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고구려韓(무쿠리칸汗)계보와 영역

한부울 2009. 1. 16. 22:01

중국 한족은 허구다 https://han0114.tistory.com/16115846

한(漢)도 동이(東夷)이고 조선이다.https://han0114.tistory.com/17048297

한(漢)은 1910년 신해혁명 이후 만들어진 新造語일 가능성?
https://han0114.tistory.com/17044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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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夷는 原천자국다.

한부울

고구려 韓

백제 韓 신라 韓을 삼한(三韓, )이라 한다. 우리는 왜 韓을 큰한(大韓, 大汗)으로 보지 않고  을 큰()것으로 보려 하는가?은 韓이 큰(中原천자국)것임을 알고 후세 부도덕한 史家들이 흉내 낸 것일뿐 韓이 큰(大韓)것이다.

그리고 漢역시 韓안에 존재하는 별칭이다.

 

아래 기록을 좀 더 알기 쉽게 부첨하여 풀어보았다.

본 자료내용을 보고 나면 왜 본 天明[천명]에서 대륙역사를 우리민족의 역사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알 수 있으며 그 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상식에서 무엇을 잘못알고 있고 거짓을 사실처럼 기억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무엇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인지 확연하게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부첨하여 설명을 나름대로 해보았지만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것을 벗어나지 않았다.

비록 몽골인이 고구려(무쿠리)가 자기 민족 조상인 것처럼 기술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것은 얼마든지 광의적으로 해석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다민족을 연합하여 나라를 세우고 영토를 확장한 사실이 고구려에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를 보는 관점이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만의 자료가 아니기 때문에 그 만큼 사실성과 신뢰성을 높혀주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무쿠리(고구려)가 몽고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건설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고구려 최대영역이 14세기 정복왕조 징기스칸 때보다도 훨씬 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는 서쪽으론 유럽을 경계하는 것은 물론이고 북쪽으론 징기스칸이 확보하지 못한 시베리아전역을 확보했으며 동쪽으론 신라를 양자강으로 밀어내고 지금의 황하연안까지를 영역으로 했으며 남쪽으론 백제를 속국으로 두었다고 볼 수 있는데 십제, 22담로라고 하는 것을 보면 백제가 서남아시아, 동남아시아일대라고 불 수 있고 백제영역까지 확보하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몽고역사상 최대의 영토라고 했던 것이다.

20대 장수왕때 삼국사기에서 종전의 부족연맹제도를 지방행정제도로 고쳐 5부를 신설하는 등 민정에도 개혁을 단행하였다.라고 했지만 몽고인이 서술한 곳에는 5잔징(맹) 즉  血盟 同盟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5가 5부 정도 이해하고 있지만 징기스칸의 4한국 원나라까지 포함하여 5한국인데 그러한 의미와 동일한 것이라고 해석해야 마땅 할 것이다. 그것은 징기스칸왕조보다 고구려제국이 더 넓은 영역을 통치하고 있었던 정복왕조이고 세계제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로마와 교역을 말하고 있다.

동로마와 교역을 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그 당시 여건상 반드시 근접한 거리에 있어야 가능하다.

동로마라면 비잔티제국인데 발칸반도 지금의 터어키를 포함하는 흑해지역이다.

또한 서양역사학자도 부정할 수 없는 훈족이 존재한다.

훈족은 4~5세기 유럽전지역을 강타하고 로마를 망하게 한 고구려 후손이란점을 상기해야 한다.

끝으로 또 한 가지 이참에 주지 할 사항은 삼국사기의 신뢰성문제이다.

삼국사기는 1145년(인종 23) 무렵 김부식 등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삼국시대 역사서를 말함인데 송(宋)나라 왕응린(王應麟)의〈옥해 玉海〉에〈해동삼국사기 海東三國史記〉1174년(명종 4)의 헌서(獻書) 사실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초판이 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오늘날 전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특히 김부식이가 신라계 고려인이라는 이유로 고구려를 필요이상 폄하하고 낮추는 것은 물론이고 華夏(화하)를 높이고자 하여 정반대적인 상황을 기술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김부식이가 직접 서술한 내용이라기보다는 대륙역사를 축소하여 반도역사화를 획책하고 기획한 음모세력들에 의하여 그렇게 고쳐지고 유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삼국사기 산술숫자에서도 거의 다 10분의 1로 축소되었다는데 놀라움과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검은색은 본문이고 푸른색은 삼국사기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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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사투리로 쓴...고구려 韓(무쿠리칸)들의 계보와 영역...(몽골인이 쓴 글... 펌) 

[대륙조선사연구회]글쓴이: 홍진영 09.01.10 18:12

 

2003년도에 뭔 전쟁사 얘기 싸이트에...내몽골이나 브리야트 사투리 몽골어를 아는 몽골인으로 추정되는 분이 현 대륙조선사 연구회의 주장과 상당히 비슷한 주장을... 고려(조선)이 주체가 아닌...몽골(무쿠리)를 주체로 쓰신 글로 보입니다.

완전 정신병자거나...정식 몽골어도 아닌 글로 때려 맞추어 소설을 썼다고...매일 뚜들겨 맞다...탈퇴(당?)한 분 같습니다.

제가 볼 땐 아주 환상적입니다.

고구려의 계보도에 몽골의 어느 부족 사투리를 적당히 껴 맞춘 창작이라 해도 그 언어적 연관성만 가지고도..제가 보기엔 상당히 가치가 있는 글이었는데...다소 국수주의적 시각들의 공격에 고구려를 그 이들 것이라 주장하니...공격을 당했지 싶고...괸실이...나름대로 아주 희귀한 자료들을 잃은 듯합니다.

고구려의 건국을 기원전 몇십년으로 하는게 우리 정설였었는데...요즘은...한나라보다 3년 빠르다 수정되는 걸 봐선...이 분이 2003년 올리신 글이...무조건 우리 고구려 역사에 껴 맞춘 위작이 아닌..나름대론 뭔가의 역사지식을 따로 습득하신 정황이라 예상됩니다.

만일 껴 맞춘 소설이라 하더라도...고대사의 언어들을 몽골의 사투리는 어떻게 번역하는지...

당 연구회가 찾으려는 투르크어와 고구려말의 언어적 연결의...좋은 시도 정도로 봐도...가치가 있을까 해서 옮겨 봤습니다.

어느 정사에도 안 나오는...왜놈들이 몽골까지 가서 깨지고 돌아온 얘길하다...왜놈들 후손으로 보이는 분에게 엄청 당하고...여타 회원들에게도 정신병자로 만신창이가 되는 댓글을 보건데...밑에 분은..뭔가 우리가 모르는 걸..어떤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건 맞아 보입니다.

고구려 왕들의 호칭...

현 신장성과 그 이남(중가르&사천성)...양자강 일대 한족들을 내내 어떻게 부르는지

몽골어로 번역하면 어떻게 불리는지...감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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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쿠리 칸의 계보

글쓴이: 카마이카노 03.05.16 23:54

 

1.투멘 메르겐 보그드칸

(Tumen Mergen Bogd Khan)

 

무쿠리제국의 제1대 칸(재위 BC 199∼BC 168). 이름 투멘 (朱蒙. 鄒牟, 都慕은 음역어) 칭호는 투멘 메르겐 보그드칸이며 한자사서에는 이를 폄하하여 東明聖王이라고도 한다. 이때 코리부가 속해있던 바이칼호 동쪽의 동부리야트제국의 카불(Kabul,解夫婁)칸이 사망하고 키마(金蛙)칸이 등극하였다. 코리부의 코리챠 투멘은 활을 잘 쏘는 재능을 타고나 활쏘기 대회에서 명궁에게 주어지는 '메르겐' 칭호를 얻고 부리야트제국의 투멘(만호장)이 된다. 그는 특유의 활쏘기 실력으로 초원을 누비며 공을 세우게 된다. 이에 키마칸의 장자인 타이소(Taiso) 타이시를 비롯한 일곱명의 타이시(왕자) 및 노얀(대신)들이 시기하여 그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이에 어머니의 뜻을 따라 남쪽의 카라 무룬(흑룡강)으로 내려가서 부리야트족의 일파인 코르분부로 가서 코르분(Khorbun)부를 평정하고 199년 무쿠리제국을 건국하게 된다. 이때 코리챠 투멘은 정식으로 성씨를 코리챠로 하게된다. 197년에는 홀룬-부이르지역의 부이르의 칸 숭잉(Sunging) 칸의 항복을 받았고 195년에는 코르분지역에 '코르분'이라는 도시를 건설하였으며 194년에는 현재의 흥안령지역(Sangen)에 있던 Sangen부를 정벌하였다. 189년에는 오호츠크해 북변에 있던 아마르기 오호츠크를 멸시키는 등 대규모 정벌사업을 펼쳤다.

 

 

1.동명성왕(재위BC37년~BC19년) : 고구려의 개국시조이자 초대 군주이다.

휘는 주몽, 추모, 상해, 추몽, 중모, 도모 등이 있으며 동명왕, 동명제, 동명성제라고도 한다.

BC 37년, 나라를 세워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성을 고라 하였다. (원래 성은 해이다.)

BC 36년, 비류국의 왕 송양의 항복을 받았고, BC 34년에는 성곽과 궁실을 건립하였으며, BC 33년 행인국을 정복하고, BC 28년 북옥저를 멸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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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툴리 메르겐 칸

(Tulioi Mergen Khan)

 

무쿠리의 제2대 칸(재위 BC 168∼BC160). 이름은 툴리(類利·儒留·朱留). 정식 칭호는 툴리 메르겐 칸이며 니칸사서에는 瑠璃明王이라고도 한다. 투멘 메르겐 보그드 칸의 맏아들. 어머니 옐뤼씨(Yelioi). 부인은 다이무크 후(多勿侯) 숭잉(Sunging)의 딸. BC 168년(투멘 메르겐 칸의 31년째 치세) 동부리야트제국으로부터 아버지 투멘 메르겐 칸을 찾아 무쿠리에 입국, 타이시로 책립되고 투멘 메르겐 칸에 이어 즉위하였다. BC 166 년 계비인 챠이 부인(雉姬)을 그리는 《시라친의 노래(黃鳥歌)》를 지었으며, BC 162년 시버(Sibe)를 공략하여 항복받았다. 161년 도읍을 코르분(Khorbun,忽本)에서 Guruni Hechen(國內城)으로 옮기고 우나안(Unaan) 방어성(尉那巖城)을 쌓았다. 161년 부리야트(扶餘)가 침공해 오자 이를 격퇴하였다. 160년 군사 20으로 동부지역의 송화강유역의 rang mukuri(梁貊:小水貊)를 쳤으며, 남부지역의 니칸 한왕조의 무쿠리현(高句麗縣:玄郡의 屬縣)을 탈환하였다. 투크투 나(Tukutu Na:豆谷東原)에 묻혔다.

 

2.유리왕(재위BC19~AD18) : 휘는 유리, 유류, 주류이고 유리명왕이라고도 하며 동명왕의 맏아들이다.

BC 19년, 부여로부터 아버지 동명왕을 찾아 고구려에 입국, 태자로 책립되고 동명왕에 이어 즉위하였다. (동명성왕이 남긴 징표 부러진 칼 조각을 주춧돌에서 찾아냈다는 설화가 있다.)

BC 17년, 계비인 치희를 그리는 황조가를 지었다.

BC 9년, 고구려를 위협하던 선비족을 토벌하였다.

BC 6년, 부여의 대소왕이 고구려에 볼모를 요청하였고 유리왕은 부여의 강력한 국력 때문에 태자 도절을 인질로 보내려 하였으나, 도절이 두려워 가지 않았다. 이에 대소는 군사 5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폭설로 많은 군사를 잃고 퇴각하였다.

3년, 도읍을 홀본(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9년, 부여왕 대소가 고구려를 침략하겠다고 위협하자 왕자 무휼은 부여의 사신에게 부여의 내부 사정부터 잘 다스리라 충고하여 돌려보냈다.

13년, 부여가 침공해 오자 무휼은 매복작전을 펼쳐 부여군을 크게 격파하였고 그 후 군사 2으로 서쪽의 양맥을 쳤으며 한나라 고구려현을 빼앗았다.

