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江戸城의 正門은 왜 高麗門인가 ?

한부울 2009. 2. 22. 18:06
 

江戸城의 正門은 왜 高麗門인가 ?

[시대소리-백제사] 2008/04/19 [23:51]


고려 장군 도쿠카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준 두 번째 선물


이제 일본에서 고려제국의 흔적을 자세히 다루어 보겠습니다. 이미 이전 글에서 일본 신사의 수호신인 고려개(高麗犬)를 다룸으로써 고려제국의 흔적을 보여드린 바 있습니다. 이번엔 일본의 도시(都市)와 마을(町)에 있는 고려제국의 흔적입니다.


독 자들께서는 저번 글에서 고려 장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준 첫 번째 선물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淸道旗를 들고 행진하는 朝鮮軍. 이를 통해 필자는 朝鮮帝國의 실체인 大金(淸)帝國을 밝힌 바 있습니다. 이번엔 高麗帝國의 실체를 밝힐 차례입니다. 고려제국의 실체는 다름 아니라 현재 일본의 수도인 동경을 살펴봄으로써 파악할 수 있습니다. 동경이라는 도시에 고려제국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江戸가 東京으로 바뀌면서 도시가 어떻게 변형되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고려제국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또한 列島가 고려제국의 편입되어 있었다는 사실과 함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본질이 열도가 고려제국으로부터 이탈한 사건이라는 것도 함께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동경 우에노공원(上野公園)에 있는 동경국립박물관(東京国立博物館). 저는 그 곳에서 大德川展을 관람한 후 박물관 판매장으로 향했습니다. 판매장에서 저는 에도동경산보(江戸東京散步)라는 책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 책에 수록되어 있는 에도시대 지도. 그 지도에 고려제국의 흔적이 남아 있다니... 아주 귀중한 자료라 저는 이 책을 구입해서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일본에 거주할 때 몇몇 일본인들에게도 그 책에 있는 내용을 보여드리자 다들 놀라워하더군요. 메이지유신 이후의 열도인들도 역사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다 메이지유신 세력들이 영국 제국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바꿔놓은 세계사 틀에서 쇠뇌당한 거짓 역사를 배우고 있으니 어찌 보면 모르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 에도시대 동경 지도(1843년)와 인공위성이 촬영한 지금의 동경 사진(야후 저팬 지도 서비스)  ©백제사

 

위 사진은 에도시대 지도와 지금의 인공위성 촬영 사진을 비교해 본 것입니다. 뭐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원 안에 있는 부분의 위치가 확연히 다릅니다. 원 안에 있는 부분은 모두 다 에도성(江戸城), 즉 지금의 황거(皇居)의 일부분입니다. 에도성은 도쿠가와(德川) 가문이 열도를 통치하였던 성으로 메이지유신 이후에 황거로 바뀌어 현재 일본 천황이 거처하고 있는 곳입니다.(천황이 사는 곳을 왜 皇宮이 아니라 皇居라 부르는지는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메이지유신 이후에 에도성을 황거로 바꾸면서 성의 기본 골격도 바꾸었을까요? 아닙니다. 지도와 사진이 다르게 보이는 것은 사실 간단히 해결됩니다. 에도시대 동경, 즉 에도의 지도를 왼쪽으로 90도 돌리면 바로 해결됩니다.


우리는 지도를 그릴 때 보통 남쪽이 아래를 향하도록 배치합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선에서 적어도 메이지유신 이전에 열도는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城의 正門이 아래로 향하도록 배치하여 지도를 작성하였습니다. 에도성의 정문은 동쪽에 있었습니다. 그러하기에 동쪽을 아래에 배치하여 지도가 작성되었던 것입니다. 다음에 다루겠지만 메이지유신 이전 오사카(大阪) 지도는 서쪽이 아래로 향합니다. 오사카성(大阪城)의 정문이 서쪽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 에도시대 동경 지도 중 에도성 일대(1843년)와 지금의 동경 지도 중 황거 일대 ©백제사

 

위 지도는 둘 다 동쪽이 아래를 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한편 원은 城門을 표시한 것인데 색깔별로 서로 대응됩니다. 저 지도에서 빨강색 원이 에도성의 정문입니다. 일본에서 성의 정문은 보통 大手門이라고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에도성의 정문이 大手高麗門이라는 것입니다. 大手門은 內門과 外門의 이중문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중 외문이 高麗門인 것입니다.


저는 황거를 몇 번에 걸쳐 답사하면서 도합 4개의 고려문을 찾았습니다. 점으로 표시된 원은 제가 답사를 통해 찾은 고려문입니다.(황거를 개방할 때도 들어가 보았으나 일부분만 공개하였기에 답사에는 기본적으로 한계가 있었습니다.)

