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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한부울 2009. 8. 15. 22:12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는 조선총독부가 1925년 6월 칙령 제218호로 공포한 ‘조선사편수회관제’(朝鮮史編修會官制)에 따라 만들어진 조선총독부 총독이 직할하는 기관으로, 조선사편찬위원회규정(1921년 12월 4일 조선총독부 훈령 제64호)에 따라 발족한 조선사편찬위원회를 확대·강화하여 발족시킨 기구이다. 1937년까지 97만5534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조선사》 35편, 《사료총서》 102편, 《사료복본》 1,623을 편찬하였다. 조선사의 편찬과 자료 수집을 주로 하였으며, 일제가 한국 침략과 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타율적이고 정체된 사대주의적인 역사로 규정하기 위한 활동을 하였다는 평이 있다.


개요


일제는 조선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 취조국을 두었고, 그 역할은 1915년 중추원 편찬과, 1922년 조선총독부 직할의 조선사편찬위원회를 거쳐 1925년 조선사편수회가 담당하게 되었다. 일본과 조선의 학자들이 자료 수집과 집필에 참여하였고, 1938년 《조선사》 37권이 간행되었다. 1945년 8·15 광복으로 해산되었다.

 

편수회조직도

[우리역사의 비밀]솟대 (2009-11-13 20:19:35)

 

 

직제 및 직원 명단


이하 직책별 직원 정보는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를 기반으로 하여 작성되었다. 성명 옆의 날짜는 재임기간이다.


조선사편찬위원회 (1922~1925)


위원장


위원장직은 정무총감이 겸임하였다.


아리요시 주이치 (1922년 6월 15일 ~ 1924년 7월 4일)

시모오카 주지 (1924년 7월 4일 ~ 1925년 6월 8일)


고문

이완용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박영효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권중현 (1922년 12월 28일 ~ 1925년 6월 8일)


위원


今西龍-이마니시 류

朝鮮史家、京都帝国大学教授。

岐阜県태생. 아명은 료재了哉. 東京帝国大学卒. 1906년부터 경주등에서 고고학적 조사를 실시해, 1913년秥蝉県碑 発見. 동년 同年京都帝大강사가 되어, 1916년 조교수, 1922-1924년 북경에 유학, 1926년 경성 제국대학·京都帝大兼任教授 겸임 교수가 되지만, 58세 사망했다.


長野幹 1922年12月28日 1924年12月1日

小田幹治郎 1922年12月28日 1923年3月29日

劉猛 1922年12月28日 1925年6月8日

李能和 1922年12月28日 1925年6月8日

魚允迪 1922年12月28日 1925年6月8日

鄭万朝 1922年12月28日 1925年6月8日

今西龍 1922年12月28日 1925年6月8日

稲葉岩吉 1922年12月28日 1925年6月8日

松井等 1922年12月28日 1923年8月16日

栢原昌三 1922年12月28日 1923年8月16日

李秉韶 1922年12月28日 1925年6月8日

尹寗求 1922年12月28日 1925年6月8日

玄采 1922年12月28日 1925年2月3日

洪憙 1922年12月28日 1925年6月8日

李商永 1922年12月28日 1923年3月25日

深川伝次郎 1923年4月18日 1924年6月8日

大塚常三郎 1924年12月12日 1925年6月8日

李軫鎬 1924年12月12日 1925年6月8日

山崎真雄 1924年12月12日 1925年6月8日


간사

稲葉岩吉 1922年12月28日 1925年6月8日

金東準 1922年12月28日 1925年6月8日


서기

金子正潔 1922年12月28日 1925年6月8日

葛城末治 1922年12月28日 1925年6月8日

金容迪 1922年12月28日 1925年6月8日


촉탁

稲葉岩吉 1922年12月1日 1925年6月6日

松井等 1922年12月1日 1923年7月31日

洪憙 1922年12月31日 1923年8月16日

栢原昌三 1922年12月10日 1925年6月6日

李能和 1923年12月31日 1925年6月6日

高橋琢二 1924年6月30日 1925年6月6日

瀬野馬熊 1924年11月30日 1925年6月6日

黒板勝美 1924年11月30日 1925年6月6日


조선사 편수회 (1925~1945)


회장

회장직은 정무총감이 겸임하였다.

