 세계 또는 한국의 고미술(古美術)과 관련된 작품세계가 주조(主調)를 이루었다. 또한 국전이 대폭적인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60년대 말부터는 사실(寫實)과 추상(抽象)의 두 경향으로 분리된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또한 이 무렵에 그룹 아트가 새로이 이입(移入), 유행하여 주목을 끌었다. 한국 화단의 서양화 부문에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통하여 주목되는 작가로는 유영국·김영주·권옥연(權玉淵)·변종하(卞鍾夏)·박석호(朴錫浩)·전성우(全晟雨)·박서보(朴栖甫)·김서봉(金瑞鳳)·윤명로(尹明老) 등을 들 수 있으며, 이상범(李象範)·장우성(張遇聖)·노수현(盧壽鉉)·배염(裵廉) 등 전통적인 동양화를 지향한 작가와는 달리 이응로(李應魯)·김기창(金基昶)·서세옥(徐世鈺)·박노수(朴魯壽)·천경자(千鏡子) 등은 새로운 재료나 새로운 표현기법으로 동양화에 현대적인 조형(造形)을 받아들여 구미의 미술계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조각에서는 해방 직후부터 김경승(金景承)·김종영(金鍾暎)·윤효중(尹孝重)·김세중(金世中)·김영중(金泳仲) 등의 사실파가 중심이 되어 이순신(李舜臣)장군을 비롯한 역사적 인물, 각지의 독립운동가들의 동상 제작과 각종 모뉴먼트 및 그 밖의 작품활동이 활발하였다. 또한 50년대 후반에는 추상적 조형의 추구가 성행하였으며, 60년대로 접어들면서 종래에 보지 못하던 철재(鐵材)에 의한 추상조각이 제작되는가 하면 최기원(崔起源)·전상범(田相範)·최종태(崔鍾泰) 등의 조각가가 등장하였다. 건축은 6·25전쟁 후의 부흥기를 거쳐 60년대부터는 프랑스에서 돌아온 김중업(金重業)을 비롯하여 김수근(金壽根) 등 개성이 뚜렷한 건축가에 의하여 현대건축이 이루어졌다. 한편, 각 분야에서 내셔널리즘 운동의 발흥과 더불어 ‘민속공예전’ ‘이조백자전’ ‘조선문방구·목공예전’ ‘조선민화전(朝鮮民畵展)’ 등을 통하여 전통미(傳統美)를 재발견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그 영향 아래서 개성 있는 젊은 추상미술가들이 속속 배출되었다.
〈무용〉 한국무용을 대별하면 전통무용과 창작무용으로 나눌 수 있다. 전통무용에는 궁중정재와 민속무용이 있고, 창작무용은 1920년대부터 시작된 신무용과 80년대에 발전한 창작무용이 있다. 이 모든 무용은 시대에 따라 서로 관련을 맺고 변화·발전해왔다. 거기에는 흥과 멋과 우아함이라는 우리의 미적 정신이 담겨 있으며, 가(歌)·무(舞)·시(詩)가 일체를 이루는 종합적 예술창조로 오늘날까지 거듭 발전해오고 있다. 상고시대의 제천의식(祭天儀式)에서 비롯한 한국의 무용은 당초 음악과 무용이 미분화 상태에 있어서, 이를 아울러 ‘악(樂)’이라 불렀다. 고구려 무용의 단편(斷片)을 무용총(舞踊塚) 벽화에서 엿볼 수 있다. 또한 중국측의 사적(史籍)에도 고구려의 호선무(胡旋舞)·광수무(廣袖舞)·지서무(芝栖舞) 등에 관한 기록이 나타난다. 백제무용에 관한 국내의 기록과 자료는 아직 전무하나, 《니혼쇼키[日本書紀]》에 보면, 백제인 미마지가 오(吳)에서 기악무(伎樂舞)를 배워 일본에 전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또 《삼국사기(三國史記)》악지(樂志)에도 중국의 《통전(通典)》을 인용하여 백제의 무용의상 등에 관해 기록한 대목이 있으나, 그 춤의 형태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전혀 헤아릴 길이 없다. 신라의 무용은 무악(舞樂)을 장려한 진흥왕(眞興王)시대에 융성기를 맞았다. 552년(진흥왕 13)에는 가야국(伽倻國)의 우륵(于勒)이 신라에 돌아와서 국원(國原:충주)에서 계고(階古)·법지(法知)·만덕(萬德)에게 가야금과 노래와 춤을 각각 가르쳤다. 또한 신라 때 당(唐)의 악제(樂制)를 채용한 일도 무용의 발전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었다. 신라의 특기할 만한 무용으로는 검무(劍舞)를 비롯하여 무애무(無3舞)·도솔가무(兜率歌舞)·처용무(處容舞) 등이 있다. 이와 같은 신라 고유의 무용 외에도 서역과 중국에서 전래된 가면극(假面劇)인 오기(五伎)가 있는데, 그 모습을 최치원(催致遠)이 한시로 묘사한 향악잡영5수(鄕樂雜詠五首)가 《삼국사기》에 전한다. 고려시대로 접어들자 신라의 유풍을 이어받은 팔관회(八關會)와 연등회(燃燈會)가 국가적인 행사로 거행되고, 이와 함께 가무도 더욱 발달하게 되었다. 가무의 종류도 아악(雅樂)·당악(唐樂)·속악(俗樂:향악)으로 나누어졌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1073년(문종 27) 2월에 여자 무용수 진경(眞卿) 등 13인이 답사행가무(踏沙行歌舞)를 추었으며, 또 그 후에 포구락(抛毬樂)과 왕모대무(王母隊舞) 등을 추었는데, 이것은 모두 중국에서 전승된 당악정재(唐樂呈才)에 속하는 가무이다. 고려시대 무용의 형태는 알 수 없으나, 기록에 나타난 무용의 종류는 상당히 많다. 일무(佾舞)에는 무무(武舞)와 문무(文舞)가 있으며, 정재(呈才)는 향악정재와 당악정재로 구분된다. 조선시대에는 종래의 예능을 계승함과 동시에 부흥을 시도하였다. 궁중의 여러 행사에는 가무를 빼놓을 수 없을 정도였으며, 무악을 관장하는 곡악서(曲樂署)가 설치되었다. 조선의 무악은 세종·세조에 의해 정리 발전되고 성종대에 집대성되었으며, 익종은 김창하(金昌河)와 수십 종의 정재를 새로 창안했다.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춘앵전(春鶯)이 대표적 작품이다. 보태평(保太平)·정대업(定大業) 등의 일무의 동작과 곡을 수록한 《시용무보(時用舞譜)》가 약 200년 전에 편찬되었으며, 홀기(笏記) 등에 의해 조선시대 후기의 무용 내용을 알 수 있다. 《악학궤범》 《진연의궤(進宴儀軌)》 《정재홀기(呈才笏記)》 등에 궁중무용 51종과 남무(男舞)·무당무·무동춤·사자무·살풀이·승무·소고무·장고무·한량무·강강수월래 등의 민속무용이 기록되어 있다. 향악무에는 꽃을 어르고 꺾으며 추는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 심향춘(沈香春), 풍년을 기원하는 경풍도(慶豊圖), 태조의 건국을 축하하는 몽금척(夢金尺), 왕조창업의 공덕을 칭송하는 곡에 맞추어 추는 문덕곡(文德曲) 외에도 첩승무(疊勝舞)·초무(初舞)·박접무(撲蝶舞)·무산향(舞山香)·아박무(牙拍舞) 등이 있으며, 당악무에는 수명명(受明命)·성택(聖澤)·하성명(賀聖明)·하황은(荷皇恩)·수보록(受寶) 등이 있다. 민속무용의 대표적인 예로는 농악과 강강수월래가 있으며, 승무·살풀이·한량무·남무·탈춤 등이 있다. 강강수월래는 전라도 지방에서 밝은 달밤을 가려 부녀자들이 즐기는 향토적인 군무(群舞)이다. 농악은 상고시대부터 있었다는 설이 있는데, 농사의 능률을 올리고 유사시에는 군인들의 사기를 고무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사자무는 조선 고종 때에 궁중에 들어와 처음으로 추었는데 이는 탈춤에서 유래한 것이다. 탈춤은 조선 후기에 성행한 춤으로 가면(탈)을 쓰고 춤을 추며 대사가 있는 극형식을 띠고 있다. 탈춤의 명칭은 지방별로 다른데, 황해도 지방은 강령탈춤·봉산탈춤이고, 경기도 지방은 산디놀이, 경남 지방은 야유(野遊) 또는 오광대(五廣大)로 각각 불러왔다. 남무는 남자와 여자로 분장한 두 사람이 서로 교태를 부리는 민속무인데 주로 기녀 사이에서 성행한 것이다. 한국의 무용은 오랜 세월 동안 종교의식으로, 또는 궁중이나 민간에서 전승되어 오다가 1905년 국립극장격인 원각사(圓覺社)가 개장함으로써 궁중무용과 민속무용이 함께 무대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다. 10년 국권피탈이 되면서 무용에서는 또다른 변화가 일어났다. 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으로 전통무용은 극장의 공간을 제외하고는 공연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렇게 우리의 전통무용에 대한 전승이나 발전은 일제에 의해 철저하게 차단되었다. 