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규원사화(진본번역)

한부울 2006. 9. 23. 21:23

규원사화(揆園史話)

1675년(숙종 2)에 북애노인(北崖老人)이라는 자호를 가진 야인이 쓴 역사책인데

서문/조판기(肇判記)/태시기(太始記)/단군기(檀君記)/만설(漫說)로 구성되어 있다.

"규원"이라는 책 이름은 작자가 부아악(負兒岳:지금의 북한산) 기슭에 지은 자신의 서재 이름에서 딴 것이다.

작자는 서문에서 이 책을 쓴 동기가, 과거시험에 낙방한 자신의 울적한 심기를 달래려는 것과 왜란과 호란을 겪은 뒤의 민족적 울분 속에서 민족주체성 재건을 위한 국사(國史)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왜란과 호란을 겪은 뒤에 여러 사서(史書)가 출간되어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있었지만, 작자는 유학자들의 사관은 주체성 없는 존화 사대사상에 젖어 있다고 비판하면서, 유학자들이 외면해온 고기(古記)들을 참고하여 우리나라 상고사를 재구성한 것이다.

작자가 참고한 책은 고려 말의 이명(李茗)이 지은<진역유기 震域遺記>인데, 이 책은 고초 발해 세자 대광현 등 그 유민이 가져오거나 쓴 <조대기 朝代記>를 토대로 한 것으로

<삼국유사>보다 훨씬 더 민족 주체적 사관에 따라 쓰여진 사서이다.

<조대기>는 실재했던 고기임이 <세조실록>을 통해서 확인되므로, <진역유기>라는 책 역시,

경희대학교 사학과 조인성 교수 등의 반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수설은 대체로 긍정설을 취하고 있다.


조판기에는

환인(桓因)이라는 일대주신(一大主神)이 천지를 개창하고, 환웅천왕(桓雄天王, 일명 神市氏)이 태백산에 내려와 신정을 베푸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태시기에는 환검 이전, 환웅의 역사를 쓰고 있다.


단군기에는 환검(桓儉)으로부터 고열가(古列加)에 이르는 47대의 왕명과 재위기간, 그리고 각 왕대의 치적이 서술되어 있는데, <한단고기>의 <단군세기>와는 그 재위 년대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만설에서는 유학자들의 사대주의를 통렬히 비판하면서 민족의 주체의식을 고취하고 있는데,

우리나라가 만주를 잃어버린 뒤 약소국으로 전락한 것을 개탄하면서,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한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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揆園史話



北崖子旣應擧而不第, 乃 然投筆, 放浪[於]江湖, 凡數三歲, 足跡殆遍於 域, 而深有蹈海之悲. 時經兩亂之後, 州里蕭然, 國論沸鬱, 朝士 食, 野氓懷 . 於是北崖子, 南自金州 月城, 歷泗  熊川, 復自漢山入峽而踏濊貊舊都之地; 北登金剛之毘盧峰, 俯看萬二千峯簇擁 列. 乃望東海出日而泣下, 眺萬丈瀉瀑而心悲, 慨然有出塵之想. 更西遊至九月山, 低徊於唐莊坪, 感淚於三聖祠; 及自平壤到龍灣, 登統軍亭, 北望遼野, 遼樹 雲, 點綴徘徊於指顧之間, 若越一葦鴨江之水, 則已更非我土矣. 噫! 我先祖舊疆, 入于敵國者已千年, 而今害毒日甚, 乃懷古悲今, 咨(差)[嗟]不已. 後還至平壤, 適自 朝家有建乙支文德祠之擧, 卽高句麗大臣, 殲隋軍百餘萬於薩水者也. 經月餘, 至松京, 始聞荊妻之訃, 急遽還歸居家, 益復寂寞. 於是 揆園書屋於舊居之南 負兒岳之陽, 聚諸家書, 廣采其說, 意欲以此終餘生焉.


북애자는 이미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니, 이에 탄식하며 붓을 던지고 강호를 방랑한지 무릇 삼년에 발길은 이 나라 구석까지 닿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때로는 바다에 이 발길을 내어 맡길까하는 비탄에 젖기도 하였다. 때는 두 난리를 겪은 뒤라 온 나라가 어수선하고, 국론은 들끓어 올라 조정과 선비들은 끼니를 거를 만큼 경황이 없었으며, 뭇 백성들은 가슴에 그저 분노만을 품고 있었다.


이에 북애자는 남쪽의 금주(金州)와 월성(月城)으로부터 사비(泗 )와 웅천(熊川)을 거치고, 다시 한산(漢山)에서 골짜기로 접어들어 예맥의 옛 도읍을 밟았으며, 북쪽으로 금강산의 비로봉에 올라서서 빽빽이 들어차 가파르게 늘어서 있는 일만 이천의 봉우리를 굽어보았다. 이에 동해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니 눈물이 절로 흐르고, 만길 높이로 떨어지는 폭포를 쳐다보니 마음은 슬픔에 잠기는데, 그 복받친 마음에 속세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다시 서쪽으로 노닐며 구월산에 이르러 고개를 늘이고 당장평(唐莊坪)을 배회하자니 삼성사(三聖祠)에선 눈시울이 붉어졌다. 평양으로부터 용만(龍灣)에 이르고 통군정(統軍亭)에 올라 북녘으로 요동의 들판을 바라보니 요동(遼東) 벌판의 나무와 계주( 州) 하늘의 구름은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 드문드문 흩어져 노닐고 있는데, 작은 거룻배로 압록의 물길을 건너고자 하나 이미 갈마들어 우리의 땅이 아니구나. 슬프다! 우리 선조들의 옛 강역이 적국의 손에 들어간지 이미 천여 년에 이제 그 해독이 날로 심해져 가니, 옛날을 그리워하며 지금을 슬퍼함에 그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구나.


그 후 돌아오는 길에 평양에 이르니 마침 조정에서 을지문덕의 사당을 세우는 행사가 있다 하는데, 곧 고구려의 대신으로서 살수(薩水)에서 수(隋)나라 군사 백여 만 명을 무찌른 분이다. 한달 남짓 지나 송경(松京)에 이르러 비로소 아내의 부음을 듣고 급히 집으로 돌아 왔으나 더욱 적막할 따름이라, 이에 옛집의 남쪽이며 부아악(負兒岳)의 양지 바른 곳에 규원서옥(揆園書屋)을 짓고,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책을 모아 그 학설을 널리 연구하는 것으로 여생을 마치고자 하는 마음이다.


夫以力服人者, 力窮而人叛; 以財用人者, 財竭而人去. 力與財, 余旣不能有焉, 而亦不曾冀求. 觀乎! 荒凉北邙坂下, 曾何力與財之有乎! 且名者( )[實]之賓也, 余將慕名而爲賓乎! 名亦不足願. 昔者勿稽子有言, 曰: [天識人心, 地知人行, 日月照人意, 神鬼鑑人爲.] 夫! 人之善惡正邪, 必爲天地神鬼之所照臨監識, 則斯已矣. 寧向  人世, 汲汲然競寸銖之名利哉! 余決不爲. 惟存性養志, 修道立功, 以遺效於來世後孫, 則雖終世無知者, 亦可無 , 或萬世之後而一遇知其解者, 是旦暮遇之也. 觀夫閃忽千年往事, 曾復何向  人世, 爭寵辱於石火光中耶!


무릇 힘으로 남을 복종시키고자 하는 자는 그 힘이 다하면 사람들로부터 배반을 당할 것이며, 재물로써 남을 이용하고자 하는 자는 그 재물이 다하면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을 것이다. 권력과 재물은 이미 내가 가지지도 못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일찍이 바라거나 구한 적도 없다. 보라! 황량한 북망의 산비탈 아래에 어찌 권력이나 재물이 있겠는가! 더군다나 명예란 것은 참된 것의 손님과도 같은데, 내가 명예를 그리다가 도리어 손님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인가! 명예란 것 역시 내가 족히 바랄 것이 되지 못한다.


예전에 물계자(勿稽子)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은 사람의 마음을 알고, 땅은 사람의 행실을 알며, 해와 달은 사람의 뜻을 내려 비춰보고, 귀신은 사람의 행위를 내어다 본다] 하였으니, 무릇 사람의 선하고 악함과 바르고 사악함의 그 모든 것은 반드시 천지신귀(天地神鬼)가 내려 비춰보고 살펴 아는 것이 곧 그와 같을 따름이다. 어차피 백골로 향하는 인생에서 어찌 그리도 조급하게 한 푼어치의 명리를 가지고 다툴 것인가! 나는 결단코 그리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타고난 성품을 간직하여 뜻을 기르고, 올바른 수행의 길을 닦아 공을 세움으로서 다음 세대의 후손들에게 본보기로 남고자 하는 것이니, 비록 세상이 다하도록 알아주는 자가 없다 할지라도 성냄이 없을 것이나, 혹시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이 변명을 이해하는 이를 마주치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내가 절박하게 접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무릇 섬광과도 같은 천년의 지난 일들을 바라보며, 한낱 백골로 향하는 부싯돌의 불빛과도 같은 인생에서 어찌 또 다시 명예와 치욕을 다투겠는가!


余嘗論之, 朝鮮之患, 莫大於無國史. 夫《春秋》作而名分正,《綱(耳)[目]》成而正閏別;《春秋》.《綱目》者, 漢士之賴以立者也. 我邦經史, 屢經兵火, 散亡殆盡. 後世孤陋者, 流溺於漢籍, 徒以事大尊周爲義, 而不知先立其本, 以光我國, 是猶藤葛之性, 不謀其直而便求纏絡也, 豈不鄙哉! 自勝朝, 以降貢使北行累百年而不爲之恨, 猝以滿洲之 爲不俱戴天, 則獨何故耶. 噫! 雖然, 若天加선寧廟十年之壽, 則卽可陳兵於遼.瀋, 馳艦於登.萊, 縱敗 旋至而亦不失爲近世之快事也. 乃天不假만聖壽而終無其事; 幸耶? 不幸耶? 余則悽切而已矣.


내가 일찍이 항상 거론하던 바와 같이, 조선의 근심 가운데 나라의 역사가 없는 것 보다 더 큰 것은 없다. 무릇《춘추(春秋)》가 저작되자 명분이 바로 서고,《강목(綱目)》이 이뤄지니 바른 계통과 가외의 계통이 나누어지게 되었으나,《춘추》나《강목》같은 것은 한(漢)나라 선비들이 자기들의 사상에 의거하여 정리한 생각일 뿐이다. 우리나라의 경전과 사서는 누차의 병화를 거치며 흩어져 거의 없어졌다. 후세에 고루한 자들이 한나라 서적에 탐닉하여 헛되이 사대(事大)와 존화(尊華)만을 옳다고 여길 뿐, 먼저 근본을 세우고 이로서 우리나라를 빛낼 줄은 알지 못하니, 마치 칡이나 등나무의 성질이 곧바르게 나아가고자 하지는 않고 도리어 얽히고 비틀어지는 것과도 같음에 어찌 천하다 하지 않겠는가!


고려조(高麗朝)부터 스스로를 낮추어 조공하는 사신이 북쪽을 드나든지 이미 수백년인데도 한(恨)으로 여기지 않다가, 졸지에 만주의 동류(同類)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김은 유독 어찌된 까닭인가? 오호라! 비록 그러할지라도 만약 하늘이 효종에게 십년의 천수(天壽)만 더하여 주었더라면, 곧 병사를 요동의 심양으로 진군케하고 병선을 등주(登州)와 래주(萊州)로 내달리게 하였을 것인데, 설령 패하고 꺾여 되돌아온다 하더라도 그 또한 근세의 통쾌한 일이 됨은 잃지 않았을 것이다. 하늘이 임금의 천수를 빌려주지 않아서 마침내 그러한 일이 생기지 않았으니, 이는 다행인가 불행인가? 나로서는 그저 처절하게 여길 따름이다.


余嘗有志於述史, 而固無其材, 且名山石室, 渺無珍藏, 以余淸貧匹夫, 亦竟奈何哉! 然何幸, 峽中得淸平所著《震域遺記》中有三國以前故史, 雖約而不詳, 比於巷間所傳區區之說, 尙可吐氣萬丈, 於是復采漢史諸傳之文, 以爲史話, 頗有食肉忘味之槪矣. 雖然, 凡今之人, 孰能有志於斯而同其感者哉!《經》曰: [朝楣, 夕死可矣.] 亦惟此而已矣. 若天假我以長壽, 則卽可完成一史, 此不過爲其先驅而已也. 噫! 後世若有, 執此書而歌哭者, 是乃余幽魂無限之喜也. 上之二年乙卯三月上澣, 北崖老人, 序于揆園草堂.


내가 일찍이 나라의 역사를 써보고자 하는 뜻은 있었으나 본디 그 재료로 삼을 만한 것이 없었으며, 또한 이름 있는 산의 석실에조차 귀하게 비장된 것 하나 없음에, 나와 같이 씻은 듯이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서 이 또한 어쩔 도리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산골짜기에서 청평(淸平)이 저술한《진역유기(震域遺記)》를 얻으니, 그 가운데 삼국 이전의 옛 역사가 있음에 비록 간략하여 상세하지는 않으나 항간에 떠도는 구구한 말들에 비하면 자못 내비치는 기상이 견줄 바가 아니라, 여기에 다시 중국의 사서에 전하는 모든 글들을 가려 뽑아 사화(史話)를 지으니, 그 재미로움은 밥 먹는 것도 자주 잊을 지경이었다. 비록 그렇지만 지금의 사람 가운데 과연 누가 이러한 것에 뜻이 있어 이 감흥을 같이 할 수 있으리오! 경전에 말하기를 [아침에 도를 듣게 되면 저녁에 죽더라도 여한이 없다] 하였으니, 오직 이를 두고 한 말 같구나. 만약 하늘이 나에게 오랜 수명을 누리게 한다면 하나의 역사를 완성하게 될 것이니, 이는 단지 그 선구(先驅)가 될 뿐이리라. 오호라! 후세에 만약 이 책을 붙잡고 곡소리를 내는 자가 있다면, 이는 곧 나의 유혼(幽魂)이 무한히 기뻐할 바로다.

[숙종 2년 을묘년 3월 상순 규원초당에서 북애노인이 서문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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揆園史話卷之(上)


一 肇判記 (조판기)


太古, 陰陽未分, 洪 久閉, 天地混沌, 神鬼愁慘, 日月星辰堆雜無倫, 壤海渾瀜,  生無跡, 宇宙只是黑暗大塊, 水火相 不留刹那; 如是者, 已數百萬年矣. 上界, 却有一大主神, 曰桓因, 有統治全世界之無量智能, 而不現其形體, 坐於最上之天, 其所居數萬里, 恒時大放光明, 麾下更有無數小神. 桓者, 卽光明也, 象其體也; 因者, 本源也, 萬物之藉以生者也.


태고에 음과 양이 아직 나누어지지 않은 채 아주 흐릿하게 오랫동안 닫혀 있으니, 하늘과 땅은 혼돈하였고 신과 도깨비들은 근심하고 슬퍼하였으며,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은 난잡하게 쌓여 질서가 없었고 흙과 바다는 뒤섞여 있어 뭇 생명의 자취는 아직 존재하지 않음에, 우주는 단지 커다란 암흑 덩어리일 뿐이고 물과 불은 잠시도 쉬지 않고 서로 움쩍이는지라, 이와 같은지가 벌써 수 백 만년이나 되었다. 하늘에 무릇 한 분의 큰 주신(主神)이 있었으니 이름하여 환인(桓因)이라 하는데, 전 세계를 통치하는 가 없는 지혜와 능력을 지니고서, 그 모습은 나투지 않고 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거처하는 곳은 수만 리나 떨어져 있지만 언제나 밝은 빛을 크게 내뿜고, 그 아래로는 또한 수많은 작은 신들이 있었다. '환(桓)'이라 함은 밝은 빛을 말하는 것이니 곧 근본 바탕을 모양으로 나타낸 것이며, '인(因)'이라 함은 말미암은 바를 말하는 것이니 곧 만물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음을 나타낸 것이다.


爾時, 一大主神, 乃拱手默想曰: [如今, 宇宙大塊, 冥閉已久, 混元之氣, 包蘊停 , 正要啓生化育; 若不 時開判, 何以成無量功德乎!] 乃召桓雄天王, 授命行剖判之業. 天王奉命辭出, 乃督諸神, 令各自大顯神通, 只看風雲晦冥 深 電光閃 馳繞 雷霆  震擊 得, 玉女失色, 百鬼遁竄. 於是洪 肇判, 天地始分, 虛曠浩茫, 不可端倪. 乃命日月, 輪流相轉, 光麗於天, 照臨於地, 日行爲晝, 月行爲夜, 又命星辰周 蒼穹, 以定四時, 以紀年日.


이때 한 분의 큰 주신이 손을 마주잡고 곰곰이 생각에 잠기다 이르기를 [지금과 같이 우주의 큰 덩어리가 어둠으로 닫힌 지 이미 오래되어, 천지개벽의 기운이 감싸인 채 머물러 오다가 바야흐로 낳아 길러지기를 바라니, 만약 때가 다하였음에도 세상을 열어서 구분하여 주지 않는다면 어찌 가없는 공덕을 이룰 수가 있으리오] 하고는, 환웅천왕(桓雄天王)을 불러 세상을 가르고 나누는 작업을 명하였다.


천왕은 명을 받들고 물러 나와서 여러 신들을 독려하여 각자에게 스스로의 신통력을 크게 발휘하게 하니, 단지 바람과 구름이 어둑어둑한 가운데 검푸른 빛이 깊어지고 번개 불이 일어나며 번쩍이는 섬광은 쏜살 같이 치달아 얽혀 드는 것만이 보일 뿐, 우뢰와 천둥소리는 맹호가 울부짖는 소리와 같은지라, 옥녀는 놀라서 낯 색을 잃어버렸고 모든 도깨비들은 도망쳐 숨어 버렸다. 그리하여 아주 흐릿하게 하늘과 땅이 처음으로 나누어지기 시작하니, 그 나누어진 처음에는 텅하니 비어 있고 휑하니 넓은 것이 아무런 구별도 할 수가 없었다. 이에 해와 달에게 명하여 바퀴가 굴러가듯이 서로 돌아가며 하늘에서 고운 빛을 발하여 땅에 내려 비추게 하여, 해가 가는 것을 낮으로 삼고 달이 가는 것을 밤으로 삼았으며, 또한 별들로 하여금 창공을 두루 돌게 하여, 이로서 사시(四時)를 정하고 햇수와 날수를 기록하게 하였다.


雖然天地旣分, 日月輪轉, 而地界, 水火未定, 壤海混淪, 停 之氣, 未卽啓發化成矣. 一大主神, 再命桓雄天王大顯法力, 只看大地, 水(涯)[ ]陸現而壤海始定, 火藏水動而萬物滋生. 於是草木托 , 昆蟲 鱗介 飛禽 走獸之屬, 振振生育 繁衍充 於地上三界. 盖自天地始分以來, 又十萬年矣.


그러나 비록 하늘과 땅을 나누고 해와 달을 운행하게 하였으나, 땅에는 물과 불이 아직 제자리를 잡지 못하였고, 흙과 바다는 그 원기가 아직 나뉘지 않은 채 하나로 엉켜 있었으니, 멈추어 쌓여온 기운은 아직 열려 변화하지 못하였다. 한 분의 큰 주신이 다시 환웅천왕에게 명하여 법력을 크게 드러내게 하니, 단지 큰 땅덩이만 보이던 것에서 물이 휘돌아 나가며 뭍이 드러나고 흙과 바다가 비로소 나뉘어져 자리를 잡게 되니, 불의 기운은 잠들고 물의 기운이 움직여 만물이 무성하게 생겨나게 되었다. 이에 초목은 뿌리를 내리고 곤충과 물고기 및 날짐승과 들짐승 등의 무리들은 무수히 자라나 땅 위의 삼계에 번성하여 가득하였다. 무릇 하늘과 땅이 처음으로 나누어진 이래 또 십만년이 지났다.


一大主神, 更聚衆神曰: [今乘宇宙自然之運會, 已煩汝等出力, 剖判天地, 化生萬物, 功德自固無量. 但天地之間, 宜置萬物之長, 其名曰人, 可與天地 爲三才, 而作萬物之主. 元來天地停 之氣, 散爲萬物, 而靈秀之性 貞明之氣, 則尙鍾毓而不發; 今可啓導靈秀 發放貞明, 而別作人衆,  於 生之中, 自作主宰. 但此事須先有備, 不可造次.] 乃三命桓雄天王. 天王奉令, 依計頒行. 於是桓雄天王大召滿天(皇)[星]宿, 令分管上天諸事, 却令主神麾下無數小神, 一幷降落下界, 主治山岳 河川 洋海 沼澤 丘陵 原野 里社之基, 務要謹嚴平正, 不可有誤, 然後采天地靈秀之性 貞明之氣, 造成無數人生.


한 분의 큰 주신이 다시 뭇 신들을 모아 놓고 이르기를 [지금 우주의 자연스러운 기운을 타고 이미 너희들이 번거롭게 힘을 내어 하늘과 땅을 가르고 나누며 만물이 드러나게 하였으니, 그 공덕이 자고로 한량이 없구나. 그렇지만 하늘과 땅 사이에 마땅히 만물의 어른을 두어야 하기에 그 이름을 '사람'이라 할 것이니, 하늘 그리고 땅과 더불어 삼재(三才)로 삼아 만물의 주인이 되게 하리라. 원래 하늘과 땅의 멈춰 쌓였던 기운을 흩어지게 하여 만물이 되게 하였는데, 신령하고 빼어난 성질과 곧고 밝은 기운은 자못 모아 받았지만 이것을 밖으로 드러내지는 못하였다. 이제 신령하고 빼어남을 이끌어 내고 곧고 밝음을 드러내게 할 수 있게끔 따로 사람의 무리를 만들어서 이들로 하여금 뭇 생명 가운데 스스로 주인 노릇을 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마땅히 먼저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할 것이며, 절대 미루어서도 안된다] 하며 환웅천왕에게 세번째로 명을 내리니, 천왕은 명을 받들어 계획대로 널리 펴서 행하였다.


이에 환웅천왕은 하늘에 가득찬 별자리를 모두 불러 하늘 위의 모든 일을 나누어 맡게 하고, 주신(主神) 휘하의 무수한 작은 신들에 명령하여 하나같이 모두 하계에 내려가 산악과 하천, 해양과 소택, 구릉과 들판 및 마을들의 바탕되는 일들을 다스리게 하며, 근엄하고 공평하게 하여 잘못이 없도록 한 후에, 하늘과 땅의 신령하고 빼어난 성질과 곧고 밝은 기운을 가려 모아 무수한 사람들을 만들었다.


一大主神, 乃四命桓雄天王曰: [如今, 人物業已造完矣. 君可勿惜厥勞, 率衆人,  自降落下界, 繼天立敎, 爲萬世後生之範.] 乃授之以天符三印曰: [可持此, 敷化於天下.] 桓雄天王, 欣然領命, 持天符三印, 率風伯 雨師 雲師等三千之徒, 下降太白之山 檀木之下. 太白山者, 卽白頭山也. 衆徒推爲君長, 是爲神市氏. 自草木托  禽獸滋生以來, 又十萬年也.


한 분의 큰 주신이 이에 네번째로 환웅천왕에게 명하기를 [이와 같이 사람과 만물을 일으키는 공적을 이미 이루어 완전하게 하였다. 그대는 그 노고를 너무 애석히 생각말고 뭇 사람들을 이끌어 몸소 하계에 내려가서, 하늘을 이어서 가르침을 세움으로서 만세토록 후생의 모범이 되도록 하라] 하고, 천부(天符)의 세가지 인(印)을 주며 말하기를 [이것을 가지고 널리 천하에 교화를 베풀어라] 하였다. 환웅천왕은 흔연히 명을 받들어 천부의 세 가지 인을 지니고서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 등 삼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의 밝달나무 아래로 내려왔다. '태백산'이라 함은 곧 백두산을 말한다. 뭇 무리들이 그를 임금으로 추대하니, 그가 곧 신시씨(神市氏)이다. 초목이 뿌리를 내리고 금수가 무수히 생겨난 이래 또 십만 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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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 太始紀 (태시기)


神市氏旣爲君長, 以神設敎, 存其彛性, 周護飽養, 聽其繁衍, 天下民物, 於是漸盛. 但此時, 開闢不遠, 隨處草木荒茂 鳥獸雜處, 人民艱困殊甚, 且猛獸 毒蟲不時衝動, 人民被害不少. 神市氏, 卽命蚩尤氏治之. 蚩尤氏, 實爲萬古强勇之(租)[祖], 有旋乾轉坤之力, 驅使風 雷 雲 霧之能, 又造刀 戟 大弩 巨斧 長槍, 以之而治草木 禽獸 蟲魚之屬. 於是草木開除, 禽獸蟲魚, 僻處深山大澤, 不復爲民生之害矣. 是以蚩尤氏, 世掌兵戎制作之職, 時常, 鎭國討敵, 未嘗少懈.


신시씨가 임금이 되어 신(神)으로서 가르침을 베풀며, 타고난 떳떳한 성품을 보존케하고 두루 보살펴 배불리 먹이고 양육하며 무성하게 불어남을 모두 받아들이니, 천하의 백성과 사물은 이로서 번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는 개벽한 지 아직 멀지 않은 때인지라, 곳곳에 초목이 무성하고 날짐승이며 들짐승이 어지러이 섞여 있어 사람들의 괴로움이 매우 심하였고, 더욱이 사나운 짐승과 독충들도 때를 가리지 않고 다투어 사람들의 피해 또한 적지 않았다.


신시씨는 곧 치우씨(蚩尤氏)에게 명하여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치우씨는 진실로 만고에 있어 강인하고 용맹함의 조상이 되니, 천지를 움직여 휘두르는 힘과 바람·번개·구름·안개를 부리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칼·창·큰도끼·긴창 등을 만들어 이로서 초목과 금수며 벌레와 물고기의 무리를 다스렸다. 이에 초목이 차츰 걷히고 금수와 벌레며 물고기들이 깊은 산 속이나 큰 못 속으로 피하여 달아나 숨어 버려서 다시는 백성들이 살아가는데 해악이 되지 않았다. 이로서 치우씨는 대대로 병기 만드는 일을 맡았으며, 항시 나라 안을 편안하게 안정시키고 적을 토벌하는 일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神市氏, 見人居已完 蠢物各得其所, 乃使高矢氏, 專掌 養之務, 是爲主穀. 而時, 稼穡之道不備, 又無火種, 民皆就食草蔬木實,  鮮血, 茹生肉, 殆不堪其苦. 高矢[乃氏](氏, 乃)漸敎稼穡之方, 猶以無火爲憂. 一日, 偶入深山, 只看喬林荒落, 但遺骨骸老幹枯枝, 交織亂叉; 立住多時, 沈吟無語, 忽然大風吹林, 萬竅怒號, 老幹相逼, (揆)[擦]起火光, 閃閃  , 乍起旋消乃猛然, 省悟曰: [是哉! 是哉! 是乃取火之法也.] 歸取老槐枝, (揆)[擦]而爲火, 功猶不完. 明日, 復至喬林處, 徘徊尋思, 忽然一個條紋大虎, 咆哮躍來, 高矢氏大叱一聲, 飛石猛打, 誤中巖角, 炳然生火, 乃大喜而歸, 復擊石取火. 從此, 民得火食, 鑄冶之術始興, 而制作之功, 亦漸進矣.


신시씨는 사람의 거처가 이미 완비되고 살아서 꿈틀거리는 사물들 또한 각기 그 마땅한 처소를 얻었음을 보고, 이에 고시씨(高矢氏)로 하여금 먹여 살리는 일을 맡도록 하였으니, 그것은 곡식을 주관하는 일이다. 이때는 곡식을 심고 거두는 일이 아직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며 불씨 또한 없던 때라, 백성들은 모두 풀의 푸성귀나 나무의 열매를 먹고 신선한 피를 마시며 날고기를 먹었으니, 그 고초는 참아내기 어려웠다. 고시씨가 이에 점차 곡식을 심고 거두는 방법은 가르쳤으나, 여전히 불이 없는 것이 근심이 되었다.


하루는 우연히 깊은 산 속에 들어가니 높이 우뚝 솟은 나무들이 어지럽게 쓰러져 있는 것이 온 사방으로 보였는데, 앙상하고 말라버린 체로 메마른 가지들만이 남아 서로 어지럽게 얽혀져 있었다.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서 있으려니, 갑자기 숲으로 큰 바람이 불어와 모든 구멍들이 성난 목소리를 내뱉고 앙상한 가지들은 서로 밀치며 비벼대었는데, 마찰되어 일어나는 불길이 번쩍번쩍 빛나는 듯 언뜻 일어나다가는 도리어 사 글어드는 듯 하더니 이내 맹렬하게 타오르는지라, 깨달음이 있어 이르기를 [이것이로다! 이것이로다! 이것이 바로 불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로구나] 하였다.


돌아와서 마른 홰나무 가지를 비벼 불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아직까지는 완전하지 못하였다. 다음 날 다시 숲 속으로 가서 생각에 잠겨 배회하고 있으려니, 홀연히 한 마리의 줄무늬 범이 으르렁거리며 달려들기에, 고시씨가 벽력과 같은 소리로 꾸짖으며 돌을 날려 호되게 내려치니 바위 모서리에 빗맞으며 번쩍이면서 불길이 일어나기에, 이에 크게 기뻐하고 돌아와 다시 돌을 부딪쳐서 불을 얻게 되었다. 이로부터 백성들은 음식을 익혀 먹을 수 있게 되었으며, 주조하는 기술이 비로소 흥성하였기에 제작의 능률도 점차 나아지게 되었다.


又使神誌氏作書契. 盖神誌氏, 世掌主命之職, 專管出納獻替之務, 而只憑唯舌, 曾無文字記存之法. 一日, 出行狩獵, 忽驚起一隻牝鹿, 彎弓欲射, 旋失其(跡)[踪]. 乃四處搜探, 遍過山野, 至平沙處, 始見足印亂鑽, 向方自明, 乃俯首沈吟, 旋復猛省曰: [記存之法, 惟如斯而已夫! 如斯而已夫!] 是日, 罷獵卽歸, 反復審思, 廣察萬象, 不多日, 悟得 成文字, 是爲太古文字之始矣. 但後世年代邈遠, 而太古文字泯沒不存, 抑亦其組成也, 猶有不完而然歟. 嘗聞, 六鎭之地及先春以外岩石之間, 時或發見雕刻文字, 非梵非篆, 人莫能曉, 豈神誌氏所作古字歟?


또한 신지씨(神誌氏)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하였다. 무릇 신지씨는 대대로 임금의 명을 주관하는 직책을 맡으며 명령의 출납과 임금을 보좌하는 임무를 관리하였는데, 단지 한낱 혀에만 의지할 뿐, 일찍이 글로서 기록하여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하루는 사냥을 나갔는데, 갑자기 놀라 달아나는 암사슴 한 마리를 보고 활을 당겨 쏘려 하였으나 순식간에 그 종적을 놓쳐 버렸다. 이에 사방을 수색하며 산과 들을 두루 지나 넓은 모랫 벌에 이르러 비로소 어지럽게 찍혀있는 발자국을 보니 달아난 방향이 명확하게 드러나는지라, 머리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가 잠시간에 불현듯 깨달아 말하기를 [기록하여 두는 방법은 오직 이와 같을 따름이구나! 이와 같을 따름이야!] 하였다.


그 날 사냥을 마치고 돌아와 연거푸 깊이 생각하며 널리 만물의 모습을 관찰하다가, 며칠 지나지 않아 깨달음을 얻어 글을 만들어 내니, 이것이 태고 문자의 시작이다. 그러나 후세에 세월이 까마득히 오래되어 태고 문자는 사라져 존재하지 않으니, 생각건대 그 꾸밈새가 아직은 완전하지 못해서가 아닌가 한다. 듣건대 육진(六鎭)의 땅이나 선춘(先春) 등지의 암벽 사이에 때때로 문자를 조각한 것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범자(梵字)도 아니요 전자(篆字)도 아닌 것으로 사람들이 능히 알아먹지 못한다고 하니, 어쩌면 그것이 신지씨가 지은 옛 문자가 아닌가 한다.


高矢氏, 亦世掌主穀之職, 而後世蚩尤 高矢 神誌之苗裔, 繁衍最盛. 蚩尤氏之族, 則占居西南之地; 神誌氏之族, 則繁殖於北東之地; 獨高矢氏後裔, 廣處東南, 轉流爲辰弁諸族, 後之所謂三韓者, 皆其孫也. 三氏苗裔, 又細分九派, 卽 夷  夷 方夷 黃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暘夷之屬, 皆異支同祖, 不甚相遠. 夷之爲言, 大弓之稱也. 盖自蚩尤氏作刀 戟 大弩以後, 狩獵征戰, 賴以爲武, 中土諸族, 甚畏大弓之用, 聞風膽寒者久矣. 故謂我族曰夷.《說文》所謂: [夷, [人人大]人人弓, 東方之人.]者, 是也. 乃至仲尼《春秋》之作而, 夷之名, 遂與戎狄幷爲腥 之稱, 憤哉! 後世 夷 風夷, 分遷西南, 恒與中土諸族, 互相  . 風夷則卽蚩尤(氏)之一族也.


고시씨 역시 대대로 곡식을 주관하는 직책을 맡았으며, 후세에 치우씨·고시씨·신지씨의 후예들이 가장 번창하여 융성하였다. 치우씨의 부족은 서남의 땅에 자리를 잡았고, 신지씨의 부족은 북동의 땅에 많이 정착하였는데, 오로지 고시씨의 후예들만이 동남쪽에 넓게 거처하다가 더욱더 이동하여 변진(辰弁)의 뭇 부족들이 되었으니, 후에 삼한(三韓)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모두 그의 후손들이다. 삼씨(三氏)의 후예들은 또한 아홉 갈래로 자세히 나누어지는데, 곧 견이( 夷)·우이( 夷)·방이(方夷)·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풍이(風夷)·양이(暘夷)의 무리들이 모두 같은 조상의 다른 가지일 뿐, 서로 그리 멀지는 않다.


