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아발스(Avars) 서양에 알려진 고국려 국명

한부울 2009. 1. 24. 00:17
무쿠리칸(고구려 한)들의 계보 http://blog.daum.net/han0114/17045482

 

아발스(Avars) 서양에 알려진 고국려 국명

[한국청소년신문사]2008/07/31 오전 9:05

 

 

 

돈황석실에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발견하여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프랑스 동양학자 Paul Pelliot는 [Notes on Marco Polo]의 "Cauli"항에서 "그것은 Kao-li, Corea"라 하고, "중앙 아시아에 알려진 고대의 또 다른 국명은 산스크리트어로 무쿠리(Mukuri)라 하고 티베트어로는 무그리그(Mug-lig)"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무쿠리"는 당(唐)의 예언(禮言)이 편찬한 [범어잡명]이란 책에 있는 것을 인용한 것이다. [범어잡명]에는 "고려(高麗), 무구리(畝俱理)"로 되어 있고, 그 아래 고대 산스크리트어가 표기되어 있다. 이 "무쿠리"가 후에는 음이 변하여 "메르게드, 메르키트, 또는 메크리트"등으로 변한다. [몽고원류]의 독일어 번역판에서는 "Ssolongos Merged"라는 것이다. 어떤 서양학자는 "무쿠루(Mukkuru)"라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틀렸다.(E.H. Parker, [A Thousand Years of the Tartars].) 이 국명은 유연국(柔然國)의 시조라는 "목골려(木骨閭)"의 중국식 발음에서 유래한 것이다. "-ru"가 "려(閭)"의 음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려(閭)"에는 "-ru"가 아니라 "-ri"음니 있다. "유연국"은 실은 고구려의 "무쿠리"국인 것이다. 그 영토는 지금의 몽골에서 서양의 비잔틴제국에 까지 뻗어 있었다. 또한 "말갈(靺鞨)"은 "메르게드"의 한문식 표현이다.


원(元)의 쿠릴라이칸(世祖) 시대에 몽골의 일부였던 패르시아의 역사학자 라시드 앗딘(Rashid al-Din)은 백과사전적 세계역사를 저술한 학자다. 그의 책 가운데 [부족지]가 있다. 그 내용중에 "메르키트 종족"이란 항목이 있다. 메르키트는 일명 "메크리트(Mekrit)"라고도 한다면서, 그 종족을 구성하는 부족으로 네개를 소개하고 있다. "아우할(Auhar), 무단(Mudan), 투다크린(Tudaqlin), 지운(Jiun)"등이다. (최근 이 책은 한국어 번역본이 나왔는데 "아우할(Auhar)"을 "우하즈(Uhaz)"라고 적고있다. 아마 다른 필사본을 근거로 한 것 같은데, 라시드 앗딘의 책은 19세기말 러시아의 Berezine가 석문하고 러시아어로 번역한 것이 가장 권위가 있고 정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인은 이것을 근거로 한다.) 러시아의 학자인 미놀스키(Minorsky)가 고대 페르시아의 지리서를 번역, 주석한 책이 있는데 그 중에 "사릴(Sarir)"이란 나라에 관한 설명이 있다. "사릴"은 "산상의 황금 보좌의 군주"란 뜻의 아랍어를 줄인 말이다. 그리고 이 사릴국은 "위대한 정복민족"인 "아발스(Avars)"가 지배하는 나라다. 지금의 코커서스 지방의 다게스탄(Daghestan)에 있었다. 그의 고증에 의하면 "아우할"이 고대 아르메니아어를 거치면서 음이 변하여 "아발"이 되었다고 한다. 민족을 뜻할 때는 복수어미가 붙어 "아발스(Avars)"가 된다. 서양학자들 간에는 오래 전 부터 유연국이 아발스국으로 알려져 있었다. 아랍인 기록에는 "아바레스(Abares)"라고도 하고 러시아 최초의 [편년기]에는 "오브리(Obry)"로 표현되기도 한다. [몽고원류]의 몽골어 원문을 독일어로 번역한 책에서는 "소롱고스 메르게트 (Ssolongos Merged)"가 바로 "메르키트 종족"인 것이다. [원조비사]에서는 메르키트 앞에 "소롱가", 한문본에는 "고려"가 빠져있다. 몽골어의 원본을 없앴다가 후에 몽골이 망한 후에 재구성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몽고원류]나 [몽고황금사강]등에는 모두 메르키트 앞에 고려 또는 소롱가란 표현이 있다. 


