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지리

오페르트가 본 테이블 타워 마운트(Table tower mount)

한부울 2012. 9. 1.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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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르트가 본 테이블 타워 마운트(Table tower mount)

 

글쓴이:한부울

 

지금부터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1832-1903)가 1880년도에 펴냈다고 하는 저서 금단의 땅<A Forbidden Land, 1880>에서 솔직하게 느끼는 부분을 세계삼한역사에 비추어 진실에 입각한 주요한 부분을 발췌하여 차례로 글을 써 보려한다.

이것은 실제 세계를 지배한 삼한의 모습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오페르트가 그린 삽화]

 

                                            [미국 와이오밍에 있는 데블스타워]

 

첫번째로 (5)오페르트 기록 원본 249p에 기록과 삽화(Table or tower mount)를 면밀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독일인이라고 하는 오페르트(Ernst Jakob Oppert,1832-1903)는 분명 당시 조선(朝鮮:1392-1881)이라고 하였던 한국(corea)에 왔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책 제목이 "금단의 땅"이라고 하는데는 동의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가 방문한 곳은 교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목적을 위한 침범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금단의 땅이라는 것은 범죄자를 들어올 수 없도록 막는다는 합법적인 조치와는 전혀 다르게 호도하거나 실체와 다르게 왜곡한 사실 때문에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곳이 과연 한반도인가 하는 문제에서 나는 심각하게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오페르트가 뉴욕에서 영어본으로 처음 번역을 하여 책을 만든 시기가 1880년이라고 하면 대조선이 해체되는 년도 1881년에서 불과 1년 전이니 거의 해체에서 긴박한 분위기가 조선을 휘감던 시기라는 점에서 진실성을 담보 할 수 없으며 설혹 독일어 원본을 영어로 뉴욕에서 정확하게 번역하였다 하더라도 진실로 원본에 가깝게 또는 오페르트가 기록한 사실을 전혀 훼손하지 않고 정확하게 공정하게 번역을 하였을 것이란 기대는 사실상 당시 시대적인 방향에서 매우 힘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환경에서 순수하게 대조선을 위한 번역이라고 솔직히 기대할 수 없다는 말이다.

아마도 대조선이 해체되던 시점이었으니 이것이 어쩌면 조선을 한반도에 집어 넣으려고 하는 그들의 거대한 작업의 수단으로 충분하게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그가 실제 한국을 방문한 것은 프랑스(조선숙종, 영조, 정조대와 일치)가 조선에 처음 침입하여 도발한 역사기록의 년도 즉 1866년(고종3)인데 이 시기는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도 학살과 탄압이 시작된 해로서 이것에 대항하여 프랑스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인 병인양요(丙寅洋擾)때 였음을 알 수가 있어 국제 질서 흐름상 아주 미묘한 시기라고 여길 수 있는 것이다.

 

숙종과 루이14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5 
영조와 루이15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6
정조와 루이16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7

 

그러나 그것은 본 블로그(프랑스가 숙종, 영조, 정조)의 글들을 참고 할 때 프랑스가 곧 조선의 일부라고 판단되는 사실이 있기 때문에 프랑스 운운하는 것은 매우 이질적인 것으로서 전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을 수 있는 사건의 시점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기록들에서 보면 한반도 지형조건에 전혀 맞지 않는 기술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명 즉 명칭에서도 고유의 한국 조선 땅에서 사용하던 지명이라고 하지만 일단 한반도에서 조차 낮설은 지명들이 난무하는 것은 어쩌면 이 글 원본이 영어본으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많은 수정과 편집이 있었을 것이란 짐작을 하게 한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버려 이미 그러한 수정과 편집이 무엇인지 밝혀내기가 쉽지 않다.

오페르트의 조선방문기가 영어를 포함한 한반도 국내에서도 이런 저런 후속으로 나온 번역본이 널려있을 정도로 많다.

애초 잘못 꿰어진 단추가 우스광스럽게 하기는 마찬가지라고 본다.

하지만 분명코 오페르트가 본 코리아는 한반도가 아님에도 하나같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마치 한반도 인 것처럼 포장하고 그것을 맞추려 인위적으로 애를 쓴 흔적이 곳곳에 보이기 때문에 첫째로 근세기에 서양인들에 의해 쓰여진 무슨무슨 저술들은 분명코 역사적인 신뢰를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존재하는 것이다.

때문에 온갖 수식어를 동원하였지만 오페르트가 말하고 있는 실제 조선 땅은 알 수 없으며 그가 와서 직접목격한 지형 형상과 엄청난 차이가 있음에도 그리고 고유지명역시 분명치 않다는 사실이 존재함에도 밝히기가 쉽지 않다는 것도 부첨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단언한다.