下岡忠治 1925年6月6日 1925年11月22日

湯浅倉平 1925年12月3日 1927年12月23日

池上四郎 1927年12月23日 1929年4月4日

児玉秀雄 1929年6月22日 1931年6月19日

今井田清徳 1931年6月19日 1936年8月5日

大野緑一郎 1936年8月5日


고문

李完用 1925年7月20日 1926年2月12日

権重顕 1925年7月20日 1934年3月19日

朴泳孝 1925年7月20日 1939年

内藤虎次郎 1925年9月22日 1934年6月26日

服部宇之吉 1925年9月22日 

黒板勝美 1925年9月22日 

山田三良 1933年9月8日 1936年1月16日

李允用 1934年4月17日 

速水滉 1936年3月7日


위원

이쿠타 세이자부로 (1925년 7월 20일 ~ 1929년 11월 8일)

시노다 지사쿠 (1925년 7월 20일 ~ )

이진호 (1925년 7월 20일 ~ 1929년 1월 19일)

오다 쇼고 (1925년 7월 20일 ~ )

유맹 (1925년 7월 20일 ~ 1930년 3월 21일)

어윤적 (1925년 7월 20일 ~ 1935년 3월 7일)

이마니시 류 (1925년 7월 20일 ~ 1932년 5월 20일)

야마자키 마사오 (1925년 7월 20일 ~ 1928년 3월 30일)

이능화 (1925년 7월 20일 ~ )

이병소 (1925년 7월 20일 ~ )

윤영구 (1925년 7월 20일 ~ )

고타케 마사요시 (1928년 5월 22일 ~ 1929년 10월 28일)

최남선 (1928년 12월 20일 ~ )

이마무라 다케시 (1929년 12월 4일 ~ 1931년 7월 22일)

다케베 긴이치 (1929년 12월 5일 ~ 1931년 7월 1일)

하리마 겐시로 (1930년 1월 18일 ~ 1932년 2월 12일)

하야시 한조 (1930년 7월 15일 ~ 1937년 10월 30일)

우시지마 쇼조 (1931년 11월 7일 ~ 1936년 5월 21일)

하야시 시게키 (1931년 11월 7일 ~ 1933년 8월 4일)

오타니 쇼신 (1931년 11월 7일 ~ )

마쓰모토 이오리 (1932년 3월 4일 ~ 1934년 11월 5일)

후지타 료사쿠 (1933년 4월 13일 ~ )

와타나베 도요히코 (1933년 9월 8일 ~ 1936년 5월 21일)

오타케 주로 (1936년 6월 3일 ~ )

도미나가 후미카즈 (1936년 6월 3일 ~ 1937년 7월 3일)

나가타 나오마사 (1937년 11월 9일 ~ )


간사

야마자키 마사오 (1925년 7월 20일 ~ 1928년 3월 31일)

김동준 (1925년 7월 21일 ~ 1925년 9월 10일)

이나바 이와키치 (1925년 7월 21일 ~ 1937년 6월 26일)

정교원 (1925년 9월 18일 ~ 1928년 3월 30일)

다카타케 사토미 (1928년 5월 22일 ~ 1929년 10월 28일)

이동진 (1928년 5월 22일 ~ 1928년 7월 27일)

손영목 (1928년 12월 4일 ~ 1929년 10월 28일)

엄창섭 (1929년 12월 3일 ~ 1934년 12월 12일)

하리마 겐시로 (1929년 12월 12일 ~ 1932년 2월 12일)

마쓰모토 이오리 (1932년 2월 16일 ~ 1934년 11월 5일)

가미다키 모토이 (1933년 12월 8일 ~ 1936년 6월 3일)

김대우 (1934년 2월 15일 ~ 1936년 5월 28일)

노세타니 간료 (1934년 12월 12일 ~ )

신구 하지메 (1936년 6월 30일 ~ 1937년 7월 3일)

김병욱 (1936년 7월 17일 ~ )


