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깨달음

일신강충,성통광명

한부울 2006. 9. 2. 14:54
 

(1)一神降衷 : 胎夢

 

一神인 하나님은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하늘과 땅과 인간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니,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인간에 나뉘어 존재하신다. 하나님의 나뉨은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존재하시며, 인간의 性에서 하나님의 나뉨을 찾을 수 있으니 곧 性의 중앙에 존재하는 眞性이다. 진성은 인간의 腦에 존재하며, 진성은 곧 하나님의 나뉨이며, 하나님의 子이니 곧 하나님의 아들이다. 바꾸어 말하면, 모든 인간은 진성이 있어 하나님의 아들이며, 모든 인간의 아버지는 하나님이다. 이것을 하나님이 인간의 중앙에 내려와 계신다는 의미로 일신강충이라 한다. 그러므로 일신강충이란 한얼님인 一神이 인간의 중심에 내려와 계신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먼저 원효설화에는 이런 일신강충의 모티브가 어떻게 형상화되어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삼국유사」에는 당시 민간에 전해지고 있던 원효의 탄생설화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一然禪師가 그 당시 고향에서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를 직접 들었던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원효대사와 같은 고향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원효대사의 집이 본래 율곡의 서남쪽에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원효대사를 잉태, 만삭이 되어 마침 그 골짜기(즉 율곡)의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홀연 해산을 하였다. 창황 중에 집으로 돌아갈 수 없고 하여 그 남편의 옷을 나무에다 걸어 두고 거기서 지냈다. 그래서 그 밤나무를 사라수라 부르게 된 것이다.....

원효대사의 小名은 誓幢, 第名은 新幢이었다. 당초 그 어머니는 流星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나서 원효를 잉태했는데 해산하려고 할 때에는 오색 구름이 땅을 뒤덮었다. 원효대사의 탄생은 진평왕 즉위 39년, 즉 수나라 양제 13년(617)이었다.

이 원효대사의 탄생설화에서 우리는 일신강충과 관련하여, 두 가지 사항을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원효대사의 어머니가 流星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胎夢을 꾸었다는 사실이다.

태몽은 지금까지 전해오는 것으로, 특히 위대한 인물일수록 빼놓을 수 없는 일화이기도 하다. 고소설(新話)의  주인공들도 대개는 특이한 태몽들을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태몽이 왜 하필 ‘유성’ 즉 별이었나 하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고 본다. 이 별이 주는 상징적 의미는 원효대사의 탄생의 비밀을 밝혀 준다.

별의 상징적 의미는 신의 존재, 至高한 존재, 영원한 것, 죽지 않는 자, 최고의 위업, 신의 사자인 천사, 어둠 속에 빛나는 희망, 밤의 눈을 가리킨다. 기독교에서의 별은 신의 인도와 호의, 예수의 강림을 나타낸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별은 태양이나

달과 마찬가지로 인정된다.

결국 이 말들을 종합해 보면, 별은 一神인 하늘을 상징한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하늘에서 별이 내려왔다는 태몽은 바로 원효가 탄생할 때 이미 그에게 일신이 강충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이를 더욱 뒷받침하는 요소로, 본 설화에서는 그가 밤나무 아래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 부분을 조동일은 「삼국유사」에만 수록되어 있는데, 원래는 상당한 의미가 있는 설화였는데 그 의미가 망각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나무의 상징적 의미를 통해서 이의 본래의미를 재구성해 볼 수 있다.

즉 나무(tree)는 世界像인 동시에 宇宙軸이며, 하늘과 땅과 물, 이 3가지 세계를 연결해서 그 사이의 교류를 가능하게 하며, 또한 태양의 힘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한가운데의 나무’이다. 뿌리는 땅 속 깊은 곳인 세계의 중심에서 뻗으며 지하수와 접촉하는 나무는 시간의 세계로 자라는 나무이며, 나이테는 나무의 수령을 알려주며, 가지는 하늘과 영원에까지 닿으며, 또한 顯顯世界의 존재 단계를 상징한다. 특히 밤나무처럼 생명의 식량인 열매가 달리는 나무-- 포도, 오디, 복숭아, 대추, 야자, 아몬드 등--는 모두 聖樹이다.

이렇게 나무는 하늘과 땅을 연결시켜 주는 상징적 존재임을 생각할 때, 원효대사가 나무, 그것도 열매가 달리는 밤나무 아래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원효에게 일신강충했다는 사실을 아주 적절하게 상징적으로 나타낸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설화에 나타나는 별과 나무의 상징적 의미를 통해서, 우리는 원효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一神이 降衷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삼일신고」의 첫 단계와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다음 단계인 性通光明할 수 있는 資質을 갖추고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이를 살펴보기로 한다.