[부족지]에 의하면 징기스칸의 두번째 황후이고 서역 원정에 동행한 "쿠란(忽蘭) 카툰"은 고려 메르키트족의 왕인 "다일 우순"의 딸이다. 징기스칸은 후에 쿠란 카툰의 아버지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죽여 버리고 그 부인을 징기스칸의 아들인 "오고타이 칸"에게 준다. 그 녀가 "투르게네 카툰"이다. 딸은 아버지인 징기스칸이 차지하고, 그 딸은 징기스칸의 아들에게 준 것이다. 그들사이에서 네명의 자식이 태어나는데 첫째가 세번째 칸이되는 "구육 칸"이다. 그의 황후도 역시 메르키트 출신의 "오굴 카이미시 카툰"이다. 적어도 라시드 앗딘이 죽기 전 까지의 몽골 칸의 황후(카툰)은 대개가 "소롱고스 메르키트 종족" 출신이다. "소롱고스(Solongos)"는 물론 몽골어로 고려를 지칭하는 말이다. 여담이지만, 일본어의 [고어대사전]에는 "무쿠리고쿠리"란 단어가 있다. 그 설명에는 "무쿠리"는 몽고(蒙古)를 뜻하고, "고쿠리"는 고려(高麗)를 뜻한다고 되어 있다. 이 말이 생긴 시기는 몽골군이 일본을 침입할 때 생긴 말인데, 보채는 아이를 달랠 때 "무쿠리고쿠리"가 온다고 하면 어린애가 울음을 그쳤다고 한다. "몽골"이 실은 "무쿠리"에서 유래한 국명이라는 증거다. 그 뿐이 아니다. 요(遼)와 금(金)이 모두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했다. 중앙 아시아에서 몽골이 망한 후에 티물(Timur)이 몽고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제국을 건설했으며, 그 후손이 인도에서 "무갈 제국"을 새운다. 영국의 식민지가 될 때 까지 존속한다. 고구려가 얼마나 위대했으면 그 정통을 이어 받았다고 자처하는 나라들이 거의 20세기에 까지 있었겠는가.