'이(夷)'자는 큰 활을 지칭하는 것이다. 치우씨가 칼과 창이며 큰 쇠뇌를 만들기 시작한 이후로 사냥하고 전쟁함에 있어서 이러한 것을 병장기로 삼으니 중토의 뭇 부족들이 큰 활의 쓰임을 매우 두려워하였으며, 그 위풍을 듣고 간담이 서늘하곤 한 지가 오래되었기에 우리 민족을 일컬어 '이(夷)'라고 한 것이다.《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이르기를 [이(夷)는 '크다(大)'는 것과 '활(弓)'에서 유래하였으며, 동방의 사람을 말한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중니가《춘추》를 짓기에 이르러 이(夷)의 이름을 마침내 융(戎)이나 적(狄) 등과 아울러 비속한 명칭으로 삼아 버리니 분할 따름이다. 뒷날 견이와 풍이는 따로 서남으로 옮겨가서 항시 중토의 여러 부족들과 서로 엎치락 뒷치락 세력을 다투었는데, 풍이는 바로 치우씨의 일족이다.



先是蚩尤氏, 雖然驅除鳥獸 魚之屬, 而人民猶在土穴之中, 下濕之氣逼人成疾. 且禽獸一經窘逐, 漸自退避藏匿, 不便於屠食. 神市氏, 乃使蚩尤氏, 營造人居; 高矢[氏], 生致牛 馬 狗 豚 雕 虎之獸而牧畜; 又得朱因氏, 使定男女婚娶之法焉. 盖今之人謂匠師曰智爲者, 蚩尤氏之訛也; 耕農樵牧者, 臨飯而祝高矢者, 高矢氏之稱也; 婚娶之主媒者曰朱因者, 亦朱因氏之遺稱也.


이 보다 앞서 치우씨가 비록 날짐승과 들짐승 및 벌레와 물고기 등의 무리를 몰아내긴 하였지만, 사람들은 아직까지 흙 굴에서 사는 까닭에 아래로부터의 습한 기운이 사람에게 해를 끼쳐 질병을 일으켰다. 게다가 짐승들을 한차례 휘몰아 내쫓으니 점차 스스로 물러나 피하고 숨어 버린 까닭에 잡아먹기에 불편하였다. 신시씨가 이에 치우씨로 하여금 사람이 거처할 만한 것을 짓게 하였으며, 고시씨에게는 소·말·개·돼지·수리·범 등의 짐승을 사로잡아 데려와서 가두어 기르게 하였으며, 또 주인씨(朱因氏)를 신임하여 그에게 남녀간에 장가들고 시집가는 법을 정하게 하였다. 무릇 지금의 사람들이 힘센 장사를 두고 '지위'라 함은 치우씨의 이름이 잘못 전하여 진 것이며, 밭 갈고 농사짓거나 나무를 하고 짐승을 기르는 사람들이 밥을 먹을 때 '고시례'하며 축원하는 것은 고시씨를 일컫는 것이며, 혼인에서 중매를 서는 것을 '주인 선다'라고 말하는 것 또한 주인씨의 이름에서 남겨진 명칭이다.


此時, 神市氏之降世, 已數千載, 而民物益衆, 地域愈博. 於是復置主刑 主病 主善惡及監董人民之職, 以獸畜名官, 有虎加 牛加 馬加 鷹加 鷺加之稱. 盖牛 馬 狗 豚之屬, 皆當時民衆養生之料, 而賴以爲業者也; 虎與鷹 鷺者, 境內棲息之鳥獸, 而以表官職之[性也. 後世夫餘國, 猶傳此俗, 亦以獸畜名官, 此不可 述焉.


이때는 신시씨가 세상에 내려 온지 이미 수천 년이 되었으니, 백성과 사물들은 더욱 많아졌고 땅의 경계는 더욱 넓어졌다. 이에 다시 형벌과 질병 및 선악을 주관하고 백성들을 보살펴 이끌 수 있는 직책을 설치하고 금수와 가축의 이름으로 벼슬을 이름 하였으니, 호가(虎加)·우가(牛加)·마가(馬加)·응가(鷹加)·노가(鷺加) 등의 명칭이 있게 되었다. 무릇 소와 말 그리고 개와 돼지 등의 무리는 모두 당시에 백성들이 기르는 것으로 이에 의지하여 생업을 삼았던 것이며, 범과 매 및 해오라기 등은 나라 안에 서식하는 새와 짐승들이니, 이로서 관직의 성격을 나타낸 것이다. 후세 부여국(夫餘國)에도 여전히 이러한 풍속이 전해져 역시 금수와 가축의 이름으로 벼슬을 일컬었다 하는데, 이를 모두 빠짐없이 적을 수는 없다.


神市氏, 旣立敎御民, 民皆協洽. 乃登太白之 , 臨大荒之野, 觀天地寂然而氣機無息, 日月奔馳而貞明不易, 春秋代序而萬物循回, 乃推天地玄妙之理, 倚數觀變而創成人民依從之則, 是乃易理之原也. 當是之時, 遼瀋.幽燕之地, 已爲我族耕農游牧之所. 伏犧氏, 適以是時, 生於風族之間, 熟知倚數觀變之道, 乃西進中土, 代燧人之世而爲帝, 又得史皇之輔 河圖之瑞, 畵成八卦, 爲中土易理之元祖. 盖陰陽消長之理, 發源於我而卒爲彼國之用, 近世禹倬, 以傳《易》之故, 反爲偉功, 造翁難測之意, 盖亦怪哉! 伏犧氏, 自能馴伏犧牲, 威降豺豹, 伏犧之名, 因於是也; 生於風族, 以風爲故姓也. 以龍紀官者, 亦原於虎加 馬加之類也.


신시씨가 이미 가르침을 세워 백성을 거느리니 백성들은 모두 서로 도우며 흡족히 여겼다. 이에 태백(太白)의 꼭대기에 오르고 대황(大荒)의 들녘에 이르러 천지를 바라보니 쓸쓸하고 고요할지언정 그 기운의 틀은 쉼이 없었다. 해와 달은 정신없이 달음박질치면서도 곧고 밝음은 변하지 않았으며, 봄과 가을은 차례대로 잇대어 가고 만물은 쉬지 않고 자꾸만 쫓아 돌아갔다. 이에 천지의 깊고도 묘한 이치는 숫자에 의지하여 그 변화를 살펴볼 수 있음을 미루어 깨닫고, 사람들이 의지하여 따를 만한 법칙을 새로 만드니, 이것이 곧 역리(易理)의 근원이다.


당시에는 요동의 심양 및 유연(幽燕)의 땅이 이미 우리 민족들이 농사짓고 유목하던 곳이었다. 복희씨(伏犧氏)가 마침 이때에 풍족(風族)에서 태어나서 숫자에 의지하여 변화를 바라보는 이치에 대하여 자세히 익힌 뒤, 서쪽으로 중토로 나아가 수인씨(燧人氏)의 세상을 이어 황제가 되어 사황(史皇)의 도움과 하도(河圖)의 상서러움을 얻어서 팔괘(八卦)를 그리니, 중토 역리(易理)의 원조가 되었다. 무릇 음과 양이 줄고 늚에 대한 이치는 우리로부터 발원하였으나 마침내 저들 나라의 쓰임이 되어 버리더니, 근세에 와서 우탁(禹倬)이《역(易)》을 전한 까닭으로 도리어 위대한 공로자가 되었다 하니, 조물주의 헤아리기 어려운 뜻은 또한 괴이하다 할 것이다. 복희씨는 스스로 능히 희생(犧牲)을 잘 길들이고 복종케 하여 그 위엄이 승냥이와 표범에까지 이르렀기에 '복희(伏犧)'라는 이름이 그로 연유한 것이며, 풍족에서 태어난 까닭으로 '풍'을 성씨로 삼았다. 용(龍)으로 벼슬을 기록한 것 또한 호가(虎加)나 마가(馬加)라고 일컬음과 같은 유형에서 근원한 것이다.


神市氏御世愈遠, 而蚩尤 高矢 神誌 朱因諸氏, 幷治人間三百六十六事, 男女 父子 君臣 衣服 飮食 宮室 編髮 盖首之制, 次第成俗, 普天之下, 悉化其沾. 制治漸敷, 而政敎禮儀逐漸稍備, 初之于于  草衣木食者, 始入人道之倫矣. 嗚呼偉哉!]


신시씨가 세상을 다스린지 더욱 오래되니, 치우·고시·신지·주인씨 등이 모두 같이 사람간의 삼백예순여섯 가지 일을 다스려, 남녀와 부자 및 군신간의 일이며 의복과 음식 및 궁실의 일은 물론, 머리카락을 땋고 머리를 덮는 일에 관한 법도를 차례차례 풍속으로 이뤄가게 하였기에 하늘이 덮고 있는 곳이면 모두 그 교화에 물들어 갔다. 제도로서 다스림이 점차 두루 미치고 다스림과 가르침이며 예절과 의례 등도 점차 따라서 조금씩 갖추어져 가니, 처음에는 아는 바가 없이 제 멋대로 날뛰며 풀로서 몸을 가리고 나무 열매를 먹던 사람들이 비로소 사람된 도리로서의 윤리에 접어들게 되었다. 오호라 그 위대함이여!


夫六合之外, 聖人存而不論, 六合之內, 聖人論而不議;《春秋·經世》, 先王之志, 聖人議而不辯. 鴻 肇判而萬物滋生, 則余聞諸耆老, 神人降世而民物漸繁, 制治漸敷[政而](而政)敎始成, 則余徵諸斷簡破編. 夫六合之外, 洪荒之世, 聖人曾不詳辨區區, 後生安得以窺其一斑哉! 至如唐虞三代 秦 漢 隋 唐者, 中國歷代之謂也;       荊蠻 越裳之屬, 則上古戎狄之稱也. 漢武之世, 始通西域, 月氏 安息 奄蔡 焉嗜 于   賓諸國, 始現於載籍中; 多民, 隨畜牧, 逐水草往來者, 及被髮裸身之類. 及若大秦之國, 遠在西海之西, 地方數千里, 領四百餘城, 小國役屬者數十, 以石爲城郭, 列置郵亭, 人皆 頸而衣(文)[紋]繡, 乘輜 出入所居, 城邑周(圍)[ ]百餘里, 宮室皆以水精爲柱, 以至殊俗珍風 奇寶異貨之産, 不可 述, 盖想見其殷富盛(疆)[彊]之風矣. 漢.章和中, 班超遣甘英, 由條支欲通大秦而不果, 及至桓帝.延熹中, 其主安敦遣使始通. 降至唐代, 又有 項 吐蕃 波斯 大食之國, 或交侵門洛, 或航通商舶, 而赤髮綠睛 巨幹長軀之徒, 罕至出入宮庭. 宋代, 有提擧市舶司之職, 專管西域買遷之業. 近代, 明.萬曆中, 有利瑪竇者, 自廣東轉入北京, 有數理曆法之書, 使行之從燕還者, 或傳其說. 盖其國, 與古之大秦同在西域之西, 與古來諸國逈殊云. 噫! 天下廣矣, 生民之來久矣. 未知, 後世果有巨人一目之國, 復自東南來, 通於此世否.


무릇 우주의 밖은 성인이 그대로 간직해 둘 뿐 의론하진 않고, 우주의 안은 성인이 대체의 강령만 의론할 뿐 그 근원까지는 논의하지 않는다 하였다.《춘추》의 <경세편>에 앞선 성군의 뜻은 성인이 명분품절만 의론할 뿐 그에 대한 자세한 시비를 논변하진 않았다 하였다. 천지자연의 원기가 처음으로 나눠지고 만물이 무성하게 자라난 것은, 곧 내가 뭇 노인네들에게 듣기로 신시씨가 세상에 내려옴에 백성과 사물이 점차 번성하고 제도로서 다스림이 점차 두루 미쳐서 사물을 다스리는 일과 가르쳐 육성하는 일이 비로소 이루어졌다 하였으니, 이것을 내가 어찌 쪼개고 나누어 밝힐 수 있을 것인가. 무릇 우주 밖의 아주 오랫 적 세상에 대해서는 성인들도 아직 하나하나 상세히 나누어 놓지 않았는데, 후손이 어찌 그 일부분일지언정 헤아릴 수 있겠는가.


당요(唐堯)와 우순(虞舜) 및 하(夏)·은(殷)·주(周)의 삼대 및 진(秦)·한(漢)·수(隋)·당(唐)과 같은 것은 중토의 역대를 말하는 것이며, 험윤(  )과 훈육(  ) 및 형만(荊蠻)과 월상(越裳) 등의 무리는 상고 시대의 중국 변방 민족을 가리키는 것이다. 한나라 무제 때 처음으로 서역과 통하여 월지(月氏)·안식(安息)·엄채(奄蔡)·언기(焉嗜)·우전(于 )·계빈( 賓) 등의 나라들이 비로소 서적 가운데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러한 많은 민족들은 목축을 하며 물과 풀을 좇아 오가고 머리를 풀어 늘어트리거나 벌거숭이 몸을 한 부류들이다.


대진(大秦)과 같은 나라는 멀리 서해의 서쪽에 있으면서 영토는 사방 수 천리에 사백여 성을 거느리고 있으니, 작은 나라로서 지배를 당하는 것이 수십 개나 된다고 한다. 돌로 성곽을 쌓고 역말의 객사를 열 지어 설치하였으며, 사람들은 모두 목덜미까지만 머리를 기르고 수놓은 옷을 입으며, 덮개가 있는 수레를 타고 거처하는 곳을 출입하며, 성읍은 그 주위가 백 여리로 궁실은 모두 수정으로 기둥을 하는 등, 별스럽고 진귀한 풍속과 기이한 보물과 재화의 산출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세히 말할 수가 없다고 하니 그 번성하고 부강한 기풍은 그저 미루어 볼뿐이다. 한나라 장화(章和) 연간에 반초(班超)가 감영(甘英)을 보내어 조지(條支)를 경유하여 대진과 통교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환제(桓帝) 연희(延熹) 연간에 이르러 그 나라의 주인인 안돈(安敦)이 사신을 파견하자 비로소 통교하게 되었다. 후세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 또한 당항(黨項)·토번(吐蕃)·파사(波斯)·대식(大食) 등의 나라가 있어 혹은 번갈아 앙락을 침범하거나 상선을 보내와 통상을 하였는데, 붉은 머리칼에 푸른 눈을 가진 큰 몸뚱이와 큰 키의 무리들로서 드물게는 궁정에까지 출입하였다.


송나라 시대에는 제거시박사(提擧市舶司)라는 벼슬이 있었는데 오로지 서역과의 교역 업무만을 전담하였다. 근대의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에 이마두(利瑪竇)라는 자가 있어 광동으로부터 북경으로 옮겨왔는데 수리(數理)와 역법(曆法)에 관한 책을 가지고 있었다고, 사신으로 갔던 무리 가운데 북경에서 돌아온 어떤 사람이 간혹 그 예기를 전하였다. 대저 그 나라는 옛날의 대진과 같이 서역의 서쪽에 있으나 예로부터 내려오는 여러 나라와는 사뭇 다르다 하니, 오호라! 천하는 넓고도 넓으며 사람이 생겨난 지는 오래고도 오래구나. 후세에 과연 외눈박이 거인의 나라가 있어, 다시 동남쪽으로부터 와서 이 세상과 통교를 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盖異風殊道之國, 星羅碁布於普天之下, 時移物換而逐漸交通. 想於神市氏之世, 坐而論之, 則安知世間有奄蔡 安息 天竺 大秦之國耶. 然則, 高辛氏之世, 所謂[執中而遍天下, 日月所照, 風雨所至, 莫不[服]從.]者, 盖亦自好之(說)[言]也. 余 (蚩)[嗤]之可惜, 近世學者, 拘於漢籍, 溺於儒術,   然以外夷自甘, 動稱華夷之說.


무릇 풍속이 다르고 법도가 틀린 나라가 하늘 아래별처럼 늘어서 있고 바둑돌처럼 퍼져 있다가 시대가 흐르고 사물이 교환되면서 점차 서로 통하게 되는 것이니, 생각건대 신시씨의 시대에 앉아서 세상을 얘기하면서 이 세상에 엄채나 안식이며 천축이나 대식과 같은 나라가 있었음을 어찌 알았겠는가. 그러한 즉 고시씨 세대에 이른바 '한가운데를 잡아 그 교화가 천하에 두루 미치니, 해와 달이 내려 비치는 곳과 비와 바람이 닿는 곳마다 복종치 않는 자가 없었다'라고 한 것은 아마도 스스로를 훌륭하게 여긴 말일 것이다. 내가 남몰래 냉소하면서도 애석해 하는 것은, 근세의 학자들이 한나라의 서적에 얽매여 유교의 술수에 빠지고 흐리멍덩해져 '바깥 오랑캐(外夷)'라는 말을 스스로 달갑게 받아들여서 걸핏하면 '화이(華夷)'의 논리를 입에 올리는 일이다.


余於盛筵, 賓朋齊會, 皆雄談峻論之輩, 余因醉揚臂而呼曰: [君等皆云華夷, 焉知我非華而中原之爲夷耶! 且夷者, 從大從弓, 東人之稱, 太古我朝鮮, 以武强鳴於世, 故中原之士, 聞風懼之, 夷豈是戎狄之賤名耶! 國自上古, 人皆强勇質直, 雅好禮讓, 中土有'東方君子之國'之稱焉, 我國豈本戎狄之類哉! 鴨水以外, 縱橫萬里之地, 是乃我往聖先民, 艱苦經營之地也, 豈本是漢家物耶! 孔子之世, 周室旣衰, 外族交侵,  王敗死於犬戎, 其他北狄 荊蠻 山戎無終之屬, 侵 不已, 我族亦以是時, 威振中土. 故孔子, 慨王政之不敷, 恨列國之交侵, 有志而作《春秋》, 尊華攘夷之說, 於是乎始立. 若使孔子, 生於我邦, 則寧不指中土而謂戎狄之地乎!] 滿座冷笑或驚怪, 不小縱有然之者, 竟不快應, 余蹴床而起, 人皆謂淸狂殊甚, 可(難)[歎]. 前者, 滿洲之有 , 廟議紛 斥和者, 亦以尊周爲重, 余不知其可矣. 若余復出此言於 輩, 則渠等應必, 大驚小怪, 殆將不齒, 豈怪彼輩言. 箕子之化則信, 漢武之討滅則信, 唐高之平定則信, 而殊不知, 我先民却有赫赫武勳之有足誇耀者耶! 余悲, 世俗不察其變漫, 以仲尼尊攘之意, 自誤焉.


내가 어느 성대한 잔치 자리에서 손님이며 벗들과 함께 모였는데, 모두 뛰어난 말솜씨로 그럴싸한 말들을 하는 무리들이기에 내가 취기를 빌어 팔뚝을 걷어 올리고 탄식하며 이르기를 [그대들이 모두 '화이(華夷)'를 말하는데, 우리가 어찌 중화가 아닐 것이며 중원이 도리어 오랑캐가 됨을 그대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또한 '이(夷)'라 함은 '크다'는 것과 '활'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하여 동방의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서, 오랜 옛적 우리 조선이 무예가 강성하여 세상에 이름을 드날린 때문에 중원의 선비들이 그 풍문을 듣고 두려워하여 그렇게 이름한 것인데, 이(夷)가 어찌 융(戎)이나 적(狄)과 같은 천한 이름이겠는가!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사람들이 모두 굳세고 날래며 품성 또한 강직하고 올바르기에 평소에도 예의와 양보를 좋아하여 중원에는 '동방 군자의 나라'라는 말이 있게 되었는데, 우리나라가 어찌 그 근본이 융·적 등의 무리와 같다는 말인가! 압록강 바깥 사방 1만 리의 땅은 예전에 우리의 성인과 앞선 백성들이 어려움으로 일구어 온 땅인데, 어찌 본시 한나라 놈들의 물건이겠는가!


공자의 시대에 주(周) 왕실이 이미 쇠퇴하여 바깥 민족들이 번갈아 침범하니 여왕( 王)이 견융(犬戎)에게 패하여 죽게 되었고, 그 밖에 북융(北戎)이며 형만(荊蠻)과 산융(山戎) 등 끊임없는 무리들이 침략하여 핍박하길 마지않았으며, 우리민족 또한 이때에 위엄을 중토에 떨쳤었다. 때문에 공자가 왕의 다스림이 널리 미치지 못함을 개탄하고 여러 나라가 번갈아 침범함을 한탄하며 뜻이 있어서《춘추》를 지었기에, 중화를 받들고 오랑캐를 내친다는 말이 이때 비로소 쓰여지게 되었다. 만약 공자가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 오히려 중토를 가리켜 오랑캐의 땅이라고 어찌 말하지 않았겠는가] 하니, 모든 사람들이 비웃기도 하고 혹은 놀랍게 생각하기도 하였으며 적지 않게는 사뭇 수긍하는 자도 있었으나, 결국에는 모두 쾌히 응하지 않기에 내가 상을 박차고 일어나니 사람들이 모두 광기가 매우 심하다고 말하였다. 탄식할 노릇이다.


예전에 만주에 허물이 있다 하여 조정에서 화친이니 배척이니 하며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이 또한 주나라 왕실을 높이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까닭이기에 나는 그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만일 내가 또 다시 동년배들에게 이 말을 끄집어낸다면 그네들은 응당 크게 놀라긴 하여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아마도 장차 친구로 끼워 주지도 않을 것인데, 그렇다고 어찌 저들의 말만을 이상하다 하겠는가. 기자(箕子)가 교화를 베풀었다는 것은 믿으면서, 한무제가 조선을 쳐서 멸망시켰다는 것은 믿으면서, 당고종이 고구려를 평정하였다는 것은 믿으면서, 오히려 우리의 선조들에게 충분히 자부할 만한 빛나는 무훈이 있었음은 왜 알지 못하는가. 내가 슬퍼하는 것은, 세속의 인식이 제멋대로 변한 점은 살피지 않고, 중니가 높이고 깎아 내린 것만을 가지고 스스로를 그르치고 있다는 점이다.


夫神市肇降之世, 山無蹊隧, 澤無舟梁, 禽獸成 , 草木遂長, 民與禽獸居, 族與萬物幷, 禽獸可係 而(遊)[游], 鳥鵲之巢可攀援而 ; 飢食渴飮, 時用其血肉, 織衣耕食, 隨便自在, 是謂至德之世也. 民居不知所爲, 行不知所之, 其行塡塡, 其視顚顚, 含哺而熙, 鼓腹而(遊)[游], 日出而起, 日入而息, 盖天澤洽化, 而不知窘乏者也. 降至後世, 民物益繁, 素樸漸離,     , 勞勞孜孜, 始以生計爲慮. 於是焉, 耕者爭畝, 漁者爭區, 非爭而得之, 則將不免窘乏矣. 如是而後, 弓弩作而鳥獸遁, (綱)[網] 設而魚鰕藏, 乃至刀 戟 甲 兵, 爾我相攻, 磨牙流血, 肝腦塗地, 此亦天意之固然而不可怨者也. 余嘗觀, 夫小兒 [出胎門, 便 救我救我者, 盖求其哺也;  ]至行走, 便會 打 打者, 欲其求强也, 余於是乎知, 爭戰之不可免也.


무릇 신시씨가 처음 내려온 세상은, 산에는 길이나 굴이 없었고 못에는 배나 다리가 없었으며, 날짐승과 들짐승은 무리를 이루고 있었고 풀과 나무는 무성히 자라났다. 백성들은 금수와 함께 거처하며 만물과 더불어 어울리니, 금수는 굴레를 매어 같이 노닐 수 있었고 새나 까치의 보금자리는 기어 올라가 엿볼 수 있었다. 주리면 먹고 목마르면 마심에 때때로 그 피와 고기로 하였으며, 옷감을 짜서 옷을 해 입고 밭을 갈아 음식을 먹으며 편함에 따라 있는 그대로 지내니, 이것이 바로 이른바 덕이 가득한 세상이다. 백성들은 살아가면서도 그 행하는 바를 느끼지 못하였고 나아가면서도 그 가는 곳을 의식하지 않았으니, 그 행위는 당당하고 그 시야는 한결 같았다. 배불리 먹고 기뻐하며 배를 두드리고 노닐며,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쉬니, 대저 하늘의 은혜가 널리 미쳐 궁핍함을 알지 못한 것이리라.


후세에 내려와 백성과 사물이 더욱 번창해지며 소박함에서 점차 멀어지고, 아등바등 힘쓰며 쉬지 않고 노력하게 되니 비로소 생계를 근심거리로 삼게 되었다. 밭을 가는 자는 이랑을 놓고 다투고, 고기를 잡는 자는 구역을 놓고 다투는데, 다투어 얻지 못하면 장차 궁핍함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된 후에 활이며 쇠뇌를 만드니 날짐승과 들짐승은 달아나 버렸고, 그물을 만들어 설치하니 물고기와 새우들은 숨어 버렸다. 이에 칼과 창이며 갑옷과 병사가 생기고 너와 내가 서로 공격하여 이를 갈고 피를 흘리며 간과 뇌를 꺼내어 땅에 바르니, 이것 또한 하늘의 뜻이라면 원망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일찍이 보건대 어린아이가 막 태문(胎門)을 나서면서 곧 '응애(救我)'! '응애(救我)'! 라고 부르짖는 것은 대개 음식을 구하는 것이며, 막 걷게 되어 곧 서로 토닥거리며 '쎄다( 打)'! '쎄다( 打)'! 할 줄 아는 것은 강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까닭이다. 내가 이로서 다투고 싸우는 것이 면하기 어려운 것인 줄 알게 되었다.


夫月氏 大秦之屬, 余不知其詳, 至若中國與倭, 接隣之國也, 翼在左右而我國介處其間, 從古交爭最繁, 是亦必然之勢也. 神市氏(之御世)[御世之]已遠, 而民物之生愈往愈博. 民物之生愈博而, 所以彼服 飮食 奉生 送死之具, 愈見其耗. 是以始之熙熙者, 漸至忙忙, 夫忙忙求索者, 豈非爭亂之(偕)[階]歟. 及夫有巢 燧人者, 西方之君也, 神市 蚩尤者, 東方之君臣也. 御世之初, 各據一方, 地域逈殊, 人烟不通, 民知有我而不識有他, 故狩獵採伐之外, 曾無險役.


무릇 월씨나 대진의 무리에 대해서 내가 그 상세한 바를 알지 못하나, 한(漢)나라와 왜(倭) 같은 것은 인접한 나라로서 날개와 같이 좌우에 있고 우리나라는 그 가운데에 끼여 있어서 예로부터 갈마들어 다툼이 가장 빈번하였으니, 이는 필연적인 형세이다. 신시씨가 세상을 다스린지 이미 오래되니 백성과 사물이 번성하여 가면 갈수록 넓게 퍼졌다. 백성과 사물이 번성하여 넓게 퍼질수록 덮고 입으며 마시고 먹는 일과 생전에 봉양하고 죽은 후에 장사지내는 일 등에서 모두 그 소비가 눈에 뛰게 늘었다. 이로서 처음에는 화락하기만 하다가 점차 다급하게 되어 가니, 무릇 다급하게 무엇을 구하고 찾다 보면 다투고 싸우는 순서를 어찌 밟지 않겠는가. 대저 유소씨나 수인씨는 서방의 임금이요, 신시씨와 치우씨는 동방의 임금과 신하이다. 세상을 다스리던 초기에는 각각 한쪽에 웅거하고 있었는데, 땅의 구역이 사뭇 다르고 인가(人家)는 서로 통하지 않았으니 백성들은 자기들만 있는 줄 알고 다른이들이 있음을 인식하지 못했던 까닭에 수렵하고 채벌하는 일 외에는 별다른 힘든 일이 없었다.


降至數千載之後, 而世局已變, 且中國者, 天下之寶庫也, 沃野千里, 風氣恢暢. 我族之分遷西南者, 垂涎而轉進, 中土之民, 亦湊集而萃會, 於是焉, 黨同 異而干戈胥動, 此實萬古爭戰之始也. 初炎帝之世, 中土之漸民至盛阜, 穀 麻 藥 石之術, 亦已稍備. 及累傳至於楡罔之世, 而爲政束急, 諸侯携貳, 民心離散, 世道多艱. 我蚩尤氏與其民衆, 虎踞河朔, 內養兵勇, 外觀時變, 及觀楡罔之衰政, 乃興兵出征; 選兄弟宗黨可將者八十一人, 部領諸軍, 發葛盧山名之金, 大制劒 鎧 矛 戟 大弓  矢, 一幷齊整, 乃發 鹿而登九渾, 連戰連捷, 勢若風雨,  (仗)[伏]萬民, 威振天下. 一歲之中, 凡拔九諸侯之地. 更就雍狐之山, 發水金而制芮 戈及雍狐之[戟, 再整兵而出洋水, 殺至空桑. 空桑者, 今之]陳留, 楡罔所都也. 一歲之中, 更兼十二諸侯之國, 殺得(仗)[ ]伏尸滿野, 中土之民, 莫不喪膽奔竄. 時楡罔使少顥拒戰, 蚩尤氏揮雍狐之戟, 大戰少顥, 又作大霧, 使敵兵昏迷自亂, 少顥大敗, 落荒而走入空桑, 與楡罔出奔反入 鹿. 蚩尤氏乃於空桑卽帝位, 回兵圍攻於 鹿之野, 又大破之.《管子》所謂[天下之君, 頓戟一怒, (仗)[ ]伏尸滿野.]者, 是也.


수천 년을 내려온 뒤 세상의 형세는 이미 변화하였으며, 또한 중국은 천하의 보고(寶庫)로서 기름진 벌판이 천리에 뻗어 있어 바람은 널리 퍼지고 기온은 화창하니 우리 민족 가운데 서남쪽으로 나누어 옮겨간 자들은 대단히 탐을 내어 더욱더 나아갔으며, 중토의 백성들 역시 꾸역꾸역 모여들게 되었다. 이리하여 자기편끼리는 도와서 무리를 이루고 다른 편은 그저 원수로 삼아 창과 방패로 서로 충동질을 하니, 이것이 바로 만고에 있어서 전쟁의 시작이다.


처음 염제(炎帝)의 세대에 중토는 점차 백성이 번성하여 많아졌으며 곡식을 일구고 삼베를 자으며 약과 침을 쓰는 기술 또한 점차 갖추어져 갔다. 이로서 여러 세대를 전하여 유망(楡罔)에 이르니, 정치에 있어서는 단속하기 급급하고 제후들은 두 마음을 지녔으며 민심은 흩어져 세상의 도는 어렵기만 하였다.


우리 치우씨는 백성의 무리와 함께 황하의 이북 땅에 할거하고 앉아서 안으로 용맹스러운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 시대의 변화를 지켜보다가 유망의 정치가 쇠잔하였음을 보고 이내 병사를 일으켜 출정하였다. 형제와 종실의 무리 가운데 장군으로 삼을 만한 사람 81명을 선발하여 부장(部將)으로써 모든 군사를 통솔케하고, 갈로산(葛盧山)의 쇠를 캐내어 칼이며 갑옷과 중기창과 가닥창을 비롯하여 큰 활과 호목나무 화살 등을 많이 만들어 모두 가지런히 하고는 탁록( 鹿)으로 출발하여 구혼(九渾)에 올라 연전연승하니, 그 형세가 마치 비바람과 같아서 세상의 만민은 두려워 엎드리고 그 위세는 천하에 떨치게 되었다. 한 해 만에 무릇 아홉 제후의 땅을 빼앗고, 다시 옹호산(雍狐山)에 나아가 수금(水金)을 캐어 끈 달린 방패와 가지창 및 옹호창을 제작하여, 새로 병사를 정비하고 양수(洋水)를 떠나 파죽지세로 공상(空桑)에 이르렀다. 공상은 지금의 진류(陳留)로서 유망이 도읍하던 곳이다. 한 해 만에 다시 열두 제후의 나라를 합치니, 죽어 엎어진 시체는 들녘에 가득하기에 중토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하여 달아나 숨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때에 유망이 소호(少顥)로 하여금 막아 싸우게 하니, 치우씨는 옹호창을 휘두르며 소호와 크게 싸우면서 또한 큰 안개를 일으켜 적병으로 하여금 혼미한 가운데 스스로 혼란케함에 소호는 크게 패하고 황망히 물러나 공상으로 들어가더니 유망과 함께 도망 나와서 되돌아 탁록으로 들어갔다. 치우씨는 이에 공상에서 제위에 오르고 병사를 되돌려 탁록의 들판을 에워싸고 공격하여 또 크게 패퇴시켰다.《관자(管子)》에 이른바 [천하의 임금이 창을 들고 한번 크게 노하니 엎어진 시체는 들판에 가득하였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時有軒轅者, 聞知楡罔敗走而蚩尤氏爲帝, 欲代以爲君, 乃大興兵, 與蚩尤氏拒戰. 蚩尤氏, 大戰軒轅於 鹿, 縱兵四蹙, 斬殺無算, 復作大霧, 令敵軍心慌手亂, 奔竄逃生. 於是淮岱 冀 之地, 盡爲所據, 乃城於 鹿, 宅於淮岱, (遷徙往來, 號令天下.) 盖是時, 中土之人, 徒憑矢石之力, 不解鎧甲之用又値, 蚩尤氏法力高强, 心驚膽寒, 每戰輒敗,《雲 軒轅記》之所謂[蚩尤始作鎧甲 兜 , 時人不知, 以爲銅頭鐵額.]者, 亦可想見, 其狼狽之甚矣. 蚩尤氏益整軍容, 四面進擊, 十年之間, 與軒轅戰七十餘回, 將無疲色, 兵不退. 後軒轅, 旣屢敗, 乃復大興士馬, 效蚩尤氏而廣造兵甲, 又制指南之車, 期日會戰. 時蚩尤氏, 仰觀(天)[乾]象, 俯察人心, 深知中土旺氣漸盛, 且炎帝之民, 所在固結, 不可勝誅,  各事其主, 不可漫殺無(事)[辜]. 乃決意退還, 使兄弟宗黨, 務要大戰而立威, 使敵不敢生意追襲, 復與軒轅大戰, 混殺一(陳)[陣], 然後方退. 此時, 部將, 不幸有急功, 陣沒者,《史記》所謂[遂禽殺蚩尤]者, 盖謂是也. 蚩尤氏, 乃東據淮岱之地, 以當軒轅東進之路, 及至其沒, 漸至退 矣. 今據《漢·地理誌》, 其墓吊平郡.壽張縣. 鄕城中, 高五丈. 秦.漢之際, 住民猶常以十月祭之, 必有赤氣, 出如疋絳, 民名謂蚩尤(氏)旗, 豈其英魂雄魄, 自與凡人逈異, 歷千歲而猶不泯者歟.


