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대 고구려 영웅 을지문덕장군

한부울 2006. 9. 1. 00:11
 

[中역사에 쓰인 고구려, 고구려인] 을지문덕

隋書 “고구려·隋나라 명운 가른 탁월한 전략가”

여호규 한국외국어대 교수


입력 : 2004.10.15 18:08 48' / 수정 : 2004.10.15 19:12 29'


을지문덕(乙支文德). 우리 역사에서 시대와 이념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으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열전에서 을지문덕을 김유신에 이어 두 번째 자리에 놓았으며, “고구려가 대국 수나라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을지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고 평하였다.

이러한 평가는 고려·조선 시기에도 계속되었고, 근·현대에 들어와서는 외적을 물리치고 민족정기를 드높인 위인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그런 만큼 그에 대한 역사 기록이 많다고 생각하기 쉽다.


▲ 을지문덕이 수나라 군대를 전멸시킨 살수대첩 광경을 묘사한 디오라마.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있다. 전쟁기념관 제공


그렇지만 ‘삼국사기’에 실린 을지문덕 전기는 중국사서(史書)의 기록을 재편집한 것에 불과하며, 내용도 612년 수나라 군대를 격퇴한 것이 전부이다. 그의 조상·출생지·성장 과정에 대하여 전하는 기록은 아무 것도 없다.

그가 평양 석다산 출생으로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혈혈단신으로 자랐다고 기술한 위인전도 있지만, 역사적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중국 사서를 재편집한 것을 제외하고 ‘삼국사기’에만 전하는 기록은 ‘자질이 침착하고 날쌨으며 지략과 술수가 있었고, 글을 해독하고 지을 수 있었다’는 것이 전부이다.

이러한 인물평도 중국사서의 기록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과연 고구려인의 역사 기록을 토대로 서술한 것인지 의문스럽다.


 

결국 우리는 중국 사서를 통해 을지문덕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을지문덕의 행적을 처음 기록한 중국사서는 ‘수서(隋書)’이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는 과정에 대한 서술에서 을지문덕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다.


을지문덕이 활동하던 6세기 말~7세기 초 무렵 동아시아 국제 질서는 급변하고 있었다. 수가 589년 진(陳)을 멸망시키고 오랫동안 분열됐던 중국 대륙을 통일한 것이다.

수는 종전의 다원적인 국제 질서 대신 중국 중심의 국제 질서를 확립하려 했다. 이는 당시 동북아 일대에 독자 세력권을 구축한 고구려에는 엄청난 위협이었다.


양국은 일시적으로 타협하기도 했지만 수가 고구려 서북방으로 침략의 손길을 뻗어 옴에 따라 무산되었다. 고구려는 강경책을 선택하여 598년 2월 요서지역을 선제공격했다.

수도 30만 대군을 동원해 반격에 나섰지만 장마와 전염병을 만나 퇴각해야 했다. 양국 관계가 교착된 사이 주변 상황은 고구려에 더욱 불리하게 돌아갔고, 수 문제를 이은 양제는 직접 정벌에 나섰다.


612년 1월 마침내 수군이 고구려 원정길에 올랐다. 전투병만 113만 명, 보급병은 그 두 배, 출발하는 데만 40일. 수 양제는 이 정도면 금방 고구려를 멸망시킬 줄 알았다.

그런데 처음 만난 고구려 요동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온갖 무기를 동원하여 여러 달 공격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급해진 양제는 곧바로 평양성으로 진격하기로 마음먹고 우중문과 우문술을 사령관으로 삼아 30만 별동대를 편성했다.


수의 별동대가 압록강에 도착했을 무렵 을지문덕이 수에 항복했다. 이때부터 을지문덕의 행적이 나오는데, 당시 그의 명성은 대단했던 모양이다. ‘수서’에 따르면 수 양제가 우중문에게 ‘영양왕과 을지문덕을 만나면 반드시 사로잡아 오라’는 밀지를 주었다고 한다.

그는 영양왕에 비견될 정도로 명성이 높았던 것이다. 그런데 우중문은 밀지를 받들지 않고 위무사 유사룡의 건의를 받아들여 을지문덕을 놓아주었다.


물론 을지문덕은 수군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거짓으로 항복한 것이다. 수의 병사들이 군량미를 몰래 버리는 것을 보고 수나라 군대의 상황을 눈치 챘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대를 더욱 지치게 만들려고 유인했다. ‘수서’에 따르면 “수나라 군대가 하루 일곱 번 싸워 모두 이기자 승리감에 도취되어 계속 진격하였다”고 할 정도로 깊숙이 유인했다.


