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해치는 고려견(高麗犬)이다.

한부울 2009. 2. 2. 13:22
 

해치는 고려견(高麗犬)이다.

[한국일보] 2008년 12월 16일(화) 오전 02:53

 


서울시가 상상의 동물 해치(獬豸)를 상징물로 삼은 지 반년이 넘었지만 시민들의 친근감은 기대 이하인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랫동안 귀에 익어 뇌리에 박힌 '해태'를 지우고 '해치'라는 새 이름을 들여앉히기가 우선 쉽지 않다. 광화문 앞의 순하고 우스꽝스러운 해태상에서 해치의 원래 모습을 떠올리기는 더욱 어렵다.


선악을 가려 악인을 뿔로 받아 죽이고, 잡아먹기까지 한다는 해치와는 너무 다르다. 중국의 해치상은 괴기영화에나 어울릴 듯하고, 대검찰청이나 사법연수원의 해치상은 조금 낫지만 역시 두려움을 자아내기에 족하다.


이런 겉모습의 차이가 '해치=해태의 원형'이란 통설에 대한 다양한 반론을 불렀다. 해태는 상상의 바다동물인 '해타(海駝)'에서 나온 말로 육지동물인 해치와는 다르다는 주장은 어설프다. 그런 바다동물을 찾을 수가 없는 데다 그 배경인 '관악산의 불기운을 누르기 위해 바다기운을 띤 해태상을 광화문에 두었다'는 속설은 원래 감찰ㆍ탄핵 기관인 사헌부 앞에 놓였던 해태상이 일제 강점기에 광화문 앞으로 옮겨졌음을 간과했다. 반면 광화문 해태상은 해치나 해타가 아니라 한국 토종 삽사리를 형상화했다는 주장은 일고할 만하다.


일본 신사의 '고마이누'(狛犬) 석상은 해태상과 많이 닮았다. 원래 한자표기도 '한국 개'라는 뜻의 '고려견(高麗犬)'이었다. 곧바로 삽사리가 떠오른다. 흔히 좌우 한 쌍으로 서 있는 고마이누의 오른쪽 '아교(阿形)'는 뿔 없이 입을 벌리고 있고, 맞은 편의 '운교(吽形)'는 뿔 하나가 솟았고 입은 다물고 있다. 한 쌍을 합쳐 '고마이누'라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뿔 없는 쪽은 '시시(獅子)', 뿔 있는 쪽은 '고마이누'라고 부른다. 중국의 해치가 한반도에서 삽사리의 이미지와 뒤섞여 해학적인 모습으로 바뀌었을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문화교류와 발전은 수많은 덧칠하기를 통해 이뤄진다. 덧칠하기가 심해서 원형을 더듬기조차 어려운 예도 많다. 해치의 원형을 따지기보다 융화된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퍼뜨리는 게 중요하다. 오키나와의 상징물인 '시사'(사자)는 원래 궁궐이나 사찰, 귀족 무덤 앞에 놓인 종교적 장치였지만, 19세기 말 서민들에게 기와지붕이 허용된 후 지붕 장식물로 널리 쓰이면서 복덕의 상징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식당 입구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해치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새롭게 발굴해 퍼뜨리겠다는 서울시의 계획에 눈이 간다.


황영식 논설위원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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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열도의 신사에 고려견상이 있다-대륙의 사자상은 고려의 고려견상이다?


[자료의 근거]


고려개(高麗犬)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일본에는 개가 참 많습니다.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그런데 개들이 한결같이 조용합니다. 우리나라에서처럼 “멍멍”하고 짓는 개를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하고 개들을 살펴보니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는 개와는 종자가 다르더군요. 거의 다 수입개로 애완용으로 길들어진 개들입니다. 일본에 일본의 토종개가 어떻게 되는지 얼마나 남아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아무튼 지금 일본의 주류개는 수입개라는 것이지요.

 

▲ 가마쿠라(鎌倉)의 쓰루가오카하치만구(鷄岡八幡宮) 경내에 있는 고려개(高麗犬). “사자”가 아니라 전형적인 “개”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일본에서 개는 거리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인들의 정신과 종교의 구심점인 신사(神社)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개를 볼 수 있습니다. 개 석상이 쌍을 이루어 놓여 있는 것이지요. 보통 한 마리는 입을 다물고 다른 한 마리는 입을 열고 있는 형태를 취합니다.