이때에 헌원(軒轅)이란 자가 있어 유망은 패하여 달아나고 치우씨가 제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대신 임금이 되고자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치우씨에게 대항하여 싸웠다. 치우씨는 탁록에서 헌원과 크게 싸우며 병사를 풀어 사방에서 내려치니 참살시킨 자는 수도 없었으며, 다시 큰 안개를 일으켜 적군으로 하여금 마음이 흐려지고 손발이 떨리게 하니 (헌원은) 급히 달아나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회대(淮岱)와 기연(冀 )의 땅을 모두 점거하였으며, 탁록에 성을 쌓고 회대에 자리 잡아서 옮겨 왕래하며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다. 대개 이때의 중토 사람들은 단지 화살과 돌의 힘에 만 의지할 뿐 갑옷의 쓰임이나 가치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치우씨의 법력이 높고도 강함에 놀라 간담이 서늘해져 매번의 싸움마다 번번이 패하였다.《운급헌원기(雲 軒轅記)》에 [치우씨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이때의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구리 머리에 쇠로 된 이마로 여겼다]라고 한 것을 보면 그 낭패가 매우 심하였음을 상상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치우씨가 더욱 군대의 위용을 가다듬고 사방을 쳐나가며 십년동안 헌원과의 싸움을 칠십여 차례나 하였으나 장수는 피로한 기색이 없고 병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후에 헌원이 이미 여러 번 패하더니 이에 다시 병사와 군마를 크게 일으키고 치우씨를 흉내내어 군사들의 갑옷을 널리 제작하였으며, 또한 지남(指南) 수레를 만들어 놓고 더불어 싸울 날을 기다렸다. 이때 치우씨가 우러러 천체의 형상을 관찰하고 굽어 민심을 살펴보니 중토에 왕성한 기운이 점차 번성해지고 또한 염제의 백성들이 곳곳에서 굳게 단결하여 가볍게 모두 죽여 버릴 수 없으며, 더욱이 각각의 백성들이 그들의 군주를 섬기는데 무고하게 함부로 죽일 수 없음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물러나 돌아갈 것을 마음먹고 형제와 종실의 무리에게 힘써 크게 싸워 위세를 세움으로서 적이 감히 추격하여 습격할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하게 한 뒤, 다시 헌원과 크게 싸워 한 무리를 도륙한 후에 비로소 물러나왔다. 이때 부장 가운데 불행히도 서둘러 공을 세우려다 진중에서 전사한 자가 있었는데,《사기(史記)》에서 이른바 [마침내 치우씨를 사로잡아 죽였다]라고 한 것은 아마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치우씨는 이에 동쪽으로 회대의 땅에 할거하고 있으면서 이로서 헌원이 동쪽으로 나오는 길을 막고 있었으나, 그가 죽자 점차 물러서기에 이르렀다.


지금《한서.지리지(漢書.地理誌)》에 의하면 그의 묘가 동평군(東平郡) 수장현(壽張縣)의 감향성( 鄕城) 안에 있다 하며 그 높이가 다섯 장(丈)이라 한다.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때의 주민들이 한결같이 10월에 제사를 지내면 반드시 붉은 기운이 있어 한 폭의 진홍빛 비단과도 같이 솟아오른다고 하니, 백성들이 이를 일컬어 '치우기(蚩尤旗)'라 이름하였다. 이 어찌 영웅의 혼백이 범상한 사람들과 사뭇 달라 천년이 지나고도 오히려 사라지지 않음이 아니겠는가.


蚩尤氏雖然退歸, 中土以是蕭然, 楡罔亦不得復位, 炎帝之業, 以是永墜矣. 自是軒轅代爲中土之主, 是爲黃帝. 而蚩尤氏兄弟諸人, 乃永據幽靑, 聲威自是不 , 黃帝氏亦不得自安, 終其世, 未嘗安枕高臥;《史記》所(云)[謂][披山通道, 未嘗寧居, 邑于 鹿之(河)[河]阿, 遷(徒)[徙]往來無常處, 以師兵爲營衛.]者, 盖其戰競之意, 歷歷可觀. 而《尙書·呂刑》亦云[若古有訓, 蚩尤惟始作亂] 彼之畏威, 而世傳其訓, 亦甚明矣.


치우씨가 비록 물러나 돌아왔지만 중토는 이로서 쓸쓸해지고 유망 또한 다시 그 제위(帝位)를 회복하지 못하여 염제의 유업은 이로서 영원히 무너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헌원이 대신 중토의 주인이 되었으니, 곧 황제(黃帝)이다. 그러나 치우씨의 형제들이 모두 유청(幽靑)의 땅에 영원히 거처하며 그 명성과 위세가 계속되었기에 황제는 세상을 다 할 때까지 편안하게 베개를 높여 베고 누운 적이 없었다.《사기》에 이른바 [산을 헤쳐서 길을 내어도 편안하게 기거하지 못하고, 탁록에 도읍만 정하고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니 항상 거처하는 곳은 없었으며, 군사와 병졸들로 진영을 호위하게 하였다]고 한 것은 그 전전긍긍해 하는 마음을 역력히 볼 수 있다.《상서(尙書)》의 <여형편(呂刑編)>에 또한 [예로부터 내려오는 교훈에 '치우씨가 오직 처음으로 난을 일으켰다'고 하였으니……]라고 말한 것은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대대로 그 교훈을 전하고자 함이 분명하다.


其後, 三百餘年無事, 只與少昊氏戰, 破之, 以至檀君元年前後, 凡闕千歲. 闕者, 萬之稱也, 今之稱久遠者, 必曰闕千歲; 闕千歲者, 盖神市氏之御世, 至萬千歲, 寔爲我國最長年代, 故也. 或曰神市氏之後, 高矢氏與蚩尤氏, 相繼爲君, 前後合算, 爲闕百歲, 而檀君復立云, 此說亦近理. 大抵, 太古之事, 鴻荒(潤)[ 闊]遠, 不可得而詳矣.


그 후 삼백여 년은 아무 일 없이 단지 소호씨(少昊氏)와 더불어 싸워 이를 격파하였을 뿐이니, 단군 원년에 이르기까지 전후하여 무릇 궐 천년(闕千歲)이 된다. '궐(闕)'이란 '만(萬)'을 가리키는 것이다. 요즘 아주 오래 되었음을 말할 때는 반드시 '궐 천년'이라 말한다. '궐 천년'이란 아마도 신시씨가 세상을 다스리기 시작한 이후로 1만 1천년이 흘렀다는 것이니, 진실로 우리나라가 가장 긴 연대를 지녔다 함이 그러한 까닭에서이다. 혹은 신시씨의 뒤로 고시씨가 치우씨와 더불어 서로 계속하여 임금이 되었으니 그 앞뒤를 합하여 보면 1만 1백년이 되고 단군이 또 다시 나라를 일으킨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얘기 또한 이치에 가까우나 대저 오랜 옛적의 일은 너무 오래고 멀어서 상세하게 알 수 없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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檀君紀 (단군기)


神市氏, 寔爲東方人類之祖, 鴻荒之世, 開 之業, 賴以成焉, 盖檀君以前, 首出之聖人也. 古有淸平山人.李茗[高者](者, 高)麗時人, 有《震域遺紀》三卷, 引《朝代記》, 備載我國故史, 比於一然之書, 甚相逕庭, 中多仙家語. 余以爲, 我國以神設敎, 從古爲俗, 沈漸於人心者, 久矣. 故, 說史者, 不可只擬班.馬之筆而踞 焉. 夫漢自是漢, 我自是我也, 豈堂堂震域, 必擬漢制, 以後乃足乎!  國史蕩失於屢經兵火之餘, 今僅存者, 只是道家及緇流之所記傳, 而僥倖得, 保於岩穴者也. 道家旣承, 檀儉神人所創之源流, 而又得文獻之殘脈, 則其論東史者, 大有愈於緇流所記, 多出於牽强傅會, 臆爲之說者也. 余寧取淸平之說, 而欲無疑云.


신시씨는 진실로 동방 인류의 조상으로서 태고 적 세상이 처음으로 개벽하던 일들이 모두 그에게 힘입어 이루어 졌으니, 무릇 단군 이전에 처음으로 나타난 성인이다. 예전에 청평산인(靑平山人) 이명(李茗)이 있었는데, 그는 고려 때의 사람으로서《진역유기(震域遺紀)》 세 권을 저술하였다. 이는《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여 우리나라 옛 역사를 갖추어 실은 것으로서 일연(一然)의 책과 비교하면 서로 사뭇 큰 차이를 보이며 그 가운데는 선가(仙家)의 말이 많다. 내가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신인(神人)이 교화를 베푼 것이 오래 전부터 풍속이 되어 사람의 마음에 점차 스며들어 베어 있는 지가 이미 오래인데,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어찌하여 단지 반고나 사마천의 글만을 흉내 내며 옴짝 달싹을 못하는가! 한(漢)나라는 한(漢)나라이고 우리나라는 우리나라인데 어찌하여 당당한 진역(震域)을 꼭 히 한나라 정도에 견준 연후에야 만족을 하는가! 항차 나라의 역사가 몇 번에 걸친 병화(兵禍) 끝에 씻은 듯이 소실되고 지금에 근근히 남아 있는 것은 단지 도가와 불가에서 기록하여 전하는 것뿐이었으나 요행히 바위굴에 간직되어 오던 것을 얻게 되었다. 도가는 이미 단검신인(檀儉神人)이 창제한 근본 흐름을 이어받았으며 게다가 이렇게 문헌의 잔맥을 얻게 되었으니, 해동(海東)의 역사를 논함에 있어 견강부회하고 억측이 많은 불가의 기록에 비해 훨씬 낳다. 그러므로 나는 차라리 청평의 말을 취함에 의심이 없는 것이다.


桓雄天王御世, 凡闕千歲, 是卽神市氏. 蓬亭柳闕而居, 陶髮跨牛而治, 處無爲之事, 敷自然之化, 開創成業, 源流萬世. 及其暮年, 見功業已完, 民物樂生, 登太白山, 乃置天符三印於池邊石上檀木之下, 因化仙乘雲而朝天. 是以, 名其池曰朝天. 高矢氏諸人, 奉天符三印, 共推其子桓儉神人, 爲君長, 是爲壬儉. 壬儉者, 君長之意也, 新羅所謂尼師今者, 亦此類也. 以今追計, 約算四千餘歲, 正與唐堯同時, 世俗所謂與堯幷立者, 是也. 因稱檀君, 檀君者, 朴達壬儉之譯也. 盖神市氏, 已降於檀木之下, 而桓儉神人, 復踐 於檀樹下, 故因以檀爲國名, 則檀君者, 檀國之君也; 而東語謂檀曰朴達, 或曰白達, 謂君曰壬儉, 當時無漢字, 故只稱白達壬儉, 而後世之述史者, 譯以檀君, 復傳至後世, 則只記檀君字, 而不知檀君之爲白達壬儉之譯, 此漢字之功罪相半也. 今若以諺書幷用, 則必無是弊, 而草野愚夫, 亦可易曉, 文化之啓發, 更可速矣. 此未遑長述.


환웅천왕이 세상을 거느린지 무릇 궐 천년이니, 그가 바로 신시씨이다. 쑥대 정자와 버드나무 궁궐에 거처하며 정성으로 사람을 교화하고, 앉아서 쉴 틈도 없이 다스리며 행함이 없는 듯이 일을 처리하여 자연스러운 교화를 널리 펴고는 나라를 열어 처음으로 위업을 이루니 그 근본이 만세로 이어졌다. 그 말년에 이르러 공들인 위업이 이미 완성되고 백성과 사물들이 즐거이 사는 것을 보고는 태백산에 올라 하늘의 부절인 세 가지의 인(印)을 못 가의 돌 위 박달나무 아래에 놓고 신선으로 변화하여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올랐다. 때문에 그 못을 이름하여 '조천지(朝天池)'라 하는 것이다.


고시씨와 모든 사람은 하늘의 부절인 세 가지의 인을 받들고 그의 아들인 환검신인(桓儉神人)을 다함께 추대하여 군장으로 삼으니 이로서 임금이 되었다. '임금'이라 함은 군장을 뜻하는 것으로서, 신라에서 이른바 '니사금'이라고 말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은 종류이다. 지금으로부터 거슬러 셈하면 대략 4천여 년이 되니 바로 당요(唐堯)와 같은 때로서, 세속에서 말하듯이 [요(堯)와 아울러 함께 일어났다]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단군(檀君)'이라고 이름 하는데, '단군'이란 '박달임금'의 번역이다. 대저 신시씨가 이미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왔고 환검신인이 박달나무 아래에서 임금의 자리에 올랐기에 '단(檀)'으로 나라이름을 삼게 된 것이니, '단군'이라 함은 박달나라의 임금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말에 '단(檀)'을 '박달' 혹은 '백달'이라고 하며 '군(君)'을 '임금'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한자가 없었던 까닭에 단지 '백달임금'이라고 하였던 것을 뒤에 역사를 서술하던 자가 번역하여 '檀君(백달임금)'이라 하였고, 다시 후세에 전해지며 단지 '檀君'이라는 글자만 기록하게 되었기에 '檀君'이 '백달임금'의 번역인 줄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이는 한자의 공과 죄가 반반이라, 지금에 만약 언문과 함께 쓴다면 이러한 폐단은 반드시 없을 것이니, 곧 들녘의 어리석은 백성도 쉽게 깨우쳐 문화의 계발이 더욱더 빨라질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장황하게 서술하지 않는다.


於是相地於諸州, 乃建都于太白山西南 牛首河之原, 曰壬儉城. 今滿洲.吉林之地, 有蘇密城, 在於涑沫江之南, 此卽其地也. 涑沫江, 亦稱蘇密河, 乃古之粟末水也. 新羅時, 有粟末靺鞨者, 占居粟水之地, 及大氏之興, 爲其先 . 盖靺鞨者, 古肅愼之後, 而亦檀帝遺族也. 後屬凌夷, 盡擲先祖舊(彊)[疆]於他人之手, 而區區靺鞨一支, 猶能( )[捿]息於 楡之地; 大氏一號, 影從者數十萬, 天門大捷, 國基賴定, 夫豈偶然也哉! 盖蘇密 涑沫 粟末, 皆與牛首之意相近, 歷世傳訛, 猶不失其意, 豈聖人所宅, 神化洽被, 經萬載而其韻不絶者耶! 今, 春川.淸平山南十餘里, 昭陽.新淵兩江合襟之處, 有牛頭大村; 山中展 而江流抱回, 是爲貊國故都, 貊國亦出於檀氏之世, 則建都襲名, 必有之理也.


그리하여 모든 고을의 지세(地勢)를 살피고는 태백산 서남쪽 우수하(牛首河)의 벌판에 도읍을 세워 '임금성(壬儉城)'이라 하니, 지금의 만주 길림 땅에 소밀성(蘇密城)이 있어 속말강(涑沫江)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땅이다. 속말강은 또한 소밀하(蘇密河)라고도 일컬어지며 곧 옛날의 속말수(粟末水)이다. 신라 때에 속말말갈(粟末靺鞨)이 있어서 속수(粟水)의 땅을 점거하고 있다가 대조영이 흥기하자 그 선봉이 되었다. 대저 말갈은 옛 숙신(肅愼)의 후예로서 이 또한 단군의 자손인데, 뒤에 점차 쇠퇴해져 선조의 옛 강역을 모조리 다른 사람의 손에 던져 주고는 구구하게 말갈의 일족이 되어서 여전히 고향 땅에 깃들어 살았었다. 대씨(大氏)가 한 차례 호령하니 그 그림자를 쫓는 자가 수십만이 되었으며, 천문령(天門嶺)에서 크게 이기고는 나라의 기초를 이로서 바로잡게 되었으니, 무릇 어찌 우연이라고만 하겠는가. 대개 소밀(蘇密)·속말(涑沫)·속말(粟末) 등은 모두 '우수(牛首)'의 의미와 서로 가까운데, (그 말은) 대대로 그릇되게 전해졌지만 오히려 그 뜻을 잃지 않았으니, 이는 성인이 자리 잡은 곳에 신의 조화가 두루 미쳐 만세가 지나도록 그 운치가 끊어지지 않았음이 어찌 아니겠는가.


지금의 춘천 청평산 남쪽 십여 리에 소양(昭陽)과 신연(新淵)의 두 강이 합쳐지는 어귀에 우두대촌(牛頭大村)이 있으니, 산 속에 드넓게 펼쳐져 있으면서 강의 흐름을 안고 도는 이곳이 바로 맥국(貊國)의 옛 도읍지이다. 맥국 역시 단군 때에 나왔기에 도읍을 세우며 그 이름을 그대로 따른 것이니, 반드시 그러한 이치가 있었을 것이다.


淸平云: [粟末水之陽, 有渤海.中京.顯德府地, 此乃檀君始都處, 故壬儉城卽平壤也. 北去上京.忽汗城六百里……]云, 又曰: [高王夢有神人, 授以金符曰{天命在爾, 統我震域} 故, 國號曰震, 建元曰天統, 恒敬祀于天, 及至子孫, 驕逸而漸廢, 亦幷事儒.佛, 國遂衰……]云. 今, 內外載籍, 幷無是語. 盖忽汗之敗, 遼虜凶殘, 室宮庫藏, 焚燒略盡, 復豈有載籍之得存者耶. 雖然, 渤海王子大光顯以下, 來投於高麗者甚衆, 中多公侯卿相及慷慨泣血之士; 淸平所記, 盖有據於渤海人之所秘藏者也.


청평이 말하기를 [속말수(粟末水)의 북쪽에 발해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의 땅이 있으니, 이곳이 바로 단군이 처음으로 도읍을 정한 임금성으로 곧 평양이다. 북으로 상경(上京) 홀한성(忽汗城)과는 육백여 리 떨어 졌으며……]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고왕(高王)의 꿈 속에 신인이 나타나 금부(金符)를 주며 말하기를 {천명이 네게 있으니 우리의 진역(震域)을 통치하라}고 하기에 나라의 이름을 '진(震)'이라 하고 '천통(天統)'이라 건원하며 항상 하늘을 공경하여 제사를 지냈는데, 자손에 이르러 교만하고 안락함에 빠져 점차 이를 폐지하고 또한 유학과 불교를 아울러 섬기니 마침내 쇠퇴하여……]라고 하였다. 지금 나라 안팎의 서적에는 모두 이 말이 없다. 아마도 홀한의 패배 때 요나라 오랑캐의 흉악한 잔당들이 궁실이며 창고에 감추어져 있던 것을 거의 모두 불살라 버렸으니, 다시 어찌 서적 가운데 남아 존재하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발해왕자 대광현(大光顯) 이하 고려에 투항해 온 자가 매우 많았는데, 그 중에는 공경대부나 제후와 재상 및 비분강개하는 의기로운 선비도 많았으니, 청평이 기록한 것은 아마도 발해인들이 비밀리에 소장한 것에 근거한 바가 있었을 것이다.


可怪, 金富軾爲仁宗修《三國史記》, 而二千載往聖之遺烈, 闕而無述, 只以[海東三國, 歷年長久, 古記, 文字蕪拙, 事迹闕亡, 前言往事幽昧……]如彼等語, 謀逃其責. 至於東川遷都之年, 而僅有[平壤者, 本神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險](儉).]等[自](字). 當時較今, 猶近古五百年, 而古記之散亡無徵, 曾若是其甚耶! 且《朝代記》之名, 與《[古]朝鮮秘記》.《誌公記》.《三聖(蜜)[密]記》等書, 現於世祖求書之諭, 而金氏之世, 獨無此書耶!


괴이하게도 김부식이 인종(仁宗)을 위하여《삼국사기》를 편수하며 2천년 동안의 옛 성인이 남긴 공덕을 빠트리고 기술하지 않고서, 단지 [해동 삼국의 역년이 장구하나 옛 기록은 문자가 거칠고 졸렬하며 일의 자취는 이지러져 없어지고 앞선 말들이나 지나간 일들은 가뭇가뭇 어둡기만 하니……]라고 하며 이와 같은 말로서 그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였다. 그러다 동천왕이 천도한 해에 이르러서야 겨우 [평양은 본래 신인왕검이 자리잡은 곳이다] 혹은 [왕이 왕검에 도읍을 하였다] 등의 글귀가 있을 뿐이다. 당시를 지금과 비교하면 오히려 옛날에 5백년이나 가까운데 옛 기록이 흩어져 없어지고 증거가 될 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일찍이 이와 같은 일이 이다지도 심할 줄이야! 더욱이《조대기(朝代記)》의 이름이《고조선비기(古朝鮮秘記)》.《지공기(誌公記)》.《삼성밀기(三聖密記)》등의 책과 함께 세조(世祖)가 내린 구서(求書)의 유시에도 보이는데 유독 김씨의 세대에 이 책들이 없었더란 말인가.


盖三國鼎立, 互事呑 , 新羅終致聯唐兵而覆麗濟, 厥後渤海雖興, 只與新羅南北相對, 不惟秦.越而已. 是以, 弓裔襲據漢北之地, 則恨平壤之茂草, 聲言爲高句麗報 , 而浿西諸鎭, 望風歸服, 立國建元, 威壓列州; 甄萱叛據完山, 則憤百濟之衰亡, 以雪義慈宿憤爲言, 而西南州縣, 所至響應, 建都設職, 喜得人心. 高麗旣承羅後, 而疆土不出鴨水以外一步之地, 自與北方無涉. 且遼.金之勢, 威壓境上, 區區鴨水以南數千里地, 更非雄邦巨國之比, 則民氣之衰微, 自有甚於古者[矣. 是以, 金氏撰史之時, 已無過問, 鴨北之事者.]  平壤之地, 荒廢頗久, 舊基雖存而荊棘滋茂, 蕃人(遊)[游]獵, 侵掠邊邑者, 麗.太祖初年所記也. 然則, 高句麗亡後三百年, 而平壤不免荊棘, 渤海人之遊獵其間者, 則輒稱之以蕃人侵掠邊邑, 則只恨其大害; 然則, 忽汗敗而大氏之來奔高麗者, 亦家敗而睦族之類而已.


대저 삼국이 정립하고 있으며 서로 집어삼키고 물어뜯고 하다가 신라가 마침내 당나라 병사와 연합하게 되자 고구려와 백제를 넘어뜨렸다. 그 후 발해가 비록 일어나기는 하였지만 단지 신라와 더불어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었을 뿐 서로 마음에 두지 않았으니 곧 소원해질 따름이었다. 그러다가 궁예(弓裔)가 한강 이북의 땅을 점령하여 차지하고는 잡초만 무성해진 평양 땅을 한탄하며 고구려를 위하여 원수를 갚겠다고 천명하니, 패서(浿西)의 모든 고을이 그 기세에 힘입고 모여들어 복종하기에 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정함에 그 위세가 모든 고을을 제압하였다. 견훤(甄萱)은 완산에서 반란을 일으켜 점거하고 백제의 쇠망을 분하게 여겨 의자왕의 묵은 원한을 갚고자 한다고 천명하니, 서남쪽의 고을 가운데 그 명성이 이르는 곳마다 모두 향응하기에 도읍을 세우고 직책을 설치하여 기꺼이 인심을 얻게 되었다. 고려가 신라를 계승하였다고는 하지만 강토는 이미 압록강에서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하는 땅이 되었으며, 북방과 더불어 스스로 관계를 가지지도 않았었다. 또한 요나라와 금나라의 기세가 국경을 위세로 억누르니, 구구하게 압록강 이남의 수천 리 땅으로 다시금 웅혼하고도 거대했던 나라와 비교될 수가 없었기에 백성의 기세가 저절로 쇠미해짐이 옛날보다 심하게 되었다.


그러한 까닭에 김씨가 역사를 서술할 때는 이미 압록강 이북의 일에 대해 묻는 자가 없었다. 항차 평양 땅은 황폐해진지가 자못 오래되었으니, 예전의 기초는 비록 남아 있다고 하지만 가시덤불이 무성히 자라고 오랑캐들이 수렵하여 노닐며 주변의 고을을 약탈하였다는 것이 고려 태조 초년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한 즉 고구려가 망한 뒤 3백년이 지난 후 평양은 가시덤불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발해인들이 그 곳을 수렵하며 노닐었던 것을 그저 '오랑캐들이 침입하여 주변의 고을을 약탈했다'라고 한 것은 단지 같은 민족을 욕하는 커다란 해악을 두려워해서이며, 그러기에 홀한에서 패한 대씨가 고려로 투항하여 온 것과 같이 마치 집안이 망하면 오히려 가족끼리는 화목하여 지는 것과도 같은 것일 따름이다.


及夫 淸之造亂, 奉命剿討者, 又是金富軾也. 金氏旣無信文, 又惡妙淸之妖, 西京之破, 幷不深採其說, 下筆寫過, 只留本神人王儉之宅數句, 亦何足深責; 而渤海史, 幷不過問, 金氏於此, 終不免其咎矣. 盖金氏旣醉於漢籍, 又乏雄圖, 則雖有甚歎於吾邦之事, 却茫然不知其始末之處, 而亦無能而已矣. 我邦經史之禍, 其來久矣. 今浩歎無益, 亦復奈何.


무릇 묘청이 난을 일으키자 왕명을 받들어 그를 토벌하여 전멸시킨 사람 또한 김부식이다. 김씨에게는 원래 믿을 만한 글이 없는데, 또한 묘청의 요사스러움과 서경의 파탄을 미워한다 하면서도 더군다나 이 모두에 대해 깊이 있게 그 내용을 캐지 않고 글을 써내려가며 단지 [본래 신인왕검이 자리잡은 곳이다……]는 등의 몇 구절만을 남겨 놓았으니 어찌 그를 질책하는 것만으로 족할 것이며, 더욱이 발해의 역사는 언급도 하지 않았으니, 김씨는 이로서 언제까지나 그 허물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김씨는 본디 한나라의 서적에 빠져 있고 또한 웅장한 계책 같은 것도 결핍된 자인지라 비록 우리나라의 일에 대해 근심하여 한숨을 쉰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엉뚱하게도 그 시작과 끝도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일 따름이다. 우리나라의 경전과 역사 서적이 입은 화는 이미 오래이니, 지금에 와서 아무리 탄식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또한 어찌할 수 있을 것인가.


按《遼史·地理志》, 有[顯州.奉先軍, 上,節度. 本渤海.顯德府地. 天顯三年, 遷東丹民居之, 升爲南京城. 天顯十三年, 改南京爲東京府曰遼陽……]等句. 今遼陽在蘇密以南六百餘里, 與淸平之說, 甚相逕庭. 且遼陽旣爲中京, 則西京當擬於遼西.臨潢等地, 以渤海舊疆考之, 決無是理.  淸平諸說, 已有所據, 而《遼史》則乃元.至正中, 丞相脫脫等所撰也; 經金.宋交爭以後數三百年, 文獻自多不備, 傳說亦多失正鵠, 而渤海亡後, 其世族舊臣, 隨處擧兵, 殆將百年不息, 遼人多遷其民, 與漢民雜處, 遼西之地, 以至城邑, 冒稱渤海, 本名者, 不下數十. 元人修史者, 只憑古傳名字, 輒自斷之, 不亦 乎. 壬儉城者, 卽古語京城之意也. 平壤之意, 雖未詳, 亦必都城之義, 如新羅之徐羅伐 百濟之慰禮也.《括地志》云, 高麗治平壤城, 本王險城.《史記》.《漢書》[通及](及《通)典》, 皆有王險城字, 此又儉字之誤也. 此可續述焉.


《요사.지리지(遼史.地理志)》에 의하면 [현주(顯州)의 봉선군(奉先軍)은 상절도(上節度)로서 본래 발해의 현덕부(顯德府) 땅이다. 천현(天顯) 3년에 동란(東丹)의 백성을 옮겨 살게하고 승격시켜 남경성(南京城)으로 삼았다. 천현 13년에 남경을 고쳐 동경으로 삼고 관청을 두어 요양(遼陽)이라 하였다]는 등의 구절이 있는데, 지금의 요양은 소밀(蘇密)의 남쪽 600여 리에 있으니 청평의 말과는 서로 차이가 매우 심하다. 또한 요양이 이미 중경이 되었으니 곧 남경은 당연히 요서(遼西)나 임황(臨潢) 등의 땅에 비견되어야 하므로 발해의 옛 강토로써 이를 고찰하여 보면 절대로 그럴리가 없다. 더욱이 청평의 모든 말은 이미 그 근거하는 바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지만,《요사(遼史)》는 곧 원나라 중정(中正) 연간에 승상 탈탈(脫脫) 등이 찬술한 것으로서 금나라와 송나라가 서로 다툰 이후 거의 3백년이 지난 뒤이기에 문헌이 많이 소실되었고 내려오는 얘기 또한 자못 그 올바름을 잃어 버렸으며, 발해가 망한 후 그 명문세가나 옛 신하들이 도처에서 병사를 일으킴이 거의 백년 동안 쉴 틈이 없음에 요나라 사람들이 그 백성들을 많이 옮겨 한나라 백성과 섞어 거처하게 하였기에 요서의 땅에는 성읍에 이르기까지 발해의 지명을 모방하여 부르게 되어서 본래의 지명이 남은 곳은 수십 곳을 넘지 못하였는데, 원나라 사람이 엮은 역사는 단지 예로부터 전해 오는 이름의 글자에만 의지해서 함부로 단정지어 버린 것이므로 이 또한 소흘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임금성'이란 것은 옛날 말로 바로 '서울'이라는 의미이다. '평양'의 의미는 비록 상세하진 않지만 이 또한 반드시 '도읍한 읍성'이란 뜻으로서 신라의 '서라벌'이나 백제의 '위례'와 같을 것이다.《괄지지(括地志)》에 이르기를 [고려가 평양성에서 다스렸는데 바로 왕험성(王險城)이다]라고 하였으며,《사기》와《한서》및《통전(通典)》에도 모두 '王險城'이란 글자가 있으니 이 또한 '儉'자가 잘못 쓰여진 것이다. 이것은 계속해서 서술하겠다.


檀君旣建都於壬儉城, 乃築城郭, 建宮室, 置主命 主穀 主兵 主刑 主病 主善惡及主忽諸官, 以其子夫婁爲虎加,  諸加者也. 神誌氏卽古神誌氏之後,下皆倣此爲馬加, 曰主命; 高矢氏爲牛加, 曰主穀; 蚩尤氏爲熊加, 曰主兵; 二子夫蘇爲鷹加, 曰主刑; 三子夫虞爲鷺加, 曰主病; [周](朱)因氏爲鶴加, 是主善惡; 余守己爲狗加, 是分管諸州也. 稱爲檀君八加, 乃殺白牛, 以祭天于太白之麓.


단군이 임금성에 도읍을 세워 성곽을 축조하고 궁실을 지으며 생명과 곡식과 병사와 형벌과 질병과 선·악과 및 지방의 일 등을 주관하는 여러 관직을 설치하였다. 아들 부루(夫婁)는 호가(虎加)로 삼아 모든 가(加)들을 통괄하게 하였으며, 신지씨(즉 옛날 신지씨의 후손이다. 다음의 모든 것도 이와 같다)는 마가(馬加)로 삼아 생명을 주관하게 하고, 고시씨는 우가(牛加)로 삼아 곡식을 주관하게 하고, 치우씨는 웅가(熊加)로 삼아 병사를 주관하게 하고, 둘째아들 부소(夫蘇)는 응가(鷹加)로 삼아 형벌을 주관하게 하고, 세째 아들 부우(夫虞)는 노가(鷺加)로 삼아 질병을 주관하게 하고, 주인씨는 학가(鶴加)로 삼아 선악을 주관하게 하고, 여수기(余守己)는 구가(狗加)로 삼아 모든 고을을 나누어 관리하게 하였다. 이를 일컬어 '단군팔가(檀君八加)'라 하고는 흰소를 잡아 태백산 기슭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舊禮, 凡祭天, 必先定吉日, 擇白牛而護養之, 及期, 宰殺一薦之於嶽瀆, 白頭, 牛首之名, 頗亦有因於此也. 盖祭天報本之禮, 始於檀君, 後世歷代諸國, 莫不祭天. (扶)[夫]餘 濊( )[貊] 馬韓 新羅 高句麗諸國以十月, 百濟以四仲月, 各有禱天 舞天 祭天 郊天 迎鼓 東盟之稱. 夫餘則又有, 祭天殺牛, 以 占吉凶之俗, 盖其源流久遠而沈漸成俗, 亦可知矣. 夫尊卑之禮, 必自敬鬼神而興, 上下尊卑之序定而先王經世之道行焉. 而敬神之禮, 莫大於祭天, 通萬古,  四方, 未有人而不知畏天者. 是以,《易》曰: [大哉! 乾元. 萬物資始, 乃統天.] 又曰: [首出庶物, 萬邦咸寧.] 盖言其聖人,  天而率民也.