유리명왕은 6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첫째인 도절은 요절하였고, 둘째 해명은 황룡국왕이 선물한 활을 부러뜨린 일로 자살하였다. 그리하여 셋째인 무휼이 왕위를 이어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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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타이 무크센 칸

(Tai Muksen Khan)

 

무쿠리 제3대칸(재위 160∼120). 이름은 무쿨(無恤). 투리 칸(琉璃王)의 셋째 아들. 어머니는 숭잉(Sunging,松讓)의 딸. 160년(투리 메르겐 칸의 8년) 타이시(太子)로 책봉되어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맡아보다가 투리 칸이 죽은 뒤 즉위하였다. 150년(타이 무크센 칸 10) 동부리야트를 공격하여 타이소 칸(Taiso Khan,帶素王)을 정발하고, 무쿠리에 병합(倂合)하였다. 또 145년(타이 무크센 칸 15) 카이마 국(Kaima Gurun,蓋馬國)을 쳐서 이를 병합하여 국토를 예니세이(薩水) 이북까지 확대하였다. 한편 울투치(Ultuchi,乙豆智) 같은 인재를 등용하여 국사(國事)를 맡겼는데, 142년 니칸 한(漢)왕조의 뤄둥 태수(遼東太守)가 무쿠리를 침략했을 때 그의 지략(智略)으로 이를 물리쳤다. 132년 니칸 한왕조와 인접한 나크란지역의 왕자(王子) 카이두(好童)를 시켜 니칸 한왕조의 속국으로서 아직 남아 있는 나크란 지역(樂浪郡)을 정벌하게 하였으며, 130년 재차 공략(攻略)하였다. 칸의 시호(諡號)가 하늘을 크게 받드는 자인 타이 무크센인 것은 하늘의 명을 받아 재위 중에 주위의 많은 나라를 공략하여 무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칸의 무덤(陵)은 타이수켄바(Taisuken Ba,大獸村原)에 있다.

 

 

 

3.대무신왕(재위18년~44년) : 유리왕의 셋째 아들로 휘는 무휼이고 대해주류왕이라고도 불린다.

14년, 태자로 책봉되어 군국정사를 맡아보다가 유리왕이 죽은 뒤 즉위한다.

20년, 부여의 대소왕은 대무신왕에게 몸은 둘인데 머리는 하나인 붉은 까마귀를 보내어 "까마귀는 검은 법인데 이제 빛이 변하여 붉게 되었고, 또한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이니, 이는 두 나라가 병합될 징조이다."라고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에 대무신왕은 "검은색은 북방의 색인데, 이제 변하여 남방의 색이 되었다. 또한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것으로 그대가 이것을 얻었으나 가지지 못하고 내게 보냈으니 양국의 존망은 알 길이 없도다."라며 까마귀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여 대소왕에게 전하였다.

22년, 부여 정벌을 감행, 동부여를 공격하여 대소왕을 죽이고, 고구려에 병합하였다.

26년, 개마국을 쳐서 복속시켰고 그 후 구다국의 항복을 받아내어 국토를 살수 이북까지 확대하였다. 한편 을두지, 송옥구 등의 인재를 등용하여 국사를 맡겨 내치를 다졌다.

28년, 한나라 요동 태수가 군사를 이끌고 침략하였는데 고구려군은 을두지의 진언을 따라 위나암성에서 수십 일 동안 농성하였다. 한군이 포위를 풀지 않자 을두지가 계책을 내기를 저들이 물이 고갈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니 연못에서 잉어를 잡아 적장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그러자 적장은 성 안에 물이 있으니 단시일에 점령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퇴각하였다

32년, 왕자 호동을 시켜 낙랑군을 정벌하게 하였으며, 37년 재차 공략하였다.

(삼국사기-호동왕자설화 : 어느 날 옥저로 사냥을 나갔다가 낙랑 태수 최리의 딸인 낙랑공주와 사랑하게 되었다. 이때 낙랑에는 적병의 침입을 저절로 알리는 자명고가 있어서 정벌하기가 어려웠는데 호동이 낙랑공주를 꾀어 자명고를 찢게 하고 군사를 이끌어 정벌하였다. 태수는 이 사실을 알고 딸을 죽인 후 항복하였으나, 낙랑을 정벌한 호동은 원비의 참소와 공주에 대한 사랑의 번민으로 자살한다.

일설에는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하기 위해 호동을 최리의 딸과 정략혼인시키고, 그녀를 본국으로 돌려보내 북과 뿔피리를 파괴하게 하였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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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민투 칸

(Mintu Khan)

 

무쿠리 제4대 칸(재위 120∼100). 이름은 카수투(Kasutu,解色朱). 타이 무크센 칸의 아우. 타이 무크센 칸이 죽자 타이시 카이루(解優:무분 칸)가 어리므로, 대신 즉위하였다. 유언에 따라 만투 바(Mintu Ba,閔中原)의 석굴에 장사지냈다.

 

4.민중왕(재위44~48) : 이름은 해색주, 대무신왕의 동생으로 대무신왕이 죽자 태자 해우(모본왕)가 어리므로 대신 즉위하였다.

44년, 대사면령을 내렸으며, 45년에는 신하들에게 큰 연회를 베풀었다.

47년, 사냥을 나갔다가 민중원에 이르러 석굴을 발견하고 그곳에 자신을 장사지낼 것을 명하였다.

48년, 왕이 죽자 유언에 따라 석굴에 장사지내고 지명을 따서 왕명을 민중왕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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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무분 칸

(Mubun Khan)

 

무쿠리의 제5대 왕(재위 100∼76). 이름 카이루(Kairu,解憂·解愛婁). 타이 무크센 칸의 아들. 민투칸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99년(모본왕 2) 니칸 한(漢)왕조의 베이핑(北平)·워잉(漁陽)·샹골(Shanggol,上谷)·타이유완(太原) 등을 공격하였으나, 뤄둥태수(遼東太守) 채동(蔡)의 제의로 화친을 맺었다. 원래 성품이 포악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백성들의 원성을 들었다. 결국 신하 툴로(Tulro,杜魯)에게 피살되었다. 장지(葬地)는 무분 바(Mubun Ba,慕本原)에 있다.

 

5.모본왕(재위48~53) : 대무신왕의 차남으로 이름은 해우, 해애루이다.

49년, 한나라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등을 공격하였으나, 요동태수의 제의로 화친을 맺었다.

이 해에는 폭풍이 불고 서리와 우박이 내리는 등 악천후가 있어 사신을 보내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모본왕은 원래 성품이 포악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백성들의 원성을 들었다.

51년, 기록하기를 "왕이 날로 포악해져 앉을 때는 사람을 깔고 앉고 누울 때는 사람을 베개로 베어 사람이 혹시 움직이면 용서없이 죽였으며, 신하 중에서 간하는 자가 있으면 활을 쏘았다."고 하였다.

53년, 결국 신하에게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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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타이쥬 칸

(Taizu Khan)

 

무쿠리 제6대 칸(재위 BC 76∼AD 22). 한자이름 궁(Gung,宮). 본명 아이수(Aisu,於漱). 투리 칸의 손자이며, 칸의 일족인 쿠투가이(Kutugai,古鄒加) 쟈이샤(Jaisha,再思)의 아들. 국가를 새롭게 개창하였다 하여 구루니바반 칸(Guruni Baban Khan,國祖)이라고도 한다. 무분칸이 죽은 후, 타이시가 영특하지 못하여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7세에 왕이 되었으나, 태후(太后)가 섭정하였다. BC 72년(타이쥬 칸의 치세 4년) 동오호츠크(東沃沮)를 정벌, 영토를 동으로는 북태평양, 남으로는 송화강(薩水)에 이르게 하였으며, 59년 노얀중의 하나인 타르가이(Targai,達賈)를 파견하여 추나이(Chunai,藻那)부를 정벌하고, BC 31년 니칸 한(漢)왕조의 라오슈현(遼燧縣;구 니칸 한왕조의 요(遼)의 동서를 나누는 기준은 현재의 난하를 기준으로 한다.현재의 베이핑 근처)을 공격하여 라오둥태수(遼東太守) 채풍(蔡諷)을 죽이는 등, 남동면의 영토를 넓혔다. 또한 정치체제 확립에 힘써 니칸의 제도를 일부 도입,종래의 단순유목국가 형태에서 좀더 완벽한 세계제국적 형태로 체제를 정비하였다. AD 22년 동생인 수르신(Sursin,遂成:차카타이 칸(次大王))이 칸위를 탐내자 그에게 양위하고 별궁으로 은퇴하여 처음 큰 제도를 변혁한 칸이라 니칸의 전례를 일부 도입, 타이쥬 칸이라 하였다. 102년(신타이 칸 1년) 119세로 서거하여 장수한 칸이 되었다. 타이쥬 칸 때부터 니칸의 사료에도 자주언급되는데 그 이유는 타이쥬 칸의 시기에 무쿠리의 기존제도로는 부족하여 니칸의 제도를 일부 도입하자 니칸인들이 이를 칭송하였기 때문이다.

 

6.태조왕(재위53년~146년) : 유리왕의 손자, 고추가 재사의 아들로 휘는 궁이고 국조왕이라고도 불린다.

모본왕이 죽은 후 추대를 받은 재사가 연로함을 이유로 왕위를 거절하여 아들인 궁이 7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고 태후가 수렴청정 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태조왕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떠서 볼 수 있었고 어려서도 총명하였다고 한다.

55년, 후한의 침공에 대비하여 요서 지역에 10개성을 쌓았다.

56년, 동옥저를 병합하여 동으로는 창해, 남으로는 살수에 이르게 하였으며, 68년에는 갈사국을 병합하였다.

70년, 관나부 패자 달가를 파견하여 조나를 병합하였고, 72년에는 환나부 패자 설유를 보내 주나를 병합한다.

이러한 주변 소국 정벌 활동은 중앙집권화의 흔적으로 보고 있다.

태조왕은 정치체제 확립에 힘써 고구려를 종래의 부족 국가적 형태에서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끌어 올렸다.

또한 태조왕 때부터 계루부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이후 고구려 왕 세차의 확실한 연대가 시작됨으로 실질적인 국가로서의 면목을 갖추게 된다.

98년에는 책성을 순수, 102년에는 책성을 안무, 114년에는 남해를 순수하는 등 확장된 영역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105년, 요동군을 공격하여 약탈했으나, 109년과 111년에는 평화적인 외교를 펼쳤다.

118년, 예맥과 더불어 현도와 화려성을 공격하였다.

121년, 후한이 예맥을 공격하자 태조왕은 동생인 수성을 보내 막도록 하였는데 수성은 항복을 가장하여 적군을 속인 후 요지를 장악하였으며 몰래 요동과 현도를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또한 요동의 선비족과 더불어 요수현을 공격하여 요동태수를 살해하였다.

그 후 마한, 예맥과 함께 현도성을 공격하여 포위하였으나 부여와 한나라가 협공을 펼쳐 크게 패하였고, 122년에도 마한, 예맥과 함께 현도성을 쳤으나 부여의 방해로 패배하였다.

121년부터 태조왕은 수성에게 국정을 돌보도록 하였다.

122년, 후한과 화친하였으나 146년에 다시 전쟁이 벌어져 요동의 신안과 거향을 약탈하고 서안평을 공격하여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생포하였다.

146년, 동생인 수성(차대왕)이 왕위를 탐내자 그에게 양위하고 별궁으로 은퇴하여 남은여생을 보냈다.

