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지리

네덜란드가 건조한 1,000톤급 코레(core)호 정체?

한부울 2013. 11. 16.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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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가 건조한 1,000톤급 코레(core)호 정체?

 

글쓴이:한부울

 

서두
식민지 문서 제255호
생사여탈지권을 가진 코리아
네덜란드와 일본
동인도회사
나가사키 상관의 가치
태평양 근세기와의 조우
결어

 

서두

 

1619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기지로 사용된 지명 바타비아(Batavia)는 옛 자카르타 이름이라고 한다.

현재 자카르타는 인도네시아 자바섬 북서안에 있다.

여기서 1740년에 바타비아에서 발생한 중국인 학살사건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바타비아 학살(Batavia massacre, Chinezenmoord, Murder of the Chinese, Chinatown Tumult)은 1740년에 네덜란드인들이 바타비아에 있는 중국인들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으로서 이때 죽은 중국사람은 거의 1만명에 이르고 근방에 흐르던 시내에 죽은 사람들의 피가 흘러 그 때부터 그강을 칼리앙케(Kali Angke), 한어로는 붉은시내학살사건(红溪惨案)이라고 불리었다고 하였으며 그 후 살아남은 중국인들은 바타비아를 비롯한 네덜란드 자치 구역안에서 일정비율이 넘지 않도록 통제되었고 대학살을 지휘했던 아드리안 발체니에르(Adriaan Valckenier)총독은 본국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1744년 사형선고가 내려졌고 그의 재산은 몰수되었으며 1745년에 감옥에서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비록 네덜란드가 저지른 사건이라고 하지만 그들이 통제하고 그들이 지배한 바타비아에서 설령 한 통제자가 무지막지하게 중국인들을 살상할 것을 명령한 사실이 있다 할지라도 그들의 본래 약탈성과 폭악성을 전제하면 네덜란드 본국(?)에서 총독을 체포하게 하고 사형시켰다는 사실은 도저히 납득하기가 어렵고 네덜란드가 독자적으로 이와같은 해결방법을 찾았다고 보기가 힘든다는 사실이다.

바타비아(Batavia)는 네덜란드민족의 조상인 바타비안스(Batavians)에서 유래된 명칭이라고 한다.

이 땅이 유럽 네덜란드에 있었던 아니면 근세사가 이야기하는 자바에 있었던 그렇지 않고 중앙아메리카 어디에 있었던 간에 바타비아는 중국인 들락거릴 수 있는 영역근처에 있었던 땅으로 오래전부터 네덜란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지역임을 명칭에서 알 수가 있다.

때문에 네덜란드의 고유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을 상대로 이윤장사를 시작하면서부터 자본축적회사가 필요하여 그곳 근방에 동인도회사를 마련하였을 것이고 그러자 이 소문을 들은 중국인들이 바타비아에 몰려들면서 그들의 본래 계산과 어긋나기 시작하여 그들의 목적이 손상되었을 것이고 자신들에게 돌아올 이윤들이 바타비아에 거주하는 중국인들로 인해 반토막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어 회사존립자체가 위협을 받게 되자 중국인과 자연적으로 작은 충돌로부터 시작하여 규모크게 확대되었을 것이고 종국에는 바타비아 통제자가 학살을 명령하는 사태까지 이어질 수밖에 없는 최악의 환경이 당시에 충분히 조성될 수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1588년부터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이 성립하면서 당시에는 총독이 통치했다는 사실은 총독이 여기 저기에 있었다는 것인데 총독이 둘이 될 수 없다고 보면 지휘권을 박탈하는 것으로서 공화국자체가 뒤 흔들리는 심각한 정치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기에 네덜란드 스스로가 나서 이런 부담이 있을 수밖에 없는 면피용 조치를 하였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중국인(화교)들의 상술도 대단했다고 보았을 때 분명히 적잖은 충돌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러나 비타비아가 네덜란드의 본래거주지였고 또는 무역기지로 중요하게 활용되었다고 본다면 그곳을 침해당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고 사생결단 지켜려 하였을 것이 뻔하다.

하지만 당시 네덜란드 이름으로 국가가 성립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세계삼한역사 입장에서는 네덜란드 계(係)라고 할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바타비아사건이 확대되자 가까이에 있었던 중국을 크게 자극했을 것이고 정치적인 문제가 확대되어 중국이나 통제할 수 있는 세력이 나서 해결하려 하였을 것이다.

어쩌면 서세들의 총독이라는 관명도 근세기에 역사만들기에서 꾸민 것이라고 한다면 사건 전말자체가 조작되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다.

아마도 중국인을 상대도 네덜란드인의 오래묵은 감정이 폭발한 것이며 그동안의 불만을 분풀이를 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보다못한 제삼자 통제국이 이 사건에 뛰어 들었을 것이고 네덜란드 자치정부는 이를 하는 수 없이 수용하여 결국 총독이라고 하는 신분을 가진 사람을 책임을 물어 사건을 종결한 것이라고 보일 뿐이다.

이렇게 볼 때 사실상 사건 마무리는 절대로 네덜란드가 독단적으로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근세사가 말한 것처럼 네덜란드 본국의 훈령으로 스스로가 나서 주모자를 체포하여 재판을 열었고 사형선고와  재산몰수를 명하거나 감옥에 가두어 죽도록한 것이 아니란 말이 된다.

당시에도 지금처럼 국제법이나 근역법이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에 맞게 네덜란드 이외 네덜란드를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세력에 의해 처리되었다고볼 수밖에 없다.

결국 네덜란드는 주동자 바타비아의 총독이란 신분을 사형으로 처단하는 극약처분으로 중대한 사건을 마무리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엄청난 사건에서 그들의 통치가가 사형당하는 탈출구를 찾았다는 것으로서 아마도 그것이 네덜란드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의 총독과 같은 지위에 있을 신분을 사형까지 시켜야 하는 극약처분을 감수했다고 한다면 당시에 네덜란드가 바타비아의 모든 통치권을 가졌다고 보기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네덜란드가 최강이 아니라 이러한 한계가 있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그로부터 정확하게 55년 후인 1795년에 프랑스 혁명군 즉 나폴레옹에게 침략을 받고 함락이 되었던 네덜란드에 세운 공화국이름도 바타비아(Batavia:1795-1806)란 사실을 덧붙이지 않을 수가 없다.

 

이렇듯 바타비아는 많은 의문점을 낳고 근세사에서 특히 서양지명들은 뚜렷한 원칙도 없이 여기저기 마구 옮겨 붙어 나열되고 있는 것도 자세히 보면 지명을 이중처리함으로서 무엇인가 들어날 곤란함을 피하고자 한 것은 아닌지도 의심스럽고 그로인해 지명의 혼란스러움이 우리가 역사찾기를 하는데 장애로 나타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바타비아 지명만 하더라도 인도네시아 자바의 자카르타 뿐만 아니라  현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바타비아(Batavia)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 도시들이 수도 없이 많다.

 

미국 일리노이주 케인카운티와 듀페이지카운티에 걸쳐있는 도시

미국 뉴욕주(州) 북서부에 있는 도시

미국 위스콘신주 셰보이건카운티에 있는 자치구.

미국 오하이오주 클레몬트카운티에 있는 마을.

미국 미시간주 브랜치 카운티(Branch county)에 타운.

미국 아이오와주 제퍼슨 카운티(Jefferson County)에 있는 도시의 이름이다.

 

네덜란드가 북아메리카 동부를 식민지하여 뉴 암스테르담(지금의 뉴욕)을 명명하였고 또한 그 옆 가까이 뉴욕(New York)주, 뉴저지(New Jersey)주 등을 식민지로 삼았다는 사실 또한 많은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북아메리카대륙에 여기저기 같은 지명이 있다고 정당화한다.

바타비아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서세에게 유명했던 이름으로서 존재한 것임에 틀림이 없어 보인다.

 

사실 근세기 역사는 서양인들이 주도한 역사고 그들입장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반대로 동양인들 입장에서는 매우 불합리한 역사란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조작되었다고 하여도 애초부터 동양자료가 별도로 있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에 위와 같은 모순과 비정상적인 상황이 들어나도 그러한 사실을 비판이나 부정할 근거가 없었던 것은 인정될 수밖에 없다.

사실 동양역사라는 의미도 근세기 1882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 이전에는 타고르가 설파했듯이 하나의 세계에서 동양이니 서양이니 하여 나누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1922년 세계사가 완성이 되고 그것이 근세사가 되었다는 사실이 존재하는 것은 틀림이 없고 어쨌든 15세기말엽부터 발생된 대항해시대를 근거로 서양사가 기초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역사에서 동양사는 서양사가 만들어지는데서 이용될 수 있는 범위에서 역사로 존재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동양사는 본격적으로 만들어 진 것은 1922년 이후부터라고 판단되는 것도 서양사가 만들어지고 난 후 후처리 되었다는 것에 불과하였을 뿐임을 짐작하고 남음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시대가 변하여 이제 세계삼한역사를 탐구하는 우리는 근세기 역사를 그대로 답습할 수는 없다는 것이고 세계삼한역사를 명확하게 파악하려면 우선 동양이니 서양이니 갈라보면 절대 안된다는 원칙하에서 기존 역사를 다르게 보려고 하며 다르게 볼 수있는 안목까지 필요하다는 것을 강하게 첨가하고 싶다.

 

식민지 문서 제 255호

 

네덜란드가 건조한 1,000톤급 코레아(core)호의 정체를 알려면 1668년 네덜란드 식민지문서 제255호에 나타나는 기록을 유심히 관찰 할 필요성이 있다.

왜냐하면 그 기록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엄청난 역사 사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위 학살사건이 우리의 상식과 다르게 어떻게 마무리 될 수 있었는가에 대한 그 당시 상황을 충분하게 살펴보았다.

문제는 네덜란드를 통제할 수 있었던 강력한 세력권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근세사를 그대로 믿어 버린다면 세계 대양을 주름답던 네덜란드가 북치고 장구치고 다하였을 것이란 사실을 인정하여 이런 불필요한 이야기는 맞지 않는다.

하지만 여러각도에서 알아보았듯이 근세사는 너무나도 서세의 일방적인 역사이기에 때문에 근세가가 절대적일 수는 없다는 것이며 세계삼한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적어도 이러한 모순점을 하나하나 밝혀나가야 한다는 사명감이 존재한다.

 

네덜란드 식민지문서 제255호가 발행된 때는 1668년이라 했으니 조선 현종(顯宗, 1641-1674 재위:1659-1674) 9년이다.

이때 조선의 정치상황은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난 후 전기 조선과 전혀 계보가 다른 인조(仁祖,1595-1649,재위:1623-1649)가 옹립되었고 이어 과로급사, 또는 독살설이 난무하는 효종(孝宗,1619-1659,재위:1649-1659)을 거치면서 드디어 현종이 등극하여 서서히 나라를 평정해 나가던 시기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 즉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는 서세 즉 해적, 해구들의 무자비한 공격이라고 판단하는데 이러한 내란의 성격인 반란을 잘막아 내고 난 후이니 상당한 혼란이 진정된 시기였다고도 생각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시기가 프랑스 왕조 행보와 비슷하게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의 왕, 묘호(廟號)명 조종(祖, 宗)은 공(功)이 있는 자는 조(祖)가 되고, 덕(德)이 있는 자는 종(宗)이 된다는 원칙에서 후세 사관들에 의해 명명되는 것이라고 하지만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볼 때 프랑스왕의 호칭 앙리(Henri)와 루이(Louis)와 흡사하다고 볼 수 있는데 조선 인조(仁祖)이후의 계보와 프랑스 앙리이후의 계보가 거의 맞아 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어 현종(顯宗)은 연대적으로 루이13세(Louis XIII, 1601-1643 재위:1610-1643)계보와 때를 맞출 수가 있다.

