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당연합군과 반도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은 여러 군데서 확인이 되지만, 여기서 한번 정리해 봅니다. 과연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인가 ?
1. 백제패망시 지명이 없다.
백제멸망시의 지명의 예를 들어보면
석문, 대방, 석성, 평원, 황산,대산(태산), 제성, 동명, 백마강(백마하), 주류성, 항성, 동성, 잠산 독산. 덕안
충청, 전라도 지역에는 백제 패망시대 지명이 존재하지 않으나, 기자가 살던 시화의 동쪽에는 현존하고 있다는 것은 사서와 일치하는 지역이 공주, 부여, 지역이 아님을 뜻하고 있다 할 것이다. 황산벌이라는 영화가 있지만, 황산벌이 현재 충남 연산?이라고 합니다만, 대륙에는 아직도 패망때의 지명인 황산벌, 주류성등의 지명이 산동반도에 일대에 남아 있다.
(아래의 지도참조)
2.사비성이 아닌 내지성의 비가 있기 때문이다.
부여에서 사비성이라면 당연히 사비성으로 기록된 비가 있어야 함에도 내지성이 기록된 비가 출토되었다는 것은 이곳 부여가 사비성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즉, 지금의 부여는 사비성이 아니라, 내지성이 있던 곳이다.
3.백제정벌시 당군 13만과 40만 유입지가 반도가 될수 있는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사서의 기록을 보면 백제의 멸망당시의 인구는 76만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역사학계는 1호당 1명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을 "백제의 인구"편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백제의 인구가 76만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당나라 13만 정벌군이 당에서 황해를 건너 왔다고 하는데, 백제부흥군을 토벌하기 위해서 40만의 당군을 더 투입하였다고 하는데, 53만의 활동이 충청, 전라도에서 가능했을까 하는 점이다. 그러면, 백제의 인구가 76만명(76만호를 76만명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 현재 사학계이다.)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당나라군대 53만과 신라군등이 백제의 땅에 진주하였다면, 한 나라의 인구이 절반에 해당하는 군대를 과연 투입하였을 필요가 있었을까? 인천 상륙때 4만명이 되지 못했다는 것과 6.25전쟁당시 압록강을 건너온 중공군은 백만명에 달했는데, 당시 우리나라의 인구는 3,000만명인 점을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4.백제땅을 신라와 발해, 말갈이 나누어 가졌다!
삼국사기 신,구당서에서 분명히 백제땅을 신라와 발해가 나누어 가졌다고 했는데, 경기, 충청, 전라도 어느 곳이 발해 땅이라고 밝혀지고 있는가? 반도 남부에 발해땅이 있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백제에 대한 기록중에서 남제서 백제 지명 광양이 발해땅이 되고, 요나라 땅이 되었다고 요사에 기록되고 있으니, 광양, 즉 북경지역에서는 백제 땅이 발해 땅이 될 수 있으니 패망지역을 반도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 삼국사기 기록 >
삼국사기에 나오는 다음기록입니다
"나당연합군의 백제 침공"
- 660년 3월, 나당연합군 18만의 병력이 백제 침공(당군 13만, 신라군 5만)
- 소정방, 의자왕과 왕족, 신하 등 93인과 백제인 1만 2천인을 포로로 하여 당으로 돌아감
"백제의 부흥운동"시
- 당군 40만 증파
- 당시 부흥군이 회복한 성 200여성
< 의문점 제시 >
이것을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
조선때 이율곡이 10만 양병을 주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1593년 정월 임진란때 명나라에 통보한 의병 총수는 관군의 1/4인 2만2,600명이었고
백제 패망후 730여년이 지난후 지방별 인구 (태조 및 태종실록)를 보면
- 경기, 충청, 전라도 : 56,003호
- 경상도 48,993호 였으며, 신라의 경우 수도에 약 17만9천호가 있었는데
신라가 패망한지 500여년이 지난후 조선 때 경상도의 총호수가 10만에도 미달했다. 지금 사학계1호당 1인의 인구를 계산한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것은 다 알 것이다. 그러면 조선시대의 인구는 1호당 10명으로 계산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백제시대인구수에 비해서 조선시대의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을 수가 있다는 것인가?
중세까지는 산업이 크게 발전하지 않아 인구가 완만하게 증가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학계의 주장대로 백제가 반도에 있었다고 하면 오히려 조선시대의 사람수가 상당히 적은데 그렇다면 과연 백제가 반도에 있었다는 말인가?
지금도 산동반도만의 인구가 한반도인구수보다 월등히 많다. 과연 백제는 어느 곳에 있었던 것일까?