태조왕은 119세 나이로 서거하여 한국 군주 중 가장 장수하였고, 또한 가장 오래 군림한(93년)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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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차카타이 칸

(Chagatai Khan)

 

무쿠리 제7대 칸(재위 AD 22∼ AD 102). 이름은 수르신(Sursin,遂成). 타이쥬 칸의 동생. BC 3년(타이쥬 칸 69) 유주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 현도태수(玄太守) 요광(姚光), 뤄둥태수(遼東太守) 채풍(蔡諷:위의 채풍과는 동명이인) 등이 무쿠리를 침범하자 군사를 이끌고 나가 이를 대파한 뒤, 초하이 구룬 암반(군국정사)를 맡았다. 타이쥬 칸의 연로함을 기화로 정권을 노리다가 타이쥬 칸의 양위를 받아 칸의 자리에 올랐다. 차카타이 칸은 사람됨이 용장(勇壯)하여 위엄이 있었으나 인자하지 못하였다. 23년(차대왕 2) 왕위 계승을 반대하던 우보(右輔) 코리챠 후투리골민(Koricha Huturigolmin,高福章)을 유배하고, AD 25년 타이쥬 칸의 타이시 마크쿠룬(Makkurun,莫勤)마저 유배한 후 칸권을 확립하였으나, 횡포와 학정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성을 듣다가, 결국 밍린타부이(Minglintabui,明臨答夫)에게 시해당하였다.

 

7.차대왕(재위146∼165) : 태조왕의 동생으로 휘는 수성이다.

태조왕 치세 후반부터 장군으로 활약하였고 태조왕을 대신하여 국정과 군사를 통괄하였다.

146년, 측근들의 부추김을 받아 쿠데타를 모의하였으나 태조왕이 먼저 선위하고 물러남으로 차대왕은 그해 7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차대왕은 사람됨이 용장하여 위엄이 있었으나 인자하지 못하였고 횡포와 학정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성을 들었다.

147년, 왕위 계승을 반대하던 우보 고복장을 죽이고, 국가의 주요 요직에 자신의 측근을 임명하였다.

148년, 태조왕의 태자 고막근을 죽인 후 왕권을 확립하였으나, 결국 폭정으로 인해 명림답부에게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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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신타이 칸

(Sintai Khan)

 

무쿠리 제8대 칸(재위 102∼179). 이름은 베쿠이(Bekui,伯固·伯句). 타이쥬 칸의 이복동생, 쟈이샤(Jaisha,再思)의 아들. 어머니는 부리야트 사람. 둘째 형인 차카타이 칸(次大)이 포악무도하여 숨어 살던 중 차카타이 칸이 밍린타부이(Minglintabui,明臨答夫)에게 살해되자 좌보(左輔) 우주류(Ujuliu,支留) 등의 추대로 77세에 즉위하였다. 102년(신대왕 2) 좌·우보(左右輔)의 직제를 국상(國相)으로 고치고 Minglin Tabui,(명림답부)를 이에 임명, 버이제(Beise,沛者)의 벼슬을 더하여 내외병마를 맡기고 나라를 다스렸으며, 차카타이 칸의 타이시 투르얀(Turyan,鄒安)을 양국군(Liang Gurun Gun,讓國君)에 봉하였다. 169년 니칸 한(漢)왕조의 현도군태수(玄郡太守) 경림(耿臨)이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오자 이를 격퇴하였으며, 이듬해 경림의 후임인 공손 탁(公孫度)을 물리치고 이와 함께 하던 고비사막근처의 부르산(富山)의 도적을 토벌하였다. 능묘는 Gugu ba(구구 바,故國原)에 있다.

 

8.신대왕(재위165년~179년) : 재사의 아들, 태조왕과 차대왕의 동생으로 휘는 백고, 백구이다. 둘째 형인 차대왕의 폭정을 피해 산골에 숨어 살다가 차대왕이 시해된 뒤 왕으로 추대받아 7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166년, 좌, 우보를 폐지하고 국상제를 도입하여 명림답부를 이에 임명, 패자의 벼슬을 더하여 내외병마를 맡기고 나라를 다스렸으며, 차대왕의 태자 추안을 양국군에 봉하는 등 정치적 안정을 꾀하였다.

168년, 한나라 현도군태수가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오자 스스로 항복하였으며, 이듬해에는 현도태수를 도와 부산의 도적을 토벌하였다.

172년, 한나라가 쳐들어오자 청야전술로 대응하여 한군이 굶주림에 지쳐 퇴각하자 신대왕은 명림답부를 보내 좌원에서 한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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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 삼국사기와 년대가 일치하는데 본격적으로 영토를 넓혀가는 초기란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고구려 건국 174년 앞서 있음

 

9.코리구루친 칸

(KhoriGuruchin Khan)

 

무쿠리 제9대 칸(재위 179∼197). 이름 나무(Namu,男武) · 칭호-이리무(Irimu,伊夷謨:백성들의 책임자)  신타이 칸(新大)의 둘째 아들. 구룬 쿠부허 칸(國襄王)이라고도 한다. 부인은 자이나부(Jaina Aiman,提那部) Uso(于素)의 딸이다. 신타이 칸이 죽은 뒤,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184년 한나라 뤄둥태수(遼東太守)의 침입을 좌원(坐原)에서 격퇴한 뒤 요동으로 쳐들어가서 요동을 점령하였다가 다시 니칸에게 주는 등 대승하였다. 191년 Ubasi(우바시,乙巴素)를 Gohika Amban(國相)으로 등용하여 현정(賢政)을 베풀고, 우바시를 천거한 안뤼(Anlioi,晏留)를 대사자(大使者)로 삼았다. 194년 친타이 파푼(Chintai fafun,賑貸法)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빈곤을 덜어주었다.

 

 

9.고국천왕(재위179~197) : 신대왕의 차남으로 이름은 남무, 국양왕이라고도 한다.

176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179년 신대왕이 죽은 뒤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

고국천왕은 키가 9척이고 겉모습이 크고 위엄 있었다고 한다.

184년, 한나라 요동태수가 쳐들어와 동생 계수를 보내 막았으나 패배하자 왕이 직접 출병하여 대승하였다.

191년, 을파소를 국상으로 등용하여 현정을 베풀고 을파소를 천거한 안류를 대사자로 삼았다.

194년,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진대법(3~7월에 곡식을 대여하여 10월에 환납하는 것)을 실시하였는데 이로써 빈농을 구제하고 귀족세력의 확대를 막아 왕권을 강화시켰다.

왕권이 강화되면서 왕위계승 방법이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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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샨산 칸

(Shansan Khan)

 

무쿠리 제10대 칸(재위 197∼227). 이름 렌누(Lennu,延優)·칭호:이리무(Irimu,伊夷模:위의 뜻과 동일). 제8대 신타이 칸(新大)의 아들이며, 제9대 코리구루친 칸(故國川王)의 동생이다. 코리구루친 칸이 아들 없이 죽자 왕후 wu씨(于氏)에 의해 렌누가 왕위에 올랐다. 렌누 위에는 바카이(Bakai,發岐)라는 형이 있었다. 바카이는 이를 분하게 여겨 무쿠리를 떠나 훈누칸국으로 가서 훈누의 세르유(Seryu:직위명)로부터 그의 투르크 기병 3만 명을 얻어 무쿠리에 쳐들어왔다. 샨산 칸은 동생 카이수(Kaisu)로 하여금 이를 막게 했는데 이 싸움에서 바카이가 패하여 자살하였다. 207년(샨산 칸 11) 칸이 투퉁 투룬(酒桶村)에 미행(微行)하였는데 208년에 그곳의 한 처녀가 샨산 칸의 아들을 낳았다. 처녀는 소후(小后)에 봉해졌고 그 아들은 후에 제11대 둥친 칸(Dungchin Khan,東川王)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에 칸은 수도를 카한투(Khantu,丸都)로 옮겼는데, 카한투는 지금의 북몽골초원 오논강 근처의 후흐노르이다. 이후 이 근처에서 칭기스칸의 세력이 태동한다. 217년(샨산 칸 21) 8월에 니칸 한(漢)왕조 평주(平川)의 하요(夏瑤)가 백성 19,000여 호(戶)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했으므로 칸은 그들을 받아들여 지금의 남몽골의 옹구트족이 사는 지방인 체른 헤첸(柵城:현재의 후흐후트)에서 살도록 하였다. 칸의 무덤(陵)은 샨산 카능 메자르(Shansan Khanun Mezar,山上陵)이다.

 

10.산상왕(재위197년~227년) : 신대왕의 아들이자 고국천왕의 동생으로 휘는 연우, 이이모이다.

고국천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왕후 우씨의 지지를 받아 즉위하였는데 이후 우왕후는 산상왕의 아내가 되었다.

이것은 고구려의 형사취수 풍습이 남아있는 것으로 우씨의 권력 유지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산상왕의 형이었던 발기는 자신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군사를 동원하여 왕궁을 포위하였으나 3일 동안 산상왕이 농성하는 가운데 고구려 국내에서도 발기를 따르는 자가 없자 요동으로 망명하였다. 그 후 발기가 요동 태수에게 군사 3만명을 얻어 고구려에 쳐들어왔고 왕은 동생 계수로 하여금 이를 막게 했는데 이 싸움에서 발기는 패하자 자살하였다.

198년, 환도성을 쌓았고 207년 서울을 환도로 옮겼다.

208년, 제사에 쓸 돼지가 달아나자 제사 담당자는 돼지의 뒤를 쫓아 주통촌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후녀라는 여인의 도움으로 돼지를 잡았다. 이 소식을 들은 산상왕은 후녀를 몰래 찾아가 하룻밤을 보냈고 왕후는 이를 알고 분노하여 그 후녀를 죽이려 하였으나 후녀가 산상왕의 아들을 잉태하여 죽이지 못하였다.

이후 후녀는 아들 교체를 낳아 소후로 봉해졌고 213년에는 후녀의 아들 교체가 태자에 책봉되었다.

217년, 한나라 평주의 하요가 백성 1000여 호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는데 왕은 그들을 받아들여 지금의 중국 훈춘 지방인 책성에서 살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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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둥친 칸

(Dungchin Khan)

 

무쿠리 제11대 칸(재위 227∼248). 이름은 우뤼크(Ulioike,憂位居), 초명은 코차이(Kochai). 샨산 칸(山上王)의 아들. 더르기 쿠부허 칸(Dergi Kuhuber Khan:동방을 키우는 칸)이라고도 하며, 213년 타이시로 책봉되었다. 그의 치세는 니칸이 위(魏)·오(吳)·촉(蜀)으로 대립하고 있던 삼국시대로서, 236년(둥친 칸 10) 오나라 손권(孫權)이 사신 호위(胡衛)를 파견하여 화친을 청해 왔으나 사신을 죽여 위나라에 보냈고, 238년에는 위나라가 오나라 공손 연(公孫淵)을 토벌할 때 군사 30,000여 명을 보내어 오를 견제하고 니칸의 세력균형을 유지하였다. 242년에 니칸과 나크란지역을 연결하는 고비사막 이남의 교통의 요지인 사얀핀(Sayanpin,西安平)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에 수도가 비워져 있다는것을 노린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丘儉)이 카한투 헤첸(丸都城)을 직접 공격하여 함락되고, 장군 왕기(王)의 추격으로 남오호츠크(南沃沮)로 피란하였다. 이때 용장(勇將) 미리이(Mirii,密友)와 루르이(Lurii,紐由)의 계책으로 적을 격퇴시켰으나, 카한투헤첸이 복구할 수 없을 만큼 파괴되어 247년에 수도를 닝우타 헤첸(Ningguta Hechen,東黃城:이후의 바르하이제국의 수도)으로 옮겼다. 248년에는 쉬르아(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항복을 받아내었다.

 

 

11.동천왕(재위227∼248) : 아명은 교체(교제에 쓸 돼지와 관련된 사건으로 태어났다는 의미), 휘는 우위거, 위궁(태어나면서부터 사물을 본 것이 태조왕 궁과 닮아서 붙여짐)이며 동양왕이라고도 한다.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어서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213년, 태자로 책봉되어 227년에 왕위에 올랐는데 때는 중국의 위, 오, 촉 3국의 대립시기로 동천왕은 위와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236년, 오나라 손권이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청해왔으나 사신을 죽여 그 목을 보냈다.

238년, 위나라가 오나라 공손 연을 토벌할 때 동천왕은 군사 1000여을 보내어 위를 도왔다.

그러나 공손연 세력이 멸망하고 위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되자 고구려는 위나라로부터 압력을 받기 시작했다.

 

242년, 서안평, 구련성 지방을 선제 공격하였으나 유주자사 관구검의 반격으로 환도성이 함락되고, 북옥저로 피란하는 등 정복활동이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

247년, 환도성이 복구할 수 없을 만큼 파괴되어 평양성으로 일시 천도했다.