물론 이후 숙종은 루이14세, 영조는 15세, 정조는 16세로 이어진다는 것도 이미 밝힌바가 있다.

 

숙종과 루이14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5
영조와 루이15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6
정조와 루이16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7

 

여기서 주의할 것은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근세사에서 프랑스 역시 국가명이 아니다.

거대한 지배권역에 묶여 있거나 포함된 하나의 계열일 수밖에 없는 정황을 본 블로그에서 이미 읽었 보아었다.

근세사에서 프랑스, 독일, 스페인, 네덜란드, 포르투갈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어느 지방에 주도(州都)정도라는 것을 알았고 민족, 인종으로 분리한다 하더라도 계열(系列)정도로 봄이 타당하다는 것도 알았다.

여기서는 글의 흐름을 감안하여 근세사의 명칭을 그대로 호칭하자면 대체로 프랑스지역에는 조선소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프랑스는 선박 건조술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고 17세기부터 상당히 많은 선박들이 건조되어 근세선박리스트에 프랑스가 건조한 선박들이 대다수 등재되어 있음도 알 수 있다.

프랑스는 선박건조에 대한 것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독보적인 것임을 알 수가 있다.

프랑스 혁명 당시에도 이러한 선박 건조기술이 탁월하였기 때문에 수많은 선박을 건조하여 영국을 바다로부터 봉쇄하려고 제해권을 발동하였지만 1805년 10월에 있었던 트라팔가르 해전(Battle of Trafalgar)에서 완패 당하면서 21척의 함선들이 나포를 당하는 수모 끝에 영국에게 제해권을 내주는 결과로 마무리되는 역사를 볼 수가 있다.

이처럼 프랑스가 선박 건조기술이 독보적이었다는 것은 제왕의 계보처럼 조선이 그렇다는 것을 충분하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앙리와 루이계보까지만 그렇다는 것이고 그 이후 순조(純祖1790-1834,재위:1800-1834)부터는 이상하게도 영국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1801-1922)의 조지 3세(George III, 1738-1820,재위:1760-1820)로 옮겨간다.

위 앙리계보를 이야기 하였듯이 프랑스는 곧 조선과 연결될 수 있음을 가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또한 본 블로그 글 "나폴레옹이 주는 단서(端緖) 캘리포니아http://blog.daum.net/han0114/17050659"에서 순조(純祖)때 평서원수(平西元帥)라 일컫으며 횡산(橫山), 발해(渤海)에서 난을 일으켜 ‘乃者八州之連陷。’여덟 고을(州)을 연달아 함락 또는 점령하였던 홍경래(洪景來, 1771-1812)가 나폴레옹이라는 의심을 낳게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근세사에서 나타나는 프랑스의 기록이 바로 조선 또는 '코리아"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하는 것들이다.

이처럼 유럽역사는 조선역사전체를 가름하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 코리아가 '왠 프랑스?'라고 의아해 하겠지만 이것은 본래 조선 즉 코리아가 가진 선박건조능력을 이야기 하려는 것이다.

건조능력이 있으니 선박의 안목도 높았을 것이란 예측도 가능하다.

아래 네덜란드 식민지 문서 제255호의 기록을 보면 도저히 한반도 코리아라고 할 수 없을 조건에서 네덜란드가 스스로 선박을 건조하여 '코리아'에게 바친다는 기록임을 알 수 있게 하는데 내용이 이렇다.

현종9년 1668년 네덜란드 식민지 문서 제255호에는 이때, 동인도 회사가 조선과의 직교역을 검토했던 기록이 남아있다. 1년 후인 1669년 동인도 회사는 새로 만든 상선의 이름을 "코레아호"라 명명했다. 조선과의 직교역을 위해 만들어진 배였다. "코레아호(core)"는 천톤급의 대형 상선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erenigde Oostindische Compagnie:동부인도회사) 입장에서 조선은 중국 진출을 위한 전략적 교두보로 인식됐다. 이 전략적 요충지를 자신들의 무역권 안에 포함시키기 위해 동인도 회사는 조선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직교역 추진에 앞서 동인도 회사는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 1630-1692)이 포함된 조선 잔류자 8명에 대한 소환 문제를 먼저 해결하려 했다. 동인도회사는 이 문제를 바타비아(Batavia)본부에 지시했다. 그러나 아직 조선과 외교관계가 없었던 바타비아 본부는 일본에도막부(江戶幕府:1600-1868)의 중재를 요청했다. 에도막부는 잔류자 소환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오자 적극적으로 나섰다.

1670년 2월, 마침내 잔류자 8명도 고국 네덜란드로 귀향했다.

귀향자는 하멜의 보고서(Hamel's Journal and a Description of the Kingdom of Korea, 1653-1666)를 근거로 14년간의 급여를 지급받았다. 잔류자 송환 문제를 해결한 동인도 회사는 조선과의 직교역 추진을 위해 "코레아호"를 동양 무역본부인 바타비아(Batavia)로 출항시켰다. 동인도회사 출항일지에는 네덜란드를 출발한 "코레아호"가 1670년 4월 2일 바타비아(Batavia)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네덜란드 17인 위원회는 바타비아 상관장에게 조선과의 직교역을 추진하라는 명령도 함께 내렸다. "코레아호"가 출항 했을때 그들 중 몇 명은 이 항해를 자원했었다.

그런데 뜻밖의 문제가 발생한다.

네델란드 17인 위원회

"일본을 제치고 우리가 직접 코레아와 교역을 한다면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을것이다. 조선과의 직교역을 추진하라!"

도쿠가와 이에스나(德川家康)-에도막부 4대장군

"우리는 조선과의 무역에서 우란타국의 개입을 원하지 않는다. 만일 우란타국이 조선과의 직교역에 나선다면 우리는 데지마 상관을 페쇄 시킬 것이다!"

요한 마차이케르-동인도 회사 동양본부장

"일본에 상관을 두고 있는 이상 우리는 일본과의 무역에 불씨를 일으키는 일을 삼가해야 합니다. 코레아와 직교역을 해 보려는 생각은 버려야 할 것입니다." 동인도 회사의 최종 결정은 조선과의 직교역을 포기한다는 것이었다. 동인도 회사가 조선과의 직교역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을 눈치 챈 에도막부가 이를 적극 저지하고 나섰던 것이다. 결국 동인도 회사가 의욕적으로 명명했던 "코레아호"는 조선으로 단 한 번도 항해하지 못하는 운명이 되고 말았다.

위는 사건의 내용 주요 줄거리이다.

 

생사여탈지권을 가진 코리아

 

위 내용들은 도대체 '한반도 코리아'라는 설정을 두고 보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마치 소설같은 이야기지만 그들의 기록으로 남겨진 이야기니 '코레호'로 명명된 선박 실체를 믿을 수밖에 없다.

네덜란드가 어떤 나라인가?

근세사를 보면 1588년부터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Netherlands)을 설립하면서 세계 제일의 무역국으로 발돋움하였고 주주들의 투자를 받아서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였으며 이것을 발판으로 16,000명이나 되는 네덜란드 상인들은 남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의 인도네시아 등의 방대한 식민지를 건설하였으며, 북미대륙 동부 지금의 뉴욕을 뉴암스테르담이라 하여 건설하기까지 하였고 또한 오세아니아주에도 간 상인들은 뉴질랜드를 발견한 사실과 동아시아대륙에 있는 일본에도 진출하여 나가사키에 데지마 상관을 설치하여 활동범위를 최대한 넓혔던 나리였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최소한 1793년 2월 1일 프랑스 혁명으로 출현한 나폴레옹의 선전포고가 있기 전까지 이러한 황금시대를 구가한 나라라는 것이다.

특히 네덜란드연방공화국(Netherlands)의 건립 모토(Motto)는 : "Je maintiendrai" (French) 혹은 "Ik zal handhaven" (Dutch)이듯이 업홀드(uphold) 즉 '유지시키다'를 강조하고 있고 "I will uphold" '나를 인정하다','나를 유지하다', '내가 나를 지켜야 한다' 등 기독교를 말하고 있는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매우 장사꾼만이 생각할 수 있는 극단적인 자주, 자립성을 볼 수 있고 매우 이기적인 구호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위 내용에서 지적될 수 있는 문제는 바로 네덜란드가 건조한 코레호가 코리아에 도착할 수 없었던 배경으로서 네덜란드가 코레호를 건조하여 출항까지 마쳤는데 나가사키에 설치된 데지마상관의 중요성때문에 포기한다는 내용이다.

네덜란드가 코리아에게 어떤 이유이든지 간에 선박을 만들어 바쳐야 했던 것은 틀림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사전 건조가 시작되기 전에 파악되어야 할 것으로서 네덜란드가 그만큼 가치를 두고 있는 동아시아의 활동기지 데지마(出島)상관(商館)으로 인해 발생될 수 있는 문제를 살펴보지 않고 건조 결정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실수를 떠나 엄청난 손실인 것이다. 

 

국제적인 관례의 행동이라면 더욱 그러한 원칙을 지켜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라고 보는데 코레호를 명명하여 코리아와 직교역을 타진하는 문제를 알아차린 일본 막부에서 그들이 중개역할을 막는 행위라고 하여 불만을 토로하고 제동을 건 사실 때문에 거대한 자본으로 수많은 시간동안 건조하여 막상 출항까지 한 마당에 애초목적한 코리아에 당도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허술한 그들의 주식회사 실체를 들여다 보게 하는 심각성이다.

무엇때문에 사전에 문제가 생길 수있다는 판단도 하지 않고 성급하게 1000톤이나 되는 '코레호'를 건조했을까?

그들의 모토와도 전혀 맞지 않는 어리석은 결정이었던 것이다.

이를 반도사관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네덜란드가 그저 이름만 그렇게 붙인 것이니 과장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이미 건조한 상선 이름을 '코레(core)'라고 명명했다는 자체는 선박자체의 권한도 이름과 함께 코리어로 넘어가는 것으로서 작은나라가 큰나라에게 상납이나 헌납하는 수순과 같다라고 생각할 수가 있기때문이다.

 

동인도회사가 무엇보다도 이윤추구가 우선이었던 것을 감안할 때 이런 사전 검토없이 먼저 거대한 배를 건조부터 하였다는 것은 비용손실을 계산하더라도 무모한 짓이라고 할 수 있고 '코레호'란 당시 거대한 선박을 아무런 효용의 가치에 대한 평가나 계산 그리고 뚜렷한 사후대책도 없이 무작정 건조하였다는 사실은 상당한 의문점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뒤집어 생각한다면 근세기에 역사판짜기하면서 서세학자들이 틀에 맞게 꿰 맞추기 한 사실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기록을 남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출항까지 한마당에 무엇이 그렇게 두려워 실행을 할 수 없었을까?

