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지리

세종지리지가 말하는 만리장성(萬里長城)

한부울 2014. 1. 8. 20:42

*****************************

세종지리지가 말하는 만리장성(萬里長城)

 

글쓴이:한부울

 

세종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대해서 잠시 집어보고 가자.

현재 전해지고 있는 지리사서(地理史書)에서 세종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대해 반도역사에는 아래와 같이 설명되고 있다.

 

본래 조선왕조실록 세종장헌대왕실록(世宗莊憲大王實錄)은 김종서(金宗瑞1383-1453), 황보인(皇甫仁1387-1453), 정인지(鄭麟趾1396-1478)가 세종 승하 후 문종2년(1452년)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여 2년 뒤인 단종2년(1454년)에 완성되었던 것으로서 실록 148권부터 155권까지는 지리지(地理志)로 편성된 것인데 이것을 세종지리지라고 하며 이것은 이미 세종(世宗,1397-1450,재위:1418-1450) 8년(1425)에 발행된 경상도지리서(慶尙道地理書)와 그외 다른 지리서를 토대로 한 것이며 이것에 더하여 세종지리지가 편찬되기 전인 세종14년(1432)에 조선 최초 지리서라고 할 수 있는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가 편찬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현재 전해지는 것은 편찬기간 겨우 2년 남짓한 세종실록의 세종지리지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다. 

그리고 1425년에 편찬되었다고 하는 팔도지리서 중 죄다 없어지고 경상도지리서(慶尙道地理書)만 규장각에 소장되어 전한다고 하고 있고 또한 팔도지리서를 토대로 1432년에 편찬되기 시작하여 정확히 46년이 걸려 성종9년(1478)에 마침내 완성되었다고 하는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가 있었다는데 이것도 유일하게도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만이 규장각에 소장되어 전한다고 한다.

실제로 남아 있는 것은 편찬기간 겨우 2년 남짓한 세종실록의 세종지리지뿐이라고 하는 우리나라 사서 현황은 한마디로 초라하기가 그지 없다. 

 

이러한 반도역사 설명에서 당연히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어떻게 세종지리지는 불과 2년 남짓한 시간동안 그것도 세종실록 및 세종지리지 모두를 완성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런시간은 당시 상황으로 보았을 때 정리할 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를 완성하는데는 정확히 46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하였다.

또 한가지 의문은 세종8년에 편찬한 팔도지리서 중 현재 규장각에 소장된 것이 ‘경상도지리서’뿐이라고 하였고 또한 조선 최초 지리서라고 하는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에서도 유일하게 남아 규장각에 소장되고 있다는 것은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뿐이라고 하니 어떻게 ‘경상도(慶尙道)지리지’만 남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여기서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판단할 때 단언코 한반도 기후와 지형에 맞을 '경상도지리지'만을 축소하여 일제가 만들어 보관하게 하였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도 세종지리지에서 연원(淵源) 즉 잇다라 이어진다 하였는데 성종 때 명(明)의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가 1462년에 들어오자 성종(成宗,1457-1495,재위:1469-1495)이 노사신(盧思愼:1427-1498), 양성지(梁誠之:1415-1482), 강희맹(姜希孟:1424-1483)을 시켜 그것을 참고(?)토록 하면서 세종 때의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를 대본으로 지리서를 편찬케 하였다는 것이며 이것을 성종12년(1481년)에 50권을 완성하였고, 성종17년에 다시 증산(增刪), 수정케 하여 35권을 간행하였으며 연산군 5년에 개수(改修)를 거쳐 중종(中宗,1488-1544,재위:1506-1544)25년(1530)에 이행(李荇:1478-1534)등에 의해 증보, 신증(新增)판이 만들어지게 하니 이것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라 했다는 것이다.