그런데 신사 앞에 놓여 있는 개들이 꼭 개 형태를 보이는 것만은 아닙니다. 개가 아니라 사자상이라고 해야 옳아 보이는 것들도 참 많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본사람들은 그 석상들을 항상 “개”라고 부릅니다. 정확히 말하면 코마이누(こまいぬ), 즉 고려개(高麗犬)라 부릅니다. 이누(いぬ)는 일본어로 개(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코마이누(こまいぬ)는 말 그대로 고려에서 온 개라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신사 앞에는 고려에서 온 개가 있는 것입니다. 이 개가 참배객들을 인도하는 것이며 또한 신사를 수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보면 코마이누(こまいぬ)라 할 때, 한자를 高麗犬로 쓰지 않고 狛犬로 쓰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狛”도 “高麗”와 같이 “코마(こま)”로 발음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본인들은 코마이누(こまいぬ)의 한자를 狛犬로만 알고 있어 신사 앞에 있는 개 석상이 高麗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지 못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는 의도된 한자표기라고 생각합니다. 고려와의 관계를 지우기 위해 언어를 가지고 농단을 부린 것이지요. 일제강점기에 한반도에 얼마나 많은 지명이 바뀌었는지 생각해 보면 그런 추정은 가능한 것입니다.


한자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 고려개는 모두 다 수컷이라는 것입니다. 도고신사(東鄕神社)에서 저는 이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쌍을 이루어 있다면 암수 한 마리씩 세워 두는 것이 좋다고 보여 지는데 옛날의 관점에서는 그러하지 않았나 봅니다.

 

▲ 동경(東京)의 도고신사(東鄕神社) 경내에 있는 고려개(高麗犬). “사자”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두 마리 다 수컷임을 알 수 있다.  한 마리는 입을 다물고, 다른 한 마리는 입을 열고 있다.


그러면 이 고려개는 언제 일본에 영향을 미쳤을까요? 어느 고려일까요? 태왕 고려(太王 高麗)일까요? 황제 고려(皇帝 高麗)일까요? 국왕 고려(國王 高麗)일까요?


한국에서 코마이누(こまいぬ)와 관련된 자료를 인터넷을 통해 아무리 뒤져 보아도 그럴 듯한 설명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답이 쉽게 나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삼국시대(三國時代), 정확히 사국시대(四國時代)에 존재했던 나라는 태왕 고려(太王 高麗), 백제(百濟)라 일컬어지는 남부여(南夫餘), 신라(新羅), 가야(伽倻)가 있었습니다. 이 4국은 당시 신천지인 일본열도를 점령해 들어갑니다. 남부여(南夫餘), 신라(新羅), 가야(伽倻) 등은 열도 서남쪽을 정복해 들어간 반면 태왕 고려(太王 高麗)는 동북쪽을 정복해 들어갑니다. 태왕 고려(太王 高麗)의 근거지는 제가 머물고 있는 동경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이곳에 고려산(高麗山), 고려신사(高麗神社) 등이 지금까지 있는 것입니다.


신사는 그 기원을 언제로 잡아야 할지 어렵지만 4국시대에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또한 4국시대에 각 국가마다 이에 해당하는 신사가 일본에 있었습니다. 즉, 고려신사, 백제신사, 신라신사, 가야신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 신사가 내려오는 경우도 부지기수 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에 신라신사 앞에 고려개를 수호신으로 모셨을지... 그건 불가능 한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지금 일본에 있는 고려개는 황제 고려(皇帝 高麗)나 국왕 고려(國王 高麗) 시대의 영향이라 봐야 합니다. 물론 태왕 고려(太王 高麗) 시대에도 고려개가 있었을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고려개가 일본열도에 널리 퍼지게 된 시기는 황제 고려(皇帝 高麗)나 국왕 고려(國王 高麗) 시대라 보아야 논리적으로 맞아 떨어집니다.


또 한 가지 의문은 과연 우리나라, 정확히 고려 시대에 개를 모시는 풍속이 있었냐는 것입니다. 확실히 고려의 영토였던 한반도에 이와 관련된 풍속이 있었어야 일본의 고려개가 한반도를 경유해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설명이 될 수 있습니다. 다행히도 고려개의 흔적이 한반도에 남아 있습니다.

 

            낙안읍성(樂安邑城) 동문 밖 평석교(平石橋)에 남아 있는 고려개©낙안읍성


전라남도 순천에 있는 낙안읍성(樂安邑城)에 고려개가 있습니다. 낙안읍성 동문 밖 평석교(平石橋)앞에 고려개 두 마리가 남아 있습니다. 원래는 세 마리였는데 두 마리만 남아 있다고 합니다. 전라남도 땅에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개는 역시 태왕 고려보다는 황제 고려나 국왕 고려와 관련이 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더욱이 낙안읍성 축성 연대가 이를 증명합니다. 낙안읍성 민속마을홈페이지(http://www.nagan.or.kr/)에 이와 관련한 설명글이 나옵니다.