네덜란드가 세계 대양 어디든지 마음만 먹으면 식민지할 수 있는 세상에서 '코리아'가 한반도에 있지 않다면 아무 쓸모도 없는 동아시아대륙 나가사키 데지마 상관 폐쇄가 그렇게 두려웠단 말인가?

아니면 애도막부가 공갈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인가?

이런 간단한 이치에도 맞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큰 줄기를 숨기는 듯한 이야기인 것이다.

당시 선박을 건조하는데 목조 선박으로서 1,000톤급의 선박은 목재로 만들 수 있는 한계점에 있던 규모라는 사실에서 보더라도 1000톤급“코레호”는 건조부터 상당히 주목을 받았을 것이며 관심에 대상이 되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더군다나 선박기술이 뛰어난 '코리아'의 관리들을 만족시키는데 나름대로 상당한 노력을 했을 것이란 예측도 가능하여 조선관리들이 배가 도착할 것을 기다렸을 수도 있는 것이다.

사전 양해각서라고 해야 하나 그런식으로 이미 통보가 되고 알려진 사실들일 것이다.

 

여기서 '한반도 코리아'란 사실에 대해서 따져보자.

반도역사를 인용하면 당시 '코리아'는 한반도에서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내디딜 수 없는 처지에서 다른 나라를 침범도 할 수없고 언제나 대국에 눌려 꼼짝달싹도 할 수 없는 조그마한 나라, 그리고 아무것도 가질 것이 없었던 나라, 당파싸움만 일삼던나라, 하멜이 말했듯이 힘없는 왕과 미개한 백성들이 특별한 자원도 없이 구질구질하게 못살던 나라, 그리고 임진왜란으로 전국토가 쑥대밭이 되어버린 나라, 결국 나중에는 왜구란 해적들에게 결국 식민지가 되어 버린 나라에 무엇이 있어 이런 가당찮은 행동을 하였을까 의문이 왜 들지 않는가?

왜 무엇때문에 당시 세계를 주름잡던 해양대국 네덜란드가 이런 거대한 선박을 단순히 교역 교섭만을 목적으로 만들고 출항까지 하게 되었을까 하는 큰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 배를 건조하고 배 이름을 명명하는데는 지금도 그렇지만 상당한 지명도가 없이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코리아의 '코레(core)'는 영어로 핵심, 축(中心軸)등의 무거운 의미가 있지만 네덜란드가 판단한 것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수용할 수 있는 명칭이었다는 말이 된다.

배를 만들어 주고 뭐라도 빼먹을 것이 있어야 하는데 빼먹을 것이 없었던 '한반도코리아'라면 사정은 크게 달라질 것이 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리아에 도착만 못했다는 것이지 선박 건조후 명명하여 출항까지 하였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시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쩌면 '한반도코리아'에는 코리아의 실체가 없어 물론 들어 올 수도 없었고 들어오지도 않았기때문에 포기한 것으로 기록되었겠지만 근세사가 아닌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는 코레호가 코리아 땅에 당시 이미 들어갔을 것이란 상황을 충분하게 인지 할 수 있게 하고 있다.

기어코 네덜란드가 이와같은 규모의 배를 건조한 것이라면 그들 나름대로 계산이 있거나 특별한 정치적인 목적 또는 상업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생각하기 힘든 다는 사실이다.

또한 위 글에서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조선에 표류한 하멜(Hendrik Hamel, 1630-1692)을 포함한 8인 표류 잔류자를 구하기 위해 이러한 선박을 건조했을 것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윤을 목적으로 한 장사꾼들의 집합체인 동인도회사의 설립목적을 생각하고 주주들의 권익을 생각한다면 오늘날 인권우선주의발상이라든가 도덕적인 판단에서 나올 수 있는 상황설정은 지극히 단순한 것이어서 타당성이 없다 할 것이다.

당시 하멜등이 코리아에 포로신세가 되어 요새하는 말로 인권차원에서 그들을 구하기위해 이와같은 무모한 행동을 하였다고는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이다.

1000톤급 선박을 만든 것은 무조건 '코리아'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만 생각했을 것이고 판단했을 것이며 그렇게 결정했을 것이다.

네덜란드가 '코레호(core)'를 만들고자 한 것은 분명히 엄청난 이윤이나 어떤 거대한 보상을 위해서라고 이해하는 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코리아가 주는 무한의 힘에 굴보이 주는 질서 협조차원이 될 수도 있다.

피치못해 그들이 직접적으로 선박을 건조하여 코리아란 이름을 붙여 상납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점은 분명 이 배를 이용하여 타개하려고 한 것이 있었을 것이고 아마도 그것은 그들의 생명줄인 동인도회사가 죽느냐 사느냐하는 생존의 갈림길에서 '코리아'란 지배력에게 아부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최소한 자원이 없는 '한반도코리아'가 아니라 자원풍부한 거대한 영역의 코리라는 사실을 전제해야 하는 이야기다.

이와같은 설정이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 아닌 것은 이미 세종지리지에 보면 일본이 조선에게 수많은 공물들을 바쳐 수시로 조공했다는 사실이 존재한다.

오늘날 '한반도코리아'에 일본인들이 조공하는 시늉이라고 하는가?

아니면 존경이라도 해 주는 몸짓이라고 하는가?

그들의 발밑 때 만큼도 여기지 않는다.

어쨌든 당시 네덜란드는 절박한 무슨 사정이 있어 선박을 이용하여 이를 타개하려고 했던 것이 틀림이 없고 그들이 이윤을 극대화 할 수 있는 그들의 상선만 제약없이 코리아 영역에 들어갈 수 있는 환경만 주어진다면 어떠한 것도 시행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그것이 진정한 장사꾼의 진면목이 아닐 수 없다.

 

임진왜란의 여파도 생각할 수 있는데 임진왜란이 끝난지가 약 50년 경과된 시점이라 하더라도 아마도 상거래하는데 이 왜란의 휴유증으로 코리아인들이 상당한 거부감을 가졌을 것이고 그로 인해 상거래에서 적잖은 장애와 함께 그들이 원할하게 코리아 영역으로 왕래가 불가능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앞에서 이야기 했지만 임진왜란을 일으킨 주역을 포르투갈이라고 단어했다.

포르투갈 역시 국가이름이 아닌 것은 마찬가지인데 어떤 지역이나 부류정도의 지칭이었을 것이다.

이 포르투갈을 제거한  세력이 바로 네덜란드이다.

그렇더라도 같은 장사꾼이라고 하였을 때 코리아입장에서는 똑 같이 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서세 세력에서 당시 중심역할을 담당하던 네덜란드라면 더더욱 코리아의 경계가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코레호'선박을 상납하는 것 뿐만아니라 그들이 '코레아'를 상대로 장사만 할 수 있게 된다면 당시 '코리아'를 위해 무엇이든 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 그들 장사속의 자립성까지 지배했을 것이란 가정을 충분하게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와같은 거대한 선박 상납은 그들의 존패를 가름할 수 있는 그들에게 지극히 절박한 상황이 주는 정치적인 판단에서 시행된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당시 조선이라고 판단되지만 고려일 가능성도 있는 '코리아'는 이와같은 상응한 조건을 가진 거대한 나라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당시 '조선 또는 코리아'라고 하는 나라는 한반도에 있었던 것이 아님이 저절도 판명이 된다.

그렇다면 당시 하멜은 거짓말을 기록한 것이다.

코리아를 의도적으로 "네덜란드 식민지 문서 제255호"안에 넣고 네덜란드 식민지라는 테두리에 가두거나 씌우려 한 것으로서 하멜의 기록은 지금의 반도사관이 보는 관점이라 하겠지만 본 블로그의 글을 읽는 우리들은 최소한 글쓴이가 주장한 것처럼 다르게 볼 필요성이 있다 할 것이다.

 

감히 내다보건데 '코레아'라고 하는 '고려 혹은 조선'은 네덜란드세력들이 결코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는 거대한 지배력을 가진 나라로서 아마도 그들이 설령 식민지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식민지조차 이러한 '코리아'와 공동관리 할 수밖에 없는 강력한 통제력을 가진 힘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바로 바타비아의 총독을 사형시킨 힘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가 이 때 세계 전역을 손아귀에 넣은 것처럼 포장한 근세사가 있다.

여기서 근세사는 중국이란 틀을 만들어 동아시아에 넣었고 당시 힘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코리아를 완전히 빼버리고 동아시아대륙 귀퉁히 한반도에 가둬놓았으니 그들의 역사사실에서 표현이나 묘사가 자유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찌보면 당시 힘의 원천이라고 할 수있는'거대한 코레아'에 비교하면 한낱 '회사'의 위치밖에 안되는 '네덜란드'가 근세기에 온갖 땅을 지배하였다는 사실은 솔직히 믿기가 좀 그렇다.

서두에서 잠시 언급하였지만 1795년에 프랑스 혁명군이 네덜란드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세운 공화국이 이바타비아(Batavia:1795-1806)라고 한 것은 프랑스가 네덜란드의 근원인 민족성까지 지배한 것이 된다.

결국 네덜란드가 황금시대 운운하였지만 장사로서 이윤을 극대화하는데 꺼리낌이 없었다는 것이지 마치 셰를 휘어잡고 지배력을 가진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어 '네덜란드'란 실체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세력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기어코 그들이 '코레호(core)'를 명명하여 코리아(고려 또는 조선)에게 바치려고 한 것이 단순히 직교역이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명확하게 짐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하나 우리가 혼란을 느끼는 것은 동인도회사란 개념과 네덜란드란 국가 개념이다.

솔직히 당시 네덜란드가 세계 대양을 호령하던 국가라면 현재 인구가 1억은 넘어서야 맞다.

생각해보라.

반도역사에서 조선에게 이렇게 바치고 저렇게 바치며 노략질로 점철되었던 일본도 현재 인구가 1억2천만명이 넘는다.

일제원흉들이 그렇게 일갈했단다,

인구가 1억이넘어야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고...그래서 오늘날 1억명을 넘긴 것이다.

인구를 산수개념으로 따진다 해도 그렇듯 해양을 넘나들면서 각 지역에 뿌려놓은 씨앗들이 수도 없이 많았을 것이고 그렇듯 잠재적 인구가 늘어나게 될 것은 뻔하며 이렇게 저렇게 모인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 된다 할 때 거의 400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도 인구수가 고작 2005년도 기준으로 16,407,491명 정도뿐이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세계인구통계숫자를 들여다 보면 네덜란드의 인구가 그들이 전성기를 구가 할 때인 1700년도에 180만명(1,794,000)이 못되었다고 나오는데 180만으로 세계를 지배한 것이다.

일제 원흉들이 1억이 넘어야 한다는 것은 헛소리가 되 버렸다.

유럽 전대륙의 인구수가 각나라 별로 거진 이런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근세사에서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실제로 유럽각국나라가 근세기에 설쳐 되며 대항해시대를 구가하던 서세라면 절대로 당시 국가로서의 위치에 있질 못했다고 크게 단언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개인과 개인, 단체와 단체, 조직과 조직간 그저 상권을 주고 받은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500년전 1518년 유행한 천연두란 역병으로 한꺼번에 몰살했다고 전하고 있는 아메리카의 인구가 당시에 대략1억여 명이었으나 이 중 90%이상 약 90,000,000명이 몰살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더라도 당시 네덜란드의 인구가 세계를 지배하는데 얼마나 취약한 것인가를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다. 