이제 평양성 공격만 남은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평양성도 철옹성이었다. 더구나 군량미는 다 떨어지고 병사들은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이때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시 한 수를 보냈다.


 

                                    ‘신묘한 책략은 하늘의 원리에 통달하였고 /

                                     오묘한 꾀는 땅의 이치를 꿰뚫었으며 /

                                     전쟁에서의 공 또한 이미 높으니 /

                                     족한 줄 알고 그만 둠이 어떠한가?’


꼬임에 빠진 줄도 모르고 우쭐하던 우중문에 대한 조롱, 지금 물러나지 않으면 곧바로 반격하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묻어난다.

게다가 을지문덕이 다시 한 번 거짓 항복하면서 “당신들이 물러나면 우리 왕이 당신네 황제를 찾아가 뵙겠다.”고 물러갈 명분까지 제공했다.


수의 군대는 을지문덕의 거짓 항복을 명분삼아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수나라 군대를 기다린 것은 고구려의 항복이 아니라 거센 추격이었다.

수 군대가 살수(청천강)에 이르러 허겁지겁 건널 무렵 고구려군이 총공세를 폈다. 이때 ‘수나라 군대는 하루 사이에 450리나 도망쳤고, 30만5000명 가운데 겨우 2700명만 살아서 돌아갔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러한 중국사서의 기술에 따르면 수의 대군은 을지문덕 한 명의 지략에 말려 패배했다는 결론에 이른다. 더욱이 이때의 패배로 인해 수의 지배 질서가 점차 흔들리며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을지문덕의 지략이, 독자 세력권을 유지하려던 고구려와 중국 중심의 국제 질서를 확립하려던 수의 명운을 갈랐다고 평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을지문덕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통전(通典)’ ‘책부원귀(冊府元龜)’ ‘태평어람(太平御覽)’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의 중국 사서에서 계속 이어졌다. 더욱이 ‘무경총요(武經總要)’라는 병서에서는 살수대첩을 공격시점을 절묘하게 포착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고, ‘고시기(古詩紀)’라는 시문집에는 위의 시를 중국 명시와 나란히 실었다.


그럼 중국인들의 칭송처럼 고구려는 단지 을지문덕의 지략만으로 수나라의 대군을 물리쳤던 것일까?

당시 수나라 군대의 최대 약점은 군량미를 수천 리나 운반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에 고구려는 수 군대의 약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국경에서 도성에 이르는 요새마다 축조해 놓은 물샐틈없는 성 방어체계를 바탕으로 ‘들판에 곡식 한 톨 남기지 않고 성 안으로 들어가 싸우는’ 청야수성전(淸野守城戰)을 펼쳤다.

을지문덕의 유인전과 기습 공격전은 튼튼한 군사 방어체계와 이를 뒤받쳐 주는 조직된 군대와 백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중국사서의 을지문덕 행적에는 이런 것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중국 사서에 가려져 있는 이런 요소를 염두에 두어야 수나 당의 침공을 물리칠 수 있었던 고구려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을지문덕도 혼자만의 영웅이 아니라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적진에 뛰어들며 일반 병사나 백성들과 고락을 같이한 불후의 명장으로 재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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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성장 과정등 을지문덕 기록 없어…

“선비족 출신” 주장도


이선민기자

입력 : 2004.10.15 18:09 50'


을지문덕은 어느 민족일까? 엉뚱하게 느껴지는 이런 질문이 던져지는 것은 그의 조상·출생지·성장 과정에 대해 전하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는 “출생과 성장 배경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조선시대 후기에 홍양호(洪良浩)가 지은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에는 “평양 석다산(石多山) 출생으로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혈혈단신으로 자랐다”고 돼 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없다.


한편 중국 쪽 역사서인 ‘자치통감’에 인용된 ‘혁명기(革命記)’라는 책에는 을지문덕의 이름이 ‘울지문덕’으로 나온다.

중국 북쪽의 유목민인 선비족에는 ‘울지’라는 성이 있어 중국 왕조에도 관료로 많이 진출했다. 을지문덕과 비슷한 시기에는 ‘울지경덕’이란 인물이 활동하고 있었다.

학계 일각에서는 이를 근거로 ‘을지문덕’이 선비족이었다고 주장하고, 다른 학자들은 고구려나 백제에도 ‘명림(明臨)’ 같은 복성(複姓)이 있었다는 점을 들어 이를 반박한다.

하지만 고구려가 부여족이 중심이 돼 말갈·거란 등 여러 민족을 아우른 다민족 국가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을지문덕이 선비족 출신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을지문덕이 ‘고구려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