248년,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화친을 맺었다.

(245년 신라와의 전쟁, 248년 신라와의 화친의 사실 여부는 의심받고 있다)

248년, 동천왕이 서거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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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쥴친 칸

(Julchin Khan)

 

무쿠리 제12대 칸(재위 248∼270). 일명 두림바이 쿠부허 칸(中壤王:중심을 기르는 칸). 이름은 예푸이(Yepui,然弗:延弗), 둥친 칸(東川王)의 맏아들. 왕비(妃)는 예른 씨(Yerun,椽氏). 둥친 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뒤 동생 예르무(Yerumu,預物)과 사구이(Sagui,奢句)가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259년(쥴친 칸 12) 니칸 위(魏)왕조의 장수 위지계(尉遲階)의 침입군을 량무크 골(Liangmuk Gol,梁貊谷)에서 격퇴하였다. 서거 후 쥴친카눙 메자르(Julchin Khanun Mezar,中川原)에 장사지냈다.

 

12.중천왕(재위248년~270년) : 동천왕의 맏아들로 휘는 연불, 중양왕이라고도 한다.

243년, 태자가 되었고, 248년에 왕위에 올랐는데 동생 예물과 사구 등이 모반하였다가 처형되었다.

250년, 국상의 권한을 확대하여 수도와 지방의 군권까지 겸하게 하였다.

251년, 측실 관나부인이 왕후 연씨를 시기하여 모함을 하자 왕이 분노하여 관나부인을 가죽 주머니에 넣어 바다에 수장하는 처벌을 하였다.

254년, 음우를 국상으로 삼았으며, 255년에 왕자 약로를 태자로 삼았다.

259년, 위나라가 쳐들어 오자 왕이 기병 5천 명을 이끌고 양맥에서 싸워서 이들을 무찌르고 8천여 명을 목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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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숫친 칸

(Suchin Khan)

 

무쿠리 제13대 칸(재위 270∼292). 일명 와르기 쿠부허 칸(西壤王). 이름은 야르우(Yarwu,藥盧·若友). 쥴친 칸(中川王)의 둘째 아들이다. 255년(쥴친 칸 8) 타이시로 책봉되고, 271년 서부대사자(西部大使者) 우수이(Wusui,于漱)의 딸을 카툰으로 삼았다. 280년 슈르센(Shurshen,肅愼:무쿠리 동부의 반란 세력)이 내침하자 동생 타르구트(Targut,達賈)를 보내어 이를 격퇴하고, 탄로이 헤첸(Tanloi Hechen,檀盧城) 등 여러 성을 빼앗았다. 286년 반란을 도모한 동생 이르우(Iruwu,逸友)·Sobai(소바이,素勃) 등을 주살하였다. 칸의 장지(葬地)는 숫친 카눙 메자르(西川原)이다.

 

13.서천왕(재위270년~292년) : 중천왕의 차남으로 이름은 약로, 약우이고 서양왕이라고도 한다

255년, 태자가 되었고 270년에 즉위하였다.

280년, 숙신이 쳐들어오자 동생 달가를 보내 이를 격퇴하게 했는데 달가는 단로성을 빼앗아 추장을 죽이고, 6백여 가구를 부여 남쪽으로 이주시켰으며 부락 예닐곱 곳을 복속시켰다. 서천왕은 달가를 안국군으로 삼아 군대를 지휘하게 하였고, 양맥과 숙신의 여러 부락을 통솔하게 하였다.

286년, 동생 일우와 소발이 반란을 획책하여 거짓으로 병을 칭하고 입조하지 않자 서천왕은 이들을 재상으로 삼는다고 속여 입조한 두 사람을 처형하였다.

서천왕은 276년, 288년 두 차례에 걸쳐 신성으로 순행하였는데 이는 신성이 서쪽 변경의 중요한 거점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288년의 순행은 3월에서 11월에 걸친 장기간의 순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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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푼샹 칸

(PunShang Khan)

 

무쿠리 제14대 칸(재위 292∼300). 이름 샹부이(Shangbui,相夫)·샤이시르흐(Shaisirkh,矢婁). 숫친 칸의 태자. 체르갈 칸(雉葛王)이라고도 한다. 자랄 때부터 교만하고 시기심이 많았다. 칸위에 오르자 숙부인 안국군(安國君) 타르구트(Targut,達賈)가 백성들의 추앙을 받음을 미워하여 살해하고, 이듬해 동생 토르구트(Torgut)마저 사사(賜死)하였다. 명신(名臣) 차주이(Changjui,倉助利)를 국상(國相)에 등용하여 무트바흐츠 시버족인 연(燕)나라 무트바흐츠 오르(慕容)의 침입을 격퇴하기도 하였으나, 차츰 사치와 방탕을 일삼게 되었다. 298년 대기근으로 백성들이 굶주릴 때, 화려한 궁궐을 지으려 하여 차주이가 이를 말렸으나 끝까지 그의 간언을 듣지 않았다. 300년 폐위되고, 후환이 두려워서 자결하였다. 무덤은 푼샹 카눙 메자르(烽山原)에 있다.

 

 

14.봉상왕(재위292년~300년) : 이름은 상부, 삽시루이고 치갈왕이라고도 한다.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하며 의심과 시기심이 많았다.

292년, 왕위에 올랐는데 숙부인 달가가 백성들의 추앙을 받음을 미워하여 음모하여 살해하였다.

293년, 동생 돌고에게 역모죄를 씌워 자살하게 하였다.

명신 창조리를 국상에 등용하여 연나라 모용외의 침입을 격퇴하기도 하였으나, 차츰 사치와 방탕을 일삼게 되었다.

298년, 흉년이 들었으나 궁궐을 증축하는 공사를 강행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이때 봉상왕은 신하들의 간언을 듣지도 않고, 백성들을 살피지 않았다.

300년, 또 흉년이 들었으나 다시 궁궐을 증축하여 백성들이 흩어졌고 이에 국상 창조리가 왕에게 백성을 돌볼 것을 간언하였으나 봉상왕은 오히려 왕권의 지엄함을 역설하며 창조리를 위협하였다. 이에 창조리는 여러 신하들과 모의하여 봉상왕을 폐위하고 을불을 맞이하여 왕으로 삼았다. 봉상왕은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두 아들과 함께 목을 매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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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메르친 칸

(Merchin Khan)

 

무쿠리의 제15대 칸(재위 300∼331). 코리챠씨. 이름 우푸이(Upui,乙弗·憂弗). 숫친 칸의 손자, 구추가이(Guchugai,古鄒加) 토르구트(Torgut)의 아들. 사인 쿠부허 칸(好壤王)이라고도 한다. 큰아버지 푼샹 칸이 아버지를 죽일 때 민가(民家)에 숨어 화를 면하였으며, 뒤에 국상(國相) 차주이(Chajui,倉助利) 등이 푼샹 칸을 폐하자 칸위에 올랐다. 국토 확장에 진력하여, 302년 군사 3만으로 켄두르군(玄郡)을 공격, 적군 80,000명을 사로잡았다. 311년 고비이남의 시얀핀(西安平)을 점령하였으며, 313년 니칸의 사주를 받고 반란을 일으키려는 나크란지역(樂浪郡)을 공략하여 적군 190,000명을 사로잡았다. 이로써 나크란 아이만(부족)은 멸망하였다. 314년 다이반부(Daiban,帶方郡)를 정벌하여 영토로 삼았다. 메르첸 메자르(Merchun Mezar,美川之原)에 장사지냈다.

 

15.미천왕(재위300년~331년) : 서천왕의 손자, 고추가 돌고의 아들이고 이름은 을불, 을불리, 우불로 호양왕이라고도 한다.

293년, 아버지 돌고가 큰아버지 봉상왕에게 반역으로 몰려 죽음을 당하자 도망쳐 신분을 숨기고 고용살이와 소금장수 등을 전전하였다.

300년, 국상 창조리가 을불을 찾아 모셨으며 봉상왕을 폐위한 뒤 왕으로 옹립되었다.

미천왕은 즉위초부터 중국 군현세력과 치열하게 대립하며 국토확장에 전력하였다.

302년, 군사 3만으로 현도군을 공격하여 적군 8000을 사로잡았다.

311년, 요동 서안평을 점령하였으며 낙랑군, 대방군의 보급로를 끊는데 성공하였다.

313년, 낙랑군을 공략하여 적군 1000명을 사로잡았고 이로써 낙랑군은 멸망하였다.

위와같이 미천왕때에는 서안평을 확보, 낙랑군과 대방군 등을 정복하여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였으며 대동강 유역을 차지하여 경제적인 자원도 풍부히 얻게 되었다. 또한 백제 등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314년, 대방군을 정벌하여 영토로 삼고 중국 군현 세력을 축출하였으며 317년 다시 현도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요동지역을 지배해 오던 진의 통제력이 약해지면서 선비족의 일파인 모용부가 세력을 확대함에 따라 고구려는 영토 확장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이들과 자주 충돌했다.

318년, 진의 평주 자사 최비등과 연합하여 모용부를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이후 모용부가 요동을 장악하면서 본격적인 대립이 시작되었다.

319년, 최비가 요동을 잃고 고구려로 도망쳐 왔으며 이에 미천왕은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공격하였는데 모용외 역시 두 아들을 보내 침략해 왔다. 이에 미천왕이 휴전을 청하여 잠시 휴전이 성립되었다.

320년, 다시 요동을 침략하였으며 이후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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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코리구룬유완 칸

(Khorigurun Yuwan Khan)

 

무쿠리 제16대 칸(재위 331∼371). 이름 사이뤼(Sailioi,斯由,釗). 메르친 칸의 아들. 구루니 낫훈 구르칸(國岡上王)이라고도 한다. 314년(메르친칸 l5) 타이시로 책봉되고, 즉위하자 페르얀성(平壤城:현재의 심양,묵덴)을 증축하였으며 구루니 헤첸(Guruni Hechen,國內城)을 쌓았다. 342년 카한투성(丸都城)으로 천도한 뒤 수차례 무트바흐츠 시버인 연(燕)나라의 침입을 받게된다,이에 분노한 칸은 40만 군사를 거느리고 무트바흐츠 후왕(慕容)의 연왕조의 수도 돌론노르를 포위하고 무트바흐츠 왕조의 칸의 시체를 빼앗고,무트바흐츠 칸의 카툰과 구르카툰(왕모)을 사로잡아 포로로 잡아갔다. 343년 무트바흐츠 칸 무트바흐츠 후왕은 이에 조공을 바치며 찾아와 카툰과 구르카툰,그리고 시체를 찾아갔다. 369년 20만 군대로 무쿠리중앙의 협동작전에 협조하지 않는 베르체(백제)를 공격하였으나 해전의 열세로 패하고, 371년 제국의 패권을 노리고 쿠테타를 일으켜 수도에 침입한 베르체의 쿠툴루크 칸(근초고왕)과 페르얀에서 싸우다가 죽었다.

 

 

16.고국원양(재위 331년~371년) : 이름은 사유, 쇠이고 국강상왕이라고도 한다.

314년, 태자로 책봉되어 331년에 즉위한 뒤 평양성을 증축하였으며 국내성을 수리, 신성을 축성하는 등 변경의 방비를 갖추었다. 또한 전연을 견제하기 위해 336년, 343년에 걸쳐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342년, 4만 대군을 이끈 모용 황이 고구려로 쳐들어왔는데 고구려군은 남쪽길에서 크게 패하여 환도성이 함락되고 왕은 피신하였으며 모후 주씨와 왕비는 포로로 납치되었다.

(전연군은 평탄한 북쪽길로 소수의 군대를 보내고 험난한 남쪽길로 대군을 보내는 기만전술을 폈는데 이에 속은 고구려군은 북쪽으로 무가 이끄는 정병 5만을 파견하고 남쪽은 왕이 직접 소수의 군대로 지켰었다. )

전연군은 퇴각하는 길에 미천왕릉을 파헤쳐 미천왕의 시신과 함께 5만명의 백성을 잡아갔다.

