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동북아의 최강국 고구려

한부울 2006. 9. 1. 00:02

고구려韓(무쿠리칸汗)계보와 영역

https://han0114.tistory.com/17045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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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고구려韓(무쿠리칸汗)계보와 영역 이란 자료를 보면 도저히 대륙사의 남조(南朝), 북조(北朝)란 역사 도식을 믿을 수가 없어진다.

중국역사 5세기 후반에 남조(南朝), 북조(北朝), 신라, 고구려 4강체제라고 하고 있지만 전혀 그러한 사실에 동의 할 수 없고 오히려 그 당시 대륙전체를 양분하여 남쪽은 신라와 북쪽은 고구려, 즉 2강 체제에 있었다고 보아야 하며 실제 위 고구려韓(무쿠리칸汗)계보와 영역이란 자료로 아시아, 유라시아를 포괄한 대륙 북방전체 지역을 군사대국인 고구려가 지배하였다고 보여지는 면이 충분히 존재한다.
위 고구려 자료에서 보더라도 남조(南朝), 북조(北朝)는 나라명호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상징성을 부여한 호칭으로서 예를 들자면 대한민국 즉 한국이란 국가 명호를 매번 기록하거나 부를 수 없을 때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라고 부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보여지는 기록 명사이다.

즉 남쪽에 있는 조정(朝廷)과 북쪽에서 있었던 조정(朝廷)이라는 뜻일 뿐 지금 역사처럼 마치 남조(南朝), 북조(北朝)란 나라가 존재한 것처럼 만드는 것은 이중 써 먹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반도역사란 기획된 조작사틀에서 한반도 삼한을 만들고 보니 대륙사는 자연스럽게 삼한의 공백이 생겨 그 것을 매우려고 만든 나라가 남조(南朝), 북조(北朝) 일 뿐인 것이다.
더불어 지금 대륙역사를 포장하고 있는 당, 송, 금, 요, 원, 명, 청 역시 그런식에 분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중국사는 무엇이 남는가?
헛깨비 역사일뿐이다.
얼마전 중공에서는 용감한 역사학자의 명쾌한 발언으로 대륙전체가 발칵뒤집힌 사건이 있었다.
그가 발언 한 내용 중 중국역사는 5%만 사실이고 나머지는 전부 허구라고 양심선언 한 사례이다.
그러한 발설을 보더라도 위와 같은 사실을 충분히 짐작 할 수 있어진다.
때문에 이제부턴 역사에서 남조(南朝)는 신라이고 북조(北朝)는 고구려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무엇때문에 중공정부가 고구려를 자기 역사에 편입하려고 애를 쓰는지 숨은 의도 역시 충분히 알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역사 뒤틀림은 19세기 대륙조선이 서세에 의해 쇠락하고 붕괴되면서 서세가 세계의 중심이 되고자 하여 역사재편짜기가 시행되었고 그 틈을 이용 그 하수정권인 명치일제와 어부지리를 노린 대륙객가정치집단인 국민당세력들이 협력, 공모, 조작하였고 그러한 세력들은 처음부터 대륙삼한사(大陸三韓史)전체를 없애버리고 말살코자 하였으나 조작할 자료가 워낙 방대하다 보니 역사에서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은 포기하고 그 대신 조그맣게 축소하여 한반도로 옮겨 심고 대륙의 빈 자리를 남조(南朝), 북조(北朝), 당, 송, 금, 요, 원, 명, 청이라고 이름 붙여 만든 것이 지금의 대륙역사이며 동시에 삼한(三韓)이 아닌 서세(西勢)가 세계의 중심이 되는 세계사가 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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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의 최강국

만주 장악한 고구려, 중국 南朝·北朝와 4강 체제

2004.02.15 17:55 03' 

 

 

                                                             반도사의 한계

 

“폐하, 고려 대왕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오호, 슬픈 일이로다. 내 직접 문상하지는 못하나, 이곳에서라도 애도의 뜻을 표하고자 하니 동교(東郊)에 제단을 마련하고 상복을 준비하라.”

 

서기 494년 12월, 재위 79년 만에 세상을 뜬 고구려 장수왕의 부음을 듣고 중국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가 보인 반응이다. 이에 앞서 414년, 장수왕이 부친 광개토왕을 기리고자 세운 광개토왕릉비문에는 ‘영락대왕의 은택은 황천(皇天)이 민(民)을 어여삐 여김과 같이 넓고, 그 위무는 사해(四海)에 떨쳐’라는 구절이 나온다. 사해란 천하(天下), 곧 온 세상을 뜻하는 말이다.