아발스로 알려진 고구려는 A.D. 461-5 년에 비잔틴제국 인근의 "사빌족(the Sabirs)"를 서쪽으로 몰아 내기도 했다. A.D. 551 년에 다시 비잔틴제국을 공략한 적이 있는데 배후에서 나타난 돌궐족(T'u-chueh)의 공격을 받아 공격은 실패로 끝난다. 비잔틴제국의 역사학자 테오피락트(Theophylactus Simocatta)가 613년에 저술한 [역사]란 책에 의하면 "일부는 무크리(Mouxri, Mucri)국으로 도주하고 다른 일부는 탁발씨(拓跋氏-Taugast)에게로 도망한다." 즉 유연국과 북위(北魏)로 갔다는 것이다. 테오피락트의 "무크리"가 무엇이냐에 관해 오랫동안 서양학자들은 말을 아꼈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 [역사]를 영어로 번역한 책에서 "Mucri는 반도 고려"라고 주석하고 있다. 즉 Mukuli가  Mouxri(Mucri)로 변했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유연국에서 야장으로 지내던 신라가 반란세력을 모아, 고구려에 저항하면서 돌궐이 성립한 것이고 보면, 두 나라의 전쟁은 서양에서 까지 진행된 샘이다. 번역의 주석이 "반도 고려(peninsula Korea)"라 한 것을 보면 고대 삼국이 반도에 한정되어 있었다는 고정 관념은 쉽게 깨지 못할 것 같다. 테오피락트의 기록이 갖는 또하나의 의의는 중국정사가 "북위(北魏)"와 유연국이 서로 적대 관계인 것 처럼 기술해 놓았지만 실은 두 나라는 같은 고구려의 지배를 받은 나라들이란 것이 명백해 진다. 실제로 유연국의 공주가 북위로 시집 온 사실은 있다. 그러나 테오피락트의 책에 의하면 그런 관계는 일회성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남제서]에는 "북위가 기병(騎兵)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의 경내에 침입했다가 백제의 왕이 이끄는 장군들에게 대패한다"는 기록이 있다. 보병도 아니고 기병이 백제를 공격할려면 고구려를 거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백제는 반도에 있는 백제가 아니다. 그 때에 백제는 "요서"를 경략하여 점거하고 있다는 때이다. 따라서 백제는 대륙의 서북에 있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는 [위서.서역전]에 있다. "무령왕"의 능이 발국되었는데 그 안에 있는 지석들 어디에도 "무령"이란 이름은 없다. 어릴 때 이름인 "사마왕(斯麻王)" 이라고만 되어 있다. [일본서기]에는 백제 장군들 성 가운데 "동성자(東城子)"라는 석자의 성을 가진 사람이 등장한다. 현행의 표주교감본 25사의 [위서]에는 "동성자우량(東城子于亮)"이란 이름이 보인다. 고유명사는 모두 옆줄을 그어 표시를 하고 있는데 현행 [위서]에는 "동성자"와 "우량"에 각각 옆줄을 그어 놓았다. 다시말해 "동성자우량"은 백제인이란 뜻이다. [일본서기]에 보이는 "동성자"란 성이 여기에도 쓰여 있기 때문이다. 동성자를 일본어로 읽으면 "히가시기시"가 된다. "키르기스"와 매우 음이 가깝다. "무령(武寧)"은 "우량(于亮)"과 음이 비슷하다. 둘 다 "우링(U-Ling)"으로 읽었을 것이다. 만약 이 가설이 성립한다면 "무령왕능"의 백제왕과 실제의 "무령왕"은 다른 인물이다. 동성자우량과 무령왕(시마왕)의 시기는 513년 경으로 시기도 일치한다. 두 왕을 [삼국사기]는 한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뿐더러 능에서 발견된 기록에 죽고나서 추증하는 시호인 "무령왕"이란 이름이 없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나아가서 사마왕의 능에서 나온 지석에는 황제가 죽었을 때나 사용한다는 "붕(崩)"이란 자가 쓰이고 있다. 키르기스에 의하여 견곤도호부가 설치되는 곳이다. 백제가 서역에 있었다는 것은 중국 학자들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인다. [어석]이란 금석문의 고전을 쓴 엽창치가 백제승려가 기증하고 갔다는 불경을 봉안한 탑에 쓰인 내용의 진위를 고증하면서, 백제승려의 귀국길장안에서 옛 고창국이었던 서주(西州)를 거쳐 "서쪽으로 간다"고한 것을 두고,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은 백제인이 맞다고 결론 지은 글이 있다. (엽창치, "香泉寺經塔跋," 顧燮光 著. [몽벽이석언]권5.)