옛 예절에 무릇 하늘에 제사를 지내려면 반드시 먼저 상서러운 날을 정하고, 흰소를 선택하여 이를 보호하여 길러 날이 되면 잡아서 그 머리를 명산대천에 제물로 올렸다. '백두(白頭)'는 소의 머리를 이름하는 것이니 이 또한 여기에서 연유한 바가 있다. 대저 하늘에 제사를 지내어 근본에 보답하는 의식은 단군으로부터 시작된 것인데 후세의 역대 모든 나라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않음이 없었으니, 부여·예맥·마한·신라·고구려 등의 모든 나라는 10월에 지냈고 백제는 사중월에 지냈으며, 각각 도천(禱天)·무천(舞天)·제천(祭天)·교천(郊天)·영고(迎鼓)·동맹(東盟)의 명칭이 있었다. 부여에서는 또한 하늘에 제사 드린 소의 발굽으로 길흉을 점치는 풍속이 있었으니, 대개 그 원류가 오래되고 요원하지만 생활에 깊숙이 젖어 들어 풍속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대저 존귀하고 비천함에 대한 예절은 반드시 귀신을 공경하면서부터 일어나게 되었으며, 위아래와 귀천의 순서가 정해지니 세상을 다스리는 선왕의 도가 행하여지게 된 것이다. 또한 신을 공경하는 예절 가운데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 보다 더 큰 것은 없으며, 만고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서 하늘의 두려움을 알지 못하는 자는 없었다. 그러한 까닭에《역(易)》에 이르기를 [크도다 건(乾)의 원(元)이여. 만물이 원(元)에 바탕하여 비롯하나니, 이에 하늘을 모두 다스리도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모든 것이 싹이 터 나오니 모든 나라가 다 평안하니라] 하였으니, 이는 아마도 성인이 하늘의 뜻을 체득하고 그것으로 백성을 통솔하는 것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洪範八政, 三曰祀, 祀者, 所以通神明而報其本也. 是以, 陸有祭獸之豺, 水有祭魚之獺. 夫豺獺者, 禽獸也, 猶知報本之意,  人而不知(其)報本之禮乎! 又 神市, 肇宅人界, 其降自天; 桓儉繼志述事, 未嘗少弛, 此桓儉所以,  定厥鼎而便祭上天也. 且太白山者, 神市陟降之靈地也; 檀君踐(祚)[ ], 亦肇于厥地, 此又始行之, 于太白也. 是爲東方萬世之國典, 故古代國君, 必先敬事上帝卽一大主神[也]及檀君三神, 因以爲道.


홍범팔정(洪範八政)의 세번째는 '사(祀)'를 말하고 있는데, '사'란 신명(神明)과 통함으로써 그 근본에 보답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육지에는 제사를 지내는 짐승인 승냥이가 있고 물에는 제사를 지내는 고기인 수달이 있으니, 대저 승냥이며 수달은 짐승이면서도 오히려 근본에 보답하는 의미를 아는데 항차 사람이면서 근본에 보답하는 예절을 알지 못하겠는가! 또한 신시씨가 인간세계에 처음으로 자리잡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왔으며, 환검은 그 뜻을 이어 이를 처리함에 조금도 소흘하지 않았으니, 그러한 까닭에 환검이 비로소 솥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태백산은 신시씨가 하늘을 오르내리던 신령스러운 땅이며 단군의 등극 역시 그 땅에서 비롯하였으니, 이로서 그 제사를 태백에서 처음으로 행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동방에 있어 만세에 걸친 나라의 제전이 되었으니, 고대의 나라 임금은 반드시 먼저 상제(上帝)(즉 한 분의 큰 주신이다)로부터 단군에 이르기까지 삼신(三神)을 삼가 섬기는 것을 도리로 삼았다.


至於官職, 又有(太)[大]仙 國仙  衣之稱, 至若東明聖王, 有朝天之石, 明臨 夫, 曾帶 衣之職. 泉蓋蘇文, 入鳳凰山, 修鍊十年, [□□]遂爲[萬古奇傑; 金庾信, 亦入中嶽石]窟, 十年修道, 終爲名將, 助太宗致盛强. 渤海時有報本壇, 高麗時有聖帝祠, 遼有木葉山三神廟, 金有開天弘聖帝之廟. 我世宗, 設檀君廟於平壤, 世祖元年, 改位版曰[朝鮮始祖檀君之廟]. 盖神市氏之事, 聽者多疑其迂怪. 至今惟知崇檀君, 而不知其前實有神市氏之開創矣. 世俗不知原由, 只憑漢籍曰: [仙敎是黃老餘流.] 殊不知, 以神設敎, 實自我神市之世也.


관직에 있어서는 또한 대선(大仙)·국선(國仙)·조의( 衣) 등의 명칭이 있었으며, 동명성왕에 이르러서는 조천석(朝天石)이 있었고, 명림답부(明臨答夫)는 일찍이 조의( 衣)의 직책을 맡았었다. 연개소문은 봉황산에 들어가 십년을 수련한 뒤 마침내 만고에 뛰어난 호걸이 되었으며, 김유신은 중악의 바윗굴에 들어가 십년을 수도한 뒤 결국에는 명장이 되어 태종을 도와 나라를 강성함에 이르게 하였다. 발해 때는 보본단(報本壇)이 있었고, 고려 때는 성제사(聖帝祠)가 있었으며, 요나라에는 목엽산(木葉山)의 삼신묘(三神廟)가 있었고, 금나라에는 개천홍성제(開天弘聖帝)의 사당이 있었다. 우리 세종께서는 단군묘(檀君廟)를 평양에 설치하였는데 세조 원년에 위패를 고쳐 '조선시조단군지묘(朝鮮始祖檀君之廟)'라 하였다. 대저 신시씨의 일을 들은 사람은 현실에 맞지 않고 괴이함에 의심을 많이 한다. 지금은 오직 단군만을 숭상할 줄 알 뿐, 그 앞에 신시씨가 세상을 열어 창조하였음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세속은 그 연유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 단지 한나라의 서적에 의지하여 이르기를 [선교(仙敎)는 황노(黃老)의 한 부류이다]라고 하니, 신인으로서 가르침을 베푼 것이 우리 신시씨의 세상에서부터 비롯하였다는 것을 거의 알지 못한다.


檀君旣祭天而立敎率民, 而致道化行數年, 率土之民, 皆洽其化, 陶鈞停毒, 無爲而治, 此檀君神德之所致也, 乃立國之本也. 後可續述焉.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가르침을 세워 백성을 통솔하며 도를 궁구하여 교화를 행한 지 수년만에 강토의 백성에게 모두 교화가 두루 미치니, 세상이 잘 다스려지고 모든 악독함이 사라지는 등 행함이 없이도 잘 다스려졌으며, 이는 단군의 신령스러운 덕의 소치로서 곧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후에 계속하여 말하고자 한다.


居牛首河畔十年, 乃遷都於白山之南 浿水之北, 曰平壤卽第二(王)[壬]儉城也. 盖今涑沫之地, 風氣凄冷, 土味勁寒, 雖野勢通豁, 而耕農之利不如南土. 且涑沫之水, 北流入混同江, 南地交通, 自多不便, 此必其由也. 淸平云: [檀氏之世, 四遷其鼎, 第二奠都於浿水之北. 卽渤海.西京.鴨 府地, 神州是也. 高句麗.國內 桓都古城之址, 在其境內焉.] 則浿水之非獨爲今之大同江, 明矣.


우수하(牛首河)의 물가에 거처한 지 10년만에 백산(白山)의 남쪽 패수(浿水)의 북쪽으로 도읍을 옮기고 평양이라 하니 곧 두번째의 임금성이다. 대저 속말의 땅은 바람 기운에 냉기가 돌고 토양이 척박하여 비록 들판의 기세는 광활하게 트였으나 농사를 짓는 이로움은 남쪽 땅만 못하였다. 게다가 속말의 물은 북으로 흘러 혼동강(混同江)으로 들어가기에 남쪽으로의 교통에는 자연히 많은 불편이 있었으니, 이것이 반드시 그 이유일 것이다. 청평이 말하기를 [단씨(檀氏)의 치세 때 모두 네차례 솥을 옮겼는데, 그 두번째는 패수의 북쪽에 도읍을 정하였으니 발해의 서경 압록부 땅인 신주(神州)가 바로 그 곳이다. 고구려의 국내성 및 환도성(桓都城)의 옛 성터가 그 경내에 있다]고 하였으니, 패수가 지금의 대동강이 아님은 분명하다.


按《新唐書·渤海傳》曰: [高麗(古)[故]地爲西京, 曰鴨(綠)[ ]府, 領神 豊 桓 正四州.]《遼史·地理志》曰: [ 州, 鴨 軍, 節度, 本高麗(古)[故]國, 渤海號西京.鴨 府, 都督神 桓 豊 正四州事. 故縣三, 神鹿 神化 劒門, 皆廢.] 又曰: [桓州, 高麗.中都城, 古縣三, 桓都 神鄕 淇水, 皆廢.] 夫渤海承高句麗(之)後統, 高句麗復出於夫餘, 則渤海之世, 猶有古史之傳者, 想不少矣. 或曰: [平壤之敗李勣, 盡燒宮室庫藏, 復虜其公侯世族, 則史籍亦不免灰燼矣, 渤海, 安得傳其史乎?] 余以(謂)[爲]不然. 渤海.高王, 乃高句麗舊將也. 高句麗之亡, 徙居營州, 及看藎榮之亂, 與乞四比羽, 領衆東還, 麗.鞨之衆, 響應而起, 盖其舊國宿將, 如百濟之黑齒常之, 明矣; 其麾下, 想多舊國遺臣, 能博通古今者. (耳)[且]自高句麗亡後, 距高王之興, 僅二十七八年事也, 古史能無得傳乎? 且以文勢言之, 則神州當爲渤海.西京所在鴨 府地, 而神州 桓州之名, 又有近於神市 桓儉等字.  神市 桓儉, 人每認爲一人, 至今擧世殆然而. 神州屬縣, 有神化 神鹿等地; 桓州屬縣, 又有桓都 神鄕 淇水之名. 桓都者, 盖高句麗之丸都也. 丸都之名, 旣出於《魏志》.《北史》等書, 則桓.丸之誤, 固不可知, 而渤海旣以桓州 桓都定名, 則其或原於慕遠之意. 神鄕則, 有寓神市之鄕之義也. 神化則, 言神人之化也. 神鹿之稱, (丸)[尤]益可奇.  古來, 稱桓儉曰神人, 則神 桓等名, 決非偶然, 且淇水,《元.一統志》作浿水, 又與前述浿水之北之說, 暗合. 按漢籍, 說浿水及平壤者, 頗多, 今不可便述, 而神州 桓州 神化 神鹿 桓都 神鄕 浿水之名, 旣與檀君古事, 多合, 則檀君第二之平壤, 當在於鴨水之北.


《신당서.발해전》에 따르면 [고려의 옛 땅을 서경으로 삼아 압록부(鴨 府)로 이름하고 신(神)·환(桓)·풍(豊)·정(正)의 4주를 거느리게 하였다]라 하였으며,《요사.지리지》에는 [녹주( 州)의 압록군(鴨 軍)은 절도(節度)이다. 본래 고려의 옛 국토로서 발해가 서경압록부라 불렀다. 모두 신(神)·환(桓)·풍(豊)·정(正) 등 4주의 일을 감독한다. 옛 현인 신록(神鹿)·신화(神化)·기수(淇水) 등 세 군데는 모두 폐지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환주(桓州)는 고려의 중도성(中都城)이며 옛 현인 환도(桓都)·신향(神鄕)·기수(淇水) 등 세 군데는 모두 폐지하였다]고 하였다. 무릇 발해는 고구려를 이어 훗날 그 지역을 다스렸고, 고구려는 다시 부여로부터 나왔으니, 곧 발해의 세대에는 아직까지 옛 역사가 전해지는 것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혹은 말하기를 [평양이 이적(李勣)에게 패하여 궁궐이며 곳간이 남김없이 불타 버리고, 게다가 공경대부며 명문세족들은 포로로 잡혀갔기에 역사 서적 역시 재가 됨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인데 발해가 어떻게 그 역사를 전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발해의 고왕은 바로 옛 고구려의 장수이다. 고구려가 망하자 영주(營州)로 옮겨 거처하다가 신영(藎榮)의 난을 보고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무리를 영도하여 동쪽으로 돌아오니 고구려와 말갈의 무리들이 이에 호응하여 일어났다. 대저 이들은 옛 나라의 노련한 장수들로 마치 백제의 흑치상지와 같음이 분명하니, 생각건대 그 휘하에는 옛 나라의 신하였던 자로서 능히 고금의 일에 널리 통하는 자가 많이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고구려가 망한 후로부터 고왕이 일어서기까지의 사이는 겨우 27,8년의 일이니 옛 역사가 능히 전해진 것이 없었겠는가. 또한 문장의 흐름을 보아 말하더라도 곧 신주(神州)가 마땅히 발해의 서경이 있는 압록부 땅이며, 신주(神州)나 환주(桓州) 등의 이름 또한 신시(神市)나 환검(桓儉) 등의 글자에 가까운 바가 있다. 항차 신시씨와 환검신인을 사람들마다 모두 한 사람으로 여기더니 지금은 모든 세상이 거의 다 그렇게 여긴다. 신주에는 그에 속한 현으로 신화(神化)와 신록(神鹿) 등의 땅이 있고, 환주에는 그에 속한 현으로 또 환도(桓都)와 신향(神鄕) 및 기수(淇水) 등의 이름이 있다. 환도(桓都)는 아마도 고구려의 환도(丸都)일 것이다. '환도(丸都)'라는 이름은《위지(魏志)》나《북사(北史)》등의 책에도 이미 나오는데, 곧 '桓'이 '丸'의 잘못 된 표기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발해에서는 이미 환주(桓州)와 환도(桓都)로 이름을 바로잡아 놓았으니, 이는 아마도 오랜 옛날을 그리는 뜻에 그 근원을 두었으리라. '신향'이라 함은 곧 신시씨에게 의지하며 살던 마을이라는 뜻이 있으며, '신화'라 함은 곧 신인의 교화를 말하는 것이다. '신록'의 명칭은 더욱 기이하다. 항차 예로부터 환검(桓儉)을 일컬어 신인(神人)이라 하였으니, 곧 '神'·'桓'등의 이름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또한 기수(淇水)는《원일통지(元一統志)》에 패수(浿水)로 되어 있으며, 또 앞에서 서술한 '패수의 북쪽'이라는 예기와 암암리에 부합한다. 한나라 서적에 의거하면 패수와 평양을 말한 것이 자못 많으나 지금 다 말할 수는 없다. 신주·환주·신화·신록·환도·신향·패수 등의 이름은 이미 단군의 옛 일들과 많이 부합되니, 곧 단군의 두 번째 도읍인 평양은 압록강의 북쪽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


且《三國史記》, 高句麗.琉璃王二十一年, 薛支見王曰: [臣逐豕至慰那岩, 見其山水深險, 地宜五穀, 又多 鹿魚鱉之産, 王若移都, 則不惟民利之無窮, 又可免兵革之患……]云云. 故明年冬十月, 王遷都國內, 則其地, 非但山水險阻, 原野開 , 亦可知, 適於耕農矣. 夫古者建都, 必取險固殷富及交通之便. 今平壤 松京 漢陽之地, 莫不皆然, 長安 洛陽, 恒爲漢土建都之地, 亦此故也. 然則, 檀君之世, 民物漸繁, 交通愈緊, 且耕農之業, 逐漸而興, 則其捨粟末之地, 而南遷於浿水之濱, 以圖後日之隆運, 盖可想見矣.


또한《삼국사기》의 고구려 유리왕 21년에 설지(薛支)가 왕을 뵙고 아뢰기를 [신이 희생(犧牲)인 돼지를 쫓아 위나암(慰那岩)에 이르렀더니, 그 곳은 산과 물이 깊고 험하며 땅은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고 또한 순록과 물고기 및 자라 등 산물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왕께서 만일 그 곳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면 단지 백성들의 복리가 무궁할 뿐만 아니라 전쟁의 걱정 또한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다음해 겨울 10월에 왕이 도읍을 국내(國內)로 옮겼으니, 곧 그 땅은 단지 산수가 험준하고 들판이 광활할 뿐만 아니라 또한 농사짓기에 적당한 곳임을 알 수 있다. 무릇 옛날에 도읍을 세울 때는 반드시 험준하여 견고하며 산물이 풍부하면서도 교통이 편리한 곳을 취하였다. 지금의 평양이나 송경과 한양 등지의 땅이 모두 그렇지 않은 곳이 없으며, 장안과 낙양이 항상 한나라에서 도읍을 세우는 땅이 됨은 또한 그러한 까닭에서이다. 그러한 즉 단군의 세대에 백성과 사물이 점차로 번창해지고 교통이 더욱 요긴해지며 또한 농사짓는 일도 따라서 점차 일어나게 되니, 그 속말(粟末) 땅을 버리고 남쪽으로 패수의 물가로 옮겨와 후일의 융성한 운세를 도모하게 되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又按《唐書·地理志》曰: [自鴨 江口, 舟行百餘里, 乃小舫溯流, 東北三十里, 至泊 口, 得渤海之境; 又溯流二百里, 至丸都縣城, 故高麗王都; 又東北, 溯流二百里, 至神州; 又陸行四百里, 至顯州, 天寶中, 王所都; 又正東如北六百里, 至渤海王城.]云. 今, 自鴨綠江口, 約行四百餘里, 乃得婆 江合流處, 又行二百里, 至江界.滿浦鎭隔江處, 田野開豁, 山河固密. 盖檀君南遷四百餘里, 定都于古鹽難水之東, 浿水之北, 渤海.神州 神化等地, 殆無疑, 而渤海之時, 猶傳其蹟也.


또한《당서. 지리지》에 의하면 [압록강 어귀로부터 배로 1백여 리가서 또 작은 배로 동북쪽으로 30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박작구(泊 口)에 이르러 발해와의 경계에 닿는다. 2백리를 또 거슬러 올라가면 환도현(丸都縣)의 읍성에 이르는데 옛날 고려왕이 도읍한 곳이다. 또 동북으로 2백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주(神州)에 이르고, 또 육지로 4백리를 가면 현주(顯州)에 이르는데 천보(天寶) 연간에 왕이 도읍한 곳이다. 또 바로 동쪽에서 북으로 6백리를 가면 발해의 왕성에 닿는다]라고 하였다. 지금 압록강 어귀로부터 약 4백여 리를 가면 이내 파저강(婆猪江)과 합류하는 곳에 이르고, 또 2백리를 가면 강계(江界) 만포진(滿浦鎭) 강의 맞은편에 닿게 되는데, 밭과 들이 광활하고 산과 강이 견고하게 밀집되어 있다. 대저 단군이 남쪽으로 4백여 리를 옮겨와서 옛 염난수(鹽難水)의 동쪽이요 패수의 북쪽인 발해의 신주·신화 등지의 땅에 도읍을 정하였음은 거의 의심할 바가 없으며, 발해 때는 여전히 그 유적이 전해졌었다.


乃復祭天而薦新居, 築城郭, 建宮室, 浚溝 , 開田陌, 勸農桑, 治漁獵, 使諸民進用餘之物, 以補國用, 民皆熙熙而樂之. 時有, 蒼鹿遊郊外, 靑龍見朝天池. 檀君乃出巡, 至南海, 登甲比古次之山, 設壇祭天. 還至海上, 赤龍呈祥, 神女奉 , 有一童子, 衣緋衣, 從 中出謁, 檀君愛之, 因姓曰緋, 名曰天生, 遂爲南海上長. 及還至平壤, 有三異人, 自東方渡浿水而至, 首曰仙羅, 次曰道羅, 又其次曰東武. 於是因二龍之祥, 改虎加曰龍加, 使仙羅主之, 道羅爲鶴加, 東武爲狗加. 又因蒼鹿之瑞, 改鷺加曰鹿加, 依前, 使夫虞主之, 制治比前更完矣.


이에 다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새로운 거처로 옮겨 성곽을 짓고 궁실을 세우며 봇도랑을 준설하고 밭두둑 길을 열어 농업과 누에치기를 권장하였으며, 어로와 수렵을 가르치고 모든 백성들에게 쓰고 남은 물자를 진상하게 하여 이로서 나라의 살림에 보태게 하니, 백성들은 모두 화합하며 즐거워하였다. 이때 푸른 사슴이 교외에서 뛰어 놀았으며, 푸른 용이 조천지(朝天池)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단군은 이에 순행을 나가서, 남해에 이르러 갑비고차산(甲比古次山)에 올라 제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돌아오는 길에 바다에 이르니 붉은 용이 상서러움을 드러내 보이고 신녀가 함을 받들어 바치는데, 한 동자가 붉은 비단 옷을 입고 그 함속에서 나와 단군에게 알현하기에 그를 사랑스럽게 여겨 성을 비(緋)라 하고 이름을 천생(天生)이라 지어 주었더니 마침내 남해상장(南海上長)이 되었다. 돌아와 평양에 이르니 3명의 비범한 사람이 동방으로부터 패수를 건너와 있었는데, 그 첫째는 선라(仙羅)라 하였고, 다음은 도라(道羅)라 하였으며, 또 그 다음은 동무(東武)라 하였다. 이에 두마리 용의 상서러움이 있었다고 하여 호가(虎加)를 고쳐 용가(龍加)라 이름하고 선라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하였으며, 도라는 학가(鶴加)로 삼고 동무는 구가(狗加)로 삼았다. 또 푸른 사슴의 길함으로 인해 노가(鷺加)를 녹가(鹿加)로 고쳐 부르고 예전처럼 부우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하니, 제도의 다스려짐이 이전에 비하여 더욱 완전하게 되었다.


當是之時, 檀君之化, 洽被四土, 北 大荒, 西率  兪, 南至海岱, 東窮蒼海, 聲敎之漸, 偉乎廣矣. 乃區劃天下之地, 以封勳戚. 蚩尤氏之後, 封于南西之地, 巨野浩豁, 海天 碧, 曰藍國, 宅奄慮忽. 神誌氏之後, 封于北東之地, 河嶽(鹿 )[ 莊], 風氣勁雄, 曰  國, 亦稱肅愼, 方言, 豪莊之稱也, 治肅愼忽. 高矢氏之後, 封于南東之地, 山河秀麗, 草木暢茂, 曰靑丘國, 宅樂浪忽. 封[周](周)朱因氏之後, 於蓋馬國. 余守己爲(穢)[濊]君. 夫蘇 夫虞及少子夫餘, 皆封于國西之地, 句麗 眞番 夫餘諸國, 是也. 其後, 夫婁又封東來三人於各地, 後世之沃沮 卒本 沸流之稱, 皆起於其所封國名也. 通檀氏之世, 凡大國九, 小國十二, 分治天下諸州, 今不可詳矣.


당시에 단군의 교화는 사방에 두루 미쳐 북으로는 대황에 다다르고 서쪽은 설유를 거느리며, 남쪽으로 회대의 땅에 이르고 동으로는 큰 바다에 닿으니, 가르침이 퍼져 나가 물들어 감은 위대하고도 넓은 것이었다. 이에 천하의 땅을 구분하여 나누고 공훈이 있는 친족에게 주어 제후로 삼았다. 치우씨의 후손에게는 남서쪽의 땅에 봉하니, 거대하고 광활한 들녘에 바다는 고요하고 하늘은 푸르기에 남국(藍國)이라 이름하고 엄려홀(奄慮忽)에 자리 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신지씨의 후손에게는 북동쪽의 땅에 봉하니, 물길이 수려하고 산악이 장엄하며 바람의 기운은 굳세고 웅장하기에 속진국(  國) 또는 숙신(肅愼)이라 일컬었으니, 방언으로 호걸 장엄함을 말하며, 숙신홀(肅愼忽)에서 다스리게 하였다. 고시씨의 후손에게는 남동쪽의 땅에 봉하니, 산하가 빼어나게 수려하며 초목이 무성하여 청구국(靑丘國)이라 이름하고 낙랑홀(樂浪忽)에 자리 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주인씨의 후손은 개마국(蓋馬國)에 봉하고, 여수기는 예(濊)의 임금이 되게 하였으며, 부소와 부우 및 작은 아들인 부여는 모두 나라의 서쪽 땅에 봉하니, 구려(句麗)와 진번(眞番) 및 부여(夫餘) 등의 여러 나라가 바로 그것이다. 그 후에 부루가 또 동쪽에서 온 세 사람을 각지에 봉했는데, 후세의 옥저(沃沮)와 졸본(卒本) 및 비류(沸流) 등의 명칭은 모두 이 봉함을 받은 나라의 이름에서 생겨났다. 단씨(檀氏)의 시대를 통하여 무릇 큰 나라는 아홉이요 작은 나라는 열둘로서, 나누어 천하의 모든 고을을 다스렸는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蚩尤氏旣受封於藍國, 乃紹先祖之志, 撫民安業, 講習戎事, 恒爲西南藩蔽. 且其民, 數遷(徒)[徙]海岱之地, 以致後世, 恒與漢土諸國, 互相角逐. 神誌氏受封於  國, 地旣勁寒, 不宜五穀, 土廣人稀, 牧畜頗適, 乃使民帶弓佩劒, 幷事遊獵. 後世, 其民漸徙黑水之地, 遂以漁獵爲生, 艱險儉嗇,  健勁悍. 雖强勇遠出於諸國, 漸至不習文事. 後世, 漢曰 婁, 元魏曰勿吉, 隋.唐曰靺鞨, 稍與窮北蠻人相混, 漸失其俗, 頗有陵夷之歎. 近古, 金 女眞等, 皆其後身, 同族異稱也. 高矢氏就靑丘國, 觀山川, 相土地, 開田野, 興農桑. 風氣溫[ ]美, 五穀豊肥. 民皆, 衣輕(暖)[煖]而食肥( )[ ]美, 頗有冠帶衣履天下之槪, 文武亦得以幷興. 夫食足貨通然後, 國實民富而敎化成. 故《管子》曰: [倉 實而知禮節, 衣食足而知榮辱.] 若使民, 終歲  以絲粟爲慮, 則復奚暇言禮義哉! 雖然, 天覆地載, 區隅各殊, 於是氣有寒溫, 土有肥瘠, 其如天澤地利之不齊, 何是, 三家者之守國敎民之道, 所以各異, 而其果應亦自不同者也.


치우씨는 남국에 봉함을 받고서 선조의 뜻을 이어 백성들을 위무하고 생업을 편케하며 군사의 일을 배워서 익히니, 항상 서남방으로 울타리가 되었다. 또한 그 백성들을 수차례 해대(海岱)의 땅으로 옮겨가게 하니, 후세에 이르러 항시 한나라 땅의 뭇 나라들과 더불어 서로 각축하게 되었다. 신지씨는 속진국에 봉함을 받으니, 땅의 기후는 모질게 한랭하여 오곡에 마땅하지 않았으나 넓은 지역에 사람이 드물어 목축이 매우 적합하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활을 매고 검을 차고 유목과 수렵에 함께 종사하게 하였다.


후세에 그 백성들은 점차 흑수(黑水)의 땅으로 옮겨가 마침내 어로와 수렵으로 생업을 삼으며 고생하면서도 검약하니 건장하고도 억세어 졌다. 비록 용감하게 멀리 여러 나라로 나아갔으나 점차 글은 익히지 않게 되었는데, 후세에 한(漢)나라는 읍루( 婁)라고 일컬었고, 원위(元魏) 때는 물길(勿吉)이라 하였으며, 수와 당나라는 말갈(靺鞨)이라 불렀으며, 점차 북쪽 끝의 야만인들과 서로 섞이더니 점차로 그 풍속을 잃어버리고 한탄스럽게도 자못 쇠미해져 갔다. 가까이는 금나라와 여진 등이 모두 그 후손으로 같은 족속을 달리 일컬은 것이다. 고시씨는 청구국으로 나아가 산천을 둘러보고 토지의 형세를 관찰하고 밭과 들녘을 개간하여 농업과 잠업을 일으켰다. 바람의 기운은 따뜻하고 부드러워 오곡은 풍성하게 살찌니 백성들은 모두 가볍고도 따뜻한 옷을 입고 기름지고 훌륭한 음식을 먹게 되었으며, 모자를 쓰고 띠를 두르며 옷을 갖춰 입고 신을 차려 신는 등 자못 천하의 풍채가 있었기에 문무(文武)가 아울러 일어나게 되었다. 무릇 음식이 풍족하고 물자의 유통이 원활한 연후에야 나라가 견실해지고 백성이 부귀해지며 교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런 까닭에《관자(管子)》에서 이르기를 [곳간이 가득하고서야 예절을 알 수 있으며, 입고 먹는 것이 풍족하고 서야 영광됨과 수치스러움을 알 수가 있다]고 하였다. 만약 백성으로 하여금 평생을 곁눈 짓이나 하며 먹고 입는 것을 걱정하게 한다면 곧 누가 다시 한가롭게 예의며 의리를 말하려 들겠는가. 비록 다 같이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있으나 거처하는 구석은 각기 다르기에 기후는 찬 곳과 따뜻한 곳이 있고 토양은 비옥한 곳과 척박한 곳이 있으니, 마치 하늘의 혜택과 땅의 이로움이 고르지 않은 것과 같으므로 이를 어찌하겠는가! 세 집안이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가르치는 도리가 그러한 까닭으로 각기 다르기에 그 결과 또한 응당 같지 않은 것이다.


檀君旣封諸侯, 天下淸靜. 居十年, 有南夷之患, 卽甲比古次以南夷人也, 乃遣夫餘, 率兵定之. 後益遣夫蘇 夫虞, 築城於甲比古次, 以備南巡, 今江華.三郞城, 是也. 摩利山又有塹城壇, 此卽檀君設壇祭天之頭嶽也. 盖水行藉舟, 陸行藉車, 泥行乘 , 山行則 , 此乃上古交通之具. 而陸行不如水行之易, 是以, 上古建都, 必擇臨水之地. 凡人居之稱美者, 必曰阻山帶水, 或依山傍水 背山臨流者, 其所從來尙矣. 故檀君之世, 必使依山臨水而結居, 耕農漁獵, 隨便可行.《山海經》所謂: [北海有國, 名曰朝鮮, 天毒育也其人, 水居 (受)[愛]也人.]者, 非但, 其聲敎之澤, 洽被四 , 亦可窺見, 其結居之風矣. 夫檀君祭天, 非但頭嶽也. 北狩則祭太白, 南巡則祭頭嶽也, 而甲比古次傍在海濱, 通航容易, 則南巡之際, 必致祭於壇所也.  其地, 孤絶靜謐, 山岳淨潔, 海天收霽, 則 深晶瑩之氣, 使人自感, 神明之陟降者耶. 余嘗(遊)[游]觀其地, 祭壇疊石, 爲之上圓下方, 而太多頹 , 仁祖十七年改築云. 噫! 平壤故城, (王)[壬]儉舊闕, 今不留敗石殘礎, 獨一壘天壇, 得保其形骸, 豈僻處海 , 人跡稀到故耶! 余實不勝, 追遠之悲矣.


단군이 제후들을 모두 봉하니 천하는 맑고도 고요하였다. 10년 만에 남이(南夷)의 환난이 있었는데, 바로 갑비고차 남쪽의 이인(夷人)들이다. 이에 부여를 파견하여 병사를 인솔해 이를 진정시켰다. 후에 부소와 부우를 아울러 파견되어 갑비고차에 성을 쌓아 이로서 남쪽을 순행할 때를 대비하게 하니, 지금의 강화 삼랑성(三郞城)이 바로 그것이다. 마리산(摩利山)에는 또한 참성단(塹城壇)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단군이 제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두악(頭嶽)이다. 대저 물로 다닐 때는 배에 의지하고, 뭍으로 다닐 때는 수레에 의지하며, 진흙 위를 다닐 때는 썰매를 타고, 산으로 다닐 때는 징나막신을 신었으니, 이것이 바로 오랜 옛적 교통의 도구이다. 그러나 뭍으로 다니는 것이 물로 다니는 것 보다 쉽지 않았던 까닭에 옛날 도읍을 세울 때는 반드시 물에 잇대어 있는 땅을 택하였다. 무릇 사람이 거처하는 곳 가운데 좋은 곳이라 일컫는 곳은 반드시 '산을 막아서며 물을 두르고 있다'거나 '산에 의지하고 물을 곁에 두고 있다'거나 '산을 등지고 강을 끼고 있다'는 등으로 말하는 있는데, 그러한 장소는 예로부터 바라던 곳이었다. 때문에 단군의 시대에 반드시 산을 의지하고 물을 끼고 있는 곳에 집을 지어 거처하게 하여서 농사짓고 어로와 수렵을 함에 편히 행할 수 있게 하였다.


《산해경(山海經)》에 이른바 [북해에 나라가 있는데 조선이라 이름한다. 하늘이 그 사람들을 길렀고(毒은 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가에 살면서 남을 아끼고 사랑( 는 사랑함을 의미한다)한다]고 한 것은, 비단 그 덕스러운 교화의 은택이 사방에 흡족히 두루 미친 것 뿐만이 아니라 집을 지어 거처하는 기풍 또한 엿볼 수 있게 한다.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냄은 단지 두악(頭嶽)에서 만이 아니었다. 북으로 사냥을 나가면 곧 태백에서 제사를 지내고, 남으로 순행할 때는 곧 두악에서 제사를 지냈으며, 갑비고차는 바닷가에 있어서 배를 통하기에 용이하므로 남쪽을 순행할 때는 반드시 들러 제단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항차 그 땅은 홀로 떨어져 있으면서 고요하고 평온하며 산악은 정결하고 바다와 하늘은 가든히 개어 있으니, 곧 안존하고 깊으며 밝게 빛나는 기운이 사람으로 하여금 신명이 오르내리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해준다. 내가 그 땅을 유람하며 살펴보니 제단은 돌을 포개어 위는 둥글고 아래로는 네모지게 하였는데, 아주 많이 무너져 있던 것을 인조(仁祖) 17년에 다시 고쳐서 쌓았다고 한다. 오호라! 평양의 옛 읍성과 임금성의 옛 궁궐은 이제 부서진 초석의 조각하나 남아 있지 않은데 유독 한 채의 천단(天壇)만이 그 모습의 골격을 보존하고 있으니, 이는 편벽된 바다의 후미진 곳이기에 사람의 자취가 드물게 닿은 까닭이 어찌 아니겠는가. 나는 실로 옛일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구나!


