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지리

강남(江南)을 섬멸하면 조선(朝鮮)은 주머니 속에 든 물건이다.

한부울 2013. 4. 23.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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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江南)을 섬멸하면 조선(朝鮮)은 주머니 속에 든 물건이다.

 

글쓴이:한부울

 

江南殲盡, 則朝鮮有若囊中物

후금(後金)을 본래 후금(喉衿)인데 그 뜻이 목구멍과 옷깃이라는 뜻이다.

大明或稱江南, 朝鮮或稱高麗, 此亦互相稱號之語也。

 

위 제목은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있기 일 년 전에 누르하치(奴児哈赤, Nurhachi:1559-1626.9.30,후금:1616-1626)가 한 말이란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당시 조선(朝鮮)역사를 보면 광해군(光海君, 1575-1641,재위:1608-1623)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인조(1595-1649,재위1623-1649)를 왕으로 옹립한 인조반정(仁祖反正:1623)을 주도하여 성공하게 한 이괄(李适)은 1623년 5월 관서(關西)지방에 여진족이 침입할 염려가 있다 하여 평안병사로 좌천된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었고 1624년에 반란을 일으켰다는 역사가 있다.

그런데 마침 이괄의 난이 있었던 1624년에서 2년후 후금군(後金軍)이 요하(遼河)를 건너 영원성(寧遠城)을 포위하고 마침내 명군(明軍)과 전쟁을 일으켰으나 요동순무(遼東巡撫) 원숭환(袁崇煥:1584-1630)의 방어로 실패하고 누르하치가 죽는다는 것이 동아시아대륙역사이다.

공교롭게도 이괄이 관서지방을 지키면서 여진족과 접전한 역사와 누르하치가 명의 요동을 공격하는 것과 시기가 2년밖에 차이 나지않고 전개상황이 같아 사건이 다르다고 할 수 없다는 의혹이 존재한다.

다만 장소가 다르다는 것인데 과연 그러한지는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동은 전통적으로 고구려 즉 고려의 땅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결국 누르하치는 요동에서 죽고 그를 이은 홍타이지(皇太極, Hong Taiji:1592-1643,재위:1626-1643)가 이듬해 1627년 1월에 조선(朝鮮)으로 마침내 침입해들어와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일으키자 인조(仁祖)가 하는 수 없이 강화(江華)로 피신한다는 것이 또한 굴곡의 반도(半島)역사이다.

강화는 지명으로서 존재하였겠지만 어쩌면 피신처의 대명사로 반도역사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반도역사를 보면 툭하면 강화로 간다.

강화는 고려 고종(高宗,1192-1259,재위:1213-1259)이 몽고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도읍을 송도(松都)에서 강화로 천도(遷都)한 1232년부터 다시 환도(還都)한 1270년까지 38년간 사용되던 고려궁궐 장소로서 충분한 여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성립한다.

그러나 한반도 강화섬이 그러한지 솔직히 보라.

제발 한반도 강화섬이라고 하지 말라.

 

홍타이지가 일으켰다는 정묘호란(丁卯胡亂)에서 볼 때 이상하게도‘조선전왕 광해군(光海君)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란 명분을 앞세우고 1627년 1월 누르하치의 아우 슈르하치(舒爾哈齊)의 차남 아민(阿敏, Amin)이 이끄는 3만의 후금군(軍)이 먼저 항복한 강홍립(姜弘立)등 조선인을 길잡이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를 공략하였으며 이어 용천(龍川), 선천(宣川)을 거쳐 청천강(淸川江)을 넘어 계속 진군하여 안주(安州), 평산(平山), 평양(平壤)을 점령하고 황주(黃州)를 장악하였다는 사건으로 단 3개월 만에 조선은 굴복하였고 조선의 인질을 후금에 제공하는 조건으로 마무리된 사건이다.

3개월만에 항복한 것이라고 하면 결국 엄청난 병력과 화력을 동원하여 조선을 순식간에 굴복시킨 것이다.

그러나 엄청난병력이나 화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 자세히 기술된 것은 없다.

앞에서 홍타이지가 조선을 침략한 명분으로 조선전왕인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 것이라고 했다.

일찍이 누르하치 역시 명을 공격하는 명분으로 그의 조부를 살해한 것에 대한 복수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한 두 사건의 시차가 2년 밖에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호란(胡亂)이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반도역사만에 존재하는 호칭이다.