수사관

稲葉岩吉 1925年6月25日 1937年6月26日

藤田亮策 1925年6月25日 1926年6月23日

洪憙 1925年6月25日 1935年1月7日

中村栄孝 1928年12月27日 1937年6月26日

末松保和 1935年4月13日 1935年6月8日

葛城末治 1936年8月22日 1937年3月31日

申奭鎬 1938年9月22日


수사관보

高橋琢二 1925年6月6日 1933年6月30日

葛城末治 1925年8月8日 1936年8月22日

李丙燾 1925年8月8日 1927年5月30日

鶴見立吉 1925年8月18日 1928年4月14日

潮田富貴蔵 1927年5月31日 1927年8月24日

末松保和 1928年3月21日 1935年4月13日

申奭鎬 1930年5月2日 1937年9月22日

萩原秀雄 1933年6月31日 1936年3月6日

田川孝三 1935年4月12日 

李鐘明 1936年3月12日 1937年5月10日


서기

玄陽燮 1925年6月6日 1934年8月28日

金子正潔 1925年8月18日 1928年3月18日

金容迪 1925年8月18日 1930年12月23日

小野徳三 1925年9月28日 1929年4月5日

葛城末治 1929年2月17日 1936年8月22日

可知清次郎 1933年7月14日 

前田耕造 1935年4月12日


촉탁위원

이나바 이와키치 (1925년 6월 6일 ~ 1925년 6월 25일)

사사카와 다네오 (1925년 6월 6일 ~ 1925년 8월 31일)

홍희 (1925년 6월 6일 ~ 1925년 6월 25일)

세노 바유 (1925년 6월 6일 ~ 1935년 5월 20일)

이와타니 다케이치 (1925년 7월 25일 ~ 1928년 6월 6일)

가와구치 우키쓰 (1925년 7월 25일 ~ 1931년 12월 17일)

시부에 게이조 (1925년 11월 4일 ~ 1934년 4월 16일)

나카무라 에이코 (1926년 5월 31일 ~ 1927년 12월 31일)

이마니시 류 (1926년 9월 28일 ~ 1932년 5월 20일)

박용구 (1926년 12월 31일 ~ 1932년 1월 23일)

스에마쓰 야스카즈 (1927년 5월 13일 ~ 1928년 3월 21일)

이병도 (1927년 5월 31일 ~ )

육종윤 (1927년 6월 10일 ~ 1927년 7월 20일)

권중익 (1927년 7월 31일 ~ 1927년 12월 16일)

김태두 (1927년 10월 20일 ~ 1928년 12월 20일)

조중관 (1928년 3월 31일 ~ 1932년 1월 23일)

최남선 (1928년 10월 8일 ~ 1936년 6월 25일)

신석호 (1929년 4월 27일 ~ 1930년 5월 2일)

하기와라 히데오 (1929년 6월 17일 ~ 1933년 6월 31일)

구찬서 (1929년 6월 20일 ~ 1936년 4월 23일)

조한직 (1929년 12월 31일 ~ 1938년 3월 15일)

윤용균 (1930년 4월 15일 ~ 1931년 9월 14일)

이마무라 다케시 (1930년 7월 21일 ~ 2931년 12월 21일)

소노다 요지로 (1931년 9월 30일 ~ )

마에다 고조 (1932년 12월 31일 ~ 1935년 4월 12일)

다보하시 기요시 (1933년 3월 15일 ~ )

다가와 고조 (1933년 3월 31일 ~ 1935년 4월 12일)

스도 요시유키 (1933년 9월 15일 ~ 1936년 10월 24일)

마루가메 긴사쿠 (1933년 9월 15일 ~ )

구로다 쇼조 (1934년 4월 30일 ~ )

이시하라 도시오 (1934년 4월 30일 ~ 1937년 3월 15일)

마쓰오카 이와오 (1934년 6월 18일 ~ 1936년 11월 29일)

스에마쓰 야스카즈 (1935년 6월 18일 ~ )

다나카 한지로 (1936년 6월 30일 ~ 1937년 3월 15일)

후지이 세이치 (1936년 6월 30일 ~ 1937년 3월 15일)

이나바 이와키치 (1937년 6월 26일 ~ )

나카무라 에이코 (1937년 6월 26일 ~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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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李丙燾)


이병도(李丙燾, 1896년 9월 20일(음력 8월 14일) ~ 1989년 8월 14일)는 대한민국의 역사학자, 교육인, 대학교수로, 본관은 우봉, 호는 두계(斗溪)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사 편수회에서 수사관보와 촉탁으로 참여하였다. 이병도는 조선사 편수회에 있으면서 한국사를 왜곡하였고 식민사관을 정립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1934년, 일본인을 배제한 민간학술단체인 진단학회를 창설하였다.경성제국대학 교수, 서울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대학원장, 학술원 회장, 진단학회 이사장, 민족문화추진회 이사장, 국방부 전사편찬위원장,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문교부 장관 등을 역임하였다. 《국사대관(1948년)》을 비롯하여 한국의 역사와 사상, 문화에 관한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내무부장관 윤치영의 처남이며, 서울대학교 교수 이장무·이건무는 그의 손자이다.