아발스(the Avars)는 일부가 카스피해 연안 에서 "사릴"이란 국가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후에 도착한 아발스는, 지금의 헝가리가 있던 고대의 로마 속주였던 "파노니아(Panonia)"에서 대제국을 건설하기도 했다. 이 제국은 유럽을 통일한 샬르르 마뉴 대제에 의해서 정복당한다. 신성로마 제국의 샤를르 마뉴 대제는 파노니아의 아발스 제국을 정복한 것이 유럽통일의 마지막 정복사업이었다. 그것이 A. D. 795년이고 A.D. 800년에는 신성로마재국의 황제로서  로마에서 대관식을 거행한다. "아발스 제국"을 멸망시키고서야 비로소 "신성 로마 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물론 고구려가 언제 부터 "유연국"을 가졌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도 있다. 이 점은 [삼국지.위지.고구려전]에서 해답을 구해야 한다. 건안중(建安中- A.D. 196-219 년)에 고구려왕 이이모(伊夷模)가 작은 아들이면서도 큰아들 발기(拔奇)가 불초(不肖)하다고 나라사람들이 형을 두고 동생인 이이모를 왕으로 추대했다. 마침 그 때 공손강이 군대를 출격시켜 고구려를 파괴하고 읍락을 불태워 버린다. 형인 발기는 형이면서 왕이 못된 것을 원망하던 차라 공손강에게 가서 항복하고 비류수에 돌아가서 산다. 즉 "홀본"으로 돌아갔다는 뜻이다. 이 때 이이모는 "다시 새로운 나라를 만든다 (更作新國). 지금 살고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발기도 결국엔 요동으로 가서 사는데, 구려에는 그 아들을 남겨 두었다." 맥락으로 봐서는 이이모가 "갱작신국"했다는 곳이 요동이고, 발기도 마침내 그 동생인 왕에게 가서 동생인 왕에게 승복한다. [남사]등이 고구려가 "요동을 점거했다는 것"이 이 요동일 것이다. 요동은 지금의 요동반도와는 전혀 무관하다. [삼조북맹회편]에 의하면 송의 두 황제가 금(金)나라에 잡혀갔을 때 "오국성(五國城)"일대를 요동이라 했다. 여기는 위굴이 있던 곳이다. 명의 도종의가 쓴 [철경록]에는 "고려는 북(北)을 별십팔(別十八)이라 한다. 중국말로는 연오성(連五城)이다."라 한다. "오국성"이나 "연오성"은 "베시바리크(Beshibalik)"를 말한다. 한문으로는 "別十八"이라고도 표현한다. 같은 곳이다. 다시말해 이이모가 "갱작신국"한 "요동"은 대륙의 서북이다.


이병도는 이 "갱작신국"을 평양으로 천도한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오다. 분명 "갱작신국" 즉 "다시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다"고 했는데 어째서 고구려 삼경(三京)의 하나인 평양으로 천도한 것을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다"고 했겠는가. 또한 그 표현도 "다시(更)" "새로운 나라(新國)"를 "만들었다(作)"고 했다. 마치 주몽이 홀본에 건도하여 나라를 새운 것과 같은 것이다. 고구려가 새로운 나라를 정복했으면 새로운 영토를 얻은 것이지, 어째서 나라를 아예 새로 만든 것이라 표현했겠나. 예컨데 [위지.동옥저전]의 경우는 분명 새로 영토를 획득한 것이었다. 전 중국대륙을 지배하던 고구려가 크기에 있어 그에 못지 않는 "새로운 나라를 다시 하나 더 만든 것"이다. [위서(魏書]]의 표현에 의하면 그 나라는 군장을 "카칸(可汗)"이라 하는데 중국의 "황제(皇帝)"와 같은 것이라 했다. 또 [구당서]에 의하면 고구려는 제사가 많은데 "카칸신(神)"의 제사도 모신다고 한다. [한원]에는 "황제들을 동맹의 사당에 줄 세워 놓고 음식을 차려 제사를 지낸다(饗帝列東盟之祠)"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유연국이 304년에 사륜(社崙)이 왕이 되어 서역 원정을 떠나 "이스텔(the Ister)강" 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7년 만에 돌아 와서 처음으로 "카칸"이 된다.