이 외에 1919년에 다양한 서구의 춤이 도입되어 무대상연을 위한 활동이 본격화되면서 새로운 형태로 창안된 한국무용이 서서히 일어났다. 1929년에는 일본인 이시이 바쿠[石井漠]에게 사사한 조택원(趙澤元)·최승희(崔承喜)가 현대무용을 한국화한 ‘무용의 현대화’를 표방하면서 신무용사의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우리 민속무용에 가장 뛰어난 예인으로 한성준(韓成俊)을 들 수 있다. 한성준은 여러 지방의 민속무용을 정리하고 승무·태평무·학무 등을 창안하기도 했다. 그의 춤들은 중요무형문화재로 책정되어 한영숙이 계승 발전시켰다. 45년 8·15광복 이후 한국은 남·북으로 양단되어 무용계에도 무용의 해석방법·표현법 등을 놓고 커다란 대립이 나타났다. 50년대 무용은 신무용의 대표적 인물인 최승희의 제자 김백봉(金白峰)의 제1회 무용발표회에서 공연한 부채춤·화관무 등 작품의 경향은 여전히 신무용의 흐름을 유지하였다. 60년대에는 대학에 무용학과가 생겨났고, 국립무용단이 발족되어 62년에는 국립극장에서 제1회 무용공연을 가졌다. 그 후 73년 현 국립극장 건물이 준공되었고, 이때부터 국립무용단과 국립발레단이 분리되어 송범(宋范)·임성남(林聖男)을 단장으로 하여 많은 공연을 했다. 이 시기에 활동한 무용가로는 전통무용과 창작무용을 포함하여 김천흥(金千興)·김진걸(金振傑)·최현(崔賢)·김선영(金善泳)·김문숙(金文淑)·김백봉·최희선(崔喜仙)·한순옥(韓筍玉)·한영숙(韓英淑)·송수남(宋壽男) 등이 있다. 이들은 무용수뿐만 아니라 안무가로서 1950년대 이후 한국 무용계를 이끌어온 중추적 구실을 했다고 볼 수 있다. 74년 11월에는 서울시립무용단이 제1회 무용발표회를 가졌으며, 61년에 창립된 한국무용협회는 한국 무용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힘쓰고 있다. 70년대 후반에는 각 대학에서 배출된 많은 무용수들의 활동을 예견할 수 있는 계기를 제시해 주었다. 79년에는 대학민국무용제가 창설되어 창작무용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대한민국무용제는 현재 서울무용제로 개칭하여 14회를 거듭하고 있다. 이러한 1970년대의 변화는 80년대에 더 한층 활기를 띠어 ‘무용의 르네상스시대’라 부를 정도로 공연의 양적 증대와 질적 변화를 가져왔다. 그 결과 1920년대 이래 계속되어 온 신무용 위주의 창작무용이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창작 예술성을 펼치게 되었다. 연간 100여 회 이상의 공연은 공연공간에 대한 의식변화를 가져와, 대극장 중심의 70년대의 많은 무용수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못한 반면, 80년대에는 소극장·거리·공원 등 다양한 곳에서 공연이 이루어졌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개막과 폐막식을 화려하게 수놓은 한국무용은 우리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식을 고취시켰으며, 이와 같은 의식은 또 다른 전통의 발전적 계승이라는 문제를 제시했다. 80년대에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무용수가 김매자(金梅子)·배정혜(裵丁慧)·문일지(文一枝)·김현자·정재만·국수호(鞠守鎬) 등이며, 대학을 중심으로 한 동문단체인 창무회·설무리·한무회 등이 창작무용 활동에 많은 참여를 하였다. 80년대 한국무용의 발전은 다양한 양식적 측면에도 영향을 주어 내용면에서도 신무용의 미학적 한계인 미나 선의 미적 범주를 넘어선 많은 사회적인 소재들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러한 무용은 특히 이애주·채희완·강혜숙 등 민족춤으로 나뉘어 서민정신과 노동, 신바람 등 한국적 특성을 바탕으로 삶의 현실을 추구하는 춤을 추었다. 80년대의 변화는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교육개방과 함께 무용에서도 우리의 것에 대한 광범위한 문제를 다시 한 번 짚어 보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전통무용의 올바른 계승을 위해 단순한 춤동작의 고답적 답습이 아닌, 살아 있는 한국적인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 시급하다. 또한 국적 없는 창작무용의 한계도 한시 바삐 정리되어야 할 숙제이다. 그렇지만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무용예술은 다양한 측면에서 변화·발전하고 있음은 확실하다.
【스포츠】 한국이 서구식 스포츠에 처음으로 접한 것은 조선 말기인 1897년(광무 1) 영국 함대가 인천에 입항하여 수병들이 축구경기를 시범으로 보여준 데서 비롯된다. 그 후 한국 조정의 궁내대참리(宮內對參理)와 어전통역(御前通譯) 등의 벼슬아치 중 외국어학교 출신들이 ‘대한축구클럽’을 조직하였는데 이것이 한국 축구팀의 효시이다. 이어 서울의 젊은이들 사이에 축구가 유행하여 많은 팀이 생겨나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야구는 1903년(광무 7) 서울 종로에 YMCA를 세운 미국인 선교사 G.L.질렛이 이듬해 봄 YMCA 회원들에게 야구를 가르쳤다. 그리고 1905년에는 관립 한성고등학교(지금의 경기고교)의 다카하시[高橋]라는 일본인 교사가 야구팀을 만듦으로써 서울에 두 팀이 생겼다. 그 해에 두 팀이 훈련원(訓鍊院)에서 한국 최초의 야구경기를 펼쳤는데, 승리는 고등학교 팀에게 돌아간 것으로 되어 있다. 연식정구(軟式庭球) 역시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정확한 도입연도는 기록이 없다. 다만, 고종 황제가 땀을 흘리면서 하는 외국인들의 연식정구 시합을 보고 “그렇게 힘드는 일을 하인들에게 시키지, 왜 직접 하느냐?”고 하문(下問)하여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하였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기록에는 황명원(黃明源)·연학년(延鶴年)·이세정(李世禎) 등이 금강(金剛)클럽을 조직하여 1910년 이래 오랫동안 전국 연식정구계를 주름잡은 것으로 되어 있다. 농구는 11년에 YMCA 뒷마당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편을 갈라 게임을 하고 연습도 하는 광경을 찍은 사진 한 장과 그 뒷면의 설명이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이로 보아 농구도 YMCA 창립과 더불어 한국에 도입되었음이 확실하다. 20년에는 YMCA 팀이 일본에 원정하였는데 이것이 한국 농구의 해외경기의 효시이다. 육상경기는 어려운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스포츠라서, 상당히 오래 전부터 도입되어 경기대회는 운동회 또는 학교 대운동회 때 달리기 등을 중심으로 거행되었다. 공식 기록으로 남아 있는 본격적 육상경기대회는 1908년(광희 2년) 훈련원에서 열린 연합운동회였는데, 그 입장식에는 영친왕이 대청(臺廳)에서 관람하였다고 되어 있다. 초창기의 한국 스포츠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20년 4월에 조선체육회(朝鮮體育會)가 창립되면서부터이다. 이 해 4월 1일 창간된 《동아일보》가 스포츠를 보급시켜 젊은이의 체력과 기력을 양성할 것을 역설한 것이 계기가 되어 유지(有志)들의 발기로 조선체육회가 창립되었다. 조선체육회는 창립기념사업으로 7월에 배재고보 교정에서 제1회 전조선 축구대회와 제1회 전조선 야구대회를 개최하였다. 축구대회 중학단부에는 경신·휘문·배재·중앙·보성의 5개 고등보통학교 팀이 출전하여 배재고보가 우승하였고 청년단부에서는 배제OB·YMCA·천도교·경신OB·삼한(三韓)클럽의 5개 팀이 겨룬 끝에 배재OB가 우승하였다. 야구대회 참가 팀도 축구대회 참가 팀과 같았는데 중학단부·청년단부 모두의 패권을 역시 배재 YB(young boy:재학생)와 OB(old boy:졸업생)팀이 휩쓸었다. 