343년, 고국원왕은 동생 무를 연나라에 파견하여 많은 조공을 바쳐 미천왕의 시체와 왕비를 찾아왔으며 평양의 동황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355년, 다시 조공하여 왕모 주씨를 돌려받는데 성공하였다.

(위 사실 삼국사기수정의심, 상황이 정반대임)

이후 전연은 전진의 공격을 받아 쇠퇴하였으며, 370년에 전진에 의해 멸망하였다. (고구려는 멀쩡한데 전연이 망한다?)

이때 고국원왕은 고구려로 도망쳐온 태부 모용평을 체포하여 전진에 송환함으로써 전진과의 우호관계를 수립했다.

369년, 고국원왕은 2만 군대로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였다,

371년, 다시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였고 그후 백제 근초고왕이 평양으로 공격해왔는데 고국원양은 이를 막다가 유시에 맞아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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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시유수린 칸

(Siyoosulin Khan)

 

무쿠리 제17대 칸(재위 371∼384). 아지게 카투르 칸(小解朱留王)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쿠부이(Kubui,丘夫), 코리구룬 유완 칸(故國原王)의 아들. 355년(코리구룬 유완 칸 25) 타이시로 책봉되었으며 371년 코리구룬 유완 칸이 베르체의 쿠툴루크 칸(近肖古王)과 평양에서 싸우다가 화살(流矢)에 맞아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니칸 전진(前秦)왕조로부터 조공을 받는 관계를 수립하여 조공을 받았으며 동로마제국과의 교역에 노력하여, 372년 니칸의 전진 왕 부견(符堅)이 보낸 조공사절단에 속해있던 승려 순도(順道)가 가져온 불상과 경문을 받아들여 니칸(漢文)식 불교를 공인하였으며 같은 해 타이 타치하 아문(Tai Tahchiha Amun,太學)을 설립하였고, 373년 처음으로 법령(Fafun,律令)을 반포하고, 375년 니칸(漢文)식 불교절인 초문사(肖門寺)를 창건하여 순도를 머물게 하였다. 그 해에 고대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 또 전년에 무쿠리에 온 중 투르크 승려 아투르(Atur,阿道)를 위하여 이프란사(Ipran,伊佛蘭寺)를 지어 주지(住持)로 삼았으며, 같은 해에 베르체(백제)의 시유골 헤첸(Siyoo Gol Hechen,水谷城)을 빼앗았다. 377년 30만 대군의 베르체반란군 침공을 물리치고 베르체의 북변(北邊)을 역습하였으며 이듬해 키타이(契丹)인 제후를 그곳에 임명하여 북방베르체(요서)지역의 통할을 맡겼다.

 

17.소수림왕(재위371년~384년) : 이름은 구부이고 소해주류왕, 해미류왕이라고도 한다.

355년에 태자가 되었고 371년 고국원양이 전사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당시 국왕이 전사한 상황에서 국가의 체제 정비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넓은 영토와 주민들을 체계적으로 통치할 제도의 정비가 요구되던 시기였으므로 소수림왕은 새로운 체제로 국가를 정비해 나갔다.(넓은 영토와 주민은 정복왕조체제를 정비한다는 의미)

 

372년, 전진 왕이 보낸 승려 순도가 와서 불상과 경문을 전함으로써 최초로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었으며 곧 불교는 호국불교, 현세구복적인 불교로 신앙되고 발전되었다.

(불교를 도입한 이유는 전진과 평화적 관계를 수립하고자 한 것과 호국사상의 필요성 때문이다)

또한 유교교육기관(?)인 태학을 세워 유교적 정치이념에 충실(조작가능성)하고 중앙집권적 정치제도에 적합한 관리를 양성(정복왕조체제)하였으며 민간에서는 각처에 경당을 세워 미혼의 자제들에게 독서와 궁술을 익히게 하였다. 그리하여 유교의 경전이나, 사기, 한서(고조선사,고구려사임) 등의 사서가 읽혀졌고 옥편, 자통과 같은 사전류가 유포되었으며, 특히 지식인 사이에는 중국의 문선 같은 문학서가 많이 읽혔다.

373년, 처음으로 율령(정복왕조법령)을 반포하여 유학적 통치 이념 아래 고대 율령국가 체제를 구축하여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발돋음 할 수 있었고 이러한 소수림왕의 체제정비 시책들을 기반으로 고구려는 5세기에 전성기를 누렸다.

374년, 아도(투르크승려)가 전진에서 건너와 불도를 전하였다. 이에 소수림왕은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창건하여 순도와 아도를 기거하게 하는 등 불교의 수용 및 보급에 노력하였다.

(정복왕조로서 다양한 종교를 수용하고 했음)

375~377년에 걸쳐서는 백제의 수곡성을 빼앗고 3(30만정도는 되어야 대군이 아닌가?)대군의 백제군 침공을 물리치고 백제의 북변을 역습하는 등 백제와의 충돌이 계속되었다.

378년, 극심한 가뭄이 든 상태에서 거란의 침략을 받아 8개의 부락을 빼앗겼다.(거란을 제후로 삼아 통치하도록 맡겼는데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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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코리구룬 쿠부허 칸

(Khorigurun Khubuher Khan)

 

무쿠리 제18대 칸(재위 384~391). 이름 오치르치(伊連,於只支). 시유수린 칸의 아우. 러리 토크토부하 바 칸(Leli Toktobuha Ba Khan)의 아버지. 385년 군사 40만으로 요동(遼東)을 공격하였고, 이듬해 베르체를 정벌하여 국토를 넓히는 등 외치(外治)에 힘썼다. 불교,조로아스터교,마니교,네스토리우스교 등 다양한 종교를 널리 인정하고 양성하여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국사(國社)를 세우고 종묘(宗廟)를 수리하는 등 국가체제 확립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18.고국양왕(재위384년~392년) : 고국원왕의 차남으로 이름은 이련, 어지지이고 국양왕이라고도 불린다.

385년, 군사 4만 명으로 후연의 요동을 공격하여 요동 및 현도를 점령하였다가 다시 빼앗겼다.

 

백제와도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는데 고국양왕은 백제를 정벌하여 국토를 넓히는데 힘썼다.

386년, 백제를 공격하였으며, 389년과 390년에는 백제의 침입을 받기도 하였다.

392년,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또한 불교를 장려(불교만 한정한 것이 아니라 정복왕조로서 다양한 종교를 인정)하여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나라의 사직을 세우고 종묘를 수리하여 국가체제 확립에도 이바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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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러리 토크토부하 바 칸

(Leli Toktobuha Ba Khan)

 

무쿠리 19대 칸(재위 391∼413). 코리구룬쿠부허 칸(故國壤王)의 타이시. 이름은 타르더(Tarde,談德)이며 시유수린 칸의 정치적 안정(소수림왕정복왕조체제정립)을 기반으로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유목 정복대칸이다. 그의 완전한 묘호는 구룬 낫후니 러리 토크토 부하 바 타이핀 사인 구르칸(Gurun Nathuni Leli Toktobuha ba taifin Sain Gurkhan,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며, 생존시의 칭호는 후투크 쿠문 보그드 칸(Hutuk Kumun Bogd Khan,永樂大王)이었다. 러리 토크토부하 바 칸은 약칭이고, 그가 쓴 후투크 쿠문(Hutuk Kumun,永樂)이란 연호는 제국의 영원한 발전을 약속하는 뜻에서 쓰인 연호이다. 즉위 초부터 다이반(Daiban,帶方) 탈환전을 개시하여 베르체의 북쪽을 진격하여서 세크하르(石峴) 등 10성을 함락하였고, 396년(러리 토크토부하 바 칸 6:베르체 아신 칸) 친히 수군 50만을 거느리고 베르체를 정벌하여 58성을 차지하였으며, 칸의 동생인 아시하(Asiha) 옷치킨과 대신 10인을 볼모로 삼아 개선하였다. 이리하여 산동반도근처의 지역과 하느쿵반도의 서쪽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400년에는 쉬르아 나이무르 왕의 요청으로 50만원군을 보내어 일번에서 건너온 남부베르체군를 격퇴시켰으며, 둥야이(Dungyai,東濊:현재의 나나이인)를 통합하고(410), 쉬르아와는 하스라(Hasra,何瑟羅:현재의 하느쿵 반도의 강원도지역)를 경계로 삼았다. 또 연(燕)나라의 무트바흐츠 키(慕容熙)를 공격하여 이체 헤첸(Iche Hechen,新城)·난솜(Nansom,南蘇)의 2성 등 7000여 리의 땅을 회복하였고, 405∼406년 후연(後燕)의 무트바흐츠 키에게 2번동안 항복권고를 하였으나 뤄둥성(遼東城)과 무치성(Muchi,木底城)을 주는 정도로 거부하였다. 407년 무트바흐츠 키에 반발하여 그의 신하로서 그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켜 자립한 코리챠 운크(Koricha Unkh,高雲)과는 수교를 맺고 현재의 탕구트지역인 서부로 밀려난 무트바흐츠 시버군을 물리쳤다. 410년에는 북부 시베리아의 동부리야트(東夫餘)를 정벌하여 64성을 공파함으로써 오브강 연안의 동부리야트가 무쿠리의 판도 안에 들게 되었다. 또한 남하하여 시라무렌선(황하)까지 진출하였으며, 서쪽으로 로란(Roran)을 격파하고 서부시베리아를 확보하고 킵챠크/쿠만과 국경을 맞대고 그들을 속국으로 만듦으로써 명실공히 유라시아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그의 릉은 소재 미상이며 일번(일본)측이 주장하는 챠이슈트 칸이 414년에 세웠다는 러리 토크토부하 바 칸비(中國 吉林省集安縣 通溝 소재)에는 그의 니칸정벌과 하느쿵반도로 범위가 축소된 수준의 기록만이 존재한다.

 

Roran(Rouran) -유연(중국어: 柔然, 병음: Róurán; 의미 "부드러운")은 4세기 말부터 6세기 말까지 중국 북쪽 경계 지역에 존재했던 유목민족의 국명이다. 일부 학자들은 유연이 이후 유럽에 출현한 유라시안 아바르족(Eurasian Avars)(현대의 코카서스 아바르족(Caucasian Avars)의 선조)과 연관이 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Kipchak Kuman(킵챠크쿠만)-쿠만인들은 동유럽평원을 활보했던 민족이였다.

코만(Coman), 쿤(Kun)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킵차크 초원으로 불리는 현재의 카자흐스탄으로부터 동유럽까지의 평원 지대에 퍼져 유목 생활을 했다. 킵차크의 서진으로, 흑해북해안으로부터 베사라비아(현몰도바)의 방면으로 유목 하고 있던 투르크계 유목민들의 일로였다. 이 사람들은, 러시아사에서는 폴로프치(Половцы)로 부른다.

 

 

오비 강 ob.river(러시아어: Обь, 만시어: Ас, 네네츠어: Саля' ям)은 서시베리아저지를 흐르는 강이지만, 지류의 이르티시 강은 알타이 산맥에서 발원을 한 다음, 카자흐스탄 영내를 지난다. 중류에서는 튜멘 유전을 횡단하고, 남북으로 800 km 정도 있는 오비 만을 지나 카라 해로 향한다. 강하구의 위치는 북극권에 해당한다. 전체 길이는 세계 5위, 유역 면적에서는 예니세이 강 다음으로 세계 7위이다. 지류로는 바흐 강, 케티 강이 있다.

예니세이 강 Yenisei River(러시아어: Енисе́й)는 러시아의 강이다. 북극해에 흘러드는 최대의 강이다. 몽골 북쪽에 흘러 북극해의 카라 해로 흘러 들어간다. 상류부는 급류로 홍수가 잘 일어난다. 중류에는 몇개의 거대한 수력 발전용 댐이 건설되고 있어 러시아의 원료 생산 산업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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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광개토대왕(재위392년~413년) : 이름은 담덕, 안이고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 등이 전해지며, 이를 줄여서 광개토대왕, 광개토태왕이라 부르기도 한다.

생존시 칭호는 영락대왕이였는데 영락이란 연호는 한국에서 사용된 최초의 연호였으며, 중국과 일본 등지에는 호태왕으로 알려져 있다.

386년, 태자로 책봉되었고 392년 즉위한 직후부터 백제와의 전쟁에 주력하였다.