 

이러나 저러나 전해졌다고 하는 설명이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

 

문제는 실제로 이 두 지리지가 한반도 지리지가 아니라는데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다른 자료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지도들은 모두 동서(東西)의 폭이 넓고 남북(南北)의 길이가 짧은 것이 특징이라고 하였으며, 특히 북부(北部)지역이 남부(南部)지역에 비해 매우 작게 그려져 있다 하여 현재 사학가들이 이것을 당시 변경(邊境)

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하여 폄훼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반도사학자들은 한반도 지형이 남북이 길고 동서가 짧다는 것에서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조상을 어리석다고 가당찮은 헛소릴 하는 것인데 어떻게 자기 나라의 국경이 어떤 것인지 알지못한다고 할 수 있는가?

세계삼한역사(世界三韓歷史)관점에서 볼 때 국경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낮은 것이 아니라 현재 반도사학자들이 오히려 무식한 것으로서 옛 삼한의 강토는 동서(東西)의 폭이 넓고 남북(南北)의 길이가 짧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북부(北部)지역이 남부(南部)지역에 비해 작다는 것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세종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절대 한반도 지리지가 아니라는 결론이다.

 

그럼 본격적으로 만리장성이라는 어마어마한 주제에 들어가 보자.

 

세종지리지(世宗地理志)

평안도(平安道)

大川曰大同江, 卽古之浿江,【《文獻通考》曰: “平壤城東北, 有魯陽山, 魯城在其上, 西南二十里, 有葦山, 南臨浿水。”】 又云王城江

대천(大川)은 대동강(大同江)이니, 곧 옛 패강(浿江)이다.【《문헌통고(文獻通考)》에 이르기를, “평양성(平壤城) 동북쪽에 노양산(魯陽山)이 있고, 노성(魯城)이 그 위에 있으며, 서남쪽 20리에 위산(葦山)이 있는데, 남쪽으로 패수(浿水)에 임(臨)한다.”고 하였다.】

古長城。【俗傳萬里長城, 自麟山郡西鎭兵串江始築, 歷義州南, 連延朔州、昌城、雲山、寧邊, 至于熙川東古孟州之境, 接于咸吉道 定平境。】

옛 장성[古長城]【세속에서 전하기를,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 하는데, 인산군(麟山郡) 서쪽 진병곶강(鎭兵串江)으로부터 쌓기 시작하여 의주(義州) 남쪽을 지나서 삭주(朔州)·창성(昌城)·운산(雲山)·영변(寧邊)에 연하여 뻗치고, 희천(熙川) 동쪽의 옛 맹주(孟州) 지경에 이르며, 함길도 정평(定平) 지경에 닿았다.】

세종지리지(世宗地理志)에 “동쪽으로 함길도 고원(高原)에, 서쪽으로 바다에, 남쪽으로 황해도 황주(黃州)에, 북쪽으로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는데, 동서(東西)가 3백 23리, 남북(南北)이 4백 23리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3권

평안도(平安道)

의주목(義州牧)

【고적】장성(長城) 고려 덕종2년에 평장사(平章事) 유소에게 명하여 북쪽 변경의 관방(關防)을 창설하였는데, 주의 서쪽 바닷가에 있는 옛 국내성의 경계로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으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威遠)ㆍ흥화(興化)ㆍ정주(靜州)ㆍ영해(寧海)ㆍ영덕(寧德)ㆍ영삭(寧朔)ㆍ운주(雲州)ㆍ안수(安水)ㆍ청색(淸塞)ㆍ평로(平虜)ㆍ영원(寧遠)ㆍ정융(定戎)ㆍ맹주(孟州)ㆍ삭주(朔州) 등 14성에 걸치고, 요덕(耀德)ㆍ정변(靜邊)ㆍ화주(和州) 등 3성에 다 달아 동쪽으로 바다에 가까이 붙었다. 연무(延袤 연은 동서, 무는 남북, 즉 넓이, 넓음, 길게 뻗음의 뜻) 1천여 리를 돌로 성을 쌓았는데, 높이와 두께가 25척씩이며, 속칭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 한다.