출생과 성장

조선 말기인 1896년 9월 20일(음력 8월 14일)에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천리(泉里)에서 충청도 수군절도사 이봉구씨와 나주 김씨 사이의 오남으로 출생하였다. 12세가 되던 1907년 7월에 가족이 모두 서울로 이주하였다. 같은 해 11월에 부친이 작고하였다. 1907년 이종일 선생이 교장으로 있던 보광학교에 입학하여 이 학교가 재정난으로 폐교하는 1909년까지 수학하였다. 15세였던 1910년에 육군참장 조성근의 장녀 조남숙과 결혼하였다. 같은 해 3월에 사립 중동학교를 졸업하였다. 1912년 3월 보성전문학교(현재 수송동 조계사 자리) 법과에 입학하여 1915년 3월에 졸업했다. 1916년 4월에 와세다 대학 사학급 사회학과(史學及 社會學科)에 입학하여 1919년 7월에 졸업하였다.


일제강점기 활동

1919년 10월부터 7년간 중앙고등학교 전신인 중앙학교에서 지리와 역사, 영어 담당 전임교원으로 근무했다. 야간에는 영어강습소에 출강하는 한편, 중앙학교의 전임교원이자 중동학교(야학) 교장인 최규동의 요청을 받고 1920년 4월 부터 1년간 이 학교에서 영어를 강의하였다. 1920년 7월에 김억, 남궁벽, 김혁로, 김영환, 나혜석, 민태원, 김찬영, 염상섭, 오상순, 황석우, 김원주 등 12인(후에 변영로 참가하여 13인)과 함께 동인지 폐허(廢墟)를 창간하였다. 폐허는 2호까지 출판되었다. 1921년 4월 부터 1년간 경신학교에서도 지리와 역사를 강의하였다. 1922년부터는 주로 한국사상사와 지리도참 등 사상사 연구에 전념하였다. 1925년 8월부터 1927년까지 조선총독부 산하의 조선사편수회에서 수사관보로 일하였으며, 이후 조선사편수회에서 퇴사하고, 임시직인 촉탁으로 해방까지 일하였다. 그러나 이병도의 조선사편수회 활동, 특히 촉탁으로의 활동은 사실상 이름만 올라 있었을 뿐, 실질적인 업무는 맡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933년 4월부터 1943년까지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로서 "조선유학사" 강의를 담당하였다.


1934년 5월 7일에는 한국과 근린의 문화 연구를 목적으로 하여 이상백, 조윤제, 김상기, 이병기, 손진태 송석하 이희승 김태준 등과 함께 진단학회를 창립했다. 진단학회 발기식겸 창립총회는 경성부 長谷川町(현 소공동 50번지) "푸라디아느" 다방에서 개최하였다. 같은해 11월 28일에 진단학보 창간호를 간행하면서 "삼한문제의 신고찰:진한급삼한고"라는 논문을 투고하고 그자신은 편집 겸 발행인으로 활동하였다. 진단학회의 주소를 "경성부 계동 98번지" 자신의 집 주소지로 하였다. 또한 위의 진단학보 창간호에 "하멜표류기"를 번역하여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1935년 4월 17일 진단학보 제2호를 발간했다. 1941년 4월부터 3년간 이화여자전문학교 사학강좌 담당 강사로 출강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1943년 9월 진단학보 제14호의 발행을 끝으로 진단학회가 해산되었다. 그는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지켰다. 그러나, 1945년의 8·15 해방을 맞아 진단학회의 자진해산 후에도 조선사편수회를 지켰다.


해방 후

1945년 8월 해방과 동시에 진단학회를 재건하고, 임시교원양성소를 구성하여 국어와 국사 중등교원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친일 어용 역사학회인 조선사 편수회를 계속 존속시켜 나갔다. "국사교본"을 편찬하여 중등교과용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같은해 12월 동지들과 서지학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서지를 발간하였다. 같은 해 경성제국대학에서 일본인 교원이 전부 빠져나가고 난 후 조선인을 운영되던 경성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1946년 9월 국대안의 제정으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의 교수로 임명되어 사학과의 창설에 기여하였다.