고구려가 망한 곳도 유연국에서다. 수양제가 남조의 진(陳)을 멸망시켰을 때 고구려는 으로 간 것이다. 따라서 을지문덕유연국의 카칸이다. [통감고이]에 의하면 "을지문덕"의 성은 "위지(尉支)"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위지(尉遲)씨"이다.  중아아시아의 "코탄(Khotan)국"의 왕이다. [수서]에 의하면 수고조가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떠나기에 앞서 장문의 조서를 내리는데 그 내용중에 "지난 해에 리찰계대(利察稽大)는 고려(高麗),말갈(靺鞨)에게 격파 당했고, 사비설(娑毘設)은 또한 흘지카칸(紇支可汗)에게 피살 당"했다고 한다. 고려와 말갈이 같은 나라이고, "흘지카칸"은 [수서]와 [삼국사기]가 말하는 "을지문덕(乙支文德)"일 수 밖에 없다.  고구려의 관등은 9 품까지 있는데 말년에는 2 품막리지인 연개소문만 등장한다. 1 품은 "토졸(吐拙)"이란 명칭만 있지 역사에는 한번도 누구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유연국의 "카칸"이기 때문에 고구려와 결부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장군 이적(李勣)은 본성이 서씨(徐氏)다.  그가 죽고 나서 당 고종은 그의 공을 높이 사서 생전에 전공을 세운 세곳의 산 모양으로 그의 묘역을 조성했다. 그 산들은 철산(鐵山), 음산(陰山), 그리고 울독건산(鬱督건山)이다. 고종이 죽고 나서 무후(武后)가 제위를 차지하자, 이적의 손자는 본성을 회복하여 서경업(徐敬嶪)으로 행세하면서 반란을 일으킨다. 화가 난 무후는 그 할아버지 이적의 묘총을 파 없애게 했다. 그러나 깊은 안개가 3일 밤낮을 걷히지 않아 묘를 굴착하는 것을 중지했다. 송(宋)의 왕당이 저술한 [당어림]에는 이 사실을 기술하면서 이적의 묘에 조성한 세개의 산은 모두 고구려의 산들이라 한다. "울독건산"의 "-건산"은 두 개의 한자가 모두 산을 의미한다. 한사군의 하나라는 현토는 "원토(元兎)"라고도 쓴다. 여기의 "원"자는 고음이 "원"이 아니다. [설문]에 의하면 "울(亐)"로 발음하라고 한다. 고구려는 오음(吳音)의 원칙으로 한문을 읽었으니까 "L"로 끝나는 종성은 "T"로 발음한다. 따라서 "元兎"는 "웃토(Ut-to)"가 된다. "울독"도 "웃도(Ut-to)"이다. 두 단어는 같은 음인 것을 알 수 있다. [한서.지리지]는 고구려현을 현토군의 속현으로 편입했다고 했으니 결국 "홀본"과 "현토"는 같은 곳이란 뜻이다. 즉 "울독건산"은 고구려의 "현토산"이란 의미다. 학자들은 이 산은 현재 몽골의 북쪽에 있는 항애산(杭愛山)으로 비정한다. 이 산의 남에는 "세렝가(Selenga)강"이 흐른다. 이 강은 카라코룸산에서 발원하여 동으로 흘러가다가 바이칼호수 부근에서 북상하여 동쪽에서 바이칼호로 유입한다. 수양제의 "살수(薩水)"는 당 시대에는 "살하수(薩賀水)"로 나오고, 돌궐전에서는 "사릉수(沙陵水)"로 나온다. 모두 같은 강을 지칭하는 것이며 바로 "세렝가강"을 의미한다. 수양제의 백만대군이 몰살했다는 강은 바로 이 "세렝가강"에서 였다. Selenga강이 "살수(薩水)"인 것이다. 수양제의 100만 대군을 수장시킨 장군은 "을지문덕"이 아니라  "위지문덕(尉遲文德)"이며 "흘지카칸(紇支可汗)"이며 중국의 황제와 동격인, 고구려의 1 품이었다. 막리지인 연개소문 보다 지위가 높은 장군이다.  [한원]에 인용된 [고려기]에 의하면 막리지는 "마하하라지(莫何何羅支)"라고 읽었다. 고대 산스크리트어의 "마하(Maha) 라지(Raj)"를 강한 후음으로 읽었다는 뜻이다. "마하라지"는 "대왕(大王)"을 의미한다.