조선(朝鮮)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민족간의 갈등으로 빚어진 충돌을 의미하거나 아니면 조선의 주체세력들이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어떤 막강한 힘을 가진 세력들에게 정치적으로 굴복한 것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분명 전쟁 명분을 전 조선왕 광해군의 원한을 갚기 위해라고 한 것을 보면 호란이라고 하지만 정치적으로 인조반정에 대한 복수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니 정치적으로는 인조반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사건은 절대로 반도역사가 말하는 것처럼 청과 조선간의 치열한 전쟁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호(胡)는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북아메리카대륙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밝혔고 호(胡)는 대 고려(高麗)을 상징하였거나 아니면 조선호국(朝鮮胡國)이라고 한 것에서 보더라도 조선과 고려는 같은 권역에서 서로 공존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복수는 명을 상대로 먼저 누르하치가 하였다가 죽고 1년후 그의 조카가 광해군에 대한 복수한다고 조선에 쳐들어 간 사실들은 절대로 다르게 볼 수가 없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제목에서 "강남(江南)을 섬멸하면 조선(朝鮮)은 주머니 속에 든 물건이다"라고 한 말은 아래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나오는데 이 기사는 정묘호란이 있기 넉 달 전에 발생할 수 있는 조짐을 조선에게 알리는 상황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인조4년 (1626,천계 6)8월26일

평안 감사 윤헌이 노추(奴酋)의 정세에 대해 치계하다

○乙丑/平安監司尹暄馳啓曰: “金時若馳報內: ‘眞㺚一名, 自馬郞洞出來。 盤問賊情, 則奴酋已造舟車、雲梯, 期以來月, 進犯廣寧。 且聞奴酋之言, 戰雖不利, 當焚蕩糧穀。 且奴酋(當)〔嘗〕言, 江南殲盡, 則朝鮮有若囊中物。 且朝鮮俘將等言, 朝鮮修築山城時, 多得金塊。 且城內倉穀甚多, 衝突昌、義間, 直到安州、平壤, 則其穀不可勝食云。

평안 감사 윤훤(尹暄)이 치계하였다. 㺚

“김시약(金時若)의 치보(馳報)에 ‘진달(眞㺚)’ 1명이 마랑동(馬郞洞)에 나왔기에 적의 정세에 대해 여러 가지로 물으니,‘노추(奴酋)가 이미 배와 수레, 운제(雲梯)를 제조해 놓고 다음 달에 광녕(廣寧)을 침범하려고 한다.’하였으며, 또 ‘노추의 말을 들으니, 전세가 비록 불리하더라도 식량을 불태워 버릴 것이라고 하였다.’하고, 또 ‘노추가 강남(江南)을 모두 섬멸하고 나면 조선은 주머니 속에 든 물건과도 같다고 하였다.’하였으며, 또 ‘포로가 된 조선의 장수 등이 말하기를, 조선에서 산성(山城)을 수축(修築)할 때에 금덩이를 많이 얻었으며 성 안의 창고에는 곡식이 매우 많아 창성(昌城)·의주(義州) 지역에서 충돌해서 곧바로 안주(安州)와 평양(平壤)으로 가면 식량을 이루 다 먹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하였다”

 

위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조선 중기 무신 김시약(金時若:1564-1627)이 군사간첩, 진달(眞㺚)1명을 잡아 물어 본즉 주요 정보로서 노추(奴酋)가 말하길 "강남(江南)을 모두 섬멸하고 나면 조선(朝鮮)은 주머니 속에 든 물건과도 같다"라고 한 놀라운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반도사학자들은 이 놀라운 사실을 한반도에 맞춰 서울 한강 이남을 당시도 강남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말할 수 있었다고 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홍타이지가 남쪽에서 쳐 올랐갔다는 사실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압록강을 넘어 평양으로 들어왔다고 하였을 뿐이다.

조선이 당시 경각에 달린 것은 구태어 강남을 가지고 운운할 필요가 없는 한반도 지리적 상황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아는 사실이다.

후금이 한강 이남에 있어 북쪽으로 쳐 들어온 것이 아닌 이상 반도역사의 이야기는 거짓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누르하치는 구지 강남을 이야기 하였고 이 강남은 중국강남이라고 할 때 과연 조선은 어디에 있었는가 되묻지 않을 수 없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따지고 볼 때 명 주원장도 강남 남경에서 일어난 세력이었다.

노추(奴酋)는 바로 후금(後金)누루하치(奴児哈赤, 愛新覺羅 努爾哈赤, Aisin-gioro Nurhaci)를 말하는 것으로 노추(奴酋)란 말은 노예의 추장이란 뜻이다.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은 한어(漢語)사전에 보면 후금(後金)을 본래 후금(喉衿)이라 했는데 그 뜻이 목구멍과 옷깃이라는 뜻으로, 중요한 장소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 했다.