御國三十餘年, 正値洪水, 浩波溜天, 懷襄遼滿之(時)[野], 浿水漲溢平壤沈潛. 乃遣四子, 遍相土地之宜, 占居阿斯達下唐莊之野, 今文化.九月山下, 有莊莊坪, 卽其地也. 余嘗觀其地, 方數百里無大河, 而水勢東走, 原土高燥, 可避西來之水矣. 乃結廬阿斯達下, 使夫婁, 盡濟平壤之民, 復治平水土屢年(以)[而]後功完, 唐莊之民, 亦已安土而樂居矣. 今俗士或云: [檀君遭洪水, 使彭吳治山川, 奠民居……]云云, 而《漢書·食貨志》明書: [武帝卽位數年, 彭吳穿濊( )[貊] 朝鮮.]等句, 則是乃, 東西有兩個彭吳, 相前後而同掌朝鮮水土之役也, 史上豈有, 如此奇巧事耶. 盖夫婁[與]弗虞同音, 且漢音.虞 吳相(同)[通], 而彭 弗兩字之初聲, 皆與夫音相近, 則後人忘夫婁字而只記其音, 又訛而只記彭吳也. 今, 人家有夫婁壇地者, 籬落淨潔處, 築土爲壇, 土器盛禾穀, 置於壇上, 編(緝)[葺]藁艸掩之, 每十月, 必薦之以新穀, 或稱業主嘉利, 卽報賽夫婁氏治水奠居之義, 賴爲鎭護之神[也].


나라를 다스린지 30여년 만에 홍수를 만났는데, 어마어마한 파도는 하늘까지 치솟아 요만(遼滿)의 들녘을 품으며 올라서니 패수의 물은 불어 넘치고 평양은 물에 잠겨 버렸다. 이에 네 아들을 보내 마땅한 땅을 두루 살피게 하고는 아사달(阿斯達) 아래 당장(唐莊)의 들녘을 차지하여 거처케 하였는데, 지금의 문화(文化) 구월산(九月山) 아래 장장평(莊莊坪)이 있으니 바로 그 땅이다.


내가 그 땅을 살펴보니 사방 수 백리에 큰 물줄기가 없고 물의 형세는 동쪽으로 내달으며 넓은 들녘의 땅은 높고도 건조하여 서쪽에서 오는 물을 피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이에 아사달 아래에 띠풀집을 짓고 부루로 하여금 평양의 백성들을 모두 구제하게 하고, 다시 물과 흙을 다스리기를 몇 년 한 후에 그 일을 온전하게 하니, 당장(唐莊)의 백성 또한 그 땅에서 편안하게 기거하며 즐겁게 생활하게 되었다. 지금의 세속 선비들이 혹 이르기를 [단군이 홍수를 만나자 팽오(彭吳)로 하여금 산천을 다스려 백성들의 거처를 정하게 하고……]라고 들 하는데,《한서. 식화지(食貨志)》에 [무제가 즉위한지 몇 년 만에 팽오가 예맥 및 조선과의 길을 터놓았다]는 등의 문구가 분명히 적혀 있으니, 이는 곧 동쪽과 서쪽에 두 명의 팽오가 연이어 앞뒤로 있으면서 조선의 물과 흙을 관장하는 일을 맡았다는 것인데, 역사에 어찌 이와 같이 기이하고 공교로운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는 아마도 '부루(夫婁)'와 '불우(弗虞)'는 음이 같고 또한 한나라 소리로 '우(憂)'와 '오(吳)'는 서로 통하며 '팽(彭)'과 '불(弗)' 두 글자의 초성이 모두 '부(夫)'의 음과 서로 가까우므로, 훗날의 사람들이 '부루(夫婁)'라는 글자는 잊어버리고 단지 그 소리만을 기록하면서 또한 잘못 전하여져 단지 '팽오(彭吳)'라고 만 기록하게 된 것이다.


지금 사람들의 집에는 '부루단지(夫婁壇地)'라는 것이 있는데, 울타리를 친 깨끗한 곳에 흙을 쌓아 제단을 만들고 토기에 곡식을 담아 제단 위에 놓아 볏짚으로 지붕을 이어 그것을 덮어두고 매 10월마다 반드시 새로운 곡식을 올리는 것으로서 혹은 '업주가리(業主嘉利)'라고 이름 하기도 하는데, 곧 부루씨가 물을 다스리고 거처를 정하여 준 것에 보답하여 제사를 지내는 의미이니, 이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누르고 백성을 보호하는 신이 된 것이다.


夫婁旣平水土仍舊而奠民居, 萬民咸懷其德. 及至粗定宅宇而, 濕汚之氣蒸成 疫, 罹病死者甚多, 夫虞幷醫藥而治之. 又値猛獸毒 乘間滋殖, 殆將橫行民間, 夫蘇乃演高矢舊法, 以乾艾爲料, 金石相擊, 因此廣造火種, 燻燒山澤, 於是獸 遠遁而其害漸除. 今人, 多携取火之物, 有金 石 艾三種, 必冠之以夫蘇之名, 如夫蘇鐵 夫蘇石 夫蘇羽者, 皆原於夫蘇氏之完其功也. 夫婁, 又使民帶劒戟而行, 及至關嶺  , 必積石爲堆, 行逢猛獸則用以爲備, 後世所謂石子軍者, (爲)[謂]東國用武之一目, 而實原於此也. 今遺俗尙存而, 野 村氓, 以此謂石城隍, 頗懷畏敬之意. 何後俗之陵夷, 如此其甚耶!


부루가 물과 흙을 예전과 같이 모두 바르게 하고 백성들을 그 땅에 편안하게 살게 하니 만백성은 모두가 그 덕을 가슴에 품게 되었다. 대충이나마 집들을 정하고 보니 축축하고 더러운 기운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병에 걸려 죽는 자가 많아서 부우가 의술과 약으로 이를 치료하였다. 또한 맹수와 독충이 그 틈을 타고 무수히 번식하여 머지않아 민간에 거리낌 없이 돌아다닐 것 같기에, 부소가 이에 고시씨의 옛법을 헤아려 마른 쑥을 재료로 하고 쇠와 돌을 맞 부딧쳐 이로서 불씨를 만들어 산과 못 등을 태우니, 그제야 맹수와 독충이 멀리 숨어 버리고 그 해악이 점차 제거되었다. 불을 일으키는 물건으로 지금의 사람들이 많이 지니고 있는 것에는 쇠와 돌과 쑥의 세 가지가 있는데, 반드시 '부소(夫蘇)'라는 이름을 머리에 붙여 '부싯쇠(夫蘇鐵)'·'부싯돌(夫蘇石)'·'부싯깃(夫蘇羽)'이라 하니, 모두 부소씨가 그 공덕을 온전히 하였음에서 연유한 것이다. 부루는 또 백성들로 하여금 검과 창을 지니고 다니게 하였으며, 관문과 산꼭대기의 고갯길 등 좁고 험한 길에는 반드시 돌을 쌓아 돌무더기를 만들어 놓고 지나다니다가 맹수를 만나면 곧 그것을 사용하여 위험에 대비케 하였다. 후세에 이른바 '석자군(石子軍)'이라 하는 것이 우리나라 무예의 한 종목이라 일컬어지게 된 것은 실로 여기에 그 기원을 둔다. 지금도 그 풍속이 남아 있어 시골의 늙은이와 들녘의 백성들이 이를 일컬어 '석성황(石城隍)'이라 하며 자못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뜻을 품고 있으니, 뒷날에 와서 풍속의 쇠퇴함이 어찌 이다지도 심하단 말인가.


初, 神市之末, 蚩尤氏兄弟, 雖自 鹿退歸, 而東人之占居淮岱者甚多, 與漢土之人雜處, 農 織牧, 資以爲業. 且南鄙海島之民, 皆以 珠魚貝, 相交易於漢土, 稍稍住息於濱海之地. 至是海岱.江淮之地, 遂爲其州里, 與漢土之民, 交(遊)[游]而錯居.《尙書》所稱,  夷 萊夷 淮夷 島夷者, 皆是也.


처음 신시씨의 말기에 치우씨의 형제가 비록 탁록으로 부터 물러나서 돌아왔으나 동방의 사람으로 회대(淮岱) 지역을 차지하고 생활한 자가 매우 많았으니, 한나라 땅의 사람들과 섞여 거처하면서 농사짓고 누에치며 길삼하고 가축을 기르는 것을 밑천으로 하여 생업을 삼았다. 또한 남쪽 지방의 바다섬 백성들은 모두 진주와 물고기 및 조개 등으로 한나라 땅에서 서로 교역하더니 차차 해변의 땅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 이에 이르러 해대(海岱)와 강회(江淮)의 땅에는 마침내 마을을 이루어 한나라 땅의 백성들과 교류하며 섞여 살게 되니,《상서(尙書)》에 이른바 우이( 夷)·래이(萊夷)·회이(淮夷)·도이(島夷) 등이 모두 그들이다.


夫餘之平南夷也, 洌水以南, 完服王化, 以故靑丘之民, 得漸遷居, 及洪水旣平, 南渡者益多. 於是南夷之人, 幷沾於神化, 遂變其俗. 後之辰 弁諸族, 皆是也.


부여가 남쪽의 이인(夷人)들을 평정하니 열수(洌水)의 남쪽은 완전히 왕의 교화에 복종하게 되었으며, 그 까닭에 청구의 백성들이 점차 옮겨가서 살게 되었고, 홍수가 완전히 다스려진 뒤로는 남쪽으로 넘어가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이로서 남쪽의 이인들도 함께 신인의 교화에 물들어 마침내 그 풍속이 변화하였으니, 후의 진. 변(辰.弁)의 뭇 부족들이 모두 그들이다.


御國四十餘載, 而有  兪之亂.   兪者,   之屬也, 洪水之際, 僥倖得免, 及看水土 定而州里蕭然, 乃乘 東侵, 其勢頗猛, 卽使夫餘會集中外之兵, 討平之. 乃益封夫餘, 北方之地, 使宅牛首忽卽先平壤, 使夫婁居(王)[壬]儉城, 令夫蘇修樂浪忽, 夫虞監唐莊京, 更封高矢氏於南方之地.


나라를 다스린지 40여 년 만에 설유(  兪)의 난이 있었다. 설유는 험윤의 족속으로 홍수를 만났을 때는 요행히 그 해를 면하더니, 물과 흙이 겨우 안정을 되찾은 뒤 마을과 고을이 쓸쓸해진 것을 보고는 이내 그 틈을 타고 동쪽으로 침략해 오니 그 기세가 자못 맹렬하였는데, 곧 부여로 하여금 안팎의 모든 병사를 모아 그를 토벌하여 평정케 하였다. 이에 부여에게 북방의 땅을 더하여 봉하고 우수홀(牛首忽)(즉 먼저 번의 평양이다)에 자리 잡게 하였으며, 부루로 하여금 임금성에 거처하게 하고, 부소에게는 낙랑홀을 다스리게 하고, 부우는 당장경을 살펴보게 하였으며, 고시씨는 그 봉토를 고쳐 남쪽의 땅에 봉하였다.


於是檀君西至(王)[壬]儉城, 按撫庶民, 大會諸侯, 令復申天下[農桑之政. 乃北巡而祭天于太白之麓, 封天下]山嶽河川之神, 凡三千餘. 歷牛首忽, 而至肅愼忽, 會北東諸侯, 令祭神誌氏之靈, 遂立廟于夙沙達. 西轉而至奄慮忽, 會南西諸侯, 令祭蚩尤氏之靈, 遂立廟于奄慮達. 復南巡, 而至甲比古次, 祭天于頭嶽之顚. 遂至樂浪忽, 會南東諸侯, 令祭高矢氏之靈, 遂立廟于蘇婁達. 乃還至平壤, 八加及衆諸侯畢集.


그리하여 단군은 서쪽으로 임금성에 이르러 모든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제후들을 크게 모아 명하기를, 다시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을 천하에 널리 펴게 하였다. 이에 북쪽으로 순행하여 태백산의 기슭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천하의 산악과 하천의 신을 봉하니 무릇 3천 곳 남짓 되었다. 우수홀을 지나 숙신홀에 이르러 북동의 제후들을 모아 명령하기를, 신지씨의 영령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숙사달(夙沙達)에 사당을 세웠다. 서쪽으로 돌아 엄려홀에 이르러 남서의 제후들을 모아 명령하여 치우씨의 영령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엄려홀에 사당을 세웠다. 다시 남쪽으로 순행하여 갑비고차에 이르러 두악의 꼭대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마침내 낙랑홀에 이르러 남동의 제후들을 모아 명하여 고시씨의 영령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소루달(蘇婁達)에 그 사당을 세우고는 평양으로 돌아오니 팔가(八加)와 뭇 제후들이 모두 모였다.


檀君乃使諸加及國內人民, 各獻祭于日月 陰陽 四時之神, 及山岳 河川 里社之主. 祭畢, 大誥于有衆, 若曰: 惟皇, 一神在最上一位. 創天地, 主全世界, 造無量物, 蕩蕩洋洋, 無物(不)[弗]包, 昭昭靈靈, 纖塵弗漏. 惟皇, 一神在最上一位. 用御天宮, 啓萬善, 原萬德, 群靈護侍, 大吉祥, 大光明, 處曰神鄕. 惟皇, 天帝降自天宮, 率三千團部, 爲我皇祖, 乃至功完而朝天, 歸神鄕. 咨爾有衆, 惟則天範, 扶萬善, 滅萬惡, 性通功完, 乃朝天. 天範惟一, 弗貳厥門, 爾惟純誠一爾心, 乃朝天. 天範惟一, 人心惟同, 惟秉己心, 以及于人心, 人心惟化, 亦合天範, 乃用御于萬邦. 曰: 爾生由親, 親降自天, 惟敬爾親, 乃克敬天; 以及于邦國, 是乃忠孝, 爾克體, 是道. 天有崩, 必克脫免. 飛禽有雙, 弊履有對; 爾男[女], 以和, 毋怨 毋妬 毋淫. 爾嚼十指, 痛無大小; 爾相愛毋胥, 讒互佑毋相殘, 家國以興. 爾觀于牛馬, 猶分厥 ; 爾互讓毋胥奪, 共作毋相盜, 家國以殷. 爾觀于虎, 强暴不靈, 乃作 ; 爾毋桀 以 物, 毋傷人, 恒(導)[遵]爾天範, 克愛物, 爾如有越厥, 則永不得神佑, 身家以殞. 爾如衝火于(花)[華]田, (花)[華]將殄滅, 神人以怒; 爾扶傾, 毋凌弱, 濟恤, 毋侮卑. 爾雖, 厚包厥(杳)[香], 必漏; 爾敬持彛性, 毋懷慝, 毋隱惡, 毋藏禍, 心克, 敬于天, 親于民, 爾乃福祿無窮. 咨爾有衆, 其欽哉!


단군은 이에 뭇 가(加)와 나라 안의 인민들로 하여금 각기 일월과 음양 및 사시(四時)의 신과 산악과 하천 및 마을의 주인에게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제사를 마친 다음 무리들에게 크게 유시하니 다음과 같았다. 하느님은 오직 하나 되는 신으로서 가장 높은 곳의 하나 되는 자리에 있도다. 하늘과 땅을 시작하게 하고 모든 세계를 주재하며 한없는 사물을 만드시니, 가없이 넓고도 넓음에 감싸지 아니한 사물이 없으며, 신령스럽게 밝고도 밝음에 가녀린 티끌마저도 새지 아니한다. 하느님은 오직 하나 되는 신으로서 가장 높은 곳의 하나 되는 자리에 있도다. 부리고 거느리는 하늘 궁전은 모든 선함이 열리고 모든 덕화가 근원하는 곳이며, 뭇 영령들이 보호하고 모시는 크게 길하고도 크게 밝은 곳이니, 이름하여 신향(神鄕)이라 한다. 하늘의 천제(天帝)께서는 하늘 궁전으로부터 3천의 동아리를 거느리고 내려와 우리들 임금의 조상이 되더니, 공덕을 온전히 함에 이르러 하늘로 향하여 신향으로 돌아갔다.


너희 무리들아! 오직 하늘 본보기를 본받아 모든 선함을 돕고 모든 악함을 소멸시키며, 본바탕이 통하여 맡을 일을 온전케 하면 이에 하늘로 향하느니라. 하늘 본보기는 오직 하나요 그 문은 둘이 아니니, 너는 오로지 정성을 순수하게 하고 너의 마음을 하나 되게 한다면 이에 하늘로 향하리라. 하늘 본보기는 오직 하나요 사람의 마음도 오직 같으니, 오로지 자기의 마음을 잡아 이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에 미치게 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이 교화되고 또한 하늘 본보기에 부합하게 되므로 이에 만방에 이르러 부리고 거느리리라.

말하노니, 네가 생겨난 것은 어버이로 말미암은 것이요 어버이는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것이므로, 오로지 너의 어버이를 공경하면 이는 능히 하늘을 공경하는 것이다. 이로서 나라에 미치게 하면 그것이 곧 충효이며, 네가 극복하여 체득하게 된다면 이가 곧 도(道)이니, 하늘이 무너짐이 있더라도 능히 피하여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날아다니는 짐승도 쌍이 있고 헤어진 신발도 짝이 있으니, 너희 남녀들은 화합할 뿐 미워하지 말고 투기하지 말며 음탕하지 말지어다. 네가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아라 아픔에는 크고 작음이 없으니, 너희는 서로 사랑할 뿐 너희끼리 헐뜯지 말 것이며, 서로 도울 뿐 너희끼리 죽이지 말지어다. 집안과 국가가 이로서 일어나리라. 너희는 보아라, 소나 말도 가히 그 먹이를 나눠 먹으니, 너희는 서로 양보할 뿐 너희끼리 서로 빼앗지 말 것이며, 서로 같이 경작할 뿐 너희끼리 훔치지 말지어다. 집안과 국가가 이로서 은성하리라. 너희는 보아라, 범은 강하고도 사나우나 신령스럽지 않기에 재앙을 일으키는 법이다. 너희는 사납고 교만해져 사물을 상하게 하지 말며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지 말고 항상 존중하며 너희 하늘 본보기를 따라 사물을 사랑하라. 너희가 만약에 그것에 지나침이 있다면 곧 영원히 신인의 도움을 얻지 못할 것이며 몸과 집안은 이로서 망하리라. 너희가 만약 꽃밭에 불을 질러 꽃이 장차 모조리 없어지게 되면 신인이 이로서 노여워할 것이다. 너희는 위태로움을 도울 뿐 약함을 업신여기지 말며, 어려움을 구제할 뿐 천하다고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가 비록 두텁게 감싼다 하더라도 그 향기는 반드시 새어나오는 것이니, 너희는 타고난 떳떳한 성품을 삼가 지닐 뿐 간사함을 품지 말고 악함을 숨기지 말고 재앙을 감추지 말라. 마음으로 능히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가까이하면 너희는 이에 복록이 한없을 것이니, 이로서 너희 무리들은 삼갈지어다.


檀儉旣大誥于有衆, 於是神德大彰, 如此數十年, 天下復熙熙焉, 忘其災矣. 或曰, 此卽檀君八條之敎令, 可以此分八目, 或說是也. 後世, 駕洛國.房登王時, 有 始仙人者, 自七點山而來, 見王於招賢臺曰: [君以自然爲治, 則民[自以](以自)然成俗. 爲治之道, 古有其法, 君何不體之.] 饋以大牢, 辭不受而去. 此道, 破先聖之訣也. 又崔孤雲.鸞郞碑序曰: [國有玄妙之道, 實乃包含三敎, 接化 生. 且如入則孝於親, 出則忠於君,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孤雲, 精敏文學, 卓越諸人, 博通古今, 文名飄動, 其言可謂善採先聖垂訓之精華矣. 此外, 散見於載籍者, 及道家文集, 如《四聞錄》.《三韓拾遺記》等諸書者, 不可 記矣.


단검이 무리들에게 크게 유시를 내리니 이에 신인의 덕화가 크게 빛나기를 수 십 년, 천하는 다시 화락하여 그 재앙을 잊게 되었다. 혹은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단군팔조(檀君八條)의 교령(敎令)'이라 하는데, 이것을 여덟 조목으로 나눌 수 있으니 혹은 그 예기가 맞을 것이다. 후세에 가락국 방등왕(房登王) 때 암시선인( 始仙人)이 있어 칠점산(七點山)으로부터 내려와 초현대(招賢臺)에서 왕을 뵙고 이르기를 [임금께서 자연의 도리로서 다스림의 기본을 삼으면 곧 백성들도 자연의 도리로서 풍속을 이루어 갈 것입니다. 다스림의 기본이 되는 도(道)는 예로부터 그 법도가 있는데 임금께서는 어찌하여 이를 체득하지 않습니까]라고 하기에, 왕이 크게 희생(犧牲)을 잡아 보내 주었으나 사양하며 받지 않고 떠나가 버렸다. 그가 말하는 도가 바로 앞선 성인의 도를 공구(窮究)할 수 있는 비결이다. 또 최고운(崔孤雲)의 난랑비(鸞郞碑) 서문에 이르기를 [나라에는 심오한 이치를 지닌 도가 있으니, 실로 삼교(三敎)를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뭇 삶의 무리들을 가까이에서 교화한다. 또한 들어오면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나서면 임금에게 충성함과 같은 것은 노나라 공자의 요지이고, 행함이 없는 듯이 일을 다스리고 말함이 없는 듯이 가르침을 펴는 것은 주나라 노자의 근본 되는 생각이며, 모든 악함을 짓지 말고 모든 선함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천축국 태자의 교화이다]라 하였다. 최고운은 문학에 정통하고 재주가 뭇 사람들 보다 뛰어나며 고금의 일에 대해 두루 통하고 글의 명성이 자자한데, 그의 말은 앞선 성인들이 후세에 전하는 교훈의 진국을 잘 가려 뽑았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에 여러 서적에 흩어져 보이는 것과《사성록(四聞錄)》과《삼한습기(三韓拾記)》같은 도가(道家) 문집에 있는 것들은 빠짐없이 적지 못하였다.


從此時, 常出巡, 以孟冬月祭天, 遂爲萬世之遺俗, 此乃東方特有之盛典, 而非外邦之可比也. 太白一山, 足壓崑崙之名而有餘矣. 古之三神山者, 卽太白山也. 三神, 又云三聖, 今文化.九月山有三聖祠, 卽敬祀桓因 桓雄 桓儉者也. 今檀君之敎, 雖不得健行, 而神化靈訓猶傳於後世. 擧國男女, 猶崇信於潛默之中, 卽人生生死, 必曰三神所主, (兒小)[小兒]十歲以內, 身命安危及智愚庸俊, 多托於三神帝釋. 三神者, 卽創天地 造治民物之三神也. 帝釋等語, 雖出於佛家之《法華經》, 亦天帝之意. 此則, 只因古史譯出於緇流之手也, 不可妄以爲非. 昔司馬相如謂漢.武帝曰: [陛下謙讓而弗發, 契絶也三神之歡.] 註云: [三神, 上帝.] 三神之說, 當時亦通于漢土矣.


이때부터 항상 순행을 나가면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마침내 만세에 길이 전하는 풍습이 되었다. 이는 동방 특유의 성대한 제전으로 외국과는 가히 비할 바가 아니다. '태백'이라는 하나의 산은 족히 곤륜(崑崙)의 이름을 누르고도 남음이 있으니, 예전의 삼신산이 곧 태백산이다. '삼신(三神)'을 또는 '삼성(三聖)'이라 하는데, 지금의 문화 구월산에 삼성사(三聖祠)가 있어서 환인과 환웅 및 환검을 공경하여 제사를 지낸다. 지금에 와서 단군의 가르침이 비록 꾸준히 행해지지는 않지만 신령스러운 교화의 가르침은 여전히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온 나라의 남녀가 여전히 은연중에 받들어 믿고 있는 것으로서, 곧 사람의 삶에서 나고 죽고 하는 것은 반드시 삼신이 주관한다고 말하며, 10살 이전 어린아이의 신변과 목숨의 안위 및 슬기롭고 어리석음과 못나고 뛰어남 등을 모두 삼신제석(三神帝釋)에게 의탁한다. '삼신'은 곧 하늘과 땅을 열고 백성과 사물을 만들어 다스린 삼신을 말하는 것이다. '제석' 등의 말은 비록 불가의《법화경》에서 나왔지만 역시 하늘 임금의 뜻으로서, 이것은 단지 옛 역사가 승려의 손으로 옮겨진 까닭일 뿐이니 망령되게 잘못되었다고만 할 수는 없다. 옛날 사마상여(司馬相如)가 한나라 무제에게 아뢰어 [폐하께서 겸손하게 사양만 하시고 내어 비치지 않으신다면 이는 삼신(三神)의 기쁨을 끊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 주석에 삼신은 상제를 말한다 하였으니, 삼신이란 말은 당시 한나라에도 통용되었던 것이다.


盖東方諸山, 以太白名者, 頗多. 俗士, 卒以寧邊.妙香山當之, 實由於一然《三國遺事》之說, 而彼等眼孔如豆, 安足以與論哉! 今白頭山上, 有大池, 周八十里, 鴨( )[綠] 混同諸[江]發源於此, 曰天池, 卽上述神市氏乘雲朝[天]處也. 妙香, 曾無一小 , 其不爲桓雄肇降之太白, 不足辨也. 盖白頭巨岳, 盤據大荒之南, 橫 千里, 高出二百里, 雄偉山層   磅 , 爲東方諸國之鎭山. 神人陟降, 實始於此, 豈區區妙香一山, 只係狼林西走之一 , 而得 如許聖事耶! 世俗, 旣以妙香爲太白, 則其見, 只局於鴨水以南一隅之地, 便唱, 山之祖宗崑崙, 欣欣然, 以小中華自甘宜; 其貢使北行屢百年而不爲之恨, 僅以南漢下城之羞,  ( )然, 自歎者也.


무릇 동방의 모든 산 중에 '태백(太白)'이라 이름한 것이 자못 많은데 세속의 선비들이 졸지에 영변의 묘향산을 그것으로 여기고 있으나 이는 그저 일연의《삼국유사》의 이야기에서 연유한 것일 뿐이니, 저들의 눈구멍이 마치 콩알 같음에 어찌 족히 더불어 논박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백두산 위에는 큰 못이 있어 주위가 80여 리며, 압록(鴨綠)과 혼동(混同) 등의 여러 강이 여기에서 발원하기에 '천지(天池)'라 일컫는데, 곧 위에서 서술하였듯이 신시씨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곳이다. 묘향산에는 일찍이 작은 물줄기 하나 없었으니 그 곳이 환웅이 처음으로 내려온 '태백'이 될 수 없음은 밝힐 필요도 없다. 무릇 백두의 웅대한 산악은 대황(大荒)의 남쪽에 굳게 자리하여 좌우로 1천리에 뻗치고 위로 2백리를 솟아 있으며, 웅장하면서도 층을 지은 험한 능선이 길게 이어지면서 아울러 하나가 되어 있으니, 동방의 모든 나라를 위엄으로 진압하는 명산이다. 신인의 오르내림이 실로 여기에서 처음 하였거늘, 구구하게 단지 서쪽으로 내달은 낭림의 한 줄기에 매어 달린 묘향의 산 하나가 어찌 그와 같은 많은 신성한 일들에 참여할 수 있었겠는가! 세속에선 이미 묘향을 태백으로 여기지만, 이는 곧 그 견해가 단지 압록강 이남의 한 모퉁이에만 국한된 것일 뿐이다. 곧잘 산의 으뜸이 되는 우두머리는 곤륜이라 노래 부르고 기꺼이 스스로를 '소중화(小中華)'로 마땅한 듯 달갑게 여기며, 그 조공의 사절이 북으로 다닌 지가 수 백 년이 되었으나 이는 한스러워 하지 않다가 겨우 남한산성 아래의 수치만을 떠들썩해 하니 스스로 한탄스러울 뿐이다.


余嘗歷觀載籍, 白頭山之異名, 頗多.《山海經》曰: [大荒之中, 有山, 名不咸, 有肅愼氏之國.].《後漢書》曰: [東沃沮, 在高句麗.蓋馬太山之東, 東濱大海, 北與 婁接.] 註云: [在平壤城西.] 此, 漢士眩學之(忘)[妄]語也.  婁, 乃肅愼後身, 東沃沮, 又在今咸鏡之地, 則蓋馬之(謂)[爲]太白, 可知. 且《麗史·列傳》曰: [女眞, 本高句麗之部落, 聚居于蓋馬山東.]云, 當時女眞, 明在白頭山之東北, 蓋馬之爲白頭, 明矣.《魏書·勿吉傳》曰: [國有徒太山, 魏言太白, 有虎豹熊狼不害人, 人不得上山 溺…]云云.《北史·勿吉傳》[曰亦](亦曰): [國有徒太山, 華言.太白, 俗甚畏敬之.]《唐書》曰: [粟末部居最南, 抵太白山, 亦曰徒太山, 與高麗接.]《括地志》曰: [靺鞨, (古)[故]肅愼也, 其南有白山, 鳥獸艸木皆白.]《金史·高麗傳》述高句麗以來靺鞨之事曰: [黑水末曷, 居故肅愼地, 有山曰白山, 蓋長白山, 金國之所起焉.] 葉隆禮《遼志》曰: [長白山在冷山東南千餘里, 盖白衣觀音所居, 其山內禽獸皆白, 人不敢入, 恐穢其間…]云云, 又曰: [黑水發源于此.]《明一統志》曰: [長白山在三萬衛東北千餘里, 故會寧府南六十里, 橫 千里, 高二百里, 其 有潭, 周八十里, 淵深莫測, 南流爲鴨綠江, 北流爲混同江, 東流爲阿也苦河.]云. 然則, 不咸 蓋馬 太白 徒太 長白等名, 皆爲同山異名, 而歷代方言之異也. 又《高麗史》[光宗十年, 逐鴨綠江外女眞於白頭山外居之.]云, 則白頭之名, 始見於此. 而蓋字之音, 近[白於](於白)字之意; 東語, 馬 頭亦同訓, 蓋馬, 白頭之異字同意亦可明辨, 而白頭之名, 其來亦尙矣.


내가 일찍이 여러 서적들을 두루 살펴 보건대 백두산의 다른 이름이 자못 많았다.《산해경》에 이르기를 [대황의 가운데 산이 있으니 이름하여 불함(不咸)이라 하며 숙신씨의 나라가 있다] 하였으며,《후한서》에 이르기를 [동옥저는 고구려의 개마태산(蓋馬太山)의 동쪽에 있다. 동으로 큰 바다를 접해 있고 북으로 읍루와 더불어 접해 있다] 하고는 그 주석에 [평양성의 서쪽에 있다] 하였는데 이것은 한나라 선비가 잘 알지 못하고 배웠기에 생긴 망령된 말이다. 읍루는 곧 숙신의 후신이며 동옥저 또한 지금의 함경의 땅에 있었으니 '개마'가 '태백'이 됨을 알 수 있다.


또한《고려사. 열전》에 이르기를 [여진은 본래 고구려의 한 부락이었는데 개마산의 동쪽에 모여 살았다]라 하였으니, 당시의 여진이 분명히 백두산의 동북에 있었으므로 '개마'가 '백두'가 됨은 분명하다.《위서. 물길전》에 [나라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위(魏)나라 말로는 '태백'이라 한다. 범과 표범·곰·승냥이 등이 있으나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사람들은 산위에 올라가서는 방뇨를 하지 않았다] 하였고,《북사. 물길전》에도 역시 [나라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중원의 말로 '태백'이라 하며, 풍속에 그것을 매우 삼가며 공경한다]고 하였다.《당서》에는 [속말부가 가장 남쪽에 살고 있는데, 도태산(徒太山)이라고도 일컬어지는 태백산과 맞닥뜨린 곳에서 고려와 더불어 접해 있다] 하였다.


《괄지지》에는 [말갈은 옛 숙신이다. 그 남쪽에 백산(白山)이 있는데 새와 짐승이며 풀과 나무가 모두 희다]라 하였고,《금사. 고려전》에는 고구려 이래 말갈의 일을 기술하며 [흑수말갈이 옛 숙신의 땅에 거주하였는데 '백산(白山)'이라 불리는 산이 있었으니 곧 '장백산'으로서 금나라가 일어난 곳이다]라고 하였다. 엽융례(葉隆禮)의《요지(遼志)》에는 [장백산은 냉산(冷山)의 동쪽 1천여 리에 있으며 대저 백의관음이 기거하는 곳이다. 그 산 안의 짐승은 모두 희다. 사람들은 그 곳을 더럽힐까 염려하여 감히 들어가지 않는다]라 하였고, 또 [흑수(黑水)가 그 곳에서 발원하였다]라고 하였다.


《명일통지(明一統志)》에는 [장백산은 삼만위(三萬衛) 동북쪽의 1천여 리에 있으니 옛 회녕부(會寧府)의 남쪽 60리에 있다. 좌우로 1천리에 뻗어 있고 위로 2백리를 솟아 있으며, 그 곳의 정상에 못이 있는데 주위는 80리이며 못은 깊어서 측량할 수 없다.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이 되고 북쪽으로 흘러서 혼동강이 되며 동쪽으로 흘러서 아야고하(阿也苦河)가 된다] 하였으니, 불함·개마·태백·도태·장백 등의 이름은 모두 같은 산의 다른 이름으로 역대 방언의 차이점일 뿐이다. 또《고려사》에 [광종(光宗) 10년에 압록강 밖의 여진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내어 살게 하였다] 하였으니, 곧 '백두'의 이름이 처음으로 여기에서 보인다. '개(蓋)'의 음은 '백(白)' 자의 뜻과 가까우며, 동방의 말에 '말(馬)'과 '두(頭)'는 같은 새김이기에 글자의 뜻으로 새기면 '개마(蓋馬)'와 '백두(白頭)'가 글자는 다르지만 같은 뜻임이 분명한 것이 되므로 '백두'라는 이름의 유래 또한 오래된 것이라 할 것이다.