이같이 YMCA는 초기 스포츠 보급에 크게 이바지하였는데 서울에 이어 21년에는 평양에서 YMCA 주최로 제1회 전조선 축구대회가 열렸고, 이것을 계기로 평양에 축구가 유행해 서울·평양 간 경평축구전(京平蹴球戰)이 열렸으며 이에 일본유학생 팀이 가세하여 지방 순회경기 등을 벌임으로써 축구를 중심으로 한 서구 스포츠는 전국에 번져나가기 시작하였다. 스포츠를 한국에 완전히 정착시킨 것이 연희(延禧)전문과 보성(普成)전문의 두 사학(私學)이다. 24년에 양교 축구부가 동시에 탄생하자 그때부터 양 팀 간의 대결은 서울의 화제가 되었다. 강력한 축구부를 먼저 구성한 것은 연희전문으로서 26년에 이영선(李永善)·이영민(李榮敏)·김윤기(金允基) 등으로 강팀을 이루어 전국 축구를 휩쓸자, 보성전문은 이듬해 김화영(金化永)·김원겸(金元謙)·임용업(林龍業) 등으로 팀을 구성하여 연희전문과 맞섰다. 이때부터 연보전·보연전(延普戰·普延戰)은 열기를 높여갔으며 이것이 자극이 되어 중등학교 축구의 질이 높아졌다. 당시의 축구소년들은 누구나 연희전문·보성전문 진학을 열망했고 진학 후 기술을 더욱 연마했으므로 양교 재학생을 중심으로 35년에 구성된 경성축구단(京城蹴球團)은 동양 최강의 실력을 지녔다고 평가받았다. 농구는 이보다 늦게 30년에 연희전문 농구부가 강화되고, 보성전문 농구부는 이듬해 팀이 구성되었다. 그 결과 축구의 연보전과 더불어 농구 연보전도 스포츠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또 다른 행사가 되었다. 선의의 경쟁에 의한 양교 농구 수준의 급격한 향상에 따라 연희전문 농구팀이 36년 전일본 종합농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자 이성구(李性求)·염은현(廉殷鉉)·장이진(張利鎭)의 세 선수는 이 해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11회 올림픽대회에 출전한 일본 대표농구 팀의 선수로 선발되었다. 연보전은 축구·농구뿐만 아니라 육상경기·아이스하키·스피드스케이팅·유도·정구 등의 경기도 공통적으로 장려하였으며, 그 밖에도 연희전문에서는 야구를, 보성전문에서는 럭비·배구·역도·탁구 등을 장려하여 한국 스포츠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축구·농구에서와 같이 양교의 육상경기 장려는 양정·배재 고보를 비롯한 전국 중등학교 육상경기 발전에 자극제가 되어 그 산물로서 권태하(權泰夏)·김은배(金恩培)·손기정(孫基禎)·남승룡(南昇龍) 등 우수한 장거리 및 마라톤 선수가 배출되었다. 이 가운데 손기정·남승룡은 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대회에 출전, 1위와 3위를 차지하여 한국 민족의 우수성을 세계에 자랑하였다. 그리고 김원권(金源權)·김유택(金裕澤)은 39년에 멀리뛰기와 3단뛰기 및 100 m달리기에서 그 해의 세계최고기록을 세웠다. 한국의 스포츠는 조선체육회의 주도로, 또 연보전의 경쟁 아래 해가 거듭할수록 널리 보급되었고 수준을 높여갔으나, 군국주의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으로 조선총독부가 43년에 이르러 외래 스포츠의 금지지시를 내림에 따라 일본이 패망하는 날까지 침체되었다. 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체육인들이 광복의 감격을 발현(發現)하기 위하여 이 해 10월 광복경축 종합경기대회를 서울운동장에서 개최하였다. 8·15광복과 더불어 독립국가로서의 한국 스포츠는 국제무대에도 진출하기 시작하였는데, 47년 4월 19일 서윤복(徐潤福)이 제51회 보스턴 마라톤대회에 출전하여 우승한 것을 비롯하여, 같은 해에 한국대표 축구팀은 중국 상하이[上海]에 원정하였고, 9월에는 역도선수단이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회 세계역도선수권대회에 출전하였다. 또 이 해 여름에 대한올림픽위원회가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승인을 얻음으로써 한국도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48년 런던에서 거행된 제14회 올림픽대회에 한국선수단은 독립된 대한민국 팀으로 첫 출전을 하였다. 대회에서 비록 금메달은 하나도 차지하지 못했으나 성적은 비교적 좋아 역도 75 kg 급(미들급)에서 김성집(金晟集)과 복싱 플라이급에서 한수안(韓水安)이 각각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국내적으로 모든 스포츠가 활발히 펼쳐졌고 국제적으로 한국 스포츠가 세계에 진출하여 그 전도는 밝았지만, 38선으로 국토가 남북으로 갈리면서 한국 스포츠는 통일된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자유를 찾아 월남한 체육인들이 상당한 활약을 보였는데 최윤칠(崔崙七) 선수는 마라톤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50년 제54회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한국이 1~3위를 차지할 때 3위에 입상하였다.:50년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한국 스포츠는 다시 수렁에 빠졌다. 그러나 해병대를 포함한 국군 4군이 다투어 장병의 사기앙양책으로 스포츠를 장려함에 따라 다행히 명맥은 유지되어 전쟁 후의 혼란기에 올림픽(52년 헬싱키)과 아시아대회(54년 마닐라)에 출전할 수가 있었다. 61년의 5·16군사정변 이후 정책적으로 스포츠를 장려하여 많은 실업 팀이 창단되었는데 이에 따라 대학스포츠도 활성화되었다. 그 영향은 하부구조로 경기 인구를 증대시켰다. 정부의 스포츠 장려와 맥락을 같이하여 대한체육회(大韓體育會) 제22대 회장에 취임한 민관식(閔寬植)은 체육행정기구를 근대적으로 개편한 후 체육발전을 위해 정력적으로 활동하였다. 태릉(泰陵)에 선수촌(選手村)을 건립하여 국가대표급 선수의 전천후 강화훈련이 가능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옥외 인공 스케이팅 링크도 지어 태릉을 한국 스포츠의 메카로 만들었다. 이어 민관식 회장은 소년체육대회(少年體育大會)를 기획하여 72년 6월 서울에서 제1회 대회가 열리도록 하였다. 한국 스포츠가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74년 몬트리올 올림픽대회에서는 레슬링의 양정모(梁正模)가 건국 후 첫 올림픽 금메달을 따냈고, 여자 배구선수들은 3위에 입상, 올림픽 무대에서 구기종목에서 첫메달을 획득했다. 국제 스포츠무대에서 자신감을 회복한 한국 스포츠는 84년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에서 완전히 자신감을 회복하였다. 한국은 김성집(金晟集)을 단장으로 284명의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해 올림픽사상 최다의 수확인 금메달 6, 은메달 6, 동메달 7개를 획득해 세계 140개국 중 처음으로 10위에 입상했다. 유도의 안병근(安炳根)·하형주(河亨柱), 레슬링의 김원기(金元基)·유인탁(柳寅卓), 복싱의 신준섭(申俊燮), 양궁의 서향순(徐香順)이 금메달을 따내 일약 한국 스포츠를 세계 10위로 끌어올렸다. 이 밖에도 여자 농구와 여자 핸드볼이 각각 올림픽 구기종목에서 처음으로 은메달을 차지하여 한국 스포츠의 가능성을 보여준 대회였다. 1983년 6월 4~21일 멕시코에서 벌어진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는 이른바 박종환(朴鍾煥) 사단이라 불리던 청소년축구 팀이 한국 축구사상 처음으로 세계 4강에 진입하였다. 