아발스가 서양으로 진출하여 현지에서 식민 국가를 건설했다면 그 후손이 있었을 것이다. 얼마전에 체코인의 DNA를 검사한 결과 상당수가 아발의 DNA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릴"을 차지했던 아발스는 처음에는 기독교로 개종했으나 후에는 이스람교로 개종했다. 그들의 언어는 한 때 다게스탄 일대의  국제 공용어로 쓰이기도 했다. 사릴의 아발스는 비록 독립국가는 없어 졌지만 그 인근에서는 대대로 사회적 지도계급으로 대접 받았다. 러시아의 에카테리나 대제가 남으로 훅해를 확보하고저 한 시기를 역사소설로 저술한 책이 있는데, 그 내용중에는 여전히 아발스는 귀족으로 행세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술되어 있다.(Lesley Blanch. [The Sabres of Parad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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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3 개

   

김재만

Avar가 차지했다는 '사릴'이 Sarkel인 것 같습니다. 흑해와 카스피해의 사이에 존재했었고, 아조프해로부터 동쪽으로 220Km위치해 있으며, 현재의 지명은 Volgodonsk로 표시됩니다.. 과거 6세기에는 이 지역이 Sarkel로 표시되고, Astrakhan은 Atil로 표시됩니다. 08.09.28 20:16


대불가리아제국의 Kubrat왕은 바로 이 Avar와 갈등을 겪습니다. Avar의 왕을 죽였다는 기록도 본 것 같습니다.(확실치는 않습니다.)... 연개소문과 고구려왕의 갈등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저도 Kubrat왕의 기록을 조사하면서 Kubrat가 연개소문 이라면, Avar가 고구려 조정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08.09.28 19:57


Sarkel은 북해의 바이킹이 Khazaria를 멸할때, 이용했던 수로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흑해에서 아조프해를 지나, 바로 물길로 카스피해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물길 바로 옆에 위치하였었습니다.... 당시 물류의 중심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08.09.28 20:05


현재는 이곳에 이상한 동물모양의 호수가 존재합니다. 이것을 강으로 불러야 하는지?... 하늘에서 보면, 개와도 비슷하고, 어떻게 보면, 용(dragon)하고도 비슷합니다.

08.09.28 20:07


살수라는 지명은 어떤 문헌을 참고 하였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영주가 지금의 페르가나 지역일 수 있어도, 더 고대에는 위치가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가지 접근 방법이 필요한 것입니다... 08.09.29 19:59


홍진영

저도 셀렝게가 살수가 아닌가를 고심해 봤었는데...물론 음운학적으론 같은 언어로 보이고...현도는 몽골 동북부라 봐서...상당히 소중하신 말씀 같습니다만...너무 북부 오지라서 후보지론 좀 미흡합니다...수당이 현 외몽골 현도 지역으로도 진격한 기록은 있읍니다만...대 병력들이 전면전을 치룰 조건은...서역의 본국과의 수송로가 확실히 보급됄 수 있는...가장 가까운 국경지대로 보입니다...시르달이아가 맞을듯 합니다. 08.09.29 08:55


시르다리아 상류 의 그 호수들이 터지면...현재도 우즈벡평원이나 카자흐 남부 강변따라 발달한 도시들이 물에 잠깁니다...무엇 보담도...수당이란 명칭은...오늘날도 서남아에 많은 국명들이니...수당의 황가는 비록 북방족일진 몰라도...수당의 군사들은 대부분 서남방계일 것이라 보이니...비록 여름에 정벌했다손 쳐도...북방지역은 아주 낯설었을 겁니다...200여만의 군대가 엄청난 거릴 이동하기엔 산악고지대지 보급등...엄청난 난관이 따릅니다. 08.09.29 08:56


참고로...현 외몽골의 동북부...수도인 울란바타르 북동 전 지역이...일반적으론 헨티란 지명으로 불리웁니다...전 이곳이 현도(현토)라고 보며...셀렝게는 현 외몽골의 가장 북부에 있는 강입니다...아르항가이 산맥 북쪽...러시아와의 경계를 흐르며...동으로 흘러 톨강과 합류 북쪽 바이칼로 들어갑니다. 08.09.29 08:57