 

위 세종지리지(世宗地理志)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평안도(平安道)편에 나타나는 것은 놀랍게도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는 단어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장성이라고 하였지만 이것을 속칭 만리장성이라고 정리되었다.

때문에 조선 땅 평안도(平安道) 의주목(義州牧)에 있는 고장성(古長城)은 만리장성(萬里長城)이 맞는 것이다.

의주(義州)가 어딘가?

우린 본 블로그의 글 “멜론(甜瓜:melon)은 조선 의주(義州)에서 나는 것이 최상품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86 ”에서 의주(義州)에 대해 면밀하게 그리고 심층적으로 위치까지 확인해 보았던 적이 있다.

그곳에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있었다고 현존하는 지리서 세종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공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난감하다.

반도역사는 이러한 문구가 분명하게 있음에도 쏙 빼버리고 장성을 기껏 천리장성이라고 해버렸다.

천리(千里)가 아니고 만리(萬里)지 않는가?

천리인지 만리인지도 모르는 바보들이 우리나라 사학자들이 아닌가?

지경이 이러하니 우리사서의 모든 숫자가 10분지 1로 축소된 것이란 의혹을 받는 것이다.

하기사 한반도에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있다고 하면 그야말로 개판이 될 수밖에 없다.

어쨌던 이 단어로 인하여 발생하는 난리를 막아야 하고 꼼수를 대놓고 부린 것으로서 일제사학자들은 반도역사에서 만리장성(萬里長城)이란 단어자체를 가차없이 빼버린 것이다.

그러나 분명하게 세종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으로 만리장성(萬里長城)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숨길 수가 있는가?

 

만리장성은 현재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알기로는 세계 유일한 만리장성(萬里長城:The Great Wall)은 동아시아대륙 신중국이 차지하고 있는 땅에 있다.

그곳 동쪽은 산해관(海關), 서쪽은 가욕관(嘉峪關)까지 총거리는 2,700㎞로서 만리(萬里)가 실제로 못미치는 6,875(里)이다. 그러나 중간에 갈라져 나온 지선들까지 합치면 총 길이가 약 5,000~6000㎞에 이른다 하였으니 15,000(里)가 넘는 경우가 나온다.

그러니 정확하게 만리(萬里)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은 없다.

이것을 현재‘인류 최대의 토목공사의 구축물’이라고 하며 우주에서도 볼 수 있다는 찬사가 끊이질 않지만 지금은 우주에서 보이지 않는단다.

이러한 규모의 만리장성이 어쨌던 한반도에 들어앉아 있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놀랄 노자가 아닐 수 없다.

 

장성(長成)의 기원은 춘추시대(春秋時期:BC770-BC403)의 제(齊)에서 시작되어 전국시대(戰國時代:BC403-BC221)에 들어오면 초(楚), 위(魏), 연(燕), 조(趙), 진(秦)등 북방의 이민족과 국경을 접하고 있던 중원(中原)의 제국(諸國)이 모두 북방의 방어를 위해 이를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중원의 실체를 모르면 모르겠지만 이미 본 블로그를 통해 충분히 검토하고 알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들을 곧이곧대로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중원이 어딘가?

동아시아대륙이 아니다.

중앙아메리카라고 해야 맞다.

그런데 무슨 중원에서 북방이민족을 막기 위해 성을 세웠다는 것인가?

BC222년(秦始皇帝:25년)에 시황제(秦始皇帝:BC259-210)는 중국을 통일한 후 흉노를 방어하기 위하여 북쪽에 만들어졌던 여러 성들을 보수하거나 서로 연결시켜 장성을 쌓았다는 것인데, 이것이 기록에 맞다면 삼한의 장성이어야 하고 물론 세종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만리장성과 일치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揆園史話(北崖子)

(2)余嘗論之,强國之要有三;一曰「地廣而物博」,二曰「人衆而合」,三曰「恒守其性而不失其長」。此所謂地利‧人和及保性也。而朝鮮,則得地利而不全,失人和而亡其性,此萬世之患也。何謂得地利而不全。