이에 앞서 한국은 1981년 가을 한국민족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인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였다. 9월 30일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48차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일본의 나고야[名古屋]를 52:27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88년의 제24회 올림픽 개최권을 따낸 데 이어 11월 26일에는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아시아경기연맹(AGF:현 아시아올림픽평의회) 임시총회에서 북한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참가대표 전원의 만장일치로 1986년의 제10회 아시안게임 개최권을 획득했다. 양 대회의 서울 유치는 긴장이 감도는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으며, 훗날 한국의 북방외교의 교두보를 마련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특히 한국이 세계에서 16번째로, 동양에서 2번째로 올림픽대회를 유치하게 된 것은 국민들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주는 사건이었으며, 국민 화합에 힘쓰게 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86·88년 분위기에 편승, 국가적 차원에서의 체육정책이 수립되면서 진해선수촌을 비롯해 온양 온천수영장 등 국가대표 훈련시설이 대폭 확충되었으며, 스포츠과학연구소(현 한국체육과학연구원)가 설립되는 등 스포츠 과학화에도 열기가 확산되었다. 86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10회 아시안게임에서는 금메달 93, 은메달 55, 동메달 76개를 따내 사상 처음 일본을 제치고, 중국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이어 2년 후 역시 서울에서 열린 제24회 올림픽대회에서도 금 12, 은 10, 동 11개 등 모두 33개의 메달을 따내 소련·동독·미국에 이어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4위를 차지, 국력을 전세계에 과시하였다. 특히 이 대회에서는 남자 100 m 우승자인 캐나다의 벤 존슨이 금지약물을 복용한 사실을 발견해, 한국 스포츠과학도 세계적인 수준임을 동시에 인증받는 계기가 되었다. 2년 후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제7회 아시안게임에서도 한국은 금 54, 은 54, 동메달 73개를 따내 역시 일본을 누르고 중국에 이어 2위를 차지함으로써 스포츠에서 ‘극일(克日)’을 기록했다. 베이징 아시안게임 후 남북은 평양과 서울에서 각각 한 차례씩 친선축구경기를 가져 남북 간의 긴장을 해소하기도 했으며, 91년에는 각각 탁구와 축구가 남북단일 팀을 구성하는 등 활발한 남북 체육교류를 갖기도 했다. 92년 에스파냐의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제25회 올림픽대회에서는 남자 마라톤의 황영조(黃永祚)가 금메달을 차지한 것을 비롯해 여자 핸드볼이 서울올림픽에 이어 우승, 구기종목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하였고, 금 12, 은 8, 동메달 12개를 획득해 다시 세계 7위에 올라 명실공히 한국 스포츠가 세계 ‘G 7’의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한국 스포츠는 여름종목뿐만 아니라 겨울종목에서도 진가를 드러내기 시작해 94년 3월 노르웨이의 릴레함메르에서 벌어진 제17회 동계올림픽대회에서는 금 4, 은 1, 동메달 1개로 러시아·노르웨이·독일·이탈리아·미국에 이어 세계 6위를 차지, 동·하계 스포츠의 균형적인 성장을 입증하였다. 또 94년 일본 히로시마[廣島]에서 열린 제12회 아시안게임에서도 마라톤의 황영조가 금메달을 따낸 것을 비롯하여 여자 배구가 아시안게임 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획득, 금 63, 은 53, 동메달 63개로 일본을 누르고 중국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등 각종 국제대회에서의 상위 입상으로 국민들의 스포츠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고, 소득수준의 향상으로 인한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생기게 된 80년대부터, 한국 스포츠는 엘리트 스포츠를 벗어나 모두가 참여하는 각종 생활체육시설들이 확충되어 많은 국민들이 직접 체육활동에 참여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과학·기술】
〈8·15광복 이전〉 한국에서 현대적인 과학기술 활동이 싹튼 것은 한말로서, 이때 공업전습소(工業傳習所:후의 중앙공업시험소),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후의 농사시험장)이 일본인에 의해 발족되었다. 이러한 연구기관은 1910년 국권피탈로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게 되자 점차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규모가 확대되고 내용도 충실해졌다. 이리하여 목적은 딴 데 있었겠으나 일본에 의한 근대적 교육제도의 보급, 산업의 진흥 등 부분적인 근대화 작업의 추진과 더불어 과학기술의 토양이 배양되는 듯했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이익을 위한 한국인 회유 방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파행적인 것에 그쳤고, 한국인의 과학기술 연구활동의 기회는 철저하게 제한되어 결국 한국인 자체의 과학기술 능력개발에는 그다지 큰 기여를 하지 못하였다. 1945년 8·15광복 직전에는 과학기술의 고등교육기관으로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의 이공학부와 의학부, 경성고등공업학교·경성의학전문·수원고등농업학교·광산전문 등이 있었고, 연구기관으로는 조선총독부 중앙공업시험소·농사시험장·중앙지질조사소 등이 존재했었다.
〈8·15광복 이후∼1961년〉 8·15광복으로 일본인들이 물러가자 한국의 연구활동은 한동안 공백기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전후(戰後)의 혼란, 국토의 분단, 훈련된 과학기술자의 부족과 시설미비 등으로 시험·연구활동은 부진을 거듭할 뿐이었으며 과학기술 교육도 심한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러한 어려운 환경에서도 독자적인 운영의 기틀이 잡혀가고 우리 손으로 교육된 젊은 과학기술 학도들이 교육을 마치고 과학기술 활동에 활력을 불어넣으려고 할 때 6·25전쟁이 일어났다. 6·25전쟁으로 막대한 연구·실험 시설의 파괴와 인적자원의 손실을 입어 또 다시 과학기술 활동도 중단되었다. 그러나 1953년 휴전이 성립되자 활발한 복구사업에 주력하였고 미국 원조기관의 도움도 있어, 50년대 후반부터는 그 동안 관계기관에서 양성된 많은 과학기술자의 등장과 함께 외국원조에 의한 기재의 도입 이용으로 점차 연구활동이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한편 서울대학을 비롯한 여러 대학의 연구시설도 확충되어 전쟁 전의 상태보다 훨씬 나아진 것은 물론, 의학·화학 등 몇 분야에서는 주목할 만한 연구활동이 진행되었고, 아울러 원자력(原子力)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세계적 추세에 따라 초보적이기는 하나 원자력 사업도 진행되었다. 이 무렵 국립 연구기관은 원자력연구소를 비롯하여 23개에 이르렀는데, 이 연구소들의 관장업무는 산업기술 향상을 위한 연구, 공통적 기초업무의 연구, 국민의 보건·복지의 연구, 국가발전에 관한 연구 등으로 나눌 수 있었으나, 그 중 대부분이 생산품 시험에 그쳤을 뿐 연구·실험 분야에는 손을 대지 못한 실정이었다.