(2). 性通光明: 무덤에서의 깨우침

 

성통광명은 일신강충한 인간이 스스로 광명한 일신을 찾아가서 그와 하나가 되는 과정이며, 이것은 곧 자기완성의 길이기도 하다. 즉 眞性은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하늘과 땅과 인간의 중심이 되는 일신이 인간의 중심에 내려와 계심이니, 인간은 스스로의 중심에서 우주의 절대자이며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 性通이란 性의 중심인 眞性에 도달하는 것이며 光明은 하나님의 모습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광명에 도달하는 것이 곧 성통광명이며, 이것이 곧 道通이다.

「삼일신고」에서는 ‘스스로의 본 바탕에서 씨앗을 구하라. 너의 뇌에 내려와 계시느니라’라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원효대사가 어떻게 성통광명을 이루는지를 「삼국유사」의 설화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원효대사는 출가하고 나서 그의 집을 희사하여 절로 만들어 이름을 「初開寺」라 했다. 그리고 그가 태어났던 그 밤나무의 곁에도 절을 지어 「娑羅寺」라고 했다.... 그는 천성적으로 聰慧가 비범하여, 스승을 모시지 않고 독력으로 배워갔다. 그가 수도를 위해 사방으로 雲遊한 행적의 시말과 불교의 弘通에 남긴 업적은 당 僧傳과 그의 行狀에 모두 실려 있으므로 여기서는 일일이 다 적지 않는다.

본 설화에는 그가 성통광명하게 되는 修道過程이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소략하게 적혀 있다. 그것은 아마도 당시 민간에서는 그의 득도과정보다는 제세이화와 홍익인간의 성통의 과정을 더 중요시했고 더 재미있어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위에서 보듯, 「삼국유사」에는 다만 원효는 태어날 때부터 총명하여 스승을 모시지 않고 독력으로 사방으로 운유하며 도를 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宿世에 善根을 심어 한 모퉁이를 들 적에 반드시 세 모퉁이와 연관하여 관찰할 수 있는 上士요 高士의 자질을 타고난 이였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그의 전기 기록에는 그의 소년기로부터 청년기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 이 때문에 그의 생애 초반의 결정적 전환점이었을 출가 동기와 그 시기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宋高僧傳」에는 丱髽之年에 불법에 입문했다고 했다. 志學之年인 15세가 되면, 상투를 하고 관을 쓰게 되는데 이 때가 관좌지년에 해당한다. 따라서 원효는 그의 나이 15세에 출가한 셈이 된다. 그러나 불지촌에서 성장한 15세의 소년 서당이 무슨 생각과 계기로 출가를 결행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주는 분명한 기록은 없다. 출가 이전에 화랑으로 상정되어 전쟁에 출전했던 그가 동료의 죽음을 목격하고, 유한적 존재의 극한을 경험함으로써 죽음 저편의 무한을 추구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원효가 진골의 신분이라야 가능했던 화랑이 되기에는 현실적으로 제약이 따랐을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당시의 사회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원효의 출가동기를 헤아리는 데 근거 있는 접근 방식으로 여겨진다. 원효가 아직 불지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던 진평왕 말기인 7세기 초반, 그 무렵의 신라 사회는 전쟁으로 편할 날이 없었다. 사량부의 청년 嘉實의 경우처럼 군역의 의무기간이 지나도 청년들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전쟁터에서 고생하기 일쑤였다. 장군도 예외가 아니었으니, 김유신장군 같은 이는 자기 집 문 앞을 지나치면서도 처자도 보지 못한 채 전쟁터로 달려나가야 했을 정도이다. 진평왕 49년(627) 7월, 서쪽 변경에 살던 남녀 300여명이 沙乙이 거느린 백제군에게 사로잡혀 갔다는 소식이며, 그 이듬해 봄에는 신라 전국을 휩쓸던 지독한 기근으로 자녀를 노비로 파는 참담한 현실을 원효인들 어찌 듣고 보지 못하였겠는가. 이런 와중에서 사려 깊은 소년 서당의 머리 속에 맴도는 것은 사람들은 왜 다투며, 세상은 왜 평화롭지 못한가 하는 의문이었을 것이고, 이 의문을 풀기 위해 구도의 험한 여정에 올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출가한 원효는 「태어나자 총명하고 뛰어나 배움에 스승을 따르지 않았다」는 「삼국유사」의 표현으로 보아, 젊은 날에는 한 스승에게서만이 아니라 여러 방면의 高僧이나 大德을 찾아 배움을 청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실제로 그가 朗智, 普德, 惠空 등으로부터 사사받았던 예가 있다. 가슴 가득 구도심이 넘쳐 나고, 「求法譬喩論」과 같은 저서를 남기기도 했던 그가 어느 한 곳에만 머물러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그는 구름처럼 떠돌면서 성통광명의 길을 찾아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성통광명의 길은 道人이 되는 길로, 멀고도 험한 길이다. 이에 원효는 당시의 다른 승려들처럼 당나라로 유학을 가려고 하였다.