바로 요충지(要冲, 要地)를 말하는 것이다.

목구멍과 같은 요충지라면 길목 어딘가를 막고 있다는 상황이 그려지기에 충분하다.

사람으로 치면 입에서 식도를 넘어가는 목구멍이니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중요한 요충지를 차지하면서 누루하치(奴児哈赤)는 후금(後金, 喉衿) 즉 목구멍이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삼한역사 관점에서 볼 때 목구멍은 어딜까?

바로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사이에 위치한 과테말라(Gwatemalla), 벨리즈(Belize), 온두라스(Honduras), 엘살바도르(El Salvador), 니카라과(Nicaragua), 코스타리카(Costa Rica), 파나마(Panama)가 속해 있는 육교처럼 좁다랗게 길게 뻗어 이어진 중앙아메리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곳은 특히 북아메리카의 남쪽 부분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그러니 북쪽에서 보았을 때 강남이라 할 수밖에 없다.

이 중앙아메리카에서 시각적으로 목에 튀어나온 곳을 갑상연골(甲狀軟骨)이라고 하고 혹은 목젖이라고 하는데 유카탄(Yucatan)반도를 연상시키고 있다.

후금(喉衿)이라 함은 사람 목구멍과 같은 바로 이곳에서 출몰한 세력이며 이곳을 만주(滿洲)라 하였던 것이다.

동아시아대륙역사(東亞世亞大陸歷史)에 따르면 누르하치는 1589년 건주여진(建州女眞)을 통일하고 해서여진(海西女眞)인 예허부(葉赫部), 하다부(哈達部), 호이파부(輝發部), 울라부(烏拉部)등 네 개의 부족들을 거침없이 복속시켰다고 한다.

이 부족들을 현재 과테말라(Gwatemalla), 벨리즈(Belize), 온두라스(Honduras), 엘살바도르(El Salvador), 니카라과(Nicaragua), 코스타리카(Costa Rica), 파나마(Panama)라고 한들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때는 한반도에서 속칭 ‘7년전쟁(7年戰爭)’이라고 하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생하게 된다.

누르하치가 동아시아대륙 만주에서 생성된 세력이라면 지척에 있는 한반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것과 전혀 상관 없이 건주부족들을 통일하여 만주(滿洲)라고 부르기 시작하였으며 후금(後金)이라 하였다는 것에서 볼 때 앞에서 광해군을 복수하겠다고 정묘호란을 일으켰다는 사실과 모순되는 것이고 상반되는 이야기라 맞지 않는다.

만주(滿洲)는 문수보살(文殊師利:Manjusri)을 신봉하던 민족이 사는 땅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원시불교(原始佛敎) 시원의 땅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기후가 덥고 따뜻한 곳일 가능성이 많다.

여름 과일은 달다.

달다, 묘하다, 훌륭하다란 뜻에서 복덕(福德)과 길상(吉祥)이 더해진다고 하였으니 만주(滿洲)는 천혜(天惠)의 땅, 물자가 풍부하여 사람이 살기가 가장 좋은 적합한 지역임을 알게 하고 이러한 곳에서 고대인도(印度)가 발상(發祥)되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여 세계삼한역사 관점과 거의 틀리지 않는 결과라고 생각된다.

또한 누르하치의 성(性)을 애신각라(愛新覺羅)라 한 사실에도 알 수 있듯이 신라(新羅)가 있었던 지역이나 영역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데 세계삼한역사 관점에서 볼 때 스페인과 연결됨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을 토대로 ‘노추가 강남(江南)을 모두 섬멸하고 나면 조선은 주머니 속에 든 물건과도 같다'고 한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아래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더 하여 보면 누루하치가 말한 강남(江南)에는 동아시아대륙역사에서 주체라고 할 수 있는 중앙정부(大明高麗)가 있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다.

누르하치 역시도 여진족이고 달단이라고 하지만 강남(江南)에 있었던 세력이 틀림이 없다.

때문에 강남(江南)을 차지하면 조선은 힘을 쓸 수가 없을 정도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그 나름대로 진단한 것이다.

명(明) 주원장(朱元璋)이 1368년 원(元)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한족(漢族)의 통일왕조를 세우는데 강남의 남경(南京)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건업(建業)하여 강남(江南)의 중심지로 부상(浮上)시켰다는 역사가 현재 동아시아대륙역사이다.