이 강을 건너 북쪽에서 고구려 도성으로 보이는 장안(평양=서안)을 치려면...뭐 강이야 그렇다 치고...일단 거대한 카자흐알타이..러시아알타이...산맥들을 한참 북으로 돌아...병풍같이 길게 외몽골 서북부를 감싸는 사얀산맥(북방의 또 다른 장백=향산?)을 넘어야 합니다...여긴 여름에도 산정상은 설산입니다...이 산맥들의 면적과 길이는...거의 인도 대륙 한 덩어리 수준이라 봐야 합니다...히말라야 산맥 통과보다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08.09.29 08:58


천신 만고 끝에...사얀산맥도 넘고..셀렝게를 건너 ...아르한가이 산맥도 통과했다손 처도...외몽골에선 장안 갈 길은...다시 극동으로 돌아 현 만주를 거처...다시 서쪽으로 가는 길입니다...유라시아 대륙을 한 바퀴 돌아가야 합니다...몇 십만 대군이 온전히 행군하긴 좀 그렇다 보입니다...시베리아 벌판엔 고구려의 속령들이 엄청 많으니...희생도 많을 테고여...울란바타르를 경유해 고비사막을 넘어도...또 중원북부의 고원지대를 만납니다...천상...몽골 서남부의 호부도 호수등을 거쳐...우루무치 북단으로 진입해야 합니다...그게 젤 쉽고 경재적인 코스입니다...어짜피 그럴 거였으면...원조 요동으로 보이는...이르티쉬 상류를 타고.. 08.09.29 01:30


카자흐 북부의 고구려 잔당들만 제거하면서...우루무치 북단으로 내리 쏘면 그만인 겁니다...이 코스가 수당과 구려 때의 전쟁뿐 아닌...동양과 서역의 전통적인 대 이동 전쟁루트일까 합니다...그래 요동방어와 요서 공략이 중요했던 겁니다, 08.09.29 00:52


수양제는 머리 좀 쓰겠다고...대군이 보급로가 끊이질 않고 힘을 덜 빼는 최단거리인...많이 위험한 페르가나 계곡을 탓던 겝니다...을지문덕이 이시쿨호나 그 밑의 호수...즉.동쪽으로 올라오는 고갯길 정벌로인 시르다리아 상류를 터트린 겁니다...이 수공으로 수당군이 대부분 수장됐다 보긴 어렵습니다...대부분은 골자기 등성이로 올라가면 삽니다...문젠 시궁창이 된 길에서...대군이 양쪽 능선 골짜기 반으로 쪼개지고...공격해 올라가야 할 곳에선..계속 물이 넘쳐오고...대열을 집결하자니...땅은 칠퍽거려 수레와 말이 빠지고...천상 백백전을 해야 하는데...고려군은 이미 매복한 고지에서 얄밉게 활만 쏴 대고...어떤 자는 돌덩이. 08.09.29 09:01


그 파미르산맥 이곳 저곳에 매복했던 고구려군은...이미 우즈벡 쯤 와서...퇴로를 차단하니...돌아가지도 못하고...대군은 전멸 당하고...수양제는 고구려의 본거지나 마찬가지인 흉로지역 북쪽 두만강(토문강=투멘카강)쪽 옴스크 톰스크로 튑니다...여긴 지금도 엄청난 습지라서...여름엔 기마군단이 설치고 따라오질 못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여길 짱박히며 숨어 댕기가 몇만명만 살아서..눈치 슬슬보며 북유럽으로 돌아 서남아시아 본거지로 돌아 간 것으로 보입니다...이 지역도 고구려의 속지라서...말갈 지방 군벌들에 계속 도륙을 당하며...결국, 서남아에 도착할 당신...2천여명만 목이 달려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08.09.29 01:11


그래,수당에선...어짜피 대군이니...전래의 유구한 방식대로... 애초에 겨울에 이르티쉬가 얼면...대군을 몰아 서북에서 내려치는...요동공략전을 하자 한 것인데...수양제가 똑똑한 척 하다...지대로 맛을 본 걸 겁니다...이 수공은...을지문덕 이전...한무제란 자가 먼저 그 자리에서 우즈벡 평원을 겨냥해 썼던 전술이기도 하고...칭기스칸도 썼던 똑 같은 자리에서 진행됐던 전술입니다.. 08.09.29 01:15


