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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킬러 이두황 묘 발견

한부울 2011. 3. 5. 12:28

명성황후 살해범 중 조선인 우범선(禹範善) http://blog.daum.net/han0114/17049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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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킬러 이두황 묘 발견, 잘먹고 잘살다 갔다.

[뉴시스] 2011년 03월 05일(토) 오전 08:18 |

 

 


신동립의 잡기노트<227>1895년 8월 일본공사 미우라 일당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이 을미사변이다. 일본 낭인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명성황후를 살해했다. ‘여우사냥이 성공했다. 이제 조선은 우리것이 됐다’는 유명한 말이 남았다. 이 살인집단에는 조선인들도 끼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이두황이다. 이 자의 묘를 후암미래연구소 대표 차길진이 찾아냈다. 전주 기린봉에 터를 잡은 이두황의 무덤은 비석높이만 2m가 넘는 호화판이다. 후손이나 친일 관련자들의 이름은 묘비에서 모두 삭제된 상태다. 그들로서는 당연한 조치다.


광복 직후 이완용을 위시한 친일파는 대부분은 부관참시 당했다. 이두황도 그리 될 뻔했다. 앞서 1951년 차길진의 부친인 빨치산 토벌대 18대대장 차일혁은 독립투사 김지강과 함께 이두황의 묘를 추적해냈다. 이어 부관참시를 시도했다. 이미 서울 원남동에서 일본 고등계 형사 사이가와 미와를 처단한 전력도 있는 강골들이다. 하지만 이두황 부관참시는 불가능했다. 당대로서는 드물게 화장을 해 묻은 탓이다.


아버지에 이어 이두황 뫼의 존재를 확인한 차길진은 “이두황의 시문 족자 2점을 얼마전 일본 궁내청을 통해 입수했다. 한학과 서예솜씨가 제법이다. 글에는 일본에서 고향땅을 그리워하는 심정이 녹아들어있다”고 혀를 차면서도 “동시에 잊고 지낸 친일매국노 이두황의 존재가 상기됐고, 모종의 도움(영능력)으로 그의 분묘로 향하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이두황(1858~1916)은 서울의 가난한 상인(常人) 출신이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후 무과에 급제, 친군 좌영 초관(哨官) 벼슬살이를 시작한다. 그러다 1894년 동학운동 진압에 투입된다. 이후부터는 승승장구다. 특히 1894년 11월 8~14일 동학농민군과 친일관군의 최대 격전지인 우금치에서 대학살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로 맹활약한다.


능력을 인정받은 이두황에게 떨어진 새 미션이 명성황후 시살이다. 이두황은 훈련대 간부 제1대대장 자격으로 제2대대장 우범선, 제3대대장 이진호, 전 군부협판(軍部協辦) 이주회와 명성황후 살육 프로젝트를 짰고, 성공했다. 다음 단계는 도피다. 아들과 함께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달아난다. 도쿄에서 활개를 치며 주색잡기에 빠진다. 1만엔짜리 지폐에 얼굴이 실린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 후키자와 유키치가 ‘국모를 살해하고도 은인자중하지 않는다’고 질책했을 지경이다.


그렇게 10여년을 유유자적한 이두황은 1907년 슬그머니 귀국한다. 혁혁한 공을 세운 이 베테랑에게 중추원 부찬의(副贊議) 명함이 주어진다. 곧 격렬한 의병투쟁지인 전북의 관찰사 겸 재판소 판사로 임명되며 옛 실력을 발휘한다. 영화와 천수를 누리고 숨이 끊어졌을 때 이두황은 고등관 1등, 종 4위, 훈 3등의 귀족이었다. 전라북도 장으로 장중히 엄수됐다.


명성황후 모살 직후 달아난 탁지부 대신 어윤중은 용인 인근 어사리에서 주민들에게 맞아 죽었다. 제 죽을 곳으로 찾아들었다(魚死里)고 천벌 운운하며 다들 자위했다. 친일파였지만 한일합방 소식에 자결한 민영환을 순국자로 용서하고, 안중근의 둘째아들 안준생이 선친의 의거 30년 후인 193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히로쿠니에게 사죄했다고 치를 떠는 것과 유사한 심리다.


대개 도사들은 ‘조상 덕은 못보지만, 후손에게 해도 입히지 않는’ 수단이 화장이라고 주장한다. “영혼은 영원불멸이다. 뇌사(雷射) 같은 빛이다. 화장됐더라도 이 빛은 자손과 연결된다”며 다른 소리를 하는 이도 있기는 하다.