〈1962년∼70년대〉 박정희정부가 경제개발에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개발계획을 세워 조직적으로 밀고 나간 때는 62년이었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66)을 기점으로 하여 한국의 공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과학기술은 이러한 경제개발을 어떻게 지원하느냐 하는 관점에서 국가발전 계획의 일부로서 조직적인 개발이 시작되었다. 따라서 60년대는 준비기간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기간 중 과학기술 발전의 기본법이라고 할 수 있는 과학기술진흥법(科學技術振興法)이 제정되었으며, 이에 따라 67년 과학기술 정책수립 및 조정지원 담당 중앙관서로서 과학기술처(科學技術處)가 발족하였다. 이보다 1년 먼저 66년에 이미 산업기술 개발의 핵심체로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종래의 국립연구소들의 단점을 개선한 새로운 운영방식의 현대적 연구소로 발족되었다. 그러나 뚜렷한 목적의식과 종합적인 실천방안이 제시된 것은 71년에 들어서서 70년대의 과학기술 정책방향이 설정된 때라고 볼 수 있다. 즉, 70년대에 들어와서 70년대 과학기술 개발방향을 ① 과학기술 발전의 기반구축, ② 산업기술의 전략적 개발, ③ 과학기술 풍토조성에 두고 제3~5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기간 중의 과학기술 개발사업을 전개시켜 온 것이다. 발전기반의 구축으로서는 과학기술처의 발족 이래 기술개발촉진법(1972)·기술용역육성법(72)·특정연구기관육성법(73)·국가기술자격법(73) 등이 제정 공포되어 과학기술 발전의 기초를 구축하였으며, KIST의 설립으로 연구개발 체제의 정비에 하나의 전환점을 만들어 놓았다. 개발도상국의 과학기술이 안고 있는 가장 큰 취약점의 하나는 과학기술 인력의 양적 부족과 질적 미흡에 있는데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60년대의 공업화 과정에서 그 수요가 급증하는 과학자·기술자·기능인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정부는 장기 인력수급계획의 수립, 해외두뇌의 유치, 특수 이공계 대학원인 한국과학원(韓國科學院)의 설립, 이공계 대학교육의 진흥, 실업교육과 직업훈련의 확충, 국가기술자격 제도의 창설, 기능대학의 설립 등, 종합적인 인력개발 체제를 갖추고 다각적인 인력 양성과 활용 시책을 펼쳐나갔다. 한편, 이 기간에 국제 기술협력 활동도 크게 강화되었다. 과학기술처는 국제 기술협력의 총괄청의 위치에 서서 국제연합(UN), 국제개발처(AID), 콜롬보계획, 여러 나라와의 기술협력 등을 강화하여 왔으며 나아가서 아프리카·동남아시아 국가 등 개발도상국가들에 대한 기술제공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즉, 한국은 50년 초부터 60년대까지 약 1억 6000만 달러의 기술원조를 받아왔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72년에는 보다 효율적으로 급변하는 기술 수요에 대처하기 위하여 국제기술협력 5개년계획을 입안하였다. 산업기술의 전략적 개발이라는 면에서 살펴보면 60년대는 공업화의 시발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간에는 생산시설과 기술을 거의 전적으로 선진국에 의존하면서 일부 전략적 수입대체산업(에너지·비료·시멘트 등)과 수출지향적 경공업을 육성하였다. 이 기간에 과학기술부문 활동의 특색은 주로 도입된 선진기술이 한국기업의 생산과정에 적용될 때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는 현장문제해결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70년대는 성장단계라 할 수 있다. 이 기간에는 좀더 선택된 전략산업(기계·철강·화공·조선·전자 등)을 육성함으로써 산업국가로서의 기초를 다지는 데 주력하였다. 이 기간의 과학기술부문 활동의 특색은 종래와 같은 당면문제 해결 역할 외에 한걸음 더 나아가서 지금까지 가지고 있거나 또는 선진국에서 도입한 기술의 개량 향상에 힘쓰는 일이었다. 80년대에는 이와 같은 60~70년대에 이룩한 공업화를 기반으로 하여 선진공업국가로의 도약을 위한 자주개발(自主開發) 단계로 들어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80년대〉 전두환 정부가 수립되고나서 80년 11월 과학기술 정부출연연구기관 통합조정안에 따라 과학기술처 산하 5개 연구기관과 타부처 11개 연구기관이 과학기술처 산하 9개 연구기관으로 통합되었다. 81년 10월 과학기술처는 제5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과학기술부문 실천계획을 확정발표하였다. 정부는 기술도약을 위해 82년부터 대통령이 주재하는 기술진흥확대회의를 설치·운영하는 한편, 연구개발의 국제화, 신기술투자의 해외진출, 반도체·항공기 등 12개 핵심 산업기술의 토착화, 고급인력의 대단위 양성, 기업연구소의 육성 및 활용에 주력하였다. 범국가적 기술진흥정책 의지를 구현하기 위하여 대통령주재 기술진흥확대회의의 첫번째 회의가 82년 1월 29일에 개최되었다. 이 확대회의의 실무자급 회의인 기술진흥심의회(技術振興審議會:의장 과기처장관)가 84년 4월 설치되어 법령제정, 기술정보 유통체제구축 등의 문제를 다루었다. 85년에는 ‘2000년대를 향한 과학기술발전 장기계획 기본방향’을 수립·확정함으로써 2000년까지 세계 10위권의 기술선진국을 구현한다는 기본목표 아래 한국에 적합한 중점추진분야를 정하고 분야별 발전목표와 추진전략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기본 방향은 과학기술처장관의 빈번한 경질로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과학기술처 발족 20주년을 맞는 87년에는 정보산업육성을 도모하기 위한 소프트웨어개발촉진법, 해양입국을 겨냥한 해양개발기본법이 제정되었다. 88년에는 주로 대학 등에서의 기초연구 능력향상을 기하기 위한 기초과학 연구지원센터가 한국과학재단 부설로 발족했다. 남극 세종과학기지가 설치됨으로써 세계의 남극관측·연구대열에 끼었다. 산·학·연·관(産學硏官) 협동으로 4MD램 반도체(半導體)를 개발하여 한국 반도체공업 발전을 위한 이정표를 만들었다. 89년에는 대통령 과학기술자문회의가 설치되었고,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분리되어 독립했으며, 한국항공우주연구소가 한국기계연구소에 부설되어 발족했다.
〈90년대〉 2000년대 10위권 진입이라는 이제까지의 기본방향이 뚜렷한 근거제시도 없이 2000년대 7개국 수준 도달 목표로 수정되었다. 그 목표달성을 위해서 정보산업·생명공학·신소재 등 핵심 첨단기술 분야에서 여러 가지 과제를 선정해서 G7계획을 출발시켰다. 한편 90년에는 한·소 과학기술협력 협정, 원자력협력의정서 체결 등으로 국제기술협력이 추진되었다. 91년 사업에서는 과학기술혁신 종합대책의 수립, 새로운 국가기술자문회의의 설치운영, 과학기술진흥기금의 설치 등을 볼 수 있다. 92년에는 기술복권의 판매, 우리별 1호의 발사, 한국기술개발주식회사의 한국종합기술금융회사로의 개편 등 움직임이 있었다. 노태우정부 말기에는 한국인삼연초연구소의 재정경제원 복귀, 한국전자통신연구소의 정보통신부로의 소속 이전 등 일부 연구기관의 개편이 있었다. 김영삼정부가 시작되면서 민간연구소의 수와 투자는 크게 늘어 93년 11월 현재 약 1,600개 기관, 투자액은 약 4조 원에 이르렀다. 정부 대 민간의 투자비는 18:82(92년)였다. 95년 8월 5일 한국 최초의 상용 통신·방송 위성인 무궁화호가 미국 플로리다주 케이프 커내버럴 기지에서 맥도널 더글러스사에 의해 발사되었다.
【교육】 1945년 8·15광복을 맞아 한국의 교육은 일제의 식민지교육에서 탈피하고 국가의 재건과 더불어 새로운 민주교육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일시 퇴보하기도 했지만, 전후(戰後) 어려운 여건 속에서 민주주의 교육이념 아래 교육제도·교육내용·교육방법 등을 단기간에 혁신적으로 발전시켜 왔다. 45년 9월 교육계 대표 10명으로 구성된 조선교육심의회(朝鮮敎育審議會)가 미군정의 교육자문기구로서 발족되었다. 조선교육심의회에서는 초창기의 대한민국 교육에 관한 중요문제를 심의·결정하였는데, 주로 교육이념·교육제도·교육행정·교과서 등에 관한 사항을 입안·결정하였다. 이 심의회에서는 46년 3월 20일 민주교육의 방향을 제시하였는데, 주된 내용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교육이념과 6·3·3·4의 학교제도 및 4실 7국으로 편제한 문교부 직제 등으로서, 이것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민교육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각급 학교교육의 방향과 지표인 교육이념은 교육법(1949. 12. 31 제정) 제1조에 명시되어 있다. 