셀렝게가 살수란 내용만 좀 무리가 있어 보이고...여타의 말씀들은...정말 눈이 번쩍 뜨입니다...무쿠리가 몽골이자 마고구려다...동의합니다...막고구려=막고굴=다 같은 말 같습니다...왕건의 고려는...신라나 수당을 계승한 중원 남방의 송고려(솔렁거스)같습니다...메르키트가 그 송고려 인진 몰라도...당시 중원 북부와 카자흐일대에 있었단 서하..즉, 탕구트란 말 자체도...북송(북고려)를 뜻한다 보입니다. 08.09.29 09:03


김재만 

이정혁님의 글처럼 Avar족에 관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5호에 해당하는, 훈족, 게르만족, 슬라브족 등을 서양의 문헌에서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죠... 동양의 문헌과, 서양의 문헌의 일치점을 찾는다면, 역사의 해석은 더욱 정확해 질 것 입니다.. 08.09.29 20:00

이정혁

송동건님이 쓴 <고구려사 복원>박용숙교수님 쓴 <지중해 문명과 단군조선>에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08.09.29 20:51


김재만

고려시대, 거란의 침입시에 강동육주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유럽의 시각으로 해석했을때, 드네프라강 오른쪽 또는 볼가강 오른쪽 지역밖에는 위치 할 수가 없습니다... 페르가나 지역도 고려되어야 되고,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합리적 이론이 나왔다고 하여, 그것에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다각도의 검증과 검증이 또 있어야 되는 것이죠... 한사람이 한 지역에 촛 점을 맞췄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개연성과 문헌적 근거들이 있다면, 다른 지역을 통해서 다시한번 접근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08.09.29 20:03


The 6th century historian Menander Protector noted that the language of the Avars was the same (possibly meaning similar) as that of the Huns.

(http://en.wikipedia.org/wiki/Eurasian_Avars)... Avar족과 Hun족의 언어가 동일했다는 내용입니다. 결국은 완벽하게 다른 부족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08.09.29 20:15


Initially, the Avars and their subjects lived separately, except for Slavic and Germanic women that were married by Avar men. Eventually, the Germanic and Slavic peoples were included in the Avaric social order and culture ? which itself was Persian- Byzantine in fashion[22]. Scholars have identified a fused, Avar-Slavic culture, characterized by ornaments such as half moon-shaped earrings, Byzantine-styled buckles, beads, bracelets with horn-shaped ends. ..또한, 슬라브족과 게르만족의 여자들이 Avar족의 남자들과 결혼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Avar는 몽골리안 이되죠... 08.09.29 20:22


아바르 족이 훈족과 불가족과 어떻게 다른지 찾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상당히 재미있고, 제가 알고 싶었던 많은 내용들이 발견됩니다.... 08.09.29 20:23


이 아바르족이 5호 16국에 나오는 '저족'의 느낌이 듭니다. 저족에는 '임금'이 있고, 저족은 하나의 인종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저족에는 여진과 거란의 여인들이 있었던 것이죠.... 보다 이민족에 관대하고, 포괄적인 문화가 있었던 것이죠... 이것이 훈족과 다른 면입니다. 전쟁을 통한 강력한 서방진출을 이룬 것은 '훈족'입니다. 불가족의 kubrat왕이 아바르의 왕이 전쟁을 원치는 않아서 대립을 하였던 것이죠... 많은 것을 풀어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08.09.29 20:28


이정혁

그런데 쿠브라트가 죽은 것은 642년이고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킨 게 642년입니다.

. 08.09.29 21:04

김재만 

정확한 년도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한 유사성에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08.09.29 21:07


현상태 

이 5호를 부여 고구려 역사에서의 5가일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08.09.29 21:57


정응준

고구려 5가... 5부족....충분히 설득력이 있군요. 새로이 개안한 느낌입니다. 08.09.30 1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