1947년 5월에 진단학보 제15호를 간행하였다. 그해 10월에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장에 임명되어 1952년까지 그 일을 맡았다. 1952년에 4월는 서울대학교에서 "고려시대의 연구: 특히 도참사상을 발전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53년 9월 서울대학교 부속 박물관장에 임명되어 1954년까지 맡았다. 1953년 10월에 진단학회를 사단법인으로 재편성하여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교육자

1945년 경성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경성대학과 다른 관공사립전문학교들이 통합된 후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54년 5월에 서울대학교 대학원장이 되었다. 이후 1962년까지 서울대학교 문리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1950년에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국방부 전사편찬위원장에 임명되어 4년간 복무하였다. 1954년에는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 되었고, 1959년에는 종신회원이 되었다. 1955년부터 1982년까지는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또한 1956년에 김창룡의 묘비명을 썼다.


1957년 5월 동아문화연구위원회(Research Council of Havard Yenching Institute)의 이사가 되었다. 고려대학교 교우회 회장이 되었다. 1959년 3월에 학술원 종신회원이 되었다. 동아문화연구위원회 회장이 되었다. 1960년 4월 허정 과도내각의 문교부 장관에 취임하였다.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학생단체를 자율화시키는 한편, 대학 총학장의 교수직선제를 채택했다. 그해 8월에 사임하고 9월에 서울대학교대학원장 겸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장에 임명되었다. 또한 같은 해 7월에 대한민국 학술원 회장에 취임하였다.


1961년 4월에 국민대학 학장에 취임하였다. 1962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1963년 6월 동아문화연구위원회 회장에 재선되었다. 7월에 율곡기념사업회 이사장에 피선되었다. 10월에 3.1문화상 심사위원장이 되었다. 미국 학술원창립100주년 기념식에 초청받았다. 하바드 엔칭 연구소의 초청으로 특강하였다. 12월에 미국역사학회 명예회원이 되었다. 1964년 4월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피선되었고 7월에 학술원 회장에 3선, 11월에 고려대학교 교우회장을 4선으로 맡았다. 1965년 4월에 성균관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였다. 9월에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원장이 되었다.


1967년 6월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68년 학술원 회장을 5선으로 맡았다. 조선왕조실록과 유학자들의 문집 등과 같은 고전의 국역 사업을 위해 현재 한국고전번역원의 전신인 민족문화추진위원회를 이희승, 김두종 등과 함께 발족하면서, 1965년 11월 6일 서울대학교 강당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회장에는 박종화가 추대되었고 최현배와 함께 부회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1970년 2월에 민족문화추진회를 재단법인으로 개편 발족하면서 이사가 되었다. 이후 1977년 5월 11일 고전국역의 종합심의기구인 교열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82년 2월 22일 민족문화추진회 이사장에 취임하여 고전국역자 양성과 고전국역 사업을 전개하였다. 1976년에 학술원 회장 8선이 되었고 이후 1980년까지 회장을 맡았다. 1981년에 학술원 원로회원으로 추대되었다. 1975년 10월 성균관대학교 이사에 취임하였다. 1984년에는 다산선생기념사업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말년

1980년에는 두계학술상이 제정되었다. 1985년 11월에 민족문화추진회 창립 20주년 및 "두계이병도 이사장구순기념 특집호"(민족문화 제11집) 간행되었다. 1986년 5월 9일 고려대학교 교우회 '교우의 날' 행사에서 '자랑스러운 고대인'으로 선정되었다. 1986년 10월 9일 "단군은 신화 아닌 우리 국조 - 역대왕조의 단군제사 일제때 끊겼다"라는 제목으로 단군조선 실재의 가능성을 주장하였다. 1987년 10월 진단학회에서 편찬한 "이병도박사구순기념한국사학논총"을 봉정받았다. 1989년 8월 14일 새벽, 서울시 종로구에 있는 한국병원에서 운명하였다.