그때 원효에게는 참으로 좋은 道伴이 있었으니, 바로 義湘이었다. 의상은 원효에 비해 8년이나 후배였지만, 이들의 우정에 나이가 문제였던 것 같지는 않다. 마음의 벗이고, 진리의 벗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출가 수행자라는 점에서는 같은 길을 가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출신도 성격도 수행방법도 전공분야도 서로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서로 친했다. 그래서 「삼국유사」에는 원효와 의상, 이 두 스님이 함께 등장하는 이야기가 많다. 그만큼 가까이 지냈기 때문이다. 의상은 625년(진평왕 47)에 귀족의 신분으로 출생했고, 19세 청년 시절인 선덕여왕 12년(643)에 경주의 황복사에서 머리를 깎았다. 원효와 의상이 언제 어디서, 그리고 어떤 인연으로 만나서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날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두 스님이 함께 당나라로 가고자 했던 때가 650년(진덕여왕 4)이었던 점에 유의할 뿐이다.

이들의 제1차 入唐求法에 대한 기록은 다만, 無極이 「삼국유사」 전후소장사리조 끝에 인용한 浮石本碑의 다음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의상은 영위 원년 庚戌(650)에 원효와 함께 서녘으로 가려 하였으나, 고구려까지 갔다가 어려운 일이 있어 되돌아왔다.

이들의 1차 시도가 좌절된 원인은 위의 기록처럼 정확하지 않다. 위의 기록처럼, 부석본비에서는 ‘고구려까지 갔다가 어려움이 있어 되돌아왔다’고 하였고, 「삼국유사」에서는 ‘요동 변방에서 수비군에게 첩자로 몰려 수십일 간 갇혀 있다가 풀려나 돌아왔다’고 했다. 여하튼 이들의 1차 시도는 실패하였다. 이때 원효는 34세, 의상은 26세 되던 때였다.

이후 원효가 역시 도반 의상과 함께 두 번째로 당나라 유학 길에 나선 것은 그의 나이 44세가 되던 문무왕 원년(661)이었다. 1차 시도 이후 10년만의 일이었다. 그런데 남양만이 멀지 않는 곳에 이르러서, 원효의 인생행로에 일대 전환점을 가져다 준 놀라운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원효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悟道했다는 사건이다.

延壽(904-975)의 宗鏡錄에는 원효의 悟道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옛적 동국의 원효법사와 의상법사 두 분이 함께 스승을 찾아 당나라로 왔다가, 밤이 되어 노숙하면서 무덤 속에서 잤다. 원효법사가 갈증으로 물 생각이 났다. 마침 왼편에 물이 물이 많았는데, 맛이 심히 좋았다. 다음날 보니 그것은 시체가 썩은 물이었다. 그때 마음이 불편하여 토할 것 같았는데, 활연히 크게 깨닫고는 말했다. ‘내 듣건데, 부처님께서는 三界가 唯心이요 萬法이 唯識이라고 하셨다. 그러니 좋고 싫은 것이 나에게 있는 것이지, 실로 사물에 있지 않음을 알겠구나.’ 마침내 고국으로 되돌아가서 지극한 가르침을 널리 베풀었다.

위에서 보듯, 원효는 해골에 고인 물을 단순히 샘물로 알고 맛있게 마셨던 일을 통해서, 그는 스스로 모든 것이 한 마음 안에 있는 것이지 마음 밖의 사물에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즉 원효가 마셨던 물은 어젯밤이나 오늘 아침에나 변한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었다. 변한 것이 있다면 원효 자신의 마음이었고, 인식이었던 것이다. 원효가 부딪쳤던 대상, 혹은 경계는 밤에도 아침에도 동일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관적인 인식에 의해 그 대상은 전혀 다르게 인식되었던 것이다. 간밤에는 편안하기만 했던 고분이 다음날 밤에는 귀신의 소굴로 변했고, 시원하기만 하던 그 물맛이 아침에는 도리어 역겨웠던 것이다. 이에 원효는 一切唯心照의 도리를 깨달았고, 오랜 세월 풀리지 않던 의심이 환하게 밝아졌던 것이다. 오도의 순간이고 성도의 순간이었다. 이처럼 원효는 해골이 나딩구는 옛 무덤 속에서 오랜 꿈을 깨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오랜 세월에 걸친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다. ‘근원으로 돌아가는 크나큰 깨달음은 공을 쌓은 뒤에야 얻는 것이니, 흐름을 따르는 긴 꿈을 단번에 깰 수는 없는 것’이라고 한 원효 자신의 말을 생각해 보아도 그렇다. 원효 같은 천재도 不惑의 나이를 더 지나고서야 흔들리지 않는 인생의 확신을 얻었고, 인생에 새로이 눈을 뜨고, 마음의 창문을 열 수 있었다.