즉,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인격을 완성하는 개인적 이념과 민주국가 발전에 봉사하는 국가적 이념 및 인류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세계적 이념을 제시해 놓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각급 학교에서는 구체적인 교육목적과 교육내용을 정하고 교육에 임하도록 하였다. 68년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을 제정·공포함으로써 교육이념과 교육목적이 재검토되었는데, 근년에 와서는 인간의 존엄성과 주체성을 강조하고 교육의 기회균등과 복지사회를 표방하는 민주교육을 강화하고, 바람직한 인성과 도덕성 및 사회성을 중시하는 인간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교육제도는 8·15광복 직후 미군정 당시 6·6·4제를 일시 채택하였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기간학제로서 6·3·3·4제의 단선형 학제가 정립되었다. 초등교육 6년은 무상 의무교육으로서 80년대에 와서 그 기반이 정착되었으며, 중등교육 전기 3년은 동일계열 중학교 과정이고, 후기 3년은 고등학교 과정으로, 인문계열과 실업계열로 분리하고 있다. 중등교육을 잇는 고등교육은 4년제 대학이 중심적 위치에 있다. 그 밖의 고등교육으로는 2년제 전문대학이 있고, 또 4년제 대학을 수료한 후 진학할 수 있는 대학원이 설치되어 있다. 각급 학교에서 학생에게 직접 제공하는 교육내용은 교육부에서 고시하는 교육과정에 근간을 두어야 하며, 그 교육과정에 의거하여 편찬된 교과서에는 구체적인 교육내용이 포함된다. 학교교육의 기본설계도라고 할 수 있는 교육과정은 8·15광복 이후 6~8년 간격으로 6차에 거쳐 수정·보완되고 개정되면서 교과서도 함께 개편되어 왔다. 최근에 와서 교육부는 유치원부터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까지의 교육과정을 전면적으로 개혁하였는데, 이 새 교육과정의 기본정신으로 국민정신교육의 체계화, 과학기술교육의 강화, 전인교육의 충실 등을 제시하였다. 더불어 새 교육과정의 정신을 충실히 반영한 교과서 편찬을 추진하면서, 교육방법과 평가방법에 관한 교사의 자질을 높여 교육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많은 노력을 경주해 왔다. 그러나 교육이 국가의 백년대계여야 한다는 국민의 염원에 부응하지 못해서 교육부의 교육정책은 조령모개식이라는 비판을 들어왔다. 이는 정치적 중립과 재정적 안정을 기반으로 해야 할 교육정책이 정치적 혼란과 재정적 빈곤의 제약에서 언제나 탈피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8·15광복 이후 교육정책은 의무교육정책·교육자치정책·대학정원정책·교육계획정책·교과서정책·입시정책·실업교육정책 등에서 시행착오를 거듭해 왔다. 교육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교육행정의 중앙기구는 교육부이며, 지방기구는 시·도 교육위원회 및 교육감, 하부조직으로 구·시·군 교육청이 있다. 교육부의 직제는 3실 5국으로 편제되어, 학교교육·평생교육 및 학술에 관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교육부를 비롯한 전체 교육행정조직의 임직원은 국가교육공무원으로 임명제이며, 다만 시·도의 교육감은 당해 교육위원회에서 선출하고, 부교육감은 당해 교육감의 추천을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다. 또 하급교육행정기관인 자치구 교육청의 교육장은 장학관으로써 돕도록 하되, 그 직원은 지방공무원으로 충당하도록 되어 있다. 한국의 지방교육행정은 52년 지방자치제가 실시됨에 따라 시·군을 기초단위로 하는 교육자치제가 실시되어 군에는 법인체로 된 군교육구를 설치하고, 의결기관으로 초등교육을 심의하는 군교육위원회, 집행기관으로 군교육감을 두었다. 약 8년 동안 지속된 교육자치제는 5·16군사정변을 기해 지방행정 일원화 등의 명목으로 폐지되고, 교육행정이 내무행정의 산하로 이관되었다. 그러나 64년 시·도의 교육위원회를 단위로 하는 변형된 교육자치제가 실시되어 91년 초까지 지속되었다. 이 당시의 교육위원회는 7인으로 구성되는 합의제 의결기관으로, 위원 중 2인은 당해 시장·도지사와 교육감이 당연직으로 임명되고, 5인은 문교부장관에 의해 임명되었다. 91년 지방자치에 관한 법률에 의해 실시된 교육자치제에서는 해당 시·도 의회에서 선출한 교육위원으로 교육위원회를 구성하고, 교육위원회에서 시·도 교육감을 선출하는 등 지방교육행정기구의 의결기구와 집행기관이 민주적인 방식으로 성립되어 본격적인 교육자치제를 실현하게 되었다. 정부수립 이후 오늘날까지 정부의 교육예산 비중은 크게 증대하였으나, 교육인구의 양적 팽창에 비하여 교육재정의 증가가 따르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국가예산에 대한 교육예산 비율은 건국 초년인 48년에 8.9 %, 58년 10.8 %, 68년 17.1 %, 82년 20.8 %, 90년 20.4 %, 93년 19.8 %를 차지하였고, 총예산규모는 7조 3972억 원(93년)에 달하였다. 교육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82년부터 교육세를 신설하여 시행하고 있다. 의무교육의 연한은 현재 초등학교 6년에서 중학교까지 9년으로 연장하도록 확정되어 있으며, 84년부터 농촌지역에서 시작, 점차 확대 실시하고 있다. 유치원 취원율은 70년의 1.3 % 수준에서 94년에는 38.7 %로 상승하였으며, 교육부에서 유아교육정책을 강화하여 유아교육을 확대시켜가고 있다. 사회교육은 국가가 평생교육을 진흥해야 한다는 헌법 31조 5항에 힘입어 활발히 육성되고 있다. 특히 평생교육은 교양교육·통신교육·직업교육 등을 근간으로 사회교육의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교육은 급변하는 현대사회 속에서 교육인구의 양적 팽창과 교육의 질적 저하 문제에 당면해 있다. 이와 같은 당면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교육환경을 개선하고 교원의 자질을 향상시키는 일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8. 국토개발과 그 보전
【국토개발의 배경】 한국은 1960년대를 전환점으로 하여 국토개발을 국가의 중요정책으로 추진하였다. 제도적으로는 63년에 제정한 국토건설종합계획법이 모체가 되어 체계적인 국토개발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법을 제정하기 전에는 국토개발이 임기응변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특히 일제의 강점과 6·25전쟁에 의한 사회간접자본 시설의 파괴에 따라 새로운 국토개발의 진로를 모색하게 되었다. 국토개발정책의 추진 배경은 첫째, 국토이용의 불균형을 시정하는 것이고, 둘째는 농업구조로 편향된 산업구조를 공업구조로 바꾸는 일이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즉 국토분단에 의하여 제기된 남북 간의 개발 격차를 조정하는 것과 농업위주로 단순화되어 있는 산업구조를 개선하여 공업화함으로써 국토이용의 효용성을 제고시키는 정책이 필요하였다.
【국토개발의 의의】 국토는 고정성·불증성(不增性)·불변성·수입불가성 등과 같은 특성을 가진다. 또한 토지가 가지는 고유한 개발 입지의 가치성과 국토의 공간적 가치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국토개발정책은 국민생활과 생산활동에 관한 종합적인 영역의 이용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정책이다. 국토개발의 의의는 국토이용의 생산성 제고, 국토이용의 편익 증진, 입지의 효율적 선택, 용도 간의 이용경합에 관한 조정과 기능의 부여 등을 합리화하는 데 있다.
【제1차 국토종합개발계획】 이 계획은 한국에서 최초로 시행한 국토종합개발계획이다. 계획기간은 1972~81년까지 10년 간으로 70년대의 국토개발 기초 기반을 구축하는 데 획기적인 기여를 하였다. 정부가 주도한 계획으로 1971년 10월 27일 대통령공고 제26호로 공고되었다. 이 계획을 작성하는 데에는 국제연합개발계획 (UNDP) 특별기금으로 프랑스의 오탐(OTAM)팀이 1970년부터 2년 간 작업을 수행하여 개발전략과 부문별 개발 방향을 결정케 하는 데 기여하였다.
〈내용〉 계획의 기본목표는 국토이용관리의 효율화, 개발기반의 확충, 국도포장, 자원과 자연의 보호·보전, 국민생활환경의 개선에 두었다. 이 계획의 추진방식은 거점개발방식이다. 이는 서울과 부산 축에 집중되어 있는 인구와 공업기능을 고르게 분산하도록 전국에 대규모공업단지를 구축하고, 교통·통신·수자원 및 에너지공급망을 정비하며 부진지역 개발을 위해 지역기능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각 지역의 자립성을 고려하여 전국토를 8개의 권역으로 구분하고, 각 권역에 맞는 기능을 부여하여 개발하도록 하였다. 거점개발은 이 계획이 지닌 특성으로 공업거점을 동남해안 지역에 형성하여 전국 공업생산액의 33 %를 이 지역에 배치하도록 하였다. 포항·울산·온산·부산·거제·창원·마산·진주·광양·여천을 잇는 공업지대를 새로운 공업거점으로 형성하려는 계획이다.
〈성과〉 공업용지 231 km2가 새로 조성되었으며, 2,324 km2의 경지정리가 이루어졌다. 교통시설로는 도로 8,750 km, 고속도로 590 km, 도로포장 1만 1390 km를 새로 건설하였으며, 항만 하역능력은 6864만 2천 톤으로 확대되었다. 주택 1164만 1천 호가 건설되었으며, 상수도시설 438만 7천 톤/일이 증설되었고, 수자원 81억 2천만 톤을 추가공급하는 등의 성과가 있었다.