東方諸山, 有馬耳 摩尼等山, 俗人幷以摩利呼之, 曾不相別. 盖馬耳 摩尼, 幷出於頭字之意也. 今廣州有修理山, 此必鷲山之意也; 積城有紺岳山, 則乃玄山之意也; 忠州有達川, 則是月川之意也; 而馬耳 摩利之爲頭嶽或頭山之訛, 尤可辨矣. 太白之一名曰白頭, 甲比古次之祭天處曰頭岳, 此非檀君祭天, 必隨頭名之山也, 乃檀君祭天處, 必成頭名之山也. 盖頭者, 最上或元首之稱也. 白頭爲東方諸山之宗, 而又是東人始降之地, 兼復, 元首檀君, 恒行祭天禮于其山, 當時之人, 名之曰頭山也, 必矣. 而甲比古次之頭嶽, 亦不出於此外也. 獨不知, 牛首河之名, 亦只出於沈牛首之俗耶? 此不可斷矣. 然則, 神市氏(之)降, 旣在[白頭於山](於白頭山), 乃漸(徒)[徙]西南, 復沿浿水而南來, 三氏之族, 又各四遷也. (耳)[且]太白旣爲東方靈地, 祭天大儀必始於其山, 則自古, 東民之崇敬是山也, 不尋常. (耳)[且]古(者)昔, 禽獸悉沾神化, 安捿於其山而未曾傷人, 人亦不敢上山 溺而瀆神, 恒爲萬代敬護之表矣. 夫我先民, 皆出於神市所率三千團部之裔. 後世, 雖有諸氏之別, 實不外於檀祖同仁之神孫. 因 雄 儉.三神之, 開創肇定之功德, 常傳誦而不忘, 則古民指其靈山曰三神山者, 亦必矣.


동방의 여러 산에는 '마이(馬耳)'나 '마니(摩尼)' 등의 산이 있는데, 항간의 사람들은 뭉뚱그려 '마리(摩利)'라고 부를 뿐 일찍이 구별하지 않았다. 대저 '마이'와 '마니'는 모두 '頭'의 '머리'라는 뜻에서 나왔다. 지금의 광주에 '修理山'이 있는데 이는 필시 '수리산(鷲山)'이라는 뜻이며, 적성에 있는 '紺岳山'은 곧 '검은산(玄山)'이라는 뜻이며, 충주에 있는 '達川'은 바로 '달천(月川)'이라는 뜻이니, '마이'나 '마리'가 '頭嶽' 혹은 '頭山'이 잘못 전해져 그리되었음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태백'을 달리 일컬어 '백두'라 하였으며 갑비고차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던 곳을 '두악'이라 하였는데, 이는 단지 단군이 반드시 '머리'라는 이름이 붙은 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 아니라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은 반드시 '머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음을 말한다. 무릇 '머리'라 함은 가장 높다거나 혹은 으뜸 되는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백두'가 동방 모든 산의 으뜸이 되고 또한 동방의 사람이 하늘로부터 처음 내려온 땅이 되며, 게다가 더하여 으뜸 되는 우두머리인 단군이 항상 그 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예식을 행하였기에 당시의 사람들이 '머리산(頭山)'이라 이름하였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니 갑비고차의 '두악' 역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우수하(牛首河)'라는 이름은 알지 못하겠는데, 이 역시 단지 소머리를 물 속에 담그는 풍속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는 단정 지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신시씨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이미 백두산에 있으면서 점차 서남쪽으로 옮기고, 다시 패수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니 삼씨(三氏)의 겨레들은 각자 더욱더 사방으로 옮겨갔다. 또한 태백이 이미 동방의 신령스러운 땅이 되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큰 의식은 반드시 그 산에서 시작하였으니, 예로부터 동방 민족이 이 산을 숭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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漫說 (만설)


天其運乎, 地其處乎, 日月其爭於所乎? 孰主張是, 孰維綱是? 孰居天地之內, 恒推以行是? 意者, 其有機氣之不得已耶? 其運轉而不能自止耶? 觀! 夫大界列宿,   燦爛明朗, 其光自何, 其大幾何? 觀乎! 千 之岡而行人如豆; 望乎! 百里之海(而)歸帆似葉; 仰乎! 九萬里之遙而星辰如燭, 其大幾何, 其光何幾?  ! 地天之隔, 非但九萬者里耶! 人行于市而肩尻摩, 車轉于通衢則其 搏. 星辰麗于穹蒼, 則昭昭耿耿, 齊齊整整, 井然有序, 罔或有侵. 孰引是, 孰主張是? 日遠於星, 月近於星耶? 抑! 亦星居乎最遠耶? 日月之大, 較於列宿, 何如? 洪爐之火, 隔丈而燎之, 則不過微溫; 滿車之氷, 距尋而當之, 則只感微凉. 日月之氣, 來自九萬里而凉熱逼人, 其熱幾何, 其寒凡幾?


하늘이 움직이고 있는 것인가, 땅이 멎어 있는 것인가, 해와 달이 자리다툼을 하고 있는 것인가? 누가 이를 주재하여 펼치고, 누가 이를 붙잡아 다스리며, 어느 누가 하늘과 땅에 머물며 항상 이를 밀어서 움직이게 하는가? 생각건대 그 곳에는 바탕이 되는 기운이 있어 마지못해 그리되는 것인가, 그 움직이고 구르는 것은 스스로 멈추지 못해서 그렇게 되는 것인가? 이 넓은 세계에 늘어서 있는 별자리를 바라보노라면 멀디멀고도 찬란하게 밝으니, 그 빛은 어디서부터 온 것이며 그 크기는 얼마만한 것인가? 천 길 높은 산마루에서 살펴보노라면 지나다니는 사람은 마치 콩 알만 하고, 백리의 바닷길을 바라보노라면 돌아오는 돛단배가 마치 잎사귀 같은데, 9만리의 아득한 하늘을 올려다보면 늘어선 별들은 마치 촛불과도 같으니, 그 크기는 얼마나 되며 그 밝기는 얼마만한 것인가? 항차 땅과 하늘과의 간격이 단지 9만리 만 될 것인가?


사람들이 저자거리를 지나다니자면 어깨와 꽁무니가 맞닿게 되고, 수레가 번화한 네거리를 지나가노라면 곧 그 바퀴가 부딪치게 되는데, 늘어선 별들은 높고 푸른 하늘에서 빛을 발하면서 밝디 밝게 반짝거리고 가지런히 질서가 있어 행여나 침범하는 일도 없으니, 누가 이를 이끄는 것이며 누가 이를 주재하여 펼치는 것인가? 해는 별보다 멀고 달은 별보다 가까운 것인가, 아니면 별이 가장 멀리 있는 것인가? 해와 달의 크기는 별들과 비교하여 어떠한가? 큰 화로의 불도 열 자 떨어져 불길을 쬐면 단지 따뜻할 뿐이요, 수레에 가득 실은 얼음도 얼마 거리를 두고 마주 서 있으면 단지 서늘할 뿐인데, 해와 달의 기운은 9만리의 먼 곳으로부터 오면서도 춥고 더움이 사람을 다그치니, 그 열기는 얼마만한 것이며 그 냉기는 또한 얼마만한 것인가?


且夫! 山岳之莊雄, 河海之汪洋, 萬象森列, 兆物備載, 岳頂一(卷)[拳]之石, 谷底一莖之草, 自得其所, 互誇厥美; 糞堆蠢 之蟲, 長渚飄泊之藻, 各安其所, 互弄厥質; 孰撑是而不崩, 孰護是而不決? 孰守是, 孰掩庇是? 意者, 宇宙之內 蒼茫之外, 別有眞神之主宰歟? 東人則曰桓因主神, 漢土之人則曰上帝, 西域之人則曰佛 , 大秦之人則曰天主, 皆以主宇宙 統萬象爲言. 其造物者之爲性也, 隨民而各異耶? 同 而異用耶? 抑! 同一而異觀耶? 同一之元首而, 我曰(王)[壬]儉, 漢曰帝王, 倭曰命或尊. 諸民之名造翁也, 亦若是而已耶? 飛螢有光,  木放氣,  梨之木能接枝而致盛, 鳧鷄之屬能抱卵而 育. 是,  質之外, 別有精力耶? 物物之精力, 能相交而致生耶? 宇宙之內 蒼茫之外, 別有精靈, 貫流周包, 推運其體質耶? 漢人之說, 盤古.三皇之開闢創始者, 實耶? 東人之言, 三神之肇判開創者, 眞耶? 余不敢校其善否. 宇宙之內 蒼茫之外, 別有一大精靈, 維綱是, 主張是, 能推運而經營之, 則信矣.


또한 산악의 웅장함과 강과 바다의 광대함 속에는 만 가지의 모습들이 늘어서 있고 억 가지의 사물들이 갖추어 실려 있으며, 산마루의 한줌 돌과 골짜기의 한 뿌리 풀도 스스로 자리하는 곳을 얻어 그 아름다움을 서로 뽐내고, 거름더미에서 꿈틀거리는 벌레와 늘 물가를 떠다니는 풀들도 제각기 자기 자리에 깃들여 그 모양을 서로 희롱하고 있으니, 누가 이를 떠받쳐서 무너지지 않게 하고 있으며, 누가 이를 보호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고 있으며, 누가 이를 지키고 누가 이를 감싸 안아 돌보고 있는 것인가? 생각건대 우주의 안으로 아득히 넓은 그 언저리에 따로 참된 신이 있어 이를 주재하고 있는 것인가?


동방의 사람들은 곧 '환인주신(桓因主神)'이라 하고, 한나라 땅의 사람들은 '상제(上帝)'라 하며, 서역 사람들은 '불타(佛陀)'라 하고, 대진 사람들은 '천주(天主)'라 하는 것은 그 모든 것이 바로 우주를 주재하고 만물을 통치함을 말로서 드러낸 것이다. 그 조물주의 성품은 백성에 따라 제각기 다른 것인가, 바탕은 같으면서 드러남만이 다른 것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온전히 같으나 달리 볼뿐인가? 같은 우두머리를 두고 우리는 '임금'이라 하고, 한나라는 '제왕'이라 하고, 왜는 '명' 혹은 '존'이라 하니, 모든 민족이 조물주를 이름 하는 것 또한 그와 같을 따름인가?


날아다니는 반딧불에도 빛이 있고 썩은 나무에서도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감나무 배나무는 가지에 접을 붙이면 능히 과실이 무성해 지고, 오리나 닭 등은 알을 품어 능히 새끼를 낳아 기르니, 이것은 몸의 바탕 외에 따로 응결된 힘이 있는 것이며 그러한 사물과 사물들의 응결된 힘이 서로 교접하여 능히 생명을 낳는 것인가? 우주의 안으로 아득히 넓은 그 언저리에 따로 정령(精靈)이 있어 일관되게 흐르고 두루 감싸 안으며 그 몸의 바탕을 밀어 움직이게 하는 것이겠는가? 한나라 사람의 말에는 반고(盤古)와 삼황(三皇)이 세상을 처음으로 연 창시자라 하는데 이것이 진실인가? 동방 사람의 말에는 삼신(三神)이 세상을 처음으로 가른 창조자라 하는 데 이것이 진실인가? 내가 감히 그 옳고 그름을 단정할 수는 없으나, 우주의 안으로 아득히 넓은 그 언저리에 따로 한 큰 정령(精靈)이 있어 이 세상을 잡아 유지하고 이 세상을 주재하여 펼치며 능히 밀어 움직여서 이 세상을 이끌어 나간다고 한다면 곧 믿을 만한 것이 될 것이리다.


人生則 溫而動, 靈能慧明; 人[事](死)則(驅)[軀]殼厥(今)[冷], 骨肉梗固, 腐爛而散滅, 不數年而膚肉不留, 不百年而骨骸莫存. 天地之氣, 聚而爲物 爲質, 散則復爲空 爲氣歟? 靈性發於氣質, [氣質]散亡則靈性亦隨而滅歟? 抑! 天地靈秀之性, 鍾而爲靈, 貞明之氣, 聚而爲體,  沒而靈自不滅耶? 靈旣不(沒)[滅]則返朝于天耶? 悠悠然, 縱遊乎六合耶? 抑! 如佛氏之說, 時墮輪回之苦, 重疊而爲人耶? 觀! 夫蟲蠶卵者, 能知其爲母蛾所産耶? 卵化爲 ,   然索餌而走動, 能知其[從爲](爲從)卵而出者耶?  旣成長, 造繭脫毛而爲 , 暗眠於其中, 使人觀之,   然樂矣. 雖然, 渠能知其方夢而覺夏 之爲 耶?  旣 滿, 則脫殼爲蛾, 穿繭而出, 翩翩然飛(飛)舞於林 , 渠能知其自 而變化者耶? 使人高脫乎其外, 歷觀變化之迹, 則其序瞭然, 曾無毫末之疑. 使蛾自量, 則是個未知從來底一生涯也, 寧知其四變之序耶? 使造翁超脫乎塵外, 達觀乎人生變化之迹, 則是亦若是而已耶?


사람이 살아 있으면 곧 몸은 따뜻하며 움직이게 되고 영혼은 능히 총명하고 밝지만, 사람이 죽으면 곧 몸덩이는 싸늘해져 뼈는 굳어지고 육체는 썩어 문드러져 흩어 없어지게 되니,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피부나 육체는 남아 있지 않고 백년이 못 되어서 뼈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하늘과 땅의 기운이 모이면 사물의 바탕이 되고 흩어지면 다시금 공허로운 기운이 되는 것인가, 영혼의 본질은 기운이 모습을 갖춘 다음에 그 곳으로부터 생겨나며 그 기운의 모습이 흩어져 없어지면 영혼의 본질 또한 그에 따라 없어져 버리고 마는 것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하늘과 땅의 신령스럽고도 빼어난 본질이 모여 영혼이 되고 곧고도 밝은 기운이 뭉쳐 몸이 되는 것이니 몸은 사라지더라도 영혼은 스스로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인가? 그렇게 영혼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곧 하늘로 돌아간다는 것인가, 유유히 천지 사방을 떠돈다는 것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부처의 말처럼 운명에 따라 윤회의 괴로움에 떨어져 거듭되게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인가?


살펴보건대, 무릇 한낱 벌레인 누에의 알이 어미인 나비가 낳음으로 해서 자신이 생겨난 것임을 어찌 능히 알 수 있겠는가? 알이 부화하여 벌레가 되어 꿈틀거리며 먹이를 찾으러 쫓아다니면서 그 자신이 알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어찌 능히 알 수 있겠는가? 벌레가 자라서 실을 뽑아 고치를 만들고 번데기가 되어 그 속에서 깊이 잠드니 사람들이 이를 보고 놀라면서도 즐거워하는데, 그 자신이 곧 잠을 잘 것이라는 것을 어찌 능히 알 것이며, 여름날의 벌레가 그 자신이 곧 고치가 될 것이라는 것을 어찌 능히 알 수 있겠는가? 고치가 잠에서 깨어나 껍질을 벗고 나비가 되어 고치를 뚫고 나와 숲속을 훨훨 날아다니는데, 그 자신이 고치에서 변화하였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사람은 멀찌감치 벗어나 그 밖에 있으면서 변화하는 자취를 낱낱이 보게 되니 그 순서가 분명하여 아무런 의심도 없다. 나비는 스스로를 헤아린다 하더라도 한 생애를 다하도록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도 알지를 못하니, 네 번이나 변하는 그 순서를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조물주는 세상의 바깥에 벗어나 있으면서 사람의 삶이 변화하는 자취를 멀리서 두루 바라보면 그 또한 이와 같을 따름이 아니겠는가?


范縝有言曰: [形者神之質, 神者形之用也. 神之於形, 猶利之於刀. 未聞, 刀沒而利尙存, 豈容形亡而神在哉!] 是說眞耶? 儒曰: [魂升而魄降], 佛曰: [靈魂不滅]而涅槃 地獄 輪回 解脫之說, 最繁. 乃檀儉則曰: [功完而朝天, [歸神鄕.] 又曰: [扶萬善, 滅萬惡, 性通功完乃朝天.]] 佛說可耶, 儒說不 耶, (檀)[桓]儉之訓眞耶? 抑! 范縝神滅之論, 乃發前人所未發者耶? [人何由生], 人何由死? 人生自何, 人死歸何? 生是寄也[而]死乃歸耶? 生乃起也[而]死則落耶? 生也有涯而死則無涯耶? 抑! 亦死而後始有, 無限眞善之境耶? 摩利之塹城壇, 則經四千載而健存, 漠南之長城, 歷二千餘歲而猶崇墉屹屹, 慶州之瞻星臺, 過千數百年而尙巍巍然特立. 然(特立然)則, 人之所肩擔手磨, 規矩繩墨之者, 能閱累千載而不滅, 獨, 肩擔手磨, 規矩而繩墨(之)[之]之人生, 則與腐血 肉, 盡消永滅於黃沙腐土之中, 不曾精靈之有留耶?


범신(范縝)이 한 말에 이르기를 [모습은 정신의 바탕이요 정신은 모습의 활용이다. 모습에 있어서 정신은 마치 칼에 있어서 날과도 같은 것이니 칼이 없어지고 나서도 날이 남아 있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하였다. 어찌 모습이 없어지고 나서도 정신이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이 말이 참된 것인가? 유가에서는 [혼(魂)은 오르고 백(魄)은 내린다] 하였고, 불가에서는 [영혼은 없어지지 않는다]하여 열반·지옥·윤회·해탈 등의 말이 가장 많으며, 단군 임금은 이르기를 [맡은 바를 완전히 이루면 하늘에 올라 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였으며, 또한 [모든 착한 것을 북돋우고 모든 악한 것을 소멸시키며, 본성에 통하고 맡은 바를 완전히 이루면 하늘에 오르게 된다] 하였다. 불가의 말이 맞는가, 유가의 말이 충실한 것인가, 단군 임금의 교훈이 진실된 것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범진의 '정신 소멸론'이 앞선 사람들이 아직까지 밝히지 못한 새로운 것을 드러낸 것이란 말인가?


사람은 어찌하여 생겨나는 것이며 사람은 어찌하여 죽는 것인가? 사람은 어디서부터 생겨나는 것이며 사람은 죽어서 어디로 돌아가는 것인가? 삶이란 잠시 의지하는 것이요 죽음이 곧 본질로 돌아가는 것인가? 삶이 바로 본질을 깨워 일으키는 것이고 죽음은 곧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인가? 삶이란 것에는 끝이 있지만 죽음에는 곧 끝이 없는 것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역시 죽고 나서야 비로소 무한한 참된 선의 경계가 있게 되는 것인가? 마리의 참성단은 4천년이 지났지만 굳건히 남아 있고, 사막 남쪽의 만리장성은 2천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높은 담으로 쭈삣 쭈삣하게 서 있으며, 경주의 첨성대는 1천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높다랗게 우뚝 솟아 있다. 그러한 즉 사람이 어깨로 지고 손으로 갈며 먹줄을 퉁긴 것은 능히 수천 년이 지나고도 없어지지 않았는데, 유독 그것을 어깨로 지고 손으로 갈며 먹줄을 퉁겼던 사람의 생은 부패한 피와 썩은 살과 함께 모두 사라져서 누른 모래와 썩은 흙 사이로 영원히 없어져 버렸으니, 일찍이 정령(精靈)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宇宙之內 蒼茫之外, 旣有一大精靈,  滿而推運之. 則人之生也, 非但血肉骨骸之, 從氣質中受者也, 更有精神魂魄之, 自精靈而稟者也. 余於儒.佛及檀儉之說, 雖不遑其辨證, 而人生自有不滅之靈, 扶善滅惡, 通性完功, 則身固有死, 而英靈不泯, 能朝天而入神鄕, 則可信矣.


우주의 안으로 아득히 넓은 그 언저리에 이미 하나의 큰 정령이 있어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밀어 움직이는데, 곧 사람의 삶이란 것은 비단 피와 살과 뼈를 그 기운의 바탕에 따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 다시 정신과 혼백을 정령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다. 나는 유가나 불가 및 단군 임금의 말에 대해 비록 증명할 만한 겨를이 없으나, 사람의 삶에는 없어지지 않는 영(靈)이 있어 착함을 북돋우고 악함을 소멸시키며 본성에 통하고 맡은 바를 온전히 하면, 곧 신체는 굳어져 죽는다 하더라도 영령(英靈)은 없어지지 않고 능히 하늘에 올라 신의 고향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 믿을 만하다고 여겨진다.


昔者永郞, 恨人生之無幾, 慕先聖之化神, 乃棄其率, 入向彌山中, 修道行, 年九十有 兒之色, 鷺羽之冠, 鐵竹之杖, 逍遙于湖山. 神女寶德, 歎  之殘命, 惜朝露之易消, 乃求師學道, 抱琴以歌, 音若靈 之玉簫, 貌若秋水之芙蓉. 是固, 仙之達者也. 若夫, 齊.景公, 泣牛山之落日; 秦皇, 嘆東南之雲氣; 漢武, 有悔於汾水之秋風; 阮籍, 乃哭於窮道落日蒼蒼者, 是人生之悲處耶? 秦皇而無死, 則東南之雲氣竟得無驗耶? 漢武而遇仙, 則建章柏(粱)[樑]終免黃塵耶? 阮籍而寄生於虞舜之世, 則擊石 石, 率百獸以舞耶? 人之說生者, 是惑耶? 惡死者, 是弱(衰)[喪]而不知歸者耶? 方其夢而不知夢者耶? 余與人, 皆夢耶? (人之死者)[人之死者]人之說死者, 信可悔, 其始之 生耶? 此世則苦海也[而], 人之生也是墜落於苦海者耶? 兒出胎門則便哭, 眞有愁於人世而然耶?


예전에 영랑(永郞)이 인생의 덧없음을 한탄하고 앞선 성인들이 신이 되었음을 사모하다가 그 식솔을 버리고 향미산(向彌山)에 들어가 도를 닦더니, 나이 아흔에도 어린아이와 같은 얼굴 색을 하고서 백로의 깃으로 만든 관에 철죽(鐵竹) 지팡이를 짚고 호수와 산을 거닐었다. 신녀(神女) 보덕(寶德)이 하루살이의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한탄하고 아침 이슬이 쉽게 사라지는 것을 애석해 하더니, 이에 스승을 찾아가 도를 배우고는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부르니 그 소리는 마치 영묘한 하늘의 옥퉁소 같았고 그 모습은 마치 가을 연못의 연꽃과도 같았다. 이러한 것이 진실로 신선에 이른 것이라 할 것이다. 또한 제나라의 경공(景公)은 우산(牛山)에 떨어지는 해를 보고 눈물을 흘렸으며, 진나라의 시황제는 동남의 구름 기운을 보고 한탄하였으며, 한나라의 무제는 분수(汾水)의 가을 바람결에 후회함이 있었으며, 완적(阮籍)은 갈 길은 어려워지는데 해는 기울어 어둑어둑한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하니, 이것이 인생의 슬픔이 아니겠는가.


진시황에게 죽음이 없었더라도 동남에서 피어난 구름의 기운에 결국에는 그 영험스러움이 없었을 것인가? 한무제가 신선을 만났더라도 새로운 문장(文章)을 만들어 내었던 백량대(柏梁臺)가 결국에 가서는 누런 먼지로 변함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완적이 순임금의 태평 세대에 더불어 살았더라면 옥쟁반을 두드리며 온갖 짐승을 거느리고 춤을 추었겠는가? 사람으로서 삶을 좋아하는 것은 삶에 미혹되어서이며,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돌아 갈 곳을 몰라서인가? 한참 꿈을 꾸면서도 꿈인 줄을 모르는 것인가? 내가 다른 사람과 더불어함께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사람의 죽음이란 살아 있음을 참으로 한스러워 하다가 죽음으로서 비로소 참된 삶이 된다는 말인가? 이 세상은 고통의 바다이며 사람의 삶이란 것이 바로 고통의 바다에 추락한 것이라는 말인가? 어린아이가 뱃속을 나서자마자 울음을 터트리는 것은 진실로 세상에 대해 근심이 있어서 그러한 것인가?


觀! 夫市朝, 宏樓層疊, 士女繁鬧, 肥馬大道, 長嘶花朝. 觀! 夫北邙, 古墳衰敗,   荒落, 寒鴉古木, 悲鳴秋風. 前何是熱, 後何是冷耶? 人之生也, 竟若是而已耶? 雲捲而山空, 潮落而海虛, 日月落, 星辰蔽而天地居然(瞑)[冥]閉, 人之死也, 竟若是而已耶? 觀乎! 窮 飢男 女, 屋漏而 裂,  浸 , 雪打戶, 破衣襤褸, 頭蓬面垢. 何樂之樂, 何生之生! 人生而難得公侯豪傑之勢, 高人烈士之趣, 寒 衣, 飢呼食,   役役而終一生, 寧投海而死者可耶? 觀乎蜂蟻! 將者 卒者 守者 戰者 役者 産者, 雄雄(窺窺)[雍雍], 來來去去, 運花搬(密)[蜜], 探腐捨死, 勞勞役役, 勤勤孜孜. 意者, 微物亦有, 久遠之大計耶? 抑! 旣有生則, 必求其存而不能自止者耶? 人之於生也, 亦若是而已耶? 世如苦海, 夭者爲福而壽者爲禍, 夭而無寃易, 壽而作善難, 人可赴海而死, 以(端)[短]其壽者善耶? 抑! 亦忍痛耐苦, 長其生而積其善, 以入于涅(盤)[槃]者, 爲最善耶?


저자거리를 살펴보노라면 거대한 누각은 층층이 겹쳐져 있고, 선비와 계집들은 북적북적 시끄러우며 살찐 말은 큰길가에서 꽃이 피는 아침에 길게 울음을 운다. 그러다 북망산천을 바라보노라면 옛 무덤들은 허물어 쓰러지고 해골은 버려져 흩날려 있으며, 을씨년스러운 까마귀는 고목 위에서 가을바람에 슬피 울고 있으니, 이곳은 어찌 이리도 활기차며 저곳은 어찌 저리도 을씨년스러운가?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결국에는 이와 같을 따름인가? 구름이 걷히면 산은 텅 비게 되고, 조수가 밀려가면 바다는 허전해지며, 해와 달이 떨어지고 늘어선 별들이 가려지면 천지는 꼼짝없이 어둠으로 닫혀 지게 되니,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결국에는 이와 같을 따름인가? 가릴 것도 변변찮은 굶주린 남녀를 보노라면, 새는 집에 창은 찢어지고 장마에는 부엌이 물로 잠기고 눈발은 집안으로 휘몰아치며 남루하게 떨어진 옷에다 흐트러진 머리와 때가 낀 얼굴을 하고 있으니, 즐거움이 무슨 즐거움일 것이며 삶이 무슨 삶이겠는가.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다 어렵게 공후(公侯)나 호걸(豪傑)의 권세와 고인(高人)과 열사(烈士)의 풍취를 얻어서, 추우면 옷을 입고 주리면 밥을 먹으며 전전긍긍하며 한 생을 마치게 되느니, 차라리 바다에 뛰어들어 죽어 버리는 것이 낳지 않겠는가? 벌과 개미를 보라! 앞선 놈과 따르는 놈, 지키는 놈과 싸우는 놈, 일하는 놈과 새끼 낳는 놈들이 사이좋게 윙윙거리며 왔다 갔다 하면서 꽃의 꿀을 따 옮기고 죽어 버려진 것을 찾아 모으며 한눈팔지 않고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있다. 생각건대 미물에게도 먼 앞날을 생각하는 큰 계획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미 주어진 삶이니 오로지 그 생존만을 갈구하여 스스로 그치지를 못할 뿐인가?


사람이 삶에 대한 것도 역시 이와 같을 뿐인가? 세상이 마치 고통의 바다와 같다면 요절하는 자는 복이 되고 장수하는 자는 재앙이 되며, 요절하면 억울한 것이 없기 쉽고 장수하면 착함을 이루기 어려운 것이 되니, 사람마다 모두 바다로 달려 나가 죽음으로서 생명을 단축하는 게 옳은 일이라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역시 고통과 괴로움을 참고 견디며 그 삶을 늘이고 선을 쌓아 이로 열반에 드는 것이 최고의 가치인가?


余于人之生死, 不敢妄斷而, 宇宙之內 蒼茫之外, 儼存者主宰, 欲扶眞養善, 滅惡消凶, 以率萬物而生人也, 則信矣. 人之於生也, 樂道安分, 忍辛耐苦, 勤孜而毋敢怨, 則善矣. 存性養志, 行善而不怠, 使得俯仰而無愧, 則雖死而無(感)[餘], 亦足矣. 余, 於是乎, 歎聖訓之無 , 而知震域之壽祿能致其久遠也.


내가 사람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감히 망령되게 단언하지는 못하나, 우주의 안으로 아득히 넓은 그 언저리에 엄연히 존재하는 분이 세상을 주재하며 진실을 북돋우고 선을 기르며 흉악함을 소멸시키고자 하면서 만물을 통솔하고 사람을 기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곧 믿을 만한 것일 것이다. 사람이 삶을 살아가면서 도리를 좋아하고 분수를 지키며 괴로움과 고통을 참고 견디어 힘써 일하면서 함부로 원망을 하지 않는다면 곧 착하다 할 것이며, 품성을 보존하고 뜻을 기르며 착한 일을 행함에 태만하지 않아서 하늘을 우르러고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러움이 없기에 비록 죽는다 하여도 여한이 없다면 역시 족할 것이다. 내가 그러한 까닭에 우리 성인들의 가르침이 없어지고 드물어 진 것은 한탄스럽지만, 우리 진역(震域)의 장수와 복록은 능히 오래도록 이를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莊子》曰: [天道運而無所積, 故萬物成. 帝道運而無所積, 故天下歸. 聖道運而無所積, 故海內服.] 此三者, 皆藉物之性而無所牽滯也. 夫帝王之德, 以天地爲宗, 爾德爲主, 以率萬民 順萬事爲用. 昔者, 神市氏旣開創萬始, 垂範萬類, 體天道而導物性. 及夫檀儉之世, 而(後)[復]建都立國, 分邦設牧, 純誠抱一, 以則天範, 秉天心以及于人心, 扶萬善, 滅萬惡. 於是萬民以化, 天下以靖, 及其功完, 則竟朝天而入神鄕. 昭格陟降, 子懷我民, 聖澤神律, 洽被萬世,  歟盛哉! 夫婁承統, 益修德政, 廣采賢能, 啓學而廣敎, 聲聞大彰. 嘉勒續位, 能繼父祖之道, 西 失德, 仗善征惡, 威被天下, 兆民慕化. 於是振振神孫, 繩繩繼位, 歷千二百載而, 國無弑逆簒奪之變, 民無魚肉塡充之禍. 定南夷, 平  兪, 討夏征殷, 建侯于禹域; 逐 肅, 平阿叱, 縱有 骨之肆毒, 乃竟服乎帝德, 細民有犯, 卒化於神韻, 震域萬年之鴻基, 旣原於此也.


《장자》에 이르기를 [하늘의 도는 운행될 뿐 쌓이는 바가 없는 까닭에 만물이 다스려지게 되는 것이고, 제왕의 도는 운행될 뿐 쌓이는 바가 없는 까닭에 천하가 돌아와 의지하게 되는 것이며, 성인의 도는 운행될 뿐 쌓이는 바가 없는 까닭에 나라 안이 모두 복종하게 되는 것이다]라 하였으니, 이 세 가지는 모두 사물의 본 모습에 의지하는 까닭에 막히는 바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무릇 제왕의 덕은 천지를 근본으로 삼고 도덕을 으뜸으로 삼으며, 만민을 통솔하고 만사를 바르게 하는 것을 그 쓰임으로 삼는다.


예전에 신시씨가 세계를 열고 만물을 비롯하게 하여 모든 무리에게 본보기를 드리우고, 하늘의 도를 체득하여 사물의 본 모습을 계도하였다. 단군 임금의 시대에 이르러 다시 도읍을 정하여 나라를 세우고 지방을 나누어 제후를 두니, 순수한 정성은 하나로 뭉쳐 곧 하늘 모범이 되었으며, 천심을 잡아 지켜 이로 민심에 미치게 하고 모든 선을 북돋우고 모든 악을 없앴다. 모든 백성이 이로써 교화되고 천하가 이로써 편안히 다스려 지니, 그 맡은 바를 다함에 이르러 마침내 하늘에 올라 신의 고향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밝디 밝게 하늘을 오르내리며 우리의 백성들을 아들과 같이 품으니 성인의 은택과 신인의 법도는 만세에 미치게 되는지라, 오호라 그 융성함이여! 부루가 그 전통을 이어서 더욱 덕스러운 정치를 닦으며 어질고 능력 있는 이를 널리 가려 뽑아 학문을 계도하고 널리 가르치니 명성이 자자하였다. 가륵이 임금의 자리를 이어 능히 부왕과 조부의 도를 계승하였는데, 서방의 하나라가 덕을 잃음에 좋은 것은 권장하고 나쁜 것은 정벌하여 없애니 그 위세가 천하에 미치고 만백성이 모두 그 교화를 사모하게 되었다.


그렇게 쟁쟁한 신인의 후손들이 1천2백년을 면면히 그 보위를 이어가니, 나라에는 임금을 시해하고 보위를 찬탈하는 변고가 없었으며 백성에게는 무참히 짓밟히는 재난이 없었다. 남이와 설유를 평정하고 하나라를 토벌하였으며, 은나라를 정벌하고 제후를 그 땅에 두었다. 또한 앙숙을 쫓아내고 아질을 평정하였으며, 비록 앙골의 방자한 해독이 있었으나 결국에는 제왕의 덕에 복종하였으며, 가난한 백성이 죄를 저지르기는 하였으나 마침내 신인의 운치에 교화되고 말았으니, 진역(震域)의 1만년에 이르는 커다란 기초가 이미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方外之人, 名之以君子國, 言其俗則曰[衣冠帶劒, 好讓不爭.] 郭璞贊之則曰: [有東方氣仁國, 有君子 薰華, 雅好禮讓, 禮委論理.] 胥餘避周, 則慕化歸依, 安(捿)[棲]一枝, 綿延千年, 遺裔尙繁.《王制》則記曰: [仁而好生, 萬物 地而出.] 仲尼歎其道之不行, 則欲乘 浮海而居九夷, 以君子所居爲說. 許愼作《說文》則曰: [唯東夷人人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 不死之國.] 以孔子之乘 欲去, 謂有以. 東方朔著《神異(徑)[經]》, 則以恭坐而不相犯, 相譽而不相毁, 見人有患, 投死救之, 名曰[善人]. 此則言, 能仁而復能勇, 能恭而復能烈, 敬美而不妄言. 具眞人之美德, 兼剛柔之良能也. 余, 於是乎, 誇爲東夷之人也.