그렇다면 원래 남경(南京)이라고 곳은 전통적으로 빼앗겨서는 안될 조선 중앙정부(中央政府)가 있었던 중원(中原)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중원(中原)이란 단어역시 지형적으로 중앙아메리카를 부르던 지칭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때문에 누르하치가 “강남(江南)을 모두 섬멸하고 나면 조선(朝鮮)은 주머니 속에 든 물건과도 같다”라고 장담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강남(江南)을 나누고 가르는 강을 요하(遼河)라고 하였고 이 요하동쪽을 요동(遼東), 요하서쪽을 요서라고 하였으며 만주(滿洲)는 목구멍을 뜻하는 곳 후금(喉衿)이니 남북아메리카를 연결하는 목구멍, 바로 그곳을 가리킨 것이다.

정확하지 않다 하더라도 지형적인 구도는 이와 같을 것이다.

 

(25)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인조 24년(1646,순치 3)12월22일

역관 이형남·한상국을 파견하여 왜사를 따라가 대마도주를 위문하게 하다

○甲午/遣譯官李亨男、韓相國, 隨倭使問慰對馬島主。

島主新遭母喪故云。

朝廷以爲, 內喪弔問無前規, 有後弊不許。

橘倭嘗因宴享, 問于閔應協、任重曰: “㺚靼旣得北京, 南京、李將軍見敗云, 然耶?【卽李志誠也。】 丙子之亂, 王子被執云, 國王與王子, 同在一處耶? 王子尙今未還耶? 使价、幣帛之數, 一如事大明之時耶? 㺚靼以順治紀元云, 朝鮮今用何年號耶?” 應協等曰: “當初漂倭入送時, 我國書契中, 以淸國所送爲言。 而回答書契中, 有㺚靼二字, 方以爲怪。 今番又問㺚靼, 所謂㺚靼, 曾所未聞, 未知指何國而言乎?” 倭曰: “大明或稱江南, 朝鮮或稱高麗, 此亦互相稱號之語也。” 應協曰: “兩國書契, 或書淸國, 或書㺚靼, 大相不同, 須卽改書可也。 且我國書契, 爾等每請改書, 而朝廷無不曲從。 爾國書契, 何惜數字之改乎?”

역관(譯官) 이형남(李亨男)·한상국(韓相國)을 파견하여 왜사(倭使)를 따라가 대마도주(對馬島主)를 위문하게 하였다.

도주가 새로 모상(母喪)을 당했기 때문에 이른 것이다.

귤왜(橘倭)가 일찍이 연향(宴享)을 인해서 민응협(閔應協)·임중(任重)에게 묻기를,

“달단(㺚靼)이 벌써 북경(北京)을 차지하고 남경(南京)의 이장군(李將軍:李志誠)이 패배하였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 그리고 병자년 난리에 왕자가 사로잡혔다고 하던데, 국왕과 왕자가 함께 같은 곳에 있습니까? 왕자는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했습니까? 그리고 사신과 폐백의 숫자는 한결같이 명나라를 섬기던 때와 같이 합니까? 달단이 순치(順治)로 기원(紀元)한다고 하는데 조선(朝鮮)에서는 지금 무슨 연호(年號)를 씁니까?”

하였는데, 민응협(閔應協)등이 말하기를,

“당초 표류했던 왜인을 들여보낼 때의 우리나라 서계(書契) 가운데 청국(淸國)에서 보낸 것이라고 말을 하였소. 회답하는 서계 가운데 달단이란 두 글자가 있어 바야흐로 이상하게 여겼는데, 이번에 또 달단에 대하여 물으니, 이른바 달단이란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바이며 어느 나라를 가리켜 말한 것인지 모르겠소.”

하니, 귤왜가 말하기를,

“명나라를 더러 강남(江南)이라고 일컫기도 하며 조선(朝鮮)을 더러는 고려(高麗)라고 일컫기도 하니, 이것은 역시 서로 호칭(號稱)하는 말이오.”

하므로, 민응협(閔應協)이 말하기를,

“양국(兩國)의 서계에 더러는 청국(淸國)이라고 쓰고 더러는 달단이라고 써서 크게 서로 같지 않으니, 모름지기 곧바로 고쳐 쓰는 것이 옳겠소. 그리고 우리나라의 서계를 그대들이 늘 고쳐서 써주기를 바라면 조정이 굽혀서 따라주지 않은 적이 없었소. 그런데 그대 나라의 서계는 어찌하여 두어 글자 고치는 것을 아끼시오.”

 

또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인조24년(1646)의 ‘역관 이형남, 한상국을 파견하여 왜사(倭使)를 따라가 대마도(對馬島)주를 위문하게 하다’ 라는 위 기록에서 보면 강남(江南)과 고려(高麗)에 대한 해명이 명쾌하게 나타난다.