조선 태조6년(1397년) 왜구가 침입하자 이 고장 출신 양혜공(襄惠公) 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고 왜구를 토벌하였다. 그 후 인조4년(1626년 5월∼1628년 3월) 낙안 군수로 부임한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 군수가 석성(石城)으로 개축하였다고 전해 오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 세종편에 의하면 세종6년(1423년) 전라도 관찰사의 장계 내용에 "낙안읍성이 토성으로 되어 있어 왜적의 침입을 받게 되면 읍민을 구제하고 군을 지키기 어려우니 석성으로 증축하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왕이 승낙하여 세종9년(1426년) 되던 해에 석성으로 증축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는 이설이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가 흔히 조선이라 부르는 시대에 낙안읍성이 만들어 졌다는 것입니다. 그 낙안읍성에 고려개가 있는 것입니다. 왜 고려개가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흔히 고려라 부르는 시대에 고려개가 만들어졌어야 정상일 텐데 말이죠. 또한 우리야 지금 이를 석구(石狗)라 부르지만 일본은 굳이 고려개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우리는 고려개가 3마리인데 일본은 2마리일까요? 옛날에 숫자는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경복궁(景福宮) 근정전(勤政殿)에 있는 용의 발톱은 7개입니다. 7개는 황제보다 우위에 있을 때 쓸 수 없는 발톱인 것이지요. 5개가 황제이며 4개가 제후국입니다. 더욱이 고려개가 만들어진 이야기를 들어보면 제작 연대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조선 중기에 해당합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한 마리는 멸악산(지금의 오봉산)이 험준하고 산세가 강하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고자 세웠다고 한다. 석구상은 삽살개로서 자세히 보면 익살스럽기 그지없으며, 꼬리를 치켜세우고 볼기짝이 빨갛도록 용을 쓰며 앉아 있는 모습이 한없이 귀엽기만 하다. 구전에 의하면 정유재란 때 지금의 오봉산(옛 멸악산) 아래서 많은 왜군이 죽어 갔다고 하는데, 그 원귀가 고을을 넘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세웠다고도 한다.


즉 한반도 남부에 남아 있는 고려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조선 중기에 만들어 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논의된 사실을 통해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일본에 고려개가 있는 것은 황제 고려나 국왕 고려와 관련이 있다. 둘째, 우리가 흔히 말하는 조선 중기까지는 확실히 한반도에도 고려개를 만드는 풍속이 이어져 내려왔다. 셋째, 한반도에 개의 숫자가 많았던 것으로 보아 한반도가 열도보다 우위의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저는 일본에서 고려개가 퍼져 나간 경위를 조사하면서 중요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에도시대(江戸時代 : 1603∼1867년) 이전에는 석상이 건물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에도시대에 들어와서야 지금과 같이 신사 참배 길에 고려개가 정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에도시대 이전에 있던 석상도 고려개라 불렀는지는 불분명 합니다. 확실한 것은 에도시대에 들어서 지금과 같은 고려개가 들어앉게 되면서 일본 신사 형태가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 닛코(日光)의 도쇼구(東照宮) 경내에 있는 고려개(高麗犬). 도쇼구(東照宮)는 에도시대(江戸時代)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모신 사당이다. 에도시대에 고려개가 정착되었음을 고려해 볼 때 이 신사부터 고려개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에도시대는 잘 아시겠지만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년) 일파를 몰아내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년)가 일본 정국을 통일한 후 실질적인 수도로 에도(江戸), 즉 지금의 동경(東京)을 삼은 시대입니다. 그런 에도시대에 왜 고려개가 널리 퍼졌을까요? “개”가 왜 “고려개”였을까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조선 중기에 한반도 남부에 고려개가 만들어졌고, 그 시대 일본에서도 고려개가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으로 너무나 이상하지 않습니까?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까? 고려(高麗)라는 말은 조선(朝鮮)시대에도 쉽게 쓰일 수 있는 것인가요? 에도시대 일본에서는 고려(高麗)가 없고 조선(朝鮮)이 있는데 왜 고려개를 만들었을까요?


답은 차근차근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도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십시오. 역사는 암기만 해야 할 것이 아니라 생각해야 할 학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역사를 암기의 학문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친일사학자들입니다.


[의의]


1. 일본열도 동경엔 고려견이 있고, 고구려 아니면  고려제국때 만들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고려견도 구한 말때 대륙에서 일본렬도로 옮겨놓은 것으로 사료된다.


2. 왜냐하면 고려견상이 대륙의 해태상이나 사자상하고 너무나 닮았다.  대륙의 요소를 많이 담고 있었다. 특히 대륙의 사자상하고 고려견은 거의 같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거꾸로 대륙의 사자상이 고려견? 이라는 의미이다.


3. 중국대륙의 사자상이 고려견, 즉 사자상은 고려의 동물상이라는 것이다. 대륙의 사자상이  일본의 고려견과 똑같고 일본이 전에 대륙남부에 있었다고 하면 대륙의 남쪽도 고려의 고유영토였다. 대륙의 사자상은 고려의 고려견상이요 고려의 사자상이란 의미로 압축된다. 역시나 놀라운  결론이다


백제사(百濟寺), 시대소리 일본통신원

출처 : 낙안읍성 민속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