바깥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군자의 나라'라 이름하고, 그 풍속을 일컬어 [의복에 관을 쓰고 검을 차고 다녔으며, 양보를 좋아하고 서로 싸우지 않는다] 하였으며, 곽박은 찬탄하여 이르기를 [동방에 기운이 어진 나라에는 군자가 있고 훈화(薰華)가 있으니, 우아하면서도 예절과 사양함을 좋아하고 예의로서 이치를 논한다] 하였다. 서여(胥餘)는 주나라를 피해 물러나와 임금의 교화를 사모하여 귀의하고 나라의 한쪽 편에 편안히 머무르니, 면면히 1천년 동안을 그 후예들이 항상 번창하였다. 《왕제(王制)》에 기록되어 이르기를 [어질고도 기르기를 좋아하니 만물이 그 땅에 뿌리를 두고서 나온다] 하였으며, 중니는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한탄하여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 구이(九夷)의 땅에 머물고 싶다 하였으니, 이는 군자가 거처하는 곳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허신이《설문(說文)》에서 말하기를 [오직 동이만이 큰 것을 쫓으니 대인이다. 동이의 풍속은 어질며 어진 자는 장수를 누리니 '군자의 나라'·'불사의 나라'라는 명칭이 있게 되었다] 하였으니, 이로서 '공자가 뗏목을 타고 가고 싶어하다'라는 말이 있게 된 것이다. 동방삭이《신이경(神異經)》을 지으며 [공손히 앉아 서로를 거스러지 않고 서로 칭찬할 뿐 서로를 헐뜯지 않으며, 어려움이 있는 사람을 보면 목숨을 바쳐 이를 구해 주니, 이름하여 '선인(善人)'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는 곧 어질고도 또한 용감하며, 공손하고도 또한 굳세며, 아름다움을 공경하면서도 망령된 말은 하지 않으니, 참된 사람으로서의 미덕을 모두 갖추고 강인함과 유순함의 좋은 점을 두루 겸비한 것이 된다. 내가 이러한 까닭에 동이인이 됨을 자랑하는 것이다.


《尙書·堯典》曰: [分命羲仲, 宅 夷, 曰暘谷.] 禹貢曰: [海(垈)[岱]惟靑州,  夷旣 .] 則是, 東人之占(居)[據]於海(垈)[岱]之間也. 冀州有皮服之島夷, 則是, 東人自渤海西北諸島, 遷居冀州近海之地也. 揚州有卉服之島夷, 則是, 東人自揚州印諸島, 徙居乎江淮之間也. 更有, 作牧之萊夷, 商 珠 纖縞之淮夷, 則是, 又東人之相地審勢, 應便營生之一端也. 上古, 人心素樸, 雖異族隣處, 非非常之際, 則必各守其業, 不甚相侵而互觀其勢, 若强弱懸殊而治亂相反, 則必生征戰之端. 此, [屹]達遣兵 .岐, 勿理建侯殷地也. 余, 於是乎, 歎上古我先民之武勇也.


《상서》의 <요전(堯典)>에 이르기를 [따로 희중(羲仲)에게 명하여 우이( 夷)의 땅에 머물며 다스리게 하니 그 곳이 바로 양곡(暘谷)이다]라 하였으며, <우공(禹貢)>에 이르기를 [해대(海岱)는 바로 청주(靑州)인데 우이( 夷)가 이미 그 곳을 다스렸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곧 동방의 사람들이 해대 사이의 땅을 차지하여 살았다는 것이다.


기주(冀州)에는 가죽 옷을 입은 도이(島夷)가 있었는데, 이는 곧 동방의 사람들이 발해 서북의 뭇 섬으로부터 기주 바닷가의 땅으로 옮겨가서 거처한 것을 말한다. 양주(揚州)에는 풀 옷을 입은 도이(島夷)가 있었는데, 이는 곧 동방의 사람들이 양주 동쪽의 뭇 섬으로부터 강회 사이의 땅으로 옮겨가 거처한 것을 말한다. 또한 목축을 하는 래이(萊夷)와 진주나 비단 명주 등을 거래하는 회이(淮夷)가 있었는데, 이는 또한 동방의 사람들이 양편 지역의 형세를 살펴 가며 편한 곳을 따라 삶을 꾸려 가던 한 모습이다.


상고 시대에는 인심이 소박하여 비록 다른 종족이 이웃하여 있어도 비상시가 아니면 반드시 자기들의 생업을 지키며 서로 침범하지 않고 서로 그 형세를 보고 있다가, 만약 힘의 균형이 두드러지게 차이나거나 정치가 어지러워 반목하게 되면 곧 반드시 전쟁을 일으키는 실마리가 되었다. 이것은 바로 흘달 임금이 군사를 빈·기로 보내고, 물리 임금이 은나라 땅에 제후를 세운 것 등이다. 내가 이러한 까닭에 상고 시대 우리 선민들의 용맹스러운 무예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幸無偏, 技不專, 故天下之物, 無獨享其安而專擅其威者也. 何以知其然耶? 夫! 瓜 牙者, 虎 豹之幸也, 而牛 鹿之不幸也, 頭角者, 牛 鹿之幸也, 而虎 豹之禍也.    之捷, 一(枝)[技]也, 而鼠 雀之迅, 亦一(枝)[技]也. 鷹  之擊, 固所難避, 而密林深竇, 可藏鳥 鼠. 鴻(雁)[ ] 鳧鴨, 旣無銳瓜利嘴, 則或高飛遠翔以避 敵, 或迅飛淵潛, 圖脫刑禍.   鶴之嘴, (特)[恃]長誇銳, 則蛇藏穴,  沒泥, 蟹入孔, 蛤掩甲. 此, 乃鷹     鶴之屬, 各有一(枝)[技]一幸(也), 而鳥 鼠   鴨 蛇   蟹 蛤之類, 亦各有一(枝)[技]一幸[也]. 且夫, 蛇鈍於回轉, 則蛙 鼠之幸也, 豺 狼無攀木之能, 則猿 之幸也. 斷而能生, 則 蛭之幸也, 全身毒毛, 則夏( )[蟲]之幸也. 及若蜂 之有 , 蟾 之吐液, 龜鼈之縮首, ( )[ ]  之脆尾, 皆於探餌防敵, 禦侮逃命, 莫不爲一(枝)[技]一幸也. 於是焉, 以虎豹之强而, 不免轉逐之勞 飢渴之苦, 牛鹿之柔而, 亦得保殖之幸 眠 之樂. 其他, (猫)[ ]   鷹     鶴之屬之爲强, 鼠 雀 鴻   鳧 鴨之屬之爲弱, 罔或不然. 天下豈有, 不勞之功 無難之安耶?


행운은 치우침이 없고 재주는 독점되지 않는 까닭에 천하의 만물 가운데 홀로 편안함을 누리고 그 위세로 모든 것을 제멋대로 하는 것은 없다. 어찌 그러함을 아는가? 무릇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은 범이나 표범에게는 다행한 것이 되지만 소와 사슴에게는 불행한 것이며, 머리의 뿔은 소나 사슴에게는 다행이지만 범이나 표범에게는 화근이 된다.


고양이나 족제비의 날랜 사냥 솜씨가 하나의 재주라면, 쥐나 참새의 민첩함 또한 하나의 재주이다. 매와 송골매의 공격은 물론 피하기가 어렵지만, 우거진 수풀이나 깊은 구멍은 새와 쥐를 숨겨 주곤 한다. 기러기와 오리는 본디 날카로운 발톱이나 예리한 부리는 없으나, 혹은 높이 날갯짓하며 멀리 날아올라 적을 피하고, 혹은 재빨리 날거나 연못 속에 잠기어 화를 벗어나곤 한다. 황새와 학의 부리가 길고도 날카로움을 자랑한다면, 뱀은 굴에 숨고, 지렁이는 진흙 속에 잠기며, 게는 구멍으로 들어가고, 조개는 갑옷으로 가리니, 이는 곧 매·송골매·황새·학 등의 무리에게 각기 한 가지의 재주가 있음이 행운이듯이, 새·쥐·기러기·오리·뱀·지렁이·게·조개 등의 종류에게도 역시 각기 한 가지의 재주가 있어 행운인 것이다. 또한 뱀이 몸을 갑자기 돌리는 것에 둔한 것은 곧 개구리나 쥐에게는 행운이요, 승냥이나 이리에게 나무를 타는 능력이 없음은 원숭이에게 행운이 된다. 끊어지고도 능히 살 수 있는 것은 지렁이와 거머리의 행운이요, 온몸에 독이 있는 털을 지닌 것은 여름 벌레의 행운이다. 벌과 전갈이 침을 쏘고 두꺼비가 액을 토하는 것과, 거북이와 자라의 움츠린 머리와 도마뱀의 무른 꼬리 등은 모두 먹이를 찾아다니면서 적의 해꾸지를 막고 도망하여 목숨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니, 한 가지의 재주가 곧 한 가지의 행운이 되지 않음이 없다.


그러하기에 범과 표범이 강하기는 하지만 구르고 쫓는 수고와 주리고 목마른 고통을 면치 못하며, 소와 사슴은 연약하지만 생명을 보존하여 번식하는 행운과 잠자고 먹는 즐거움을 얻은 것이다. 그 밖에 고양이·족제비·매·송골매·황새·학 등의 강한 무리와 쥐·참새·기러기·오리 등의 약한 무리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으니, 하늘 아래 어찌 수고하지 않고 얻는 공로와 어려움이 없는 안락이 있을 수 있겠는가!


嘗聞, 天竺有獅子者, 爲四足獸中獨步, 一切生類, 聞其吼則震驚, 魚沒深淵, 獸藏窟穴, 飛禽墜落, 莫不逃竄, 盖百獸之王也. 若[使][師](獅)子, 添翼付 , 大小如意, 則必飛食鳥 走食獸 水呑魚 穴呑鼠雀, 跨水陸 通上下而不遺蠢物, 天下復有, 保生之類耶? 雖然, 造翁之意, 自無偏 , 寧有盡驅一世之生類, 獨充貪獅, 堅欲之惡理耶? 是以, 海容寸銖之魚, 山有指小之雀, 樹息飮露之蟬, 泥藏無目之 ,   微 , 亦同[浴]皇天之洪恩. 然則, 世間豈有,  權專富之家, 獨覇專强之國耶? 故諺曰[未有不亡之國, 曾無不敗之家.] 余, 於是乎, 知民物之不可無危難, 而覺家國之興亡不得免 覆無常也. 然則, 安可以眠前榮枯, 二三其心也哉!


듣건대 천축에는 '사자'라는 놈이 있어 네발 달린 짐승 중에 독보적이라 하는데,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그 울부짖는 소리만 듣고도 두려워 놀라서, 고기는 깊은 연못 속으로 잠기고 들짐승은 굴속으로 숨어 버리며 날짐승은 놀라 떨어지는 등 도망하여 숨지 않는 것이 없으니, 무릇 뭇 짐승의 왕이라 하였다. 만약 사자에게 날개를 달아 주고 비늘을 붙여 주며 몸을 줄였다 늘였다 마음대로 할 수 있게 한다면, 날아다니며 새를 잡아먹고, 뛰어다니면서 짐승을 잡아먹으며, 물에서는 고기를 삼키고, 구멍에 들어가 쥐와 참새를 삼키는 등, 물과 뭍을 깔고 앉아 상하를 통하며 반드시 움직이는 물건이라고는 남기지 않을 것이니, 하늘 아래 목숨을 보존하는 생물이 또다시 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조물주의 뜻에는 본디 편벽됨이 없는데 어찌 한 세상의 생물을 모두 몰아 사자의 탐욕스런 욕심만 채워 주는 나쁜 이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바다는 한 치의 작은 물고기도 받아들이고, 산에는 손가락만한 작은 참새도 있으며, 나무에는 이슬을 먹고사는 매미가 서식하고, 진흙 속에는 눈이 없는 지렁이가 숨어 있으니, 꿈틀거리는 하잘것없는 벌레 또한 하늘의 큰 은혜를 같이 입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간에 어찌 권세를 도거리하고 부귀를 독점하는 집안과, 패권을 차지하여 외곬으로 강하기만 한 나라가 있을 수 있겠는가! 때문에 속담에 '망하지 않는 나라는 없고 패하지 않는 집안은 없다' 하였으니, 내가 그러한 까닭에 백성과 사물에게 어려움이 없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가정과 나라의 흥망이 되풀이되어 무상함을 면할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므로, 어찌 눈앞의 영고성쇠에 마음이 흔들리겠는가!


天人之際, 覆育之化, 大矣, 未遑長說. 地人之際, 載安之德, 厚矣, 其陶冶感薰之功, 甚巨. 是以國相都 民擇里, 未嘗敢忽. 夫相都 擇里者, 欲其選地理風氣之適善也. 盖定都占居, 固不可忽也. 至如闔國全族之於地理風氣, 其休戚之係甚重, 此不敢少忽也.


하늘은 사람에게 있어 감싸 기르는 조화가 위대함에 장황하게 말하지는 못할 바이며, 땅은 사람에게 있어 실어 편안케하는 공덕이 두터우니 인재를 기르고 교화에 물들게 하는 공적은 실로 크다 할 것이다. 이 때문에 나라에서 도읍을 선택하고 백성들이 동리를 고르는데 있어서 감히 소흘히 하지 않았던 것이다. 무릇 도읍을 택하고 동리를 고른다는 것은 땅의 이치와 바람의 기운이 적합하고 좋은 곳을 고르고자 하는 것이니, 도읍을 정하고 살 곳을 결정하는 것은 진실로 소흘히 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온 나라와 온 가족이 땅의 이치와 바람의 기운에 따라 기쁨과 근심의 연루됨이 매우 심하니, 이를 감히 가벼이 할 수 없었던 것이다.


夫天之於物, 不能無厚薄, 卽其地而觀之, 則兆物莫不同浴仁天之恩. 分其地而言(則之)[之, 則]兆物之得地之, 肥瘠寒煖, 高下 陋, 莫不有(若)[差]. 是以物異南北, 人殊東西, 其盛衰榮枯, 茂殘繁沒之勢, 不可以人力而左右之也. 何以知其然耶? 夫耽羅之橘, 北渡則爲枳, 于山之桃, 越海則實矮, 湖南之竹 嶺南之 , 植之[北關](關北), 于而不成, 咸興之梨 咸從之栗, 移之于漢山而味 . 且夫城上之蕨, 葉掩屋 , 架上之鼠,  高於牛背, 蓬生麻中而不扶自直, 葛出松田而直聳千尋. 至如渡淮之橘, 周原之菫(茶)[ ], 莫不如是. 此皆, 物之因於得地之肥瘠 寒煖 高下   之適與不適 幸與不幸, 而其稟得也各殊也.


무릇 하늘이 사물에 대해서는 두텁고 엷음이 없을 수 없으나, 땅을 살펴보면 곧 억조 만물 가운데 어진 하늘의 은혜를 입지 않은 것이 없다. 그 땅을 나누어 말하자면 곧 만물이 얻어 가지는 땅에는 비옥하고 메마르고 춥고 따뜻하며 높고 낮고 광활하고 좁음의 차이가 있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사물은 남북으로 다르고 사람은 동서로 틀리니, 그 영고성쇠(榮古盛衰)와 무잔번몰(茂殘繁沒)의 형세는 인력으로 좌지우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찌 그리됨을 아는가? 대저 탐라 땅의 귤이 북으로 건너가면 탱자가 되고, 우산(于山)의 복숭아가 바다를 건너오면 열매가 작아지며, 호남의 대나무와 영남의 감나무는 관북 지방에 심으면 휘어지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고, 함흥의 배와 함종의 밤을 한산(漢山)으로 옮겨 심으면 맛이 변한다. 또한 성벽 위의 고사리는 그 잎이 집의 처마를 덮고, 시렁 위의 쥐는 그 몸이 소 등 보다 높게 있으며, 쑥이 삼밭 속에서 자라면 북돋우지 않아도 스스로 곧게 올라가고, 칡이 소나무 밭에서 나면 천길을 솟아오른다. 도회(渡淮)의 귤과 주원(周原)의 바곳이나 씀바귀도 이와 같지 않은 것이 없다. 이 모든 것은 사물이 얻어 가지는 땅의 비옥하고 메마르며 춥고 따뜻하며 높고 낮고 광활하고 좁은 것 등이 그 사물에 적합한지 아니한지 혹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등에 연유하는 것이기에 그 얻어지는 바탕이 각기 틀리게 되는 것이다.


昔者, 之地, 勁寒而不宜五穀, 民皆帶劒佩弓, 幷事遊獵, 其民之生也, 艱險儉嗇,  健勁悍, 長於武風而不(閑)[閒]文事. 藍侯之地, 廣(活)[ ]平蕪, 幷施耕牧, 兼習戎事, 其民, 兼剛柔, 幷文武, 恒爲東國進攻之前驅. 靑丘之地, 風氣溫美, 五穀豊登, 民皆, 衣輕暖而食肥美, (頗)有冠帶衣履, 天下之槪, 而卒溺於華靡之弊. 且夫雍州之地, 土厚水深, 山岳 莊, 襟抱固密, 風氣勁 . 則秦人居之, 其俗悍然, 有招八州而朝同列之氣. 迫近戎狄, 修習戰備, 競事射獵, 高(尙)[上]氣力, 於是猛將悍卒, 輩出[乎]其間. 乃延敵列國, 追亡逐北, 因利乘(使)[便], 宰割天下. 終至始皇之世, 振長策而馭宇內, 呑二周而亡諸侯, 制六合而鞭笞天下. 南郡百越, 北逐匈奴, 胡人(敢不)[不敢]南下而牧, 馬士不敢彎弓而報怨.


옛날 속진(  )의 땅은 매우 추워 오곡을 심기에 적당치 않아서 백성들이 모두 칼을 차고 활을 메고 어울려 일하며 사냥을 하니, 그 백성의 생활은 힘들고 어려운 속에서도 검소하며, 거칠고도 매우 굳세어 무사의 기풍이 빼어났으나 학문을 닦는 일은 소홀히 하였다. 남후(藍侯)의 땅은 광활하고 너른 벌판으로 경작과 목축을 아울러 베풀고 무술도 함께 익히니, 그 백성들은 굳셈과 부드러움을 겸비하고 문무를 아울러 갖추게 되어, 우리나라가 공격하여 나아갈 때는 항상 선구가 되었다. 청구(靑丘)의 땅은 바람의 기운이 온화하여 오곡이 풍성하니, 그 백성들은 모두 가볍고도 따뜻한 옷을 입고,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갓을 쓰고 띠를 두르고, 옷을 갖춰 입고 신을 갖춰 신는 등 자못 천하의 풍치가 있었으나, 마침내 화려하고 사치스러움의 폐단에 빠졌다.


또한 옹주(雍州)의 땅은 흙이 두텁고 물이 깊으며 산악은 거칠고 장엄함에 속속들이 울창하고 바람 기운 또한 매우 사나우니, 진나라 사람들이 그 곳에 거처하면서 풍속이 굳세어지고, 여덟 주(州)의 제후들을 불러들여 같은 반열에서 조문을 받는 기상이 있었다. 융적(戎狄)과 근접해 있으면서 전쟁에 대비하여 닦고 익히며 활 쏘고 사냥하는 것으로 기력을 높이니, 용맹한 장군과 굳센 군졸이 그 곳에서 배출되게 되었다. 이에 오랜 적들과 여러 나라가 연이어 망하고 북쪽으로 쫓겨가자 그 유리한 틈을 타고 천하를 나누어 다스렸으며, 결국에는 진시황의 치세에 이르러 오랜 책략을 떨치며 천하로 말을 몰아 종주(宗周)와 성주(成周)를 삼키고 제후들을 멸망시키고는 육종(六縱)의 연합을 제압하여 천하를 채찍질하게 되었다. 남으로 백월(百越)의 땅에 군(郡)을 설치하고 북으로는 흉노를 쫓아내니, 오랑캐들은 감히 남쪽으로 내려와 목축하려 하지 않았고 병사는 감히 활을 당겨 보복하려 하지 못하였다.


班固歎常爲天下之劇, 晦庵推富强之業, 易興以江南之地, 原野底平, 江.漢分瀉, 風氣散漫, 天産豊饒. 於是民資川澤山林之饒, 食魚稻果  蛤之味, 食物常足, 不憂凍餓, 民生無艱, 優(遊)[游]自足. 則民皆,    生而亡積聚, 信巫鬼而重淫祠, 是以人[皆], 輕 放散, 勇而不勁. 歷觀漢籍, 曾無一人, [民](起)於南方而制天下者, 是皆地理風氣之, 所以[能]陶冶感薰, 而人之所不能如何者也. 夫南方之濕熱, 北方[燥寒之](之燥寒), 太白.崑崙之廣 , 江.河湖澤之渟流, 誰安得以,  易而遷徙之哉! 余於天人之際, 固不敢長說; 余於地人之際, (限)[恨]其執定而不能左右之. 夫天下不幸之, 莫大於失地利也.


반고(班固)는 천하가 항상 매몰차 짐을 한탄하더니, 회암(晦庵)이 부강의 기초가 되는 위업을 추진하여 장강 이남의 땅을 변화시키고 부흥시킴에, 낮고도 너른 들판에 장강과 한수가 나누어 넘쳐흐르고 바람의 기운도 매섭지 않아 천연 산물이 풍부하였다. 그러한 까닭에 백성들은 강택과 산림의 풍요를 바탕으로 물고기와 벼며 나무와 풀의 열매와 함께 고둥과 조개 등의 맛깔스러운 것을 먹었다. 음식과 물자가 항상 풍족하여 춥고 굶주림을 걱정하지 않았기에 백성들의 삶은 어려움 없이 한가로이 만족해하였으나, 곧 백성들이 모두 나태하게 인생을 즐기니 쌓아 두고 모아 둔 것은 모두 없어지고 무당과 도깨비만 믿으며 부정한 사당만을 중하게 여겼다. 이로서 사람들은 모두 약빠르고 방자하며 용감하나 굳세지는 못하였다. 한나라 사적에 남방에서 일어나 천하를 제패한 자가 일찍이 한 명도 없음을 분명히 볼 수 있는데, 이는 모두 땅의 이치와 바람 기운으로 인해 능히 인재가 길러지고 교화에 물드는 까닭이니,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무릇 남방의 습기와 무더위, 북방의 건조와 추위, 태백과 곤륜의 거대함, 장강과 황하 및 호수와 못 등 물줄기의 머무르고 흐름을 그 누가 어찌 바꾸고 옮기고 할 수 있겠는가! 내가 하늘과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감히 길게 말하지 못하고 또한 땅과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단정지어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없음은 한스러우나, 무릇 천하의 불행 가운데 지리적인 이득을 잃어버리는 것 보다 더 큰 것은 없을 것이다.


天下之物, 莫不具表裏 本末之異, 天下之事, 莫不兼利害 得失之雜. 故觀物者, 不可絞於表末而棄其(裡)[裏]本, 創事者, 不可拘於利得而忘其害失也. 是以聖人明於天之道, 而察於民之. 故隨時觀 , 從便行宜, 而天下之事, 始全利得而絶害失. 愚者膠守古法, 而不知 通以致其牽滯, 而家國以喪. 拙者弊[弊]然捨長取短, 自以爲察而反致其殃, 此, 天下萬世之弊也. 夫應時順 , 明天道而藉物性者, 惟聖者能之, 天下豈有 聖賢 萬世而無索者耶?


천하의 사물 가운데 표리(表裏)나 본말(本末)의 두 모습을 모두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며, 천하의 일 가운데 이해나 득실의 번거러움을 두루 겸비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한 까닭에 사물을 관찰하는 자는 겉과 끝에 얽매여 그 속과 밑을 버리지 말아야 하며, 일을 시작하는 자는 이득에 얽매여 그 해악과 손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함에 성인은 하늘의 도리에 밝음으로 해서 백성의 일을 살피게 된다. 그러기에 시기에 따라 변화를 관찰하고 편안함을 쫓아 마땅함을 행하니, 비로소 천하의 일은 그 이득이 온전히 되고 해악과 손실은 끊어지게 되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옛 법에 집착하여 지킬 뿐 그 변화와 융통을 모르니, 이에 구애되고 막히게 되기에 이르므로 집안과 나라는 이로서 쇠망하게 된다. 옹졸한 자는 몸과 마음을 기울여 힘쓰지만 장점은 버리고 단점만 취하므로, 스스로 살핀다고 하면서 도리어 그 재앙에 이르게 되니, 이는 천하의 만대에 걸친 폐단이다. 무릇 때의 변화에 순응하며 하늘의 도리에 밝고 사물의 본바탕에 의지하는 것은 오직 성인만이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는데, 천하에 어찌 성인의 어짐을 도거리하고서 그렇게 만세에 걸쳐 무궁무진할 수가 있겠는가?


昔者, 太公始封, 周公問[何以治齊.] 太公曰: [擧賢而尙功.] 周公曰: [後世必有簒殺之臣.] 其後二十九世, 齊爲(强)[疆]臣田和所滅. 周公始封, 太公問[何以治魯.] 周公曰: [尊尊[親親而](而親親).] 太公曰: [後世寢弱矣.] 後魯, 自文公以後, 祿去公室, 政在大夫, 陵夷微弱, 遂爲楚所滅. 夫太公 周公者, 世之所稱聖者也, 立業垂憲未嘗有差, [末流而](而末流)之弊猶然如此.  地殊其方, 人各厥族, 而互相對峙, 亘萬古, 爭雌雄而不知其極者, 株守陳古之法, 拘而不知 者, 安能向世間而求其勝也哉! 是故保其長而兼人之長者, 覇, 棄其長而用人之長者, 弱, 棄其長而用人之弊者, 亡. 何以知其然耶? 昔者, 秦.穆公問由余曰: [中國以詩.書 法度爲政, 然尙時亂, 今戎夷無此, 何以爲治.] 由余笑曰: [此, 中國之所以亂也. 戎夷則不然. 上含淳德以遇其下, 下懷忠信以事其上, 一國之政猶一身之治, 不知所以治, 此眞聖人之治也.] 夫上淳德而崇簡樸者, 戎夷之所以爲强也. 用是而乘中國之繁縟, 則勝; 用是而復學中國之繁縟, 則勞; 若舍是而專學中國之繁縟, 則亡, 此固然之勢也.


옛날에 태공이 처음 피봉될 때 주공이 [제나라를 어찌 다스릴 것인가]하고 물으니 태공이 말하길 [어진 사람을 등용하고 공덕을 소중히 여기겠다] 하는지라, 주공이 이르기를 [후세에 반드시 임금을 죽이는 신하가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 29세(世) 후에 제나라는 그 땅의 신하인 전화(田和)에게 멸망을 당하였다. 주공이 처음 피봉될 때 태공이 [노나라를 어찌 다스릴 것인가]하고 물으니 주공이 말하길 [존경해야 할 사람은 존경하고 가까이할 사람은 가까이하겠다] 하는지라, 태공이 이르기를 [후세에는 침체되어 약해 질 것이다] 하였는데, 그 후에 노나라는 문공(文公) 이후로 녹봉은 공후(公侯)의 집에서 떠나고 정치는 대부(大夫)의 손에 들어가니, 점차 미약해져서 마침내 초나라에 멸망하게 되었다.


무릇 태공과 주공은 세간에서 성자(聖者)라 말하는데, 위업을 세우고 법률을 드리움에 한치의 오차도 없었으나 끝에 이르러 그 폐단은 오히려 그와 같았다. 하물며 땅은 그 자리해 있는 곳이 틀리고, 사람은 각기 그 족속이 다르며, 서로 대치하고 오랜 기간에 걸쳐 자웅을 다툼에 그 끝을 모르는데, 펼쳐 놓은 옛 법을 어리석게 움켜쥐고 그것에 얽매여 변화를 알지 못한다면 어찌 능히 세상에 나아가 이기기를 바라겠는가! 그러한 까닭에 자기의 장점을 보호하고 다른 사람의 장점을 배워 겸비하는 자는 우두머리가 되고, 자기의 장점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장점만을 사용하는 사람은 나약해 지며, 자기의 장점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폐단만을 사용하는 사람은 망하게 된다. 어찌 그리됨을 아는가?


옛날에 진(秦)나라의 목공(穆公)이 유여(由余)에게 묻기를 [중국은 시서(詩書)와 법도(法度)로서 나라를 다스리지만 오히려 때때로 어지러운데, 지금의 융이(戎夷)는 이러한 것도 없이 어떻게 나라가 다스려 지는가?] 하니, 유여가 웃으며 이르기를 [이는 중국에 있어서 어지러운 이유가 융이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은 까닭입니다. 윗사람은 순박한 덕으로 아랫사람을 대하고, 아랫사람은 충성된 믿음을 품고 윗사람을 섬기니, 한 나라의 정치가 마치 한 몸을 다스리는 것과 같은 까닭이므로, 다스리는 이유를 모르는 이것이 진실된 성인의 다스림입니다] 하였다. 무릇 순박하고 후덕함을 높이고, 간단하고 소박함을 숭상하는 것은 융이가 강자가 되는 이유이다. 이를 이용하고 중국의 복잡하고 번거로움을 극복한다면 곧 승리할 것이요, 이를 이용하면서 다시 중국의 복잡하고 번거로움을 배운다면 곧 수고스러울 것이며, 만약 이를 버리고 오로지 중국의 복잡하고 번거로움만 배운다면 곧 망할 것이다. 이는 진실로 그러한 형세일 것이다.


何以知其然耶? 昔者匈奴, 人衆不能當漢之一郡而能不失其强者, 用其所長以撓其短也. 夫匈奴之地, 鉅野平沙, 風氣凄冷, 五穀不熟, 草菜平蕪. 民皆家氈帳, 跨鞍馬 , 畜牧逐水草而遷徙之. 乘中國之有 , 則一時蜂聚蟻合, 彎弓橫 , 背寒向溫, 剽(掠)[ ]邊塞. 如勢頭不好, 則撤帳拔鍋, 携妻率子, 縱馬任適, 曾不顧戀. 此, 其亘百世而爲中國之大 也. 及單于慕華(靡)[ ]美而妻漢妃,  胡俗而嗜漢物, 舍  之堅善而得漢繒絮以馳草棘中, 舍重酪之便美而得漢食物, 棄其簡樸而襲漢之繁縟. 夫! 學于人者, 難得出藍之譽, 汲于流者, 只酌其餘波. 天下之舍己學人者, 不爲邯鄲學步者鮮矣, 匈奴其無敗亡乎? 雖然, 豈但匈奴而已哉! 昔者拓拔氏, 以胡 之種, 入據幽燕, 承 秦之後而稱覇於中原. 太武帝, 始制叛逆 殺人 姦盜之法, 號令明白, 政事(簡淸)[淸簡]. 於是南擊宋, 北逐柔然, 西定口厭  月氏 波斯諸國, 威名(振)[震]乎當世. 晋氏.五胡之亂, 立國于中原者十六, 南北朝列國之興替不少, 而曾無若後魏之富强矣. 及于孝文帝之出而, 乃發平城, 都洛陽, 改姓易服, 禁北俗之語, 立明堂, 設 雍, 定樂章而 華靡, 立堯 舜 禹 周公 孔子之祠, 而其國卒至敗滅. 夫此數事者, 豈本亡國之事, 而終不可學者耶! 余未嘗以爲然, 此特已舍其長而無存, 求學于人而未就, 只得其末流之病弊(故耳)[矣]. 於是舊俗已泯而害毒方新, 夫奚[暇]救其敗沒渙散哉!


어찌 그리됨을 아는가? 옛날에 흉노가 사람의 숫자로는 한(漢)나라 한 개의 군(郡)에도 미치지 못하였지만 능히 그 강함을 잃지 않은 것은 자신들의 장점을 이용하고 그 단점을 꺾은 때문이다. 무릇 흉노의 땅은 거대한 들판과 평탄한 사막으로서, 바람의 기운은 싸늘하여 오곡은 익지 않고 풀과 잡초만이 너른 들에 무성하다. 백성들은 모두 털 담요로 장막을 쳐서 집을 삼고, 말안장에 걸터앉아 말을 몰아 목축을 하며 물과 풀을 쫓아 옮겨 다녔다. 그러다가 중국 땅에 틈이 생기면 곧 일시에 벌떼와 개미떼 같이 모여서 활과 창을 비껴들고는 추운 곳을 등지고 따뜻한 곳을 향하여 변방의 요새들을 사납게 공략하였으며, 형세가 여의치 않으면 곧 장막과 솥을 걷어 뽑고 처자를 거느리고 말을 몰아 마음대로 돌아가 버린 뒤 다시 돌아보는 미련은 두지 않았으니, 이것이 오랜 세월에 걸쳐 중국의 커다란 해독이 되었다.


선우(單于)에 이르러 중국의 아름다움만을 그리워하여 한나라의 비(妃)를 아내로 맞고 고유한 풍속을 변질시켜 한나라의 물건만을 즐기게 되니, 털옷의 견고하고 좋은 것은 버리고 한나라의 비단솜을 얻어 입고 초원의 가시나무 사이로 질주하였으며, 진한 젓의 편리하고 맛있는 것은 버리고 한나라의 음식물을 얻어먹었으며, 그들의 간략하고 소박한 것은 버리고 한나라의 복잡하고 번거러움만을 물려받게 되었다. 무릇 다른 사람에게 배우는 자는 청출어람(靑出於藍)의 명예를 얻기 어렵고, 흐르는 물을 긷는 자는 그 자투리 물결만을 퍼내게 되듯이, 자기 것을 버리고 남의 것을 배우면서 한단(邯鄲)의 걸음걸이가 되지 않는 것은 드물다 하였으니, 흉노의 패망이 어찌 없을 것인가?