그 해에 백제를 공격하여 석현성 등 10개 성을 함락하였고, 백제 북방의 중요한 요충지였던 관미성을 점령하였다. 또한 거란을 공격하여 500여 명을 노획하고 거란에 노획되었던 고구려인 1만여 명을 되찾아왔다.

백제는 빼앗긴 성을 회복하기 위해 계속해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광개토왕은 백제의 공격을 393년에는 관미성, 394년에는 수곡성, 395년에는 패수에서 격퇴하였으며, 394년에 백제를 방비하기 위해 남쪽 변경에 7개 성을 쌓았다.

또한 평양을 크게 중시하여 393년에 9개의 절을 평양에 창건하고 399년에는 왕이 직접 평양에 행차하기도 하였다.

395년, 비려(거란일파)를 공격하여 염수 일대의 3개 부락과 600~700개 영을 격파하고 많은 가축을 노획하였다.

396년,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여 아리수 이북의 58개 성, 700여 개 촌락을 공략하고 위례성을 포위하자 이에 백제 아신왕이 항복하여 아신왕의 동생과 백제의 대신 10명을 인질로 받아 개선하였다. 이리하여 고구려는 한강 이북과 예성강 이동의 땅을 차지하게 된다.

398년, 숙신을 정벌하여 복속시켰다.

400년, 백제, 왜의 연합군이 신라에 침입하자 고구려와 동맹관계에 있던 신라 내물왕은 평양으로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광개토왕은 5만의 원군을 보내어 왜군을 물리치고 신라를 속국으로 삼았다. 같은해,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던 후연이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시키고 700여 리의 땅을 탈취하였다.

402년, 광개토왕은 숙군성을 공격하였고 404년에도 후연을 공격하여 보복전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는 요동성을 비롯한 요동 지역을 장악하였으며 이를 회복하기 위해 쳐들어온 후연군을 405년 요동성, 406년 목저성에서 격파하여 요동 장악을 확고히 하였다. 또한 후연을 견제하기 위하여 남연과 우호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407년, 백제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6개 성을 점령하고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408년, 후연이 멸망하고 고구려계인 고운이 북연을 건국하자 우호관계를 맺어 서쪽 국경을 안정시켰다.

409년, 나라 동쪽에 독산성 등 6개 성을 쌓고 평양의 민호를 옮겨 살게 하였다.

410년, 동부여를 정벌하여 64성을 공파함으로써 동부여가 고구려의 판도 안에 들게 되었다.

위의 광개토왕의 정복활동을 다시 요약하자면, 서 쪽으로 후연을 공격하여 요동을 모두 차지하고 요서의 일부 또한 확보하였으며, 북연과 친선관계를 수립하였고 북쪽으로는 부여와 숙신, 비려를 복속시켰으며, 남쪽으로는 백제를 쳐서 한강 이북을 빼앗아 위축시키고, 왜와 가야의 침공을 계기로 신라를 보호국화하는 한편 바다를 건너 침공해 온 왜를 섬멸하였다. 또한 가야를 공격하여 전기 가야 연맹을 해체시키기에 이르렀으며 동으로는 읍루를 정벌하였고, 동예를 완전히 병합하는 등 소수림왕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군주이다.

광개토왕은 역대 왕릉의 정비에 힘써 수묘인 제도를 정비하고 실시할 것을 장수왕에게 유언하였다. 이러한 내치로 광개토왕릉비에는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하였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라 칭송하는 기록이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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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차이슈트 칸

(Chaishut Khan)

 

무쿠리 제20대 칸(재위 413∼491). 휘 커뤼이(Kerlioii,巨連:巨璉). 러리 토크토부하 바 칸(廣開土大王)의 맏아들. 모습이 괴걸(魁傑)하고 지기(志氣)가 호매(豪邁)한 대장부로, 409년(러리 토크토부하 바 19) 태자로 책봉되고, 413년 부칸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즉위 초기 니칸의 진(晉)·송(宋)·위(魏) 왕조 등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관계를 다시 확인하고, 427년(차이슈트 칸 15) 카라무룬(흑룡강) 지방의 구루니 헤첸(Guruni Hechen,國內城)에서 남쪽의 피르얀(平壤)으로 천도하여 적극적인 남하정책과 니칸정벌을 추진하였다. 인디아불교 승려 투린(Turin,道琳)을 베르체에 첩자로 파견하여 베르체의 허실을 탐지하는 한편 베르체의 국고와 민력을 소모시키고 나서, 475년 친히 군대를 이끌고 베르체를 공격하여 그 수도 니칸 헤첸을 함락하였고 베르체의 카이루 칸(蓋鹵王)을 사로잡아 죽였다. 480년(차이슈트 칸 68) 무쿠리(靺鞨) 국내의 군사들을 모두 모아 함께 쉬르아 북부와 니칸지역을 공략하여 쿠이밍성(孤鳴城) 등 7성을 함락시켜 남으로는 황하의 발원지에서 동쪽의 동태평양에 이르렀고, 북서쪽으로는 우랄산맥을 넘어 킵챠크를 차지하여, 몽골 역사상 최대의 제국(帝國)을 건설하였다(몽골인작성한 것이라서 몽골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징기스칸영역보다 더 넓었다고 이해해야 한다). 내정개혁에도 힘을 기울여 부족제도를 새로운 지방제도로 고쳐 5잔징(맹) (5혈맹, 동맹-몽고 4한국(四汗國)과같음)를 신설하는 등 무쿠리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20.장수왕(재위413년~491년) : 휘는 거련이고 100년 가까이 살았었다고 해서 장수왕이라는 시호가 바쳐졌다. 모습이 괴걸하고 지기가 호매한 대장부로 79년 동안 재위하였고 99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409년, 왕태자에 책봉, 413년에 광개토대왕이 죽자 20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며 그해 동진과 국교를 맺었다.

427년, 내부적으로 왕권을 위상을 높여 귀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외부적으로 남진정책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다.

고구려가 내부를 안정시키며 국제 정세를 관망하고 있는 동안 중국 대륙은 세력 다툼을 벌이며 새로운 형국으로 치달았다. 이들 나라의 패권 다툼 중에서 북위와 북연의 싸움이 고구려에 직접 영향을 끼쳤다. 장수왕은 외교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중국의 진, 송, 위 등과 사신을 교환하여 국교를 맺었으며 북연을 견제하였다.

430년, 북연왕 풍발이 병사하자 왕위다툼이 일어났고 결국 풍발의 아우 풍홍이 조카들을 제거하고 왕으로 등극하였다. 그러나 왕위 다툼은 조정을 동요케 해 국가 전체의 위기로 이어졌고, 북위의 침략을 용이하게 하였다.

435년, 북위의 기세로 북연은 몰락을 눈앞에 두고 있었고 이에 풍홍은 고구려에 밀사를 보내 후에 자신이 의탁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436년, 북위는 대군을 동원하여 북연을 공격하였고, 풍홍은 급히 고구려에 밀사를 보내 도움을 청했다. 이에 장수왕은 갈로와 맹광에게 수만의 군사를 내주어 풍홍을 맞이해오도록 하였으며 후에 북위는 풍홍을 자신들에게 압송할 것을 요청했으나 장수왕은 이를 거절하였다. 하지만 환영연에서 풍홍이 고구려를 업신여기는 행동을 보여 장수왕은 분노하였고 풍홍도 장수왕에게 신하 대우를 받자 이에 분노하였다.(내용이 180도 다름. 거짓으로 꾸며진 것)

438년, 장수왕은 풍홍을 평곽으로 가게 했다가 다시 북풍에 머물도록 하였다. 또한 풍홍의 시종을 빼앗고, 태자를 볼모로 잡았는데 이에 풍홍은 분개하여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송의 유유는 고구려에 풍홍을 넘겨줄 것을 요청했으나 장수왕은 손수와 고구로 하여금 풍홍과 그의 가족들을 죽이라고 명했다. 결국 북풍에서 풍홍과 그의 가족 10여 명은 참살당하였으나 송의 사신 왕백구가 풍홍의 군사 7천여 명을 이끌고 손수와 고구가 이끄는 고구려군을 습격하는 바람에 고구는 죽고 손수는 생포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장수왕은 즉시 대군을 동원하여 왕백구를 사로잡아 송으로 압송시켰다(2중간첩을 송으로 압송했다?). 이에 송은 고구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왕백구를 감옥에 가뒀다가 고구려의 눈을 피해 석방하였다.

440년, 신라가 고구려의 변경을 공격하여 변방 장수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에 고구려가 군사적 대응을 검토하자 다급해진 신라는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 사죄하였다. 이후 고구려와 신라는 한동안 평화를 유지하였다. 한편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여 이미 나제동맹을 맺고 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이들 동맹관계가 더욱 강화되었다.

454년, 장수왕은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의 북쪽 변경을 공격하고, 이듬해는 백제를 공격했다. 이에 신라와 백제가 동맹약조에 따라 연합군을 형성했고, 고구려는 나제연합군에 밀려 한동안 양국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였다.

468년, 장수왕은 말갈 군사 1만을 동원하여 신라의 실직주 성을 빼앗았는데 이때부터 고구려와 나제연합군의 치열한 전쟁이 이어졌다.

469년, 백제가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했고, 또한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공격에 대한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북위는 이 사실을 고구려에 알려주었다. 장수왕은 승려 도림을 백제에 잠입시켰다. 도림은 백제의 국고와 민력을 소모시키기 위해 개로왕을 충돌질하여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이도록 했고 백제의 경제적 혼란을 일으켰다.

475년, 장수왕은 대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입하여 수도 한성을 무너뜨리고 개로왕을 죽여 소수림왕 이래 국가의 숙원 사업이던 고국원왕에 대한 원수를 갚았다.

480년, 말갈과 함께 신라의 북변을 쳐 고명성 등 7성을 점령하였고 미질부까지 진군하였다.

이로써 고구려의 영토는 점점 확장되어 남쪽은 아산만에서 죽령에 이르고, 서북쪽은 요하에서 만주의 대부분을 포함한 큰 나라를 건설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 또한 종전의 부족연맹제도를 지방행정제도로 고쳐 5(그냥 부가 아님)를 신설하는 등 민정에도 개혁을 단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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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무차이 칸

(Muchai Khan)

 

무쿠리의 제21대 칸(재위 491∼519). 이름 라룬(Larun,羅雲). 차이슈트 칸의 손자이며 암바 구추가이(古鄒大加) 추다이(Chudai,助多)의 아들. 무차이 메르겐 칸(文咨明王)·메르겐 다산 사인 칸(明治好王)이라고도 한다. 아버지가 일찍 죽었으므로 차이슈트 칸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여러 번 시버족 위(魏)왕조로부터 조공을 받았으며, 494년 부리야트제국을 토크토부하(평정)하고 그 칸과 그 일족의 투항을 받아들였다. 497년에 쉬르아 우르산 헤첸(牛山城), 512년에 남니칸의 대도시인 베르체 카불(현 아프가니스탄 수도일가능성) 헤첸(Kabul Hechen)·유완샨 헤첸(圓山城)을 점령하였다. 한편, 쉬르아-베르체군사동맹을 통한 베르체와 쉬르아의 연합작전으로 일진일퇴를 거듭하기도 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러리 토크토부하 바 칸 이래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하여 차이슈트 칸을 거쳐 무차이 칸에 이르는 동안 판도가 넓어지고, 세력은 더욱 강성해져 세계제국으로 발전하였다.

 

 

21.문자왕(재위492년~519년) : 장수왕의 손자, 고추대가 조다의 아들이며 휘는 나운이고 문자명왕, 명치호왕이라고도 한다. 문자명왕 때 고구려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보유하였다고 한다

492년, 아버지가 일찍 죽었으므로 그가 장수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의 연합작전으로 일진일퇴를 거듭 하였다.

494년, 부여가 항복하여 고구려에 완전 복속되었고, 신라군과 살수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신라가 패하여 견아성으로 들어가 농성하자 이를 포위하였으나, 백제가 3천 명의 구원군을 보내 공격해서 후퇴하였다.

495년, 백제의 치양성을 포위하였으나, 신라가 장군 덕지를 보내서 백제를 구원하므로 물러났다.