 

귤왜(橘倭)가 민응협(閔應協)에게 말하길 달단(韃靼)이 청국(淸國)라고 하는 것은 “명나라를 더러 강남(江南)이라고 일컫기도 하며 조선(朝鮮)을 더러는 고려(高麗)라고 일컫기도 하니, 이것은 역시 서로 호칭(號稱)하는 말이오.”라고 하면서 오히려 민응협(閔應協)을 가르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타타르(Tarar)라고 판단되는 달단(韃靼)을 청국이라고 하는 사실과 대명(大明)을 강남(江南)이라고 하거나 혹은 조선(朝鮮)을 고려(高麗)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다.

강남(江南)에 대명(大明)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아시아대륙 역사의 공식이 이러하다면 누르하치가 강남(江南) 즉 고려를 모두 섬멸하고 나면 조선(朝鮮)은 힘을 잃은 주머니 속에 든 물건과도 같다고 감히 장담 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아니면 목구멍이라 하였으니 공급원 물자를 차단하는 효과가 커서 조선이 받는 충격은 엄청난 것이라고 할 때 그러한 여파도 생각할 수가 있는 일이다.

만약 실제로 강남이 중앙아메리카라면 그곳을 통해 남아메리카대륙과 연결하고 있었던 조선이라고 할 때 이와같은 손실은 조선을 더욱 혼돈속으로 빠뜨릴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강남(江南)은 일찍부터 조선(朝鮮)에게 역사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세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이 대명이라면 대명은 고려라고 볼 때 혹은 신라일 수도 있겠으나 신라를 고려가 흡수하였으니 고려(高麗)일 가능성이 더 높아 그렇게 인식되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영역적인 문제에서 강남지역은 또 하나의 조선(朝鮮)의 군사요충지로 적(敵) 수중에 들어가게 되면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군수물자 공급원으로서 취급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강남(江南)에 남경(南京)이라는 고도(古都)가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서에 보면 고려(高麗)에도 남경(南京)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송(宋), 신라남당(南唐)의 도읍지가 있었으며 고려대명(明)등의 도읍지란 사실도 함께 생각할 수가 있다.

명(明)초기 주원장(朱元璋)이 남경에 도읍을 정했다가 제2대 황제 때 북경으로 천도해 간 사실과 주원장은 이곳을 응천부에서 남경(南京)으로 고쳤고, 1378년 정월 정식으로 수도가 되면서 경사(京師)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사실도 존재한다.

남경(南京)에 대한 약칭(略稱)으로 금릉(金陵)이라는 명칭이 있고 이것은 남경(南京) 동쪽에 위치한 종산(鐘山)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때문에 최초에는 금릉산(金陵山)으로 불리웠는데, 전국시대 (B.C496년-BC221)초(楚)나라 위왕(威王)이 월(越)나라를 대파하고 남경(南京)을 보니 제왕의 기(氣)가 서려있는 바, 금(金)으로 만든 인형을 묻어서 그 왕기를 눌렀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금(金)이 많이 산출되는 곳임을 알 수가 있다.

혹자는 남북조(南北朝)시대에 동진(東晋)이 남경에 도읍을 정하고 있을때, 금릉산(金陵山)정상에서 자금색(紫金色)이 서린 빛을 보고서 자금산(紫金山)혹은 약칭으로 금산(金山)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는데 이 자금산(紫金山)이 현재 자금성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면 북경에 있는 자금성은 본래 번지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금산(金山)은 샌프라시스코의 옛 지명이다.

금릉(金陵), 금산(金山), 자금(紫金)이라고 하던 남경(南京)은 북아메리카대륙에 서부에 있는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일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현재 캘리포니아주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금산과 금릉은 따라 다니는 지명이다.

과거 김천(金泉)을 금산(金山), 금릉(金陵)이라 한 사실에서 알 수 있는 이야기다.

본 블로그에서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를 금산(金山)이라고 한 사실을 밝혔다.

캘리포니아에 당(唐)이 있었다는 사실도 밝혔다.

또 신라(新羅)가 있었다는 사실도 알렸다.

이곳 가까운 곳에 조선에서는 전조라고하는 본래의 고려 명이 있었고 만주가 있었으며 요하가 있었던 곳으로서 그곳을 강남이라 하였고 그곳에 남경이 있었다는 사실들을 이제 알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할 때 누르하치가 말한“강남(江南)을 모두 섬멸하고 나면 조선(朝鮮)은 주머니 속에 든 물건과도 같다”라고 한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강남은 어딜 말하는 것인지 나의 뇌 속을 충분히 자극하며 세계삼한역사 사실들을 명경처럼 그려놓고 있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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