내가 일찍이 말하기를 강한 나라의 요건에는 세 가지가 있다 하였다. 그 첫 번째가 땅이 넓고 산물이 풍부한 것이고, 그 두 번째가 사람이 많으면서 화합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항상 그 본바탕을 지키며 자기의 장점을 잊지 않는 것인데, 이는 지리적 이익과 사람의 화합 및 본바탕의 보전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지리적인 이익을 얻었으나 온전한 것이 못 되며, 사람들은 화합을 잃은 데다 본바탕을 망각하고 있으니, 이것은 만세에 걸친 근심이라 할 것이다.

(3)摩利之塹城壇,則經四千載而健存,漠南之長城,歷二千餘歲而猶崇墉屹屹,慶州之瞻星臺,過千數百年而尙巍巍然特立。然特立然則人之所肩擔手磨,規矩繩墨之者,能閱累千載而不滅,獨肩擔手磨,規矩而繩墨之之人生,則與腐血杇肉,盡消永滅於黃沙腐土之中,不曾精靈之有留耶?

마리의 참성단(塹城壇)은 4천년이 지났지만 굳건히 남아 있고, 사막 남쪽의 만리장성은 2천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높은 담으로 쭈삣 쭈삣하게 서 있으며, 경주의 첨성대(瞻星臺)는 1천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높다랗게 우뚝 솟아 있다. 그러한 즉 사람이 어깨로 지고 손으로 갈며 먹줄을 퉁긴 것은 능히 수천 년이 지나고도 없어지지 않았는데, 유독 그것을 어깨로 지고 손으로 갈며 먹줄을 퉁겼던 사람의 생은 부패한 피와 썩은 살과 함께 모두 사라져서 누른 모래와 썩은 흙 사이로 영원히 없어져 버렸으니, 일찍이 정령(精靈)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위 규원사화(揆園史話)는 북애자(北崖子)가 숙종(肅宗) 2년(1675)때 애민, 애족의 일념으로 후세에 남긴 기록이라고 하였다.
그는 무엇을 전하려 했을까?
나는 본 블로그 글 "조선강역(朝鮮疆域)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6 "글에서 그가 전하려 하였던 것은 바로 진실의 역사라고 하였다.

이 글에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강화도(江華島) 마리산(摩尼山)의 참성단(塹城壇), 경주의 첨성대(瞻星臺), 그리고 만리장성(長城)을 세세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물론 만리장성이라고 하는 것은 세종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정의 하듯이 옛 장성(古長城)을【세속에서 전하기를,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는데】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규원사화에서는 장성이 있는 곳으로 "漠南之長城" 즉 사막 남쪽의 만리장성이 있고 2천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높은 담으로 쭈삣 쭈삣하게 서 있다 라고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위 규원사화 원문 (2)를 보면 우리가 새겨 들어야 할 이야기가 나오는데 "강한 나라의 요건에는 세 가지가 있다 하였다. 그 첫 번째가 땅이 넓고 산물이 풍부한 것이고, 그 두 번째가 사람이 많으면서 화합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항상 그 본바탕을 지키며 자기의 장점을 잊지 않는 것"이라고 하면서  "而朝鮮,則得地利而不全' "조선은 지리적인 이익을 얻었다..."고 분명하게 나온다.

즉 조선(朝鮮)은 지리적으로 세계 유일한 강한나라(强國)이었던 것이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조선에 만리장성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사막 남쪽"높은 담으로 쭈삣 쭈삣하게 서 있었던"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찾아야 한다.

 

생각해 볼 때 고대 인류가 만든 만리장성이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었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만리장성이 하나밖에 없었다면 한쪽의 역사는 거짓이라는 말이다.

현존하는 동아시아대륙에 만리장성이 있으니 세종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규원사화 모두가 만리장성이 조선에 있었다는 사실은 거짓일까?

