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훈족(고구려유민), 유럽을 향한 신의 징벌

한부울 2006. 9. 24. 13:16

상추(萵苣)는 고구려에서 나왔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512 

고구려韓(무쿠리칸汗)계보와 영역 http://blog.daum.net/han0114/17045482 

아틸라 제국역사 375-476 http://blog.daum.net/han0114/17045681

훈(Hun)족은 정말 한민족(COREAN)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2191914 

훈족(한민족, 고구려유민)이 로마 군단을 괴멸시키는 용맹스러움 http://blog.daum.net/han0114/6031337 

유연(柔然:Rouran Empire) -아발스(Avars) http://blog.daum.net/han0114/17048060

아발스(Avars) 서양에 알려진 고국려 국명 http://blog.daum.net/han0114/17045619 

한(漢)은 1910년 신해혁명 이후 만들어진 新造語일 가능성?
http://blog.daum.net/han0114/17044211 

5세기 후반 남조(南朝), 북조(北朝)는 신라, 고구려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914 

양귀비(罌粟 Opium poppy)가 조선 땅에서 자생되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49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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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족(고구려유민), 유럽을 향한 신의 징벌

Europeans called them "Huns". Originate ing From the main land of Korea, they invade d the Roman empire during the 4th century.

유럽인들은 그들을 "훈족(Huns)"이라고 불렀다. 본국 고려(corea; 고구려의 준말) 땅에서 일어난 그들은 4세기 기간중에 로마 제국을 쳐들어왔다.


그러나 여기에서 고려=고구려 본국을 어디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먼저 집고 넘어 가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한반도북방인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구려 땅은 유라시아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야만이 고구려 정규군이 아니더라도 유민들이 조직화하여 유럽을 공격 할 수 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그리고 몽골계 자료를 보면 고구려가 19대 광개토대왕, 20대 장수왕, 21대 문자왕 3대 걸쳐 서기 392년부터 519년까지 최대 영역을 유라시아까지 벋쳤다는 기록이 분명 있고 시기적으로도 훈족이 준동하였던 시기와 일치한다.

그리고 아래 삽화그림에서 보듯이 훈족이라고 하는 고구려 군사들의 모습 또한 서양인과 비슷하다고 느끼게 하는 것은 당시 서양사의 열등의식을 가늠케 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론 우리가 반도사에 몰입해 우리 모습만 감안하고 이 기록을 보려고 하기 때문에 혼란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러시아계 역시 고구려 영역내에 존재한 종족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일찍부터 고구려의 기록을 보면 다민족 다문화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터어키 사람들이 고려를 보고 형제의 나라라고 하는 말을 생뚱하게만 들어야 할 것인가?

대륙사를 접함에 있어 먼저 갖추어야 정립해야 할 것은 터어키란 투르크계 역시 대고려(korai)연합제국(united corea) 내에 존재한 민족이라고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서양중심의 역사에서는

동방을 유라시아, 중앙아시아가 아닌 한반도라 하고 한반도 조선(朝鮮)의 뜻을 영어로 ‘the Land of Morning Calm"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서양인들 스스로가 모든 역사와 문화의 시작 즉 아침이 朝鮮 즉 동방으로부터 나온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인데 근세기 조선을 한반도로 집어넣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해석 무조건 순종하는 나라인 것처럼 매도한 역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수수께끼 같은 일본이란 나라의 태동을 한번 생각해 본다.

일본이란 나라와 마찬가지로 몽골이란 제국의 이름 태동도 수수께끼이다.

일본이란 나라는 1872년 전후 서세에 의해 근세기에 만들어진 신생국가라 판단한다.

동시에 몽골이란 제국도 필요에 의해서 근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판단된다.

무슨이야기냐 하면 서세가 동남아시아 향료를 원만하게 독차지하고 양귀비(아편) 생산지

황금삼각지대(Golden Triangle) 즉 동남아시아의 타이, 미얀마, 라오스등지를 점령하기 위해서 지금 소말리아 해적처럼 방해가 되는 토속 해적집단 왜구무사정치인들을 먼저 회유해야 하였고 한편으론 안정장치로 정착시키기 위한 방책으로 한지로 남아있던 대륙조선 관할지인 지금의 열도를 이용 일본이란 나라를 새롭게 만들어 그들을 고정 거주지에 몰아 넣기 위해 진정시켰을 가능성도 생각 할 수 있다.