496년, 신라의 우산성을 공격하여 패하였으나 이듬해 다시 우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507년, 장수 고노를 시켜서 말갈군과 함께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횡악과 싸우다가 물러났다.

512년, 백제를 침략하여 가불, 원산 두 성을 함락시키고, 포로 1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전체적으로 보면, 광개토왕 이래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하여 장수왕을 거쳐 문자왕에 이르는 동안 판도가 넓어지고, 세력은 더욱 강성해져 대국으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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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얀쟝 칸

(YanJang Khan)

 

이름은 샹얀(Sangen). 빨간 돼지의 해(519)에 즉위. 치세는 12년간..

 

22.안장왕(재위519년~531년) : 휘는 흥안이고, 문자왕의 맏아들이다.

498년, 태자가 되었고 519년에 문자명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523년, 군사를 보내 백제를 침공하였다.

529년, 오곡에서 백제와 싸워서 이기고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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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얀완 칸

(Yanwan Khan)

 

이름은 부이르(Buir). 노란 돼지의 해(531)에 즉위. 치세는 14년간.

 

23.안원왕(재위531년~545년) : 휘는 보연이고 곡향강상왕, 향강상왕, 안강상왕이라고도 부른다. 안장왕의 동생으로 형의 사랑을 받았는데 후사 없이 죽은 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는 키가 7척 5촌이며 도량이 넓었다고 한다.

534년,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분열되자 동위와 양과의 양면외교를 적극 전개하여 안정을 유지하였다.

536년,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었으므로 사신들을 보내 굶주린 백성들을 위무하고 구제하였다.

540년, 백제가 우산성을 포위하였으나 기병 5천 명을 보내 물리쳤다.

당시 홍수와 지진, 전염병, 가뭄, 황충, 기근, 태풍 등의 재난이 계속되어 어려웠다

542년, 음력 3월에는 바람이 크게 불어 나무가 뽑히고 기왓장이 날아갔고 음력 4월에는 우박이 내렸다고 한다. 왕의 후사를 둘러싼 세력다툼으로 사회가 동요되는 가운데 추군과 세군의 무력충돌 속에서 죽음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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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랑완 칸

(陽原王)

 

무쿠리의 제24대 칸(재위 545∼559). 이름은 타이핀 헤첸(平城). 얀완 칸의 맏아들. 선 낫훈 구르 사인 칸(陽崗上好王)·랑걍 칸(陽崗王)이라고도 한다. 533년(얀완 칸 3) 태자로 책봉되고, 얀완 칸이 죽자 즉위하였다. 버족 왕을 임명하여 제국의 일부지역을 동위(東魏)·북제(北齊) 등으로 지정하여 보다 효율적인 제국통치를 도모하고, 47년 사얀 투르 헤첸(白巖城)·이체 헤첸(新城:무크슌(Mukusun)) 등을 재건하였으며, 50년 반란을 일으키려는 북제의 왕을 폐하고 직접 통치를 도모하였다. 51년 자칭 투르크라 칭하는 니칸 사이비교단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나, 쉬르아·베르체에게 하느쿵 반도의 한강 유역을 잃었다.

 

24.양원왕(재위545년~559년) : 휘는 평성으로 안원왕의 태자이지만 안원왕 사후에 바로 즉위하지 못했다. 안원왕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는데, 서로 자신의 자식을 왕위에 올리고자 다툼이 있었고 무력 충돌로 번져서 평성 태자 쪽이 승리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 국상이였던 왕산악은 진의 칠현금을 개량하여 거문고를 만들었으며 100여 곡의 악곡을 지었다.

547년, 백암성을 고쳐 쌓고, 신성을 수리하여 전쟁을 대비하였다.

548년, 군사 6천 명으로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신라의 장군 주진이 구원군을 이끌고 와서 실패하였다.

550년, 백제가 쳐들와 도살성이 함락되었다. 이에 백제 금현성을 공격하였으나, 이 틈을 노린 신라군에게 고구려 두 성을 함락되었다.

551년, 돌궐군이 쳐들어와서 신성을 포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백암성으로 옮겨 공격하였다. 이에 양원왕은 장군 고흘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어 싸우게 하여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또한 신라가 다시 쳐들어와서 10개의 성이 함락되었다.

552년, 장안성을 쌓았다.

554년, 백제 웅천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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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핑완 칸

(Pingwan Khan)

 

무쿠리 제25대 칸(재위 559∼590). 이름은 야르센(Yarsen,陽城). 타이핀 이 얼허 구르 사인 칸(平崗上好王)이라고도 한다. 랑완 칸(陽原王)의 타이시로 559년 즉위한 후 니칸의 진(陳)·수(隋)·북제(北齊:위의 국가와는 다른 시버족 국가 좀더 남쪽에 있었다.)·후주(後周) 등 여러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일찍이 차이슈트 칸(長壽王)이 피르엔의 북서쪽 서 싱안옝(흥안령) 코리 투메트 알린 헤첸(大城山城)으로 국도를 옮긴 뒤 랑완 칸이 장안성(長安城:니칸지역의 성)에 대규모의 축성 공사를 시작한 것을 586년(핑완 칸 28) 완성시켜 장안성으로 천도하였다.

 

25.평원왕(재위559년~590년) : 휘는 양성이고 평강상호왕이라고도 한다.

557년, 태자로 책봉되었고 559년에 즉위하였다.

당시 수나라가 점차 고구려를 압박해왔고, 백제와 신라의 나제동맹이 깨져서 삼국이 서로 대립하던 시기였다. 평원왕은 중국의 진, 수, 북제, 후주 등 여러 나라와 친교를 맺었으며 장안성으로 천도하였다.

589년, 평원왕은 수나라가 쳐들어올 것에 대비하여 군사력을 강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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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링얀 칸

(Lingyan Khan)

 

무쿠리 제26대 칸(재위 590∼618). 이름 암바수충가(Amba Suchungga,元·大元). 핑완 칸의 타이시. 피르엔 칸(平陽王)이라고도 한다. 즉위 후 니칸의 수(隋)왕조로부터 조공을 받다가 이들이 올바로 복속하지 않자,598년 무쿠리 철기병 1만을 이끌고 요서(遼西)를 선공(先攻), 전략적 요충 확보에 나섰다. 이에 수나라 문제(文帝)가 30만군으로 침공하였으나 이를 격퇴시키고,20만명의 포로를 잡아 모두 복속시켰다. 이와 함께 50의 대군으로 수왕조를 공격하여 동북지역을 탈환하였다. 600년 태학(太學)박사 이문진(李文眞:니칸식 이름으로 개명된 무쿠리인)에게 명하여 《유기(留記)》 100권을 재편수, 《신집(新集)》 5권을 만들게 하였다. 608년 쉬르아의 변경을 습격, 우밍 알린 헤첸(牛鳴山城)을 함락하고 군사 80,000을 포로 잡았다. 612년 니칸 수왕조 양제(煬帝)가 문제의 패전을 설욕하고자 113만 수륙군(水陸軍)으로 쳐들어오자, 명장 울치 문더(Ulchi Munde,乙支文德)을 시켜 살수(薩水:현재의 난하)에서 적을 섬멸하고 그 뒤에도 계속 침공군을 무찔러 수왕조 멸망의 요인이 되게 하였다.

 

 

26.영양왕(재위590년~618년) : 휘는 원, 대원이고 평양왕이라고도 한다.

565년, 태자로 책봉되었고, 590년 왕위에 올랐다.

당시 수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여 돌궐과 고구려에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수가 통일이라 한 것은 한정된지역 군소국만 정리한 수준)

수나라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의 영토를 염탐하였고, 그 후에도 몇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 지형을 알아보게 하였다. 마찬가지로 영양왕 역시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동태를 살폈다.

598년,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비밀리에 군대를 양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고구려는 말갈병 1만 명을 동원하여 요서 지역의 임유관을 선제 공격하였으나 점령하지는 못했다.

이에 수나라 문제가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요동성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고구려군은 미리 알아낸 보급선을 격파하여 군량 보급을 끊었고 때마침 장마가 닥쳐 수의 30만 대군은 결국 대패하여 병력을 대부분 잃고 퇴각하고 만다.

(20만 포로했다는 내용이 없다. 50만 군사로 공격한 사실도 없다)

600년, 영양왕은 태학박사 이문진에게 명하여 <유기> 100권을 재편수, <신집> 5권을 만들게 하였다. 또한 영양왕은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했고 수는 그 제의를 받아 들였다.

그 무렵 백제가 자신들이 길잡이 노릇을 하겠다며 다시금 수나라에게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요청했으나 수나라는 이를 거부하였고 이 소식을 접한 영양왕은 진노하여 곧바로 백제를 침공했다.

603년, 고구려는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였고 이때 신라에서는 진평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대항하였는데 고구려군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퇴각하였다.

607년, 백제의 송산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했고, 석두성을 공격하여 포로 3천 명을 사로잡아 끌고갔다.

608년, 신라의 변경을 습격하여 군사 8천명을 포로로 잡았고 우명산성을 함락시켜 신라의 북진을 차단하였다. 그리고 다시 여러 차례에 걸쳐 신라와 백제를 공격하여 양원왕 때 잃었던 아리수 이북의 영토를 거의 회복하였다.

610년, 일본에 승려 담징, 법정을 보내 종이, 먹의 기술을 전하였고 담징은 일본 호류사 금당내부의 벽화를 그렸다. 그 무렵 수나라의 황제로 등극한 양제는 돌궐에 압박을 가하여 돌궐 왕이 장안으로 입조토록 하였다.

이렇게 되자 수나라에 조공하지 않는 나라는 오로지 고구려밖에 남지 않았다. 수 양제는 여러 차례에 걸쳐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라고 요구하였으나, 고구려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612년, 살수대첩 : 수나라 양제가 직접 113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왔는데 이때 명장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활약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613년, 수 양제는 고구려를 재차 침공하였으나 요동성과 신성이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본국에서 반란을 벌어져서 급히 퇴각하였다.

614년, 수 양제는 전국의 군사를 소집하여 다시 고구려 침공을 하려했으나 수나라 군대는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이 사실을 간파한 영양왕은 화친을 제의했고(상식적인 문제다), 수 양제는 화친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후로도 수 양제는 고구려 침략을 몇 번이나 계획했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모두 실행되지 못했으며 무리한 잦은 대외 원정으로 경제가 피폐해지고 곳곳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는 등 수나라는 점차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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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영뤼 칸

(Yeongli Khan)

 

무쿠리의 제27대 칸(재위 618∼642). 이름 게르무(Germu,建武)·게르친(Gerchin,建成). 링얀 칸의 이복동생. 즉위하자 니칸의 당왕조로부터 조공을 받고 수왕조 양왕(煬王)의 무쿠리 공격 때 포로가 된 니칸인들(漢人)을 송환하고 무쿠리의 포로를 찾아왔다. 624년 당왕조를 정벌하고 당왕조의 고조(高祖)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631년 서북쪽의 부리야트헤첸(扶餘城)으로부터 서남쪽 바다에 이르는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축조를 시작(현재 내몽골지역과 고비사막에 '고려장성'이라는 명칭으로 일부 남아있다.), 예른케 소만(Yerke Soman,淵蓋蘇文)에게 성 축조(役事)의 감독을 맡겼으나 그의 반역으로 살해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천리장성이라 하고 있지만 기실 만리장성이 고구려가 축조하였고 고려가 마무리한 것이다.그래서 지금도 고려장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27.영류왕(재위618년~642년) : 평원왕의 차남, 영양왕의 이복동생이고, 휘는 건무, 성이다.

618년, 영양왕이 후사 없이 서거하자 왕위에 올랐다.

당시 중국 대륙에서는 수나라가 몰락하고 당나라가 건국되었다. 당나라는 각지에서 할거하는 군벌을 제거하는 등 통일 작업에 몰두하면서 외적으로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했다. 영류왕의 온건주의적 성향은 자연스럽게 친당 정책으로 이어졌고 두 나라는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가졌는데 전쟁 당시 잡혀갔던 양국의 포로들을 교환하고 도교를 수입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교류하였다.

