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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한국의 속국이었음을 증명하는 문서 발견

한부울 2006. 10. 7. 11:47
 

[본문스크랩] 일본이 한국의 속국이었음을 증명하는 문서 발견

2006/09/01 23:54


교토대 고고학과 야나기사와 교수팀이 발견한 고지키(고서기) 초본의 해석이 일본학계를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애초에 실체가 불분명한 일본 고대사를 정립해줄 사료로서 각광받았던 고지키 초본 (고지키 히미노리혼반)의 최종해석의 상당수가 일본인이 한반도의 지배를 받았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고지키 초본은 가라키 (가락국=가야)에서 갑회년 (10년)에 1번씩 총축을 파견하여 왜 땅을 평정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정작 문제가 되는 부분은 임나일본부 문제이다.

고지키 초본에는 임나부의 상관에 여러 왜 부족 수장들이 모여 부족별 교역, 공물량을 협의했고 가라키왕이 이를 승인해주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임나일본부가 일본사학계가 주장해온 것과 같이 일본이 한반도에 설치한 식민통치기구가 아니라 가야왕의 주제하에 왜 땅의 여러 추장들이 모여 무역문제를 상의하는 통상회의 본부였음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이다.


그러나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초본 36장의 이 구절 때문이다. 야무용과 이중의 장이 세력이 커 서로 다투니 가라키왕이 이를 말리며 구다라에 공물을 보내어 중재를 요청했다...


즉 왜 땅의 유력 추장들이 교역량을 놓고 서로 싸우자, 백제의 영향권 하에 있던 가야왕이 백제에 중재를 신청한 것이다.


한 마디로 일본은 가야에 기생한 하청식민부족들이 난립하던 땅이었고 그 가야는 백제의 속국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가장 충격적인 부분이 남아있다.

바로 박제상에 관한 부분인데, 우리는 신라의 중신 박제상이 고구려 등에 볼모로 있는 왕자를 협상으로 구해낸 후 일본의 볼모인 왕자는 협상이 통하지 않자, 몰래 탈주 시킨 후 처참한 고문 끝에 순절했다고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니었다.


박제상이 들른 왜는 왜가 아니라 가야였다.

즉 그때까지만 해도 왜는 일본을 칭하는 말이 아니라, 일본 및 동남아 국가 등과 교역이 활발하며 한반도의 기타 민족과 이질적이었던 가야국 및 가야국의 세력 하에 있던 일본의 군소 부족 즉 문신을 한 땅딸하고 가무잡잡한 인종을 통칭하던 말이었으며 박제상은 왜가 아닌 가야국에서 순절한 것이었다.


그리고 왕자가 가야에 볼모로 잡혀있었던 이유는 가야가 백제의 속국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신라가 왕자를 찾기 위해 병사를 일으키더라도 백제 본토가 아닌 가야 땅에서 전쟁을 치르려는 이유에서 가야 땅에 볼모를 둔 것이었다. 가야가 박제상을 왜로 보내어 죽인 것도 처형 책임을 왜로 돌려 백제의 응징을 피하려 했던 떄문이 아닐까 싶다.


그 증거는, 이 문구이다.

신라재상이 왕자를 탈출시키니, 신라군 8천이 산 아래에 운집하여 호위했다.

신라재상을 죽이자 (신라)장군 형분이 3000 병사를 몰아 시신을 찾으러 왔는데 가라키왕이 거짓으로 고하기를 왕자는 재상과의 협의로 신라에 돌려보냈거니와 구다라의 눈을 피하고저 밤중에 몰래 말을 달려 보냈던 것입니다. 재상은 바닷길로 신라로 돌아가려하다가 풍랑을 만났는데 우연히 왜(일본)로 표류하였다가 분별없는 무리들에게 살육당한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