〈파생된 문제점〉 이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새로 나타난 문제점은 첫째, 공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파생한 문제로서 기간 중 도시인구가 1043만 2천 명이나 급증되어 이에 따라 주택·상하수도 등 도시기반시설의 부족현상이 나타났다. 둘째, 거점개발에 따른 문제로 국토의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었다. 특히 양극화 현상은 매우 심각하여 서울과 부산 간을 연결하는 국토의 약 22 %의 면적에 1980년 기준으로 전국인구의 59.5 %, 공업생산액의 81.6 %가 집중하게 되었다. 이는 70년대 초보다도 훨씬 높아진 수준으로, 동남해안 공업벨트에 당초계획보다 8.2 %나 높은 41.2 %의 공업생산 비중을 나타냈다. 셋째, 공업화 과정에서 배태한 환경공해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여 환경문제가 크게 부각되었다. 이는 공업국가의 공통적인 문제점으로 70년대를 전후하여 환경청의 설립에 대한 논의가 보편화되었다.
【제2차 국토종합개발계획】 기간은 1982~91년이며, 1981년 12월 31일 대통령공고 제80호로 공고되었다. 이 계획의 수립은 78년 전문연구기관인 국토개발연구원을 설립하여 수행하였다. 개발이념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통일기반조성, 국제경제권으로의 역할신장, 국토의 균형개발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70년대에 이룩한 개발의 성과를 확산시킴으로써 국토개발의 균형발전을 유도하는 데 이상적인 목표를 두었다. 한편 이 계획은 성장거점도시 육성, 지역경제권 형성의 구상 등 새로운 지역자립권의 인구정착 기반을 조성하는 것을 계획의 기본틀로 제시하였다. 이 계획은 87년에 수정하였는데 그 이유는 수도권 인구의 계속적인 증가에 따른 문제 해소를 위한 지역경제권 형성의 구상과 국제적 지위향상을 위한 새로운 모색 등에 있었다. 즉 86년의 아시안게임, 88년의 서울올림픽 개최를 위한 국토개발 기반의 구축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새로운 이론의 등장〉 국토개발정책을 시행하기 위하여 제2차 국토종합개발계획에서는 첫째로 성장거점도시육성이론을 제시하였다. 이 이론은 낙후지대에 성장거점이 될 수 있는 중심도시를 지정하여 지원하고 개발하기 위한 정책으로, 15개의 성장거점도시를 지정하여 중점 육성·지원하도록 함으로써 기존의 서울~부산 축에 집중된 기능을 분산시키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이는 제도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관계부처의 이해상충으로 87년에 작성한 제2차 국토종합개발계획 수정계획에서 제외되었다. 둘째는 지역생활권 조성이다. 지역생활권은 지역단위로 자립성을 확보하고 이를 통하여 지역적으로 안정화된 생활권을 마련함으로써 취업권이 자생적으로 형성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지역생활권의 구상은 기본적으로 지역적 불균형을 시정하고 인구의 지방정착 유도를 위한 국토정책으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 정책 역시 광역권 개념과 상충하여 대권 중심지인 지역경제권 개념으로 변경되었다. 셋째는 지역경제권 형성이다. 이는 수도권에 대하여 각 권역을 대권 위주로 재편성하고 2개도 정도의 지역을 묶어서 하나의 지역경제권으로 조성하려는 것이다. 지역경제권의 기본틀은 기본적으로 수도권정비 세부시행계획에 따라 각 지역경제권이 수도권의 기능을 분담하는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내용〉 인구의 지방정착 부문에서 전국을 28개의 지역생활권으로 구분하였으며, 성격과 규모에 따라서 5개의 대도시생활권, 17개의 지방도시생활권, 6개의 농촌도시생활권으로 각각 계층화하였다. 대도시생활권은 인구가 장차 100만 명 이상이 될 것이 예상되는 서울·부산·대전·대구·광주를 중심으로 하는 생활권이며, 지방도시생활권은 춘천·원주·강릉·청주·충주·제천·천안·전주·정읍·남원·순천·목포·안동·포항·영주·진주·제주 등 지방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생활권이다. 농촌도시생활권은 영월·서산·홍성·강진·점촌·거창 등을 중심으로 하는 농업적 기반이 강한 낙후지역의 생활권이다. 성장거점도시 육성은 대전·광주·대구·원주·강릉·청주·천안·전주·남원·순천·목포·안동·진주·제주 등 15개 도시를 대상으로 지정하였다. 이들 도시의 인구는 1980년 509만 1천 명에서 91년에는 848만 명이 되도록 육성목표를 세웠다. 국토자원개발 부문에서는 충주댐·홍성댐·임계댐·합천댐·임하댐·함양댐·명천댐·주암댐·낙동강하구언·금강하구언 등 10개 다목적댐의 건설을 목표로 하였다. 국민생활환경 부문에서는 10년 간 354만 호의 주택을 건설하여 공급하도록 하였으며, 이는 후반기에 200만 호 건설을 목표로 세워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상수도시설은 1583만 9천 톤/일을 목표로 하여 13개의 광역상수도망을 계획하였다. 특히 환경시설로서 하수도시설은 76만 9천 톤/일의 목표를 세워 서울·의정부·구리·대전·대구·인천·안산·청주·춘천·과천·전주·부산·구미·광주·경주 등에 하수종말처리장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교통시설은 고속도로건설 470 km, 고속도로확장 466 km, 국도확장 326.8 km, 서울~부산 간 고속철도 411 km의 건설을 계획하였다. 한편 대도시교통시설은 수도권전철 110.9 km, 서울지하철 142.33 km, 부산지하철 46.1 km를 건설하도록 목표를 세웠다. 공업단지는 계획입지 175.8 km2, 자유입지 132.6 km2를 계획하였다.
〈성과〉 인구의 지방정착유도 부문에서는 성장거점도시 육성 및 지역생활권조성 정책 등을 통하여 계획목표를 달성하려 하였으나, 이에 적합한 지원시책이 뒤따르지 못하여 중간단계에서 수정되었다. 또한 인구지방정착유도 시책의 주요 골격이 되는 수도권정비계획은 기본계획이 수립되었으나 세부시행계획이 마련되지 못하는 등 그 후속정책이 상세화되지 못하였고, 제주·태백산·다도해·88올림픽고속도로 주변지역 등 특정지역의 조정, 지정 및 개발과 전주권·광주권 지역개발사업을 추진하였다. 1980~90년의 전국의 증가인구 608만 4천 명 중 87.1 %인 530만 2천 명이 수도권에 집중하여 광역도시권 정비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며, 이에 따라 91년에 도시계획법을 개정하여 광역도시계획을 위한 구역의 지정(20조 4항), 계획의 입안(11조), 광역시설의 설치관리(20조 5항) 등의 조항을 신설하였다. 개발가능성의 전국적 확대부문에서는 대규모 공업단지 조성을 지양하고 적정규모의 중소공업을 지방도시에 분산배치하였고, 농공지구와 지방공업단지를 확대하였으며, 91년까지 452.4 km2를 공업지역으로 지정하여, 이 중 61.8 %에 이르는 272.9 km2의 공업용지를 조성하였다. 또한 북방정책 등 국제적 여건변화에 장기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서해안에 6개 지구 70.33 km2, 남해안에 2개 지구 35.72 km2 등 대규모공업기지를 신규로 배치하였다. 교통부문 투자는 국토개발 총투자의 9~11 % 수준으로 도로·항만·철도·공항 등에 대한 국토하부구조 부문에 대한 투자가 확대되었으나 수요에는 따르지 못하였다. 교통량의 수요확대에 대응하여 전반기에는 지하철 건설에, 후반기에는 도로개발에 집중투자가 이루어졌다. 시회간접자본 시설의 애로타개를 위해서는 교통망의 재편과 관련된 투자를 획기적으로 증대하게 되었다. 항만시설의 확충을 위하여 부산항·인천항 등 기존 항만의 단계별 확충사업을 계속하였고, 아산항(12선좌), 군장(群長)신항 등은 94년 개항을 목표로 개발을 추진하였다. 기간 중 고속도로 353.2 km를 신규로 건설하고, 325.4 km를 확장하였다. 