떠돌이 신분이었던 왜구들은 일본이란 국명을 걸고 나라를 차지 할 수 있는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마다 하지 않았을 것이고 서세입장에선 골치아픈 해적들을 일단 소개시켜 자연스럽게 항로가 안정되면서 비용이 크게 줄어 들것이기 때문에 누이 좋고 매부 좋고의 조건이 성립되는 것이다.

때문에 서세의 용병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근세기에 서세 앞잡이가 되어 왜구무사정치인들은 대대로 그늘이 되었던 부모같은 나라 중국이고 대국인 조선을 배반하면서까지 눈에 불을 켜고 앞장서 대륙조선 말살에 동참했을 가능성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바로 1872년경 명치유신정치인들이 부르짖던 탈아입구(脫亞入歐)가 바로 이러한 실체였던 것이고

몽골제국 역시 고려연합을 동방 즉 한반도로 집어 넣기 위해 필요한 각색이었던 것이다.

대고려 소속 몽골계 무사들이 마치 독자적인 국가체제를 가졌던 것처럼 만들었지만 기실 그 국가체제는 바로 고려연합(united corea)이란 사실이며 그러한 사실을 서세는 역사에서 감추고 싶었던 것이다.

몽골계 무사 부족장, 추장정도의 테무진을 징기스칸으로 띄운 것은 바로 몽골제국을 만들기 위한 것이며 몽골계 장수 테무진(鐵木眞1162~1227.8.25 정복시기:1206~1227)=티무르(鐵,chol)=최(崔, chol)이 고려무신정권(武臣政權1170-1270)시기에 대고려 대장군 위치에 올라 옛 고구려 땅을 회복한 일련의 전쟁이었지만 서세는 이것을 고려가 아닌 몽골제국이라 하여 고구려를 연상 할 수 없도록 하였고 마치 새롭게 생성 된 역사 사건인 것처럼 꾸민 역사인 것이다.

문제는 고려와 고구려가 연계되는 것을 막는 것이지만 훈족과 고구려가 연계되는 것을 크게 두려워했을 것이란 추측을 할 수 있다.

훈족이 벌린 전쟁은 고구려와 연계되는 것이지만 훈족과 고구려를 분리하니 유라시아의 영역은 빈공간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후세 13세기때 대고려가 벌렸던 고구려 영토 회복전쟁이었지만 마치 몽골계 침략전쟁인 것처럼 만들어 동방역사가 가진 진실성을 훼손시키고 초라하게 만든 것이 지금의 근세사이다.

고구려를 이은 대진국(발해)등 삼한제국들이 하나같이 이어 고토회복, 다물흥방이란 구호를 내 건 것은 다 이같은 이유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몽골제국이 이름 붙인 4대 칸국(汗國)들의 면모를 보자.

모두 옛 고구려 강역 5(盟)이고 시베리아 전역이다.

 

 

 

汗國-韓(漢)國

汗=韓=漢' 은 음이 같다.

汗은 뜻이 나라이름으로는 맞지 않는 땀만 흘리는 수고로움이란 뜻의 글자이다.

漢은 나라이름에 사용 할 수 없는 협소한 물이름(水名)의 글자이다.

그러나 韓은 나라이름이다.

지금까지 한국(韓國)이라는 국명을 사용한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대륙을 차지한 세력은 중국(中朝:나라 중앙에 있는 지도부 즉 중앙정부지칭)이라고 만 하였지 감히 한국(韓國)이란 이름을 가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삼한의 뿌리인 대한민국은 근세기 대륙조선이 망한 후 대륙을 점령한 세력이 중국이란 국명을 가지기 이전 1882년 부터 이미 대한제국이라는 국명을 사용하면서 한(韓:거대한 나라)국의 전통성을 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지금의 몽골 역사학자들은 고구려를 자기네 역사라고 하면서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 20대 장수왕, 21대 문자왕 3대(392~519)걸쳐 확보한 영역이 징기스칸의 영역보다 더 넓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훈족이 서유럽을 강타하고 쑥대밭을 만든 것은 역사를 거슬릴 수 없는 이치에서 나온 것이고 또한 서양역사흐름자체를 바꿔놓았던 큰 회오리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 역사 사실을 근세기 서양인들은 도저히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근세기 그들이 동양을 지배하고 침략자가 되면서 거대한 삼한 영역이 한반도로 축소되어 들어갈 수 있었으며 비로소 그들은 목적을 달성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근세기 역사는 서양중심의 역사였기 때문에 이치적으로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역사가 많다.

고려 또는 조선이 원래 동방의 개념으로서 존재 할 때 서양주류에겐 큰 장애가 되었을 것이 뻔하다.