1800년 초에 독립한 남아메리카대륙의 나라들을 보면 거의가 100만명도 못되는나라가 수도 없이 많았다.

이들 신생국가들과 서세 각 나라들이 크게 다르다고 할 것이 없어진다.

사람이 곧 지배 근원이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은 인구가 1억명이 넘었다는 설이 꾸준하게 존재한다.

 

네덜란드와 일본

 

여기서 네덜란드가 동아시아대륙 열도 서쪽 끝에 있는 나가사키에 상관을 설치했다고 하니 일본과 네덜란드의 관계를 따져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일본이란 실체는 다름이 아닌 네덜란드(和人)이름을 걸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가 힘든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름만 다를 뿐 역사는 같다고 보아야 맞다.

물론 네덜란드도 계열정도의 이름이라고 한다면 거의 홍이(紅夷)란 이름을 가진 세력들의 집합체라고도 할 수가 있겠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당시 네덜란드는 결코 국가라고 칭할 수 없을 위치였다.

아마도 세력권, 지배권에서 배제된 세력에서 나름대로의 힘을 가진 것으로 중심역할을 하였을 것이라고 판단은 가능하다.

위의 인구숫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개 장시꾼의 세력정도로 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것이 근세기 역사를 통하여 나라라고 굳어진 것일 뿐이다.

어찌 네덜란드만 그렇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유럽 신생국가 모두가 이런식으로 근세기에 나라로 생성된 것임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다.

누가 뭐래도 일본은 전통적으로 '코리아' '삼한'의 복속국이었다.

일본이 네덜란드라고 하는 것은 지금도 네덜란드를 화란(和蘭)이라고 하는데 일본인들 스스로는 물론이고 타칭 일본인들을 화인(和人)이라고 했다는 점을 들수가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 대화(大和) 즉 '야마토'라고 하여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도 있다.

화란(和蘭)은 네덜란드 사람이라는 말이며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는 현재 영국이 될 수도 있고 또는 홍이(紅夷)라는 세력도 될 수 있다.

과거 앵글로(Anglo) 와 더치(Dutch)서로 충돌역사가 있다지만 지배한 땅을 서로 교환하기까지 한 사실만 보더라도 이를 알 수가 있다.

매우 혼란스러운 명칭들이지만 이러한 명칭들이 난무하는 것은 과거 그들의 역사와 생활패턴을 읽을 수 있는 것으로서 쉽게 정착할 수 없는 환경에서 치고빠지기를 습성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조건 즉 해적, 해구신분임을 숨길 수가 없다.

1882년부터 서양에서는 해적, 동양에서는 왜구라고 통칭된 것으로 바다의 무법자, 약탈자들을 통칭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도 비유가 가능하다.

서양에서는 '마피아(Mafia)'를 '폭력조직'이 아니라 '범죄조직'으로 묘사되는데 이들은 본래 장사꾼들로서 지배력이나 통제력에 의해 합법적이냐 비합법적이냐에 그들의 명암이 갈렸던 것이다.

설에 따르면 마피아(Mafia)라는 용어는 1282년 시칠리아 만종사건이라 하여 프랑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서 "이탈리아는 열망한다. 프랑스인의 죽음을! (이탈리아어: Morte alla Francia Italia Anela)라는 문구의 머리글자를 취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어원자체는 나쁘지 않다.

그러나 세계삼한역사관으로 볼 때 프랑스는 조선이라고 하였으니 서세들이 프랑스를 좋지 않게 보았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러한 조직과 마찬가지로 장사꾼들은 이러한 규율속에서 움직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 그것이 국가와 비슷한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때문에 일본이란 명칭에서 우리는 포괄적인 명칭을 읽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지극히 당연한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시각적으로는 분명히 동양인과 서양인이 일본이라고 할지라도 분리되어야 맞다.

어찌하여 작은 동양인 일본인이 백인인 네덜란드인이라고 할 수있는가?

나는 이것을 '도플갱어(Doppelgänger)가 지배하는 역사'라고 하는데 본래는 하나이지만 근세기에 갑자기 분신, 복제가 되어 이중으로 나타나게 한 역사를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세계에서 공용어라고 판단되는 산스크리트어로 인류의 조상 또는 시조를 마누(manu)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서양에서는 영어 맨(man) 즉 인간으로 역사를 만들었고  동아시아대륙 동양에서는 한문으로는 인(人) 사람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본래의 역사에서 마누가 변질되어 서샹사에서는 인간으로 나타나고 또한 동양사에서는 사람으로 나타난 것이지만 결국 모두 하나에서 출발한 것이다.

산스크리스트어의 본래역사에서 영어문 역사가 다르고 희랍어의 역사가 다르고 라틴어의 역사가 다르고 한문의 역사가 다른 것과 같다.

도플갱어 사람의 변신이 아니라 근세기 역사가 분신, 복제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혼란은 근세기에서 서세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새판짜기에서 발생된 어처구니라 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근세기 이후 역사판짜기를 새롭게 할 때 과거에는 없었던 동양과 서양이 분리되면서부터 발생된 것으로서 동인도와 서인도가 생성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대항해시대때 네덜란드의 기록은 유럽 네덜란드인이 고스란히 가져 갔다고 볼 수 있고 그들이 실제 활동한 위치는 작은 동양인인이 있는 동아시아 열도 일본에게 넘어간 것이라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

때문에 일본은 아열대지방 곳곳에 거주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동양에서 보면 본래 위치가 동남아시아 자바근처에 있어야 하는 것이 맞고 서양에서 보면 중앙아메리카 연안이나 카리브에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이란 역사명칭은 늘 조선가까이에 있어야 하고 조선을 위협하는 존재로 부각된 것에서 그것만 따로 떼어 한반도와 함께 열도에 심었던 것이 틀림이 없다.

이것이 오늘날 말도 안되는 동양 역사구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근세기에 더욱 아연실색하게 만드는 것은 거주역사가 분명치 않은 일본 열도세력들이 역사반전을 이루게 한다는데 있고 한반도를 일본이 식민지화한다는 상황까지 도가 넘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서세가 유럽땅으로 들어가면서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도록 한 것은 그들의 구차한 자취를 없애려는 방도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기회가 작은 동양인 열도 일본인에게 제공되었고 이것을 이용하여 일제식민지사를 구가 한 것이 일제라고 정리가 되겠다.

어쩌면 서양세력들이 가지고 있던 구차한 껍데기를 작은 동양인 일본에게 벗어 주는 대신에 적절한 보상을 한 것이라고 보면 정확한 비유가 될 수있을 것이다.

 

사실상 근세사가 이렇듯 엉망진창으로 변하게 된 가장 주된 요인을 꼽으라면 바로 이탈리아의 탐험가인 마르코 폴로(Marco Polo,1254-1324)의 저서 '세계 불가사의의 서(Livres des merveilles du monde)'가 근세기에 제목이 바뀌어[동방견문록:The Travels of Marco Polo]으로 둔갑하는 바람에 모든 것이 그처럼 둔갑해버린 결과라 할 수가 있다.

지팡구(Cipangu)가 일본(日本)이라는 것을 근세기 학자들에의해 단정하면서부터 시작된 혼란이다.

지팡구 역시 위치적으로 보면 아메리카대륙이어야 맞다.

 

또한 근원적으로 일본(日本)이란 국명은 백제의 명호란 사실은 삼한사서에 기록된 것이다.

그것을 일본이라고 하여 작은 동양인에게 붙이고 또한 동양사에 떼어 맞춘 것에 불과하는 것이다.

결국 일본이란 명호는 삼한역사성으로 따질 땐 우리에게 거부감이 없어야 맞다.

하지만 근세기 이후 의도적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서양 앞잡이노릇을 하고 실제로 대조선을 와해시키는데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나며 그것에 대한 댓가로 현 동아시아역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할 수 있도록 배려 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즉 지금 일본이란 세력은 결국 삼한역사를 팔아먹은 꼴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인들은 일본을' JAPON'이라 지칭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데 이 자폰이 가진 본래의 뜻은 절대로 작은 동양인 일본이 가질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뭐도 모르고 열도 일본인들은 취해서는 안될 업보를 취한 것이 된다.

'JAPON'를 2차세계대전 당시 서양사람들이 음흉하고 믿을 수 없다고 한데서부터 출발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 명칭은 오래 된 것으로서 지금도 비하, 멸시의 대상이 되어 있다.

하지만 서세는 'JAPON'이 해적, 해구신분으로 설쳐 될 때 서세의 껍데기란 의미를 모를 턱이 없다.

이것을 작은 동양인에게 벗어던져 주고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역사 아이러니(irony:反語)가 아닐 수 없다.

다시말해 대항해시대는 대해적시대라고 하여야 하는데 이것을 기반으로 하는 서양세력들은 이 'JAPON' 이라고 하는 범주에서 절대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아마 문신처럼 각인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세들은 기독교를 앞세우고 있지만 그간 역사에서 상당한 열등의식을 가졌던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대항해시대란 것은 허울좋은 개살구로서 약탈시대, 침탈시대이다.

해적, 해구란 신분으로 그들이 발 닿는 곳 어디든지 쳐들어가 그들의 땅이라고 하였을 때고 그곳에  엄연히 전통 역사를 가지고 존재한 역사실체를 무시하고 원주민들을 가차없이 학살하며 인간백정짓도 마다하지 않았으니 이러한 이력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어차피 비주류로서 주류를 피해 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주류들이 이들을 통칭할 때 행동이나 성질이 약삭빠르며 툭하면 속이고 너절하고 더럽다고하여 그들을 원숭이와 같다 하였으며 그것을 오래전부터 잽'Jap'이라 하였고 이것을 현재 미국속어로 남아 있다는데 그 뜻을 보면'야비한 기습', '숨었다가 몰래 기습하는' 식의 불연듯 나타나는 해적이나 해구에게 붙였던 이름임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그들은 이 'JAPON' 에 대해서 분명하게 해명하지 않을 것이지만 현재 동아시아대륙 열도 작은 동양인 일본인에게 붙여 그들 서양인들이 비하하고, 멸시하는 것이 어찌보면 터무니 없다고 볼 수도 있다.

마치 우리가 열도 일본인들을 '원숭이 왜구'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지만 따지고 보면 서세들은 그렇게 부를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러한 지칭은 구세력이라고 하는 삼한의 역사주체들이 부를 자격이 있는 것이다.

때문에 'JAP' 이나 '왜구'는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근세기를 거치면서 서양세력들은 고상한 유럽인으로 거듭나면서 이미 벌써 벗어던져 버린 추악한 껍데기에 불과하고 어리석은 작은 동양인은 이 껍데기를 기꺼이 물려 받은 것이다.

정말 우습지 않는가?

이 추악한 껍데기를 아낌없이 일본열도인들에게 물려 주었고 이것을 열도 일본인들은 업보처럼 스스로 위안을 하며 기꺼이 받아 덮어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때문에 그런 역사를 택했을까?

안타깝게도 이 작은 동양인은 역사란 근본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JAPON' 에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포르투갈이 있고 네덜란드도 있으며 지금의 앵글로 라는 영국도 있으며 홍모번(紅毛番)도 있으며 하란인(荷蘭人)뿐만 아니라 아란타(阿蘭陀), 화란(和蘭), 화란타(和蘭陀), 아란타(阿蘭陀), 하란타(荷蘭陀), 이것을 모두 합친 홍이(紅夷)란 한 세력들 모두가 결국 'JAPON'이라는 껍데기 속에 있었던 세력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놓칠 수가 없다.