연구 및 평가

이병도는 1950년대 이후의 고대사학계를 이끌어 나갔다. 1955년에는 서울대학교 논문집에 〈남당고〉를 발표해 합좌제의 원형이 된 남당(南堂)의 실체를 밝히고, 고구려 국호 기원 문제를 해명하는 한편, 위만조선의 전개과정을 통해 위만이 조선계 인물임을 주장하였다. 또한 1930년대부터 시작한 자신의 연구 성과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한국사 ─고대편─》을 출간하여 고대사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후에도 고대사 연구뿐만 아니라 역사지리와 국가 기원 및 사회 제도까지 연구를 확대하여, 1976년에는 《한국고대사연구》를 출간하였다.


1977년에는 《삼국사기》에 역주를 달아 《국역 삼국사기》를 출간하고, 고대사·지리 도참과 함께 관심을 쏟고 있던 유학사를 연구한 성과는 1987년에 《한국유학사》를 간행하여 결실을 보았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실증주의 역사학의 대표적인 인물로 실증적·객관적 방법을 중시하며, 철저한 문헌 고증에 입각한 연구 태도와 엄격한 학풍으로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문헌을 기본으로 하는 실증주의 역사학이 뿌리내리는 데에 큰 업적을 남겼다. 죽을 때까지 연구를 그치지 않았고, 왕성한 연구로 많은 저서와 다양한 논문을 남기기도 했다. 해방 이후의 고대사 연구에 독보적인 영향력을 끼치면서 대한민국의 사학계에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이병도의 제자들이 고대사학계에서 많은 활약을 하면서 일부 재야사학 계 인사 및 일반인들은 그의 후학이 한국사학계를 장악하였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일제 강점기 조선사편수회에서 수사관보와 촉탁으로 근무하여 일본 관학자를 도운 경력이 친일행위로 비판받았으며, 1980년대 이후 일부 재야사학계 인사들이 벌인 '국사찾기운동'에서는 이병도와 그의 사관을 두고 실증적인 학풍으로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를 왜곡하고 단군 조선을 신화화했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주요 저서

《朝鮮史》, 조선총독부, 1922년 ~ 1938년, 총 35권, 총 24,409페이지

《역주 삼국사기》, 박문서관,1943년[초판발행 박문문고 2책: 1책 342(?)쪽, 2책 479쪽]1945, 1956년(춘조사 재발행), 1965년(동국문화사,468쪽), 1977(을유문화사,국역본 736쪽, 원문교열본463쪽).

《조선사대관》, 동지사, 1948, 1949(수정3판,501쪽).

《고려시대의 연구: 특히 도참사상을 중심으로》, 을유문화사, 1948, 1986(개정판, 아세아문화사, 446쪽).

《한국사(고대편)》(김재원 공저), 진단학회 편, 을유문화사, 1959, 1965년 수정판(730쪽). 1980년 16판(70쪽, 부록 색인 31쪽, 역대왕실계보외 도표).

《하멜표류기(역서)》, 일조각, 1954.

《국사대관》, 1954, 1955(보문각, 613쪽, 색인 6쪽), 1958, 1959.

《국사와 지도이념》, 삼중당(90쪽), 보문각, 1954.

《이병도수필집 두계잡필(斗溪雜筆)》, 일조각, 1956(519쪽).

《중학교사회생활과 중등국사》, 을유문화사, 1956(204쪽).

《역주 삼국유사》, 동국문화사, 1956, 1962(재판, 468쪽)1965(3판, 468쪽), 1976년(광조출판사 수정판), 2000년(명문당,468쪽), 2000년(조선일보,누리미디어 제작 CD)

《자료한국유학사초고(資料韓國儒學史草稿)》, 서울대 문리대사학연구실 유인물, 1959.

《중국어판 한국사대관(許宇成역)》, 中正書局, 1963.

《한국사대관》, 보문각, 1964, 1969(589쪽).

《내가 본 어제와 오늘》, 신광문화사, 1966(289쪽).

《인문계고등학교 국사》, 일조각, 1969(274쪽).

《나의 인생관: 풀뭇간의 쇠망치》, 휘문출판사, 1971, 1974(수정3판, 436쪽).

《한국고대사회와 그 문화》, 서문당, 1972.

《한국사회와 그 문화》, 서문당, 1973.

《율곡의 생애와 사상》, 서문당, 1973.

《두실여적(斗室餘滴)》,박영사, 1975.

《수정판 역주화선 제주도난파기》, 일조각, 1975.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2001(818쪽).