만약 삼한역사가 한반도역사가 틀림이 없다면 우리의 사서들이 거짓말을 기록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역사는 정녕 반도역사일리가 없다는 것이 필연이라면 우리 사서의 기록이 맞을 뿐만 아니라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우리역사의 장성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이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동아시아대륙 역사에 따르면 시황제가 몽염(蒙恬:BC3세기-BC210)장군에게 장성을 쌓도록 명하여 기원전 214년경에 완성하였다 하였으며 동쪽으로는 요동(遼東)에 이르렀고 서쪽은 임조(臨洮)에 이르렀다고 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 사서에서는 고려 덕종(德宗1016-1034,재위:1031-1034) 2년(1032)에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북쪽 변경의 관방(關防)을 설치하고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압록강 상류)으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바다에 가까이 붙었다 하였다.

또한 연무(延袤)는 '끊이지 않고 길게 잇다'는 뜻으로 중간 중간 끊어질 수 있는 곳, 1천여 리를 돌로 성을 쌓았다는 것으로서 높이와 두께가 25척(尺:근초고왕척도-25cm)씩이라 하였으니 높이와 두께가 모두 6.25m 로 입체 정사각형나 되어 엄청난 구조물임을 알 수가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한반도에 있다는 성벽 따위들을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규모이다.

위 원문에 나오는 설명대로 장성을 쌓다보면 중간 중간에 망루(望樓,樓台,樓子)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데 이것을 연무(延袤)라고 하여 '끊이지 않고 잇는 다'는 것임에도 이것을 반도사학자들은 장성이라고 하여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천리장성이라고 해석하였던 것이다.

이게 반도사학자들의 역량이다.

 

우리사서에서는 이 장성을 연결하는 설명이 더욱 세밀하고 위치를 정확하게 나열하고 있는데 세종지리지(世宗地理志)는 “세속에서 전하기를,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 하는데, 인산군(麟山郡) 서쪽 진병곶강(鎭兵串江)으로부터 쌓기 시작하여 의주(義州)남쪽을 지나서 삭주(朔州), 창성(昌城), 운산(雲山), 영변(寧邊)에 연(軟)하여 즉 잇따라 뻗치고, 희천(熙川)동쪽의 옛 맹주(孟州)지경에 이르며, 함길도(咸吉道)정평(定平)지경에 닿았다”라고 세밀하게 위치를 표시하고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동쪽으로 위원(威遠), 흥화(興化), 정주(靜州), 영해(寧海), 영덕(寧德), 영삭(寧朔), 운주(雲州), 안수(安水), 청색(淸塞), 평로(平虜), 영원(寧遠), 정융(定戎), 맹주(孟州), 삭주(朔州) 등 14성에 걸치고, 요덕(耀德), 정변(靜邊), 화주(和州) 등 3성에 다 달아 동쪽으로 바다에 가까이 붙었다라고 상세하게 설명되고 있다

 

그렇다면 만리장성은 근세기에 들어 역사판짜기 과정과 아무런 관계가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가 있다. 

그래서 한번 따져보았다.

좀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현재 동아시아대륙 역사는 1882년 신중국 세우기가 시작되면서부터 연결되며 근세기 중국이란 영역을 옮기기 시작하면서부터 생성된 것이 현재 동아시아대륙역사라고 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동아시아대륙에 있는 모든 유물과 유적들의 생성과정을 우리가 알지 않으면 안된다.

동아시아대륙을 차지하고 있는 신중국은 모택동이가 장개석을 대만으로 내쫓고 대륙을 차지하는 시점 1949년부터 1989년 6월 4일, 천안문사건(天安門事件)을 정점으로 한 1990년까지의 시간은 대륙 역사에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죽의 장막(竹─帳幕:Bamboo Curtain)이란 별칭 속에 모든 사건들이 갇혀 밖으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이야기 하면 그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대륙밖에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오죽했으면 서방세계에서 죽의 장막이라고 까지 표현했겠는가?

거의 신중국영토에서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고 밖에서 들어 갈 수도 없었다.