결국 일본이라는 동양명칭은 동양 즉 아시아에만 통용된 것이 아니라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볼 때 세계사에서 해양시대를 구가하던 서양세력들에게 붙여야 할 이름으로 기억해야 할 이야기다.

 

동인도회사

 

이제 동인도 회사(東印度會社:East India Company)를 살펴보자.

동인도회사는 근세사에서 마치 역사 근원처럼 아니면 거대한 동력쯤 여길 수 있도록 존재자체가 실로 어마어마한 전지전능한 신과 같은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 없을 정도로 힘을 가진 거대한 국가와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수도 없이 나타난다.

동인도회사는 근세사에서 서양유럽인들이 동방진출을 목적으로 세운 주식회사라고 하였고 동양을 상대로 무역과 식민지점거를 위한 전초 기지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거대한 힘이 식민지를 만들기 위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딜향해? 동양이다.

그들의 지도는 동쪽의 끝을 아시아대륙 시베리아 동단에 두고 배링해를 끝으로 한다.

그러니 아메리카대륙은 자연스럽게 서양 끝을 장식하는 대륙으로 존재한다.

때문에 아메리카대륙은 서양이다.

즉 동양은 아시아 동쪽 동단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세계지도를 그리자면 동쪽 끝은 아메리카대륙이어야 맞다.

 

동인도회사가 설립했다는 년도를 보면 제일 먼저 영국 동인도 회사:1600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1602년, 덴마크 동인도 회사:1616년, 프랑스 동인도 회사:1668년, 스웨덴 동인도 회사:1731년, 포르투갈 동인도 회사만이 설립년도가 알려지지 않고 있는데 서양사를 보면 제일 처음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0-1524)가 인도 남서 해안의 항구 캘리컷(Calicut)에 도착한 후, 1511년 말레반도 끝에 있는 항구 도시 말라카(Malacca)공략하여 본격적으로 동남아시아에 진출하였고 1513년에는 중국과 자바섬에도 포르투갈 선대를 파견했다라고 되어 있다.

사실 동남아시아에서 단번에 중국이라 하고 자바라고 하는 것은 위치상 근거리라고 할 수 없어 표현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안다.

그렇지만 그런 것이 겠지하고 만다.

포르투갈은 마침내 인도네시아 최북단에 있는 작은 테르나테 섬(Ternate, Maluku Islands)에 도착하여 그곳에 성채를 축조하여 기지로 삼았다고 하는 것이 동인도회사의 역사의 첫 일보이다.

그러니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를 서세가 구가할 수 있도록 길을 터놓은 것인데 이것이 정말 동남아시아인지 알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들 동인도회사(Verenigde Oostindische Compagnie)가 지금 아시아대륙 인도아대륙(印度亞大陸)에 있었다고 강변하는 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았을 때 타당성이 없는 이야기란 결론이다.

왜냐하면 동인도회사는 인도에 기지를 두고 있었다고 하면서 출발하는데 현재 아시아 인도대륙에 있었다는 것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많은 분량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이기에 다음기회에 충분하게 논하기로 하고 그들의 항로에서 많은 문제점과 모순을 낳고 있다는 사실만을 한번 따져보자.

먼저 동인도회사(Verenigde Oostindische Compagnie)의 단어들을 풀이하면 네덜란드어(Dutch)'Verenigde' 는 영어로 'United' 이다. 또 'Oost-Indische'는 동쪽, 동부를 의미하는'East'와 인도열도, 군도를 나타내는 단어'indische'가 합성된 것으로서 영어로 제도의 총칭 인디즈(Indies)와 같다 할 수 있는데 이것을 그대로 사용되면서 현재 인도네시아가 생겼다고 볼 수가 있으나 동인도회사의 전체 문장을 연결하면 인도제도 또는 군도, 열도(indische)에서 동쪽, 동부에 위치하는 회사 연합체를 의미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다.

다시말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동인도(東印度:East india)니 서인도(西印度:West india)니 하여 완전히 세계를 동서로 나눌 범위 만큼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동인도(East india)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동인도회사(East india)라고 하면 거대한 대양을 오고가는 범위에 있는 회사이거니 하여 마치 아시아 전 지역을 휩쓸고 다녔다고 할 수 있어 거대한 나라와 같다고 생각하는 착각에 빠졌었다.

이것이 오류인 것이다.

 

결국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Verenigde Oostindische Compagnie)라는 것은 역사성이 깊은 인도(印度:India)에 많은 회사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인도대륙과 별도로 제도, 군도에 포진하고 있는 회사들에서도 위치가 동부에 있는 회사만을 모두 집합한 명칭임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을 약칭 'VOC' 라 했던 것이다.

또하나 살펴볼 자료가 다음 같은 것이 있다.

"de l'archipel Indien et du Japon"

바로 "인도(印度)군도, 열도와 일본"이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결코 일본을 열도나 군도라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고 지금까지 인도라면 무조건 인도아대륙으로만 알고 있던 상식에서 인도(印度)도 군도와 열도가 존재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 수가 있는 자료인 것이다.

매우 놀라울만한 이야기다.

위 문장은 독일네덜란드(German-Dutch)의 식물학자(botanist)인 칼 루드비히 브룸(Karl Ludwig von Blume:1796-1862)저서[Collection des Orchidées les plus remarquables de l'Archipel Indien et du Japon:日本和印度群岛的兰花主要品种(1858-1859)]의 표지에 적힌 글의 일부이다.

 

 

도대체 아시아 인도아대륙에 무슨 군도가 있고 무슨 열도가 그렇게 많이 있는가?

그래서 찾아보았다.

스리랑카말고는 눈에 띄는 것이 없다.

이것은 바로 아메리카대륙 카리브해 군도와 열도를 이야기 한 것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게 한다.

그곳을 인도(印度)군도 또는 열도라고 지칭하지 않으면 다른 곳에 그렇게 지칭될 만한 곳이 없다는 사실을 금방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 동남아시아의 제도들을 그들은 순다열도라고 분명하게 호칭했다.

때문에 인도열도, 인도제도라는 것은 동남아시아가 아님도 확인할 수 있는 문제이다.

우리는 일본이 본래 열도이고 군도의 나라라고 알고 있었지만 위 지료는 이러한 것이 크게 잘못된 것임을 밝혀주는 것이다.

프랑스어 "데 라아쉬펠(de l'archipel)"은 영어 'the archipelago'로서 군도이고 다도해이고 열도인데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처럼 일본이 열도이고 인도가 대륙이라면 위 프랑스어 제목에서 "de l'archipel"를 'Indien' 앞에  붙이지 않고 'Japon' 앞에 붙여야 했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다.

이러한'de l'Archipel Indien' 사실과 위 "Oost-indische" 는 상통하는 것이다.

즉 동인도회사는 제도나 열도나 다도해라고 할 수 있는 인도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동인도회사(The East India Company)는 아시아 인도아대륙(印度亞大陸)에 있었다고 알고 있었다.

 

한가지 언급할 것은 인도네시아가 무슨 뜻이겠는가?

인도네시아(印度尼西亞)의 어원도 사실상 따지고보면 인도의 군도, 인도의 열도란 프랑스어원에서 발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정식으로는 인도네시아공화국이 1949년 네덜란드로 부터 독립이되면서부터 생긴 명칭임을 상기해야 한다.

인도(印度)는 대륙이외 열도(列島) 또는 군도(群島)로서 존재했을 것이며 이렇게 오래전부터 불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것을 현재 인도네시아라 하고 열도(列島) 또는 군도(群島)라고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인도네시아의 네시아의 어원은 그리스어 'nesos' 로서 분명'섬(島:island)'을 뜻한다.

때문에 현재 인도네시아는 어원상 맞지 않는다.

즉 다도해(多島海), 열도(列島) 또는 군도(群島)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알 수있는 것은 바로 인도(印度)란 명칭은 오래된 역사속에서 사람들에게 각인 된 것으로 속칭이 대명사처럼 굳어진 것이며 실제 시대가 변하여 그곳 영역을 지배하는 나라이름이 별도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과 별도로 통칭되던 것임을 알 수 있고 이러한 포괄적인 인도란 명칭 안에 많은 섬으로 구성된 다도해 또는 열도, 군도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것를 'indische' 혹은 'de l'archipel Indien' 이라고 하였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때문에 현재 동남아시아의 인도네시아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열도나 제도등이 아니라 몇개의 큰 섬으로 구성된 곳을 지칭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현재 인도네시아는 인도아대륙 본토와도 별개의 지역으로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들은 본래의 인도란 개념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어 본래의 인디즈(indies)가 아님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동인도회사는 아시아에 있을 명칭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위키자료를 참고 하면 동인도회사가 아시아에 있었다고 확신하기가 어려운 문제들을 볼 수가 있는데 자료에서 네덜란드는 1602년에는 동인도회사를, 1621년에는 서인도회사를 설립하여 아시아와 아프리카 및 아메리카까지 진출하였다고 나온다. 

당시에 네덜란드에는 16,000명의 상인들이 활동했다고 하였으나 상인들이니 솔직히 배를 타고 이들이 어딜 못가겠는가?

이 상인들이 간 곳을 전부 식민지라고 하면 너무 넌센스같은 이야기다.

설령 이 상인들이 잘 훈련된 해적이라고 할지라도 그러한 조직력으로 나라를 구성하거나 나라를 공격하여 침략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고 본다.

더군다나 지금까지 네덜란드는 아시아의 인도네시아를 식민지했다고 하는데 명확하게 들어나는 자료가 없다. 다만 인도네시아의 바타비아를 자바섬에 있었던 자카르타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정도로 인지할 수 있지만 실제로 아시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는 점도 밝힌다.

또 자료를 보면 네덜란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식민지했다고 하였는데 포르투갈이 점령한 것을 그대로 빼았다고 보면 조금은 이해가 되나 국가와 상대하여 그곳을 점령했다거나 현지 원주민들과 대대적인 전쟁을 하고 지배한 것은 아니란 점이 여러각도에서도 감지된다.

해적들이 갑자기 들어닥치면 충돌할 것이고 그래서 사상자가 발생하는데 그것을 전부 국가를 상대로한 전쟁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또 특이한 사실은 명청전쟁시기(1618-1662)인 1652년부터 1674년까지 '앵글로' 영국(Anglo)과 '더치' 네덜란드(Dutch)의 3차례 걸친 지들끼리의 전쟁이 있었다고 하는데 나는 어차피 같은 해적입장에서 전쟁이라고 하니 좀 어색함을 느끼게 된다.

하기사 근세기에 모든 전쟁을 날조할 때 그림을 그려놓고 그렇듯하게 포장했다는 사실말고 덧 붙일 것이 없다.

이 두번째 충돌일 수밖에 없는 2차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끝난 후 영국은 뉴암스테르담(New Amsterdam)을 얻었고, 네덜란드는 수리남(Surinam)을 확보한다는 조약이 맺어지며 이것을 1667년 브레다 조약(Treaty of Breda)이라고 한다.