《일어판 한국고대사연구(상,하)(金思燁역)》, 大興출판사, 1979.

《한국의 유학사상(한국사상전집2,공역)》, 삼성출판사, 1981.

《한국사대관》, 동방도서, 1983(538쪽).

《성기집(成己集)》, 정화출판문화사, 1983(318쪽).

《한국사의 이해》, 삼성출판사, 1984.

《한국유학사략(韓國儒學史略):한문본》, 아세아문화사, 1986(322쪽).

《한국유학사》(한국유학사략 국역본), 아세아문화사, 1987(506쪽).

두계이병도박사화갑기념사업위원회, 《이병도박사화갑기념논총》, 일조각, 1956(729쪽).

진단학회 편,《역사가의 유향: 두계이병도선생추념문집》, 일조각, 1991(336쪽).

《한국상고사입문》, 최태영 공저, 고려원, 1989.


상훈

1954년 3월 금성충무무공훈장 수상(戰史編纂功勞)

1955년 3월 서울특별시문화상 수상

1956년 7월 대한민국 학술원상

1962년 8월 대한민국장(無窮花章) 수여

1977년 10월 인촌문화상

1979년 5월 5·16민족상 수상


가족 관계

부:

모:

여동생: 이병영(李丙暎), 내무장관 동산 윤치영의 첫째 부인

처:

딸: 이순경

사위: 장욱진(1918년 1월 8일 ~ 1990년 12월 29일 , 화가 )

손자: 이웅무(1944년 1월 1일 ~ , 아주대학교 자연과학대학 자연과학부 화학전공 교수)

손자: 이장무(1945년 5월 14일 ~ , 서울대학교 총장)

손자: 이건무(1947년 9월 19일 ~ , 용인대학교 예술대학 문화재보존학과 교수)

큰 아버지가 이완용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손자 이건무는 주장이 사실과 다름을 해명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병도가 이완용의 관 뚜껑을 태웠다는 사실을 들어 이완용의 후손임을 숨기기 위한 행위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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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崔南善)


최남선(崔南善, 1890년 4월 26일 ~ 1957년 10월 10일[1])은 한국의 사학자, 문인, 문화운동가이다. 본관은 동주, 호는 육당(六堂), 한샘, 남악주인(南嶽主人), 곡교인(曲橋人), 육당학인(六堂學人), 축한생(逐閑生), 대몽(大夢), 백운향도(白雲香徒)이다.


어려서는 한학을 배웠으며, 1904년 국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그해 도쿄 부립제일중학교에 3개월간 다니다 중퇴하였으며, 1906년에는 와세다 대학 고등사범학부 지리역사과를 역시 3개월간 다니다 동맹 휴학으로 중퇴하였다. 이어 이광수 등 유학생과 사귀면서 러시아 문학 작품을 탐독하였다. 이때 유학생 회보인 《대한 흥학회보》를 편집하면서 새로운 형식의 시(신체시)와 시조를 발표하였다.


귀국한 뒤 우리 민족의 시대적 각성을 위한 신문화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인쇄 시설을 구입하여 1908년 신문관을 창설하였다. 여기서 《대한역사》, 《대한지지》 《외국지지》 등 중요한 책을 출판하였으며, 새 시대의 주인공을 위하여 1908년 최초의 종합 잡지인 《소년》을 발행하였다. 그는 이 잡지에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최초의 신체시를 발표하였으며, 이듬해 안창호와 함께 ‘청년 학우회’를 설립하여 학우회의 노래를 짓는 등 청소년 지도 운동에 앞장섰다. 1911년에 《소년》이 폐간되었으며, 이듬해 이광수의 도움으로 《붉은 저고리》, 《아이들 보이》, 《새별》, 《청춘》 등의 잡지을 발간하였으나 조선 총독부의 명령으로 모두 폐간되었다.