1992년 사회주의 시장경제정책을 채택하면서부터 어느날 갑자기 신중국은 조용히 문을 열기 시작했고 비로소 세계 인류의 이목이 집중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 이전까지는 어떤 일이 그 땅에서 벌어졌는지 알 길이 없다.

죽의 장막(Bamboo Curtain)이란 철의 장막(鐵의帳幕)과 같은 의미로 동아시아의 신중국 영토 내에 있었던 배타적 폐쇄정책, 고립정책에 이르는 말이다.

 

이러한 "죽의 장막"시대 때 들리는 소문으로는 엄청난 역사파괴운동이 벌어졌다는 사실만이 간간히 알려졌을 뿐이다.

그때 대표적인 것이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이라는 이름으로 무산계급운동이 벌어졌는데 1966년부터 1976년까지 거의 10년 동안 행해진 역사파괴운동이 주류이었다. 이것은 명목상 이상적인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천명하였으나 정작 신중국(新中國)에서는 이 기간을 십년동란(十年動亂)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였으니 우리나라 6.25동란(動亂)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며 그러한 참혹한 환경이 주는 역사적인 배경은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 파괴행위가 무산계급문화대혁명(無產階級文化大革命)이라고 하지만 사상 정화 운동의 성격이 강했다고 볼 수 있으며 기존 교육의 파괴, 그리고 전통적으로 이어오던 풍습과 도덕을 한순간 괴멸시키며 공산당 내의 알 수 없는 내부 권력투쟁과 함께 소수민족 문화의 핍박으로 이어졌는데 이 소수문화 중에서 가장 피해가 많다고 생각되는 것은 바로 삼한 문화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기간동안 엄청난 공포정치가 휘둘려 졌고 파쇼(fascio)란 미명아래 국가권력을 강화하고 개인에게 가해지는 가혹 행위로 인하여 인권이 유린되거나 인과관계의 파괴를 면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할 것은 신중국 영역내에 문화 유적과 전통 유산의 철저한 파괴행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데 대문화혁명 기간 동안 고대건물, 공예, 서적 등의 옛 중국의 많은 역사적 유산들이 "구시대적산물"로 간주되어 파괴되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공예품들은 붉은 완장을 찬 홍위병에 의해 각 가정에서 탈취되거나 혹은 즉석에서 파괴되었으며 이러한 행위로 얼마나 많은 역사 유물이 파괴되었는지 정확하게 기록을 산출하기 어렵다고 하고 서양의 목격자들은 옛 중국 역사의 수천년의 문화유산들이 단 10년간의 문혁기간동안 파괴되었다고 추산하고 있으니 어느 정도인지 알만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파괴행위는 인류 역사상 전대 미문의 행위였다고 말하고 있으며 신중국 역사가들도 문화대혁명을 진시황의 분서갱유에 비유하고 있으니 더 이상 말이 필요없을 것 같다.

 

생각해보라.

이것은 역사청소이기도 하지만 인간청소이다.

이러한 파괴행위로 인하여 결국 파괴 행위를 정당화 할 수 있는 보충물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무엇을 보충하고 어떤 것을 메꾸었을까?

모택동은 역사에 대해 지식이 많았으며 평소 상당한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라는 평이다.

이러한 과정을 그가 기획했다면 어떤 역사적 프로그램이 그 자리를 채우고 메꾸었을까?

1949년부터 1990년까지 거의 40년 시간이다.

이 엄청난 시간동안 무엇을 못할까?

반도역사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일제침략에 의한 식민지 기간이 36년이라고 하여 현재 한반도역사로 탈바꿈한 사실을 보아도 동아시아대륙에 어떤 변화와 어떤 역사가 생성된 것인지 짐작이 가능하다.

신중국 전역에서 고대 주요 건축물들이 신중국 역사에 맞게 곳곳에 새롭게 건립되면서 엄청난 공사가 시작되었다는 사실들이 소문의 꼬리를 잇고 있었으며 그 중 북경의 자금성(紫禁城) 역시 그러한 의혹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어땠을까?