공항은 수도권 신국제공항을 영종도~용유도 간에 건설하기로 입지를 지정하였고, 이를 효율적으로 지원하기 위하여 수도권신공항건설촉진법(1991)을 제정하였다. 대도시 교통은 서울이 제2기 서울지하철 총 152.3 km(5~8호선)의 건설에 착수하였고, 부산은 1·2호선 60.2 km를 착공하여 95년 완공할 예정이며, 대구는 1호선 27.6 km를 91년 말에 착공하였다. 철도는 경부고속철도(411 km) 건설공사를 92년에 착공하였다. 국민복지수준의 제고는 ‘주택 200만 호 건설계획’에 따라 주택의 양적 공급을 확대하여 주택가격안정 및 주택투기억제 등을 유도하였으며, 주택의 질적 수준도 크게 높아져 주택 평균규모는 68.4 km2에서 81.5 m2로, 1인당 주거면적은 9.7 m2에서 14.0 m2로 확대되었다. 수도권의 분당·일산·평촌·산본·중동 등 5개 신도시에 50.1 km2의 택지를 공급하는 등, 전국에 총 194.7 km2의 택지를 조성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택부문에 대한 과투자는 기술개발 및 사회간접자본 등 다른 부문에 대한 투자를 위축하기도 하였으며, 부실공사·미분양아파트 증가 등의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상수도 시설용량은 91년 현재 1만 6895 톤/일로 확대되었고, 급수지역도 572개의 도시로 확대되었다. 광역상수도시설은 수도권 Ⅰ·Ⅱ계통을 비롯 9개 계통이 완공되었고, 금호강·섬진강·주암댐·수도권의 Ⅳ계통 등 4개 지역 광역상수도를 건설 중이다. 하수도의 보급률은 기간 중 6 %에서 35.7 %로 대폭 향상되었으며, 하수처리시설용량은 540만 톤/일로 확충되었다. 국토자연환경보전 부문은 개발위주 정책의 추진에 따라 환경이 점차 악화되자, 깨끗한 환경, 맑은 물, 맑은 공기 등을 위한 환경보전의 새로운 시책이 요구되었다. 86년에 환경의 보호관리를 위하여 폐기물처리법이 제정되었고, 89년에는 환경정책기본법·수질환경보전법·대기환경보전법·소음진동규제법·환경오염피해분쟁조정법·유해화학물질관리법 등 7개의 관련법을 제정하였다. 기간 중에 충주댐(78~85)·합천댐(83~88)·낙동강하구둑(83~87) ·금강하구둑(83~90)·주암댐(83~91)이 완공되었고, 임하댐(84~92)·남강댐(87~95) 보강사업과 마산~금호만 하구둑 건설사업을 추가하여 추진 중이다. 지역적 물부족 현상을 해소하기 위하여 중규모 댐 건설에 역점을 두고 밀양댐·용담댐·운문댐·횡성댐·부안댐 등의 건설을 착공하였다. 용수공급량은 기간 중 127억 4300만 톤이 증가되어 계획목표를 초과 달성하였다. 대단위 농업종합개발사업은 91년 현재 임진지구·남강지구·낙동강지구·김포지구·서산지구·미호천(Ⅰ)지구·논산지구·금강(Ⅰ)지구 등 8개 지구 999.4 km2의 사업이 완료되어 완공면적 기준으로 총계획 1,475 km2의 67.8 %를 추진하였고, 농지는 기간 중 974 km2가 감소되어 계획면적 243 km2의 4배나 감소하였다.
〈파생된 문제점〉 국토개발의 추진과 지역분산정책에도 불구하고 서울·부산의 양대도시권에 인구와 공업의 집중도가 크게 높아져서 집중이 가속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88서울올림픽을 치르기 위하여 기존의 시책을 완화하는 등의 이유로 서울에 대한 집중화가 지속되었다.
【제3차 국토종합개발계획】 기간은 92~2001년이며, 1992년 1월 8일 대통령공고 제117호로 공표되었다. 계획의 기조는 지역균형개발, 국토이용체제의 확립, 국민복지향상과 국토환경보전 및 통일기반을 조성하는 데 두고 있다. 그리고 수도권집중형의 국토골격구조를 지방분산형으로 분산시킴으로써 종래까지 억제정책에 치우친 소극적인 개발을 지양하여 도시·농촌에 각각 적합한 개발을 추진하도록 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아산·군장·대불·광양 등 서해안 중심의 신산업거점을 형성하여 앞으로 조성될 공업지의 60 %를 이 지대에 배치할 계획이다. 제3차 국토종합개발계획을 추진하기 위하여 실행계획에서는 광역권개발을 지정하여 추진하도록 하고 있고, 전국토의 균형개발을 위하여 지역균형개발법에 따라 개발촉진지구를 각 도의 10 % 범위에서 지정하여 연차적으로 개발하도록 하였다. 광역개발권역의 지정은 94년에 제정한 지역균형개발법에 의거하여 광역시와 그 주변지역, 공업단지와 그 배후지역, 여러 도시가 상호인접하여 동일한 생활권을 이루고 있는 지역 등에 대하여 권역을 지정하도록 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정부는 7개의 광역권을 우선 지정하여 개발하도록 하였다. 권역지정 대상지역은 부산광역권역·대구광역권역·대전광역권역·아산만광역권역·군산~장항광역권역·광주~목포광역권역·광양만광역권역 등이다. 이들 지역은 95년까지 권역을 지정하고 개발계획을 구체화하여 계획을 추진하며, 광역권역은 국토개발의 지방거점이 되게 하여 지역개발의 구심점을 형성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광역시설의 설치와 지역 간의 공동계획 추진이 용이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개발체계를 개편하도록 하였다. 또한 개발촉진지구 지정에서는 지역균형개발법에 따라 각 도에서는 낙후지역을 여러 개의 개발촉진지구로 지정·개발할 계획이다. 개발촉진지구는 낙후지역형·도농통합형·선진지역형 등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개발촉진지구는 각 도의 면적 중 10 % 범위에서 연차적으로 지정하여 개발하도록 하고 있다.
〈추진전략〉 국토개발의 추진전략은 지방의 육성과 수도권의 집중억제를 지속적으로 수행하며, 신산업지대의 조성을 통하여 산업구조를 고도화하고, 통합적 교류망을 구축하여 유통에 효율을 기하고, 국민생활환경 부문에 투자를 확대하며, 국토개발계획 집행력 강화를 위하여 제도를 정비, 남북교류지역의 개발과 관리를 통하여 추진하도록 하고 있다. 지방의 육성과 수도권 집중의 억제는 지방도시와 농어촌을 집중 육성하여 인구와 산업의 자발적인 지방정착을 유도하며, 이를 위하여는 지역실정에 적합한 신도시를 배치하여 개발하고 수도권 집중을 지속적으로 억제하도록 하고 있다. 국토의 중부 및 서남부 지역에 첨단산업 중심의 신산업지대를 조성하여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꾀하며, 국제화·개방화에 대비하여 산업입지 및 산업구조의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도록 하고 있다. 국민생활환경 부문의 투자확대는 상대적으로 침체해 있는 국민생활환경 부문인 주택·상하수도·여가시설 등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여 생활의 질적 개선을 도모하고, 환경보전과 관련된 제도를 국내외의 환경여건 변화에 맞게 조정할 계획이다. 국토이용 집행력 강화는 국토개발의 집행효율을 제고하기 위하여 국토개발에 소요되는 투자재원을 확대하고, 민간의 참여와 지방화 시대에 부응하기 위한 자율적 개발계획의 집행 등을 유도하도록 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는 실제적으로 중앙·지방·민간이 담당할 역할분담에 관해 구체적으로 조정하도록 하였다. 남북교류지역의 개발관리는 통일에 대비하여 남북교류 공간을 조성하고, 단절되어 있는 남북교류망을 복원·개발하며, 수자원·환경·관광·자원 등 남북공동개발에 필요한 기초기반을 조성하도록 하고 있다.
〈내용〉 지방분산형 국토골격 형성의 주요내용은 수도권으로 유입하는 인구를 억제하는 것으로서 지방대도시의 성장관리를 위하여 부산·대구·광주·대전을 분담기능에 따라 육성하고, 업무단지를 조성하도록 하는 것이다. 신도시는 신산업지대·국민여가지대, 간선교통망·주택단지·환경보전 등과 연계하여 개발한다. 기간 중 도시화율은 성숙단계에 진입하여 2001년에는 전국의 도시화율이 86.2 %가 될 것으로 예상되므로 도시인구 수요에 맞는 도시관리가 요구된다. 산업의 균형배치와 고도화를 위하여는 아산만~대전~청주, 군산~전주, 목포~광주~광양만 등에 신산업지대를 조성할 계획을 세워 추진하고 있다. 이 지대에는 신규로 늘어날 공장부지의 60 %를 배치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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