1914년 다시 종합 계몽 잡지 《청춘》을 발간하여 새로운 지식의 보급과 민중 계몽을 위해 공헌했으나 1918년 폐간되었다. 1918년 《청춘》에 역사 연구 논문인 《계고차존》(稽古箚存)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신문관에서 많은 책과 잡지를 발행하는 한편 우리 민족 문화를 보호하기 위해 ‘조선광문회’를 1910년 설립하였다. 그는 여기에서 우리 나라의 귀중한 옛 책들을 다시 간행하였으며, 민족 문화를 널리 퍼뜨리기 위한 국가적인 사업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당시 《동국통감》, 《열하일기》 등을 비롯한 20여 종의 고전이 간행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체포되어 2년 6개월형을 받아 감옥살이를 하였으나 1921년 10월 18일에 가출옥하였고, 그 뒤 변절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가출옥 사유는 “청년들을 규합하는 데 대단히 좋은 영향이 있을 것”이었다. 총독부는 조선은행 총재 미노베(美濃部俊吉)에게 잡지 《동명》의 발행 자금을 지원토록 주선하였으며, 그 이유를 최남선의 출판물이 “조선의 사상계의 악화를 구하고, 또 진학문(秦學文)·이광수 등의 생계비 출처로 삼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밝힌다. 출옥 후 《동명》지와 《시대일보》를 발간하여 일본제국의 침략 정치를 규탄하고 우리 민족 정신을 불러일으키기에 힘썼다는 견해도 있다.


1925년 《동아일보》에 사설을 쓰는 한편, 〈단군론〉(1926년), 〈불함문화론〉(1928년)을 발표하였는데, 특히 〈불함문화론〉에서 그는 동방 문화의 근원지를 우리나라 단군 신화의 무대인 백두산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일본제국이 총독부 내에 식민사관 유포를 위해서 만든 어용단체인 ‘조선사 편수위원회’를 둘 때 편수 위원직을 맡았다. 1937년 중추원 참의를 거쳐 1938년 《만몽일보》고문과 일본 관동군이 만주에 세운 만주 건국대학에서 교수직을 역임하였다.


이로써 광복 후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며 수감되었으나 병보석으로 출감하였다. 하지만 그를 기소한 반민특위를 이승만이 친일파들을 정치적 목적에서 감싸면서 1948년에 해산됨에 따라 그의 친일행각은 사실상 처벌되지 않았다. 한국 전쟁 후 《서울시사》 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재직하였고, 1957년 《한국역사대사전》을 편찬하던 도중 병으로 죽었다. 1973년 고려대학교 아시아 문제 연구소에서 《육당전집》이 발간되었다.


문학

최남선은 한국 최초의 잡지 《소년》을 창간하고,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창작하는 등 개화기 신문화 운동의 선구자였다. 시조 부흥 운동을 지도하여 최초의 시조 시화집 《백팔번뇌》를 출판하기도 하는 등 신문화와 전통 문화의 과도기를 살았던 인물로서 한국의 신문화 운동에 남긴 업적은 매우 크게 평가되고 있다.


역사 연구

단군을 건국 시조 개인이 아닌 제사장으로 파악하였고, 동북아시아의 샤머니즘을 바탕으로 단군 신화를 이해하려 하였다. 1925년 일본어로 발표된 〈불함문화론〉은 한·일 문화동원론, 일선동조론을 위한 것으로 동이문화권에 발칸반도, 카스피해, 일본, 유구를 끌어들여 단군의 민족주의를 세계주의로 변질시키고 역사인식을 혼란시켰다는 지적이 있다.


작품 및 저서


〈해에게서 소년에게〉

시조집 《백팔번뇌》

〈단군론〉(檀君論)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 《조선급조선민족(朝鮮及朝鮮民族)》, 1927년

《조선역사》

《삼국유사해제》

《조선유람기》

《고사통》

《조선 독립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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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호(申奭鎬)


신석호(申奭鎬, 일본식 이름: 寺谷修三, 1904년 ~ 1981년 2월 13일)는 한국의 역사학자이다.


경성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고려대학교에서 20년간 교수로 일하다가 1966년에 정년퇴임한 후, 1966년부터 1970년까지는 성균관대학교에서 문리대학장을, 1971년에서 1974년까지는 영남대학교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고, 2005년 고려대학교 교내 단체인 일제잔재청산위원회가 발표한 '고려대 100년 속의 일제잔재 1차 인물' 10인 명단에 들어 있다.


생애

1904년 경상북도 봉화군에서 출생했다.

조선사편수회의 수사관보(1930년 ~ 1937년)와 수사관(1938년 ~ 1940년)을 지냈다.


참고자료

반민족문제연구소 (1994년 3월 1일). 〈신석호 - 친일사학자에서 국사학계의 거두로 (윤재식)〉, 《청산하지 못한 역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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