서세들은 서로 이권다툼의 충돌에서 늘 조약이나 협약을 통해 전쟁을 끝내는 룰이 상호간 암암리에 존재하였던 것 같은데 근세기 역사를 보면 모두 이것을 통해 기록으로 보전됨도 알 수가 있다.

물론 그림도 덧붙인다.

북아메리카대륙의 뉴암스테르담 즉 뉴욕을 영국이 차지하게 되고 대신 네덜란드는 수리남을 차지한다는 상호교환에서 그 영토의 서로 상대적으로 가치를 논하기 이전에 대항해시대라고 하여 서세(해적)들이 마치 온천지를 지배하는 것처럼하여 지들 마음대로 주고 받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인간에게 오래전부터 전쟁이라는 개념을 파고 들 때 생명과 같이 생각하는 영토가치에서 파생하는 감정적인 해소가 완전히 생략되거나 무시되어버렸다는 서술에서 상당한 모순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근세기 북아메리카대륙을 평정하는 문제에서도 미국은 영국과 동부13개주를 제외하고서는 거의 전부 유럽세력들로부터 할량 또는 양도 따위로 영토를 수용하는 식으로 처리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영토가치를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물질적으로 단순하게 처리되었음도 알 수가 있다.

이것이 근세사의 모순이고 오류라는 것이다.

서로 같은 신분의 해적이니 충돌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수많은 충돌이 근세사에서 국가대 국가의 전쟁으로 둔갑하여 수만리 떨어져 있는 땅들을 서로 조약을 통해 지배력을 넘기고 받고 한다는 것은 애초 국가개념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고 개인과 개인끼리 상권을 넘겨주거나 받거나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서세들의 역사는 해적들의 역사로서 절대로 국가적인 역사가 아닐 것이며 그들이 들어내지 않는 역사가 동양역사로 둔갑하게 하였을 뿐 당시 그들이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지배세력이 존재하였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이 좀 넘친다고 보고 네덜란드가 선박을 건조하여 바치려 했던'코리아'라고 하는 것이다.

네덜란드 역시 1602년에는 동인도회사를, 1621년에는 서인도회사를 설립하였다고 하는 것에서도 지구전체를 동서로 분할하여 마치 손아귀에 넣고 동분서주하였다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앵글로가 현재 영국(Anglo)이라는 사실도 이상하지만 1664년에 아메리카대륙의 뉴네덜란드(New Netherland)라고 하여 동부 코네티컷(Connecticut), 뉴욕(New York), 뉴저지(New Jersey), 델라웨어(Delaware)를 침략하여 뉴암스테르담을 점령하고 이를 뉴욕으로 고쳤다고 하는 점과 뉴(New)가 너무 남발되고 있다는 점도 면밀하게 살펴할 문제로 보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믿을 수가 없는 사실들이다.

 

앵글로에게 넘겨받은 수리남이 본래 네덜란드의 식민지(상권?)이라는데 동의한다.

그렇다면 네덜란드의 활동지역은 절대로 동남아시아가 될 수가 없다.

이러한 구도는 그들의 해상술로는 무리라는 것이다.

역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남아메리카대륙 동북부에 있는 수리남(Suriname)으로부터 가까운 곳에 설치했을 것이라고 보이고 수리남은 네덜란드의 근원지라고 할 수 있고 나무신발, 나막신을 신고 생활하던 홀란드(Holland)의 주민들이 그곳에 살지 않았는가 하며 혹 근세사가 말하는 식민지들은 그들의 독특한 상권을 확보하고 난 것일 뿐인데 마치 지배권과 통치권한을 가진 것처럼 날조하였던 것은 아닌지 그래서 전혀 그곳에 존재한 통제력과 전혀 상관없이 마음대로 상거래를 할 수 있었던 지역이라 하여 식민지(植民地:colony)라 한 것은 아닌지 의혹스럽다 할 것이다.

 

나가사키 상관의 위치 모순

 

위에서 일본은 열도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았다.

오히려 인도를 군도 열도라고 하였다.

인도 역시 고대인도를 대명사처럼 불리었던 것이고 인도대륙이 다른 국가명으로 불렸다면 인도 부속도서 다도해 즉 열도, 군도라는 이름으로 인도(印度)와 별도로 호칭했음도 알 수가 있었다.

때문에 1492년에 콜롬버스가 서인도를 발견하고 그곳이 인도라고 했던 것은 정확한 판단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결국 콜롬버스는 목적대로 인도를 찾은 것이다.

그곳은 역시 데지마 상관이 있어야 할 곳이다.

 

데지마(出島)란 1634년 에도 막부(江戶幕府:1600-1868)시대때 쇄국정책의 일환으로 나가사키(長崎)에 건설된 인공섬이라는데 1641년 히라도(平戶)에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상관(商館)을 이곳으로 옮기고 네덜란드인들을 거주시켰다는 곳이다.

인공섬은 무엇일까?

흙과 돌을 인간이 힘으로 날라 덮어 만든 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요사이 간척사업정도이었을 것이다.

바다 한 가운데 섬을 만든 것이 아님을 충분하게 알 수가 있다.

나는 이미 동아시아 열도에 나가사키니 히라도니 데지마니 하여 마치 본래 이런 지명들이 존재한 것처럼 하는 자체가 비위를 상하게 하여 거론조차하고 싶지 않지만 글의 연속성을 위해 언급하자면 정말 진짜로 당시 세계 대양을 주름잡던 네덜란드가 동아시아 열도에 무역상관을 설치한 것이 사실이라면 나가사키는 자바 즉 자카르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있어야 맞다.

 

실제로 동아시아대륙 역사는 1882년부터 생선된 역사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사실이지만 하나의 역사를 동양과 서양역사로 나뉘면서 동양역사만을 떼어 동아시아대륙에 심을 때부터 파생된 오류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 역사는 하나의 역사로 존재한 것일 뿐이지 동양역사는 없다고 해야 맞다.

18세기 말까지의 서양고지도를 보면 알 수 있는데 동아시아에는 지명조차 확실하게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이다.

물론 하나의 역사에서는 분명 각각 지명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었을 것이지만 근세기에 이것을 완전히 빼버렸고 그래서 우리는 도무지 알수가 없다.

서양고지도에서 한반도와 열도를 놓고 보더라도 큰 지명 몇개만 표시되어 있을 뿐 자세하지 않다.

거의 불분명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데 무슨 상관인가?

지명도 불분명한 동아시아에 그들은 무엇을 추구했을까?

그곳에 중국이 있었고, 코리아가 있었고 일본이 있었다고 하고 있으니 답답한 이야기 아닐 수 없다.

 

네덜란드가 지금의 열도에 무역상관을 설치했다는데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지리적 위치문제가 가장 크다라고 할 수 있다.

15세기 말엽부터 대항해시대가 촉발된 이유로서 서양세력들이 값비싼 향료(香料:spice)을 구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을 때 그것들을 구하기 위해 경쟁이 되었고 결국 찾았다고 하는 곳이 말라카(Malacca), 수마트라, 자바섬이다.

그기까지 그렇다치고 그렇다면 향료생산지에서 상당히 동떨어진 곳, 왜 동아시아 열도에 상관을 설치했을까?

그것은 코리아와 중국을 상대로 교역하기 위해 중개 기지역할의 위치가 적합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문제는 중국과 코리아가 동아시아대륙과 한반도에 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만약 세계삼한역사관으로 보았을 때 들어나고 있는 중국과 코리아가 그런 것이 아니라는데 결국 동아시아 열도에 네덜란드가 상관을 설치하였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다.

 

당시 상황을 역사적으로도 보면 1598년 7년전쟁, 또는 반란이라고 하는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비록 많은 피해를 양산하였지만 마침내 란(亂)을 제압한 대조선(大朝鮮)의 승리로 끝나면서 왜구집거지에 수많은 난민이 양상 되어 혼란이 일자 새로 집권한 덕천가강(德川家康)은 예수회 포르투갈(임진왜란의 주역)과 완전한 관계를 끊어버리고 패퇴한 전범인 풍신수길(豊臣秀吉)과 그 일당을 처단하여 대조선에 충성맹세한 결과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란 작위가 내려짐과 함께 막부정부가 생성되고 왜구들을 양민으로 양성화하는 정책으로 전환되었다고 본 블로그에서 설파한 적이 있다.

나는 이것을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바통터치(Baton touch)라고 생각한다.

임진왜란은 포르투갈이 일으켰고 이에 대한 마무리는 네덜란드가 하였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포르투갈은 물론이고 네덜란드와도 일본은 같다라는 공식이 성립된다.

 

 

 

위 네덜란드 식민지 문서 제 255호에 보면 코레호라고 명명하여 코리아로 들어갈 수 없었던 이유로 당시 정이대장군이었던 막부 덕천가강이 "우리는 조선과의 무역에서 우란타국의 개입을 원하지 않는다. 만일 우란타국이 조선과의 직교역에 나선다면 우리는 데지마 상관을 페쇄 시킬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만약 실제로 당시 상황을 들여다 보면 과연 덕천가강이 이러한 발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인지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한반도에 코리아가 있었다는 사실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고 하나의 역사를 동양과 서양으로 분리하게 되면서 부터 발생한 불필요한 사건전개라는 사실이다.

잘 이해가 될지 모르겠지만 포르투갈이 풍신수길이고 네덜란드가 덕천가강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할 이야기다.

한마디로 네덜란드가 코레호를 명명하여 그 선박을 몰고 들어가 코리아에게 상납하려는 기록을 세세하게 풀어보면 당시 코리아는 거대한 나라였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근세사에서는 1598년 임진왜란이 마무리되고 난 후 1602년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을 대신하여 동인도회사 설립을 새롭게 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여세를 몰아 영국 함대를 물리치고 쇄약해진 포르투갈을 제치면서 동인도제도(Malay Island,諸島)를 장악하였으며 1619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자바섬 북부에 바타비아(Batavia)를 거점기지로 만들고 그 주변 섬들을 정복하면서, 그곳에서 생산되는 특산품을 직접 재배하거나 현지인으로부터 강제 매입하여 무역을 독점한 것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살펴보면 이러한 자료가 여기저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네덜란드 식민지 문서 제 255호에 나타난 코레호 명명기록은 1668년에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는데 포르투갈 대신에 네덜란드가 바타비아에 거점을 만들고 난 후 약 50년이 경과한 시기이다.

상황이 어느정도 짐작가는 것이 있지 않는가?

덕천가강의 발언을 분석하면 결국 네덜란드는 코리아에 들어가려 하였지만 다시 네덜란드가 코리아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한사코 반대한 것이나 다름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혼란스럽지만 나가사키는 그러한 구도속에서 찾아야 한다.

정녕 동아시아라면 1839년-1842년까지 영국에 의해 발생되었다고 하는 아편전쟁과 마찬가지로 홍콩에서 밀고들어가서 광동, 광주를 발판으로 삼은 것처럼 네덜란드는 그러한 행로를 택할 수 있었고 물론 상관도 지금의 열도에 설치할 것이 아니라 중국을 목표로 한 것이라면 홍콩이나, 대만이나, 아니면 마카오를 선점하여 그곳에 설치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때까지 무조건 네덜란드가 동아시아 진출에서 영국보다, 포르투갈보다 우위를 점한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홍콩이나 마카오를 네덜란드가 차지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1553년 중국 무역권을 획득한 것은 포르투갈이고 동시에 마카오의 실질적인 사용권을 인정받았으며 광동 중국 관리(官吏)로부터 도시건설허가까지 받아 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후 임진왜란이 발생되었으며 포르투갈은 힘을 잃었고 그때 제쳤다고 표현되지만 그 공백을 네덜란드가 차지했다는 것이 근세사의 역사구도인데 그렇다면 같은 조건이면서 왜 마카오를 차지 못했을까?