실제로 동아시아대륙에서 신중국 역사를 만드려면 공산당 추종 사학자들이 동원되어 아마도 사생결단으로 만들어야 할 유적들임에 틀림이 없다.

모택동이 정권을 잡은 1949년 이후부터 시작된 역사판짜기는 1990년초 비로소 개혁, 개방정책으로 회귀하며 빗장을 열 때까지 이러한 작업은 은밀하게 비밀스럽게 계속되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 기간 동안 민간인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였다는 사실은 그러한 의혹을 증대시킬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 동안 신중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또하나 놓칠 수 없는 사실을 밝혀본다.

아래 간단한 영어문장은 위키자료이다.

아래 문장의 근거는 19세기초 영국정부가 당시 청나라 가경제(嘉慶帝)와의 무역관계를 개선하기 위하여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하였고 1816년 로드 암허스트 사절단(William Pitt Amherst:1773-1857)의 수행함선으로 주함 1000톤급 수송선 알세스트호(Alceste)의 선장 멕시웰(Murray Maxwell)과 보조함 리라호(Sloop Lyra)의 선장 바실홀(Basil hall)를 1816년 2월 19일 영국을 출항하게 하여 그들은 중국으로 항해에 나섰고 마침내 그해 7월 27일 목적지인 천진(天津)항에 도착하여 암허스트 사절단 일행을 내려준 멕시웰과 바실홀은 암허스트사절단 일행과 6개월 후 중국광동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후 남는 여분 시간을 이용하여 이 두 척의 배는 ‘코리아 서해안’을 방문했다고 모든 자료에 나타난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이 멕시웰(Murray Maxwell)에 관한 행적기록인 아래 문장 속에 숨어 있는데 바로 만리장성에 대한 글이다.

 

During the journey, Maxwell saw the Great Wall of China and discovered serious inaccuracies in the charts of Western Korea, finding it lay 130 miles west of its supposed position.[위키]

 

위 내용을 간단하게 풀어 보면 멕스웰이 코리아 서해안을 여행하는 동안 만리장성을 보았는데 이것의 추정되는 위치로 부터 130 마일(209km:약800리)가량 서쪽에 있는 것을 발견하여 코리아 서부의 해도에서 심각한 부정확성을 발견하였다는 내용이다.

 

도대체 코리아 서부의 해도(charts of Western Korea)가 무엇일까?

코리아 서해안(West Coast of Corea)도 아니고 그냥 웨스턴(Western) 즉 서부이다.

이것은 그냥 한국 서부 즉 조선서부(朝鮮西部),  또는 고려서부(高麗西部)지역이라고 풀이하는 것이 맞다.

그곳을 멕스웰이 코리아 서부를 여행하며 발견한 것이 만리장성이었다는 사실이다.

어쨌거나 그들이 가지고 있던 코리아 서부라는 차드(charts)에는 약 209km 서쪽에 만리장성이 밀려 있는 것을 발견하여 실제로 보니 차드(charts)의 매우 심각한 부정확성을 나타내고 있다는 내용을 말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두가지를 지적할 수 있는데 하나는 우리가 여태 알고 있던 서해안이 아니라 서부라는 것이며 하나는 코리아 서부에 만리장성이 있는데 그곳이 그들의 차드에 그려진 것과는 다르게 서쪽으로 209km 약 500리 정도 밀려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반도사학자들이 천리장성이라고 주장한다.

서쪽으로 500리가 밀리면 천리에서 반이 밀리는데 이제 한반도에서 천리장성은 어디로 갈 것인가 매우 궁금해진다.

 

당시 그들이 방문한 코리아는 한반도 서해안이 아니라 조선이던 아니면 고려이던 통칭 "코리아"란 역사실체가 있었던 영역의 서부지역에는 우리가 꿈에도 알 수 없는 만리장성이 떡 하니 거대하게 버티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