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살수대첩의 비밀

한부울 2006. 9. 22. 02:33
 

살수대첩의 비밀

 

 

 

을지문덕장군의 薩水(살수, 보수) 는 하북성( 河北省 ) 창해 ( 滄海 )서쪽에 있었다

우리는 을지문덕이 승리한 살수가 한반도에 있는 청천강으로 홍보를 해왔다. 그러나 살수는 한반도에 있을 수 없음을 史書에서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卷43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보고의 의용(義勇)이 있어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던들 민멸하여 전문(傳聞)할 수 없었다.(수서인용)"

(雖有乙支文德之智略張保皐之義勇微中國之書則泯滅而無聞)"


살수대첩은 612년에 있었고 김부식은 1145년에 삼국사기를 편찬하였으니 532년의 시차가 있어서 을지문덕에 대한 기록이나 소문이 고려땅에는 없었을까? 아니면 정말 한반도에 기록이 없었던 것일까? 을지문덕의 기록이나 장보고의 기록이 한반도에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여러 정황을 볼 때 맞을 것 같다. 왜냐하면 김부식 본인도 살수의 위치를 모르는 지명이라고 분명히 삼국사기에 밝혀 놓았다.

"삼국의 지명중 위치를 알 수 없는 지명이 350여개나 된다 ! (삼국유미상지분 350여개)"

그런데 김부식도 모르는 살수가 어찌 청천강으로 둔갑이 되었는가?


▣ 이하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


동천왕 21년(247)과 장수왕 15년(427)에 평양에 도읍을 정했다고 하였는데, 이상하게도 신라 소지마립간 17년(494)에 살수에서 신라군과 고구려군이 전쟁을 한다. 비행기를 타고 평양을 넘어 전쟁을 했을 리도 없고 분명 한반도에서는 설명이 되질 않는다.


< 高句麗本紀 太祖大王4年 >


고구려는 영토를 "동으로 창해에 이르고 남으로 살수(薩水)에 이른다"고 삼국사기에 기술되어 있다. 여기서 "창해"는 바다가 아니라 지명으로 볼 수 있는 데 "창해군(滄海郡)"은 "연제지간(燕齊之間:산서성과 산동성과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하북성에 있을 수 밖에 없다. 북사(北史)에서 창해(滄海), 교하(交河)의 지명이 있는데 이 모두 태원의 동쪽에 있다. 그러므로 살수(薩水)는 창해(滄海)의 서쪽에 있어야 한다.


< 高句麗本紀 榮留王 14年 >


앞서 언급한 고구려 천리장성에 대한 기록이다. 왕은 뭇사람을 동원하여 장성을 쌓되 동북의 부여성(扶餘城)에서 동남(東南)의 해유리까지 1천여리를 잇대니 무려 16년만에 역사를 끝냈다.


三國史記 東北自扶餘城 東南至海有里

舊唐書199 東北自扶餘城 西南至海有里

唐 書220 東北首領域 西南屬海久


이는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의 있은 지 9년 후의 기록이다. 이 장성의 기록에서 장성의 서쪽에 고구려가 있고 동쪽은 신라땅인데 어떻게 남의 땅에 "薩水"가 있었겠는가?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고구려 천리장성을 기준으로 서쪽이 고구려, 동쪽이 신라라는 말이다

그 근거로 천리장성의 서쪽으로 현재 철도가 나있다. 즉 방어위치가 동쪽이라는 얘기이다

더욱이 살수대첩 이후 23년이 지난 뒤의 당과 고구려의 전쟁에서 빼앗긴 지명이 장성 서쪽에 있는데 은산, 신성, 용도, 고대인성 (銀山, 新城, 用道, 古大人城)의 기록이 있었겠는가? 이 지명은 北平의 서쪽에 있는 지명들이니 위 지명이 있는 지역에 살수가 있었을 것이다.


"살수(薩水)"라고 읽는 동이문자 "살(薩)"은 "보살 살", "도을 보" 두 가지로 발음이 된다. 그렇다면 "보수(薩水)"로 발음해야 옳은 것인가? 창해의 서쪽에는 산서성의 오대산(五臺山)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물이 있다. 이 산은 불교의 명산이다. 이 산에서 흐르는 물을 표시함은 "보살"을 뜻하는 글자로 볼 수 있으니 오대산에서 물이 "살수"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볼 수밖에 없다.


< 고구려와 한, 당과의 전쟁지명이 모두 중국 태행산맥의 동쪽에 실존한다 >


고구려장성의 기록과 고구려 패망때의 지명인 은산, 고대인성, 신성, 용도 등이 실존하므로 고구려 평양은 유연제노와 오월 지역 요 동쪽과 "요사"에 의하여 해주사이에서 찾아야 하며 살수 역시 이 지역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