그렇게 막강한 세력을 구가했던 네덜란드가 당시 일본 열도 나가사키 말고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니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태평양 서양세력과의 조우

 

그렇다면 동아시아대륙 열도에 있었던 나가사키에 상관이 설치될 수밖에 없다면 태평양과는 얼마나 친숙할 수 있는 역사가 그들에게 있었을까?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1480-1521)이 있다.

마젤란은 포르투갈 출신인 스페인 해적이다.

왜 해적이라고 단언을 하는가 하면 그가 남아메리카대륙 남단 혼 곶을 지나 태평양에 들어와 필리핀 비사야제도(Visayas) 세부 섬(Cebu Island)에 도착하여 원주민들과 교전하다가 처참하게 살해되었다는 마젤란 최후의 이야기가 근세사를 통하여 전해지는데 분명 그는 늘 하던 방식대로 무고한 생명들을 무참히 살해하자 분노를 느낀 원주민들이 그를 살해한 것이다.

근세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마젤란은 1520년 11월 28일 험난한 항해 끝에 해협을 빠져나가 잔잔한 대양(大洋)에 이르자 이를 태평양(太平洋)이라 명명하였고, 지나온 해협을 마젤란해협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식이다.

어쨌던 해적의 항해기록을 바탕으로 이런 기록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해적일지라도 그들이 침범하거나 몰래 들어간 곳에 지명들을 본래의 지명과 상관없이 해적들의 이름을 붙여 혼란스럽게 하였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근세사를 만들때 서세들의 사고가 어떤 것인지 잘 알 수가 있다.

해적이라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식이다.

마젤란이 태평양을 발견한 시기에서 고작 7년전인 1513년에 에스파냐의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Vasco Núñez de Balboa,1475-1519)가 파나마 지협(地峽)을 통해서 중앙아메리카를 횡단하여 태평양을 발견하고 ‘남해(南海)’라고 이름붙였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는데 이 사람의 행태역시 해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마젤란은 스페인이라고 하여 발보아는 에스파냐인이라고 하는데 에스파냐나 스페인은 같은 사람이 아닌가?

실제로 1602년에 이탈리아인 선교사 마테오 리치(利瑪竇:Matteo Ricci,1552-1610)가 북경(北京)에서 제작한 곤려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에 보면 그냥 남해가 아니라 동남해(東南海)로 적고 있음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 발보아(Balboa)란 인물도 근세사가 모호하게 피력하기를 그가 파나마에 상륙한 이유를 통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목적없이 방황하는 해적이라는 것이다.

발보아의 행적을 보면 해적처럼 살인으로 점철되는데 1509년 파나마에 상륙하여 풍토병과 식량부족으로 일당들이 허덕일 때, 발보아가 원주민 부락을 습격하는 것을 주도하여 일당들의 지지를 얻었고, 당시 그곳을 지배하던 총독을 쫓아낸 뒤 총독이 되었다 하며 다른 정복자들과 다를 바 없이 학살하고, 원주민을 고문하였다 한다.

이와같은 사실을 보면 발보아 역시 해적이라고 할 수 있음에도 근세사는 이를 탐험가(explorer), 통치자(governor), 정복자(conquistador)라고 미화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보기에는 해구(海寇:sea marauders), 해적(海賊:pirates), 왜구(倭寇), 왜적(倭賊)일뿐이다.

 

 

이처럼 발보아와 마젤란 두사람이 태평양을 처음 발견한 것처럼 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도 콜롬버스와 크게 다르지 않는 것은 지리학(地理學:geography)지식인데 그만큼 낙후되거나 뒤 떨어져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콜롬버스가 아시아대륙과 아메리카대륙이 붙어 있어 태평양을 하나의 만으로 생각하였듯이 발보아 역시 '남해'라고 하였지만 만(灣:gulf)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지리학(地理學:geography)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당시 세상을 지배하던 세력권에서 국가적으로 비밀로 관리되었다고 판단되는 것으로서 이런 지리학을 절대 공유할 수 없는 것으로 보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비주류(지배권에서 배제된)에게는 접근할 수 없는 지식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콜롬버스의 착각이 아니라 당시로 보았을때 무식함이었던 것이다.

지리학도 중요하지만 항해의 기본이 되는 것은 분명 항해술이고 그 항해술을 뒤받침하는 것은 나침반이다.

위키자료를 보면 3세기 이후 13세기까지 지리학적 연구와 지리적 문학 집필에 대한 중국의 이론은 동시대의 유럽에 비해 훨씬 복잡했다고 완곡하게 표현하였지만 직역하면 훨씬 앞섰다고 보는 것이다.
유안(劉安, BC179-BC122), 배수(裴秀, 224- 271), 가탐(賈耽, 730-805), 심괄(沈括,1031-1095), 범성대(範成大,1126-1193),주달관(周達觀,1266–1346), 서하객(徐霞客,1587-1641)과 같은 중국인 지리학자의 중요한 논문은 17세기까지 서양지리학을 지배했었다는 것이 타당한 이론이다.

지리학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러 전문분야가 앞섰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어쩌면 아시아계가 아닌 유럽인도라고 은폐되었을 확률이 높다 할 수가 있다.

여기서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는 주류를 삼한이라고 보면 비주류는 삼한이 지배하는 권역에서 배제된 세력을 뜻하는 것이다.

이 비주류가 현재 서양세력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정말 서양세력들이 주장하는 식으로 태평양을 마젤란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을까?

나는 이를 해석하길 해적신분으로 나서 처음 발견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오랜 예날부터 먼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 인간의 바람이고 꿈이었다고 본다면 어쨌던 그 위치에서 넓은 지역을 범위로 항해했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원주민이라고 하여 항해를 아예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지금의 근세사의 잘못된 시각이고 우월주의에 빠진 서양인들의 주장이라고 할 때 이미 먼 항로를 개척하고 항해지도나 그밖에 항해에 필요한 자료들이 많이 만들어졌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그것을 토대로 서양세력을 구가 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것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삼한의 나침반 발명이다.

이미 신라(新羅)는 지남기(指南器) 즉 '남쪽을 가르키는 기구'라 하여 나침반을 만들었는데 이것의 자석(磁石)과 나침반(新羅針盤)을 당(唐)에 주었다는 기록으로서 신라 문무왕 9년(669)정월에 당(唐) 승려 법안이 당제의 명을 전하며 자석을 구하였고 그해 5월에는 신라가 당(唐)에 자석 두 상자를 바쳤다는 기록과 문무왕12년(672)에 당(唐)에 금과 은침을 보냈다는 기록을 인용하더라도 충분하게 알 수 있는 이야기다.

반도사에도 신라(silla)해상왕(海商王) 장보고(張保皐:?-846)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나침반을 발명한 것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대양을 누볐다는 것까지 충분하게 짐작할 수 있게 한다.

1602년에 이탈리아인 선교사 마테오 리치(利瑪竇:Matteo Ricci,1552-1610)가 북경(北京)에서 제작한 곤려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라고하지만 북경에 있는 지도를 모사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서양인의 이름으로 보존된 것으로 처음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특별하게 들어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 세계지도가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통제하던 세력에 의해 이미 세밀하게 완성되어 그것을 토대로 항해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었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즉 해적의 힘을 빌어 신대륙 발견이니 무슨대양을 발견한 것처럼하는 것은 모두 뒤북 친 것이 된다. 

본 블로그가 탐구한 바로는 동아시아에 서양세력들이 본격적으로 들이 닥친 시기는 대조선이 해체되고 난 후 1881년 이후라고 보고 있다.

그 이전의 서양인에 의해 작성된 태평양의 기록은 전부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고지도를 보면 분명히 근세기(1922년)이전까지 태평양이라고 불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 태평양을 넓게 쪼개어 각각 위치마다 다르게 불렸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포괄적으로는 소동양(小東洋)이라고 했다는 사실을 이미 밝혔던 바이다.

반면 북아메리카대륙 동쪽바다 즉 대서양을 대동양(東洋)이라고 한 것을 보면 어디까지나 북아메리카대륙이 동양임을 부정할 수 없게 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동양이라고 하는 것은 북아메리카대륙의 역사를 포함한 것이니만큼 아시아만 동양이라고 선을 그으려 한 근세가가 바르게 고쳐져야 한다는 말이다.

북아메리카대륙은 큰 동쪽이라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이것을 전통적으로 동해(東海)라 했음을 알 수가 있으며 물론 그곳에는 역사주체가 네덜란드 사람들이 배를 만들어 바칠 만큼 거대하게 존재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는 것이다.

 

15세말엽부터 시작하여 최소한 19세기 중엽까지 그들이 마구 들락날락 한 곳은 아시아 인도양을 포함한 동남아시아가 아니라 미안하지만 북아메리카의 남쪽 즉 지금 서인도제도라는 사실을 근세사는 통째로 숨기고 있을 뿐이다.

 

마젤란이 바람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범선을 몰고 불안과 공포 두려움을 앞세우며 망망대해 섬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태평양을 지나 마침내 도착한 곳이 필리핀이라고 하였는데 그렇더라도 동아시아대륙과는 멀고도 먼 것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해적이다.

해적은 장사될만한 곳을 찾지 그렇지 않는 곳은 들어가지 않는다는 철칙이 있다.

태평양은 너무 넓다고 보았을 것이다.

두려웠을 것이다.

동아시아보다는 해적신분에서 특별한 항해기술이 필요가 없으며 훨씬 많은 섬과 그러한 섬에서 생산되는 값비싼 향료 뿐만 아니라 각양각색의 생산되는 산물들이 지천에 깔려있는 아메리카대륙을 놔두고 구태어 위험을 무릎쓰고 태평양을 건널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엄청난 금과 보석이 지천에 깔려 있는 곳, 중앙아메리카와 카리브해, 그리고 남아메리카대륙등지가 그들 해적들의 꿈 같은 삶의 터전이었던 것이다.

금이 있는 곳 엘도라도(El Dorado)명칭에 걸 맞는 곳이 그곳에 있었고, 황금왕국 금가서랍(金加西蠟, Castilia Del oro)도 남아메리카대륙의 콜럼비아라고 하였으니 더 이상 이야기 할 것이 없다.

그기다가 마르코 폴로가 이야기한 지팡구까지 그곳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지팡구(Cipangu)를 동아시아대륙에 있었다고 한 발상자체가 근세기 역사를 알리는 시발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결어

 

네덜란드가 북아메리카 동부를 식민지하여 뉴 암스테르담(지금의 뉴욕)으로 명명하였다는 것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 옆 가까이 뉴욕(New York)주, 뉴저지(New Jersey)주 등을 식민지로 삼았다는 사실 또한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지만 해적들의 세상, 대항해시대란 명분만으로 이러한 기록을 역사라 한다는 것은 너무 근세사가 일방적이라는 사실도 첨가되어야 마땅하다.