비록 그렇지만 어찌 단지 흉노뿐이겠는가! 옛날 탁발씨(拓拔氏)는 호갈(胡 )의 종족으로 유연(幽燕)에 들어와 자리하며 부건(符健)이 세웠던 전진(前秦)의 뒤를 이어 중원의 패자로 일컬어 졌다. 태무제 때 비로소 반역·살인·간음·도적에 관한 법을 제정하니, 호령이 명백하고 정사가 맑고 간략하였다. 이에 남쪽으로 송(宋)을 치고 북쪽으로 유연(柔然)을 쫓아내고 서쪽으로 압돌과 월씨 및 파사 등 뭇 나라들을 정벌하여 위세와 명성을 당대에 떨쳤으니, 진(晋)나라 오호(五胡)의 난리 때 중원에 나라를 세운 자가 열여섯이었으며, 남북조 때 열국(列國)의 흥망성쇠도 적지 않았으나 후위(後魏)와 같은 부강함은 없었다.


그러나 효문제가 즉위함에 이르러 이내 평성(平城)을 떠나 낙양(洛陽)에 도읍을 정하였으며, 성씨를 고치고 복식을 바꾸며, 북쪽 풍속의 언어를 금지시키면서 명당(明堂)을 세우고 벽옹( 雍)을 건설하였으며, 악장(樂章)을 정하여 화려하게 꾸미고는 요·순·우·주공·공자의 사당을 세우니, 그 나라는 마침내 패망하게 되었다. 무릇 이런 몇 가지 일들이 어찌 나라를 패망시키는 근본이 되겠는가 마는, 아무래도 배울 만한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내가 일찍이 그렇다고 여긴 적은 없지만, 이것은 특별히 자신들의 장점은 이미 버렸기에 남아 있는 것이 없고, 다른 사람에게 배움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이루어 놓은 것도 없이 단지 그 말단의 병폐만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옛 풍속은 이미 다 없어지고 그 해독만이 바야흐로 새로워지니, 무릇 어느 겨를에 패몰하여 흩어진 것을 구제할 수 있겠는가!


女眞者, 肅愼之後也. 其古風泯滅, 雖不知書, 然猶有祭天地 敬親戚 尊耆老 接賓客 信朋友, 禮意款曲, 皆出於古聖帝之垂訓, 賢侯之立敎也. 方其奮興於黑水之地也, 以一枝之師, 席卷遼滿, 越長城而屠 京, 禽徽欽而北去, 叱孤主而南竄, 跨幽燕而鞭笞中原之士. 於是趙家君臣, 莫不輸誠納款, 稱臣呼侄, 苟乞殘喘. 秦檜 韓胤之徒, 咸匍匐而獻媚. 此誠, 千古之快事而東方諸族之誇也. 雖然, 其弊在於急一時之利, 踵久壞之法. 及其中葉, 鄙遼儉樸, 襲宋繁縟之文, 懲宋寬柔, 加遼操切之政. 是棄二國之所長, 而倂用其所短也. 於是繁縟勝而財用竭, 操切勝而民人害. 夫國用 , 民心離, 而金安得不亡乎.



여진(女眞)은 숙신(肅愼)의 후예이다. 그 옛 기풍은 다하여 없어지고 비록 글도 알지 못하지만, 여전히 천지에 제사를 지내고 친척을 공경하며 노인을 존경하고 손님을 맞고 벗을 믿는 등 예의바른 마음에 다정하고 성의가 있음은 모두 옛 성제(聖帝)께서 펼친 교훈과 어진 제후들이 세운 교화에서 나온 것이다. 바야흐로 흑수의 땅에서 떨치고 일어나서 한 갈래의 군사만으로 요동과 만주를 석권하였으며, 장성을 넘어 변경( 京)을 도륙한 뒤 휘흠(徽欽)을 사로잡아 북쪽으로 보내고 고주(孤主)를 꾸짖어 남쪽으로 귀양을 보냈으며, 유연(幽燕)을 넘어 중원의 선비들을 매질하였다. 그러자 조가(趙家)의 군신들 가운데 정성과 성의를 보내며 신하를 자칭하고 조카라고 스스로를 일컬어 남아 있는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진회(秦檜)와 한윤(韓胤)의 무리는 모두 엉금엉금 기면서 아첨을 떨었으니, 이는 진실로 천고의 쾌사이며 동방 제후의 자랑이다.


비록 그렇지만 그 폐단은 한 때의 이익에 급급하여 오랜 폐악을 답습한데 있었으니, 그 중엽에 이르러 요(遼)의 검소하고 소박함을 깔보고 송(宋)의 복잡하고 번거로운 글을 따랐으며, 송(宋)의 너그럽고 부드러움은 제재하고 요(遼)의 엄격한 정치만을 더하게 되었는데, 이는 두 나라의 장점을 버리고 그 단점들을 아울러 쓴 격이다. 그러한 까닭에 복잡하고 번거로움이 기승을 부리니 재정은 바닥이 나고, 엄격한 정치가 기승을 부리니 백성들은 피해를 입었다. 무릇 나라의 살림이 고갈되고 백성의 마음이 떠났는데 금나라가 어찌 망하지 않겠는가!


噫! 天異候, 地殊勢, 國異俗, (民)[人]各(枝)[技], 安有舍其能而不危者, [安有]學乎人而易其性者耶? 余, 於是乎, 歎造翁之於物也, 不能無厚薄, 而君師之於政也, 不可不三思之也. 今, 夫愛親氏者, 赫圖阿羅之人也. 其先, 遠出於  之後, 其民多承, 句麗 渤海之衆, 是爲舊檀氏之遺裔, 庶可斷焉. 而今, 夫! 人  然以小華自耀, 肯認滿洲而爲親乎? 彼等之於女眞, 已以蠻胡斥之, 其於滿洲, 寧怪其罵斥耶? 且彼等之與朝鮮, 角立者已尙矣, 而與諸胡相混者久矣, 其勢安能復合而悔其久分耶? 此不必長說也.


오호라! 하늘은 모습이 다르고 땅은 형세가 틀리며, 나라마다 풍속이 다르고 사람마다 기술이 제각각 인데, 자기의 능함을 버리고 어찌 위태롭지 않은 자가 있겠으며, 다른 사람에게 배운다고 그 본 바탕이 바뀌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그러한 까닭에 조물주가 사물에 대해 두텁고 얇음이 없을 수 없고, 임금이 정치를 행함에 세번 되돌아보지 않으면 안됨을 찬탄하는 것이다. 지금에 무릇 애친씨(愛親氏)는 혁도아라(赫圖阿羅) 사람이다. 그 선조는 멀리 속진의 후예에서 나왔고 그 백성들은 고구려와 발해의 무리 중에서 많이 이어받았으니, 이들이 남아 있는 단군의 후예가 됨을 거의 단정 지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사람들은 떠들썩하게 스스로를 '소중화(小中華)'라고 뽐내고 있으니, 만주가 우리와 친척 됨을 긍정하고 인정하려 하겠는가? 저들 등이 여진을 대함에 있어서도 이미 오랑캐로 여기고 그들을 배척하고 있으니, 우리가 만주를 대하며 욕하고 배척하는 것을 어찌 괴이하다고만 하겠는가! 또한 저들 등이 조선과 더불어 대립한 지가 이미 오래이며, 뭇 오랑캐와 더불어 서로 섞인지가 오래이니, 그 형세가 어찌 능히 다시 합치고서 오랫동안 갈라져 있었음을 후회할 수 있겠는가! 이는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至如太祖.努爾哈赤, 蹶然奮興於建州之地, 率八旗之師而席卷滿洲, 創金汗國而虎視東西, 乘明朝之衰而奪遼東, 因流賊之亂而奄據幽燕. 於是, 下 髮之令, 立國史之 , 禽永明而掃淸海內, 服諸汗而倂呑漠北. 其政令之所出, 八旗之所向, 更無堅城 强壁矣, 處處蜂起, 復明之志士, 曾不幾何而 敗. 盖自有史以來, 塞外諸族, 入帝漢土者, 未有若此之强且盛者. 我國之士, 雖(曰)[日]夜以南漢之 切齒, 以區區東援壬辰之誼, 欲向明而圖報; 然, 百年之內, 余保, 其必無是事矣. 夫區區鴨水以南, 數千里之地, 衆寡之數, 已自懸絶, 而又自却女眞以爲胡, 斥滿洲以爲虜, 東控于倭, 西戀于明, 民復奚暇能養其力哉! 然則, 淸之勢威, 可謂猛矣, 然而其後孫, 若至於慕漢俗而棄其本, 操漢語而賦其詞, 后吳姬而嬪越女,  八旗之[之]兵而事田獵, 紹堯舜之道而演其說,  膏粱而飽華靡, 則  漢土好說之士, 皆  然以師傅自傲, 夷狄鄙之,  起而戮滿胡, 復孰能禦之哉! 不出數百年, 淸必亡於善 之士也.


태조 누루하치에 이르러 궐연히 건주(建州) 땅에서 떨치고 일어나서 팔기병(八旗兵)을 거느리고 만주를 석권하였고, 금한국(金汗國)을 세우고는 동서를 호시탐탐 살피다가 명 왕조가 쇠퇴해진 틈을 타고 요동을 탈취하였으며, 도처의 도적들로 어지러운 틈을 타고 유연(幽燕)을 점거하여 버렸다. 이에 변발령을 내리고 국사관(國史 )을 세웠으며, 영명(永明)을 사로잡아 나라 안을 깨끗이 한 뒤에 뭇 우두머리들을 굴복시켜 막북(漠北)을 아우르니, 그 명령이 나아가고 팔기병이 향하는 곳에는 견고하고 강한 성벽이 없었기에 곳곳에서 벌 때 같이 명(明)의 부활에 뜻이 있는 선비가 일어났으나 다시 어찌할 수 없이 꺾이고 패하였다. 아마도 유사이래 변방 밖의 뭇 종족 가운데 황제가 다스리는 한나라 땅에 들어온 것 중에서 이처럼 강하고도 번성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선비들이 비록 밤낮으로 남한산성의 치욕에 대해 이빨을 갈면서 임진년에 신통치 않게 도움을 받은 의리로 명나라에 대해 보답하고자 하지만, 내가 보장하건대 1백년 안에는 기필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 무릇 변변치 못하게 압록강 이남의 수천 리 땅에서 적은 숫자의 무리로 이미 스스로가 절박함에 매달려 있으며, 또한 스스로 여진을 오랑캐로 여겨 물리치고 만주를 호로(胡虜)로 여겨 배척하며, 동쪽으로는 왜놈들에게 손발이 묶인 채 서쪽으로 명나라를 그리워하고자 하니, 백성들이 다시 어느 겨를에 능히 힘을 기를 것인가!


청(淸)의 위세는 가히 맹렬하다 할 것이지만, 만약 그 후손들이 한나라 풍속을 사모하여 자신들의 근본을 버리고 한나라 말로서 글을 짓고 오나라 계집과 월나라 계집을 황후와 비빈으로 앉히며, 팔기병을 몰아 밭에서 사냥하고 요순의 도를 이어 그 말을 치장하며, 고량진미를 배불리 먹으며 화려하고 사치스러움에 만족해한다면, 곧 앵앵거리던 한나라 땅의 말하기 좋아하는 선비들이 모두 시끌벅적하게 스스로를 거만히 스승이라 여기고 이적(夷狄)을 천하게 여기며 무리 지어 일어나 만주의 오랑캐들을 도륙할 것이니, 누가 다시 그들을 능히 제압할 수 있겠는가! 수백 년이 지나지 않아 청나라는 반드시 떠들기 잘하는 선비에게 망할 것이다.


若天假余以再生, 使置數百年之後, 則余可服東服而操淸語, 跨駟馬而說淸帝, 談同祖, 陳利害, 與朝鮮倂據遼滿 幽營之地, 北誘野人而爲前驅, 東聯倭而使撓其南鄙. 夫! 然後, 朝鮮之强可復, 而漢之慢可挫矣. 不然者, 今朝鮮之勢, 滔滔日下, 只管虛弱而不思奮勵, 不出數百年, 朝鮮必復敗於强 矣, 頹然孰能支之乎.


만약 하늘이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여 수백 년 뒤로 놓아두기만 한다면, 곧 나는 우리나라 옷을 입고 청나라 언어를 구사하며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에 올라앉아 청나라 황제를 설복하여 우리가 같은 조상임을 얘기하고 그 이해득실을 나열할 것이니, 조선과 더불어 요만(遼滿)과 유영(幽營)의 땅에 나란히 웅거하여, 북으로는 야인(野人)을 꾀어 선봉으로 삼고 동으로는 왜(倭)와 연합하여 그들로 하여금 남쪽의 천한 종족들을 휘어잡게 하자고 할 것이다. 무릇 그러한 후에야 조선의 강성함은 다시 살아날 것이요 한나라의 거만함은 좌절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조선의 형세가 저무는 해를 따라가듯 하기에 단지 허약함만을 돌보아서는 떨치고 나와서 힘을 쓰는 것은 생각도 못해 볼 것이며, 수백 년이 지나지 않아 조선은 반드시 강한 이웃에게 다시 패망할 것이니, 힘없이 무너지는 것을 누가 능히 지탱하겠는가!


余嘗論之, 强國之要, 有三. 一曰[地廣而物博], 二曰[人衆而合], 三曰[恒守其性而不失其長]. 此所謂地利 人和及[保性也. 而朝鮮則, 得地利而不全, 失人和]而亡其性, 此萬世之患也. 何謂得地利而不全. 夫朝鮮(之)地, 北連大荒, 則凍天氷地斷我後退之路; 西接蒙古, 而萬里流沙斷我左展之臂. 西南隣漢土, 而無泰岳峻峙 長江大河之限, 則其勢易於進攻, 難於防守. 東南阻大海, 而無前進一步之土. 且漢人者, 盤據萬里金湯之地, 容百族以爲衆, 蓄布粟以爲富, 鍊百萬之師而以爲强, 則恒涉野跨海, 以侵西鄙. 時有 强桀 者, 蹶起於北方, 則爲後顧之慮, 必來 攻. 倭, 海洋萬里, 各據島嶼, 有事則以易自保, 無事則順風駕帆, 任志來寇, 譬如床下 之恒致其苦. 若我常强而無衰, 則可抑漢士而郡其地, 斥倭寇而鎖其海, 可號令天下, 囊括宇內也. 若我勢一弱, 則敵騎長驅, 蹂 闔國, 虜掠吏民, 焚燒閭里. 此, 所謂得地利而不全者也.


내가 일찍이 말하기를 강한 나라의 요건에는 세 가지가 있다 하였다. 그 첫 번째가 땅이 넓고 산물이 풍부한 것이고, 그 두 번째가 사람이 많으면서 화합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항상 그 본바탕을 지키며 자기의 장점을 잊지 않는 것인데, 이는 지리적 이익과 사람의 화합 및 본바탕의 보전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지리적인 이익을 얻었으나 온전한 것이 못 되며, 사람들은 화합을 잃은 데다 본 바탕을 망각하고 있으니, 이것은 만세에 걸친 근심이라 할 것이다. 지리적인 이익을 얻었으나 온전한 것이 못된다 함은 무엇을 말함인가? 무릇 조선의 땅은 북으로 대황(大荒)과 연결되어 있으니 곧 얼어붙은 하늘과 빙판 같은 땅이 우리의 퇴로를 끊고 있고, 서쪽으로는 몽고와 접하니 만리에 뻗친 사막이 우리의 왼쪽으로 뻗은 팔뚝을 끊고 있으며, 서남으로는 한나라 땅과 인접하여 있으나 태산의 험준함이나 장강의 큰 물줄기 같은 경계가 없기에 곧 그 형세가 나아가 공격하기는 쉬우나 지켜 방어하기는 어렵고, 동남으로는 큰 바다에 가로막혀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땅이다.


한나라 사람들은 만리에 뻗친 철옹성 같은 땅에 자리 잡고 살면서 수많은 종족을 포용하여 이들로 그 무리를 삼고, 베와 곡식을 축적하고 1백만의 군대를 훈련시켜 이로서 부강함을 삼으며, 항상 들을 건너고 바다를 뛰어 넘어 그로서 서쪽의 천한 종족들을 침략하였다. 때때로 뛰어나게 강인하고도 굳세어 굴하지 않는 자가 나타나 북방에서 떨치고 일어나면 곧 뒷날의 우환을 염려하여 반드시 와서 으르고 공격하였다. 왜(倭)는 바다 1만리의 크고 작은 섬에 제각기 살면서 유사시에는 쉽사리 스스로를 보호하다가 무사하면 곧 순풍에 배를 몰아 마음대로 와서 노략질을 하니, 마치 마루 아래의 등에가 항상 골치인 것과 같다.


만약 우리가 항상 강하여 쇠퇴함이 없으면 곧 한나라 선비들을 눌러 그 땅에 군림하고 왜구를 배척하여 그 바다를 봉쇄할 것이니, 가히 천하를 호령하며 세상을 주머니 속에 넣고 주무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의 기세가 조금이라도 약해지면 곧 바로 적의 병사가 멀리로부터 말을 몰고 와서 온 나라를 유린하고 백성들을 노략질하며 고을을 불사를 것이니, 이것이 소위 지리적인 이익은 얻었으나 온전한 것이 못되는 바이다.


昔者, 蚩尤氏卽帝位於 鹿, 屹達陳兵於 .岐, 藍侯建四侯於殷地, 奄薄姑王誘三監而唆武庚, 幾撓周室, 徐偃王抑宗周而王潢池之東朝三十六國. 後世, 遼 金 淸者, 皆起於舊朝鮮[地]而有中原. 高句麗之方盛也, 强兵百萬, 南擊吳.越, 北挑幽燕 齊.魯, 恒虎威於漢方. 百濟則跨渤海而略遼西 晉平, 越草海而占越州. 新羅[則]鯨濤萬里, 陳雄兵於明石, 刑白馬而盟赤關. 此皆, 我强而易於攻彼, 是得地利也.


옛날에 치우씨는 탁록에서 제위에 올랐고, 흘달 임금은 빈·기에 병사를 주둔시켰으며, 남후는 은나라 땅에 네 제후를 세웠고, 엄박고왕(奄薄姑王)은 삼감(三監)을 꾀고 무경(武庚)을 부추켜 주나라 왕실을 거의 휘어잡았으며, 서언왕(徐偃王)은 종주(宗周)를 누르고 황지(潢池)의 동쪽을 다스려 서른여섯 나라로부터 조회를 받았다. 그 뒤에 요(遼)와 금(金) 및 청(淸) 등이 모두 옛 조선의 땅에서 일어나 중원 땅을 차지하였으며, 고구려가 막 번성하려고 할 때에는 강병이 1백만으로서 남방의 오와 월을 치고 북방의 유연(幽燕) 및 제.노(齊.魯)등과 싸움을 일으키는 등 항상 한나라 땅에 위엄을 세웠다. 백제는 발해를 뛰어넘어 요서와 진평을 공략하였고 초해를 건너 월주를 점령하였다. 신라는 1만리 길의 거대한 파도를 넘어 명석(明石)에 뛰어난 병사들을 주둔시키고 백마를 잡아 적관(赤關)의 맹세를 받았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우리가 강하면 저들을 공략하기 쉬운 것이니 이것이 지리적인 이익이다.


若夫檀氏之世, 有  兪之寇, 列國之時, 箕氏蒙東胡之侵, 丸都焚蕩, 后妃被虜, 平壤敗沒, 而公侯世族及士民之被掠者二十八萬. 黃山將殞, 泗[ ]( )城陷, 白馬江頭, 胡馬爭嘶, 落花岩畔, 芳魂亂飄. 忽汗之滅, 而渤海之民放散四處, 雖謀復圖興, 數百餘年而終致其殘滅. 夫勝朝以後累百年間事, 誰肯 顔而過問哉! 降至壬辰之役而八域魚肉, 丙子之禍而州里蕭然.  ! 今世之人, 溺於虛文, 閒於衰弱, 棄其道而咀宋儒之餘唾, 貶其君而比外邦之臣僕. 盖, 歷觀近世之往事, 傍察今代之趨勢, 舍大猷而謀小(欲)[慾], 擲公戰而圖私益,  公(宣而)[室以]循其家, 漁細民以肥其腹, 而以區區零 之事,   然醉中談夢 蝸角爭勝; 滔滔之勢, 日下而不振, 已無我力而謀賴於人, 此勢已孤弱而倂亡其本性也. 後世若有强 者, 代淸而興則, 必脅其主而誘其臣, 郡其地而隸其民矣. 今日之所以, 溺於安逸而茫然無爲者, 豈非後日, 呼飢 寒之因耶? 余之所謂, 不出數百年而必爲强 所敗者, 豈矯激之語耶? 噫!


무릇 단군의 치세 때는 설유의 노략질이 있었고, 열국시대에는 기씨(箕氏)가 동호의 침략을 입어 환도성이 깡그리 불타고 후비들이 포로로 잡혀갔으며, 평양이 패망하여 몰락하니 공후(公候)와 세족(世族) 및 선비와 백성 등을 노략질해 간 숫자만 28만이었다. 황산벌에서 장군이 운명하고 사비성이 함락되자 백마강 머리에서 오랑캐 말들이 다투어 울고 낙화암의 물가에는 꽃다운 넋들이 어지러이 떨어졌으며, 홀한(忽汗)의 멸망으로 발해의 백성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비록 부흥을 도모하기를 수백여 년이었으나 결국에는 죽임을 당하여 멸망하기에 이르렀다. 무릇 고려조 이후 수백년간의 일을 그 누가 기꺼이 나서서 얼굴을 붉히며 물어 오겠는가? 아래로 임진왜란의 어려움에 이르러서는 팔도가 진창이 되었으며, 병자호란의 재앙을 만나서는 고을들이 쓸쓸하였다. 더욱이 지금 세대의 사람들은 헛된 글에 빠져 하릴없이 쇠약해지고, 자신의 도는 버리고 송나라 유생이 뱉은 침을 곱씹으며, 자신들의 임금을 깎아 말하여 외국 신하의 몸종에 비기고 있다.


대저 근세의 지난 일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지금 세대의 추세를 그 곁에서 관찰해 보면, 큰 계책은 버리고 작은 욕심만을 꾀하며, 공동을 위한 싸움은 내팽개치고 사사로운 이익만을 도모하며, 조정을 좀먹어 이로 가문을 다독거리며, 가난한 백성들을 약탈하여 자신들의 배를 살찌우며, 자질구레한 일들을 가져다 희믈그레한 눈매로 취중에 꿈 얘기하듯 하면서 쓸데없는 승부나 다투고 있다. 이처럼 세상의 흘러가는 형세가 마치 저무는 해와 같아서 떨치고 일어서지 못하고 이미 스스로의 힘은 없이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고자 하고 있으니, 그 형세는 이미 나어린 고아가 아울러 그 본 바탕마저 잃은 꼴이라 할 것이다. 후세에 만약 강한 이웃이 있어 청나라를 이어서 일어난다면, 곧 반드시 우리의 임금을 협박하고 그 신하를 꼬여 이 땅에 군림하며 이 백성들을 노예로 부릴 것이다. 오늘날 안일함에 빠져서 우두커니 아무일 없이 있는 것이 어찌 뒷날에 주리고 춥다고 울부짖는 원인이 되지 않겠는가? 수백 년이 지나지 않아 반드시 강한 이웃에게 패하고 말 것이라고 내가 일컬은 것이 어찌 지나치게 과격한 말이라고만 하겠는가. 오호라 슬프도다!


昔者, 檀儉之肇基立業也, 以無爲爲道, 以寧靜爲行, 扶善滅惡, 入孝出忠, 此誠(萬歲之聖)[萬世聖之]萬世之聖訓也. 雖然, 後屬疎遠而益相分, 風土互殊而別其業. 且膠守陳法而不知應變, 遠事進攻以求攘拓, 而其功不得永固, 歷檀氏千數百年之隆運而已. 作列國分治之勢, 於是人和已失而地利亦去. 雖三國與渤海者, 得振古威以光我國, 而其後無足可聞者.  ! 金庾信與太宗王, 恨麗.濟之交攻, 憤國威之不揚, 乃誘唐兵而滅其同族, 奉封策而辱其祖宗, 實爲萬世之開醜. 夫羽翼折, 則鵬失扶搖之勢, 唇已亡, 則齒不免凍寒矣. 新羅旣引敵國而 同族, 棄祖宗之土而不能復. 夫內 其親, 外親 敵, 而能無孤弱, 則天下之人, 亦可倒行 逆施而無所 也, 割股充 而無所 也; 造翁豈有, 如斯非理耶!


옛날에 단군 임금이 나라의 기초를 열어 위업을 세우고 무위의 도로서 고요히 행함에, 선을 북돋우고 악을 멸하며, 들어서면 부모에게 효도하게 하고 나서면 나라에 충성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진실로 만세에 걸친 성인의 교훈이다.


비록 그러하나 후손들이 점차 소원해 지고 게다가 서로 나누어지게 되니, 풍토가 서로 틀림에 생업을 서로 달리하게 되었다. 또한 진부한 법에 얽매여 변화에 순응할 줄 모르니, 멀리 원정을 나아가 공략하여 오랑캐를 내쫓고 땅을 넓히고도 그 공덕을 영원히 굳히지 못하고 단조(檀朝) 1천 수백 년의 융성함에 지날 뿐이었다. 열국 분할통치의 형세를 이루고 나자 인화(人和)는 이미 잃어버렸으며, 지리적 이득 역시 없어지고 말았다.


비록 삼국이 발해와 더불어 옛 위세를 얻어 떨치고 우리나라를 빛내었으나, 그 후에는 그다지 귀 기울일 만한 것이 없었다. 항차 김유신과 태종왕이 고구려와 백제가 번갈아 침공해 옴을 한탄하고 나라의 위세가 드날리지 못함을 분하게 여기다가, 이에 당나라 병사를 끌어들여 동족을 멸망시키고 당의 봉책을 받들어 조종(祖宗)을 욕되게 하였으니, 실로 만세에 걸친 추악함의 시작이라 할 것이다.


무릇 날개 깃이 꺾이면 곧 붕새는 힘차게 나는 기세를 잃어버리게 되고, 입술이 없으면 곧 이빨이 시려움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신라는 이미 적국을 끌어들여 동족을 죽였으며, 조종(祖宗)의 땅을 버리고는 다시 회복하지 못하였다. 대저 안으로 친척을 원수로 여기고, 밖으로 원수나 적들과 친하게 지내고도 능히 외롭고 약해지지 않는다면, 곧 천하의 사람들 역시 거꾸로 행하고 거슬러 시행하여도 어리석지 않다 할 것이며, 다리를 베어 배를 채우고도 굶주리지 않았다 할 것이다. 조물주에게 어찌 이와 같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 있는가!


宇宙之內 蒼茫之外, 果有一大精靈, 貫流周包而推運之者耶? 造翁之生人也, 欲其養善滅惡, 以率萬物者耶?  質之外, 果有精靈, 能扶善滅惡, 通性完功, 則身固有死, 而靈可以朝天入神鄕耶? 人之於生也, 只可安分樂道, 忍辛耐苦, 而無怨則足耶? 存性養志, 行善而不怠, 使得俯仰無愧, 則雖死而無餘亦足耶?   噫! (此數者者)[此數者者]此數事者, 豈可(易以)[以易]爲言哉! 余誇爲東夷之人, 可對天下而無愧乎! 余歎上古之武勇, 而今世之人, 皆可不勞戈戟, 東斥西攘, 使國復置於富强之域耶?   噫! 此數事者, 今雖弊其舌而說之, 乃算死兒之齡而已也, 亦復何大益之有. 夫! 幸不偏, 技無專, 民物不可無危難, 而家國之興亡, 飜覆無常. 今朝鮮之不幸, 是亦將幸之端歟! 余觀, 夫! 人心之分裂, 民氣之銷沈, 而不能不投筆長歎也. 嗟桓因乎! 嗟桓因乎! 今片區震域, 一脈遺民, 其將奚爲! 其將奚爲!


우주의 안으로 아득히 넓은 그 언저리에 과연 한 큰 정령(精靈)이 있어 일체를 꿰뚫어 흐르고 두루 감싸 안으며 이 세상을 밀어 운행하게 하고 있는가? 조물주가 사람을 낳게 한 것은 선을 기르고 악을 멸하여 이로서 만물을 통솔하게 하고자 했던 것인가? 신체의 바탕 외에 과연 정령이 있어 능히 선을 북돋우고 악을 멸하며, 본바탕에 통하여 맡은 일을 온전히 함으로서 곧 신체는 물론 죽음이 있더라도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서 신의 고향으로 들어가는 것인가?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서 단지 본분을 지키고 도리를 즐기며 괴로움을 참고 견디어 원망함이 없으면 곧 족한 것인가? 본바탕을 지니고 뜻을 기르며 선을 행함에 태만하지 않고,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보아 부끄러움이 없으면 비록 죽어서 남는 것이 없다 할지라도 역시 만족한 것인가?


오호라! 이 몇 가지 일들 또한 어찌 쉽게 말처럼 되겠는가! 내가 동이의 사람됨을 자랑으로 여기기에 천하를 대함에도 무슨 부끄러움이 있겠는가! 내가 상고 시대의 용맹스러운 무예에 탄복하고 있지만, 지금 세대의 사람들은 어이하여 모두가 군사의 일에 힘을 써서 동쪽과 서쪽으로 적들을 몰아내고 이 나라를 다시 부강의 강역으로 올려놓으려 하지 않는가? 오호라! 이 몇 가지 일들 또한 지금 비록 혀가 닳도록 말하지만 그저 죽은 아이 나이 헤아리기일 따름이니 다시 무슨 큰 이득이 있겠는가! 무릇 행운은 편중되지 않고 재주는 독점됨이 없기에 백성과 사물에게는 위난이 없을 수 없고 가문과 국가의 흥망은 반복됨이 무상하다 할 것이니, 지금 조선의 불행 또한 장래 행운의 실마리가 될 것인가? 내가 살펴보건대 인심은 분열되고 백성의 사기는 소침하니, 이에 붓을 던지고 길게 탄식을 하지 않을 수가 없도다. 오호라 환인(桓因)이여! 오호라 환인(桓因)이여! 지금의 한 조각 진역(震域)과 한 줄기 유민(遺民)은 장차 어찌될 것인가! 장차 어찌될 것인가!


《규원사화》의 현존하는 판본을 크게 나누면, 본서에서 저본으로 이용한 '국립도서관의 소장본을 ?翩祺?社에서 영인·출판한 것(편의상 '?貶돎?'이라 한다)'과 '양주동 소장의 필사본 계열 6종(편의상 '양필본'이라 한다)' 등 두 부류가 있다. 먼저 ?貶돎뼈? 조선 중기로 예상되는 시기에 실명씨(고평석님은 북애노인이 직접 쓴 원서라 하였다)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서, 영인시 첨부된 고평석님의 影印後記 내용을 일부 전제하면 다음과 같다.


《규원사화》는 조선조 숙종 2년(을묘, 1675년)에 북애(北崖) 노인이 쓴 우리의 상고사이다. …… 필자는 우리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규원사화》에 관한 사료적 가치를 조사하다가 이 원전을 어려운 과정을 거쳐 대할 수 있었다. 이 사서는 다른 고서와 비교해도 매우 오래된 책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서지학자이며 국립도서관에서 고서를 전문적으로 다루고 있는 장지연 선생도 확인했듯이 종이의 질과 글씨 그리고 제호를 표지에 바로 쓴 것 등으로 미루어 조선 중기의 것임이 틀림없었다. 틀린 글자 때문에 종이를 버릴 수 없어 그 위에 종이를 오려 붙여 바로잡은 데도 여러 곳 있어 저자의 소박한 일면을 읽을 수 있었다. …… 이 사서의 원전을 조사하면서 북애 노인의 깊은 사려에서 비롯된 민족사의 방향 지침을 다시 한번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은 잊을 수 없는 일이다.


(후략)


다른 하나는 그 뿌리를 양주동님 소장의 필사본에 두는 도합 여섯 종류의 필사본들로서 각 대학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는 것인데, 이상시(李相時)님이《규원사화》의 진서(眞書)임을 여러 자료를 들어 밝혀 놓은 고려원 발간《단군실사에 관한 고증연구》(이 책에는 ?貶돎뼁? 대한 언급은 없다)에서 판본의 종류를 밝힌 부분을 일부 전제하면 다음과 같다. 현전하는《규원사화》가 A.D.1920년부터 A.D.1930년 사이에 단군교도들에 의하여 복사 또는 등사되고 민족주의 사학자들에 의하여 인용되어 여러 가지 역사 서적이 출판된 사실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A.D.1920년 경에도 민간에 그 사본이 전래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는데, 현전하는《규원사화》의 필사본은 A.D.1940년(단기 4273년, 昭和 15년) 9월에 양주동(梁柱東)이 비장하고 있던 소장본을 손진태(孫晋泰) 가 3본을 필사하여 소장하고 있다가, 광복 후 고려대학교 도서관과 서울대학교 도서관 및 국립중앙도서관에 각각 1부씩 기증하여 소장하고 있던 중에 고려대학교본은 A.D.1976년에 아세아 문화사에서 영인 발간한 사실이 있고, 서울대학교본은 그 후 없어졌다가 방종현(方鍾鉉)이 소장하고 있던 소장본을 다시 등사하여 동 대학교 도서관에 소장하고 있으며, 그 밖에 언제 어디에서 누가 필사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권상로(權相老) 소장본을 필사하여 동국대학교에, 이선근(李瑄根) 소장본을 등사하여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각각 소장하고 있고, 또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마이크로 필림본 하나를 역시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하고 있는 등 도합 6종이 현존하고 있다.


그런데 이 6종의 필사본을 비교 대조하여 보면 동국대학교본에서는 '啓發'을 '啓達'로, 고려대학교본에는 '壬儉'을 '王儉' 등으로 잘못 필사한 흔적이 간혹 발견될 수 있을 뿐 그 내용은 모두 동일하다.

먼저 영본과 양필본을 비교하여 보면 양필본은 필사된 경로가 확인되는 것과 확인되지 않는 것이 있다.

[송준희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