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뛰어난 정치가이며 지략영제 대고구려 20대 장수대왕

한부울 2006. 9. 1. 00:04
 

[중국 사서에 쓰인 고구려, 고구려인] 장수왕(長壽王)

宋書 “포로된 北燕王 석방요구에 아예 처형”


고구려 시대의 임금 가운데 광개토왕과 아들인 장수왕은 ‘대왕’으로 불린다.

이 두 임금의 시대에 고구려는 가장 강력했고,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으며, 가장 정체성에 충실했다.

그 시대의 동아시아에는 고구려, 중국의 북위(北魏)와 남조(宋·齊), 북방의 유연(柔然) 등이 질서를 끌어가는 사각의 주축국이었다.

그래서 중국의 사서에는 유독 장수대왕에 관한 기록이 많다.


송서(宋書)에는 고조가 장수왕 연(璉)을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으로 삼고, 고구려왕(高句驪王)·낙랑공(樂浪公) 등 다른 칭호들은 인정 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 위서(魏書)에는 세조가 장수왕을 “정동장군(征東將軍)·영호동이중랑장(領護東夷中郞將)·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고구려왕(高句麗王)에 배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에 책봉을 하였다는 이 기록을 근거로 중국은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으며, 신속(臣屬) 관계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책봉은 형식적이었을 뿐 실제로는 고구려가 약소국으로서 불평등한 관계로 편입된 것임이 아니라는 상황을 전해 주는 많은 기록들이 있다.


송서 및 위서, 그리고 한국의 삼국사기에는 북연(北燕)의 멸망 과정에서 고구려·북위·송이 복잡한 관계를 맺는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436년 무렵 북연은 북위의 공격을 받자 고구려와 연합하려 하였고, 고구려는 요서의 용성(龍城·현재 조양시)에 군대를 수만명 파견하였다.

북위는 군사를 보내 대응하려 했으나 결국은 포기하였다.

438년 장수왕은 북연 왕 풍홍(馮弘)을 사로잡고, 태자를 볼모로 끌어왔다.

그러자 송 태조는 이들을 돌려보내라고 압박하였는데, 장수왕은 군대를 보내 북연 왕을 죽였다.

이에 송은 고구려 군대를 습격하였고, 분노한 장수왕은 송의 장군을 붙잡아 옥에 가두게 하였다.


장수왕은 한편 백제와 신라를 공격하여 서로는 경기만 전부와 동으로는 현재의 삼척지역에 이르는 한반도 중부 이북의 땅을 정복하였다.

일본서기에는 이 무렵 고구려군사가 경주에 상주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 위서에는 사신의 말을 인용하여 장수왕이 즉위한 초기에 이미 고구려가 “남쪽으로 소해(경기만 북부)에 이르고… 동서가 2000여 리이며 남북이 1000여 리가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위서 거란전에는 고구려가 479년(태화 3년)에 “북위와 적대적인 유연과 모의하여

현재 동몽골 지역인 지두우(地豆于)를 분할하고자 했다”는 기록이 있다.

성공했을 경우에 동몽골 지역의 일부는 고구려의 영토가 되는 것이었다.

이때 고구려는 시라무렌강 유역의 거란을 공격했다.


장수왕은 이러한 군사적인 정복 활동을 토대로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외교를 추진하였다.

송의 뒤를 이은 남제(南齊)의 역사를 기록한 남제서(南齊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구려는 “오랑캐(북위)에게도 사신을 보냈지만 세력이 강성하여 남제의 제어를 받지 않았다.

북위는 사신의 관저를 두었는데, 제의 관저를 제일 큰 것으로 하고 高(句)麗는 그 다음이었다”라고 하였다.

또한 장수왕 77년(489년)에도 “북위가 사신들의 모임(원회·元會)에서 (제의 사신을) 고구려의 사신과 나란히 앉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에게 항의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고구려가 등거리 외교에서 성공을 거둔 결과, 북위에서 상당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남조와 대등하게 여겨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북위와 남제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동방의 강국인 고구려를 우호적인 관계로 만들 필요성이 강했다.

이러한 국제 정치의 본질을 파악한 고구려는 더욱 능동적으로 등거리 외교를 펼쳤다.


위서에는 매우 흥미있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북위의 효문제(孝文帝) 때

“장수왕이 파견하여 남제의 태조에게 가던 사신 여노(餘奴) 등을 바다 가운데에서 체포하여 대궐로 압송하여 왔다”는 기사가 나온다.

그런데도 고구려는 계속해서 남조와 교류를 한다.

이 같은 고구려의 해양 등거리 외교를 제지할 현실적인 능력이 남·북조 모두에게 없었다.