동방역사의 근원을 유라시아, 중앙아시아에서 한반도로 밀어내기 위해서는 열도가 일본국이 되어야 했고 일본과 열도는 조선을 한반도에 집어 넣을 수 있는 환경조성에 적절한 대안으로 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삼한의 존재를 깡그리 없앨 수는 없었다.

역사를 온통 다 고칠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에 삼한을 몰 집어 넣었고 한반도 신세와 다를바 없이 인구 260만(2006) 정도의 작은 나라로 몽골을 만들어 역시 그렇게 남겨 두었다.

지금의 몽골과 한반도 조선은 같은 민족이 아닌가?

그렇게 볼 수도 있는 것은 삼한과 대륙조선의 실체를 같은 선상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인종을 따지기 이전에 역사 분리가 풀어야 할 문제인 것이다.

같은 역사를 분리한 근세기 역사재편짜기 실체는 서양인들이 두려워하는 역사인 것이다.

일본이 지금의 열도에 존재하게 한 이유로서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은 바로 서양 중심의 역사를 꾸미는데 유익한 것이라고 볼 수 있어야 하며 그러한 판짜기는 양쪽 모략집단에게 분명 이익이 되는 장사였던 것이 틀림이 없다.

근세기 서양 중심의 역사는 상업주의(commercialism)를 떠나서는 도저히 설명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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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황실에 입조한 호한야(呼韓琊)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질지(郅支)는 자신의 추종세력을 이끌고 서 투르키스탄의 초원으로 향한다.

그러나 흉노내의 반한(反漢)세력의 일소를 원했던 한 황실은 기원전 36년 장군 진탕(陳湯)을 보내, 질지를 살해하고 그의 세력을 와해시켜 버렸다. 이후 질지의 서흉노는 유라시아 초원의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이들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서는 시기는 그로부터 400년이 지나서였다.

현재의 중앙아시아사 연구결과를 종합해볼 때 질지를 따라나선 서흉노의 잔존세력은 진탕의 군대에게 자신들의 수령을 잃은 뒤에도 계속해서 서 투르키스탄과 아랄 초원 인근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이들이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은 그들 주변에 그들의 행보를 기록 해 줄 정주문명이 전무했던 까닭에서였다. 질지로 부터 400년 후, 서흉노의 잔존세력은 당시 유럽 최대의 문명이었던 로마와 접촉하게 된다.

 

 

4세기경 서 투르키스탄과 아랄초원에 거주하던 서흉노의 후예들은 돌연 유럽으로의 대 이동을 개시한다.

이러한 행동의 원인에 대한 학설은 매우 분분한 편이지만, 현재로서는 당시 유라시아 초원의 기상이변에 따른 이주라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여하튼, 유럽으로의 이동을 개시한 서흉노의 후예들은 이후 역사적으로 훈(Hun)이라고 불리게 된다.

374년 발라미르(Balamir)가 이끄는 훈족의 일파는 볼가 강과 돈 강을 건너 알란인과 조우를 하며 유럽의 역사 전면에 화려한 데뷔를 하게 된다. 일거에 알란인들 격파하고 복속시킨 훈족은 드녜프르를 건너 오스트로고트를 짓밟고, 그들의 수령인 에르마나릭(Ermanarich)과 그의 계승자 비시미르(Vithimir)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이웃의 처참한 파괴를 목격한 비시고트의 일족은 훈족을 피해 로마제국의 영내로 들어가게 된다.

로마를 파멸로 몰아넣은 게르만족 대 이동의 시작이다. 이후 발라미르의 훈족 기마군단은 다뉴브 유역의 헝가리 초원으로 향했고, 그곳에 있던 고트족의 일파인 게피대(Gepidae)를 복속시켰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사망하고 동 · 서 로마가 분열되었다. 이 해에 훈족은 트라키아와 아나톨리아 양쪽방면으로 동로마 제국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훈족의 발칸방면 원정은 동로마제국의 끈질긴 저항에 부딪쳐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아나톨리아 방면으로 쳐들어간 훈족 군단의 위력은 동로마 제국은 물론 사산조 페르시아에게까지 엄청난 공포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동시대의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Ammianus Marcellinus)와 고트인 사가 요르다네스(Jordanes)가 훈족에 대해 서술한 기록을 찾아보면, 한(漢) 대의 사가 들이 흉노에게 품었던 공포심과 너무도 유사한, 공포와 경악, 적대적 경외심을 유감없이 표출 하고 있다.