626년, 당 태종은 제위에 오르자마자 영토 확장 작업을 가속하였는데 고구려를 비롯한 백제, 신라 등 주변 나라들이 모두 당나라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는 한편 당나라와 화친하였다.

631년, 영류왕은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하기위해 부여성에서 발해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축조하였다. 이 작업을 지휘하던 연태조가 축성 과정에서 지병으로 사망하자 아들 연개소문이 아버지 뒤를 이어 감독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638년, 영류왕은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의 북쪽 변경의 요지인 칠중성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고구려가 신라와의 싸움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 당나라는 동돌궐을 멸망시키고,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왕태자를 장안에 입조시킬 것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조정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라져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강경파는 왕태자를 장안에 보내지 말 것을 주장, 온건파는 왕태자를 보내 당과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할것을 주장)

640년, 영류왕은 결국 온건파의 주장을 따라 왕태자를 장안에 보냈고 당 태종에게 서신을 보내 왕태자를 당나라의 국학에 입학시켜 줄 것을 청원하였다.

641년, 당 태종은 왕태자의 예방에 답하기 위해 직방낭중 진대덕을 고구려에 보내겠다는 서신을 보냈다. 진대덕은 고구려에 들어와 고구려의 지리를 자세히 관찰하는 것은 물론, 각 성에 배치된 군사력까지 면밀하게 조사하였다. 그후 당나라에 귀국한 진대덕은 태종에게 고구려를 칠 것을 간언하였다. 한편, 영류왕의 친당 정책으로 강경파의 불만은 점점 커져가고 있었는데 영류왕을 비롯한 온건파에서는 그러한 강경파의 불만을 무시했다. 급기야는 천리장성 축성 작업을 중단하자는 주장이 나왔고 천리장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던 연개소문이 이에 강하게 반발하였다. 이에 영류왕과 온건파 대신들은 연개소문을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영류왕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챈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비롯한 온건파를 척결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642년, 연개소문은 천리장성으로 떠나는 열병식에 조정 신하들을 대거 초청한 뒤 모두 참살하였고 군사를 이끌고 왕궁으로 들이닥쳐 영류왕을 시해하였다. 태종은 영류왕이 죽었다는 전갈을 받고 곧바로 애도 의식을 거행하고 지절사를 고구려에 보내 조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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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부르진 칸

(Burjin Khan)

 

무쿠리의 마지막 제28대 칸(재위 642∼668). 이름 칭자이(Chingjai). 영뤼 칸의 아우·타이손 칸의 아들. 영뤼 칸을 시해한 예른케 소만(Yernke Soman,淵蓋蘇文)의 추대로 칸위에 올랐다. 643년 예른케 소만의 주장에 따라 당왕조에 사신을 보내라고 명을 내려 그들이 도교(道敎)를 바치게 하였다., 수크다르(Sukdar,叔達) 등 도사(道士) 8명과 함께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을 받아들였다. 645년 당왕조의 태종이세민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예른케 수만이 독전, 격퇴하였다. 661년 당왕조 시유 칭바이(蘇定方)가 당왕조의 명령을 받은 쉬르아군과 합세하여 피르엔성을 공격하였지만, 다음해 예른케 소만이 다시 격퇴하였다. 그러나 예른케 소만이 병사한 뒤에 내분으로 국정이 어지럽자, 668년 쉬르아-당왕조 반란은 다시 무쿠리를 침입하였다. 당시 예른케 소만의 장남 난새이(Nansei,男生)는 무쿠리를 배반하고 당왕조에 협력한 때이므로, 둘째 아들 난게이(Nangei,男建)가 마리치(Marichi,莫離支)로서 쉬르아-당왕조연합군을 맞아 싸웠다. 그러나 피르엔헤첸이 함락되면서 무쿠리는 동북방일부지역이 남아 저항하다가 바르하이(발해) 제국을 건국하게 된다., 어쨋든 그는 당왕조로 압송되었다. 뒤에 당왕조로부터 사평대상백원외동정(司平大常伯員外同正)에 책봉되었으며, 677년(문무왕 17) 요동주도독 조선왕(朝鮮王)에 봉해졌다. 그 지역의 무쿠리인들과 손을 잡고 무쿠리제국 부흥을 도모하다가 실패하여, 681년(신문왕 1) 공주(州:쓰촨성 峽)에 유배되었다. 뒤에 당왕조의 고종은 그를 위위경(衛尉卿)으로 추증하였으나 명목상이었을 뿐이었다. 이후 바르하이 제국이 건국되어 요동과 요서를 평정하고 당왕조를 제압한다.

 

28.보장왕(재위642년~668년) : 평원왕의 셋째 아들이자 영류왕의 동생인 태양의 맏아들로 휘는 장, 보장이다.

642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이 그를 새 왕으로 추대함에 따라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연개소문은 스스로 대막리지에 오른 후에 정권을 장악하였고, 보장왕은 그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이에 따라 고구려에는 연개소문의 일인독재 체제가 성립되고, 이는 고구려의 멸망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된다.

643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구하여, 숙달 등 도사 8명과 함께 <노자도덕경>을 받아들였다. 한편, 신라에서는 백제의 공격으로 요지인 대야성(합천)을 빼앗기는 등 백제와의 공방전에서 점차 불리해져갔다. 신라의 선덕여왕은 고구려에 구원병을 요청하였으나 연개소문은 그 요청을 거절하였고 이에 신라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와 고구려의 침략으로부터 도와 달라며 원군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고구려 침략을 계획하고 있었던 당 태종은 흔쾌히 신라와 손을 잡게 된다.

고구려는 그들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전국에서 군사를 모집하고, 변방의 성곽을 수리하며 군사 훈련을 하는 한편 당나라의 군대가 바다를 건너 평양성을 공격할 것을 염려하여 요동과 서해안 일대의 수군 경비를 강화하였다. 또한 백제와 손을 잡고 신라를 협공하였는데 당나라는 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으면 군사를 일으키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고구려는 과거에 신라에 빼앗긴 지역을 되찾기 전에는 전쟁을 멈추지 않겠다며 당나라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645년, 당 태종의 30만 군대가 고구려의 성 10여 개를 함락시키고 안시성으로 진격하였는데 연개소문은 고연수와 고혜진에게 15만의 군사를 주어 안시성을 지원하도록 하였다. 당 태종은 고연수에게 사람을 보내 신하의 예만 갖춘다면 빼앗은 영토를 모두 돌려주고 돌아가겠다고 회유했고 이에 고연수는 당 태종이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판단하고 싸움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태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2만6천명의 기습병을 조직하여 고구려군을 급습하였고 그 과정에서 3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직할부대 3만 6천 명과 함께 당나라에 투항하였고, 나머지 병력은 신성과 건안성으로 퇴각하였기때문에 안시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그래서 당나라군이 안시성을 일제히 공격하였지만 성주 양만춘의 뛰어난 용병술에 힘입어 시간이 지날수록 안시성의 사기는 점차 올라가는 반면 당나라군은 사기가 저하되기 시작했다. 당 태종은 안시성보다 더 높은 토산을 쌓아 공격도 해보았으나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갔고 오히려 이 작전으로 많은 물량과 병력을 잃고 말았다. 당의 패배가 거듭되는 가운데 겨울이 다가와 당나라군은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퇴각하였는데 퇴로에서 많은 동사자가 발생했으며, 이에 따라 군사들이 대거 몰살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하였다. 당 태종은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이후 몇 차례에 걸쳐 공방전을 벌였으나 싸우는 족족 퇴각하였다.

649년, 당태종은 고구려 정벌을 중지하라는 유시를 남기고 죽었고 이에 따라 두나라는 휴전 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고구려와 신라의 전쟁은 지속되었으며, 무열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급파하여 원군을 요청하자, 당나라는 군사를 내주어 고구려를 다시 공격하게 하였으나 패배하였다.

658년, 당 고종은 정명진과 중랑장 설인귀에게 군사를 내주어 다시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패하고 퇴각하였다.

661년,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연합군은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로 진격하였고 당 고종은 4만4천명의 병력을 징발하여 고구려의 변방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백제부흥군이 나당연합군의 후미를 치는 바람에 신라군이 다시 남진하여 백제 부흥군과 싸워야 했으며, 그 상황을 이용하여 고구려는 변방에 병력을 집결시켜 당나라군을 격퇴하였다. 이에 당나라군은 다시금 대군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향해 진군하였으나 패하였고 당나라 조정에서는 고구려와 휴전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으며, 당 고종은 일시적으로 고구려 공략을 중지하였다.

그해 당나라는 다시 고구려 정벌에 나섰는데 10만 대군의 당나라 함대가 대동강을 타고 평양성을 포위하여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고 서쪽에서는 당나라 육군이 압록강 일대를 향해 밀려왔다. 이에 연개소문은 맏아들 연남생에게 군사를 내주고 압록강 일대를 지키도록 하였으나 패퇴했다.

662년, 당나라군은 연개소문이 이끈 고구려군과의 사수 전투에서 패배하여 몰살되었으며 평양성을 공략하고 있던 당군대는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황급히 퇴각하였다. 고구려는 당나라와 전투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당이 신흥 대제국으로서 융성한 것과는 반대로 60여년에 걸친 수, 당과의 전쟁으로 국력은 쇠퇴해 가고 있었다. 백성의 생활은 파탄에 직면했고, 국가 재정은 탕진되었으며 동맹국 백제의 멸망과 고구려 지배층의 내분은 더욱 그 국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666년,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사이에 막리지의 자리를 둘러싼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맏아들 연남생이 대막리지 직위를 이어받았지만, 연남건과 연남산은 형의 권력 독식에 불만을 품었다. 그래서 연남생이 변방을 순행하는 사이 왕명을 빙자하여 연남생의 측근을 없애고 연남생을 소환하려 하였고 이에 연남생은 아우들에게 쫓겨 국내성에 가서 당 고종에게 항복하였다.

그 후 보장왕은 연남건을 대막리지로 삼고 조정을 재편으나 이미 많은 신하가 제거되어 어수선하였고, 민심도 연남건 형제에게서 등을 돌렸다. 당 고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남생을 앞장세워 고구려를 재침략하도록 하였다.이렇게 되자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한반도 쪽의 12개 성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해 버렸다.

668년, 당나라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여러 성과 마을이 함락되었고, 보장왕이 머무르던 평양성까지 함락되고 말았다. 보장왕은 항복을 선언하며 당나라로 끌려갔고 결국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고구려 멸망 이후 검모잠, 안승등의 고구려 부흥 운동이 지속되었으며, 안시성과 요동성 및 일부 요동의 성들은 671년까지 당나라에 항전하였다.

보장왕은 당 고종으로부터 벼슬을 하사받고, 그들이 평양에 설치한 안동도호부에 머물렀는데 고구려 유민의 부흥운동이 지속되자 당은 677년에 보장왕을 요동도독 조선군왕에 봉하고 요동에 머무르게 하여 고구려 유민을 무마하고자 하였다. 이때 그는 고구려의 재건을 노려 말갈족과 함께 군사를 일으키려다가 발각되어 681년에 양주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출처] 고구려왕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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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영

주몽(朱夢)을...두만...투만...투멘..이라 하니...왜 돌궐족들이 황제를 "투멘"이라 했는지 금방 답이 나옵니다...추모왕"이나...주몽"이나...같은 망이였던겁니다...두고두고 감상좀 해 봐야 겠습니다.19:01

 

 

홍진영

무쿠리 역사로 보면...돌궐(투르골)의 원 주거지역은...제 예상대로...알타이 서북지역 토하 공회국 자리였군여...음19:03

 

현상태

좋은 자료입니다. 중국어, 한국어, 몽골어 한국사/, 중국사/, 몽골사/를 잘 섞어 놓았습니다. 제가 보기엔 몽골어와 중국어에 좀 능한 현 중공의 내몽골 거주자가 한국에 유학 와서 쓴 글로 보입니다. 하지만 일부내용은 매우 타당성이 있습니다. 朱蒙이 음가이며 투먼으로 발음된다는 것은 참으로 일리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홍진영 선생님은 범어를 배우시면 상당한 실력자가 되리라 예상해 봅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기대하겠습니다.20:21

[대륙조선사연구회]

 

 

[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