오페르트는 한반도에 애초부터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단정지을 수 있다.

 

그가 범죄자이기는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솔직한 면도 없지 않다.

얼마나 조선 땅이 탐이 났으면 도굴사건까지 벌리며 침범하였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는 조선(朝鮮)의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The land of milk and honey"이라고 표현하고 "쿠빌라이 이후 가장 눈부신 동양문명을 일구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직접 목격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사실에 가깝게 기록 했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생각을 갖게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번역자료들은 모두 한심하게도 반도사를 의식하여 제대로 번역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반도사에 얽메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번역에 따른 오역이 난무하고 사실과 다르게 번역될 수밖에 없는 조건임을 감안한다면 그나마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집문당에서 신복룡선생 번역으로 나와 있지만 반도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때문에 사실적인 번역이라고 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더라도 오페르트가 기행한 조선 즉 코리아의 기록은 중요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여태 우리가 모르고 있던 사실들이 들어나기 때문이다.

오페르트 글의 중요한 두 문장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젖과 꿀이 흐르는 땅(The land of milk and honey)"과 "쿠빌라이(Kublai Khan 1215-1294, 재위1260-1294)이후 가장 눈부신 동양문명을 일구었다는 사실"이다.

이 두 문장은 세계삼한역사를 실제로 풀 수 있는 열쇠라고 본다.

구약성서에서 말한 약속의 땅인 가나안(Canaan)땅이 지중해 동부의 가나안 지역이 정말 맞는가 의심이 갈 정도로 파문이 일 수 있는 사한임에 틀림이 없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한반도라고 하면 욕먹는다.

그곳은 동아시아대륙도 아니고 중동도 아니며 '가나안 땅'은 현재도 그렇지만 150년 전에도 북아메리카가 되어야 자연의 이치에 맞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는 고려연합제국의 황제가 쿠빌라이(Kublai Khan)라고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말할 수 있다면 분명 세계삼한역사가 아메리카대륙에 있어야 하고 고려 이후 조선 역시 동양(東洋)문명을 일구었다는 곳은 바로 동쪽바다(大東洋)를 동해라고 지칭할 수 있는 지형조건의 북아메리카대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라고 감히 주장한다.

 

대서양(大西洋)과 대동양(大東洋)은 같은 바다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515

 

이것은 본 블로그에서 수많은 노력으로 찾아내어 실증을 한 사실이다.

때문에 북아메리카 대륙문명을 삼한이 일구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는 역사성이며 동시에 중요성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직 결론을 내리기에는 이르다고 하겠지만 오페르트가 기행한 곳은 실제로 한반도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곳은 분명코 북아메리카대륙이어야 맞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가 보는 세계 모든 지형은 150년전 오페르트가 본 지형모습과 변함없이 똑같을까 하는 의문도 가질 수가 있다.

북아메리카대륙도 그 시대상황과 다를 수 있다고 보아야 맞고 변해도 엄청나게 변했을 것이란 생각을 쉽게 할 수가 있다.

때문에 역사찾기란 힘든 것일 수밖에 없다.

지형이 변할 수밖에 없는 가장 중요한 조건인 기후가 완전히 변했으며 지금도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과학적으로도 뒤받침 되는 이야기다.

지금은 어쨌던 지구의 기온이 상승하여 빙하가 녹고 있다는 절대절명의 상황을 감안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동안 수자원이 될 수 있는 조건이 기온 상승으로 퇴화하였으며 150년 동안 고갈되었다는 점을 들 수도 있다.

특히 강은 물흐름의 강세가 약해지고 물 흐름의 수량도 엄청나게 줄어 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강의 흐름 폭도 지금과 차이가 난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강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말이다.

 

(1)KANQ-KIANQ? Kang-kiang River 인가?

(2)Saoiil-seoul?

(3)GOREA-corea?

(4)ISLAlfD OF KAXaWUk-Kangwha lsland?

 

위 네가지 비교는 오페르트 원본에 등장하는 용어와 현재 우리가 그럴 것이라고 믿고 사용하는 지명들인데 이것들이 동일하다고 단정짓지 못하는 이유가 분명하게 있다면 당시 조선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믿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할 수가 있다.

매우 어려운 것이다.

솔직하게 이야기 하면 이 글을 쓰려는 동안 상당히 많은 고민을 했다.