 

                                       ▲ 필자가 황거 일대에서 찾은 고려문©백제사

 

제가 에도동경산보(江戸東京散步)라는 책에서 에도성의 정문이 고려문인 것을 보았을 때 얼마나 놀랐었는지... 고려 장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저에게 이런 선물을 주다니... 후에 도쿠가와(德川) 가문의 무덤편에서 다루겠지만 고려 장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자신의 가문이 처참히 무너진 것에 대해 무덤 속에서 통곡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하기에 저에게 이런 선물을 주지 않았을까요? 선물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원한을 풀어달라는 간절한 소망일까요?


도대체 왜 고려문이 에도성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도 열도 최고 통치자의 성인 에도성의 정문이 왜 고려문일까요? 열도에서는 성에 들어갈 때 入城한다고 하지 않고 登城한다고 합니다. 막부시대 이후 平地城이 발달한 열도에서 入城보다는 登城이라는 말이 쓰였음은 열도인들이 城을 어떻게 대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城의 정문 앞에 발달한 마을의 이름은 아이에 城下町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열도인이 그렇게 우러러 보았던 성의 정문이 고려문인 것입니다.


한국에서 알아본 본 바에 의하면 딱 한 가지 그럴 듯한 설명이 있습니다. 高麗門의 高麗는 흔히 高句麗라 불리는 太王 高麗와 관련이 있다는 설명입니다. 이미 연재 2편에서 소개하였지만 동경권은 태왕 고려(太王 高麗)의 근거지였습니다. 지금도 동경권에 고려산(高麗山), 고려신사(高麗神社) 등이 남아 있음이 이를 증명합니다. 한국에서 찾은 그럴 듯한 설명은 태왕 고려 후손들이 태왕 고려 멸망 이후에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오면서 에도성 축성에 대거 참여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고려문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이 옳다면 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태왕 고려 후손들을 대거 기용하였을까요? 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태왕 고려의 후손은 아니었을까요? 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태왕 고려 세력의 후손이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열도의 태왕 고려 세력이 에도시대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태왕 고려를 계승한 황제 고려가 존재하였으며, 열도가 고려제국에 편입되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고 봅니다. 이는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아 무튼 한국에서의 이런 설명은 황제 고려와 열도간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해석하였기에 근본적인 한계를 가집니다. 이런 설명은 단 한 가지 사실에 의해 단번에 설득력을 잃어버립니다. 그 사실은 고려문이 에도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대마도에도 고려문이 있다고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그런데 에도성과 대마도에만 고려문이 있을까요?


지금 당장 일본 포털 사이트에서 고려문을 검색해 보십시오. 열도 전국에 깔려 있음을 바로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에서의 설명이 옳으려면 동경권에 거주하는 태왕 고려 후손들이 열도 전국에 가서 축성에 참여했으며 이를 기려 그곳 번주가 고려문이라 이름을 남겼다고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고려문이 있는 것일까요? 일본에서 찾은 그럴 듯한 설명은 문의 양식이 고려에서 온 것이기에 고려문이라 부른다는 것입니다. 위의 사진을 보시면 알겠지만 양식이 일정함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양식이 고려풍이라 해서 고려문이라고 문의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전 세계 어디에도 양식을 가지고 문의 이름을 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찾은 설명이 백번 양보하여 옳다 해도 두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왜 朝鮮門이 아니고 高麗門인가? 왜 에도시대에 고려문이 열도 전국에 세워지게 되었으며, 그 정치적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半島에 朝鮮이 있었다면 이를 결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는 이미 설명한 바 있기에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고려 장군이며 열도 반란군을 진압하고 열도를 다시 고려제국에 편입시켰다고 역사를 인식하지 않으면 도저히 이를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근대라 부르는 시대 이전에 어떠한 양식이 유행한다는 것은 최소한 정권이 이를 허용하였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더욱이 에도시대 열도는 이것이 아주 극심했었습니다.


일본에서 있을 때 인터넷에서 찾아 본 바에 의하면 지금의 황거 정문에도 원래 고려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황거 정문은 고려문을 철거하고 들어선 것이라고 합니다.(위 사진에서 갈색 원 안에 에도시대에는 고려문이 있었고, 지금은 황거 정문이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확인한 에도시대 에도성에서의 고려문은 총 5개가 됩니다. 그런데 왜 황거 정문 자리에 있었던 고려문이 철거되었을까요? 왜 大手高麗門을 이용하지 않고 正門을 새로 만들었을까요? 도대체 에도성이 황거로 바뀌면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는 다음 글 “高麗의 도시 江戸와 日本의 임시수도 東京”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동경에 남아 있는 고려제국의 흔적을 글 한편으로 마무리 지으려 했는데 글이 길어져서 어쩔 수 없이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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