이 의문점을 풀기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계백장군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은 영토 다툼으로 한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지러운 상황을 맞이하였다. 계백은 백제 말기 장군으로, 일찍이 벼슬길에 올라 660년(의자왕20)에 "달솔"이라는 벼슬에 있었다. 백제는 북으로는 고구려, 남으로는 왜와 손을 잡고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다급해진 신라는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여 백제에 맞섰다. 그러나 백제의 의자왕은 그 무렵 연회만을 즐기고 나라일을 돌보지 않았다.(늘 그렇듯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멸망당시의 왕은 항상 이렇게 기술되기 마련인 것도 같다.-편자註) 신라는 이 틈을 이용하여 660년 5만 명이 넘는 나당 연합군을 결성하여 백제를 공격하였다. 김유신과 당나라 소정방이 이끄는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과 백강으로 쳐들어오자 계백은 좌평 충상, 달솔, 상영과 함께 결사대 5천여명을 이끌고 황산벌(충청남도 연산이라고 하지만...)로 나가 싸웠다. 싸움터로 나아가기에 앞서 계백은 가족들이 적의 되어 치욕스러운 삶을 사는 것보다, 차라리 자신의 손에 죽는 것이 낫다며 가족들의 목을 모두 베었다. 그리고 자신도 목숨을 바쳐 싸울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계백은 싸움터에서 군사들에게 옛날 월나라 왕 구천이 5천 명의 군사로 오나라 왕 부차의 70만 대군을 무찌른 예를 들면서, 전쟁의 승리는 군사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력에 있다며 군사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5천 명의 백제군은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신라군과 네 차례의 싸움에서 모두 이겼다. 계백은 먼저 공격해 온 화랑 반굴을 죽이고, 홀로 공격해 온 관창을 사로잡았다. 어린 관창의 용기를 높이 산 계백은 여러 번 살려 보냈으나, 관창이 계속 공격해 오자 할 수 없이 관창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신라 진영으로 돌려보냈다. 그러자 두 화랑의 용기 있는 죽음을 보고 분노하여 사기가 오른 신라군은 총공격을 펼쳤다.
5만의 신라 대군과 대적하기에는 백제군의 숫자가 너무 적었다. 결국 계백 장군과 5천 결사대는 모두 죽었고,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 훗날 조선의 유학자 서거정은 백제가 망할 때까지 절개를 지킨 계백의 행동을 높이 평가하여 '나라와 더불어 죽은 사람'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처럼 계백은 나라를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온몸을 다바쳐 싸운 훌륭한 장군이었다.
계백장군이 백제를 끝까지 지킨 장군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과연 계백장군이 5천결사대를 이끌고 싸운 황산벌이 지금의 충청도 연산?인가는 의심이 간다.
우선 백제가 5천명의 결사대를 보낼만큼 군대가 빈약하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백제가 멸망후 56만 당나라군대는 백제부흥군에게 포위되어 보급로가 모두 끊겨서 신라에 구원을 청한다. 그렇다면, 56만의 당나라군대를 포위한 백제군은 얼마인가? 과연 백제는 군대가 없어 망한 것인가 불의의 기습이나 적군 진로의 오판(2차대전당시 노르망디상륙작전처럼) 으로 인해서 멸망한 나라인가?
계백장군이 물론 황산벌전투에서 자신의 군대가 승리하리라고 확신이 서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최소한의 시간이라도 벌어볼 목적으로, 아니 그곳을 지킬 목적으로도 평지를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선시대 임진왜란때도 조령은 한 사람으로 수천명의 적병을 막을 수 있다고 평할만큼 험준한 곳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소수의 군대로 다수의 적군을 막는 수비대장으로서는 험준한 곳에 진을 치고 적을 막았을 것이다. 물론, 계백장군이 잘 싸웠든지 아니든지에 관계없이 말이다. 그러나, 과연 한반도 충남 연산에 그런 지형이 있는가? 물론 한갖 야산이라도 휼륭한 방어수단이 될 수는 있으나, 똑 같은 지명을 가진 곳이 산동반도에는 아직도 남아 있다. 중국 관광코스를 소개한 곳을 보면 항상 포함되는 곳이 "황산"이라는 곳이다.
천하제일의 비경 황산, 신비한 숲 계림, 영원한 서울 장안, 장안근처의 천지호수 우루무치, 호남제일의 명소 장사, 심청전의 설화를 간직한 소홍, 한수(漢水) 한강 등 등... 너무도 친숙한 우리의 고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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