무엇이 역사사실에 근거한 펙트인가 하는 문제에서 누구든지 알 수 있어야 하고 이해해야 하는 펙트(fact)에 접근 할 수록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 옴을 스스로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은 나혼자 느끼는 혼란이지만 갈 수록 그 폭은 커질 것이란 기대가 없지 않다.

다수 대중들 역시 그러할 텐데 그것은 평소 상상할 수도 없었던 기존 역사사실의 변환점이 될 수 있거나 역사반전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고도 여긴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당장 인정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느껴야 하는 갈등일 수 있다는 것이며 그렇지만 이러한 갈등과는 별개로 현재 이 만큼 먼길까지 왔다는 것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이것은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나를 미쳤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자료를 섭렵한 입장에서 이러한 결과에 대해서는 솔직히 어느정도 자신감도 없지 않다.

나의 목적은 현재 조급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지만 펙트에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근접점에 접근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펙트가 아닌 것에 목메 달고 싶지는 않다.

바르고 옳다고 느끼는 것을 따라 그대로 묵묵하게 실행을 하고자 하는 마음뿐이며 언제까지나 여건이 된다면 이렇게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탐구하고 연구하고자 할 따름이다.

특히 역사의 자취는 누가 감춘다고 감춰지는 것은 아니라라고 본다.

언제인가 시간이 말할 뿐이지 자연스럽게 들어나게 되어 있다는 원칙과 이치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밝힐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것이고 때문에 겹쳐지는 난관이 수없이 깔려 있다 하더라도 겁이 날 것이 없어진다.

역사에서 애초에 없었던 것이 돌연 남아 놀랠킬 수는 없는 것이다.

반대로 역사에서 애초부터 있었던 것을 인위적으로 전부다 없앨 수 없다는 이치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어느정도 사실인 펙트의 모습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역사의 펙트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하며 긍정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욕심이다.

나는 그러한 자연 이치에 의한 변하지 않는 진리를 강하게 믿는다.

 

테이블 타워 마운트(Table or tower mount)

 

그렇다면 본론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오페르트가 보고 그린 삽화 테이블 타워 마운트(Table or tower mount)를 살펴본다.

그가 그린 삽화를 보면 지금 미국 와이오밍 주의 북동부(Black Hills near Hulett and Sundance in Crook County, northeastern Wyoming) 벨푸어셰이강(Belle Fourche River)에 위치한 데빌스타워(Devils Tower)라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

처음 보는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수십번 수백번을 보았기 때문에 같다고 느낀다.

이 타워 밑 직경은 1,000피트, 상단 직경은 275 피트, 돌기부분 높이는 1,267피트(386 m), 계곡의 하단부터 높이가 5, 112피트(1,558 m)인 돌기바위산으로서 지구 내부에서 생성된 고온의 규산염 용융체 마그마가 굳어서 된 화성암(火成岩, igneous rock)이라고 한다.

오페르트 역시 조선에서 본 테이블 마운트를 높이가 3000~4000 피트에 달한다고 했으니 거의 같다 할 수 있다.

이곳은 인디언들이 바위 위에 올라가서 북을 치며 노래를 하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마찬가지로 반도역사에서 오페르트가 보았다던 강화 정족산의 삼랑성(三郞城) 역시 전설에 의하면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서 쌓은 성이라 전한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하늘 가까이에 몸을 두고자 노력한 신성심은 매일반 같다고 볼 수 있다.

모두 천신를 숭앙한 것이다.

 

 

 

 

 

 

위키자료를 따르면 미국에 있는 데빌스 타워(Devils Tower)라는 명칭은 1875년에 미국지질조사국의 지리탐험대의 리차드 어빙 닷지 (Richard Irving Dodge, 1827–1895)대령이 이 지방의 인디언들이 나쁜 하나님의 탑(Bad Gods Tower)라고 부르는 것을 블랙 힐즈(흑산, Black Hills-2,208 m)란 관한 자신의 책에 데빌스 타워(Devils Tower)라고 의역하여 소개한 것으로 기원하였다 하였으며 지질학자들은 데빌스타워가 약 5천만년 전 화산 폭발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추측하였고 화산이 폭발하고 나서 분출되지 못하고 화도 속에 잔존하던 마그마가 그대로 식어서 화도 모양 그대로 굳은 것이라는 것이다. 당시 주변 지형은 대부분 셰일(shale,박리(剝離:벗겨냄)가 발달한 점토질 암석)과 사암, 석회암, 이암으로 이루어진 퇴적층으로 이루어져있었는데, 약 5천만년에 걸쳐 침식작용이 일어나면서 퇴적층은 깎여나가고, 풍화에 강한 화성암만 남아 지상으로 드러나 현재와 같은 장관을 연출하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결국 1906년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미국 최초의 천연기념물(1호)로 지정되었고,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1916년 국립공원국의 설립 이래로 그 관리하에 있다. 현재는 스카이다이빙과 암벽등반 장소로 유명하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UFO영화 ‘미지와의 조우(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 1977)’에서도 등장한 바 있는 산이다.