이두황의 먼 자손들이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다면, 신 또는 정의는 없다.[문화부장 뉴시스통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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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乙未事變 1895년 음력 8월 20일) 조선인 협력자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음력11.16~ 1898.2.2)은 장손이며 아들 흥친왕 이재면(興親王 李載冕, 完興君, 1845.음력7.20~1912.9.9)의 아들 이준용(永宣君 李埈鎔, 1870.음력6.25~1917.3.22)이 교동에 유폐된 이래 불만을 품고 공덕리의 별장 아소정에 칩거하면서 외출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뒤에 오카모토(岡本柳之助, 1852.8~1912.5.14)(가 대원군을 찾아 설득하였다. 유길준(兪吉濬, 1856.음력10.24~1914.양력9.30)은 명성황후를 "세계에서 가장 나쁜 여성"이라고 혹평하였으며  미국인 은사 에그워드 모스에게 보내는 편지에 명성황후를 개화당 살해의 배후로 보았다. 편지 본문에서 유길준은 민비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와 비밀 접촉하고, 1894년 가을 개화당 모두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미다가 대원군에게 발각되었고 대원군은 일본공사 오카모토 류노스케와 협의 끝에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그녀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고 진술하였다. 편지에서 유길준은 명성황후 암살은 실행되었지만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 문제를 일본공사와 협의하고 일본측에 약간의 도움을 요청한 것은 큰 실수였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유길준은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사학자이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2대 대통령인 박은식(朴殷植, 1859.음력 9.30 ~ 1925.11.1)도 명성황후 암살의 중요 배후의 한 사람으로 흥선대원군을 지목하였다. 박은식은 춘추전국시대에 조순(趙盾)이 왕을 암살한 것을 비유하여 이와 다를바 없다고 평가하였으며 감정이 사람의 양심을 가린다며 비판하였다.


윤치호는 암살의 협력자이자 일본 낭인들의 지휘자 중 한사람으로 유길준을 지목하였다. 명성황후가 암살당할 무렵 윤치호는 유길준과 일본인 이시쓰카가 사건의 전말을 은폐하기 위해 자신을 그날의 저녁 식사에 자신을 초대했다는 것이다. 유길준은 미국인 은사 모스 목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흥선대원군을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최고 지휘자로 지목했다. 유길준에 의하면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제거하려 하기 이전에 대원군이 일본 영사관을 찾아가 명성황후를 제거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흥선대원군과 유길준 외에도 조선국 국군 1대대장 우범선(禹範善, 1857.5.24~1903.11.24)·2대대장 이두황(李斗璜, 1858~1916)·3대대장 이진호(李軫鎬, 일본식: 李家軫鎬, 1867.음력 8.2~1946.9.3) 등과, 전 군부협판 이주회(李周會,1843∼1895), 국왕 친위대 부위(副尉) 윤석우(尹錫禹 당시40세), 일본 공사관 통역관 박선(朴銑, 당시26세), 문신 구연수(具然壽, ?~1925.5.6) 등이 협력했고, 궁궐수비대의 구식군대 출신 조선인 병사들도 자발적으로 협력했다. 송병준의 사위이기도 했던 구연수는 일본 낭인들이 민비 시체를 소각하는걸 도와줬다. 사건 이후 명성황후가 복권되면서 조선인 가담자인 박선, 이주회는 처형당하고, 우범선, 이두황, 이진호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우범선은 뒤에 일본으로 찾아간 자객 고영근에게 암살되기도 했다. 구연수는 한일 합방 이후에 복권됐다.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에 관여된 것을 알게 된 고종은 나중에 흥선대원군이 죽었을 때, 빈소에 찾아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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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연수(具然壽, ? ~ 1925.5.6)는 을미사변 관련자이며 일제 강점기에 경찰 간부를 지냈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큰 몫을 한 송병준(宋秉畯, 일본: 野田平次郞, 1857.음력 8.20~1925.양력 2.1)의 사위이다.


1895년 을미사변 당시 살해된 명성황후의 시체에 석유를 뿌려서 불태우는 작업을 감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건 후 같은 을미사변 관련자들인 이두황, 우범선 등과 함께 체포령을 피해 일본으로 피신했다. 처음에는 히로시마, 교토로 도망쳤다가, 명성황후 시해 주범인 미우라 고로 등이 석방되어 일본으로 돌아오자 도쿄로 이동하여 일본 정부의 비호 아래 망명 생활을 하였다.


1906년 한성부에 통감부가 설치되고 이듬해 대한제국 순종의 즉위로 특사가 단행되면서 명성황후 시해범들도 사면되었다. 귀국한 그는 통감부 경시, 조선총독부 경무관, 경무국 칙임사무관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경찰 최고 직급인 경무관에 임명된 조선인은 구연수 외에 아직까지 알려진 인물이 없어, 일제의 강한 신임을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중추원, 경찰, 친일단체 부문에 선정되었다.