장수왕은 이처럼 대(對)중국 등거리 외교로 동아시아의 질서를 재편하고, 고구려의 중핵 위치를 확보하려는 전략으로 활용하였다.


위서 백제전에는 서기 472년 백제의 개로왕이 북위의 효문제에게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다.

그 내용에는 백제가 사신을 보내고자 하나 “승냥이와 이리 같은 것들이 길을 막고 있어서” 교통로가 차단되고 있음을 알리며, 군사를 파견하여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어 “고구려가 때로는 남으로 송과 통하고, 때로는 북으로 북위와 맹약하여 순치(脣齒) 관계에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자료를 살펴보면 장수왕은 중국적인 질서 속에 피동적으로 편입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아시아의 중핵에서 분단된 남북조와 동시 등거리 외교를 할 뿐 아니라

북방의 유연과 동맹을 맺고, 심지어는 송과 연결하여 북위를 압박하는 포위망을 구축하는 다국간 외교를 전개한 것이다.

또 백제·신라·가야·왜가 중국의 정권들과 교섭하는 것을 차단하면서 한편으로는 대결, 다른 한편으로는 화친하면서 한반도에서 절대 우위의 공존을 모색하였다.

송서 왜인전에는 장수왕 75년에 왜국의 왕인 무(武)가 상표문(上表文)을 올리면서

“고구려의 방해로 인하여 교섭이 어렵다”고 호소하고 있다.


한편 중국측 사서에는 이러한 군사·외교 행위 외에 교역과 관련된 또 다른 기록들이 있다.

송서에는 “(장수왕이) 송나라가 북위와 전쟁을 벌이기 위해 군마(軍馬)를 요구하자 800필의 말을 보냈고(439년), 이어 화살(弓矢) 석궁(石弓) 같은 군수물자를 보냈다(459년)”

고 기록하고 있다.

또 장수왕은 북위의 반발을 무릅쓰면서 무려 23회의 교섭을 가졌다.


이처럼 정치군사적으로는 전혀 이해관계가 없는 송에 군수물자를 배로 운반하고 있는 것은 조공이 아니라 경제적인 이익을 얻기 위한 일종의 무역이었다.

실제로 아쉬운 것은 고구려가 아니라 송이었기 때문이다.

위서에는 “(장수왕이) 한 번에 황금(黃金) 200근, 백은(白銀) 400근을 조공했으며, 전보다 두 배로 조공을 하여 답례품이 증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중국 사서에 나타난 조공 기록을 근거로 고구려가 중국에 신속됐다고 하지만, 이는 정치력이나 군사적인 능력과 관련 없이 필요성에 따라 동아시아 각국 간에 오고간 공적 무역의 한 형태였다.


장수왕은 복잡한 동아시아 세계에서 단순한 정복군주가 아닌 대정치가로서 정치 외교적으로 중핵(中核) 조정 역할을, 경제적으로 다양한 지역과 교역을 벌임으로써 고구려를 동아시아의 강력한 중핵국가로 만든 임금이다.


<그래픽> 장수왕대 고구려 대외관계

윤명철 동국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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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천도;南進정책 추진… ‘羅濟동맹’ 불러


장수왕(재위 413~491)은 427년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겼다.

평양 천도는 고구려의 남진(南進) 정책과 연결해서 설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광개토왕 때 북쪽과 서쪽으로의 군사 활동으로 영역을 크게 확대한 후 장수왕은 남진 정책을 채택했고,

이를 위해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것이다.

실제로 고구려의 평양 천도는 백제와 신라에 큰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두 나라는 433년 ‘나제동맹(羅濟同盟)’을 맺었고, 백제는 북위 등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장수왕은 475년 백제를 공격하여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죽령 일대부터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을 확보했다.


장수왕이 평양 천도를 단행한 또 하나의 목적은 귀족 세력의 약화였다.

다섯 부족의 연합국가로 출범한 고구려는 귀족 세력이 강력했고, 이들의 근거지는 수도 국내성 일대였다.

따라서 귀족 세력은 평양 천도에 극력 반대했고, 장수왕은 이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여 그중 일부는 북위로 망명했다.

한편 평양 천도 후 부근의 호족과 고구려로 망명한 중국인을 새로 등용하여 신진 귀족이 형성됐다.


고구려의 새 수도 평양은 자연과 물산이 국내성보다 훨씬 좋았으며 고조선 이래 역사·문화적으로 발달된 지역이었다.

또 대동강과 황해를 이용한 해상 활동에도 매우 유리한 조건이었기 때문에 고구려는 보다 수준 높은 국가 경영을 할 수 있었다.


이선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