훈족의 아나톨리아 원정군은 카파도키아를 유린하고, 팔레스타인 지역까지 진격하여, 한때 예루살렘을 위협하기도 하였다. 398년 아나톨리아에 재차 침입한 훈족의 군대에 대해 동로마제국 황제 아르카디우스1세는 어떠한 대응도 하지 못했고, 훈족 원정군은 소아시아에 막대한 피해를 안기고 물러난다.


400년 발라미르의 지배권을 계승한 그의 아들 울딘(Uldin)은 중국과의 대결에서 흉노의 선우들이 보여줬던 유목민 특유의 교활함을 제대로 보여주는 인물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동로마제국과 적대하며 서로마제국과는 친선을 도모하는 정책을 폈다. 서로마와 적대적이었던 게르만의 일파들 역시 훈족과 적대감을 감추지 않았기 때문에 울딘과 서로마제국 황제는 서로를 이용해 각각 동로마 제국과 게르만 일파들을 견제하였다.

울딘이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동유럽의 평원으로 진출을 시도하자 401년 비시고트의 수령 알라리크(Allaric)는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서로마제국의 영지로 들어가 이탈리아 반도를 유린한다.

반달 출신의 로마장군 플라비우스 스틸리코(Flavius Stilicho)의 분투에 힘입어 서로마제국은 간신히 비시고트의 침략을 막아냈지만, 연이어 침입한 동고트의 수령 라다가이수스(Radagaisus)의 게르만 연합군에게 이탈리아전역이 유린당하고, 스틸리코 마저 파비아에서 라다가이수스에게 패하고 만다.

울딘은 서로마를 구원하기위해 자신의 정예군단을 동원하였다. 울딘의 군단은 플로렌스 남부의 파이술레에서 라다가이수스의 게르만 연합군을 격멸하고, 라다가이수스를 붙잡아 처형함으로서 서로마제국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출해 낸다. 

 

406년경 훈족의 세력은 우랄산맥부터 헝가리에 이르는 동유럽 초원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고, 알란인과 고트족의 일파인 오스트로고트와 게피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422년쯤의 훈족은 루아스(Ruas), 문주크(Mundzuk), 옥타르(Oktar) 형제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는데, 곧 이들의 권력은 루아스에게 독점되었다.

루아스는 발칸반도에서 동로마제국의 기습을 손쉽게 격퇴시키고, 그들에게 막대한 공물을 부과하였다. 423년 동로마의 황제 테오도시우스1세는 서로마제국에 대한 대대적인 원정을 감행하였는데, 수세에 몰린 서로마의 황제는 루아스에게 또다시 구원을 요청했고, 루아스는 직접 군단을 이끌고 이탈리아전선에 참전한다. 승산이 없음을 직감한 테오도시우스1세는 총퇴각을 명령했고,

동로마제국은 서로마제국의 영토대신 훈족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헌납해야만 했다.

434년 루아스가 사망하고, 훈족의 지배권은 문주크의 두 아들인 블레다(Bleda)앗틸라(Attila)에게 계승되었다. 앗틸라가 훈족의 지배권을 계승한 원년, 훈족의 무력에 대응할 의지를 잃은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앗틸라와 굴욕적인 평화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에 의해 동로마제국은 훈족에게 막대한 공물을 제공하게 되었고, 앗틸라의 일방적인 요구를 모두 수락해야만 했다.


앗틸라는 서로마제국과 친선을 유지하면서도 제국의 내정에 지속적인 간섭을 했고, 서로마제국은 앗틸라에게 의지하는 성향까지 보이기 시작한다.

훈족의 공포로 말미암아 게르만의 여러 일파들이 서로마의 영내로 속속 진입하면서 서로마제국의 내정은 극도의 혼란에 빠져들었고, 농민들의 반란마저 진압할 여력을 잃은 서로마제국은 앗틸라에게 도움을 청하여 이들을 진압하기까지 한다.

436년 서로마 영내에 자리를 잡았던 부르군드의 군디카르(Gundicar)왕벨기에를 공격하여 앗틸라를 자극했다. 이에 앗틸라는 숙부인 옥타르와 로마장군 아에티우스를 급파하여 군디카르의 부르군드 군대와 대결하였다.

네케르에서 벌어진 양군의 격돌은 군디카르의 2만 부르군드군이 그의 왕과 함께 전멸하면서 훈족의 승리로 마무리 되었고, 이 전쟁은 영웅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의 주제가 되었다.    

 

 


         앗틸라의 상반된 이미지. 우스운 건 전부 백인으로 묘사되는 점.


441년 앗틸라는 동로마제국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콘스탄티아 조약을 성실히 수행하지 않았고, 앗틸라를 자극하는 행동을 거리낌 없이 저질렀다. 마르고스 주교가 훈 왕족의 무덤을 도굴한 사건은 앗틸라와 훈족들을 분노케 하였다.