원효대사가 무덤 속에서 깨달은 것은 ‘一心’이다. 그래서 ‘마음 밖에는 다른 법이 없다’고 한 것이다. 이 일심이 바로 「삼일신고」에서 말하는 眞性이다. 즉 그는 일심을 통해서 진성을 보고, 이로 인하여 성통광명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朗然大悟 覺了自心’.이라고 한 바 있다. 신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당나라의 유학까지도 한 순간에 포기해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眞性을 통해 하나님의 광명한 모습을 발견하는 것을 性通이라 한다. 곧 성통광명이란 인간의 본모습인 진성으로 돌아가 광명을 만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모습이란 곧 하나님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씨앗을 평등하게 심어 두셨으니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간이 인간의 본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버지인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의 근원으로 되돌아간 수행자, 고향으로 돌아간 나그네, 어둡고 긴 밤의 꿈에서 깨어난 새벽의 그 신선함을 진정으로 맛 본 장부, 그가 곧 원효대사다. 그가 스스로 새벽이라는 뜻의 원효를 호로 쓰고자 했던 그 생각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이제 토굴과 고분이 둘이 아니듯이, 主와 客, 自와 他, 眞과 俗, 穢土와 淨國, 생사와 열반 등이 대립과 갈등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無分別智의 깨끗한 본심으로 돌아갔기에, 자기를 둘러싸고 있던 견고한 담장과 가시들이 무너져 내릴 때, 그는 小我의 낡은 옷을 벗고 영원과 끝없는 공간을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大我의 경지, 无碍 解脫의 날개를 달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원효대사는 성통광명한 이후에 스스로의 호를 无碍라 했다. 이는 「화엄경」 명난품 중의 ‘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라는 구절에 있음은 두루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 무애라는 단어는 「366事(參佺戒經)」에도 나오는데, ‘상서로운 구름이 하늘에 있음에 저절로 퍼지고 저절로 합쳐 머므름도 없고 엉킴도 없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바르게 깨달은 사람이 자기 몸을 처신하는 것과 같습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에서 보면 无碍란 원효대사와 같이 성통광명한 哲人이 거하는 곳이란 말이니, 원효대사의 무애행은 「참전계경」의 내용과 일치하니 재미있는 사실이다. 무애란 걸림이 없다는 말로, 원융무애로 설명되기도 한다. 이는 다시 걸리고 편벽됨이 없이 가득하고 만족하며 완전히 진성과 일체가 되어 융합하므로 방해가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불교적으로는 인간의 모든 일에서 집착을 제거한 상태라 할 수 있다.

또한 성통을 무교적으로 해석하면, 죽음과 再生의 이니시에이션 체험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그가 밤에 무덤에서 해골의 물을 마셨다는 것은 죽음의 체험이요, 다음날 햇빛 아래 도를 깨닫고 성인이 되었다는 것은 재생의 체혐이었다.

이는 바로 「삼일신고」에서 말하는 성통광명의 경지를 말한다. 즉 원효대사는 해골물을 마시는 경험을 통해서, 하늘을 보고 하나님을 만났던 것이다. 이제 원효대사는 道의 과정을 마쳐 성통광명을 했으니, 그는 완전한 ‘哲人’이 되었다. 철인은 하나님의 궁전인 天宮에 도달한 자이니, 하나님의 빛을 입어 밝은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이 곧 道通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철인은 하나님에게서 입은 밝은 빛으로 혼돈에 가득 찬 세상을 밝게 비추는 것으로 스스로의 功을 완수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功完이다. 그러므로 철인은 공을 완수하기 위하여, 인간 세상을 하늘의 천궁과 같이 만들기 위해 다시 세상으로 내러오는 것이다. 이것이 곧 德을 베푸는 것이니, 덕은 곧 재세이화‧ 홍익인간으로 이루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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