어쨌던 근세기에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미국인 지리탐험대의 리차드 어빙 닷지 (Richard Irving Dodge, 1827–1895)대령과 오페르트가 같은 세대의 사람이라고 본다면 같은 시기에 방문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싶다. 

미국인 어빙 닷지는 1875년에 처음 발견하였고 오페르트는 1866년도에 조선을 방문하여 처음 목격한 것을 삽화로 그렸을 것이란 생각을 할 수가 있다.

이렇게 볼 때 같은 시대에 서로 알 수 있는 인물일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한다.

대체적을 근세가 역사를 조작함에 있어 년도차이를 대강 10년 가량 내고 있다는 점도 참고하지 않으면 안된다.

 

[원본클릭] 

       [오페르트 금단의 땅, 원본 켑쳐: 노란선은 아래 원본 번역부분: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위는 조선을 방문한 오페르트가 본 테이블 마운트(Table or tower mount)인데 그의 책 원본 249p 에 삽화로 담겨진 모습과 원문기록이다.

 

(5)

The shore, up to this point low and uninteresting on this side, gradually gets steeper and more hilly, and the summits of the large mountain-ridges to the back become visible ; one of the highest of which, the Table Mountain, ia some 3000 to 4000 feet high.

When darkness came on, we anchored just in front of one of the deserted forts. Captain James and myself went a few miles further up the river in our boat to reconnoitre, and visited one of the forts, where we only found two or three watchmen, but not a vestige of any armament.

 

(번역)지금까지 낮고 지리 했던 강기슭이 점점 가파르고 높아지면서 뒤쪽에 있던 높은 능선의 봉우리들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중 가장 높은 산인 테이블 마운트(Table Mountain)는 높이가 3000~4000 피트에 달했다.

우리는 어두워진 후 버려진 요새중 하나 앞에 정박을 했다. 제임스 선장과 내가 보트를 타고 상류 쪽으로 몇 마일 더 정찰을 나가 요새 한군데에 들러 보았는데 파수꾼만 두어 명 있을 뿐 무장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위는 원본을 해석한 것이다.

 

[원본클릭]

                         [ 오페르트 금단의 땅, 남북기행예상행로: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이 오페르트는 테이블 마운트를 발견하는 과정에서의 기록을 보면 강기슭이 점점 가파르고 높아진다고 하였으니 분명 강 상류쪽으로 들어간 것이다.

 

만약 위 본 블로그가 지도에서 표시한 것을 보면 남쪽 미시시피강에서 올라가거나 아니면 미조리강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똑같이 벨푸어셰이강(Belle Fourche River)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로키산맥을 향하기 때문에 상류로 올라가는 형국이 된다.

현재 데빌스 타워(Devils Tower)를 찾아가는 경로와 거의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데이블마운트 와 동북쪽 반경 33km 주위에 있는 신비한 서클 8개]

 

한반도 번역자들은 이 테이블 마운트를 한반도 강화도(江華島), 정족산(鼎足山)이라 한다.

한반도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길상면 온수리에 위치한 산(220m)이라고 하며 산 정상부에 일명 삼랑성(三郞城)이라고도 부르는 정족산성이 소재한다고 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삼랑성(三郞城)은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서 쌓은 성이라 전하나 확실치 않다고 토를 달고 있을 뿐이다.

오페르트가 1866년에 본 테이블 마운트가 한반도 강화도에 있었다면 현재 바위 몇 개 만 남기고 나머지 모두 폭파 해버리고 없애버렸다는 말이 된다.

 

                                     [한반도 강화도 정족산 위에 정족산성지도]

 

                                               [정족산 정상-아무것도 없다?]

 

정말 이상한 것은 반도역사의 역사서술이다.