반달왕 게이세릭(Geiselick)의 출병요청까지 받아들인 앗틸라는 그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두 차례에 걸쳐 다뉴브를 도하하여 세르비아의 나잇수스를 점령하고, 필리포폴리스와 트라키아지역을 초토화 시켰다. 아르카디오폴리스 마저 파괴시킨 앗틸라의 군단에 대해 동로마제국은 무력대응을 포기하고 말았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파견한 아나톨리우스에 의해 동로마제국은 앗틸라와 ‘아나톨리우스 협정’으로 불리는 평화협정을 맺고, 다뉴브 남부의 대부분지역앗틸라에게 할양함과 동시에 천문학적인 액수의 배상금을 감당해야했다. 이런 천문학적 배상금을 감당 할 여력이 없었던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앗틸라에 대한 암살음모를 획책하나 실패하고 만다. 

                     

  

 

앗틸라에게 동로마제국은 이미 종속국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445년 그의 형 블레다를 제거한 이래 훈족의 유일한 군주로서 군림하고 있었고, 알란과 사르마트, 오스트로고트를 비롯한 수 십 여개의 민족을 복속시키고 있었다.

앗틸라의 관심은 이제 지속적인 친선을 유지하고 있었던 서로마제국으로 향했다. 서로마제국 역시 훈족에게 지속적으로 공물을 헌납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뒤로는 아에티우스를 중심으로 훈족과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448년 앗틸라는 혼담이 오가던 서로마 황제 발렌티아누스 3세의 여동생 호노리아(Honoria)

와의 혼인을 요구하면서 지참금으로 갈리아 지방을 요구했다. 발렌티아누스와 아에티우스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고, 앗틸라는 20만의 대군을 일으켜 서로마 영내로 진군을 개시

하였다.

서로마의 실권자 아에티우스는 비시고트의 테오도릭(Teodoric)을 비롯한 부르군드, 프랑크족 군대와 합류하여 앗틸라의 대군과 맞섰고, 양군은 451년 오를레앙에서 맞부딪쳐, 6월 20일 카탈라우눔에서 양군간의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로 훈족과 서로마제국 모두 통렬한 타격을 입었고, 비시고트의 수령이었던 테오도릭은 그의 군대와 함께 전멸한다.

이듬해 군을 재정비한 앗틸라는 재차 이탈리아를 침공했고, 무인지경으로 아퀼레이아와 파비아를 점령한 앗틸라는 라벤나까지 이르렀고, 발렌티아누스 황제는 도망쳐버렸다.


로마의 진격과 철저한 파괴를 천명하던 앗틸라는 452년 7월 6일 로마 대주교 성 레오의 방문을 맞이한다. 로마 대주교의 방문과 간곡한 회군요청, 서로마 황제의 도주와 그로부터 도착한 막대한 공물을 서로마제국의 완전한 복속으로 여긴 앗틸라는 로마공격을 포기하고 군을 돌리게 된다.

 

 

판노니아로 돌아온 앗틸라는 453년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그의 사망이후 그의 제국은 심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오스트로고트와 게피대는 위대한 지도자의 죽음 이후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곧바로 반란을 일으켰고, 이들을 진압하기위해 나선 앗틸라의 아들 엘락(Ellac)판노니아에서 전사한다.

다뉴브유역에서 쫒겨난 훈족은 앗틸라의 다른 두 아들인 덴기지흐(Dengizich)딩지기흐(Dingzigikh)가 지배했는데, 덴기지흐는 자신의 군단으로 동로마제국을 공격하던 중 다뉴브 하류에서 동로마제국에 패하여 전사한다.

그의 수급은 콘스탄티노플의 원형경기장에 오랫동안 전시되었다고 한다.

남은 딩지기흐의 훈족세력은 남 러시아의 초원으로 물러나 두 개의 세력으로 분열되었으며, 일부는 헝가리에 남아 불가르족과 마자르족의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남러시아에서 둘로 나뉘어 진 훈족세력들은 이후 비잔틴의 황제들이 벌인 비밀스러운 외교정책에 의해 참혹한 골육상쟁을 계속하게 되었고 이는 훈족이 다시 재기할 수 있는 잠재적인 힘마저 앗아가 버렸다.

결국 이들은 동방에서 이주해온 아바르에 의해 격파되고, 이로서 전 유럽을 공포로 몰아가던 훈족은 역사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출처 : '훈족, 유럽을 향한 신의 징벌' - 네이버 지식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