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14세기 고려선박 발굴된 산둥성 등주고항

한부울 2006. 8. 28. 14:03
 

고려선박 발굴된 산둥성 등주고항

[연합뉴스] 2006년 08월 28일(월) 오전 06:03

                                                [산동성 등주고항 봉래]

 

◇고대부터 수ㆍ당ㆍ북송ㆍ남송


등주지역과 한반도와의 해양접촉은 근대 이전 저 멀리 고대시대부터 이뤄지기 시작했다. 산둥 대석문화유적의 지석묘가 요동과 한반도에서 나온 지석묘와 닮은 꼴을 하고 있는 것으로 미뤄 학계는 신석기시대에 이미 산둥반도 동쪽과 한반도 사이에 해양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당 시대에도 등주고항은 고구려와 전쟁을 하기 위해 중요한 해상 집결지로 활용됐고, 서기 598년ㆍ613년ㆍ664년ㆍ647년ㆍ648년 수ㆍ당의 수군들은 이곳에서 출발해 요동반도와 한반도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고대 한국과 등주 지역의 본격적인 우호왕래는 당나라 시대부터 정착하기 시작했다. 신라 사신이나 유학생 등이 당나라 장안(長安.현 시안<西安>)으로 가기 위해 해상 교통의 중요한 길목인 등주 지역을 들렀다.

북송 시대에도 등주와 고려의 해상교류는 활발하게 이어졌지만 남송시대에 들어와서 등주지역은 고려와의 해양교류가 완전 중단됐다. 등주 지역을 금나라가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어 원(元)나라 때도 고려 사신이 등주를 통하는 해양노선이 여전히 막혀있었고, 이 시기 고려와 원 사신들은 모두 요동반도를 거치는 육로를 이용해 양국 수도인 대도(현 베이징<北京>)와 개경(현 개성)을 오갔다.

                     [산둥성 봉래시 소재 고대 항구인 봉래수성 해저출토된-14세기고려선박]

◇명 건국초 해상 주요 길목 재등장


그러다가 명나라 건국 초기 등주지역은 다시 한번 한반도를 오가는 해상 교통의 중요 길목으로 등장하는데 당시 육로는 압록강에서 요동반도를 거쳐 하북, 북경, 강소 등지를 지나 금릉(현 난징<南京))으로 들어가는 길이 쓰였고, 해로는 크게 항해사단행로와 등주항로가 있었다.

당시 고려 사신들은 압록강을 넘어 육로로 요동반도 끝까지 내려와 여순 지역에서 배를 타고 발해만을 건너 등주에 도달한다. 등주에서 다시 육로와 운하를 거쳐 금릉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해로는 당시 고려 사신들에게 왜적 출몰 등으로 안전에 있어 큰 골칫거리였다. 이에 고려 조정은 명 조정에 육로로 가기를 청원했지만, 고려 사신들은 계속해서 등주항로를 통해 명을 오가야 했다.

당시 요동 북쪽에는 아직까지 원나라 세력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명은 요동을 평정하기 위해 많은 군대와 군사 요지를 건설해 놓아 고려사신들이 명의 군사체제를 염탐할까 두려웠던 것.


◇봉래선 제작연대 '원말명초'라기 보다 '명초'


이번에 발굴된 봉래선은 바로 이 명나라 초기에 중국 등을 오가던 무역선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 순천향대 중문과 박현규 교수는 "이번 봉래선을 발굴한 중국 학자들은 3호 고선박의 침몰시기를 원말명초(元末明初)로 보고 있지만, 역사 문헌에서 원말에 고려 선박이 등주를 방문했다는 어떤 기록도 찾을 수 없는 점 등으로 미뤄 이 배의 침몰시기를 1373-1409년 사이의 명나라 초기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고려 선박은 어떤 돌발적 자연 재해나 인위적 사고에 의해 침몰됐을 개연성이 높다. 역사 문헌에서도 등주고항과 그 출입구에서 각각 조선선박이 세찬 북동풍과 유빙(遊氷)에 의해 침몰될 뻔했다는 기록이 명기돼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