시각적으로 확인되는 오페르트가 본 테이블 마운트 실존문제도 그렇지만 이 강화도에 정족산이라고 하는 테이블 마운트에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가 보관되었다는 건물이 있었다는 것이고 때려맞추듯 그 건물은 1930년경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했으며 1653년(효종4년)에 마리산사고(摩尼山史庫)에 화재가 일어남으로써 건립이 추진되었던 것이라며 1660년(현종1년)정족산성이 완성되면서 실록을 정족산성내의 사고(史庫)로 옮기라는 명령에 따라 장사각(藏史閣)과 함께 선원각(璿源閣)이 세워졌다는 것이고 실제로는 이 사고로 실록이 옮겨진 것은 1678년(숙종4년)이라 하였다. 또한 오페르트가 병인양요를 등에 업고 조선에 들어와 강화도에 테이블 마운트를 보아 삽화를 그렸다는 것인데 이 때

같은 위치 강화부 관아위쪽에 설치된 외규장각(外奎章閣)은 피해를 보았지만 정작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는 별개로 계속 운영되어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하는 역사서술에서 그저 알 수 없는 냉소만이 흐를 뿐이다.  

도대체 적이 쳐들어오면 막을 지형도 전혀 될 수 없는 한반도 강화도에 사고가 몇 개 있었는가?

1628년(인조 6) 강화(江華)의 마리산사고(摩利山史庫)

1660년(현종 1) 강화 남쪽의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

1782년(정조 6) 강화도에 설치한 규장각(外奎章閣) 세개나 있었다?

정말로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는 기막힌 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어설픈 적군이라도 금방 그들에게 점령당할 것 같은 한반도 강화도란 지형에 국가의 귀중한 사고(史庫)를 3개나 설치했다? 그리고 그렇게 어렵게 설치한 거대한 사고(史庫)는 자취도 없이 전부 없애버렸고 역사기록이 비슷하게 여길정도로 여기저기 끌어 모은 조각들만 끼워맞춰 남겨두고 역사를 말하고 있으니 그저 한심하다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이 땅에 나고 자라 반도역사를 배웠다는 자체가 바보스러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믿을 사람이 있겠는가 솔직히 누가 나서 말해 보았으면 좋겠다.

사고 유적들이 없어지지 않고 현존해도 믿을까 말까 한데 말가케 없는데 믿으라니 누굴 바보천치로 여기겠다는 것인가.

그러니 매냥 시도 때도 없이 왜놈이나 되놈에게 무시당하고 우리 역사알기를 X같이 여기는 것이다.

 

실제 오페르트가 보고 삽화를 그린 그림을 한번더 자세히 보자.

이것이 어떻게 한반도 강화도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그림인가?

삽화가 말하고 있다.

한반도에는 없다라고 분명하게 하고 있다.

오페르트가 그린 삽화 테이블 마운트 형상에서 비슷한 이런 모습의 형상을 인터넷 전부 샅샅이 디져 보았으나 결국 발견하지 못했다.

오직 발견한 곳은 미국 와이오밍(Wyoming)주의 북동부(northeastern) 흑산(Black Hills) 가까이에 있는 그리고 벨푸어셰이강(Belle Fourche River)에 위치한 데빌스타워(Devils Tower)뿐임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형편인데 어찌하란 말인가?[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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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블마운트 와 동북쪽 반경 33km 주위에 있는 신비한 서클 8개 중 실제 직경]

크롭서클(Crop circle, Mystery Circle)

이 8개의 서클(Circle)무늬가 데이블 마운트 반경 33km 이내에서 대조선의 굉장한 유적지를 파괴하고 감추려 시도한 인위적인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작업은 아마도 현대에 이루어진 것임을 짐작하게 하는데 그 시기는 아마도 UFO영화 ‘미지와의 조우(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 1977)'가 만들어지던 시점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또 하나 예측할 수 있는 예는 바로 상징적 도형으로 우주의 창조를 묘사하였다는 것인데 우선 중앙으로부터 바깥 주변으로 향하게끔 물건을 채우고 우주질서를 묘사한 도형은 둥그런 형태가 되면서 나머지 사람들은 세상의 바깥 면으로 향하게 된다. 따라서 대지(大地)의 서클(Circle)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그라미의 시작점에서 양쪽 사이드는 끈으로 동(東)쪽 세계수(世界樹) 자작나무가지에 묶고 동그라미를 완성하게 되면 끈이 다른 한쪽의 자작나무가지로 뻗어나가게 묶고 마지막엔 서(西)쪽 자작나무가지 끝에 묶이게 된다. 끈은 네 개의 나무가지에 뻗쳐 안정되고 불변하는 우주의 경계를 에워싼 형상을 묘사하게 된다. 이것은 위에서 내려다 보면 서클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스톤서클(stone circle)은 구조상 태양숭배와 관계가 있다고 하는데 집합묘지로서도 이용되고 있다는 점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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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op circle Oklahoma and Texas Bor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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