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세이, 키타이의 모태 거란
[한국경제신문] 2009년 02월 13일(금) 오후 02:27
2004년 5월 한국 산악계에 비보 한 통이 날아들었다.
에베레스트 원정을 떠났던 계명대 산악팀 박무택, 백준호, 장민씨 등 세 명이 정상 정복에 성공하고 하산하는 도중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2005년 3월14일, 설산에 잠들어 있는 세 명의 시신을 찾기 위해 서울에서 원정대가 네팔로 출발했다.
산악인 엄홍길씨를 등반대장으로 한 이 팀은 '초모랑마 휴먼원정대'라 이름 붙여졌다. 산에 묻힌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산 사나이들이 뭉친 이 원정대는 그 자체로 세계적인 화제가 됐었다. 그런데 당시 언중(言衆) 사이에서는 이 원정대 이름을 두고 또 다른 주목거리가 있었다.
에베레스트로 떠나는 원정대 이름 앞에 붙은 '초모랑마'에 관한 것이었다.
'초모랑마'는 티베트에서 에베레스트산을 가리키는 현지 이름이다. 에베레스트는 네팔과 중국의 티베트 자치구에 걸쳐 있는, 높이 8848m의 세계 최고봉 산이다.
실종된 세 명의 산사나이들이 묻힌 곳이 티베트 쪽에서 오르는 루트여서 자연스레 원정대 이름도 초모랑마 원정대라 정해졌던 것이다. 히말라야 산맥의 에베레스트는 접하고 있는 나라에 따라 현지에서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티베트에서는 예로부터 이 산을 초모랑마('대지의 여신'이란 뜻)로, 네팔에서는 사가르마타('세계의 정상'이란 뜻)로 불러왔으며, 중국에서는 초모랑마를 음차해 주무랑마(珠穆朗瑪)라고 부른다.
우리가 배우고 알고 있는 에베레스트는 영어식 이름으로 이 산을 가리키는 여러 이름들 중 하나일 뿐이다.
영국은 1852년 식민 지배하고 있던 인도에서 측량국장 앤드루 워의 탐사와 측량을 통해 이 산봉우리가 세계 최고봉임을 확인한 뒤 그의 전임 측량국장이었던 조지 에베레스트 경의 이름을 따 에베레스트 산이라고 명명했다. 이후 영어가 세계적으로 공통어가 되다시피 할 정도로 세력이 커지면서 에베레스트란 이름은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지명이 됐다.
영어의 영향을 크게 받는 남한에서도 당연히 초모랑마나 주무랑마는 낯설고 대부분 에베레스트로만 알고 있을 것이다. 이에 비해 북한에선 같은 사회주의권인 중국의 영향으로 세계 최고봉은 주무랑마로 통한다. 물론 그들의 사전에도 에베레스트란 단어는 없고 주무랑마만 올라 있다.
나라마다 국호에 대한 공식적인 영어 표기를 갖고 있는 것도 영어의 '힘'을 드러내는 경우이다. 세계적인 도시나 강 등 유명한 지명도 마찬가지다. 가령 태국의 수도이자 국제도시인 방콕(Bangkok)도 사실은 영어 이름이다.
그곳에서 현지 사람들은 방콕이란 말보다는 '끄룽텝(Krungthep · 천사의 도시란 뜻)'이란 고유의 이름을 더 많이 쓴다. 그곳 사람들에게 방콕은 조상 때부터 불러온 '끄룽텝'의 또 다른 영어식 이름일 뿐이다.
캐세이패시픽(Cathay Pacific)은 홍콩에 본사를 두고 있는 항공회사이다.
여기에 쓰인 '캐세이'와 유럽이나 러시아 사람들이 중국인을 가리킬 때 쓰는 말 '키타이
(kitai)'.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거란'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거란'은 '글안'이라고도 한다.
우리 역사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변방의 민족 거란족은 요하(遼河) 상류지역에서 여러 부족으로 흩어져 살다 발해를 멸망시키고 947년 요(遼) 나라를 세운 민족이다. 거란은 한자로 '契丹(kitan)'으로 적혔는데 '크다'는 뜻의 '글(契)'과 알의 의미인 '란(丹)'이 결합한 단어다.
한자 契는 '맺을 계' 또는 '부족이름 글'이란 글자이고,丹은 통상 '붉을 단'자이지만 '모란(牧丹)' 등에서와 같이 '란'이란 속음으로도 불린다. 이 거란(kitan)이 중국에서 한창 세력을 떨칠 때 러시아나 유럽 쪽까지 전해져 '키타이'라는 변형된 이름으로 불렸다.
이 '키타이'가 영어식으로 다시 바뀐 게 '캐세이'이다.
그래서 '키타이'나 '캐세이'는 '차이나'와 함께 중국을 가리키는 단어로 자리 잡게 됐다.
'아라사-노서아-러시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중국에서 러시아를 俄羅斯로 옮겨 적고 이를 [어뤄쓰]라 읽었다.
이 취음 한자를 우리가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게 '아라사'이다. 이에 비해 일본에서는 露西亞로 음역해 썼는데, 역시 이를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게 '노서아'이다.
우리는 개화기 때 중국과 일본의 취음어 두 가지를 다 받아들여 썼다.
지금도 사전에서 러시아를 가리키는 우리 취음어로 노서아와 아라사를 함께 다루고 있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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