아들은 한국은행 초대 총재를 지낸 구용서이다.[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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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조 보고서(石塚英藏が書いた報告書って 1895년 10월 9일)

조선 정부 내부(內部, 요즘의 내무부) 고문의 직책을 가지고 있던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가 일본 정부의 법제국장관인 스에마쓰 가네즈미(末松謙澄)에게 별도로 보낸 장문의 보고서[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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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황(李斗璜, 1858~1916)은 을미사변 관련자이며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다.


한성부 출신으로 평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1883년 말단 무관직에서 시작하여 1889년 흥해군수와 1894년 장위영 참령관(정3품)에 임령되는 등 능력을 인정 받았다. 동학농민운동 때는 진압 작전에 참가하여 내포, 신창, 해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공을 세우기도 했다.


청일 전쟁에 참여하여 일본군과 함께 평양에 진군한 것을 계기로 친일파 무관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김홍집의 친일 내각이 성립하면서 양주목사로 승진했고, 일본의 입김으로 창설된 훈련대의 제1대대장을 맡았다. 이 무렵 명성황후가 일본과 대립하면서 갑오개혁을 무력화시킨 뒤 친러파를 등용하면서 훈련대마저 해산하려 하자, 일본은 이를 계기로 명성황후를 살해했다. 이두황은 경복궁에서 벌어진 명성황후 살해에 우범선 등과 함께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가담했다.


을미사변 관련자 가운데 이주회와 박선 등은 사형당했고, 이두황, 우범선, 구연수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 가운데 우범선은 자객에게 암살당했으며, 이두황과 구연수는 14년 동안의 망명 생활 동안 살아남아 1907년 대한제국 순종 즉위 후 귀국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비호 아래 중추원 부참의와 전라북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며, 1910년부터 1915년경까지 전라북도 장관직에 있었다. 1916년 일본 정부로부터 훈3등 서보장도 서훈 받았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동학농민운동 진압 중인 1894년부터 1895년까지 작성한 진중일기 〈양호우선봉일기(兩湖右先鋒日記)〉가 발굴된 바 있다.[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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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호(李軫鎬, 일본식 이름: 李家軫鎬, 1867.음력 8.2~1946.양력9.3)는 조선 후기의 개화파 무관이며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아호는 성재(星齋)이다.

서울 출생이다. 군사 학교인 연무공원을 1888년 졸업하고 무관으로 근무했다. 이진호는 영어를 공부한 적이 있어 연무공원 미국인 교관 다이(Dye)의 신임을 얻었고 친미파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1895년 다이와 친미파가 공모하여 을미사변으로 성립된 친일파 정권을 전복하려 한 춘생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초기에는 참가했다가 변심하여 이 계획을 어윤중에게 밀고함으로써 친일파로 돌아섰다. 석달후 이번에는 아관파천으로 친러파가 득세하자, 이진호는 유길준, 우범선, 이두황, 이범래, 구연수 등 을미사변과 관련이 있거나 친일파로 널리 알려진 인물들과 함께 일본으로 피신했다.


그는 10년 동안 일본에 머물러 있다가 1907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한 뒤 돌아와서 중추원 부찬의, 평안남도 관찰에 임명되었다. 관서 지방에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사립학교가 많이 세워지는 분위기를 견제하고자 관립 평양고등보통학교가 설립되었을 때는 교장을 역임했다.


1910년 경상북도 장관, 1916년 전라북도 장관, 1919년부터 1921년까지는 전라북도 지사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조선총독부가 친일 관료와 지방의 지주들을 규합하여 곳곳에 자제단을 구성하자 이진호는 자신이 지사로 있던 전라북도에 전북자제단을 조직해 독립운동의 확산을 막았다.


이후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점 촉탁(1921), 조선중앙위생회 위원(1921), 조선구락부 발기인(1921)를 거쳐 1924년에는 총독부 학무부 국장에 임명되었다. 총독부 부서의 국장은 일본인이 맡는 것이 관례였으며, 조선인 학무국장 역시 유일하게 이진호와 엄창섭만이 역임했을 정도로 희귀한 일이었다. 3·1 운동 이후의 회유책인 문화통치 전략의 일환이었다.


공적을 인정받아 1934년에는 중추원 참의, 1941년에는 부의장, 1943년에는 고문이 되었고, 귀족원 의원에까지 올랐다. 말년에도 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각종 친일 단체에도 적극 참여했다. 국민총력조선연맹(1940), 임전대책협의회(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에 가담한 기록이 있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


사후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2008년에 이진호 소유의 토지에 대해 국가귀속 결정을 내렸다.[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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