동시에 동인도회사가 아닌 '동부 인도회사'가 존재하고 또한 '태양'을 국기로 하는 '일본'이 등장하고 그리고 동인도제도에 있었다고 하는 '바타비아(Batavia)'까지 역사의 주요한 명칭으로 남겨놓은 것은 다름이 아닌 해적들이 설쳤던 세상을 역사화 한 것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네덜란드가 교역을 하기 위해 1000톤급 대형 상선을 건조하여 '코레(CORE)'란 이름을 명명하여 상납하려는 코리아도 한반도가 아닌 이상 그들이 동아시아에 들어왔을 이유도 없고 또한 일본열도에 나가사키라고 하여 그곳에 상관을 설치할 이유도 없다 할 것이다.

 

그들이 분명 오고간 곳은 중앙아메리카이고 또한 인도 군도, 제도, 열도라고 할 수 있는 카리브해 연안이거나 남아메리카대륙 동부나 북부일 것이다.

비록 대항해시대라고 야단법석을 떨고 있지만 결국 북아메리카대륙 동해 대동양이라는 범위 한계에서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움직였던 사실 말고는 더 이상 거론 할 것이 없어진다.

여기서 글쓴이가 감히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추측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다년간 나름대로 숨은 노력으로 파헤친 사실에서 나온 결과이며 본 블로그에 대중적으로 알아야 만 하는 사실들은 빠짐없이 공개하고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더라도 이러한 사실은 금방 알 수 있는 상황까지 이미 도달했다고 감히 자부하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를 바타비아(Batavia)라고 한다는 사실에서도 바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가 아니라 바타비아(Batavia)는 북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대륙에 관할한 부속도서 카리브해까지 포함되어 그속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결론적으로 대항해시대라고 하는 것은 그 이전 역사를 깡그리 무시하고 그들이 만든 역사만을 역사라고 하는 것으로 이기적이며 독단적이고 우월주의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일방적인 자만에 빠진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서양세계사라고 하여 가르치고 또 동양사로 분리하여 가르치고 있지만 실제 그들의 서양사는 따지고 보면 결국 해적들의 기록일 뿐이다.

용케도 서양세력들이 자본을 축적하면서 그것으로 무기화하였기에 그들의 세상이 가능했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도 당시 어렵고 두려운 존재가 있었다는 것인데 그것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서 바로 '코리아'란 실체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이 글을 바탕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서세들이 기억하고 싶은 코리아는 어떤 것이었을까?

한반도에 갇혀 꼼짝달싹도 할 수 없는 나라.

어느나라도 침범할 수 없는 나약한 민족.

흰 옷만 고집하는 순박한 민족,

그리고 말썽을 피우지 않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이다.

현재 대한민국이 딱이다.

그러나 그들이 만들고 싶어하고 상징화한 코리아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민족으로 남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유일무일한 분단 국가로서 지금도 안보비용을 단순비교하면 다른 나라에서 소요되지 않는 비용 국방비가 2014년 한해 35조 8천억으로 국가예산 357조의 10%를 매년 사용해야 하는 나라이다.

동아시아에서 군사대국이 되고 싶어하는 일본의 국방비가 국가예산 대비 6.4% 이니 그것보다 높은 비율이다.

일본은 그들 땅만 지켜려 하는 것이 아니라 주제넘게 태평양을 바라보고 있고 또한 그들의 영역이라고 주장하고 나서는 곳이 그들이 살고 있는 땅보다 수십배가 넓은 지역이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려는 과욕에 의한 헛된 방위비일 수밖에 없다.

즉 그들의 욕심만 버리면 들지 않을 비용들이다.

대한민국은 국방비만 안보비용인가?

남북이 대치된 상태에서 사회 불안비용과 갈등비용을 보태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

돈을 벌어 전쟁가능성의 불안 퇴치용으로 쓰면 거의 남는 돈이 없다는 말과 같다.

죽도록 일을 하고 벌이면 다른 나라에서는 불필요한 비용으로 다 써버리는 반복된 경제활동만 할 뿐이다.

그러니 더 이상 경제발전을 이룩하기는 한계에 와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더욱 불안해 하고 희망이 사라졌다고 여기시 시작한다.

실제로 희망도 없다.

통일을 희망으로 가져보지만 스스로는 할 수 없는 꿈 같은 이야기다.

그렇다고 정치인들이 정직하거나 똑똑하여 국민이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하는 것도 아니고 새롭게 나타나는 정치인도 그나물에 그밥, 기득권을 따르니 다를 것이 없고 국민들을 상대로 늘 상 거짓말만 늘어놓기 때문에 솔직히 암울한 현실을 타개할 희망이 사라진 것이 오래이다.

자원이 풍부한 것도 아니고 오직 인력으로 모든 것을 충당하고 있는 실정임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안다.

때문에 대한민국 하층들은 더욱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국가가 제대로 힘을 못쓰는 결정적인 것은 허리가 짤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불구같은 신세이기 때문에 미국을 가지랭이 붙잡고 살려달라고 한다는 사실이다.

분단은 우리에게 크다란 약점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누가 쉽게 통일 시켜 줄 일도없다.

일본을 늘 상 이런 약점을 잡아 최대한으로 그들에게 유리한 것을 쫓아 우리를 힘들게 한다.

갈라놓고 있으면 관리하기가 쉽기 때문에 서세입장에서는 기어코 통일시키고 싶지 않다.

일본은 더더욱 그렇다.

한국전쟁때 전쟁물자보급기지가 되어 핍폐하던 그들이 경제대국의 발판을 삼을 수 있는 동력이 생겼고 이러한 동력을 다시금 절실하게 원하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를 침범한 적도 없고 서세에게 미움당할 짓도 않았으며 그저 이리치면 터지고 저리치면 넘어질 수밖에 없이 힘이 나약하여 순종적이던 우리민족이 왜 무엇때문에 이렇듯 분단국인 신세를 면할 수가 없었을까?

이것은 반도역사에 젖은 국민들의 한탄이다.

태평양전쟁이라고 하면 서세들에게 난동을 부린 일본이 일으킨 전쟁을 말하는데 일본에게는 왜 그렇게 후할까?

이 두가지 의문에서 반도역사관을 가진 사람들은 궁금증이 미구 폭발한다.

총뿌리를 서세에게 들이대고 깽판을 치자 핵을 맞고 깽갱한 열도일본인들은 오히려 서세들이 지금까지 우대하고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어렵기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근세사에 '코리아'는 반도역사가 분명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때문에 일본인들을 서세가 보호하거나 옹호하지 않을 수 없는 합체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꺼꾸로 풀이 하면 그들에게 근세기 이전역사에서 두렵고 극복의 대상이 되었던 실체가 '코리아'이며 때문에 네덜란드가 세계대양을 휘어잡으면서도 배를 만들어 상납한 과거의 무서움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한반도에 가둬놓고 앙갚음을 한다고 생각하면 틀림 없다.

지금도'코리아' 란 이름의 국가는 지구상에서 지워버리고 싶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들이 두려워했던 거대한 세계지배국 코리아, 삼한의 대조선은 당연히 지금의 대서양인 대동양을 동해라고 하였던 세력이었고 그 세력을 서세들은 '코리아'라고 하였으며 그 주체들이 있었던 곳은 다름아닌 북아메리카대륙이며 그곳에 존재하던 모든 역사가 서세에 의해 철저하게 지워지고 없다는 사실은 여기서도 금방 들어나는 이야기다.

코리아, 대조선이 건재했을 때 일본도 네덜란드도 모두 한낱 코리아가 지배한 세력이거나 한낱 조직에 불과하고 장사아치에 불과한 것으로서 코리아의 거대한 영향력아래에서 생존하기위해 발버둥치던 해양세력이었다는 사실 또한 그들이 부정하긴 힘들 것이다.

당시 그들이 만든 고대지도를 보면 아시아(亞細亞)란 단어는 지금 아시아대륙보다 아메리카대륙에 더 많이 쓰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알 수 있는 사실인데 아시아란 명칭이 결코 현재 동아시아를 기반으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과 근세기에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떠밀려 동아시아로 이동된 과정에서 생성되거나 근세기 서세가 동양의 근원지를 만들기 위해 정치적으로 지정한 명칭임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라고 본다.

이것이 다 근세기에 불과 100년에서 130년 전에 일어난 사실들이란 점에서 할말을 잃는다.

멀지도 않는 100년 또는 130년 정도의 시간에 코리아, 대조선이 해체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역사가 되어버렸다.

그 역사가 코리아 역사라니 어찌 놀라움과 한이 왜 없겠는가?

네덜란드가 코리아와 단지 직교역을 하기 위한 것임에도 거대한 선박을 건조하여 상납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시절 그 시기가 바로 생사여탈지권(生死與奪之權)을 가지고 있었던 코리아, 삼한의 전성시기임을 어찌 어리석은 우리가 알 수 있었겠는가?

때문에 서세로부터 역사적으로 미움을 받고 앙갚음을 당하고 있는 현실임을 어리석은 우리가 어떻게 인지할 수 있었겠는가?

남북이 외세의해 갈라지고 엄청난 안보비용을 부담할 수밖에 없는 이 환경을 어찌하면 좋다말인가?

더군다나 안보비용이 우리에게 식민지 고통을 안겨 준 일본인을 지키는 수단에 포함된다고 하는 것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북한정권이 남한을 공격하는 위험을 제거하려고 우리의 세금으로 국방비, 안보비용을 도리없이 쓰고 있지만 엄밀하게 따진다면 일본열도도 북한정권으로부터 우리남한 정부가 지키고 있는 형태이다.

하지만 우리의 이러한 수고스러움을 안중에도 없고 일개 총리란 작자가 이런 수고를 담당하고 있는 대한민국을 보고 '어리석은 나라'라고 막말을 하고 자극하며 음흉스럽게도 친일파를 앞세워 우리 등뒤를 공격하려고 늘 상 도발 한다는 사실이다.

아마 머지 않아 일본이 공격하면 친일파가 나서 100년전처럼 뒷문을 활짝 열어 줄 것이 틀림이 없다.

이 어찌 개같은 구도가 아닌가?

허구한날 그들은 개나발같은 소리를 지껄리며 우릴 자극한다.

그러함에도 우리 정치인들 누가 나서 그런 소릴 못하도록 '주둥이 닥쳐'라고 거친 소릴 한번 지를 인사가 없다.

다 한통속이 때문이다.

국민들은 늘 개같은 소리에 스트레스가 쌓여 죽을 지경인데 정치인들은 근원적으로 해결할 용기조차 없다.

이것은 모두 역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네덜란드가 거대한 상선을 건조하여 코레호란 이름을 명명하여 코리아에게 바치려 했던 역사,

이러한 어마어마한 역사가 존재했는지 자체를 모르는 우리가 어찌 정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어찌 세계를 지배하던 코리아라고 할 수 있겟는가?

감히 작은 동양인 일본이 얕잡아 보는 나라로 변한 지금 우리는 정신적으로 뚜렷하게 나아갈 곳이 없다.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도 없다.

이러한 명백한 역사사실 조차도 우리는 알길 거부한다.

이렇게 마무리하고 싶다.

오늘날 우리가 바른 역사를 찾고 알려는 것은 더 이상 역사를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고 우리자신을 외침으로부터 지키는 행동이라 할 수가 있다.

이것은 바로 세계삼한역사연구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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