 

당시 고구려는 이처럼 동북아시아의 중심 세력이었다. 광개토왕과 장수왕 시대에 북부여의 지방관으로 활약했던 모두루(牟頭婁)의 묘지명이 “하백의 손자이며 해와 달의 아들인 추모성왕이 북부여에서 태어나셨으니, 천하사방은 이 나라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움을 알지니”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것도 5세기의 고구려인이 지니고 있던 ‘우리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기원전 37년 시작된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를 잇는 교통의 요지, 압록강 중류 지대를 건국의 터로 삼았던 까닭에 주변에 대한 정복과 확장을 선택하지 않으면 외부로부터의 침략과 소멸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에 ‘좌식자(坐食者·생산활동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로 불리는 강력한 전사(戰士) 집단이 존재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이 혼란에 빠진 5호16국 시대 북(北)중국에서 명멸했던 왕국들은 중원의 패권을 잡고자 황하 중류 지대로의 진출을 시도하기에 앞서 반드시 동방의 강국 고구려와 동맹을 맺었다.

 

 

▲ 중국 지안의 삼실총 벽화 중 ‘공성도(攻城圖)’의 한 부분인 기마전 장면. 그림에 보이는 기병은 말까지 갑옷과 투구로 무장시킨 고구려의 정예병으로‘철기(鐵騎)’라고 불렸다.

 

그게 안 되면 굴복시키려 했다.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은 요동 진출을 노리는 고구려를 의심해 이 동방의 강자와 일전(一戰)을 불사했고, 갈족( 族)이 세운 전조(前趙)는 전연을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와 동맹을 맺었다.

 

고구려는 서기 4세기 전반 중국 군현의 후신인 낙랑과 대방을 역사 지도에서 지워 버리고 만주와 한반도의 중심 국가로 떠올랐다. 이때부터 북중국이나 남중국의 왕조들, 내륙아시아의 유목세력들은 동북아시아의 강대한 세력 고구려와 어떤 관계를 맺고 유지할 것인지를 염두에 두고 국제외교를 펼쳐 나가야 했다.

 

 

                                        ▲ 경주 호우총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청동 그릇.

 

중국의 왕조나 내륙아시아 유목국가들에 요하 유역 일부를 포함한 동방세계 전체는 ‘고구려 세력권’이었다. 광개토왕의 20년에 걸친 사방(四方) 경략과 그 뒤를 이은 장수왕의 영역 다지기가 낳은 결과였다.

 

서기 439년 북위가 북중국 통일을 이루면서 동아시아에는 중국의 남조(南朝)와 북조(北朝), 유목세계의 유연(柔然), 동방의 고구려가 상호 견제와 세력 균형을 추구하는 4강체제가 수립된다. 고구려는 내외로부터 동북아시아의 패권국가임을 인정받게 되었고, 수도 평양은 동북아시아의 정치·사회·문화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미 서기 397년 백제의 아신왕은 왕성을 둘러싼 고구려군의 압박을 견디어 내지 못하고 광개토왕에게 신하로서의 충성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어 서기 400년 신라의 요청으로 광개토왕이 내려 보낸 5만의 군대가 가야와 왜의 연합군을 궤멸시키고, 신라의 수도 금성에 주둔군을 남겼다. 망국의 위기를 벗어난 신라의 왕과 그 일행이 직접 평양에 이르러 고구려왕에게 조공을 바친 것은 물론이다.

 

광개토왕이 세상을 떠난 1년 뒤 그 왕릉에서 크게 제사를 지내고 이를 기념하여 제작한 청동 그릇이 신라 중상급 귀족의 무덤인 경주 호우총에서 나온 것이 당시의 국제정치 상황을 증언한다.

 

서기 495년 만들어진 중원 고구려비에서 신라왕은 ‘동이매금(東夷寐錦)’으로 일컬어진다. ‘매금’이란 신라왕의 고유 칭호였던 ‘마립간’의 다른 표기이고, ‘동이’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신라를 보는 시각을 나타내는 용어다. 동북아시아를 하나의 세계로, 그 중심을 고구려로 상정한 고구려인의 의식이 이 한마디에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